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간 목요일>
< 더러움>
성경에서 ‘더러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질병이지요.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질병은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부정한' 상태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병자들을 접촉하는 것을 꺼리고 심한 경우는 그들을 공동체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두 번째는 죄입니다. 육신의 부정함이 질병이라면 영혼의 부정함을 죄로 간주한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더러운 영'이 그러한 표현입니다. 그들은 단지 육적인 질병에 시달리는 개체를 넘어 그 영이 악에 의하여 지배, 장악된 ‘더러운 영’이라는 표현을 가감없이 사용합니다.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질병을 죄의 결과로 간주하였던 시대상을 고려하면 접근이 용이한 해석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현대 세계의 더러움이라는 개념은 훨씬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병고가 안고 있는 부정함에 더럽다는 개념을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오염이 되었고 감염이 된 것입니다. 부정한 부분을 도려내고 깨끗한, 정한 것으로 돌려세우는 것에 있어 과거에 비해 상당한 기술과 지적 접근이 현저하게 향상된 이 시대는 오히려 환자들이 모여 있는 병원이 더러운 곳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깨끗하고 청결한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반대로 '영혼의 더러움'은 과거보다 외연이 확장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시대에 영적 더러움은 갖은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한정되었다면 이 시대에는 훨씬 많은 사람들, 가장 똑똑한 공부를 많이 하고 서울대에 유학에 오만 석박사를 다 하고 있으면서도 돈과 권력과 사익에 눈이 먼 사람들, 그들을 보면서 깨끗하지 못한 세상, 정의롭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하고 상생하지 못하는지를! 영과 정신이 부박하고 더러워진 사람들의 면면들을 하루 종일 뉴스를 통해 듣게 만듭니다.
그래서 더럽다는 것의 현대적인 해석은 그렇습니다. 더러워서 그 자체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더럽게 만들기 때문에 더러운 것입니다!
하는 꼬라지를 보면 정말 "더러워서 살겠나!" 는 자괴를 하루에서 수십번 내뱉게 만듭니다. 결국 3대째 세습을 하고 있는 삼성공화국의 황태자는 수백억을 뇌물로 바치고도 구속조차 당하지 않습니다.
전주의 어느 버스 기사는 2,400원 회사에 사납금 넣지 않았다고 ‘정의’의 이름으로 해고를 하더만 수백억을 횡령해도 오만 똑똑한 사람들이 나서서 논리와 실리로 방어를 해주니 아무 일 없는 듯 새벽에 자택으로 돌아갔답니다. 이게 더러운 것이지요. 1988년 탈옥수 지강원이가 자기 머리에 총을 겨누고 소리쳤던 “유전무죄, 무전유죄! 더러운 세상!”의 외침에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진일보해 있을까?
불행하게도 30년 전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결국 그 아버지의 그 자식들이 얼굴과 직책만 바뀌었을 뿐, 그나물의 그밥이 그대로 해먹는 나라에서는 앞뒤양옆 꼼짝하지를 않습니다.
더러운 영들도 그분 앞에 서면 제 부끄러운 줄을 알았다는데, 인두겁이 얼마나 더 두꺼워진 세상이 되어야, 더러운 것을 더러운 줄을 알고 오늘 복음처럼 고백이라도 하며 살아가게 될까? 하루하루 복음이 아깝다는 생각밖에 들지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