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 가려고 짐을 챙기고 있었다.
네움에서 산 와인 두 병과 한국에서라면 겁나 비싸 엄두를 못 내던 모데나 발사믹드레싱 두 병을
어떻게 포장해야 그 격렬한 여정을 버틸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섬유로 된 것이라고는 죄다 유리병 호위 무사로 둔갑시켰다.
이제 기내에 가지고 탈 가방만 정리하면 된다.
비행기에서 혹시 필요할지도 모를 목베개와 슬리퍼 세면도구등을 백팩에 챙겨 넣고
여권을 비롯한 현금과 카드 휴대폰 등은 크로스백에 넣어 몸에 밀착시켰다.
어라?
그런데 어젯밤까지 카톡을 하던 휴대폰이 보이지 않는다.
어럽쇼?
여권도 없다.
버스 탈 시간이 다 됐다며 사람들은 재촉을 하는데
나는 호텔방을 시트를 뒤집어가며 맴맴 돌고 있다.
"아 어떡해 어떡해... 어쨌지? 어디로 갔지?"
땀을 함빡 쏟으며 같은 자리를 맴맴 돌다 눈을 떠보니 내 방 천정이 보인다.
집에 온지 4일이 지났는데
나는 아직도 크로아티아 꿈을 꾼다.
#1 포스토이나 동굴
일정 첫날부터 끼어있는 동굴이 탐탁치 않았었다.
언제부터 생겼는지 약간의 공황장애 비스무리한 증상 때문에 그렇다.
무리에서 빠질수도 없어 겨울 패팅파카 입고 동굴로 들어갔다.
열차를 타고 좁고 천정이 낮은 틈을 지나는 동안에는 자라목을 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석회 동굴이라는데
제일 큰지 두번째인지 나는 잘 모르겠고
먹을 수는 없는 먹을 거리가 많다는 게 재미있었다.
천정에서는 스파게티가 내려오고
바닥에서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솟아 있었다.
게다가 내눈에는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엄청 큰 다이아몬드도 있었다고 박박 우긴다.
#2 오파티야
오스트리아 합스브르크 황실의 휴양지였다는 오파티야
저기 위에 김 머시기씨도 다녀갔다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해변마을이었다.
#3자다르
부웅...우엉...우웅....
물결이 들어올 때마다 바다는 노래를 부른다.
부엉부엉 했다가, 우엉우엉 하다가, 이용이용 한다.
악보 없는 연주
한 번도 같은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그 곳은 천재 예술가 니콜라스 바시츠가 바다에 설치한 세계 최초의 바다 오르간이라고 한다.
#4 쉬베니크 솔라리스
구름이 바다와 맞닿을것처럼 낮게 몸을 숙였다.
피터팬의 네버랜드에 온 것처럼
그 곳에는 후크선장의 부서진 해적선이 있었고
팅거벨이 날아와 어깨 위에 앉을 것 같다.
솔라리스의 새벽은 황홀했다.
이제까지 본 적 없던 홍시에 연시를 섞어 호박에 버무린 것 같은 빛깔의 여명이 새벽을 밝히고 있었다.
이상하게 나는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 자꾸 맛있는 먹을거리 생각난다.
#5. 두브로브니크
오래전 누군가 살았던 역사의 현장에는
골목골목마다 사람으로 넘쳐났다.
어디를 돌아봐도 돌 돌 돌
바닥부터 석회암으로 무장한 이 곳은 천년에 가까운 시간을 그 자리에 있었다.
꽃보다 누나에서 여정아줌마가 좋아한다던 돌바닥이 여기에서 저기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 중으로 된 벽 어느 틈에선가 오래전 노래소리가 들릴 것도 같다.
거대한 세트안에 배우들만 바뀌는 것이라 생각하다가
냉장고에 있던 내 티라무슈 누가 먹었냐며 눈 부릅뜨던 일이 부끄러워졌다.
드라마에서 그랬다.
지금 내가 사는 시간은
내가 죽는 순간에 스쳐지나가는 한 낮 장면일 뿐이라고.
#6. 스플리트
우리 동네에도
제주도 에서도
크로아티아에서도
시장은 늘 북적거린다.
흥이 있고
노래가 있고
반갑게 맞고 깎아주는 인심이 있다.
다음엔 가방 큰 거 가지고 와서
고기랑 치즈랑 소시지랑 체리 많이랑 사 가지고 가야지.
#7. 폴리트비체
여정 : 와~ 예쁘다. 이 나라 폭포의 나란가봐.
자옥 : 사진보다 훨씬 아름다워.
미연 : 영화에 나오는,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장소 같아요.
희애 : 물이 어떻게 이렇게 맑아? 완전 맑아.
석회성분이 빛을 받으면 에머랄드 빛으로 반사된다고 하던가?
이유야 어쨌든
하늘은 아름답고
물 빛은 하늘을 닮았으며
폭포는 강한듯 다소곳하게 떨어지고
나는 지금 이 곳에 있다.
#8. 블레드 호수
여행을 하면서 어디가 제일 좋았냐는 질문만큼 난감한 말도 없다.
그래도 굳이 빵 사줄테니 말해보라고 하면
나는 블레드 호수가 오래 기억 날 것 같다고 말하겠다.
호수는 파도에 휘둘리지 않으며
폭포처럼 떨어져 사라지지 않는다.
호수는 하늘을 담고 나무를 품고 주변 건물을 끌어 안는다.
호수 곁에 서면
나도 호수를 닮을 것 같다.
#9.돌로미티
돌로미티에 오기 위해
돌로미티를 지나 멀리 돌아서 왔다.
여행은 갈 곳이 있어 떠나는 것이고
돌아올 곳이 있어 떠나는 것이라고 했다.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열 배는 더 했던 여행길이었다.
저질체력으로 일정을 잘 따라 갈 수 있을지도
집이 아닌 곳에서 잠을 잘 잘 수 있을지도
처음보거나 언젠가 봤거나 아직은 어색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아무 것도 추측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때로는 앞 사람 뒷꿈치만 보며 걸었고
가끔은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져 나만 두고 간 줄 알고 식겁했던 적도 있었다.
겁나 짠 음식을 입에 물고 혹여 촌스럽다고 할까봐 꿀꺽 삼키고
냉장고에 두고 온 차게 식은 우엉차 생각을 하며 그 비싼 물을 아껴가며 마셨다.
사흘 밖에 안 지났을 때, 첫 날 갔던 곳 이름이 죽어도 생각이 안 나서 내 머리를 쿵쿵 박았었다.
(아! 물론 지금도 일정표 옆에 놓고 사진을 정리하면서 소리 안 나게 '거기가 거기였구나?' 하고 있다. 어쩌면 거기가 거기 아닌 곳도 있을지 모른다.)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눈물까지 글썽거렸던 그 좋던 음악들의 곡명은 애초에 몰랐다.
아무렴 어떠랴.
이제부터 사는 동안
어느 낯선 곳을 지나칠 때
졸면서 TV를 보다가 문득
혹은 파마를 하면서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음악 소리가 들릴 때
블레드 호수가 돌로미티가 폴리트비체가 물밀듯이 사무칠지도 모르겠다.
그 때는 아마도 나흘만에 화장실 볼일을 성공하고 개운함도 잠시
약한 물살에 막혀버린 변기 붙들고 씨름하던 유럽 어느 호텔 화장실이 떠오를지도 모를일이다.
살아있는 것이
처음으로 감사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직도 크로아티아를 꿈에서 만난다.
첫댓글 시처럼 맑은 글들이 우리가 다녀온 여행을 더욱 가치있게해 주네요. 글 읽으면서 행복에 젖었습니다.
대장님 덕분에 한 십년은 행복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도요~~~대장님 제자 두셔야 겠네요 좋은글에 적절한 사진까지 첨부하셔서 마치 여행가이드 책 보는것 보다 훨씬 리얼 하네요★★★★★
수필집을 출간하신 작가님이셔요.
어쪈지~~~
대장님이 제자로 받아주실라나 모르겠어요. ㅎ
장인아님 반가웠습니다.^^
좀 남달르다 생각했죠
산드라님 멋져요~ ㅎ
간결하고 정갈한 표현이면서도
함축성까지 잘 갖추고
있네요ᆞ
골목길에서의 까르륵을
서촌에서도
재현 해 볼까요?
ㅎㅎ
코~~올~!! ㅋ
고급스런 언어들에 파마를 하면서~~
마지막 호텔 화장실 사건에서
ㅎㅎㅎ 터졌습니다.
정갈한 느낌의 감성을 존경합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함께 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작가라서 뭔가 달라도 다르네요~
숨소리 죽이며 그 길을 따라가게 만드는...
살랑거리는 바람결이 느껴지는 맛진 글, 잘 읽고 갑니다~!
여행작가, 사진작가, 수필가...또...
풍요로운 여행길이였네요~!^^
감사합니다.
더 멋진 여행길에서 다시 만나요~
아직도 뒤숭숭한 꿈을 꿔서 어쩐대요? ㅎㅎ
블레드 호숫가의 '비상구' 작품이 궁금합니다~
그러게요.
밤 열두시에는 점점 눈이 말똥말똥해지고
낮 열두시만 되면 자꾸 졸려요. Zzz
정갈한 음식을 차려 놓고 이것도 맛보고 저것도 맛보고 달콤하니 부드러운 맛에 입이 즐겁고 눈이 즐겁네요
함께 하셨으면 더 좋았을텐데요..
우와! 유나 언니!
ㅎㅎ 글 정말 좋아요^^
우와! 나눔양!
이렇게 만나니 정말 좋아요^^
모든 길에는
그 길의 언어가 존재하듯
유나님이 걸었던 그 길은 유나님 곁의
작은 들꽃 한 송이처럼 그대로 닮아있네요.
함께해 행복했답니다
감사드립니다...^^*
우드님 감성을 닮은
모놀 여인이 있네요
늘 소리없이 이곳저곳 챙기시는 모습 감동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우~~
역시 세련되고 젊은 글이예요.!!!
감사합니다.^^
역시 작가님다운
감성과 그에 못지않은 사진 솜씨까지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
유나님
멋져요
미라지님의 우아한 자태에 감동했어요.
^^
유나님에게서 느껴지는 청량감 ~
기분좋습니다
저도 휘리릭님을 뵐때마다 늘 화사하고 다정다감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져요.^^
어쩐지 ㅎㅎ 포스가 남다르다 했네 ^^* 반가왔습니다 ㅎ
으윽~ 포스라니요..ㅎ
저도 반갑고 감사했습니다.^^
유나님, 이런 분이군요..ㅎㅎ
함께해서 즐거웠고 행복했습니다...^^)**
조근조근 따뜻한 이야기 감사했습니다. ^^
세련된 문장에 나도 꼬옥 갈거야 다짐하면서 가슴 설레게 만드시네요.
사진도 여행기도 고맙습니다.
네에~ 꼬옥 가시면 좋겠어요. ^^
의외로 이번여행 까르르
웃던 기억이 생생하고....
유나님의
따뜻한 감성
함께 느껴봅니다
이야기거리가 많은 여행이 좋은 여행인 것 같아요.
오래오래 그 날 기억들로 행복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