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4장 8-18절.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치고 전도함. 요약설교
8절.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1.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에서 남쪽으로 64km 떨어져 있고, 수리아로 가는 대로상에 있었고, 해발 1100m에 있었습니다.
베자 사본에는 이 앉은뱅이가 바울의 설교를 듣기 전에 이미 유대교로 전향한 개종자(proselyte)였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2. 사도행전 3장에서는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 거지가 베드로에게 구걸하다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4장의 루스드라 앉은뱅이는 바울이 설교하는 것을 듣다가 믿음을 얻게 되어서 바울이 고쳐주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25절에서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즉 천국 복음은 죄 용서와 병 고침과 영생 천국으로 구원해준다는 복음임을 입증해주시려고 그런 것입니다.
9절.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 육신이 멀쩡한 유대교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대적하고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육신이 앉은뱅이인 이 사람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로마서 10장 17절 말씀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좋은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설교 시간에 잘 듣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앉은뱅이가 바울의 설교를 잘 들으니까, 바울이 그 앉은뱅이를 주목했다고 했습니다.
2. 베드로도 앉은뱅이를 고칠 때, <주목하여 보고, 우리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행 3:4).
옛날 어른들이 공부할 때 책장이 뚫어질 정도로 주목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무엇이든지 주목하여 볼 때,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학생이 선생님의 강의를 주목해서 들을 때,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떠드는 학생들이 있으면 <주목, 주목> <주목해>라고 합니다.
이처럼 설교를 듣는 청중은 설교자의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목사도 성도들에게 관심을 집중해서 주목해야 합니다.
3. 앉은뱅이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 말씀을 듣는 과정에서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생겼고, 예수님이 죽은 영혼을 살려주시고, 육신마저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앉은뱅이 속에 들어가니까, 그 생명의 말씀이 능력이 되어서 창조적인 역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여자도 혼자서는 애기를 낳을 수 없고, 남자로부터 생명의 씨앗이 내 몸에 들어와야 임신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말씀의 씨앗이 마음속에 들어가야 믿음이 생깁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복음 6장 63절 말씀처럼 영이요 생명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과 성령님이 능력입니다.
그래서 설교할 때 청중들은 그 영혼이 새 힘을 얻게 됩니다.
10절.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바울은 앉은뱅이에게서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고서는 큰 소리로 네 발로 일어서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굉장히 믿음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학적인 지식과 인간의 고정관념으로는 앉은뱅이가 걷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믿음으로 앉은뱅이의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앉은뱅이에게 믿음으로 선포할 때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초월한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이 믿음은 성령님을 믿을 것인가 이성과 경험을 믿을 것인가 갈등을 초월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32:27.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11절.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 사람들이 급하면 어렸을 때 쓰는 사투리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루가오니아 사람들도 평상시에는 <코이네 헬라어>를 썼지만, 놀라운 일을 만나서는 어렸을 때 쓴 사투리 방언을 썼습니다.
2. 그러면서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것을 보고, 소리 지르면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오셨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온다는 것은 헬라인들의 사상이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신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말을 <에피파네스>라고 했습니다.
12절.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했는데, 제우스는 헬라인들의 ‘제일 신’을 말합니다.
바나바가 선교대의 대장이므로, 제우스 신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헤르메스>는 제우스 신의 대변인이었는데, 설교는 바울이 했으므로, 바울은 대변인인 <허르메스> 신이라고 한 것입니다.
13절.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 루가오니아 지방의 루스드라 성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투리로 말하는 것을 듣고, 바울과 바나바는 알아듣지 못했는데, 그 사람들이 성 밖으로 나가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하려고 제사장들과 함께 소와 화환을 가지고 대문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제우스 신전의 제사장들이 대문 앞에서 사람들과 함께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하려고 했습니다.
2.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는 신의 대접을 받는 것이 얼마나 최고의 영광스런 일입니까?
그래서 많은 황제들이 신으로 대접을 받으려고 했고, 지금 많은 이단 교주들도 신으로 대접을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에서는 목사가 신적인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적 대접은 곧 망할 징조입니다.
14절.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에게 제사하려고 하는 것을 보자마자, 자기들의 옷을 찢었습니다.
구약에서도 옷을 찢는 경우는 부모가 돌아가시거나 하나님을 모독할 때, 극도의 슬픔과 분노를 나타낼 때 옷을 찢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통곡을 했습니다.
15절.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6절.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절.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절.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1.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을 신으로 제사하려는 사람들에게 우리도 당신들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7절에는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선언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모든 인간은 신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신이 되려고 하고, 회사에서는 사장이 신이 되려고 하고, 교회에서는 목사나 장로가 신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간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신이 아니라 너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다. 그러니 우리를 섬기지 말아라.’
참으로 멋있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섬기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루스드라의 앉은뱅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겨서 벌떡 일어난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믿음을 갖고, 놀라운 은혜들을 체험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