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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축구스타, 지금 어디에<2> ‘게이오의 영웅’ 이우영(상)에 이어 (하)편이 이어집니다.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비쇼베츠 감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축구선수 이우영이 지금은 센슈대학 스포츠 코칭학 교수이면서 축구부 코치를 맡고 있다.(사진=이영미)>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과 이우영
다음은 이우영 교수의 선수시절 활약상을 담은 기사 중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압축해서 정리를 하려다 지금은 지도자로 활약 중인 반가운 이름들이 눈에 띄어 본문 중 일부를 그대로 옮겨 적는다.
#1. “한국축구가 막판 저력을 발휘하며 만리장성을 넘어 애틀랜타행 문턱에 섰다. 한국은 21일 저녁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의 메르데카국립경기장에서 벌어진 애틀랜타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B조 마지막경기에서 1,2차전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며 공수에서 일방적인 우세를 보여 중국을 3-0으로 대파했다. 한국은 이기형(삼성)이 전반 36분 선취골이자 결승골을 넣은 뒤 후반 이우영(연세대 졸)이 2골을 추가해 2승1무를 기록함으로써 예선 탈락의 위기를 가볍게 넘기며 조1위로 4강에 진출했다.
연속 경고 때문에 카자흐스탄과의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던 스트라이커 최용수(LG)와 이기형 등을 스타팅으로 내세운 한국은 주장 윤정환과 최용수 이기형 등이 파상적인 공세를 펼쳤으나 전반 중반까지 골을 넣지 못해 한국 벤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날의 승부골은 36분 이기형이 엮어냈다. 이기형은 페널티지역 우측에서 최성용의 숏패스를 받아 수비 2명을 제치고 강한 터닝슛을 중국 골문에 쏘아 넣었다. 한국은 후반 들어서도 파상공세를 펼치다가 13분과 22분 이우영이 연속골을 넣어 승부를 결정지었다. 이우영은 13분 상대 수비가 잘못 걷어낸 볼을 페널티지역 정면에서 되받아 슛, 승부를 결정짓는 두 번째 골을 성공시킨데 이어 22분에도 최용수가 왼쪽 코너 부분에서 센터링한 볼을 골에어리어 정면에서 회심의 발리슛으로 골을 추가했다. 이우영은 이 경기 MVP로 선정됐다.”-<연합뉴스> 1996년 3월 1일자 기사 ‘올림픽축구-한국, 중국 꺾고 조1위로 4강’ 중에서
#2. “한국올림픽축구대표팀이 사우디아라비아에 또 완승했다. 사우디에서 전지훈련중인 한국은 25일 리야드 청소년복지구장에서 열린 사우디대표팀과의 마지막 3차 친선 경기에서 이우영의 2골 1어시스트에 힘입어 3-0으로 압승, 3차례 평가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고 선수단이 알려왔다. 이로써 한국은 내년 4월께 시작될 96애틀랜타 올림픽 아시아지역 예선리그에 대한 전망을 밝게 했다.
전반 11분 김대식의 센터링을 이우영이 땅볼 슛으로 연결, 주도권을 잡은 한국은 22분 윤정환이 이우영의 도움을 받아 두 번째 골을 성공시켰고, 33분 최성용의 긴 패스가 사우디 GK 판단미스로 머리 위를 넘자 이우영이 다시 슛, 1골을 더 보탰다.”-<연합뉴스> 1994년 12월 26일자 기사 중에서
<96 애틀랜타올림픽 대표팀을 이끌었던 비쇼베츠 감독.>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을 앞두고 대표팀이 처음 구성됐을 때부터 올림픽 본선 무대까지 함께 했던 이우영 교수는 당시의 상황들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가장 힘들었던 경기가 카자흐스탄과의 예선전이었다. 당시 (최)용수 형이 경고 누적으로 경기에 뛸 수 없었다. 용수 형의 공백이 크게 느껴진 경기였다. 공격에서 제대로 풀어가질 못했으니까. 먼저 실점했는데 후반에 우리가 가까스로 동점골, 역전골까지 성공시키면서 승리할 수 있었다. 결승전에서 만난 일본을 꺾고 올림픽 본선에 진출했을 때는 와일드카드로 ‘형님’들이 합류했다. 황선홍, 하석주 선배였는데, 선배들이 대표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면서 단단한 팀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올림픽대표팀에서 좋은 동료, 선배들을 통해 축구의 성장을 이룬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비쇼베츠 감독과 황선홍, 최용수, 윤정환…
비쇼베츠 감독이 이끄는 애틀랜타올림픽대표팀은 본선 첫 경기였던 가나전에서 윤정환의 결승골에 힘입어 1948년 런던올림픽(멕시코를 상대로 5-3승리) 이후 48년 만에 올림픽 본선 첫 승이란 쾌거를 이뤘다. 이후 멕시코와 0-0으로 비겨 8강 진입을 눈앞에 뒀으나 이탈리아에 1-2로 패하는 바람에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8강에 오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경기 종료 5분을 남겨 놓고 역전을 당했다. 5분만 잘 버텼어도 한국 축구 역사에 중요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걸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안타까운 잊지 못할 장면이다.”
비록 8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영원히 품고 가야 할 ‘선배’들을 얻었다고 한다. 이 교수는 그중 황선홍과 최용수 감독을 거론한다.
“이전에도 (황)선홍이 형의 경기를 많이 봤기 때문에 어떤 플레이를 하는 선수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함께 훈련하고 경기에 나서보니 그 형이 왜 대한민국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불리는지 알겠더라. (최)용수 형이랑은 연세대 선후배라는 인연으로 친분을 맺었고, 룸메이트를 하게 되면서 사이가 깊어졌다. 지금도 서울 가면 가끔 만나 안부를 주고받는다. 의리와 인정으로 똘똘 뭉친 스타일이다.”
몸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마지막까지 이우영이란 이름을 대표팀 명단에 올려준 비쇼베츠 감독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굉장히 냉정한 분이셨다. 잘 웃지도 않으셨고. 1994년 2월 비쇼베츠 감독이 올릭픽대표팀 감독으로 부임 후 1996년 7월 애틀랜타올림픽 때까지 호흡을 맞춘 이가 최용수, 윤정환, 이기형, 최성용, 박충균 정도였다. 난 운 좋게도 비쇼베츠 감독과 궁합이 잘 맞았다. 덕분에 낙오되지 않고 올림픽 본선까지 대표팀에서 뛸 수 있었으니까. 돌이켜보면 축구인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기가 올림픽 대표팀 시절이었던 셈이다.”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최용수는팀의 주득점원으로 활약하며게임메이커 윤정환과 함께 올림픽팀을 이끌어왔다.>
<지금은 울산 현대(윤정환 감독, 왼쪽)와 FC서울(최용수 감독)을 이끄는 지도자로 활약 중이다.>
신인 드래프트 포기하고 일본 진출한 사연
올림픽대표팀 이후 이우영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K리그에 진출하지 않고 일본 오이타 트리니타에 입단하게 된다. 그는 왜 K리그에서 뛰는 대신 일본으로 진출한 것일까. 당시 올림픽대표팀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던 이우영에게 눈독을 들인 K리그 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실 신인 드래프트 신청 마감 날, 부랴부랴 신청서를 작성해선 팩스를 통해 축구협회로 신청서를 접수시켰다. 그러다 신청서를 보낸 후 5분 만에 협회로 전화를 걸어 ‘방금 팩스로 드래프트 신청서를 접수한 이우영인데 신청서를 빼주십시오. 전 드래프트에 안 나가겠습니다’라는 내용의 얘길 전했다. 5분이란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전부터 고민했던 문제였고, 그 5분 사이에 내 진로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신청서 접수를 철회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내게 입단 제의를 한 팀은 없었다. 주위 선수들은 프로팀과 계약을 맺고 하나 둘씩 내 옆을 떠났다. 불안한 생각에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축구를 하고 싶다는 목표 하나로 믿고 기다렸다. 몇 개월 후에 아버지가 일본 J2리그인 오이타 트리니타로 가라고 말씀하시더라. 오이타는 94년 출범한 구단으로 한국의 문정식 감독님이 창단팀 감독을 맡고 계셨다. 아버지로선 소속팀 없이 지내는 아들을 지켜보기가 힘들었을 테고, 친한파로 알려진 오이타 정도면 내가 부담 없이 축구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생각하신 듯 했다. 그러나 막상 오이타에 가보니까 훈련 환경이 굉장히 열악했다. 운동장도 빌려서 사용하고, 클럽하우스도 없는 상태였다. 결국 1년 반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오이타에서 20경기에 출전하며 10골 8도움을 기록한 이우영은 일본 잔류 대신 귀국 후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안양 LG 유니폼을 입는다. 그러나 무릎 부상으로 시즌 동안 단 두 경기에만 출전했고, 재활을 반복하다 결국 은퇴 수순을 밟았다.
“당시 내 나이가 스물여섯 살이었다.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나이에 부상으로 은퇴한 것이다. 물론 선수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참아가며 재활 프로그램을 소화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무릎이 원래 상태로 돌아오질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은퇴 외엔 방법이 없었다.”
스물 여섯 살, 은퇴를 선언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이우영 교수는 관절염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한창 성장하는 나이에 매일 뛰고 달리며 축구공을 놓지 않았던 생활이 무릎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무릎에 물이 차서 병원을 찾으면 당분간 축구하지 말고 쉬라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졌다. 치료받으면서 잠시 쉬다가 조금 괜찮아진 것 같으면 다시 뛰곤 했는데 통증이 가라앉질 않았다. 초등학교, 중학교에 전문 트레이너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때만 해도 아파도 참고 뛰는 선수가 성실하고 능력있는 선수로 평가받던 시대였다. 항상 부상 위험이 존재했지만 그 통증을 참고 뛰어야만 했다. 그래도 은퇴할 때까지 수술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의사는 수술해도, 안 해도, 축구를 오래하기 힘들 거라고 얘기했다. 그만큼 무릎이 망가졌다는 의미였다.”
은퇴 후에도 그 통증은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지금까지도 약간의 통증은 남아 있는 상태이고,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올 때 무릎이 쑤시는 증상도 여전하단다.
축구를 하고 싶어도 무릎 통증 때문에 계속 할 수 없었던 이 교수는 은퇴 후 6개월 정도 동대문시장에서 옷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냥 집에만 있으면 자꾸 축구에 대한 미련을 키울 것 같아서 친척 누나와 함께 남자 셔츠를 파는 도매상에 뛰어 들었다. 배운다는 생각으로 매일 새벽에 출근해서 밤 늦게 퇴근하는 일을 반복했다. 당시 안양 LG 선수들도 날 도와주기 위해 동대문시장까지 찾아와 옷을 사주곤 했다. 동대문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왜 벤츠나 BMW를 타고 다니는지 알겠더라. 장사만 괜찮으면 돈도 꽤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6개월 하다가 그만 뒀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리 애를 써도 내 마음은 축구장으로 향했다. 옷을 팔다가도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나’하는 생각에 갈등이 반복됐다. 그때 모교인 연세대 김준현 감독님이 도와달라며 손을 내미셨다. 덕분에 모교 축구부 코치를 맡아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연세대에서 1년 6개월간 코치 생활을 했던 이우영 교수. 이번엔 김호곤 감독의 절친인 오이택 선생(연세대 아이스하키 OB)을 통해 일본 고등학교의 코치 자리를 소개받으며 그의 삶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오이택 선생이 소개한 학교는 일본 센다이에 있는 이쿠에이 시골 고등학교였다. 오이택 선생은 이후에도 이 교수를 여러 형태로 도왔고, 이 교수 또한 오이택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마음속에 새기며 살았다고 말한다.
“센다이에서도 멀리 떨어진 시골 학교였다. 제안을 받고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한국을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부담 없이 떠날 수 있었다. 물론 선수들에게 축구 지도를 하는 것도 목표였지만 그곳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개인적인 공부를 하고 싶은 계획도 세웠다. 일본은 수업 시간에는 훈련하질 않는다. 그래서 나도 학생들과 함께 오전에는 일본어 수업에 들어갔다. 그 학교에는 외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일본어 수업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게 큰 도움이 됐다. 연세대 코치 시절, 학교에서 운영하는 어학당에 다닌 적이 있었다. 기숙사에서 가까웠고,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터라 연세대 어학당을 다니며 일본어를 배운 경험이 일본 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 정확하진 않아도 훈련을 하며 선수들과 의사 소통이 가능했으니 말이다.”
<일본대학 대표팀을 이끌고 한국대학 대표팀과 경기를 펼쳤을 당시의 감독 이우영.>
일본의 지도자 생활, 새로운 인생 개척
이 교수는 그 고등학교에서 1년 반 동안 코치 생활을 하다 2003년 3월 게이오대학교로부터 전임 코치직 제의를 받고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이 교수의 행보 중에 눈에 띄는 부분은 ‘공부’였다. 게이오대학 축구부 코치를 맡고 나선 준텐도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2년간의 석사 과정을 마친 후엔 일본체육대학의 대학원에 입학했고, 5년 만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일 축구의 비교 분석을 바탕으로 한 ‘축구선수의 인지적 트레이닝의 유효성에 관한 연구’란 논문이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이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축구’를 선수들에게 주문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런 훈련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생각하며’ 축구하기란 쉽지 않다. 어릴 때 어떤 점을 생각하고, 어떤 부분을 강화해야 좋은 선수가 되는지 궁금했다.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서 분석하면 우리가 모르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논문 준비하는 데만 5년이 걸렸는데 한국과 일본에서 축구를 한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 동료 선후배 선수들,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한국과 일본의 대학 리그 통계를 모두 뽑아서 분석했다. 그 결과 한국의 지도자들이 실력이나 지도 능력은 뛰어났지만 선수들의 동기유발과 관련해선 일본 지도자들이 앞서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선수들도 한국은 상황 판단력과 작전 능력이 앞서지만 집중력과 심리적인 면에선 일본 선수가 뛰어났다. 일본은 인지적 트레이닝을 통해 자신들의 단점을 보완해 나갔다. 즉 축구에서 체력, 정신력, 기술의 3박자가 중요한데 공을 잘 다루는 기술, 그 안의 상황 판단력이 어느 정도 나타나는지가 포인트였다. 연구한 내용을 토대로 게이오대 선수들의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학교 관계자들과 일부 선수들은 이상적인 축구라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2부리그에서 1부로 올라서며 성적을 내니까 나중엔 그들도 내가 추구하는 지도법을 인정했다.”
현재 게이오대를 거쳐 센슈대학에서 스포츠 코칭학 교수와 축구부 코치로 활약 중인 이우영 교수. 나중에 한국에서의 지도자 생활을 꿈꾸고 있는지 궁금했다.
“난 내가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한국이든 어디든 다 갈 의향이 있다. 그리고 감독보다는 코치가 나한테 맡는다. 선수들과 좀 더 가까이 부대끼면서 선수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을 즐기고 싶다. 물론 지금 내가 있는 교수직은 정년이 보장돼 있기 때문에 중간에 내가 그만두지 않는 한 잘릴 일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자리에 안주할 생각은 없다. 종종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지인들 연락을 받는다. 그러나 한국 축구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본다.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최고의 전성기? 바로 지금!
이우영 교수는 지도자들도 한국만이 아닌 외국에 나가서 선수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수단을 이끄는 이성제 감독, 홍콩대표팀의 김판곤 감독, 중국 옌볜 FC의 박태하 감독 등 외국에서 활약하는 지도자들이 늘어난다면 언젠가는 그 모든 것들이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쓰일 것이라고 말했다.
“좁은 나라에서 아는 사람들끼리 ‘밥그릇’ 싸움하며 밟고 밟히는 인생에 내몰리지 말고 유럽, 아프리카, 미국, 어디든 나가서 지도자로 많은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야 이영표가 프리미어리그에서, 손흥민이 분데스리가에서 감독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교수는 자신의 축구인생을 이렇게 정리했다.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내 축구인생은 ‘운구기일’이었다.”
‘비운의 스타’ ‘게이오의 영웅’이란 수식어가 이우영 교수의 삶을 대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꼬인 축구인생을 개척해 나갔다. 선수로선 ‘비운’이었지만, 은퇴 후의 삶은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은퇴 선수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했고, 인정받았다. 그게 운이었든, 노력이었든지 간에 말이다.
인터뷰를 마친 후 영상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 이우영 교수에게 “최고의 전성기가 언제였나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지금이죠. 지금이 최고의 전성기입니다”라고 대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