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재떨이에 쌓인 담배꽁초의 수를 세었다. 여덟. 지금 물고 있는 것까지 합하면 아홉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담배연기를 피해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 머리에 꽂은 상중(喪中)을 표시하는 리본이 가늘게 흔들렸다. 여자의 어머니는 주민등록상으로 1946년 3월 19일 생이었다. 죽기에는 조금 이른나이군.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는 서류를 한 장 넘겼다. 사망 원인은 화재에 의한 질식사였다. 경찰은 기도를 하기 위해 켜 두었던 촛불이 커튼에 옮겨 붙으면서 불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 그러니까 17일이죠, 그날 어머니는 헬스클럽에 등록을 했어요. 그것도 세 달치를 한 번에 냈다구요. 세 달치를. 여자는 그에게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이면서 세 달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6개월 과정의 제과제빵학원에 등록한 사람도 있었죠. 그사람은...... 그는 여자가 매달리고 있는 끈을 끊어 버리고 싶은, 끈 따위는 끊어지면 그만일 뿐 아무 희망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거기까지만 하자.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 그래요. 여자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떡이며 대답했다. 그렇다니. 그는 여자의 대답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뜻인지, 그게 자기와 무슨 상관있냐는 뜻인지. 여자는 실망하는 기색도, 당황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서류 한 켠에 이렇게 적었다. 자살이 아닐 가능성은?
죽기 한 달 전에 제빵학원에 등록했던 남자는 사업에 실패한 중소기업 사장이었다. 중학교 1학년인 아들과 초등학교 2학년인 딸, 그리고 부인 앞으로 남겨진 보험금은 모두 13억. 그중에서 그의 회사가 지불해야 할 돈은 8억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푼의 보험금도 받지 못했다. 교통사고를 위장한 자살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유가족들은, 사업에 실패한 후 한동안 실의에 빠져 지낸 것은 사실이었지만 최근에는 새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누구보다도 강했다고 주장했다. 남자는 제과제빵학원에 등록을 했고, 자격증을 따면 빵집을 차릴 것이라며 인근 빵집들의 사진을 찍어 두기도 했다. 노트에는 디자인이 독특한 빵집의 사진이 가득 붙어 있었다. 남자는 시 외곽의 국도에서 교통사고 다발지역이라고 쓴 경고문을 들이박고 죽었다. 사고는 너무 지나치게 깨끗했다. 비 오는 날이었고, 1년이면 열 명은 족히 죽는다고 알려진 도로였다. 새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했으므로 남자의 죽음은 더욱 빛났고, 사람들에게 도대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회의를 느끼게까지 했다. 그래서 그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남자는 왜 교통사고 다발지역이라는 경고문을 들이박았을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결코 자살이 아니라고. 단순한 교통사고 로 봐달라고. 남자는 죽으면서까지 완전한 증거를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것이실수였다. 교통사고 다발지역. 그것은 죽은 남자가 남긴 유서였다.
여자의 어머니가 가입한 보험은 모두 네 개였다. 그는 머릿속으로, 여자가 탈 수 있는 보험금이 얼마나 되는지를 계산하였다. 1억과 1억 5천만원, 그리고 20년 동안 매년 지급되는 돈이 각각 300만 원과 400만 원이었다. 보험금을 노린 사건치고 큰 액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월 납입료가 많은 부담감도 불구하고 사망시 유족에게 지급되는 금액이 큰 상품에만 강비했다는 것, 노후보장을 위한 연금성 보험들 두 개나 가입했다는 것이 의심스럽다며 과정이 그에게 이 사건을 넘겼다.
왜 연금성 보험을 두 개나 가입했을까요?
여자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무엇인가를 찾았다. 박희영 씨네요. 어머니에게 보험을 권했던 설계사분 이름이요. 그분이 그러시는데, 어머니가 자식이라곤 딸이 하나밖에 없어서 연금이라도 많이 가입해 둬야겠다고 했대요.
대부분의 유가족들은 사고였는지 자살이었는지를 알고 있다. 어떤이들은 죽기 전까지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으려 애를 쓰겠지만, 자살을 생각한 순간부터 자기의 몸에서 무엇인가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은 막지 못한다. 그래서 가족들은 자신의 배우자 혹은 부모님이 비어 가고 있다는, 언젠가는 허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 할 수 있다. 물론 그가 만난 유가족 중에 그것을 인정하려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서 그는 자기가 밝혀 낸 자살 중에서 , 몇 건이 진짜였는지는 모른다.
그는 서류에 55세라고 적고는 그 위에 동그라미를 여러 번 그렸다. 주민등록상으로 55세가 된 날, 여자의 어머니는 죽었다. 두 개의 연금보험은 55세를 기준으로 각각 100만원이 더 지급된다. 그러나......시집도 안 간 딸을 놔두고 자살한 어머니. 그럴 정도의 절박한 상황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5년만 더 있으면 매달 40만원의 연금이 지급될 것이고, 그러면 멋진 노후를 설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말 제 어머니가 자살을 했다고 생각하세요?
그는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4억이나 되는 보험금을 놓칠지 모르는데도 여자는 초초해하질 않았다. 여자는 말을 할 때마다 오른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는데, 그럴 때마다 오른쪽 눈가에 옅은 주금이 생겼다. 그는 서류를 덮으면서 이 일은 그만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설사 자살이었다 하더라도 입증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는 여자처럼 입꼬리를 한번 실룩거린 다음,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만일 자살이 아니라고 확신한다면, 저를 설득해 보세요.
2
36단 기어가 있는 자전거, 라고 그녀는 수첩에 적었다. 그러고는 그 옆에 괄호를 치고는 자전거 색에 맞는 운동복이라고 썼다. 스포츠용품점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수첩 한 장이 가득 채워졌다. 생활용품이 있는 5층으로 올라가면서 그녀는 수첩을 다음장으로 넘겼다. 백화점에는 유리창이 없다. 그녀는 백화점 식품매장에서 3년을 일했지만, 오늘에서야 유리창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식품매장은 지하 1층에 있으
니 유리창 따위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3층매장을 돌다, 그녀는 비가 오는 날이면 백화점 정문에서 나눠 주는 우산 덮개 비닐이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비가 오나, 그녀는 고개를 들어 밖을 보려했지만 어디에도 유리창은 없었다.
오늘부터 13일 간 백화점은 세일에 들어갔다. 11시부터 있었던 반짝 세일에서, 그녀는 100상자 한정으로 한우 갈비세트를 판매했다. 물건은 15분이 지나지 않아서 동이 났고 물건을 사지 못한 사람들은 그녀에게 항의를 했다. 발단은 줄을 섰을 때는 분명히 100명 안에 들었다는 한 아주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 아주머니는 자기가 분명히 87번째였다고 우겼고, 그 말에 아주머니가 앞줄에 서 있던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물건은 100개가 아니었을지 모른다고 누군가 말하자, 사람들은 소비자권리를 운운하며 책임자를 찾았다. 관리자가 나서 해명을 하는 동안 그녀는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1층부터 쇼핑을 하기 시작했다.
5층에서 한 직원이 그녀를 알아봤다. 언니, 이 시간에 웬일이야. 몇 달까지만 해도 지하 식품매장에서 같이 일을 하던 직원이었다. 나 백화점 그만뒀어. 그녀는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청바지를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그건 그렇고, 여긴 왜 창문이 없니. 언닌 그것도 몰랐어. 백화점에는 원래 창문이 없어. 시계도 없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쇼핑하라는 뜻이잖아.
그녀는 패스트푸드점에 앉아서, 도로 건너에 있는 공사중인 건물을 바라보았다. 6층 건물이 철근 구조물에 싸여 있고 인부들이 매달려 있었다. 건물은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겉만 보수를 하는 중이었다. 2층 미용실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저 건물 지하에는 카페가 하나 있었다. 자리마다 칸막이가 쳐 있고 조명 대신 촛불을 밝혀 주던 곳. 입구에는 여덟 개의 촛불이 켜져 있었는데 밑에 쌓여 있는 촛농이 가게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 그 카페를 출입했을 때가 고등학교 2학년. 촛농이 무릎 높이로 쌓여 있었다. 촛농에 덮여 볼 수 없지만 촛대의 아래쪽에는 정말 근사한 장식이 있다고 그녀에게 카페를 소개시켜 준 E가 말했다. 그런 식으로 E는 자기가 얼마나 오래된 단골인지를 자랑하고 싶어했다. 그곳에 드나들던 친구들이 각자 흩어지면서, 그녀도 발길을 끊었다. 마지막으로 간 게 5년 전인가. 그녀는 수첩을 꺼내 카키색 사파리라고 적었다. 고등학교때 제일 부러워했던 것은 E가 입고 다니던 카키색 사파리였다. 그녀는 카운터로 가서 치즈버거와 콜라 하나를 시키고는, 카운터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3시 23분. 탈의실에서 나왔을 때가 11시 40분쯤이였으니까, 거의 네 시간동안 백화점을 돌아다닌 것이다.
만약 주변의 누군가 죽는다면, 이런 봄날 죽었으면 좋겠다.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말에 그녀는 햄버거를 씹다 말고 삼켰다.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겨 봤지만 가슴에 얹힌 햄버거는 내려가질 않았다. 너, 검은색 정장이 봄옷 한 벌뿐이라 그러지, 미친년. 뒷자리에 앉은 여자들이 낄낄대고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콜라 뚜껑을 열고는 남아 있는 콜라를 마셨다. 컵에 남아 있는 얼음까지 모두 먹은 다음에야 가슴이 시원해졌다. 건물 입구에는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그 카페가 지하에 있는지, 있다면 입구에 밝혀 놓은 촛불도 여전한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차도 건너편에서 볼 적에는 건물에 많은 사람들이 매달려 있던 것 같았는데, 건물 아래에서 보니 5층쯤에 두 명의 인부만이 보였다. 그중 한 남자가 발을 헛디뎠다. 그 바람에 그녀의 눈에 무엇인가가 들어갔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벌리고는 다른 손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눈에 들어간 티가 빠지지 않자 고개를 숙이고는 눈물을 흘려 보려고 애를 썼다. 그 순간, 그림자가 그녀를 스쳤다.
건물에 매달려 있던 남자가 떨어졌다. 건물에 쳐 놓은 안전망은 남자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고 안전망을 지탱하던 파이프 하나가 지나가던 사람의 어깨를 내리쳤다. 남자는 그녀 앞으로 떨어졌다. 그녀가 조금만 몸을 돌렸어도 남자는 그녀의 목을 덮쳤을 것이다. 떨어진 남자의 머리에선 피가 흘렀고 그 피가 그녀의 구두 밑창으로 흘렀다. 남자의 오른손은 그녀의 발목에 닿아 있었다. 손에 무엇인가 반짝이는 것을 쥐고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남자의 손을 옆으로 옮기는 척 하면서, 쥐고 있는 물건을 꺼냈다. 손목시계였다.
3
그는 C역에서 내렸다. 역 광장은 작고 아담했다. 광장의 오른편에는 햄버거 가게가 하나 있고, 왼편에는 3층이 넘지 않는 건물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그는 햄버거 가게로 가, 광장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 일자형의 테이블에 앉았다. C역의 주변 건물들은 모두 C역을 닮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건물 꼭대기에 모형 볼링핀이 세워진 건물을 보았다. 그가 중학교 때 지은 건물이었다. 지하1층의 오락실부터 2층의 당구장까지, 주말이면 학생들로 가득 찼었다.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을 했던 아이네 집이었는데, 그들은 그 건물 3층에서 살았다. 그 건물에서 나오는 걸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들키면, 손가락으로 맨 꼭대기 층을 가리키고는 이렇게 말했다. 친구네 집에 왔던 거예요. 볼링장 옆에 지어진 건물들은 그가 C를 떠난 다음에 지어졌다. 1년에 한두 번씩 C에 내려오면 역 주변은 항상 공사중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 건물에서도 새것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새 건물이 지어지면 상대적으로 초라해지게 되는 옛 건물들도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C는 태어날 때부터 조숙한 아이, 그러나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아이와 같았다. C에서 태어나 C에서 자란, 그와 그의 친구들이 그런 것처럼.
종업원이 다가와 그가 앉아 있는 자리를 닦았다. 더럽지도 않은 탁자를 닦는 것은 음식을 시키든지 이제 그만 나가든지 하라는 뜻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햄버거 가게에는 햄버거를 사 먹는 사람보다 팔짱을 끼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의 옆에 앉은 여자도 한 시간 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통유리로 된 벽에 맞대어 있는 일자형의 탁자에는 그와 그 여자만이 앉았다. 여자는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신발은 옷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운동화였다. 그는 시계를 한번 들여다보고는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35번 버스가 정거장에 섰다가 두 명을 태우고는 이내 출발했다. 변동이 없다면, 35번 버스의 배차 간격은 15분일 것이다. 35번 버스는 그가 살던 동네를 지나간다. 고향집에는 그의 어머니와 형이 살고 있다. 한번 다녀가라. 어머니는 전화를 할 때마다 그렇게 말했다. 그는 역사로 들어가, 되돌아가는 승차권을 끊었다. 지난 두 달 동안 그는 C역에 여덟 번을 왔다. 토요일 오후 그는 2시 03분이나 2시 16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탔고, 햄버거 가게에 앉아 있다가 종업원이 탁자를 닦을 때쯤이면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주말이라 좌석을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는 일곱 살 정도 된 계집아이가 앉아 있는 좌석에 몸을 기댔다. 입석으로 갈때면 그는 어린아이가 앉아 있는 좌석을 찾았다. 어른들보다 덩치가 작아서 손잡이에 앉아 가기가 편했다.
여기 제 자리인데요. ......이봐요. 여기 제 자리라니까요.
C역을 출발한 지 30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그는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운동화를 신은 여자가 보였다. C역의 햄버거 가게에서 만난. 푸른빛이 도는 안경을 낀 여자가 자리에 앉아 있는 운동화를 흔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운동화는 눈을 찌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태를 파악했는지 안경 낀 여자에게 사과를 하며 일어났다. 그는 썩 훌륭한 연기군, 이라고 중얼거렸다. 운동화는 잠들지 않았었다. 안경 낀 여자가 흔들어 깨울 때, 운동화는 허벅지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어떤 리듬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개찰구를 나와 그는 지하 상가로 들어갔다. 우동 한 그릇이요. 가게 주인은 그를 알아보았다. 출장 갔다 오시나 보죠. 그는 수저함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내며 끄덕였다. 이번에는 어딜갔다 오셨나요? P시에요. 그렇게 출장을 많이 다니면 외롭지 않으세요. 날마다 밥도 혼자 먹어야 하고. 가게 주인은 그 앞에 우동 한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C시에 갔다 오는 날이면 그는 이곳에서 우동을 사 먹었다. 우동 한 그릇을 다 먹을 동안 그는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혼자 밥은 먹는 것은 그이 오래된 습관이었다. 이제 회사 동료들은 점심시간이 되도 그에게 밥을 먹으러 가자고 권하지 않았다. 혼자 밥을 먹으면서 그는 자기 안에 숨겨져 있는 쓸쓸함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것이 고향 C를 떠난 다음에 그가 스스로에게 내린 벌이었다.
어서 오세요. 문에 매달아 놓은 좋이 울렸다. 어디 갔다 오시나 보죠. 가게 주인은 그의 앞에 있는 수저함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내갔다. 예, P시에요. 그는 등뒤에 꽂히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뒷자리에 앉은 사람은 기차에서 만난 운동화였다. 운동화는 김밥을 먹고 있었다. 그는 운동화가 앉은 탁자로 다가가 맞은편 의자에 앉고는, 말을 건넸다.
잠을 자는 척하던 연기는 좋았어요.
4
경찰에게 전화가 오자 그녀는 짜증이 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그녀는 그날 하루의 일을 다섯 번도 더 반복해서 이야기해야 했다. 또 무슨 일이죠? 그녀의 따지는 듯한 말투 때문인지 경찰은 더듬었다. 저, 저...... 어제 사고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목격자로서 몇 가지만 말씀해 주면 됩니다. 사고요? 그제서야 그녀는 그녀의 발목에 손을 얹고 죽은 남자를 떠올렸다.
구두에는 얼룩이 져 있었다. 그녀는 휴지에 물을 묻혀 구두를 닦았다. 휴지가 붉게 변했다. 실족사한 남자의 머리에서 흐른 피였다. 그녀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구두라고 적었다. 수첩에는 그녀가 사야 할 물건을 적은 목록이 가득했다.
그녀에게 전화를 건 경찰은 파란 모자를 쓴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경찰은 그녀에게 커피 한 잔을 뽑아 주면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순식간이었죠. 제 옆에 서서 일을 했는데, 어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까, 그만....... 손을 뻗을 시간도 없었죠. 파란 모자는 허공에 대고 손을 뻗는 시늉을 했다. 팔은 시계 자국만 남겨 놓고 검게 그을렸다. 그 자국을 보고 원래는 참 흰피부구나,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의례적인 거니까, 그날 본 것만 말씀해 주세요. 그녀는 조금전까지 파란 모자가 앉았던 자리로 옮겨 앉으면서 말을 했다. 아무것도 못 봤어요. 눈에 티가 들어갔거든요. 전 그때 눈물을 흘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죠.
장례식장에는 모두 일곱 명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었다. 세 명은 노인이었고, 한 명은 아주머니 또 한 명은 50대의 남자였다. 실족사를 한 남자의 빈소는 초라했다. 영정 속에 있는 남자의 얼굴은 앳되었다. 죽은 남자의 어깨에는 누군가의 손이 올려져 있었다.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에서 오린 듯했다. 경찰은 죽은 남자가 스물여섯이라고 했다. 조문객들은 스무 명이 되지 않았다. 모두 두 테이블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한쪽은 남자의 친구들인 모양이었다. 눈에는 충혈이 졌고, 서로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쪽은 현장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들 같았다. 그들의 자리에는 술병이 가득했다. 갑자기 한 사내가 큰 소리를 내며 울었다. 경찰서에서 보았던 파란 모자였다. 하지만 사내의 울음에는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슬픔이 담긴 눈물이었다면, 애써 눈물을 참고 있던 사람들에게 옮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죽은 남자의 친구들은 눈에 고인 눈물을 닦고는 이상하다는 듯이 파란 모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빈소에 봉투 하나를 올려놓고는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경비는 그녀를 보자 경비실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가씨. 집은 언제 고칠거요? 그녀는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유리창이 깨진 베란다와 검게 그슬린 벽이 보였다. 보험금이 나오거든요. 보험금이 나오면, 그녀는 윗집의 베란다를 고쳐 주어야 했다. 불을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은 맞은편 동에 사는 남자였다. 안방의 창문이 베란다와 연결되어 있는 바람에 불길은 베란다를 통해 윗집으로 올라갔지만, 다행히도 불이 더 퍼지기 전에 소방차가 왔다. 불은 안방과 거실을 태우고 꺼졌다.그녀의 어머니는 현관 틈에 얼굴을 대고 죽어 있었다. 질식사였다. 그래도 어머니의 시신이 불에 타지 않아서 다행이라도 그녀는 생각했다. 추한 모습은 남에게 보이기 싫어하시던 분이었으니까.
그녀의 방은 온전했다. 문이 반 정도 탔을 뿐이다. 화장실 문은 활짝 열린 채로 불에 탔다. 까맣게 타 버려, 건드리기만 하면 폭삭 가라앉을 것만 같은 문을 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바닥에 앉아 오줌은 누다 말고 그녀는 웃었다. 그래도 문이라고, 다 타버린 문을 열고 닫고 자신이 우스웠다. 이 집에 누가 있다고.
그녀는 검게 탄 텔레비전 앞에 쭈그려 앉았다. 손가락으로 브라운관은 만지자 검은 재가 묻어 나왔다. 브라운관에 네모를 그리고 그 안에 동그라미들을 그려 넣었다. 그러자 꼭 리모컨 같았다. 거실에 있는 시계는 1시 25분에 멈췄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았다. 8시 30분. 어머니가 좋아하는 연속극을 할 시간이었다. 그녀는 브라운관에 그린 리모컨의 버튼을 꾹 눌렀다. 그녀는 수첩을 펼친 다음에, 텔레비전을 적은 장을 찾았다. 무선 다리미, 오디오, 다음에 텔레비전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그 옆에 괄호를 치고는 와일드 평면 TV 63인치라고 썼다.
5
왜 매주 C역엘 가죠? 그냥 되돌아올 거면서.
어떻게 알았죠?
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운동화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말하면 당신도 이율 말해 줄 거죠?
운동화는 깍지 낀 손에 턱을 괴고는 이야기를 했다. 운동화가 C역에 가길 시작한 것은 올 1월이었다. 토요일 오후면 C역에 가는 기차표를 끊었고, 햄버거 가게에 앉아 C역의 광장을 쳐다보다가 그냥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고 했다. 그를 본 것은 한 달 전. 기차에서였다. 기차에서 본 사람을 햄버거 가게에도 또 보게 되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고, 자기처럼 그저 멍하니 광장만 바라보다가 되돌아가는 것이 궁금증을 일으켰다고, 운동화는 말했다. 거기까지 말을 하고는 운동화는 그를 쳐다보았다. 이제는 그가 말할 차례라는 표정으로.
C역은 고향이거든요. 됐죠?
그는 짧게 대단했다.
이율 말해야죠. 왜 역 광장만 멀거니 바라보다 되돌아오는지를. 그 동안 얼마나 궁금했는지 아세요. 나는 당신이 말한 만큼 대답했어요. 운동화는 깍지를 낀 손을 풀고는 의자를 앞으로 당겼다.
좋아요. 사실은 어떤 남자를 찾고 있어요. 내 통장을 가지고 도망간 놈인데, 고향이 C거든요. 처음에는 막연히 C역엘 갔어요. 광장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만 쳐다봤죠. 혹시 그 남자가 있나 해서요. 도망가면 쫓아가려고 운동화도 신었다니까요. 사진 보여 드릴까요? 고향이 C라니까, 혹시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잖아요.
그는 사진을 보지 않았다. 그는 그 남자가 친구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막연하게 들었다.
이제 내가 이야길 할 차례네요. 어느 날 고향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막상 C역에 도착했더니 갈 데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광장만 쳐다보다가 되돌아왔죠. 왜 매주 갔는지는 설명할 수 없어요. 정신을 차려 보면 C역이더라구요.
그는 고향집에 있을 어머니와 형을 떠올렸다. 어머니는 점점 빈껍질이 되어 갔다. 얼마 있으면, 형의 휠체어도 제대로 끌지 못할 것이다. 그의 월급의 반은 자동이체로 빠져나갔다. 고향집의 전화요금과 전기요금, 그리고 보험납입료였다. 그가 어머니 앞으로 들어 둔 보험은 세 개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형 앞으로 보험금이 지불될 것이다. 그가 자신 앞으로 들어 둔 보험은 다섯 개. 역시 자기가 죽으면 모두 형 앞으로 보험금이 지불될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면, 형은 1억 5천만 원과 1년에 800만 원씩 20년을 받게 될 것이다. 자기가 죽게 된다면, 형은 4억하고 2년에 200만 원씩 20년을 받게 될 것이다. C에 가는 기차 안에서 그는 보험금을 계산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두 달 전 토요일, 어머니의 생일날이었다. 그날 그는 C역에 내렸지만 집에 가질 못했다.
운동화의 직업은 영화 엑스트라였다. 그는 비디오방에 가서 운동화가 출연했다는 영화를 보았다. 봤어요. 지금 지나갔는데. 첫 번째로 본 영화에서 그는 운동화를 찾지 못했다. 비디오방은 비디오를 틀어 주는 곳이 따로 있어서 되돌려 볼 수도 없었다. 미안, 깜빡 졸았나 봐요. 운동화는 그 영화를 찍었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살이 쪘었다고, 그래서 알아보지 못했을 거라고 그를 위로했다. 두 번째로 본 영화에서는 금방 운동화를 찾을 수 있었다. 첫 번째와 달리 대사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장례식장에 가는 게 제일 두려워. 그게 운동화의 대사였다. 주인공이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일이 무엇인지를 묻는 장면 중 하나였다. 사실은 대사가 더 길었는데 편집됐어.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이 두려운 게 아니라, 장례식장에서 눈물이 나지 않을까 봐 두렵다는 거예요. 이제 다음 대사였어. 운동화가 출연했다는 영화를 두 편 더 보고 나니까 아침이었다. 운동화는 자기가 나올 장면을 미리 알려 주었지만, 그는 운동화를 찾지 못했다.
그는 설렁탕 두 그릇을 시켰다. 설렁탕이 나오기 전에 운동화는 깍두기 한 접시를 다 먹었다. 운동화가 깍두기를 다 먹은 것을 언제 보았는지, 종업원은 설렁탕과 함께 접시 한가득 담긴 깍두기를 내려놓았다. 설렁탕을 먹다 말고 그는 운동화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는 건, 올해 들어 처음이야.
6
백화점 앞에서 버스는 더디게 나아갔다. 세일 마지막 날이었다. 버스가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앞에 앉은 남자가 창문을 열고는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곧이어 다른 사람들도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자 그녀도 밖을 보았다. 파란 모자를 쓴 사내가 거기 있었다. 공사중인 6층 건물에. 일을 하기 위해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건물에 등을 기대고는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녀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건물을 향해 뛰었다. 몇몇 인부들이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파란 모자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내려와서는 좌석 버스를 탔다.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더니 내릴 때까지 뜨지 않았다. 한 시간쯤 달렸을까. 마른세수를 한번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파란 모자를 따라 내렸다.
버스 정거장에는 인형뽑기 오락기가 있었다. 꼬마아이들이 한 개의 인형도 건지지 못했는지, 에잇 하며 오락기를 발로 걷어찼다. 파란 모자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오락기에 동전을 집어넣었다. 편의점에서 동전을 바꿔 온 모양이었다. 오락기에는 한 판→100원, 6판→500원, 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점점 꼬마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이건 말이다, 인형의 생김새를 잘 봐야 해. 겨드랑이와 다리를 잘 노려야 된다구.
파란 모자는 세 번이나 네 번에 한 번 꼴로 인형을 건졌다. 고리가 인형을 들어올렸다 떨어뜨릴 때면, 그는 아쉬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파란 모자는 열한 개의 인형을 뽑았다. 하지만 가방에 인형을 넣는 파란 모자의 얼굴은 하나도 기뻐 보이질 않았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 상가에는 두더지 오락기가 있었다. 주머니에 잔돈이 있으면 한 판씩 하곤 했는데, 오락이 끝나고 나면 이상하게 눈물이 나려 했다. 마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생일날, 제일 하찮은 물건을 산 다음 스스로에게 선물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혼자 두더지를 하고 있는 어른을 보면, 그녀는 참 슬프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 어디서 봤던가요? 파란 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병원 장례식장에서……. 그녀는 자기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몰라, 말을 흐렸다. 아! 안녕하세요. 그 자식이 아가씨 자랑 많이 했었죠. 파란 모자는 그녀를 죽은 남자의 애인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파란 모자 앞에서 죽은 남자의 애인이 되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을 듣고 싶어요.
파란 모자는 고개를 기울이고는 한쪽 귀를 손바닥으로 건드렸다.
우리는 그냥, 프로야구 이야길 했어요. 야구 초창기 시절, 미국에 도루왕을 노리는 선수가 있었대요. 그 선수는 도루수를 늘리기 위해 1루에서 2루로 도루를 하고는, 2루에서 1루로 다시 도루를 했다나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그녀는 파란 모자의 신발을 보았다. 갈색 랜드로바였는데, 군데 군데 진한 갈색으로 얼룩이 져 있었다. 파란 모자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는, 슬그머니 발을 자기 앞으로 오므렸다. 그 자식을 들것으로 옮길 때 묻었는데 안 지워지네요.
이제 그만 하자고, 그녀는 자신을 타일렀다. 파란 모자가 남자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으면 어떻고, 또 손이 미끄러졌으면 어떤가.
형은 꼭 8번 타자 같아요. 그게 그 자식이 한 마지막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옆 칸으로 옮겨갔는데, 그때 미끄러졌죠.그녀는 주머니에서 손목시계를 꺼냈다. 그리고는 파란 모자의 왼손에 난 시계 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돌려드릴께요.
7
공사중인 어느 건물에 사람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고 운동화는 말했다.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닌 듯, 철근 구조물 위에 앉아서 먼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고. 길을 가다 공사중인 건물을 보면 그는 누군지 모르는 그 사람이 생각났다. 언제? 어디서? 그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한걸로 봐서 어쩌면 운동화가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형의 소원은, 음성 인식 휠체어였다. 사고로 척추를 다친 다음부터 형의 소원은 그거 한 가지였다. 형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목뿐이었으니까. 그는 건물에 매달려 먼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천 원짜리를 백 원으로 바꿨다. 오락실 같은 데서 만나야 한 사람이 늦어도 화가 나지 않는 법이라고, 운동화는 말했다. 그가 할 줄 아는 오락은 테트리스뿐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오락기가 있는 입구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안으로 들어오니 한산했다. 테트리스는 모두 두 대였는데, 그중 한 대가 비었다. 동전을 넣으면서 그는 슬쩍 옆 화면을 보았다. 조각이 거의 꼭대기까지 차 있었다. 곧 죽겠군. 그는 한 판을 끝낸 다음 다시 옆을 보았다. 만약 머리에 꽂은 상장(喪章)을 보지 못했더라면 그는 계속 오락을 했을 것이다.
그 여자였다.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여자. 그는 머릿속으로 55세, 1억, 1억 5천만 원, 연금성 보험, 3월 19일 밤, 같은 단어들을 떠올렸다.
언뜻 보면, 여자는 오락을 못하는 것 같았다. 조각은 엉뚱한 곳에 놓여졌고 걸핏하면 꼭대기까지 쌓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여자는 위태롭게 오락을 이어 가고 있었다. 이제 죽겠군, 하고 생각이 되면 곧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그는 여자가 일부러 그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자는 판을 어렵게 만들고 다시 되살리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여자에게 인사를 했다. 여자는 그를 한번에 알아보았다. 보험금이 지급됐죠? 여자는 아직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곧 지급될 겁니다. 자살일지도 모른다고 끝까지 의심을 가졌다면, 여자는 어떻게 했을까? 그는 생각을 해보았다. 경찰은 단순한 화재사건이라고 결론지었고, 사망자는 거액의 빚도 없었다. 재판까지 갔어도 여자가 이겼을 것이다. 그럼. 여자는 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그는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져 여자를 뒤쫓았다.
3월 19일 밤에 무얼 하셨죠. 그날, 왜 집에 없었던 거죠.
여자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제가 꼭 대답할 의무가 있나요.
그는 다시 오락실로 돌아왔다.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운동화가 그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 여자가 그날 밤에 어딜 갔건 그게 뭐 중요하단 말인가. 그는 운동화에게 손을 흔들었다. 우리 어머니가 죽으면 1억 5천이고 내가 죽으면 4억이지, 그는 운동화에게 말했다.
운동화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8
열쇠를 꺼내다가 그녀는 현관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도둑이 들었나. 그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현관문을 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도둑이라니. 도둑이 왔다가도 저절로 나갈 텐데. 싱크대 위에는 사기로 만든 작은 항아리들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 항아리에 콩이며 팥이며, 잡곡들을 넣어 두었다. 하나는 바닥으로 떨어져 깨져 있었지만, 군데군데 검게 그슬렸을 뿐 나머지 항아리들은 온전했다. 어머니는 그곳에 지갑을 숨겨 두곤 했다. 그녀는 항아리 뚜껑을 열었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항아리 안은, 그녀가 어머니에게 선물했던 자주색 지갑이 어려 불그스름하게 보였다.
그녀는 헬스클럽 관장에게 어머니의 회원권을 보여 주었다. 회원권은 어머니의 지갑에 들어 있었다. 이걸 등록하시고는 몸이 편찮으셔서 한 번도 나오질 못했어요. 관장은 출석부에서 어머니의 이름을 찾았다. 그렇네요. 한 번도 안 나오셨네요. 관장은 어머니 대신 그녀가 다녀도 좋다고 했다. 특별히 봐드리는 겁니다. 관장은 회원권에 적힌 그녀의 어머니 이름에 두 줄을 긋고는 그 아래에다 그녀 이름을 적었다. 그녀는 가입신청서를 새로 작성했다. 관장은 어머니가 적었단 가입신청서를 빼고는, 그 자리에 그녀가 작성한 신청서를 끼웠다.
첫날이니까 오늘은 가볍게 걷기 운동만 하죠. 그녀는 런닝머신 위에 올라갔다. 이 버튼을 누르면 점점 속도가 빨라집니다. 그녀는 런닝머신이 돌아가는 속도에 맞춰 걸음을 걸었다. 헬스클럽의 전면은 통유리여서, 운동을 하면서 밖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가게들이 간판 불을 밝히고 가로등이 켜졌다. 밖이 어두워질수록 유리에 비친 그녀의 실루엣은 점점 선명해졌다. 유리에 비친 그녀의 실루엣 너머로 건너편 도로에 있는 가로수가 보였다. 그녀의 가슴에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속도를 조금 높였다. 몸을 조금 움직여 실루엣 안에 가로등이 들어오도록 했다. 가로등은 그녀의 왼쪽 가슴에서 빛났다. 마치 심장이 뛰듯. 그녀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한번하고, 그녀는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