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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4.19는 무엇인가. . 信天함석헌
1980년 4월 10일 CBS공개강좌에서 하신 말씀
「오늘」의 세계, 「우리」의 문제
「오늘 우리에게 4.19는 무엇인가 ? 」라고 했읍니다. 그럼 오늘이라는 말부터 생각하기로 해봅니다.「오늘」은 무엇인가? 「오늘」은 어떤 날인가? 여러 말하려면 한정없읍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한다면 지금은 새 시대에 한번 새로운 출발을 해보자는 오늘입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의 의견이 아니라 역사 자체가 그렇게 명령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알아듣기는 다 알아듣는 말입니다.
그럼 새 역사창조라 합시다. 그러려면 지혜도 있어야겠고, 능력도 있어야겠고, 용기도 있어야겠고 더구나 철저한 확신이 있어야 할껍니다. 그러면 새 시대답게 새 출발한 다는 건 뭐냐? 그것을 분석 해보면 둘로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이 민주주의를 어떻게든지 발전시켜야 하는 것, 민주회복을 시켜가지고 그것을 이 앞으로 키워가야하는 것이 하나 있고, 그것을 만일 우리 안의 일이라 한다면 거기 대해 또 바깥으로 할것이 있읍니다. 우리가 우리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세계사적으로 설명이 돼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큰 의미에서 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민주주의 발전 그런 정도만이 아니고 새로운 국가관을 가지도록 해야됩니다. 오늘은 그 문제 를 토론하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우리만 아니라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도 지금 있는 국가는 낡아버린 국가라고 그럽니다. 인간의 요구를 맞춰줄 수가 없어. 지금까지는 그 국가들이 있어서 인간이 인간답게 발전해 오는 데 도움이 됐지만, 이 앞으로는 인간자체가 국가보다는 훨씬 더 자랐어. 쉽게 말해서 옛날에는 국가가 지상이고, 국민은 국가를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해 도 사람들이 다 좋게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와는 반대로 국가야 말로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국가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 합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동의하실 줄 아는데 그렇게 볼 때에는 모든 것이 매우 많이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국가관부터가 새로와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따 위 지금있는 국가가 아닌, 나라를 위해서 국민은 있다, 그 국가를 위해서는 희생이 돼도 좋다, 그것이 아주 명예다, 최고의 도덕이다, 그런 따위 국가는 이제 이 이상 더 두어둘 수 없읍니다. 이제는 인간이 휠씰 자랐으므로 , 국가야말로 국민을 위해서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새로운 국가관이 생겨나기 전에는, 그러고,우리가 그런 국가를 실현하기 전에는 인류의 앞이 암담해. 그러므로 우리가 나라의,앞날을 생각할 때 는 인류의 장래를 위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해 나갈 수 있는 하나의 모델케이스로서의 국가를 시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 역사적 현재의 우리에게 명령하는 명령의 말씀이라 그 말입니다.
그다음은 「우리 」라면 누군가 ? 그러면 「우리 」는 아주 문제가 있어요. 우리는 다 같이 「우리 」 그러지만 우리가 다 하나로 돼있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나처럼 나이 좀 많은 사람은 잘 알껍니다. 일제시대는 일본 밑에 정치적인 주권을 못가지고 식민지노릇을 해도 적어도 민족으로서는 「우리」라고 하는 말을 별신경을 쓰지 않고해도 들어맞았읍니다. 피차에 그랬읍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우리」라는 말은 그렇지만 실지로 일체감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읍니다. 잘아는대로 불신사회라고, 경제적인 의미에서 불신만이 아니라, 국민과 정부안의 불신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합의되는 경우가 아주 드물게 불신사회, 아주 혼란한 사회라고 그러는 수도 있고 타락된 사회라고 그러기도 하고 어쨌건 「우리」라고 하는 말은 있는데 같은 일체감을 가지는 「우리」라고는 그러기가 어렵게 돼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가지고 지금 우리에게 당면해 있는 역사적 현재의 명령에 그걸 들어서 우리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냐 그러면 도저히 그럭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는데가 이제 문제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한 입장입니다. 더 설명을 했으면 좋겠지만 그건 그만하고, 그런 시점에서 그러한 우리의 처지로서 답답한게 물론 많은데, 4. 19는 그럼 우리에게 어떤 관계가 되냐? 어떤 의미를 가지냐? 어떻게 볼 것이냐? 그렇게 한번 생각을 해보기로 합니다.
4. 19는 지성의 외침
4.19는 우리가 지나온 역사적 사건인데, 거기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고 찾아볼 때에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합시다. 거기서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점은 어떤 점이냐? 또 우리에게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거울 삼아서 경계할 점, 즉 잘못된 점은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4. 19의 장점은 무엇일까? 4.19 의 잘했다는 점은 무밋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지성의 공명정대한 외침입니다. 지성은 인간이 자기와 자기가 사는 자연적, 역사적, 문화적 환경을 옳바르게 이해하여서 개체와 전체를 다 옳바른 길로 나갈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4.19로 인해서 우리는 해방이후 어느 때 보다도 더 자유와 平等과 정의와 사랑의 원리를 분명히 의식하게 됐읍니다. 독재자의 타도라는 외면에 나타난 민주주의적 승리의 결과도 결과지만 이러한 진리의 깨달음이야 말로 큰 소득입니다.
그런데 그 대신에 약점은 뭐냐 ? 흔히 듣는 말이, 4.19는성공이냐? 실패냐? 그렇지만, 천하의 모든 일이 완전한 성공도 없고, 완전한 실패도 없읍니다. 대체로 말해서 우리 헌법의 전문에 들리만름 하는 4.19니까 물론 우리가 기념할만한 좋은 뜻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또 지금 우리로서 생각을 한면 미흡한 점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건 아마 이때까지 누가 생각을 해보셨는지 모르겠읍니다마는, 그래도 4.19의 결점이 있다면 뭘까하고 생각도 해보셔야 할껍니다. 쉽게 누구에게 물으려 말고 스스로 조용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해보는 사람입니다. 4.19에는 없는 게 있어요 우리가 4. 19를 말할 때는 자연히 3.1운동을 말하게 되는데, 물론 3. 1운동없이는 4. 19 없었을 것이고, 4.19는 3. 1정신의 계승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4. 19의 다른 점도 있어요. 얼핏보기에 두드러지게 누구든지 알기는, 3. 1운동은 성립이 될 때부터 당초부터 종교적인 배경이 아주 강했읍니다. 기독교 불교 천도교 세 종교가 단합이 돼서 하나로 돼서 그 운동이 됐다는 점입니다. 만일 그렇게 못됐다면 그 운동이 그렇게 힘있게 못됐을 것입니다. 그린 점에서 그건 옳은 판단입니다.
그런데 4. 19에서 보면 어떻냐? 그러나 거기는 종교적인 배경이 전연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매우 박약합니다. 거기옌 종교 소리도 없고, 기독교라고 하는 이름하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고, 불교라고하는 이름 하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고, 천도교 소리는 물론 없읍니다. 그러니까 그런 점이, 내가 이 앞에 생각할게 있기 때문에 이런 걸 먼저 말해 둡니다마는, 종교적인 확신면에서 보면 매우 많이 빈약한 점이 있다, 그랬기 때문에 그점에서는 실패했다, 물론 4.19를 4.19만으로 보면 이때까지 내가 말할 때도, 4. 19는 4.19대로 그대로 좋지 뭐 거기 실패란 말 할 필요없읍니다. 그런 말도 한 일이 있읍니다. 그대로 자기 할 사명을 했다 그럴 수 있읍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오는 5. 16이라고 하는 사건이 4.19는 그대로 됐다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읍니다. 불과 8개월만에 5.16이 터졌는데, 그건 아주 4.19하고는 서로 반대되는생각에서 나왔읍니다. 그럼 그건 왜 그렇게 됐나? 그렇게 힘찬 지성의 부르짖음이 왜 더욱 더 진전되지 못하오 얼마 못가고 군정 세력에 밀려 깨지고 말았던가? 이것은 우리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럼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나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4.19가 4.19로만 그쳤고 그다음에는 불과 8개월만에 온 것은 굳센 종교적 신념의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4. 19가 민중에게 자유·평등의 정신을 고조해준 것은 우리는 잘 알고 있고, 그리고 독재정치를 무너친 것을 큰 성공으로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것이 역사적인 소기의 목적을 다했다고는 할 수가 없읍니다. 그 목적은, 분명히 표방은 되지 않았지만,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千百년묵은 역사적 고질인 봉건주의의 껍질을 완전히 부숴내는 일이었읍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했읍니다. 그 의미에서는 실패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지성은 아주 강한 지성의 부르짖음이었지만 그 뒤에 개인적 이해관계를 초월해서 역사의 명령을 들어내는 종교적 감동의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에 이상하는 바를 실현은 못하고 그저 외침으로만 끝이난 것이 아닐까? 그랬기 때문에 그다음에 오는 5. 16을 설명할 때에는 그것과 대조해서만 이해가 될 수 있읍니다. 지성이 역사발전에서 사회생활에서 어떻게 중요하다고 하는 겻을 스스로 힘있게 외친 것이 4.19인데, 어째서 5. 16이 나타났을까? 그래서 그것이 아주 20년이나 가까운 세월을 있었는데 그 지성이 왜 아뭇소리도 못하고 있었을까? 이것은 현대인으로서 문제 아닐 수가 없읍니다.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 있지 않을까? 더구나 이 앞의 운명을 우리가 생각을 해 갈 때에 과연 이렇게 당연한 것처럼 내세우는, 지금와서도 그걸 될수만 있으면 계승을 해보면 하는 이런 따위 망상을 하는 사람이 제법 있으리만큼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점에 우리는 이 시점에서는 단단히 깊이 생각하는 것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거기 대한 나의 대답의 요점이 그것입니다. 종교적인 신념이 뒤에 뒷받침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다고 할 것 아닐까?
본능.지성.영성의 인간
그런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인성이라 할까 인격의 구조라 할까 그것을 조금 내 나름대로의 설명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사람이라, 인간성을 가졌다, 인격을 가졌다. 그렇게 말하지만 그것을 분석을 해서 그 구조를 말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 삼층으로 됐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반드시 제 말도 아닙니다. 다른이들이 이미 많이 말씀한 것이 있으므로 다 잘 아실줄 압니다만, 오늘은 여기서 혹 처음으로 만나시는 이가 있는가 해서 그 점을 조금 설명을 하렵니다. 그 구조를 생각하는 것이 4. 19와 5. 16을 대조를 시켜서 역사의 앞에 나갈 것을 더듬어 보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삼층으로 됐다는건 건물의 3층집과 같은 데 밑층은 지하실이고 땅밑에 들어가 있고, 지상에 두 층이 있어요. 지하실은 그것을 이름을 붙인다면 본능이라 그래도 좋고, 동물성이라 그래도 좋고, 지성에 대해서 지(知)는 물론 이성이라, 지성이라 하는·지성 (intelligence)인데, 그거는 지상에 있는거야요.지상 1층이 지성이라면, 그 밑에는 사람 누구든지 다 다른 어느 동물에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물성을 가지고 있어. 식물까지도 합해 넣어도 좋지만 알기쉽게 하느라고 동물성이라고 그랬읍니다. 그것이 밑바닥에 있어요. 거기서 되는 일은 생각을 해가지고 되든 것이 아니라 거의 자동적으로 혹은 잠재의식적이라고 그럴까요 ? 또는 본능적이라고 그럴까요. 우리 사람에서는 본능적이라고 심리에서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 층이 있읍니다. 생리적인 것, 심러적인 것이 그 속에 많이 속해 있읍니다. 그것은 생명의 기본되는 기능입니다. 그리고 맨 윗층은 지성에 대해서 정신층이라고 해도 좋고, 영성이라고 하는 스피릿 (spirit)이라, 영혼(soul)이라 하는 층입니다. 사람은 나기는 물질에서 나서 동물과 공통되는 살림을 하지만, 자라서는 지성을 발휘하는 것이고, 그 지성을 토대로 그위에 영그러운 층에까지 가는 것이 사람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영성이 전연없는 사람은 없읍니다. 인격구조는 그렇게 돼있읍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또 나만 아니라, 이때까지 살아왔던 사람들 중에 가장 현명하게 가르쳐 주셨고 또 가장 깊히 체험을 한 그렇게 보이는 분들의 가르침이 그점에서는 거의 다 일치하는 겁니다.
마지막에 있는 영성이라고 하는, 혹은 정신이라고 하는 그 층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 없이는 사람이 아니니까 나타나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야말로 사람의 사람되는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한가운데 있는 이성 혹은 지성이라는 2층입니다. 사람이 사람된 점은 여기있읍니다. 영성은 잘되지 않기 때문에 거기 대해선 분명하게 체험을 못하고 마는 사람도 있지만, 누구나 다 아는 점은 사람인 다음에는 다 이성을 가지고 있다 하는 것 사실입니다. 그것이 지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나와있는 건물입니다. 밑에 있는 동물성은, 우리 사는 집이 지하실을 기초로 삼고야 1층이 있는 모양으로, 그것이 위의 두층의 기초가 됩니다. 그러니까 없을 수도 없읍니다. 하나, 첫단계 지하층에 있는 것이 기본적인 것이 될지언정 목적일 수는 없읍니다. 기본적이라고 하는 점에서 중요하기는 참 중요하지만, 그렇지만 거기 그쳐서는 사람이라할 수가 없고 적어도 지성이 있어야 합니다. 지성의 발달이 있어야 사람이지. 그러나 지성도 지성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성도 결국은 마지막에 영성층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되는 것입니다. 지성까지는 시간 공간의 차원에 있읍니다마는, 초월하는 그런 차원은 거기 올라가서야 있다고 할껀데, 그런데까지 있어야 사람이라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 층으로 돼있다는 것만 말하자는 것 아니라, 사실은 그 사이의 관계가 대단히 중요해서 그것을 말씀하자는 것입니다. 그건 아마 다르게 보는 사람도 있을런지 몰라요. 그렇지만 나는 내 확신을 말할 뿐입니다. 사람으로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왜 사람으로서 그런 것도 모르냐? 그럴 때 말하는 모양으로, 주로 지성을 가르치고 하는 말인데, 그 지성이 중요한거예요, 하지만 아주 이상하게도 인간은 지성만으로는 지성도 유지하지 못하고 맙니다. 지성을 강조하는 나머지에 정신 운운하는건 실험으로 해서 알 수도 없고, 상상으로는 있을런지 모르지만 그건 우리는 모른다, 그건 일부 믿는 사람에게는 있지만 오래 면지않는 사람으로서는 그런 것 없이도 산다, 혹 그런말을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민족이 나 국가나 단체적으로도 그렇고, 지성만을 인간이라고 그렇게 믿는 사람은 결국은 지성에도 머물러있지 못하고 떨어져 내려가게 마련입니다. 실지로 보세요. 자기 친구 중에서 또 어느 민족 중에서 지금만 아니라 옛날 역사에서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이 수긍이 되실 것입니다. 왜 그러냐? 믿음없는 지성은 동물성의 종이 되고 말거나, 그렇지 않으면 죽고 맙니다. 밑에 있는 동물층이 지극히 강한 힘을 가지고, 끈질긴 힘을 가지고 아래로 자꾸 내려 끌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러해서만 그층이 성립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주 기본적인 것인데, 쉽게 말해서 먹지 않고 입지 않고 혹은 자식을 낳지 않고그렇게 사는 인간은 없다, 그러니까 아주 기본적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걸 거부하고는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지 종교생활 해보시는 분들은 알겠지만, 영성을 믿고 위로위로 올라 갈려고 하면 가장 문제되는 것이 밑층입니다. 그것이 일생의 문제가 되는 데 밑층에서 강한 힘으로 끌어내리려고 하는 것만은 사실이기 때문에, 윗층을 모르고 윗층의 존재를 인정 아니하는 사람들은 「우리는 그런 것을 모른다」 그것은 하나의 시나 상상의 세계에서만 있는거지 우리는 모른다, 인간 이성이면 만족이다 합니다. 그리고 현대문명은 대체로 그런 인생관 속에서 있는 겁니다. 옛날의 인생관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 세 층을 인정했었는데, 근래 오다가 철학에서는 실증주의가 강해지고 한펀으로는 과학이 강해져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자연과의 관계를 거의 잊어버리리 만큼되고, 인위적인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기 시작을 하면서부터, 그만 위에 층은 하나의 꿈같은 거라고해서 부정을 해버리고, 사람인 다음에는 이성이 주장이니까 이성이면 만족이다, 그러고 그런 인생관을 주장 해왔읍니다. 그랬기 때문에 시를 써도 종교믿지 않고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소설을 써도 종교믿지 않고도 얼마든지 훌륭한 작품을 낼 수있다, 조각을 해도 음악을 해도 미술을 해도 얼마든지 훌륭한 예술품이 나올 수 있다, 이렇게 대언장어하게 됐습니다. 대언장어하게 돼서 수백년 내려온 결과는 어떻게 됐냐 그러면 오늘날의 이 꼴입니다.
종교적 신념이 부족한 4.19
이제 여길 오는데 같이 온 사람이 있었읍니다마는, 미 8군이 와있는 거기로 잘 왔다갔다 하고 또 이 명동거리를 잘 왔다갔다 하는 사람인데, 내가 수십년 전인데 옛날 YMCA 없어진 강당에서 일요강좌를 하면서 했던 말을 다시 회상을 시켜주었읍니다.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읍니다. "그저 동대문에서 남대문이 환하게 보이리만큼 이놈의 서울이 확 타버리면 시원하겠다", 답답한 생각에 그런 말한 일이 있었는데, 6.25 전쟁을 지내고 나서 와보니까 정맡 그말대로 동대문에서 남대문까지 환하게 다 타버렸읍니다. 그래 내 말이 꼭 들어 맞을만한 능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쩌다 사람은 입이 가볍게 그런 저주의 말을 하기는 두렵다. 그대신에 이성은 이성다울라고 하면 그 위의 세계를 인정을 해서 사람은 이성적인 것만이 아니라, 이성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알기는 아는 것 같지만 인간문제가 해결이 될려면 거기 층에 올라가야만 된다, 그렇게 믿는 그사람에게는 제 이성을 그대로만 가지고 있는 것 아니라 더욱 더 발전을 시켜서 갑니다. 옛날 문명은 본래 문명이 올 때는 그러한 인생관, 세계관 속에서 자라온 겁니다.
지금도, 큰 나무통을 잘라놔도 한동안 뿌리가 없어도 잎사귀가 날 수 있는 모양으로, 종교를 전연 쓸데 없는 거라고, 정신의 세계는 허무한거라하며 배격해버리고, 전에 저축했던 정신의 유산 때문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만이 확실한 세게라 하는, 이 인생관속에서도 얼만동안 유지돼가는 문명입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 와서차차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오늘 우리 눈으로 보는 현실입니다. 이래도 좋다 그런다면 문제없읍니다. 그런다면 나라 소리 할 필요도 없고, 민주주의니 뭐니 할 필요도 없읍니다. 가치니 의미니하는 것이다 성립이 되지 않읍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서 밝히고 싶은것은, 아주 역리적인 말같지만, 이성이 이성 이상을 인정하고 그리로 올라 갈 생각을 하면 지켜갈 수도 있고 발전시켜 갈 수도 있지만, 이성만으로 만족하고 그 이상을 인정치 않으면 그 이성조차도 못지니고 짐승의 세계로 떨어지는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만은 좀 시간을 두고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와 비록 반대하고 싶더라도 생각을 깊이 하신 다음에 반대하시도록, 그것만은 주의해 들어주셨으면 하는 말씀입니다.
4.19는 공명정대한 인간적인 부르짖음이었읍니다. 그럼, 그 지성을 길러온건 무엇인가? 그러면 다른 것도 있지만 여기 나이든 분들은 다 알터이니까 그것만은 물론 아니지만 누구든지 다 알기쉬운 것이 「사상계」 잡지 속에서 자라난,「사상계」세례를 안받은 지성이 아마 없을 껍니다. 그렇게해서 자라나 그 덕택에 그나마 4. 19라도 있었는데, 종교적 신념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 종교라는 거는 무슨, 박태선의 종교라든지, 문선명의 증교라든지, 무슨 그따위 종교를 말하는건 아닙니다. 도덕적인 종교를 내가 말하는 겁니다. 도덕적인 종교를 부정하고는 그거는, 세세하게 말하려면 한이 없읍니다. 누구나 보통상식으로 인정하는 고등종교, 점잖은 종교라고 하는, 도덕적인 원리를 골자로하는 그 종교를 배경으로 하고, 그런데서 자라난 사람들이니까 3. 1운동에서 보는것 같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순전한 비폭력이 나올 수 있었어요. 비록력의 운동을 했으면서도, 물론 당장 보기에 독립을 쟁취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상당한 부분에서 겉으로 실패된 것 같지만 상당한 성과를 올린 겁니 다.
그런데 4. 19는 왜 외침은 상당히 강하고 그랬는데도 그 목적를 달성치못했냐 그러면 그렇게 설명할 수 밖에 다른 길이 없을 것입니다. 지성으로서는 상당히 힘있게 부르짖었지만 뒤에 종교적인 뒷받침이 길지 못해서, 말하자면 샘이 그다지 깊지 못해서 그랬다는 말입니다. 자유 · 평등이라고 이자 그랬지만 사실 자유 · 평등이라는 이념은 본래가 나오기를 종교에서 나온 겁니다. 한마디 이렇게 넘어 갈 수밖에 없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가 말하는대로 종교적인 신념없이 제대로 발달해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부득이 결론으로 나올 수 있읍니다. 그러니 자유 · 평등의 부르짖음은 종교속에서 나왔는데, 불란서 혁명에 자유 ·평등 ·사랑이라는 거 다알지 않아요 ? 허지만 부르짖음은 있으면서도 그다음 실현은 못됐읍니다. 완전히 못됐어, 그 못되는 까닭이 어디있느냐 그러면, 나오기는 종교 속에서 나왔어도, 모든 사람이다 종교적인 신념 속에서, 적어도 이 민중전체를 생각할 때에 그러하냐 그러면 그렇지 못하니까, 그때문에 그건 안된 거라고 그렇게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결론으로 이따가 시간이 있겠는지 없겠는지 모르겠읍니다마는, 그리니까 자연히 마지막에 요점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르침이, 4. 19로 인해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주어진 자유요 평등이요 하는 것이 실현이 되려면·마지막에 하나 있는 그 「사랑」이 없이는 안됩니다. 평등은 자유를 배격하고 자유는 평등을 배격하기 때문에 자유로웁다고 하면 평등이 안되고, 평등할려면 자유가 안되니까, 그 문제가 해결이 될려면 이렇게 저기걸린 十字架처럼 요 둘의 가로와 세로가 하나가 될려면 사랑에 의해서만 실현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5. 16이 나오기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 그러면 4.19혁명이 있고 그런 다음 한동안 학생들이 아주 흥분했어요. 그래서 무슨소리가 났냐 그러면 「우리 이북 좀 가볼랍니다」그랬어. 기성층들은 걱정을해서 말고 그러면 「왜 우리 이북가서 좀 아리랑이라도 같이 불러보면 뭣이 나오지 않겠읍니까?」 그런 말한다고해서 분개한사람이 누구냐 군인들입니다. 군인들이 분개한 것은또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목숨을 내던지고 싸운 싸움인데, 가서 아리랑이라도 불러본다는게 뭐냐?」 그렇게 말하면 여러분도 내가 군인이라해도 "그러겠다" 수긍이 될 수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5. 16을 생각을 할 때에는 그런 점을 좀 생각할 필요가 있읍니다. 나오기는 물론 잘못나온 오발탄이지만, 총을 쏘게 되는 데는그럴만한 이유도 있었다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학생들의 잘못도 있읍니다. 그래서 나도 직접 물어봤어요. 「너 간다면 무슨 안이라도 있느냐 아무 것도 없읍니다. 그저 가면 뭔가가 되지 않겠읍니까?」했읍니다. 그렇게 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래서 나는「다른 일에서는 시행착오라고 해서 하다가 실수해도 도움이 되지않나 그럴 수가 있지만, 한 사람도 아니고 민족의 목숨이 관계되는 데 그걸 시험해 보다가 안되면 그만두고, 그럴수 어디있냐?」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마는 그때 그러한 말을 단적으로 들어 설명을 합니다마는, 5.16을 일으킨 사람들도 덮어놓고 다 정신빠진 놈이라고 그렇게만 보시지랄고, 그들이 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다 하고 생긱을 해보아야 합니다. 4.19라고 그리고 자유·평등을 부르짖은 것은 좋지만, 그 생각에 넘쳐서 이북가서 아리랑이라도 서로 불러보면 뭣이 되지 않겠나? 그런식의 생각가지고는 역사가 돼 갈 수가 없읍니다. 왜 ? 자기네는 총칼을 들고나가 싸와봤으니까. 목숨을 잃으면서 불구자가 되면서 해봤기 때문에 그런 말 했을 것이예요. 그러니까 거기에 5. 16이 말할 발언권이 거기 있습니다.
장면정부 이래가지고는 안되겠다, 쳐부수고 했다면 당연하지만, 밖에서 외적이 들어온 건 아직 아니었읍니다. 또 그때 혁명 공약한데도 한 마디도 안나와 있읍니다. 내세운 것이 뭐냐 그러면 부패했으니까 이걸 이제 정리를 하고 일단 마치면 우리 돌아가겠읍니다. 그랬어. 나는 그대로 믿어봤어. 그랬더니 하나도 그대로 실현이 안됐어. 그러니까 내가 퍽 동정을 한대도 생존권의 주장을 했다면 그릴 수가 있지만, 생존만 하는 것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생존을 내버리면서까지도 인간다운 것을 주장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육신으로만 사는게 인간이 아니고 정신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살아도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살아야하지만, 죽기까지도 인간답게 죽지 않고는 인간노룻을 못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생존만 해가지고는 인간이 덮어놓고 보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툭하면 그래도 먹을 것이 많아지지 않았오? 그렇지만그말 가지고는 자기들의 그것을 정당화시킬 수가 없어요. 인간인 다음에는, 사람은 아무래도 고상한, 영원무한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사람이니까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인간이하로 떨처질 수 밖에 없어.
지성이 부족한 민중운동
그러면 조금 더 설명을 한다면 4.19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큰 교훈은 국가는 지성없이는 안된다,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성이다, 더구나 근대국가는 그렇다, 우리가 옛날 전시대를 탈피를 하는 데는 지성의 발달없이는 될수 없었을 껍니다. 지금 사람들은 이미 그후에 났으니까 그걸 모를껍니다마는, 나는 봉건시대도 살아본 사람입니다. 봉건시대의 그 모순적인, 참혹한 것을 탈피하는데 지성이 어떻게 힘이 됐다고 하는건 잘 알수 있어요. 내가 실례를 든다면 우리나라의 역사에 지성이 부족했던고로 나라 생각은 한다면서 실패했던 예를 든다면 대원군을 하나 들수가 있읍니다. 대원군은 대단히 열심도 있고 정치적인 수완은 있담 있다고 그럴 수 있어요. 그 영감에게 결점이 뭐고하니 지식이 도무지 우물 안에 개구리야. 자기가 잘못해 그랬다고만 할 수 없지만, 그때 우리 나라 사람이면 어느 의미론 불가피라고 그럴 수 있겠지만, 식견이 아주 좁아, 세상이 뭔지 몰랐읍니다. 불란서 사람들이 물론 야심 가지고 탐색하러 왔지만, 그것을 우리가 다 퇴치했다고 그리고 큰 자랑처럼 그랬읍니다. 그때 말로 우리가 "우물 안에 개구리 "라고 그랬어. 그건 지성의 부족으로 온겁니다. 또 홍경래도 서북에 나서 역사적으론 상놈이라고 차별대우 받아오던 관서 관북사람을 위해서 일어난 혁명가입니다. 홍경래 왜 실패했나 그러면, 홍경래 재주도 있고 그랬던 사람이지만, 그것도 실패했던 주 원인을 들면 뭔고하니 지성의 부족입니다. 세상이 뭔지 몰라. 열심은 있었지마는, 심층에 파고들어가서 민중이 뭔지 그 생각은 아직도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그게 실패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다음엔 동학을 연구하는 사람한테는 내가 욕을 먹을런지 몰라요 하지만 동학도 그중에 어느 정도로는 그런거 있어요. 동학은 어느 정도 종교의 배경띤 았기는 있지만 그것이 크게 성공을 못하고 역사 위에서 공헌이 있담 있지요. 성공이람 성공이라 하는 점도 있기는 있지만 그래도 그 기약했던대로 목적에 못 이른건 뭐고하니 역시 그것도 식견의 부족이라고 그럴 수가 있을겁니다. 녹두장군의 훌륭한 건 우리가 다 알지만, 하나만 가지고 어떻게 해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예요.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이따가 차차 말이 게까지 될런지 모르겠읍니다마는, 내가 요새 군군 군소리를 하는데, 사실은 군이 문제가 아닙니다. 군이야 나라를 위해 군이 중요한 줄을 몰라 그런것도 아니고, 군을 반대해서도 아닙니다마는, 답답한거는 뭔고하니 군대에 들어갈 때 "이유없다" 이유없다가 표어랍니다. 이유없는 일이라도 예 예 무조건 복종하게 돼야 됐다, 그리고 통과를 시키니까 그건 왜그러냐 그러면 전쟁이라는게 본래 근본인 부조리입니다. 어느 나라의 군대도 다 그렇습니다.
실패된 예를 든다면 중국에 일어났던 홍수전이 태평천국이라고 그러고 일어났었지만 그게 왜 중국의 옳은 혁명을 못하고 말았나 ? 그러면 그놈의 종교가 그랬기 때문에 실패한 겁니다. 동학에서도 종교는 종교대로 많이 반성할 점이 있지 않은가?(시간이 없는 걸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사회개혁으로까지 갔어야 한다.
그런 불건전한 지성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지성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또 종교를 가지긴 가지면서도 불건전해서 신도의 힘을 많이 빌리면서도 건전치 못한 종교에서 공동된 점이 뭐냐 그러면, 그런 사람 일수록 폭력에 의지합니다. 요새는 그저 알기쉽게 그 종교가 정말 참으로 믿을만한 종교냐? 아니냐? 여러가지 판단이 있을 겁니다마는 쉽게 가령 예를 든다면 폭력단체에 의존하는 점이 있냐? 없냐? 아주공공연하게 실지 지금은 당장 쓰지않더라도 그걸 이론으로라도 인정하는 그런 힘에 가담해서, 그것과 손을 잡는 도가 많으면 많을수록 잘못된 종교로 아십시오 ! 종교는 우리가 참된, 고등한 종교라고 하는데서는 다 용납이 아니되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왔던걸 다시 요약을 해서 말씀을 드린다면, 좋은 점에서 우리가 본받을 것은 지성의 부르짖음이 있는지, 아직도 봉건제도가 지금도 완전히 청산이 됐다고 할 수가 없읍니다. 그러니까 그걸 그러는데서도 그렇고 그점은 많이 참고해야 됩니다.
그러나 4.19에서 지성적인 거기 눈이 떠서, 사회정의로 자유라든지 평등이라든지 거기 눈을 떠서, 그걸 힘있게 부르짖은 건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자신도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내가 정당한 판단을 하는지 잘모르겠읍니다마는, 지금까지 아는 바로는 왜 그점에만 그쳤냐 그러면 당시의 정치문제를 너무 그만 지나쳐 크게봐서 그런거 아닌가? 그당시 정치문제라는거 독재인데, 이승만 대통령이 영구집권하려고하기 때문에 그랬는데, 그 정치적인 문제를 너무 크게 보기때문에 독재를 타도한다고 하는 데만 정력을 써 버렸지, 사회개혁이라고 하는 면으로 발전은 못했다 그말입 니 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4. 19는 응당 사회개혁으로, 정치개혁만이 아니라 사회개혁으로 발전했어야 옳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됐 던것은 그저 정치적인 독재자를 타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혁명으로 갔어야 하는 겁니다. 사회혁명없이 독재자를 근절시킬 수도 없읍니다.그러니까 그만 그다음에 자연히 5.16을 불러일으켰다, 그말입니다. 그점은 옆에 있던 일본하고 자주 비교를 해봤읍니다. 일본학생들의 운동을 보면 상당히 사회운동인데 결코 정치중심이 아닙니다. 어찌 우리나라 학생운동은 정치중심적만 일까? 그거는 이 38선으로 오는 정치상황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자연히 거기 그만시선을 빼앗기면서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고 넘겨봐주기도 줬읍니다마는, 우리가 기대를 한다면 모처럼 깨어 일어나는 지성일수록 문제의 뿌리가 사회에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그래서 사회적인 혁명으로까지 이끌어 가자고 하는 그 노럭을 했어야 합니다. 그일을 2,3일에 끝내고 말고 정치인에게 넘겨준 다음 이젠 "당신들이 하시오." 좀 더 깊히 들어갔더라면 그렇게만은 아마 안됐을 것입니다.
그때 당시 4. 19에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 과한지도 모르겠읍니다마는, 내가 보는데는 그렇게 보는 겁니다.
종교 개혁해야 된다
그러면 4.19의 그 교훈을 반드시 들어야 한다, 그건 잊지 말고 들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을 하면 적어도 이번에 되는 헌법에 4.19가 빠져서는 안된다. 그런 것을 그렇게 이루려면 둘째번에 자연히 오는 것이 종교개혁해야 된다, 종교라는건 하나님에게 대해서 충성하는 건데,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히 절조를지키겠읍니다. 그거 긴데 말이야. 다 붙어먹었어. 야합했어. 안 그런 종교단체가 몇이나 있을까? 그건 피차 우리가, 엄정하게 따지면 나도 그랬는지 모르겠소마는, 하여간 내가 그 명부 속에 든다하더라도 그건 해봐야겠읍니다. 죽이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적어도 이시기에 공정한 말을 한다면 종교개혁은 돼야한다, 왜 그런고하니 이정도 가지고는못해. 왜 ? 사람이 정조를 잃은 다음에는, 하기야 목욕했으면 그만이 그러겠지만, 문제가 몸에 어디 있겠어요? 정신에 있는데, 양심에 흠이 갔던 것은 물로 씻어서는 안없어진다 그말입니다. 잊어 버릴 려고 약으로 먹어서는 안없어진다, 그말입니다. 세상에 눌르고 눌러도 따끔따끔하는건 양심입니다. 아무리 잊어버릴려고 그래도 따끔따끔. 그거는 나도 지나봐서 알고, 여러분도 지나봐. 10년이 가고 20년이 가도 없어 지는 법이 없어. 어느 때 가서도 솔직하게 "내가 죄를 범했오, 나는 죄인입니다" 그렇게하고야 용서를 받아도 받고 그런 겁니다. 마음에 양심에 낙인이 찍힌 다음에는 역사적 창조는 아예 안된다, 그말입니다.
한국민이 양심을 스스로 속여서 양심의 낙인이 찍혔어. 살기 위해그랬읍니다. 혹은 자제들을 교육을 시킬라니까 그랬읍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나도 버티었으면 좋을 걸"그럴꺼야(웃음) 하나님에게 대해서 죽어도 절조를 지키겠습니다. 다른 마음은 안품겠읍니다. 형상으로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절대 안하겠읍니다. 했던 사람들이 그 양심이 어디 있을까? 그러한 양심이 과연 영감을 주는 설교를 할 수 있을까? 그러한 종교 가 없는데 새 역사가 창조될 수 있을까? 나도 거기 걸린다 해도, 지옥에 간다해도이 말을 하고야 갈겁니다. 될 수 없을꺼야. 그러니까 이 용서 받을라면 천생 회개하지 않고는 안됩니다. 그야말로 참 회개, 그러니까 내가 좀교개혁이 돼야한다, 도매금으로해서 개중의 예외 더러 있겠지마는, 절개않잃은 종교가 도대체 없어. 적극적으로 나가서 붙어먹은건 말할 것도 없고. 할 수가 없어서 했다해도 마찬가지. 그러니까 그런 점은 4.19생각해서 4.19의 미흡한 점이 종교적인 확신이 없었던 데 있다, 결론을 내려서 그게합당하다 한다면, 자연히 거기 따라오는 것은 이 앞으로 종교는 새로와지지 않고는 안됩니다. 이 종교를 무시하고 똥누고 밑 안씻는다고 그러잖아요. 똥누고 밑안씻고는 못살지. 그런다면 하나님한테 대해서 그럭하고 밑을 안씻고 어디되겠어요? 양심을 제가 스스로 똥칠을 하고 그럭하고 될수가 있어요! 한 민족이 그럴 수 없을꺼야. 그러니까 이게 아주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 입 니 다·.
이제 남은 건 「사랑」뿐이다 .
이게 마지막 말입니다. 아까 자유 평등 그랬는데 자유 ·평등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에게 와서 가능성이 있다, 그말입니다 우리가 죄를 많이 범했으니만큼 거기서 튀쳐나와 여기서 다시 나는 것을 폭력으로는 안돼요. 그래 세계 역사에서 불란서 혁명에서 큰소리를 쳤읍니다. 자유는 미국놈이 어느 정도 실현해봤고, 평등은 소련놈이 어느 정도 실현해 해보느라 했읍니다. 그랬어도 다 잘안됐읍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것이 자유할려면 자유가 안되기 때문에 그 모순때문에 그러는 겁니다.그 모순된 걸 누가 과연 동시에 되게 할 수 있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면 자유가 곧 평등이고 평등이 곧 자유가 돼 .
그러니까 이제 ·남은 것이 인류역사에서 사랑만 완전히 써먹어보질못했어, 온전히는 누구든지 다 못썼지만 적어도 나라의 하나의 표어로 생각을 할 때 그랬는데, 그런거는 우리 따위를 시켜서 실현해 보실려고 아껴두신거 아닐까? 왜 ? 못생져서 못생겨서 잘못했으니 잘못했던 것이 죽여주십사하고 살려달라고 할 때에는 천상 사랑의 체험 없이 는 안될겁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어디서 오냐 그러면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체험없이는 사랑은 거짓말입니다. 참 사랑은 거기서만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 내가했던 첫말에 돌아가서 종교적인 깊은체험의 배경이 없이는 참혁명은 되기가 어렵다는 말 입니다.
4.19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그것입니다. 「지성은 어디까지든지 우리가 한 것처럼 높일 줄 알아야 한다. 지성을 이 앞으로 더발전시켜야 할꺼다. 우리가 잘못해서 절절히 느껴본 것과 마찬가지로 깊은 고등한 종교적인 체험없이는 얼마가 못가는 빈 말이더라」(박수)
1980년 4월 10일 CBS공개강좌에서 하신 말씀
씨알의소리 1980년 4월호 93호-(1980년 4월 10일 CBS공개강좌에서 하신 말씀)
저작집30; 12-213
전집20; 1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