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雞林歷史紀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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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고도 서라벌 순례 서라벌에 거불을 재현하고 싶었던 신라인들 ㅡ 남산 약수골 마애대불입상
계림 추천 0 조회 24 26.09.11 05:39 댓글 3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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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6.09.11 20:37

    첫댓글 남산에 남아있는 불상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마애불이다.
    ​불상 높이 약 8.6m, 암벽 전체 높이 약 17m이며, ​제작 시기는 통일신라 시대 후기(9세기 후반)로 추정한다.

  • 26.09.11 20:39

    불두(머리) 부분은 유실되어 현재는 어깨 아래의 몸체만 남아있다. 원래는 머리 부분을 따로 제작하여 몸체 위에 올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 26.09.11 20:39

    양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肩) 차림을 하고 있으며, 몸 전체에 굵고 선명한 U자형 옷주름이 일정한 간격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옷주름 양식은 9세기 후반 통일신라 불상(골굴암 마애여래좌상 등)에서 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 26.09.11 20:40

    거대한 암벽의 양 측면을 깊게 파내어 몸체의 입체감을 한껏 살려낸 당차고 육중한 조각 기법이 돋보인다.

  • 26.09.11 20:40

    약수골 마애입불상은 실제로 거대한 바위에 거대하게 새겨진 규모와 형태감 덕분에 '한국의 바미안 대불'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 26.09.11 20:41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대불이 거대한 암벽을 파내어 조성한 세계 최대급 마애불이었던 것처럼, 약수골 마애불 역시 높이 약 8.6m, 암벽 높이 17m에 달해 경주 남산에 있는 수백 점의 불상 중 단연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 26.09.11 20:42

    바미안 대불이 안타까운 역사적 수난으로 파괴되어 형체만 남았듯, 약수골 마애불 역시 불두(머리) 부분이 유실되고 몸체만 남아있다. 약수골 불상 역시 머리 부분을 별도의 돌로 조각해 올렸던 것으로 보이는데, 세월의 흐름 속에 머리가 떨어져 나가면서 특유의 쓸쓸하면서도 웅장한 아우라를 풍기게 되었다.

  • 26.09.11 20:42

    거친 자연 암반을 그대로 살려 거대한 부처의 형상을 빚어낸 거장들의 대범한 기상과 조법은 바미안 대불이 주는 장엄함과 매우 닮아 있다.

  • 26.09.11 20:43

    현재 남아있는 어깨 이하 몸체의 높이만 약 8.6m에 달하는데,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일반적인 신체 비례(약 5등신~6등신 내외의 당차고 중후한 신체 비율)를 고려하면 불두가 보존되었을 경우 전체 높이가 최소 10m에서 최고 11m에 이르는 대형 불상이었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 26.09.11 20:44

    머리(불두) 부분만 단독으로 계산해 보아도 그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불두(머리) 자체의 높이는 신체 비례상 머리 크기만 약 1.8m ~ 2.2m에 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성인 남성의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크기이다.

  • 26.09.11 20:45

    어깨너비가 약 4m에 달해, 그 위에 올라앉았던 불두 역시 입체감이 상당한 대형 석두(石頭)였을 것이다.
    ​몸체 바위 윗면의 별도 결합 구조나 절단면 흔적으로 보아, 이 거대한 머리는 같은 바위를 깎은 것이 아니라 별도의 대형 암석을 따로 조각해 몸체 위에 단단히 올려놓은 형태였다.

  • 26.09.11 20:46

    만약 2m에 가까운 불두와 머리 위의 육계(상투 모양의 혹)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암벽 꼭대기(높이 17m 암반) 위로 솟아있었다면, 골짜기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의 아우라는 10m가 넘는 거대한 위용으로 보는 이를 완전히 압도했을 것이다.

  • 26.09.11 20:47

    신라인들이 약수골 마애대불을 조각할 때 바미안 대불의 존재나 명성을 직접·간접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다만, 바미안 대불을 그대로 복제하려 했다기보다는 동아시아 전체에 유행하던 '대불(大佛) 창조의 실크로드적 전통'을 공유하고 실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보편적인 시각이다.

  • 26.09.11 20:48

    신라의 스님들은 당나라뿐만 아니라 서역과 인도까지 직접 왕래하며 불법을 구했다. 대표적으로 8세기 인도를 다녀온 혜초(慧超) 스님의 《왕오천축국전》만 보더라도 신라승들이 실크로드의 거대한 불교 유적들을 직접 목격하고 그 소식을 신라로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바미안 대불은 당시 아시아 불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성지이자 상징적인 존재였으므로, 신라의 승려들과 왕실, 아간(아간급 귀족) 및 장인들 역시 그 존재와 위용을 소문이나 그림, 혹은 기행문을 통해 명확히 알고 있었다.

  • 26.09.11 20:50

    경주 남산의 석굴과 마애불, 그리고 석굴암에 이르기까지 통일신라 불교 미술은 융성한 국제성을 띤다.
    ​거대한 암벽을 파내거나 암반 자체를 부처의 몸으로 삼는 마애(磨崖) 기법 자체가 원래 인도와 서역(바미안, 둔황 등)에서 시작되어 중국을 거쳐 신라로 유입된 전통이다.
    약수골 마애불의 U자형 굵은 옷주름(통견의) 역시 인도 간다라 미술과 바미안 대불의 양식이 기원전후를 거쳐 동아시아로 전래·변용된 전형적인 유행이다.

  • 26.09.11 20:51

    신라인들은 바미안 대불이라는 거대한 불상의 세계적 전형을 염두에 두면서도, 이를 신라 고유의 자연관과 돌 다루는 기술로 재해석했다.
    ​바미안이 인공 석굴 형태 안에 불상을 깊게 파낸 형태라면, 약수골 대불은 남산이라는 신성한 바위산의 거친 질감을 그대로 살려 부처가 암벽 속에서 걸어나오는 듯한 형상을 만들었다.

  • 26.09.11 20:52

    당시 신라 후기 사회는 정국 불안과 외세의 위협 속에서 거대한 부처를 세워 나라를 지키고 위엄을 세우려는 '대불 조성의 열망'이 강했다. 바미안이나 중국의 룽먼(용문), 윈강 석굴의 대불처럼 신라만의 위대한 성지(경주 남산)에 웅장한 부처를 구현하고자 했던 열망의 결과물이다.

  • 26.09.11 20:52

    신라인들은 바미안 대불로 대표되는 석가모니의 거대한 위엄과 실크로드 대불들의 신성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신라 수도 한복판인 남산에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구현해 낸 것이라 볼 수 있다.

  • 26.09.11 20:53

    중국에서 당나라와 북위 시기를 거치며 조성된 윈강(雲岡)·룽먼(龍門) 석굴의 거대 마애불이나 낙산대불(樂山大佛) 같은 유적들은 당대 동아시아 전체에 엄청난 문화적 충격과 영감을 주었다. 신라인들 역시 이러한 국제적 흐름 속에서 "우리 땅 신라에도 그에 못지않은 거룩하고 웅장한 부처님을 모시겠다"는 강한 열망을 품었을 것이다.

  • 26.09.11 20:54

    중국의 대불들이 황제의 권위와 국가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세워졌듯, 신라 역시 거대 불상을 통해 국가의 번영과 왕실의 권위를 안팎에 드러내고자 했다.
    ​신라인들에게 부처는 단순한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외세의 침입을 막고 나라의 안녕을 지켜주는 구원자였다. 따라서 불상의 크기가 클수록 그 신력(神力)과 보호의 힘도 더욱 커진다고 믿었다.

  • 26.09.11 20:55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신라 땅이 곧 부처님이 거주하는 성지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특히 경주 남산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야외 절이자 불국토로 여겼기에, 그 핵심 공간에 남산을 대표할 만한 거대한 마애불을 조각하는 것은 숙원 사업과도 같았을 것이다.

  • 26.09.11 20:56

    이러한 간절함이 집약되어 탄생한 결실이 바로 약수골 마애대불이자, 삼국유사 속 '황룡사 장육존상'과 같은 대형 불상들이었다. 비록 화강암이라는 까다롭고 단단한 돌을 다뤄야 하는 기술적 한계가 있었음에도, 자연 암반을 대담하게 활용해 마침내 신라만의 독창적인 거불 문화를 완성해 낸 것이다.

  • 26.09.11 21:02

    약수골 마애대불의 불두(머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점은 불교미술사와 문화재학계에서도 오랜 기간 매우 아쉬워하며 다양한 추정을 내놓았던 부분이다.
    ​실제로 2.8t에 달하는 거대한 불두의 행방과 파손 원인에 대해서는 학계와 현장 조사에서 몇 가지 명확한 가설과 정황이 제시되고 있다.

  • 26.09.11 21:04

    약수골 골짜기 하부埋没(매몰) 가능성이다.
    ​약수골 마애불이 서 있는 위치는 경사가 매우 가파르고 험준한 암벽지대이다.
    ​경주 지역의 대형 지진이나 대규모 산사태, 토사 유실로 인해 상부에 올려져 있던 대형 석두가 떨어져 내렸을 때, 가파른 계곡 아래 깊은 토사 속으로 굴러 떨어져 완전히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 남산 계곡들은 퇴적물이 깊게 쌓이는 구조라 아직 발굴되지 않은 지층 아래 매몰되어 있을가 능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 26.09.11 21:06

    조선 시대 억불숭유 및 인위적 파괴·재활용 가능성이다.
    ​조선 시대 들어 유교 이념이 강해지면서 경주 남산의 수많은 불상들이 인위적으로 훼손되거나 목이 베어지는 일을 겪었다.
    불두가 계곡으로 떨어져 깨진 뒤, 그 부서진 돌 파편들이 인근 석축, 민가, 혹은 조선시대 기와가마나 건축재, 맷돌 등의 석재로 쪼개져 재활용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질 좋은 화강암 파편은 당시 주민들에게 요용한 석재 공급원이었기 때문이다.

  • 26.09.11 21:07

    약수골 마애대불의 불두가 흙(소조)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은 학술적으로도 매우 높게 평가되는 유력한 가설 중 하나이다.
    ​실제로 한국 조각사 및 불교미술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왜 약수골 마애불의 머리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를 규명할 때 석두(石頭) 가설과 함께 비중 있게 다뤄지는 핵심 이론이다.

  • 26.09.11 21:09

    마애불의 어깨 윗면을 보면 거대 암반을 평평하게 다듬고, 머리를 얹거나 정착시키기 위한 구멍·홈 같은 구조가 관찰된다. 석조 불두를 올렸다면 암벽과 석두 사이에 강력한 장부(선반/홈) 구조가 필요하지만, 나무나 쇠로 뼈대(심목)를 세우고 흙을 반죽해 얹는 소조(塑雕) 기법을 썼다면 평평한 기반 위에서도 충분히 작업이 가능했다.

  • 26.09.11 21:10

    만약 거대한 돌로 만들어 떨어졌다면 아무리 유실되거나 재활용되었더라도 파손된 화강암 조각이 계곡 주변에 일부나마 남기 마련이다. 반면 점토와 짚, 털 등을 섞어 만든 소조 불두는 비바람에 노출되어 한 번 떨어져 나가면 비에 씻기고 흙으로 흘러내려 흔적도 없이 완전히 자연으로 돌아간다.

  • 26.09.11 21:10

    통일신라 시대에는 석조 기법뿐만 아니라 목조 뼈대에 흙을 붙여 정교한 표정을 만드는 소조불(塑雕佛) 제작 기술이 매우 뛰어났다. 특히 대형 불상의 미세하고 유려한 이목구비를 3표현할 때, 거칠고 단단한 화강암보다 흙이 훨씬 유리했기 때문에 머리 부분만 소조로 완성하는 합성 기법이 종종 사용되었다.

  • 26.09.11 21:11

    17m 높이의 절벽 위, 어깨 폭 4m에 달하는 위치에 2t이 넘는 거대 화강암 불두를 크레인도 없던 시절에 올려 고정하는 것은 엄청난 위험과 기술적 부담이었을 것이다. 머리를 흙으로 만들면 중량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 26.09.11 21:12

    단단한 화강암 암벽에는 굵직하고 웅장한 몸체 옷주름을 선각·반입체로 새기고, 부처의 자비로운 미소나 정교한 이목구비, 소라 모양의 머리카락(나발) 등은 흙으로 섬세하게 다듬어 올리는 것이 제작 효율성 측면에서 훨씬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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