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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를 상징하는 명장(名將). 진평왕부터 문무왕까지 8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살며 5명의 신라 왕을 섬겼다. 옛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 김구해의 증손자이며 조부는 김무력, 부는 김서현이다. 골품은 진골이다.
성골 왕통의 단절로 인한 극도의 정치 불안정 속에서 약화된 신라군을 이끌고 재앙에 가까웠던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한 대규모 양면전쟁에서 몇 번이나 두 나라의 침공을 막아내는가 하면 꾸준히 일어났던 서라벌 귀족들의 반란을 연거푸 진압하는 등 신라를 지켜내는데 큰 기여를 했고 무엇보다 군 사령관으로서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룬 신라의 대영웅.
김유신이 활동한 시기의 신라는 진흥왕의 전성기가 끝나고 반복되는 실정, 외교적 고립, 신라 내부의 반대 세력으로 국가적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그런 신라를 존속시킨 핵심 인물로 넓게 보면 향후 수천년 한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명으로 이 사람의 존재가 없었다면 한반도 통일 국가의 성립이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장수의 이미지가 강해서 묻히기는 하지만 정치가로서의 영향력도 상대등 직을 맡았을 정도로 매우 높았던 인물이다. 혈통이 확인된 인물들에 한해 상대등 역시 역대 3번째로 신라 왕가 외에서 맡은 인물이다.
더불어 조선시대 이전 한국사 인물 중 군주, 왕족이거나, 이에 준하는 국가 지도자급 인물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 매우 드물게 한중일 정사 역사서에 모두 등장한다. 이는 장보고와 더불어 단 둘 밖에 없다.
2. 역임 관직
삼국사기 신라본기 및 김유신 열전에 기록된 역임 관작
관등
소판(蘇判)
서열 3위 관등.
이찬(伊飡)
서열 2위 관등.
대각간(大角干)
서열 1위관등인 각간에다가 대 자까지 붙힌 최고위 관등.
태대각간(太大角干)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선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을 받았다 한다. 사실상 김유신만을 위한 최최고위 관등.
직위
압량주 군주(押梁州 軍主)
삼국사기 선덕여왕 본기엔 '압량주 도독'이라 되어있다. 도독과 군주는 같은 직위로 압량주의 군대를 총괄했다.
대장군(大將軍) / 상장군(上將軍)
삼국사기 선덕여왕 본기엔 대장군, 김유신 열전에는 상장군을 받았다고 한다.
상주 장군(上州 將軍)
상주의 군대를 총괄했다.
상주 행군대총관(上州 行軍大摠管)
상주 지역의 군대를 총괄하는 동시에 모든 총관의 수장이 되었다.
대당 대총관(大幢 大摠管)
신라의 군대편제인 9당의 총지휘관. 부지휘관은 김인문이었다.
상대등(上大等)
신하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 귀족의 대표이자 국왕의 최측근이었다.
김유신 열전에 기록된 당 관작
직위
봉상정경(奉常正卿)
밑 작위와 겸함. 열전엔 당고종이 봉했다고 하는데 사실일 가능성은 적을 것으로 보인다. 김유신 열전의 원본은 후손들이 과장한 행장록이기 때문.
작위
평양군 개국공(平壤郡 開國公)
위 직위와 겸함. 봉지인 평양군은 고구려의 수도인 그 평양인 것으로 보인다.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김유신/생애 문서를 참고
4. 여담
설화적 기록을 수록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삼국유사에서는 삼국사기보다 좀 더 설화적이고 비현실적인 일화가 다수 담겨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야사가 전한다.
김유신이 수련한 경주의 단석산 정상엔 검법을 전수받은 김유신이 신검으로 돌을 갈랐다는 설화가 담겨있는 돌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백석이라는 고구려의 자객이 김유신을 죽이러 화랑으로 위장했는데 나림, 혈례, 골화라는 세 여신이 나타나서 이를 알려줘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에 따르면 영양왕에게 억울하게 죽은 고구려의 점쟁이 추남이 죽을 때 적국의 대장으로 태어나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맹세했는데, 왕이 추남이 서현의 부인 = 만명부인의 품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이라 하여 미리 제거하기 위해 자객을 보낸 것이라고 한다.# 근데 정작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김유신은 너무 나이가 들어 골골거리고 있었다. 물론 명목상으론 고구려 정벌군의 최고사령관(大幢大摠管)이었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관련이 없는 건 아니다.
특히 유명한 건 고려 시대의 문인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화랑이던 김유신은 어느날 친구 모가대, 우기나와 함께 다니다 기녀인 천관녀를 만나 사랑해 그녀와 교제했는데, 어느 날 어머니 만명부인이 그 꼴을 보고는 "나는 이제 늙었다. 네가 커서 장차 나라에 큰일을 하여 왕과 부모에게 기쁨을 안겨줄 날을 밤낮으로 고대해왔는데 어찌 너는 술과 여자나 쫓아다니느냐"라고 울면서 말했다고 한다. 아예 출가를 하라는 선언까지 떨어지자 김유신도 엎드려 울며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 해서 천관에 대한 그리움을 꾹 참고 다시 그 집에 들르지 않기로 어머니께 맹세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상태로 집에 돌아가던 중, 말이 평소 길 가던 버릇대로 그녀의 집 앞에 멈춰서자 천관이 즉시 달려나와 영접했는데, 정신을 차린 김유신이 상황을 깨닫고 천관에 대한 마음을 눌러참고 '네가 어찌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리 하였느냐'며 말의 목을 그대로 베고 그대로 떠나버렸다고 한다.늘 가던 곳이라 자율주행하던 말이 무슨 죄...~ 현재 김유신의 집이었던 제매정택과 천관녀가 살았던 곳으로 알려진 천관사는 직선거리로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천관녀는 그의 무정함을 원망하며 《원사(怨詞)》라는 향가를 지었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그의 결단에 감동하여 신녀직을 그만두고 비구니가 되어 절에서 지내다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후에 김유신도 죄책감을 느꼈는지 삼국을 통일한 후에 천관녀를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터라 천관사라는 절을 지어 그녀를 위로했다고 한다.
사실관계는 밝혀진 바 없지만, 김유신의 말은 그저 주인을 태운 것 밖엔 없는데 무슨 잘못을 해서 목이 잘려 죽은 거 냐며 김유신을 까는 밈도 있다. 현대식으로 자동차에 빗대어 음주운전 했다거나, '술 먹고 운전석에 앉았고 차가 최근 목적지로 자율주행했더니 차주가 폐차함'같이 유머스럽게 재해석하기도 한다. 이 일화를 한 때는 위인전에 싣기도 하고 국민학교 시절 정신교육이라며 찬양하기도 했으나, 그 시대라고 무분별하게 찬양했던 것은 아니다. 일례로 고려시대 문신인 '이공승'(1099~1183)은 천관사의 이름의 유래를 말하면서 느낀 점을 시로 수록하였는데 간접적으로 까고 있다.
寺號天官昔有緣 천관이라는 절 이름에 사연이 있는데
忽聞經始一悽然 새로 짓는다는 말 듣고 마음이 처연하네
倚酣公子遊花下 술 기운 가득한 공자는 꽃 아래서 노닐었고
含怨佳人泣馬前 한을 품은 아름다운 여인은 말 앞에서 울었다네
紅鬣有情還識路 말조차 정겨워서 그 길을 떠올렸을 뿐인데
蒼頭何罪謾加鞭 종놈은 무슨 죄라고 채찍만 때려댔는고
唯餘一曲歌詞妙 남은 것은 오직 한 곡조의 어여쁜 노래뿐
蟾兔同眠萬古傅 달 속에서 함께 자리라는 가사를 만고에 전하네
또 다른 해석으론 1990년 월간 보물섬에 연재하던 박문윤 만화 "우럭이"에서도 아버지가 사고뭉치 아들인 정우럭에게 이 일화를 이야기하자, 우럭이는 "아니? 대체 말이 잘못한 게 뭔데요? 못난 주인을 찬양하고자 말을 함부로 죽인 것을 찬양하나요? 그리고, 요즘 그러면 동물보호단체들에게 항의나 고소를 당하고 아주 고생할텐데요? 1300년전 일을 왜 지금 해도 된다는 것처럼 가르치면 안되잖아요? 말이 가엾잖아요!" 라고 이야기하여 아버지가 아무 말 못한다. 이걸 멀리서 듣은 아우가 '형은 사고뭉치지만 때론 아버지도 입다물게 하는 지식이 있다. 그 지식을 공부로 안 쓴다고 아버지가 아쉬워하게 하지만'이라고 생각했다.
비담의 난 때 김유신이 연을 띄어 반란군의 사기를 꺾자 이후 비담은 직접 2만의 대병력으로 왕위를 찬탈하려 드는데, 김유신에게는 그 절반 병력인 1만밖에 없었다. 이에 김유신이 비담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대항하는 자는 9족을 멸하겠다며 진군해 비담의 병력과 대치하자 김유신을 본 병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김유신은 3만 병사를 이끌고 그대로 진군해 비담과 반란에 가담한 9인의 9족을 멸하고, 투항한 2만 명의 죄는 전혀 묻지 않았다. 다만 삼국사기 본기에서는 오히려 30명 정도가 죽었다고 되어있다. 지휘관 급 인물들을 처형했는지는 불명.
정치적 입지를 올리기 위해 김춘추와의 정략결혼을 시도했는데, 축국 놀이를 하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자락을 밟아서 터트린 다음, 옷을 고쳐주겠다면서 자기 집으로 데려와서 누이동생 문희를 방으로 들여보내서 분위기를 조성, 성관계를 가지게 했다. 그런데 문희가 임신을 했는데도 김춘추는 정식 혼인한 관계가 아니었으므로 모른 척을 했는데, 이에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를 아이를 임신해서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문희를 화형시키겠다면서 일부러 젖은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지펴 연기가 무럭무럭 솟아오르게 해, 그것을 본 지나가던 선덕여왕이 중재를 하여 혼인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권위있는 제3자의 영향력을 끌어들여 자신의 입지를 세운 셈.
상장군으로 지낼 때 오랜 기간을 동안 전쟁터에서 보낸 뒤에 다시 전쟁터로 나갈 때 마침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집에 들르지 않고 전령을 보내 우물물 한바가지만 떠오라 한 뒤 말 위에서 마신 뒤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라 하고 다시 전쟁터로 떠났다. 이를 본 군사들이 "상장군님은 집을 눈 앞에 두고 들르지 않는데 우리가 집 걱정하겠는가?"라는 말과 함께 사기가 하늘을 찔러 적을 무찔렀다고 한다. 그 우물은 현재 그의 집터로 추정되는 곳에 '경주 재매정'이란 이름으로 사적 제2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정방과 기싸움을 한 다음날, 소정방이 출병하기 전 하늘을 나는 까마귀를 보고 점을 쳤는데 불길한 점괘를 받고 겁을 먹었다. 김유신은 검을 뽑아 까마귀를 가리켰는데 그대로 오체분시되었다고 한다. 이 일로 소정방이 마음을 다잡고 출정할 수 있었다.
당나라 고종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제후국 주제에 선왕에게 태종의 묘호를 올린 것을 취소하라고 압력을 넣은 적이 있는데, 신라가 비록 작은 나라이나 무열왕이 김유신을 얻어 삼국통일을 이뤄내었으니 태종이라는 묘호에 합당하다는 반박에 그냥 넘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동운부군옥라는 책에는 요괴를 만났다는 일화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죽통미녀, 노옹화구 문서 참고.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신라의 풍월주(風月主)
박창화가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화랑세기의 기록
14대 호림공 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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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유신공 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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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보종공 설보종
위서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의하면 15대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가 김유신이고, 삼국유사에서는 18세 때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이 되었다고 한다.
신문왕 때 만파식적을 보낸 것도 김유신과 문무왕의 혼백이라 한다. 또한 후에 후삼국시대가 형성되고 신라가 망할 때가 되자 왕궁에서 수많은 군사의 혼령들이 울며 김유신의 묘로 들어갔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 시대의 야담집 《천예록(天倪錄)》에는 서악서원이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던 때를 배경으로 한, 김유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김유신과 설총, 최치원 세 사람의 위패를 모신 경주의 서악정사가 비로소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게 된 것과 관련해 경주의 유학자들이 모인 회의에서 어떤 서생이 "설총은 중국의 유교 경전을 이두로 풀이하여 가르친 공적이 있고 최치원은 문장으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공적이 있지만 김유신은 무장(武將)으로서 유학자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일을 한 것이 없다." 하며 김유신의 위패를 빼고 사액을 청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 자리에서 논의가 나지 않아 회의를 파하고 얼마 뒤, 이 서생이 서원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옷을 입은 무사들이 몰려와 서생을 잡아다 뜰에 꿇어앉히고, 병사들을 거느린 김유신이 그의 앞에 나타나 서생을 향해 "유학자들이 중히 여기는 덕목이 충(忠)과 효(孝)가 아니던가. 내가 살아서는 위태로운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아가 어려움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하는 공을 세웠으니 그것이 충이고, 그렇게 공을 세우고 입신양명하여 집안과 부모의 이름을 빛냈으니 그것이 효이거늘 어찌 네놈은 나에 대해 광패한 소리를 지껄이느냐? 내 결단코 네놈의 목숨을 거두리라!"라며 호통을 쳤다. 깨어난 서생은 두려워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이틀만에 피를 두 말이나 토하고 사망했다. 많은 기담과 전설을 남겨서 뭔가 영력이 강한 장군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인지 김유신은 한국 전통 무속신앙에서도 신으로 모시는 역사 인물이다. 강원도 강릉시 지역에서는 김유신을 산신으로 모시는 사당들도 있다(7분부터). 강릉 지역 구비전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산신령이 된 김유신이 대관령의 소나무를 모두 병사로 보이게 해서 왜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대구광역시 군위군 지역에서도 김유신을 산신령으로 모시고 신당이 있고, 그 외에도 오늘날에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김유신을 모시는 신당은 매우 많다.
5. 가계
그의 가계도는 그 당시 신라에서는 순혈주의를 지키려는 의도 때문에 당연한 것이지만 철저히 유교화된 조선 시대를 거쳐 오늘날 한국인의 기준으로 따지면 완전히 막장이었다. 김유신은 자신의 여동생 김문희가 김춘추에게 시집갔는데 문제는 김춘추와 김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김유신에게 시집왔다는 것이다. 즉 외삼촌과 조카가 결혼한 셈이다. 어쨌든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이 전하는 김유신의 가계는 아래와 같다.
조부: 김무력
조모: ?
부: 김서현
외조부: 숙흘종
외조모: 만호부인
모: 만명부인
남동생: 김흠순
첫째 여동생: 보희
둘째 여동생: 문명왕후
매제: 태종 무열왕
아내: 지소부인
장남: 김삼광(金三光) 이찬
장손: 김윤중
서손:김암
증손:김장청
김웅원(?)
차남: 김원술(金元述) 소판
3남: 김원정(金元貞) 해간
4남: 김장이(金長耳) 대아찬
5남: 김원망(金元望) 대아찬
딸 4명
서자: 김군승(金軍勝) 아찬
김유신의 부인 지소부인은 655년에 김유신과 혼인했는데, 김유신이 죽은 후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성덕왕 때까지도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지소부인은 문희의 딸이 아닌 전처 소생이었을 거라는 말도 있는데, 그렇다고 쳐도 김유신과 무열왕부터가 8살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무열왕의 딸이 김유신과 엄청난 나이 차이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지소부인의 나이에 대해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신라본기 성덕왕 11년(712) 기록에서 김유신의 아내가 살아있으며 존칭과 곡식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등장하므로, 무려 57년 전인 655년에는 10~20대의 젊은 연령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재혼하는 경우가 아니면 그쯤에 결혼하는 게 전근대 사회에서는 정상적이기도 했다.
열전에서 김유신의 다섯 아들과 딸 넷은 모두 지소부인의 소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장남 김삼광의 경우 666년에 당나라에 숙위로 간 적도 있고 고구려 정벌 당시 당군과 함께 평양성에 참전하기도 했다. 이 기록대로라면 삼광은 10대 초반에 당나라와의 숙위외교와 고구려 전쟁에서 활약한 천재 소년이라는 얘기가 된다. 아무리 나이 열다섯이면 성인 취급을 하던 시대임을 감안할지라도 숙위라는 직책은 단순히 황제를 시중들거나 볼모 개념이 아니라 신라와 당과의 외교관계를 조정하는 중요한 역할도 맡고 있었기에 어린아이를 숙위로 보냈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삼광의 활약 연대로 봤을 때 삼광은 사실 지소부인이 아니라 기록에 남지 않은 전처의 소생일 가능성이 높다.
삼국유사를 보면 '재매부인(財買夫人)'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게 기록된 게 삼국유사 기이편의 김유신 편이다. 여기서는 '김씨 집안의 종부'라고만 기록해 놓았으며 그녀가 죽자 청연 위의 골짜기에 장사지내 그곳을 '재매곡'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해마다 봄이 되면 김유신 가문의 남녀들은 그 골짜기 남쪽 시냇가에 모여 잔치를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 '재매부인'을 지소부인과 결혼하기 전의 김유신의 부인으로 보는 설도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태종 무열왕의 딸과 결혼하기 전 김유신이 미실과 김세종의 손녀와 결혼을 했었으며, 이와 별개로 천관녀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있었다고 한다. 위서 의혹을 받는 화랑세기 필사본이니까 저 내용을 다 믿을 수는 없다 해도, 당시 김유신의 나이로 봤을 때 재혼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
김유신의 후손들은 희곡으로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한 일화를 남긴 원술랑을 제외하면 신라가 망할 때까지도 크게 이름을 드러내질 못했으며 기록도 별로 없다. 삼광은 삼국사기 열기 열전을 보면 열기에게 삼년산군의 태수 직을 주었다는 것과 신문왕의 혼사에서 관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나름대로 신문왕 때까지 조정에서 역할을 했던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서자로 김군승이 있었는데, 그는 661년 2월 김유신이 김인문, 김양도 등을 이끌고 태백산맥을 우회하여 평양에 고립된 소정방에게 군량을 공급할 때, 참전했다고 한다. 그는 김인문과 함께 당군과 접촉했다는 기록을 볼 때 제법 중국어에도 능통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661년에 전장에서 한 역할을 맡을 정도로 장성했다면 655년에 결혼한 지소부인 소생 아들들보다 적어도 한 세대 위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김군승을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로 유명한 천관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김유신이 지소부인 이전에 교제한 여자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천관녀뿐이고 결국 정식 혼인은 하지 못해 아들을 낳았다면 서자가 되었을 테니, 현재로선 추정 가능한 후보는 천관녀뿐이다.
장남 김삼광의 아들인 김윤중은 명장 김유신의 손자라는 이유로 당나라가 먼저 요청해 733년 발해 공격의 대장으로 북진했으나 발해로 가는 중에 폭설을 만나 전투 없이 그냥 돌아왔다. 성덕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다른 귀족들의 시기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부터 김유신 집안 사람들은 신라 조정에서 힘을 잃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서 김유신 후손들에 대한 기록이 적은 것과 삼국사기/유사에 기록된 김유신 무덤에서 김유신의 혼이 뛰쳐나와 통곡했다는 전설은 이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또한 김유신의 서손으로 당에 유학을 다녀오고 둔갑술(!!!)에 능했다고 전해지는 김암이 있다. 이밖에 신라 하대에 중국에서 일어난 이사도의 난과 김헌창의 난 때에 이를 진압한 인물들 중에서 김웅원<金雄元>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김해김씨 삼현파보(金海金氏三賢派譜)』에 김유신의 후손으로 그의 행록을 지은 장청(長淸)의 아들로 김웅원이 기록되어 있음을 근거로 그렇게 보기도 한다.
6. 대중매체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김유신/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참고 문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삼국통일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