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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Piaget연수일기
2010. 6. 25(금)
오늘은 6.25사변이 발발한지 어언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상해에서 개최되는 Piaget연수에 참가하기 위해 어제 오후 늦게 상경한 관계로 다소 피로하여 오전은 외출하지 않고, 오후에는 김포공항에서 상해로 떠나야하기에 거실에서 TV를 시청 하며 조용히 쉬었다.
11시 30분경에 식사를 간단히 하고 12시 5분에 맏아들 준삼이가 승용차로 김포공항까지 태워주려고 왔다. 차를 한 잔 마시고 김포공항으로 바로 출발하였다. 집결시간이 13시 40분까지 이기에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으나 도로 사정에 의해 늦을 수 있기 때문에 다소 빠른 속도로 달렸다. 서울시 외곽순환도로를 이용하였다. 차량 소통이 양호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13시 10분경이 되었는데 만나기로 한 장소인 아시아나 카운터(Asiana counter) 앞에 회원들이 거의 도착해 있었다.
카토릭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일본인 사쿠라이 마사오(Sakurai Masao) 교수가 먼저 와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 교수는 지난봄에 김명자 회장과 함께 경주에 왔을 때 만났기 때문에 반가웠다. 역사적인 사실을 조사하여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라고 한다. 그래서 성덕대왕신종과 교동 소재 경주최씨 고택을 직접 탐방케 하여 역사적인 내용을 전해 주었던 것 때문에 두 번째 만났지만 자주 만난 기분이 들었다. 공항 휴게소에서 커피 한 잔을 대접했다. 대전에서 온 손영환 이사장과 3명이 비록 언어 소통이 어려웠지만 서로가 영어로 의사전달을 했던 것이다.
예정과 같이 16:00시에 Asiana여객기가 김포공항을 이륙해서 1시간 50분 비행하여 상해 홍교공항에 착륙하였 다. 상해에 여러 번 왔으나 매번 푸동공항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곳 홍교공항은 처음 왔다. 김포공항처럼 옛 건물이다. 입국수속을 할 때 나 만을 재조사했다. 동명이인이 많아서 그렇다고 한다. 지난해 봄에 홍콩 마카오 심천을 여행차 왔을할 때 심천에서 입국수속시 재조사하더니 벌써 세 번 경험하는 일이다. 해외여행을 많이 다녀왔지만 유독 중국에서만 이런 경험을 하게 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8년 전에 심천에서 처음으로 재조사를 받을 때는 김영호라는 26세의 청년이 에이즈 환자라고 국제경찰에 신고가 된 이름이었기에 ‘김영호’라는 이름의 입국자는 모두 재조사한다는 것이다.
현지 가이드는 영변 조선족 출신의 30대 중반 나이의 남자이다. 그는 이곳 상해에 온지가 11년째라고 하고, 할아버지의 고향은 강원도 원주라고 하며 성은 원씨였다. 원주에는 원씨 집성촌이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먼저 시계를 한 시간 앞으로 돌려 시차를 맞춘 후 식당으로 향했다. 기내식을 한지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았기에 일행 모두는 밥 생각이 없었으나 스케줄에 따라서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식당까지는 공항에서 버스로 15분 정도 소요되었다. 규모가 큰 대형 식당이었다.
2층에서 식사를 하였다. 밥과 반찬이 여덟 가지가 나왔다. 조금 먹었다. 식후에 동방명주에 올라 상해의 야경을 보는 것이 원래의 계획인데 비가 내리고 있어서 운해가 끼인데다가 밤이라서 가시거리가 짧아 야경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극장에서 쇼를 보는 것으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쇼는 젊은 청년과 아동이 여러 가지 묘기를 보여 주었다. 경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1시간 30분 동안 숨을 죽이고 각종 표현되는 묘기에 매료되어 모두가 세상의 걱정 근심을 잊은 듯 장내는 조용하였다. 절묘한 장면에는 큰 박수를 보내며 격려하였다.
‘크라운 플라자 호텔 상하이’에 투숙했다. 특급호텔이고, 혼자 독방을 배정받았다. 2225호실이다. 넓은 방에는 침대, TV, 책상, 의자 등 모두가 깨끗하고 고급 설비이다. 샤워를 하고 내일 발표할 내용을 정리한 다음 23:00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6월 26일(토)
05:00에 기상하였다. 한국시간으로는 06:00이다. 잠이 제대로 오지 않아서 4시간 정도 잔 것 같다. 세면을 하고 짐을 정리한 다음 06:30경에 1층 레스토랑에서 조식을 하였다. 08:30부터 오전 관광이 시작되기에 여유가 있어서 식사 후에 발표할 내용을 검토해 보았다.
09:00부터 투어가 시작되었다. 중국의 갑부가 살았던 예원이란 곳에 왔다. 화려하게 꾸며진 건물과 정원이다. 이 집을 신축한 사람은 부모를 위해 건축을 시작해서 18년 만에 완공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기의 부모들은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 집에서 삼대가 살았지만 가세가 몰락하여 몇 차례 다른 사람이 거주하다가 현재는 국가의 소유이고, 7000평 정도의 넓은 대지에 각종 시설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특히 바다 속에 있는 바위를 옮겨다가 꾸민 정원은 특이하였다. 육지에서 볼 수 없는 돌들로 다양하게 꾸며졌으며, 연당, 정자 등이 자연풍광을 더해 주었다. 특히 담장을 용처럼 꾸며 놓은 것이 시각을 당겼다. 그런데 용에 대한 것은 황제만이 차지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황제가 듣고 현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조사케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사의 문제가 생겨서 많은 돈을 주고 화를 면했다고 한다.
용은 발톱이 다섯 개인데 이곳은 세 개로 이무기라고 변명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용이 아니고 이무기라 부른다고 한다. 이곳에는 하루에도 평균 10만 내지 15만 명이 온다는 것이다.
명동처럼 번화가를 이루고 있는 남경촌 거리에서 한 시간 남짓 자유 시간을 보냈다. 구름이 낀 날씨에 약간의 이슬비가 내리고 있어서 덥지 않았으나 습도 관계로 다소 끈적끈적한 기분이 들었다. 백화점 두 군데를 둘러본 후에 집합장소에 복귀하였다.
마사오 교수가 맥주를 한 병 사주었다. 12:20 경에 태가촌식당(傣家村食堂)에서 점심을 먹었다. 여덟 가지의 반찬이 나왔다. 13:10에 세미나가 열리는 홍구세기대주점(虹口世紀大酒店)으로 왔다.
중국에서 최초로 준비한 세미나이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으나 회의실에 들어가니 중앙 앞 벽에 ‘皮亞杰亞洲交流會’라는 붉은 색 바탕에 큰 글씨로 쓴 현수막이 게시 되어 있었다.
마련된 접수부 방명록에 ‘祝 Asia 幼兒敎育發展’ 韓國 慶州 새花郞幼稚園 設立者 金泳豪'라고 sign했다. 일본에서 오는 참가자들이 13:00시에 홍구공항에 도착했기 때문에 세미나는 예정보다 약 40분 늦게 시작 되었다.
중국 대표자가 ‘연분(緣分)’이라는 주제로 약 30분 정도 강연을 하였고, 그 다음은 김명자 회장, 일본 유치원장, 상해동전유아원장(上海東展幼兒園長)과 교사가 차례로 발표를 하였다. 특히 중국 동전유아원(東展幼兒園)에서는 3년 전에 Piget교육을 시작했으나 교육한 내용을 정리해서 체계 있게 발표를 하였다. 이 가운데서도 자기 나라의 전통문화와 관련한 내용은 좋은 접근방법이었다. 18:00시 경에 세미나가 종료되고 만찬이 시작되었다. 건배에 이어 다양한 요리가 나왔다. 만찬을 마치고 앉은 자리에서 몇 사람의 발표가 이어졌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한국 Piaget교육’에 관한 것이었다. 간략하게 발표를 하였다. 발표요지는 다음과 같다.
. 한국 Piaget연구회 회원유치원의 현황
. 한국의 Piaget연수 : 중앙연수, 지방연수, 자체연수
. Piaget교육을 위한 준비
. Piaget교육의 실제
. 도입수업 . 전개수업 . 평가수업
. 학부모 참가수업에서의 Piaget교육 및 평가 등 개략적인 설명을 하였다.
통역자가 잘 전달을 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계획과 같이 발표를 마칠 수 있었다.
호텔로 돌아와서 22:00시부터 시작되는 World Cup 축구 경기를 시청하였다. 한국과 우루과이의 경기이다. 2:1로 한국이지고 말았다.
6월 27일(일)
어제와 같이 05:00시에 기상을 하였다. 월드컵 경기를 보느라 늦게 잤기 때문에 잠이 부족하였던지 눈이 아팠다. 06:30분에 1층 레스토랑에서 조식을 하였다. 메뉴가 다양하였으나 혈당관계로 조금 먹었다. 09:30분부터 투어가 시작되기에 08:20분에 방을 나왔다. 팁은 1불을 두고 나왔다. 원래의 계획은 오늘 오전까지 세미나를 개최하는 것이었는데 오늘 오전에 발표할 주제들이 어제 저녁 만찬 후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아침부터 관광이 시작되었다. 10:00시에 도착한 곳은 상해신세계백화점 10층 내에 세계유명인사의 마네킹을 전시해 놓은 ‘上海杜紗夫人石像館’이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운동선수, 가수, 영화배우, 부호, 정치인, 학자, 수상, 대통령들의 우상(偶像)들이 실제의 모습과 아주 유사하게 만들어 전시해 두었다. 이들 마네킹을 보는 순간 인간의 재능이 참으로 탁월함을 느끼게 했다.
중국 최고의 부호 마네킹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등의 마네킹 옆에 서서 기념 촬영을 하였다. 마치 미로처럼 설계된 관람코스를 따라 여러 차례 촬영을 하였다. 유명 가수와 나란히 서서 열창을 하는 모습을 가연하기도 했다. 약 한 시간 정도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낸 후 진주양식장으로 왔다.
상해에 여러 번 왔기에 이런 진주양식장에 매번 꼭 들렸다. 그래서 특별히 구매할 상품은 없다고 생각을 하였으나 막상 각종 진주 장식품을 대하니 구매욕이 생겼다. 비록 싼값은 아니지만 유치원 교사들 나이의 젊은이들이 상용으로 끼고 다니는 팔찌 10개를 구입했다. 10개를 구입하니 1개를 더 주었다. 모양은 일정하지가 않아서 교사들이 좋아 할지가 다소 문제가 있으나 추첨해서 가지게 하다면 불평이 없지 않을 것으로 생각 되었다. 빨간 주머니에 정성껏 넣어주는 점원들의 마음이 진주알 빛처럼 곱고 단단한 듯하다.
진주양식장을 나오니 가는 비가 내리고 있다. 무더운 날씨에 고층건물과 공원의 수목들이 더욱 열기를 시원하게 식히는 듯 웃는 것 같다. 이조식당에서 한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상해의 북쪽 한인촌에 있는 이조식당은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으나 한식을 대하니 먹지 않아도 그 맛이 입가에 진하게 닥아 오는 듯 했다. 밥, 상치, 된장찌개, 삼겹살, 김치 등으로 차려진 밥상이다. 맛있게 먹었다.
다음 관광지는 남경이기에 다시 마련된 버스로 이동하였다. 약 1시간 30분정도 달린 후 휴게소에서 15분간 휴식을 취했다. 상해에서 남경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편도 4차선으로 거의 직선화되어 있었다. 도로변에는 나무를 심어서 공기를 정화해 주고 있다. 3시간 달려 남경에 오기까지 주변 지역에는 빌딩이 이어져 있어서 상해가 전부인 듯 착각할 정도였다. 남경에 도착하니 산이 보이고 수목이 울창하다. 강소성에 위치한 남경은 면적이 우리나라 서울의 약 두 배라고 하며, 인구는 700만 명 정도라고 한다. 들이 70%이고 산이 30% 정도로 구성된 지역이며, 매우 더운 도시로서 섭씨 39도, 40도가 평상온도라고 한다.
옛 명나라 수도였고, 손문과 장개석이 정권을 장악하고 통치한 도시로서 북쪽에는 양자강이 있고, 그와 삼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덥다는 것이다. 톨 게이트를 지나 시내로 진입하니 성이 먼저 보였다. 이 성은 1368년에 주원장이 30만 명을 동원해 축성한 것이라고 한다. 성을 쌓을 때 사용한 벽돌은 제작자의 성명과 제작 날짜를 명기하도록 하여 책임을 지도록 했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 벽돌이 깨어지면 제작자의 가족을 멸족시켰기 때문에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만들었다고 한다.
주원장이 41세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 71세 죽을 때까지 30년 동안 통치를 하였고 그의 후손 3대가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특히 주원장은 유명한 풍수를 전국에 파견하여 명당을 찾게 했는데 그중 이곳 자금성이 선택되어 이곳에 자기의 능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곳은 현재 지하철 공사 중이며, 특산품은 어항에 넣은 우화석(雨花石)이 유명하다고 한다.
호텔로 오기 전에 먼저 공부자묘(孔夫子廟)에 안내 되었다. 공자를 공부자라고 칭하는 것은 높이는 뜻이라고 한다. 대성전 앞 도로 건너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으며 그곳에는 주위가 아름답게 꾸며졌고 강위에는 유람선이 관광객을 태워 선유를 하도록 유원지로 조성하여 명소가 되었다.
공부자묘라는 출입문 앞에 서서 기념 촬영을 하고 대성전에 들어가서 위패를 향해 세 번 절하였다. 대성전 앞마당에는 공부자의 전신 동상이 바르게 서 있었다. 동상 앞에 향을 사르는 관광객 때문에 온통 향냄새가 진하게 퍼졌다.
20:00시경에 공부자묘 관광을 마치고 무궁화식당 2층에서 한식으로 저녁밥을 먹었다. 식탁에는 말끔하게 만들어진 반찬들이 친근미를 당겼다.
호숫가에 위치한 신세계대주점(New Century Hotel에 투숙했다. 배정 받은 방은 2111호실이다.
room mate는 부천 카토릭대학교에 재직 중인 Sakurai Masao 교수였다. 가방을 올려놓고 여러 가지 이야기로 나누며 친분을 다졌다. 나이가 두 살 아래인 마사오 교수는 예의바르게 대하면서 자기가 먼저 차를 끓여 가지고 탁자로 왔다. 냉장고에 들어있는 맥주를 내어서 서로 권했다. 일본인 교수와 함께 투숙하여 영어로 소통하면서 독일과 영국의 월드컵 경기를 시청하며 의미 깊은 시간을 보냈다.
6월 28일(월)
06:00시에 잠을 깨어 커텐을 열고 창밖을 내다보니 현무호와 남경역이 내려다 보였다. 뿌연 안개에 가려져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으나 호숫가에 위치해서 경관이 좋았고 또한 남경역 앞이라 이 호텔은 지리적으로 접근성이 편리한 곳에 위치해 있다. 6시 50분에 1층 호텔식당에서 조식을 하고 08:00에 호텔을 나왔다.
남경대학살가념관과 주원장릉 및 손문의 무덤을 보고 소주로 가는 것이 오늘이 주된 일정이다. 남경대학살기념관으로 오니 입구에는 높게 축조된 성벽이 내부의 세계를 차단하고 외벽에는 물이 흐르도록 설계되어 경관을 아름답게 꾸몄다.
전쟁의 피해를 입은 참혹한 동상들이 애처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그중에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는 영아의 조각상은 참으로 목불인견이었고,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하늘을 쳐다보며 힘들게 걷고 있는 조각상 또한 남경대학살의 참혹상을 대변하는 듯 생동감을 느끼게 하였다. 월요일은 휴관이라기에 내부 관람을 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돌아서야 했다.
주원장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전각에 왔다. 전각은 그렇게 크지 않았으나 주원장의 초상은 의미 있게 보였다. 주원장은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를 물리치고 41세에 명나라 황제로 등극하여 남경에 도읍을 정했다고 한다. 그는 전국에서 명성을 떨치는 풍수를 보내서 자기 무덤을 세울 명당을 찾게 했는데, 이곳 자금산이 가장 좋은 길지라는 풍수설에 따라 자기의 무덤을 만들게 했다는 것이다. 둘레가 24km가 되는 방대한 묘역을 설정하고 그 안에 손권의 무덤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파묘해서 치웠다고 한다.
주원장은 30년 통치를 하고 71세에 죽었는데 자기 무덤에 들어가는 문을 12개나 만들어서 어느 쪽 문으로 들어가야 자기 무덤으로 가는 가를 모르게 하였다는 것이다. 주원장은 황제의 자리를 장손에게 양위(讓位)하였는데 2, 3째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매우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이곳은 아직 발굴이 되지 않았으나 1998년에 유네스코에 등록되었다는 것이다. 더운 날씨에 땀이 났지만 도보로 관광을 마치고 10:00경에 손문의 능인 명효릉(明孝陵)으로 왔다. 이 능으로 가는 도로변에는 가로수를 밑 둥에서 3m 되는 높이에 가지를 잘라 크게 세 가지로 가꾸어 놓았다. 이렇게 세 갈래로 가꾼 것은 손문의 민족・민생・민권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삼민주의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입구 출입문 현판에는 ‘博愛(박애)’라는 큰 글씨가 손문의 사상을 보여 주었다. 그 다음 문에는 ‘天下爲公’이라는 현판이 게시되어 있다. 천하는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민족 전체라는 뜻이라고 한다. 또 그 다음은 손문의 비각건물이다. 아주 크고 우뚝하게 높은 비의 전면에 아래와 같이 큰 금박글씨가 각자되어 있었다.
中國國民黨葬 總理孫先生於此 中華民國 十八年 六月 一日 |
그러나 뒷면에는 아무런 글씨가 없었다. 뒤의 후면에는 주인공의 공적을 기록하는 것인데 손문의 업적이 하도 많아서 그것을 글로 요약하여 작성할 수 없어서 무자비(無字碑)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 문에는 ‘천지정기’라는 큰 현판이 있고 그 아래로 우측에서부터 좌측으로 民族・民生・民權이란 글자가 크게 황금색으로 써서 게시되어 있었다, 이문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니 둥근 석조 지붕아래 손문의 양장 조각상이 대리석 석곽 위에 누운 자세로 있었다. 이 조각은 이탈리아에 있는 조각가 친구가 조각해서 1930년에 보내온 것이라고 한다.
능실 천정에는 당기가 그려져 있었다. 11:45분에 집결지에 모두 모여 남경에서 제일 크다는 식당에 오니 12시 20분이 되었다. 이 식당은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식당이다. 4층에서 식사를 했다. 뜨거운 차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맥주 두병과 콜라 한 병이 제공되었다.
남경대학살기념관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여행사에서 특별히 배려하여 점심은 조금 비싼 것으로 예약했다고 가이드가 알려 주었다. 식사를 맛있게 먹은 후 소주로 향했다. 고속도로로 1시간 30분정도 오다가 중간 휴게소에서 잠시 쉰 다음 계속 달려서 소주에 도착하니 15시 40분이 되었다. 먼저 졸정원을 관람하였다. 이 정원은 오늘날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직위에 있던 관리가 비리로 관직에 물러나 이곳에 정원을 지어 여생을 보낸 곳이라는 것이다. 부지는 5.2 핵타르이고 명나라 정덕 4년(1509)에 공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500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아들이 도박을 하여 탕진했다는 것이다.
수목이 울창하고 군데군데 연당이 있고 사계절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정자가 아름답게 지어져 있었다. 졸정원 관광을 마치고 누에고치로 실크 제품을 만들고 있는 공장으로 왔다. 세 아들 남방과 목 스카프를 구입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150위안을 주고 전신 마사지를 받은 후 호텔로 왔어, 419호실에서 소주의 밤을 보냈다.
6월 29일(화)
6시 50분에 호텔 1층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8시주터 투어가 시작되었다. 제일먼저 간 곳은 450여 년 전에 조성했다는 ‘유원(留園)’이라는 정원을 관람했다. 졸정원과 비슷한 정원이었으나 규모는 반 정도라고 한다.
졸정원을 관람해서 그런지 별 흥미가 나지 않았다. 이곳에서 1시간 정도 보내고, 9시30분부터 10시 40분까지 한산사를 구경했다.
한산사는 규모가 상당히 크고 깨끗하였다. 장계 시인의 시가 게시되어 있고 유명한 중국의 시인들이 한산사에 관해 글을 남긴 것을 게시해 두었다. 10시 50분경에 한산사를 떠나 항주로 행했다. 소주는 역사문화도시로서 개발이 제한되어 있었으나 중국 전체에서 볼 때 이곳은 잘 살고 있는 도시라고 한다. 1년에 벼농사를 2모작을 하고 실크, 양식 등이 활발하여 잘 사는 도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구는 약 520만명 정도이며, 이곳은 전자도시이다. 우리 삼성전자도 1994년에 이곳 소주에 공장을 설립하여 운영해 오고 있었다. 강소성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첫째는 남경, 둘째는 무석, 셋째가 소주라는 것이다. 무석에는 주석이 많이 났는데 주석이 나지 않게 되자 무석(無錫)이 되었다고 한다. 호수가 많으며, 이 호수에는 진주, 새우, 미꾸라지, 게 등이 양식되어 수출 되는데 한국에도 수출한다는 것이다.
12시 15분에 항주에 도착하였다. 소주에서 항주까지 오는 고속도로는 편도 3, 4차선의 넓은 도로였다. 서호에서 유람선을 탔다. 이곳에 몇 차례 왔지만 그 사이 주변의 나무들이 많이 자란듯하다. 서호 주변을 한번 돌아오는 코스라서 많이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점심을 먹은 후 다점(茶店)에 들려서 차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캔 한 개를 구입하고 싶었으나 집에 차가 많이 있어서 구경만 하였다.
서호 남쪽 산위에 있는 전망대를 관람하고 또 침구와 베개 등을 팔고 있는 가게에 들어가서 상품들을 둘러보고 금방 내려왔다. 18시부터 19시까지 한 시간 동안 공연되는 ‘宋城千古情’이라는 곳에 왔어 공연을 보았다. ‘심천쇼’를 능가하는 아주 웅장하고 화려한 기획으로 표현된 작품이라 놀랍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