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장(火葬)>은 질척대며 눈물샘을 자극하려는 의도가 없다. 아내의 죽음이라는 분명한 결말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화장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가랑잎처럼 말라가는 여자와 봄꽃처럼 젊음이 무르익은 여자가 전편(全篇)에서 대비되고 그사이에 선 중년 남자의 흔들리는 눈빛에 무거운 자책감이 담겼다.
김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노장 임귄택 감독의 102번째 작품이니 믿고 보는 영화인 셈이다. 게다가 안성기라는 굵직한 배우에 여배우의 노출 신이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었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화장(化粧)품 회사의 임원인 남자가 죽음을 눈앞에 둔 여자를 아내로 두었다. 오 상무는 화장품회사의 홍보팀 상무다. 아내의 암 재발로 밤낮으로 업무와 간호에 시달리는 그 남자에게 눈길 가는 여자가 생겼다. 새로 온 부하 여직원 추은주다. 오 상무는 죄책감과 본능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인간의 염치와 욕망 사이에서 흔들린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난 후 가장 기억에 두는 장면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분변으로 화장실 변기 위에서 아랫도리를 그대로 내보이며 울부짖는 아내와 그 아내를 씻기는 오 상무를 기억할 것이다. 가장 적나라한 노출이고, 가장 인간적이고 숙연한 장면이다.
별장에서 갖는 남편과 아내의 마지막 부부관계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읽는 장면 중 백미다. 발기부전 치료제를 먹고 아내를 안는 남편과 그 남편의 여자이고 싶은 아내. 그들은 끝까지 남자이고 싶었고 여자이고 싶었다. 죽어가는 아내를 안으며 아내 아닌 여자를 갈망하는 남자, 그런 남편의 미묘한 변화를 읽는 아내의 복잡한 감정이 치밀하게 그려진다.
영화 (화장)은 소설의 화장( 火葬에 化粧) 을 더해 중의적인 한자로, 죽음과 삶의 순간에 선 인간의 감정을 건드리고 있다. 죽음 앞에서조차 흔들리는 인간의 나약함을 잘 묘사해준다. 존경받는 사람의 가면을 쓰고 감정을 절제하며 살지만, 욕망으로 흔들리는 눈빛과 휘청대는 걸음까지 숨기지는 못한다. 추은주의 등장으로 당혹스러워하며 허둥대는 오 상무의 모습은 저럴 수가 있나 싶다가도 저것이 인간의 본모습이지 싶어 한편 신산하다.
(화장)과 달리 철저히 통제된 감정을 다룬 영화가 ‘더 기버(The Giver)’이다. 로이스 로우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모든 것이 통제된 완벽한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차별, 폭력, 기아, 전쟁이 없는 안정된 사회, 갈등 요소가 모두 제어되어 인위적으로 평화롭게 된 커뮤니티가 배경이다. 아이는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출산 모의 직위를 맡은 사람에게서 태어나며 기초가족이라 불리는 최소의 공동체를 이룬다. 열두 살이 되면 사회 구성원들은 ‘위원회’로부터 직업의 개념과 비슷한 직위를 부여받게 된다. 교사, 보육사, 출산 모, 정원사… 그동안 위원회가 감시카메라로 면밀히 지켜봐 온 적성에 적합하게 부여된 직위를 부여받는다. 태어나면서부터 상태가 불확정한 아기(약하거나 쓸모없다는 판단이 내려진 아기)는 임무해제라는 미명하에 살해당한다. 하지만 그들은 살인의 개념을 모른다. 죽음이나 사랑, 가족애의 개념을 철저히 통제당하며 살아왔기에 인지할 수 없다.
주인공 조너스는 기억 보유자라는 직위를 부여받는다. 조너스가 사는 사회는 과거의 기억이 모두 삭제된 상태이지만 기억 보유자만은 모든 기억을 지닌 유일한 사람이다. 선임 기억 보유자가 기억 전달자가 되어 차기 기억 보유자에게 인류의 과거 기억들은 전달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조너스는 과거 사람들이 느꼈던 ‘감정’이란 것을 갖게 된다. 사랑의 감정,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 번민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기초가족 구성원인 아기 가브리엘이 불확정한 아기로 판정되어 임무 해제될 위기에 처하자, 안정되고 완벽한 커뮤니티를 버리고 다른 불확실한 세상을 향해 발을 딛는다. 그곳이 전쟁과 기아, 살인과 폭력이 있는 사회라 하더라도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 않고 사랑하고 아파하며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두 영화는 인간의 감정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하게 한다. (화장)에서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허우적거린다. 남편으로도 간부사원으로도 겉으로 완벽한 오 상무지만 젊은 여자에게 마음이 쏠려 방황하고 번민하는 연약한 갈대일 뿐이다.
(더 기버)에서 인간은 감정을 삭제당한 채 기계적인 예의를 갖추고 조용히 살아간다. 감정이 낳는 갈등이 미리 제거된 탓에 겉으로는 평화롭기 그지없다. 진로는 알아서 정해지고 시기나 질투도 없다. 추위나 더위, 가난이나 기아, 차별과 종교적 갈등도 없다. 구직의 난에 허덕이는 요즘의 젊은이들은 영화를 보며 졸업 때가 되어 알아서 직업이 주어진다면 감정 정도는 숨길 수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진로가 보장되고 수평적 평등을 이룬 사회에 산다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감정이란 무엇일까. 감정이 있으므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아간다. 감정이 있기에 풍부해진 감성으로 창작의 영감을 얻고 문학과 예술은 풍성해지고 세상은 따스해진다. 하루를 살아도 이성만으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에 지나친 자유를 부여받으면 가끔 잘못된 선택을 할 때가 있다. 감정의 과잉으로 시기와 질투를 불러오기도 하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폭력으로 안정적인 사회가 흔들리기도 한다.
표현이 자유로운 사회에서조차 자신의 감정을 꼭꼭 숨겨야만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두 영화를 보며 감정의 홍수 속에 살고있는 인간도 감정의 통제 속에 살고 있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감정을 모두 드러내는 사람도 가면 아래 숨기는 사람도 힘들고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어차피 오 상무처럼 속을 숨기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을 성공적으로 하는 사람은 알고 보면 감정통제를 잘하는 사람이다. 가면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간극이 클 수밖에 없는 게 사회 구조다. 사회가 요구하는 사람, 정글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감정을 스스로 잘 통제하는 사람이다.
가끔 감정에 출렁거린다.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발톱을 보이는 경우가 생긴다. 내 민낯을 드러내자 상대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눈빛이다. 어느 날은 이성적인 말투로 차갑게 변신해본다. 인간관계가 단절된다. 아직도 격한 감정과 절제된 이성 사이를 조절하지 못하고 가끔 세상에 대거리하는 풋짓을 해댄다. 균형이 깨어졌다 싶은 순간, 길을 나선다. 오 상무가 슬리퍼를 신은 채로 추은주를 피해 휘청대며 걷듯이, 조너스가 혼돈의 세상 속으로 몸을 던지듯이 나는 길 위에서 무방비가 된다. 화가 나 발톱들이 스멀거릴 때, 아름다운 가면 하나 챙겨보려 거리를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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