한시 감상 ㅡ
山深 (산심) /
浩然齋 金氏
(호연재 김씨) 🌿
깊은 산중에서 유유히
살아가는 정취를 읊다 -
自愛山深俗不干 (자애산심속불간)
스스로 세속 간섭 받지 않는 심심산골 좋아서
掩門寥落水雲間 (엄문요락수운간)
고요히 떨어지는 물과 구름 사이로 문을 닫네
黃庭讀罷還無事 (황정독파환무사)
황정경 읽기를 마치니 도리어 할 일이 없어서
手弄琴絃舞鶴閑 (수롱금현무학한)
손으로 거문고를 켜니 학도 한가히 춤을 추네
[번역 효송 曉松 ]
호연재 김씨(浩然齋 金氏, 1681~1722년)는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과 더불어 조선조의 대표적인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여류문인이다. 호연재(浩然齋) 선생은 시적(詩的) 재능이 탁월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시와 한글시를 합쳐 240여 수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친가는 안동(安東) 김문(金門)으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이 고조부이고, 시가는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 시증조부(媤曾祖父)이다. 15세에 양친을 여의고 19세에 소대헌(小大軒) 송요화(宋堯和)에게 출가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저서로 <오두추도(鰲頭追到)>, <호연재유고(浩然齋遺稿)>, <증조고시고(曾祖姑詩稿)> 등이 전한다.
호연재 선생은 결혼생활 동안 시가(媤家) 식구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남편과의 관계도 소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녀 혼자 가정 살림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당장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경제적으로 곤궁한 삶을 살았다. 이러한 고독과 갈등 및 궁핍한 삶에서 오는 고뇌를 해소하기 위하여, 때로는 술에 취하고 담배를 피우고, 때로는 신선을 동경하는 낭만적 사유(思惟) 속에서 비상(飛翔)을 꿈꾸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녀의 시속에는 선어(仙語)가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으며, <유선사(遊仙詞)> 6수를 짓기도 하였다. 승경(勝景)을 선계(仙界)로 관념하고 선약(仙藥)인 단사(丹砂)를 맛보는 환상에 잠기기도 하며 우가(羽駕)를 타고 봉래(蓬萊) 선계(仙界)를 오유(傲遊)하며 십이루(十二樓)에서 선관(仙官), 선녀(仙女)들과 함께 술에 취해 선악(仙樂)을 듣기도 하는 등 신선설화를 수용하여 낭만적 사유를 시적(詩的)으로 형상화(形象化)하면서 고뇌를 초탈하고자 하였다.
<참고>
조선조의 여류문인으로 사대부가(士大夫家) 출신은 물론 기녀
(妓女) 출신 황진이(黃眞伊), 이매창(李梅窓), 운초 김부용(雲楚 金芙蓉) 등 의외로 많다. 16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사대부가(士大夫家) 부녀자는 봉건사회 유교윤리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문집(文集)을 남긴 여류문인들이 있다. 그 중에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년), 안동장씨(安東張氏, 1598~1680년), 남평조씨(南平曺氏, 1574~1645년)를 비롯하여 대략 16명 정도 파악된다. 이들 여류문인들은 그들의 뛰어난 재능과 또한 명망(名望) 있는 집안의 폭넓은 이해를 토대로 하여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