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잡록-권벌
◈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충재이다.
중종 2년에 급제하여, 기묘년에 예조 참판을 제수받았는데, 시사가 많이 잘못됨을 보고 제공을 위하여 조제에 힘쓰다가, 파직되어 시골 고향으로 돌아갔다.
◈ 명종 때 문정왕후가 발을 드리고 섭정할 적에, 우찬성으로 들어와 벼슬하였는데, 유관ㆍ유인숙 등을 힘써 구해 주다가, 멀리 삭주로 귀양가서 죽었으며, 뒤에 명하여 좌의정을 증직하고 충정이라 시호하였다.
◈ 공이 어릴 때부터 재지가 특출하여 보통 아이와 달랐고, 글 뜻을 일찍 통달하여, 연구를 부르고 대구를 붙이는데 말뜻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병진년에 진사과에 합격하고, 홍치 갑자년에 연산군이 과거 보는 사람을 시험할 적에, 공의 책문이 합격되었으나, 답안 가운데에 처 자가 있었으므로, 계청하여 버렸다. 이전에 연산군이 중관 김처선의 곧은 간언에 노하여 그를 죽이고, 서울과 지방에 명하여 문자에 처ㆍ선 자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정덕 병인년에 중종이 즉위하였고, 이듬해 정묘년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고 천거되어 예문 검열이 되었다.
◈ 공이 성균관 사성이었는데, 어느 날 유시가 대성전의 들보 위에 맞았으므로, 성균관의 관원이 다 하옥되어, 곧도 그 가운데에 있었다. 마침 임금이 친히 인사 행정을 살필 때에 특별히 정원에 발탁하는 명이 있어서, 이조 판서 이장곤이 앞에 나와,
“권발이 승지가 되는 것은 여론에 매우 합당합니다.”
하였다. 유생의 전강을 마치자, 공이 나아가 이르기를,
“오늘 전강에 인을 논하였는데, 인이란 대가 끊어진 것을 일러 주는 것보다 더한 일이 없습니다.”
하고, 인해서 노산군은 후사를 세우지 않을 수 없다고 논하고, 우승지 김정국과 함께 말을 같이하여 지극히 논하여 이르기를,
“방번ㆍ방석이 모두 후사가 없자 우리 세종께서 광평대군 이여로 방번의 후사를 삼고 금성대군 이유로 방석의 후사를 삼으셨으며, 예전에 무왕이 무경을 세워서 상의 제사를 보존하였고, 우리나라에서 숭의전을 설치하여 고려의 제사를 끊어지지 않게 하셨는데, 하물며 노산군은 조종의 의친(임금의 집안)이고 연산군은 전하의 지친이온데 비록 무도하여 종묘에 죄를 얻었으나, 아주 끊고 제사하지 않는다면 전하의 인덕을 매우 손상시키오니, 어렵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끝내 거행되지 못하였다.
◈ 공이 도승지가 되어 내의제조를 예겸(벼슬자리에 따라 전례대로 겸직함)하였는데, 공이 아뢰기를,
“승지 박영이 의약에 밝으니 의원제조를 시키시기 바랍니다.”
하고, 사양하여 그 직위에 거하지 않았다.
◈ 북문의 화가 일어나자, 공을 그 당파라 하여 파면하여 시골 고향으로 돌아간 지 15년이 되었는데 가정 계사년에 중종이 명하여 거두어 서용하게 하고, 전직하여 한성 좌윤에 이르렀고, 무술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나갈 적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요사이 흉년으로 하여 유망(고장을 떠남)하는 백성이 자꾸 발생하니, 경은 편안하게 할 방책에 힘쓰라.”
하니, 공이,
“다스리는 근본은 조정에 있고, 조정의 근본은 임금의 한 마음에 있습니다. 근래 사치가 풍속을 이루었는데, 임금께서 절검을 숭상하시면 먼 곳도 또한 스스로 교화를 받아 흉년에 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 기해년에 개종계주청사로 중국 서울에 갔다가, 경자년 2월에 조칙을 받들고 돌아왔는데, 조칙에,
“그대의 나라가 여러 번 종계의 일로 와서 아뢰나, 조종에는 분명한 훈시가 있어서 고황제의 조훈(선조가 남긴 가르침)은, ‘만세토록 고치지 말라.’ 하셨으니, 뒷날 계속하여 편찬할 때의 너의 말을 자세히 주목할 것이니 별 염려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 임인년에 세종황제에게 궁비의 변고가 있었는데, 공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천자는 만승의 존엄인데, 하루아침에 뜻하지 않은 재앙이 천한 종에게서 일어났으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상국의 일이라 하여 심상하게 여기지 마소서.”
하여, 말이 매우 촉범(꺼리는데 저촉된다)되어서 동료 관원들이 모두 목을 움츠리고서 물러나왔다.
◈ 을사년 봄에 전라도의 경계로 지나는 배를 수사 양윤의가 쳐서 죽였으므로, 조정의 의론이 그것이 상국의 표류한 배일까 염려하여, 양윤의를 잡아다가 함부로 죽인 까닭을 조사하려 하는데 공이 급히 대궐에 들어가서,
“변경은 잠깐이라도 진을 비울 수 없으니, 대장을 차출하여 교대한 뒤에 잡아다가 조사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더니, 인종이 궁중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않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권발이 나라 일을 우려하여 아뢴 것이 군기에 바로 맞으니, 곧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 7월 1일에 인종이 돌아가고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한 지 8월 만에, 이기ㆍ정순붕ㆍ허자ㆍ임백령 등이 유관ㆍ윤임ㆍ유인숙 등의 죄를 아뢰려고 하였으나, 공과 의론이 맞지 않으니, 문정 왕후가 육경(6조 판서) 이상을 불러 들어와 의론하게 하였는데, 공이 아뢰기를,
“물의를 신이 듣지 못하여, 전일의 대ㆍ소윤의 설이 어디로부터 나왔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임금께서는 바로 인종의 적제이시고 이미 정당하게 즉위하셨는데, 어찌 다시 다른 염려가 있겠습니까. 이제 첫 정사할 시기에 인심을 얻기에 힘써 매사를 마땅히 대공지정하게 행하여야 합니다.”
하였으나, 이날 윤임은 멀리 귀양 가고 유관은 체직되고 유인숙은 파면되였다. 밀교를 내려 이르기를,
“윤임은 먼 섬으로 귀양보내고 두 유씨는 부처(가까운 지방으로 귀양 보내는 것)하라.”
하니, 공이 홀로 대궐에 들어가서,
“어린 임금께서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대신을 멀리 귀양보내면 사람들이 그 까닭을 헤아리지 못하오니, 임금께서는 마음을 편히 하고 살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정순붕이 상소하여 세 사람의 죄를 극단으로 말하여, 모두 반역죄로 죽이고, 논공행상할 때 공도 공신의 호를 내렸는데, 정순붕 등이 아뢰어 청하여 훈공을 삭제하였다.
◈ 정미년 가을에 정언각이 양재역의 벽에 쓴 글을 아뢰어서, 그 때문에 을사사화 때의 사람들에게 크게 죄를 더하였다. 공을 애초에 구례현에 부처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태천으로 옮겨 귀양보냈다. 진사 금원정이 공의 손을 잡고 통곡하니, 공이 웃으며,
“내가 자네를 대장부로 여겼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하는가.”
하고서, 아들 동보에게 글을 붙여 이르기를,
예전에 범충선(송 나라 정승 범순인이 나이 70에 만리길에 귀양간 일이 있었는데, 너의 아비의 죄는 매우 관대한 형벌이다. 죽으면 검박한 예로 장사지내라.”
하였다. 길이 용안역에 이르자, 한 부랑(부의 낭관)이 급히 달려오는데, 또 삭주로 옮겨 귀양보내는 것이었다. 벽제역에 이르니, 강계로 귀양가는 이회재(회재는 호. 이름은 언적)도 도착하였다. 공이 농담하기를,
“이 이상(정승을 돕는 곧 찬성을 일컫는 말)과 권이상의 행차가 어찌 이리도 빛나는가.”
하였다. 이듬해 무신년 봄에 귀양지에서 죽었는데, 나이는 71세였다.
◈ 정묘년에 금상이 왕위를 이었는데, 삼공이 건의하기를,
“권발은 덕행이 순수하고 충성을 지극히 갖추었습니다.”
하니, 명하여 공의 관직을 회복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박계현이 장계하기를,
“권발의 충의와 풍절이 이러하니, 이언적과 함께 추장(죽은 뒤에 상주는 것)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하니, 명하여 좌의정을 증직하였다.
◈ 공의 성품이 검소하며 화려하거나 번잡한 일을 좋아하지 않아서 쓸쓸히 지내는 것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공의 아들 동보가 능참봉이 되어, 타는 말이 씩씩하고 살쪘으므로, 공이 노하여,
“네가 겨우 말단의 벼슬을 얻었는데, 사람을 여위게 하고 짐승을 살찌게 함이 이러하니, 감히 사람을 구제하기를 바라랴.”
하였다. 원래 글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혹시 성현의 언행으로서 절실히 긴요한 곳을 만나면, 반드시 자질을 불러서 반복하여 가르쳐 알렸다. 만년에는 《자경편 책 이름》과 《근사록 책 이름》을 매우 좋아하여, 품이나 소매 사이에서 떠나지 않더니, 종중이 일찍이 재상들을 불러 후원에서 잔치를 갖고, 명하여 각기 마음껏 기쁘게 취하게 하고 부축해서 나가게 하였는데, 한 내시가 《근사록》 작은 책자를 주워서 누구의 것인지 몰라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권발에게서 떨어졌으리라.”
하고, 명하여 돌려보냈다. 공의 외가가 정현왕후에게 외척이 되는데, 무릇 재상으로 친척이 되는 사람들은 중국 서울에 조회하고 돌아오면 반드시 사사로이 드리는 것이 있으되, 공이 홀로 아니하고,
“감히 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 공이 평상시 부드러운 기운이 훈훈하였는데, 종이 일찍이 소반을 받들고 오다가 넘어져서 국물이 공의 옷을 더럽혔으나 성내는 모양을 내지 않았다. 시냇가 정자에 앉아 있을 적에 말을 타고 앞을 지나는 사람이 있어서 몸을 숨겨서 피하였다. 그 고장 사람으로 본부의 교관이 된 사람이 있었는데, 와서 쉬다가 길에서 아전을 때렸으므로 부사가 듣고서 맞대놓고 따지니, 교관이 황급하여 마침내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가 아니라, 권영공(영공은 대감이라는 뜻)이십니다.”
하니, 부사가,
“아전을 때리고 사적인 일을 권영공도 그렇게 하나?”
하였으나, 공이 끝내 변명하지 않았으니 넓은 아량이 이러하였다. 국가의 이해에 당하거나 사변을 만나게 되면, 낯빛에 의로운 빛이 나타나서 바로 앞장서서 담당하기를 맹분과 하육처럼 용기있게 결단하였다.
◈ 그가 임금께 두 번째 아뢸 적에, 밤새워 계사를 기초하고 대궐에 이르러 신광한과 서로 만나 공의 뜻을 알고서 놀라워 굳이 말렸으나, 공이 듣지 않고 원상(정승서리) 이언적의 사무 보는 자리에 가서, 주서 유경심을 불러 계사를 쓰게 하였더니, 이공이 초본을 보고 또한 놀라서,
“말해서 한갓 헤아리지 못할 일만 일으킬 뿐이니 무엇이 이롭겠습니까?”
하고, 위태로운 말이 있는 곳을 다 지워버리니, 공이 물러나 앉아 무릎을 싸안고서 길게 한탄하며,
“이렇게 깎아 없앤다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 처음으로 공이 이조의 낭관이 되었을 때에 박열이 판서였는데, 공이 온 것을 보고서 악수하고 서로 기쁘게 술을 마셨더니, 어떤 사람이 괴상이 여겨서 물으니,
“그 사람의 모습을 못 보았는가. 뒷날에 마땅히 큰 그릇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규암 송인수가 당세의 인물을 논할 때 권공은 재상 중의 참재상이라고 하였다. 정 문익공이 일찍이 공에게는 죽더라도 빼앗을 수는 없는 절개가 있다고 일컬었다. 모두 〈행장〉에 있다.
◈ 한림원 시강 화찰이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우리나라에 왔고, 그 뒤에 판윤 권발이 중국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자, 이윽고 시강이 드리는 매화와 제비를 그린 그림 족자 한 축을 바치자, 임금이 정원에 내리고 명하여 노래를 만들어 그 내력을 적어서 비치게 하였는데, 대개 매화는 □□ 맑고 고상한 나무요, 제비는 봄이면 오고 가을이면 가서 신의가 있는 새이니, 제비처럼 가고 와서 임금의 밝으시고 맑으신 빛을 우러러 바라보기를 바란 것이다. 《양곡집》
<재편집: 오솔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