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다방 홍여사님 안녕하십니까?
귀하의 고견을 기대하며 이 글을 씁니다.
저는 70세를 2년 앞둔 고령의 평범한 남성입니다.
안사람(63세)과 두 아들 (37세, 36세)과 며느리, 두 손녀를 두고 있는 가장이지요.
72년도 대학 졸업 후 항공사와 해운사에서의 직장경력이 있으며
현재 소규모 식품원료 수입상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털어놓으려는 이 사연은
50년도 더 된 젊은 시절의 작은 인연으로부터 발단이 되었습니다.
1964년 3월초 고교 1학년 막 입학한 저는
일본 미야자키의 1학년 동갑내기 여고생과 펜팔 인연을 맺었고
약 9년간 (제가 대학 4학년때까지) 수많은 편지교환 수차례의 사진/선물교환 등으로
상당한 정을 쌓았었습니다.
21-22세 때인가 예쁜 색종이 학 1000매를 보내어 오는 등
풋풋한 첫사랑으로 발전하였으나...
그 시대에는 인연을 이어갈 방도가 없었습니다.
25세 되던 해 그녀는 결혼을 하게 됐다고 소식을 전해왔지요.
남편 성을 따라 이러이러하게 성이 바뀐다고 알려주며
저를 보고 건강하게 훌륭한 사회인이 되라고 하며
마지막 편지를 주고 받게 되었읍니다.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어쩔 방법이 전연 없었지요.
그후 약 4-5년 후 저도 지금의 안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고
지금까지 약 38년간 나름대로 큰 문제가 없는 결혼생활을 해 오고 있습니다.
약 5년전 큰 아들 혼사까지 치루었어요.
제 성격상 일생을 비 이성적 생각/비 양심적인 행위는 단 한번도 상상도 하지 않았으며,
제 인생을 오직 곧은 길로만 묵묵히 걸어왔다고 감히 자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냥 충직하고 고지식한 인생을 별 재미없이 살아 오고 있는 사람이라고 봐야죠.
그리고 제 안사람도 성격이 거의 비슷하구요.
주위에서들 건전하고 모범적인 가정이라고들 하고 있었어요.
결혼 직전 일본에서 온 모든 우편물/사진/선물소포 등을
싸그리 불 태우고 잊어버리기로 했었고,
사실상 그렇게 약 30년은 지나갔어요.
물론 어쩌다 한번씩 그 ‘일본아지매’ (이제야 물론 68세 된 할매이지만) 생각이 났었지만...
그래도 잊으려고 잊으려고 애도 썼었고요.
그런데 약 10여년 전인, 제 나이 50대 후반에 그 사람의 소식이 문득 너무 궁금해졌어요.
우선 살아있나 죽었나, 어디에 사나 자녀들은 몇이고 건강하게 잘 사나 등등...
그러나 세월이 이만큼 흘러, 그녀를 찾는다는 것이 엄두가 안 났지요.
궁리끝에 그녀가 고교생활을 하던 니치난시의 고교 5개를 검색했습니다.
그녀가 다닌 학교명이 생각이 나지 않아 5 학교를 모두 뒤진 겁니다.
교장선생님 5인에게 1964년도 1학년 재학생 명단 중
이 사람의 소재를 좀 파악하여 달라는 영문 편지를 보냈었어요.
3곳에서 도저히 못 찾겠다는 연락이 오더군요.
나머지 한 학교 교무주임 쯤 되는 사람과는 10여차례 전화를 주고 받기도 했습니다.
언어 문제가 큰 걸림돌이 되었지만 애를 썼었고,
결과는 불발에 그쳤습니다.
주소로 찾아보려해도 너무 오래되어 주소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묘하게도 ‘미야자키현’ 하고, 번지만 내 머리에 남아 있었고
가운데 중요한 부분, 시군명/동네명 등은 완전 망각상태...
그러나 포기 하지 않고, 니치난 시장 앞으로 영문편지를 보내어
이 사람 소재지 좀 알려달라고 두세 차례 부탁을 해보았으나
묵묵부답이더군요.
무엇보다 내 머리 속에 정확한 주소가 없다보니 도저히 방법이 없어
그야말로 포기를 할 수밖에 없을 듯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습니다.
무작정 현지에 가서 관공서를 뒤져보자는 생각까지 들었지요.
항공편을 뒤지면서, 니치난시 외곽에 있는 한국인 식당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그쪽에도 수차례 도움을 청하였으나 역시 불발...
그렇게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세월이 10년쯤 흘러 2014년 3월, 그녀를 처음 알게 된지 만 50년이었지요.
다시 또 생각이 나는 거예요.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니치난 시장이 30대의 아주 젊은 사람으로 바뀌어 있더군요.
8-9년전 보냈던 부탁편지의 복사본과 함께 간곡한 내용의 편지를 다시 써서 또 보내었지요.
그러나 이번에도 묵묵부답이더군요.
안타까워서 이메일로 수차례 복사편지를 보내며 간곡하게 부탁도 했었지요.
그렇게 안타까운 순간이 2개월쯤 지났을까?
불현듯 니치난시청에서 영문 이메일이 왔어요.
그동안 영문으로 교신을 하자니 어려움이 더 컸었는데
이번엔 그쪽에서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마 독일인인 듯한 이름의 국제교류협력관이라는 사람이
니치난 시장으로부터 서한을 넘겨받아 편지작성을 도와준 모양입니다.
아무리 해도 내가 보낸 불충분한 주소로는 사람찾기가 불가능하며,
인권문제로 인하여 개인 정보를 관공서에서 수집 할 방법이 없노라고...
그래도 우선 영문 교신이 되는 사람이니 저 하고 약 20여 차례 교신을 하며
여러가지 사정을 주고 받았어요.
그러다가 그 사람이 권유를 했어요.
니치난시 일원에 발행 유통되는 일간지에 광고를 내거나
아니면 일간지 기자들을 불러모아 "기사"화 해 보자고.
정말 기가 막힌 아이디어라고 생각되어 곧 시행 해보자고 약속을 주고 받던 중
어느 순간 내 머리 속에 그녀의 최초 고향주소의 한 부분이 불현 듯 떠오르지 않겠습니까?
즉시 니치난에 연락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 주소는 real address라 하며 현존하는 주소라 하였어요.
다시 내가 그 불완전한 주소를 google map에 집어 넣어보니
완전한 주소가 나오는 거였어요.
내 머리속에 51년전에 입력된 바로 그 주소 였어요.
정말 극적으로 찾아 낸 셈이었죠.
그러나 아직 첩첩태산.
51년전의 고향주소로 사람을 찾는다니...
그 긴 시간에 얼마나 상상도 못할 변화가 있었을텐데...
저는 그곳 읍사무소쯤 되는 관공서에 영문 이메일을 넣어
이 주소, 이 사람의 소재를 좀 파악하여 달라고
3번 반복하여 요청 하였으나 역시 묵묵부답.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니치난시청쪽의 그 사람과 여러차례 교신을 하며
재삼 도움을 청했지요.
그러나 들려오는 얘기는 좀 더 기다려라, 좀더 기다려라.
더 이상 얼마나 더 기다리랴,
고심 씉에 내가 직접 그 주소에 편지를 보내게 되었지요.
너무 오래 된 주소라 그 사람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낮았지만
저는 무턱대고 시도해 본다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주소 겉봉에 미혼 때의 그녀 이름을 쓰고
괄호에다 "41년전 혼전 이름" 이라고 병기를 하였었지요.
그게 아마 작년 6월 중하순 경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기적이 이루어졌어요. 정말 기적이었지요.
약 1개월 후인 7월 말쯤인가.
바로 그 당사자인 그녀가 손수 쓴 편지가 제 앞에 도착하였어요.
그냥 이건 ‘꿈’이었어요.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눈과 귀를 의심할 정도 였어요.
그 감격을 무얼로 표현 할 수가 있을까요?
그녀의 이야기인 즉슨 1973년경 혼인 후 아들 딸 하나씩을 두었는데
결혼생활 불과 5-6년 만에 남편을 사별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30년 이상을 어느 지역 도서관 사서생활을 하다가
근래에 정년퇴임을 하였으며
사별후 지금까지도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남편 사후, 친정집으로 되돌아와 성을 다시 아버지 성으로 바꾸어
그 친정댁을 "이어 받기"로 했다고 하네요.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러나 그 집에는 딸 만 넷인데 이 사람이 둘째지요.
그리하여 본가이자 친정집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68년을 살아오게 된 셈입니다.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이야기지요.
지금은 미야자키시내 (집에서 약 10킬로 떨어진 곳)에서 서도사범생활을 하며
중 늙은이들부터 중고생 까지 서도를 가르치고 있대요.
바쁘게 살고 있는 셈이죠.
작년 첫 편지 교신 후 최근 모습의 사진을 서로 주고 받았지요.
역시 ‘할매’가 다 되었을 수 밖에요.
워낙 긴 세월에 얼굴모습도 전연 알아 볼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8월 쯤엔가 처음으로 전화가 왔어요.
51년만에 처음 들어보는 음성...
일본어 영어 한국어 뒤섞어가며 감격적인 생애 첫 통화를 하는데...
불쑥 우리 집 사람이 바로 옆에 다가오더군요.
어물어물 약 15분간 통화를 마쳤는데
우리 집 사람이 볼때는
‘우리 남편이 업무상 국제통화하는 걸 종종 보았지만...이건 좀 이상하다’고
느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저는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결심을 하고 ‘일본할매’의 존재와 그간의 사정을
간략하게 "고백"하게 되었지요.
물론 상상도 할 수 없는 충격의 이야기였겠지요.
우리 집 사람에게는 얼마나 큰 허탈감과 상실감이 들었을까 짐작이 되고도 남지요.
그런데도 저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솔직히 이야기를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어요.
저의 기본적인 생각은...
지금 70살이 가까운 이 나이에 무얼 어쩌겠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없으며
물론 간절히 보고 싶지만, 집사람의 양해 없이는 안 된다는 생각에는 변화가 없어요.
실은 연락이 닿자마자 미야자키에 날아가겠다는 생각이 앞서
서울-미야자키-서울 항공편 예약까지 해 놓았었는데.
아차 그래도 이건 아니로구나 싶어서 어느 순간 취소를 했었지요.
작년 7월 소식이 다시 재개된 이후로는
대략 월 2-3회 (편지/팩스 혹은 전화로) 통신이 되고 있지요.
정말 보고싶다는 이야기등 에피소드가 계속 되지만
무얼 어쩌자는 엉뚱한 이야기는 전연 없지요.
집 사람이 용인하지 않는 한 섣불리 만날 생각은 없구요.
38년을 함께 살아 온 집사람에 대한 내 마음에도 전연 달라진 건 분명 없어요.
그것만큼은 확신하고 있지요.
그러다보니 아직도 저는 이 일본할매를 만나지 못하고 있지요.
우리 집 사람이 흔쾌히 허락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집사람의 허탈감 상실감이 너무 큰 상황이라
가정 내에서 상당한 갈등이 계속되고 있어요.
어떨 때에는 심각한 수준까지 빠저들고, 이혼 이야기까지 나오는 정도가 되었어요.
저도 정말 괴로운 상황이고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지 갈팡질팡입니다.
6월 초엔가 제가 일본할매에게 국산김 한 박스(약 5만원 상당)를 사서
EMS로 보낸적이 있었는데
안 사람이 어떻게 이걸 알게 되었는가 봐요.
백화점 영수증이나 우체국EMS영수증을 본것 같아요.
어느날 저녁 저를 심각하게 부르더니 눈에 살기가 도는 모습으로 질책을 하는데
저는 그만 할 말을 잊었어요.
그 후 약 2개월 동안 부부간의 대화가 완전 상실입니다.
너무 괴로운 나날이 계속되고 있어요.
큰 아들 녀석과 며느리의 생각은 그저 "불용" 그 자체이며
작은 아들은 "중립"에 가까우며...
가까운 친구/누나/여동생들의 생각들은 한 마디로 "혼선" 이랍니다.
누구는 모든 게 제 잘못이라며 질책하기도 하고,
반대로 누구는 그거 뭐 생각하기 나름 아니냐,
아무런 심각한 일도 아닌데 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누구는 정말 기가 막히는 드라마로구나, 너 정말 멋있는 사나이야 하는 사람도 있지요.
모든 거 다 버리고 딱 끊어라, 아니다, 가족끼리 오고가고 편하게 지내라
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칼로 두부모 자르듯이 그 할매의 생각을 딱 짜를 수가 없어요.
물론 아무런 욕심이 없는 건 분명합니다.
그냥 그곳에서 건강하게 잘 살아 있길 바라고
종종 교신하다가 죽기 전에 한 번쯤 보면 좋겠다는 정도의 생각이죠.
그런데 이게 우리 집 사람에게는 절대로 용납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일본 할매를 내 머리에서 지워 낼 수가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집사람은 나의 이 원인행위를 "죽을 짓" "저주 받을 짓"이라고 하여 갈등이 크게 증폭시켰고
지난 6월 중순에는 심야에 일본할매에게 전화를 10여차례 이상 하여...
정말 곤혹스러운 상태를 연출하였지요.
우선 언어소통이 되지도 않는 상태인데다가.
그 할매가 무슨 큰 잘못을 저잘렀느냐하는게 내 생각입니다.
내 생각과 우리 안사람과의 사고 방식이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구나
하는 절망감, 가정생활의 괴로움 등을 이겨내기가 정말 어려워요.
종종 교신하고, 기회가 되면 서로 방문도 하고, 가족끼리도 만나고
이러면 우리 남은 인생이 더 풍요로워 질 수도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
근본적으로 내 생각에 전연 다른 욕심이 없는데, 어찌 나를 이렇게 보나...
내 생각이 어디가 얼마나 잘못 되었는지 지적해 주시고
간곡한 조언도 부탁드립니다.
홍여사님의 고견을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