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전떡볶이를 창업한 하성호 대표는 갓 군대를 전역한 1999년 대구 칠성동에서 신전떡볶이를 창업해 직접 배달하며 신전떡볶이를 운영하는데요. 입소문이 나 2003년 대구 동성로에 2호점을 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2호점이 대박 나면서 급성장하죠.
신전떡볶이의 전략은 매운 떡볶이를 좋아하는 마니아층을 공략하는 것이었는데요. 문제는 너무 매워서 2014년 서울에 진출할 때는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래는 매운맛만 2가지였는데 순한 맛을 추가했다고 하죠.
아딸(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의 시작은 꽤 장대합니다. 파주 미군기지에서 물품을 배달하던 이영석 대표가 우연한 기회에 미군 부대에서 튀김 기술을 전수받게 되는데요. 이 기술을 가지고 1972년 문산튀김집이란 가게를 차리고 꽤 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이영석 대표의 딸인 이현경 대표와 사위인 이경수 대표가 2000년 서울 금호동에 자유시간이란 8평짜리 분식집을 개업하게 되죠. 처음에는 평범했던 분식집이었는데요.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서 가업을 잇는 장인과 딸 부부라고 소개되면서 하룻밤 사이에 유명세를 얻게 됩니다. 아침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고, 문의 전화가 쇄도해서 전화기 코드를 뽑고 영업할 정도였다고 하죠.
인기에 힘입어 2002년 이화여대 입구에 가게를 확장해서 내는데, 이대생들의 핫플레이스가 되며 성공하게 됩니다. 계속된 성공을 발판으로 2002년 5월부턴 프랜차이즈를 본격화하기 시작하죠.
아딸은 이경수 대표가 전면적으로 언론에 나서 착한 기업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해왔는데요. 자서전에서도 사회기부 등을 이야기하며 착한 경영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2015년 박근혜 정부가 경제민주화 정책의 일환으로 프랜차이즈 업체를 대대적으로 수사할 당시, 아딸이 2008년부터 4년 동안 식자재 업자들에게서 61억 원을 받고 회삿돈 8억 8천만 원을 빼돌린 혐의가 밝혀지며 징역 2년 6개월에 추징금 27억 3천만 원을 선고받았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창업주 부부가 이혼소송을 진행하면서 상표권 소송에 들어갑니다. 결국 상표권 소송에서 부인이 이겨서 대부분의 아딸 매장은 아딸이란 명칭은 못쓰게 되고 ‘감탄 떡볶이’로 바뀌게 됩니다. 현재는 감탄 떡볶이와 아딸 모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죠.
동대문 엽기떡볶이의 금주영 대표는 원래 동대문 의류회사에서 상품기획자로 일했었는데요. 90년대 중반 의류 도매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외환위기로 회사가 부도나버렸죠.
재기할 아이템을 찾던 그는 술안주로 먹던 불닭발을 생각하게 됩니다. 동대문 시장을 찾는 여성들이 매운맛을 좋아했었던 것이 떠올랐거든요. 2002년 동대문 중앙시장에 배달 전문으로 가게를 내고, 입소문을 타면서 순조롭게 재기에 성공하나 싶었죠. 하지만 또다시 2003년 조류인플루엔자가 유행하며 또다시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출이 크게 줄지 않았어요. 알고 보니 닭발이 아닌 사이드 메뉴인 ‘엽기떡볶이’의 매출이 60%였기 때문이었죠. 이후 떡볶이를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합니다. 동대문 엽기떡볶이의 정식 명칭이 ‘불닭발땡초동대문엽기떡볶이’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죠.
7. 2세대 프랜차이즈 – 죠스, 국대, 두끼
2008년에는 이명박 정부의 한식 세계화 사업의 일환으로 떡볶이 산업 육성 T/F가 구성되었고, 농림수산식품부에서도 감소하는 쌀 소비량을 늘리기 위해서 떡볶이 산업 육성 예산을 책정했습니다. 이러한 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국대떡볶이 등 프랜차이즈 업체 24곳이 생기고, 가맹 점포 수도 2배 이상 증가해 2,203개가 생깁니다.
죠스떡볶이를 창업한 나상균 대표는 이전에도 핫도그 푸드트럭을 운영한 경험이 있었고, 애완동물용품 사업으로 성공도 거두었죠.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으로 근무하기도 했어요. 이후에는 미국 유학을 꿈꾸었는데요. 유학 생활 자금 마련을 위해 시작한 것이 바로 죠스떡볶이였죠.
죠스떡볶이는 2007년 고려대 앞에서 장사를 시작하는데요. 떡볶이, 순대, 튀김, 어묵으로 단순화된 메뉴와 양질의 식자재 사용, 위생적인 매장환경 등으로 차별화를 주어 성공하죠.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에는 각종 협찬과 이벤트를 통한 모바일 기프티콘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데, 이 역시 다른 떡볶이 브랜드와는 차별화되는 모습이었죠.
창업주 김상현 대표의 이력이 특이한데요. 대구대 체대를 다니다 중퇴하고 캐나다 유학길에 올라 국제경영학을 전공하고 군고구마 장사, 신발 장사, 호프집 서빙, 주류 배달업, 한인 음식점 배달업 등을 하고 한국에서 의류업을 하다 실패했죠.
이후 대구의 한 떡볶이집 비법을 전수받아 2008년 이대 앞에 태극기를 내걸고 무허가 노점을 열어 영업을 시작합니다. 이게 대박이 나 이듬해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 국대떡볶이 1호점을 오픈하죠. 국대떡볶이는 오픈 직후 월 매출 1,000만 원을 돌파하고 사업을 넓혀갑니다.
국대떡볶이는 10~30대 여성들을 겨냥했는데요. 그래서 깔끔한 인테리어를 갖추고 젊은 남성 직원들을 고용하는 전략을 취합니다.
국대떡볶이 이후로 시들했던 떡볶이 열풍은 두끼를 필두로 한 즉석떡볶이 프랜차이즈가 등장하면서 다시 불게 됩니다. 2014년 고려대 앞에 1호점을 런칭한 두끼는 무한리필 뷔페형 콘셉트와 즉석떡볶이로 차별화에 성공해 10~20대에게 인기를 얻었죠.
두끼의 창업자인 김관훈 대표는 현대오일뱅크에서 7년간 근무했지만 일에 의욕이 없이 마지못해 다니고 있었어요. 그러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민하다 떠올린 것이 떡볶이였죠. 회사에 다니면서 네이버 카페 ‘떡볶이의 모든 것’을 운영하기도 했는데요. 2011년 7월 개설 이후 카페 회원들과 전국 떡볶이 맛집 3,000여 곳을 찾아다녔죠.
김관훈 대표는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준비하기 위해 요리학원을 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꼬마가 핫바를 먹는 것을 보고 당시 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던 부산의 삼진어묵으로 가서 어묵 핫바에 대한 투자 설명회를 하죠. 삼진어묵 측에서 그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면서 떡볶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밑천을 마련하게 되었어요.
두끼는 처음부터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사업을 시작해서 2015년부터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진행해 왔는데요. 현재 베트남, 태국, 대만, 싱가포르 등 아시아를 중심으로 다양한 국가에 가맹점을 두고 있죠.
마무리하며
떡볶이는 장사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투영되는 것 같습니다. 기름 떡볶이에는 김정연 할머니의 인정 넘치는 모습, 신당동 즉석 떡볶이에는 마복림 할머니의 장난스러운 모습이 생각나요. 어쩌면 떡볶이는 가게마다 맛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
첫댓글 우리집 오는 길에도 마을버스 기다리는 목 좋은 길목에 위치한 아딸 떡볶이 집이라서 오는 길에 가끔 들러서 순대나 떡볶이 사오던 아딸이 어느날 감탄으로 간판이 바뀌어서 "엥~ 뭐지?"한적이 있었네요, 뭐 제가 분식을 좋아하는건 아니기에 그런가보다 하며 지나치곤 했는데, 이상하게 또 주인은 그대로이고 해서 그냥 궁금하긴 했었는데....... 이런건 유툽 등에서 또 자세히 다뤄놓곤 하네요.
에휴~~~~~ 돈이 뭔지? 인륜이고 뭐고 다 작살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