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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도중 한때 혀를 깨물고 자결을 시도할 때 부러진 의치를 이씨의 부인 권혁모 씨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 부인은 어떤 심경으로 살았을까. 아니 살아냈을까. 만년의 부부
사진 오마이뉴스
이세규 장군(1926~1993)은 1926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1948년에 육군사관학교를 7기로 졸업한 후, 한국전쟁 중 초급 장교로 참전하며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전쟁 후 국방대학원을 수료하고, 38세의 젊은 나이에 별을 달며 빠르게 승진했다. 이세규 장군은 군 내에서 청렴함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대령 시절 매월 자신의 봉급 절반을 불우이웃을 위해 사용하여 ‘콩나물 대령’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군 복무 동안 부패와 횡령에 손을 대지 않은 드문 인물로, 높은 도덕성과 원칙을 지킨 군인으로 평가받았다. 지금 국립서울현충원 장군제1묘역 248호에 부인 권혁모 여사와 함께 인장되어있다.
이세규 장군은 장군으로서의 직책을 맡으며 군을 이끌었으나,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대해 완곡한 반대 의사를 표시한 이세규 장군은 정권에 의해 소장 진급에서 탈락하고, 1969년 11사단장직을 끝으로 자진하여 준장으로 예편했다.
신민당의 유일한 군 장성 출신 국회의원인 이세규가 당하는 장면이다. 그는 5·16쿠데타 후 군 장성 출신 중에서도 자기 집 한 채 없이 사는 청렴결백으로 소문난 사림이었다. 그런데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신민당 후보의 안보특보로 정계에 입문한 것이 죄(?)라면 죄였다. 사진 TV 드라마 화면
청렴 사례와 아내 권혁모
이세규 장군의 청렴함은 그의 가정 생활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단장으로 재임할 당시, 아내와 자녀들이 면회를 오면 군용차량 탑승은 금지되었고, 가족들은 쌀과 부식을 직접 가지고 와야 했다. 겨울철에도 가족들은 쌀자루를 지고 수킬로미터를 걸어 사단장 관사까지 다녀야 했다. 이세규 장군의 아내 권혁모 여사는 남편의 고난의 시간 속에서도 그의 유품을 간직하며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했다. 특히 고문 중 부러진 의치는 권 여사가 남편을 떠나보낸 후에도 소중히 간직하였다고 전해진다.
박정희 정권과의 갈등
이세규 장군의 청렴한 삶은 박정희 정권과의 갈등으로 인해 극단적인 시련을 맞게 된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이세규는 국회에서 실미도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다.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을 북한의 무장공비 침입으로 발표했으나, 이세규는 684부대가 사실은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만든 북파부대라는 내부 정보를 공개했다. 이 폭로로 인해 이세규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고, 유신 선언 직후 군 정보기관에 끌려가 극심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고문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혀를 깨물어 의치가 부러지기까지 한 이세규 장군은 군부 내 인맥과 제보자 명단을 대라는 압박과 회유에 굴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1년 동안 7번이나 끌려가 고문을 받았고, 결국 몸이 망가져 생활고에 시달리며 1993년 7월 24일, 국군수도병원에서 별세했다. 그의 고난의 시간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며,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맞서 싸운 인물로 기억된다.
이세규 장군의 일생은 청렴함과 고난의 상징으로, 그가 남긴 유산과 그의 아내 권혁모 여사의 지지는 대한민국 군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개인의 역사를 넘어,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고문을 당하던 중 이세규는 자살을 결심하고 혀를 깨문다. 그러나 고문의 고통 중에 혀를 정확히 깨물지 못하고 대신 앙다문 서슬에 의치가 부러져 나간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피가 쏟아지자 고문하던 이들도 당황했다. 적군의 포로로 잡혀도 장성에게는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제 장군으로서 최후의 것을 다 잃었다. 더 이상 살아봤자... 너희 놈들은 사람도 아니다. 언제가 그 틀니 사진이 보이더니 지금은 없다. '질못된 ㄱ서은 언젠가라도 잘못되게 되어있다.!; 그것이 개인에게는 적용이 빗나가는 수도 있으나 역사는 그 기승전결이 완벽하다,
이때 박정권은 금도를 넘어 종말로 가는 것이다. 지금 현 정치상황과 비슷하다. 갈때까지 간다는 것이다. 1971년 미국과 소련의 요구로 남북비밀특사, 이후락의 상승, 이를 빌마로 北은 수령체제, 南은 유신체제. 저항이 있자, 긴급조치, 여기서 토사구팽 김형욱, 무마 위해 이후락의 덜컥수 김대중 납치, 또 이를 머무리 위해 문세광 사건, 육영수 사망과 1975년 월남패망 그러나 중공업등 무리수, 단군이래 최대 호황, 현대 압구정 아파트 사건 부터 문제, 드디어 10.26로 가는 장송곡, 역사는 이런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이 박정권을 무너뜨린 중공업이 무기산업등 엄청난 저력으로 나타나니 역시 기승전결은 맞아가는 것이다. 사진 오마이뉴스
용인이씨 이세규
시조 이길권(李吉卷)은 고려시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 太師)을 지냈다. 신라 말 경기도 용인지방의 토호였던 그는 왕건을 도와 삼국을 통합하는데 공을 세웠다. 훗날 지금의 용인인 산성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용인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이중인(李中仁)은 고려조 구성부원군을 지낸 인물로 용인이씨의 굳은 절개를 보여준 장본인이다. 그는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으로 정국이 혼란에 들자 벼슬을 버렸다. 조선 개국 후에는 머리를 풀고 산속에 들어가 은둔했던 절신이다. 또한 자손들에게 "이씨 왕조 밑에서는 벼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며 굳은 절개의 유언을 남겼다.
뿌리없는 나무가 없고 근원없는 샘물이 없듯이,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꽃이 좋고 열매가 많나니‘ 라는 말은 이 집안에 맞는 말이다. 이들이야 말로 관군이었지만 義兵의 정신을 가진 武將이었다. 이런 것이 바로 가문의 韓流로서 지난 수천년을 이어온 도도히 흐르는 정신의 脈인 것이다. 몇 년전 안동권씨 특집 ‘며느리 권씨’로 권혁모 여사에 대한 취재를 하다가 족보의 내용을 찾지 못하고 용인 이씨 대종회와 연결이 안되고 그 뒤 여사의 부음을 들은 아픈 기억이 있다. (글 권오철 기자)
얼마전 박모장군 당번병 사건등 이런 권력추구의 특권이 참 韓流정신을 모독하니 곧 거샌 청풍한류가 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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