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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으로부터 온 영(2)
고전 2:6-16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 설 교 >
하나님의 예비하심
고전 2:9-10 / 조용기목사 2015.11.29 주일4부예배
<서론>
하나님의 예비하심 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우리를 비교해 보면, 우리는 말할 수 없이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늘을 우러러 우리 지구가 속한 태양계를 보십시오. 태양계만 하더라도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등이 우리 태양 주위를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구만 태양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이 많은 다른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습니다. 우주에는 이런 태양계와 같은 행성계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우주를 우리 하나님은 손바닥에 얹어놓으시고 기뻐하십니다. 이 우주에 비교해서 우리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나를 너를 너무 사랑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아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 놓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다 지어놓으신 후에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런 글이 있는 것을 읽어보았었습니다. 하나님은, 눈이 있기 전에 빛을 예비하셨습니다. 코가 있기 전 공기를 예비하셨습니다. 귀가 있기 전에 생명의 말씀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입이 있기 전에 일용할 양식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발이 있기 전에 땅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아멘 까지는 할 필요 없지만 어떤 사람이 재미로 글을 맞추어 놓았는데 꽤 재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눅 12:29~30)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부터 시작해서 매일매일 생활에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근심할 필요가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본론>
1. 나는 우연한 존재인가
그러면 나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우연히 이 세상에 생겨났는가? 그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수 만 년 전에 하나님께로부터 예정을 입어 만들어졌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현재 지금부터 수 만 년 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예정해 놓았다. 그러니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우리가 태어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시간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만들어주시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해주셨습니다. 우리 우연히 하나님이 이리저리 거니시다가 발길에 탁 치이는 돌같이 아무렇게나 구원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 수 만 년 전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아셨습니다. 수 만 년 전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했습니다. 여러분 태어날 시기를 정해놓으시고 구원을 받을 때 친구가 전도를 해서 부모가 교회 가자고 해서 내가 환경에 예수를 믿을 수 있는 환경이 되어서 교회 나왔다고 생각한 사람 있는지 모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했기 때문에 여러분이 예수 믿게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로 5절에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러니 하나님께서 조금도 틀림이 없이 여러분을 귀중하게 여겨서 예정하시고 택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
하나님께서는 예비해놓으신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미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생애 속에 들어와서 우리 생애와 예수님의 생애가 플러스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벌써 다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예비해놓으신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혜가 되신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라’고 했는데 길이 바로 지혜인 것입니다. 지혜는 문제를 해결하고 비밀을 펼쳐놓는 능력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는 공부를 해서 배울 수가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아서 태어난 것이지. 지혜를 가진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고 숨긴 것을 풀어놓는 위대한 능력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동물들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지혜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연구해냅니다. 캄캄하고 답답한 곳에 길을 찾아냅니다. 지혜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이 지혜를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이 지혜가 우리를 어려움을 극복하고 무궁히 발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47편 5절에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혜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궁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예수님이 그 무궁한 지혜를 가지고 우리 속에 들어옴으로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예수님의 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학교 가서 공부를 못했을지라도 위대한 이름을 가진 대학에 들어가서 학문을 닦지 못했을지라도 이 세상에 살아가는데 누가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느냐? 지혜를 얻은 사람이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식은 사물에 대한 학문을 배워서 깨닫는 것이지만 지혜는 지식을 이용해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우리 대신 예수님은 고난을 받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는 지혜가 바로 십자가 고난인 것입니다. 우리 대신 고난 받으신 것을 우린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예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우리에게 옷 입혀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은혜로. 값없이. 은혜라는 것은 값을 치르지 않고 선물로 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주셔서 예수님이 값없이 우리 죄를 다 청산해주시고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구주로 깨닫고 모시기만 하면 죄 용서함과 의롭다함과 거룩함을 입는 공짜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 우리 구원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행위로써 이룩한 것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온전히 예수님을 선물로 주셨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값없이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의로워 지고 거룩해 진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에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 모든 허물을 씻어버리고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 선물로 주실 때 치료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약을 먹고 수술을 받고 치료를 얻는 것이 실제적인 것과 같이 예수님 자신이 어느 날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와서 치료가 되시고 수술이 되시고 건강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실제적인 약과 같다는 것을 늘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심리적인 치료가 아닌 것입니다. 성경에 주님께서 주신 그 말씀이 실제로 약을 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으므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느니라. 그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인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얻었도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를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저주를 다 멸해버리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거역했을 때 에덴동산에서 땅을 저주해버렸습니다. 네가 사는 땅에서는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것이라. 참 무서운 것입니다. 저주라는 것은 서고 앉는 모든 것에 가시와 엉겅퀴가 난다. 일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업을 해도 안 되고 구멍가게를 내고 안 되고 농사를 지어도 안 되고 공장을 지어도 안 되고 가시와 엉겅퀴가 끊임없이 나는 것입니다. 가시와 엉겅퀴를 제하여 버리면 그 다음에 이마에 땀을 흘리는 고생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무에 매달렸는데 성경에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저주를 받은 사람을 나무에 매어 달아 죽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때문에 나 때문에 저주를 받아서 가시와 엉겅퀴를 다 철폐해 버린 것입니다. 피땀을 흘리므로 땀을 제해버린 것입니다. 항상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볼 때 십자가를 통해서 보십시오. 나는 저주가 떠난 사람이다. 가시와 엉겅퀴가 내게는 없다. 나는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더라도 먹고 살 수 있게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나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삶을 살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여러분 스스로를 그렇게 보고 입으로 시인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새롭게 만드는 자신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 보고 ‘하나님께서 내가 네가 복주고 복주며 번창케하고 번창케하리라’고 말씀하시고 ‘네가 세상의 복의 근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복 없는 사람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2장9절로 10절. 우리 본문에서 읽은 것처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놓았으나 우리가 인간의 눈과 귀와 입과 코로 보고 맛보고 느낌으로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사망과 음부를 정복하셔서 우리의 승리자가 되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죽는 사람은 어디를 가느냐? 천국 대합실인 낙원으로 들어갑니다. 낙원, 낙원에 아브라함이 주인으로 있습니다. 낙원에 들어가서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낙원에서 기다리다가 주님과 함께 재림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죽어서 어디 가느냐? 음부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음부는 지옥에 들어가는 대합실인 것입니다. 세상 끝이 날 때 음부에서 모두다 도로 나와서 심판을 받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둘째 죽음인 것입니다. 엄청나게 무서운 것입니다. 부자와 거지에 대한 이야기 중에 부자는 죽어 음부에 들어가고 거지는 죽어 아브라함이 있는 낙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여러분 믿으신 여러분은 죽음도 겁나지 않습니다. 낙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평안하고 좋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셔서 낙원에 계신 먼저 간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낙원에 들어갈 때는 온 낙원이 그를 싸서 고함을 치고 할렐루야를 부르고 환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얼마 안 있으면 재림하셔서 그들 다 데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고 거기에 들어갈 것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린도후서 3:18)’ 우리는 예수님과 똑같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 보면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주님이 낙원에 기다리고 있던 앞서간 성도들과 함께 공중으로 강림하시는 것입니다. 큰 천사의 고함소리와 함께 온 천지가 황금물결이 넘실거리는 곳에 예수님과 먼저 간 성도들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어서 내려오면 우리는 밑에서 쳐다보고 ‘할렐루야! 어 변화 됐네’ 전부 변화되고 새로운 사람이 되고 영광의 부활의 몸을 받아서 위에서 내려오고 밑에서 올라가고 예수님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모시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주와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을 만합니다. 믿음은 그와 같은 찬란한 미래를 우리에게 약속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3.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소망을 가진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말합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늘 이 땅에 살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중대한 자본을 주셨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돈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투자를 할 수 있으니까. 여러분과 나는 영적으로 자본이 있습니다. 믿음이 자본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 말씀을 선물로 받아서 우리가 기도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부터 시작해서 큰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겨자씨만한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손에 들리면 태산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마귀의 모든 속박을 다 청산해 버렸습니다. 그 말씀을 읽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와 허물을 사했다고 기록해 놓았으므로 참말인줄 믿는 것, 그것 믿음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 병을 다 청산했다고 말씀했으니 그걸 믿어야지요. 그걸 믿는 것입니다. 저주를 다 청산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다고 말하니까 복 받은 줄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그 말씀대로 믿으면 그 믿음이 여러분의 생활에 자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을 통해서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한1서 3:9)’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한1서 4:4)’ 예수님이 오셔서 원수 마귀를 다 무장해제 시켜버리고 쫓아내었으므로 예수 이름으로 우리도 마귀를 이겼다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이 허공을 바라보고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음이라. 말씀을 안 들었을 때는 무얼 믿을지 모르지요. 그러나 여러분 교회 와서 설교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음으로서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아 그렇구나. 이런 일이 있구나. 말씀을 믿게 돼요. 말씀 믿으며 서서 나가면 하나님이 말씀 속에서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갠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살아있는 것 같지 않지요? 그러나 그것은 말씀은 하나님의 생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믿으면 하나님의 생명이 말씀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 결 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눅 12:29-30)’ 베드로전서 5장 7절에도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 때부터 믿음으로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마시고, 어떻게 살까? 세상 사람들이 다 걱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해결해주겠다고 약속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고, 의지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아 그랬다가 하나님이 약속 안 해 주면 우리 굶어죽게? 그렇게 되면 하늘나라가 설 수 없지요. 얼마나 성경에 담대하게 하나님께서 믿으면 일반 생활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겠다고 약속했으므로 하나님 약속을 믿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굉장히 위대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실천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한 영국인이 50회 생일을 맞이하여 50년 간 자신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50파운드를, 큰 돈을 하나님 사업에 바치기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마음속에 조지 뮬러 고아원에 돈을 부쳐라, 부쳐라. 조지 뮬러는 독일 사람인데 영국으로 건너가서 역사상 제일 큰 고아원을 세웠던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돈을 달라고 요구하지 아니하고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오직 기도로써 하나님께 응답을 5만 번이나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생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감사 50파운드를 주려고 했는데 빨리 조지 뮬러 고아원에 10파운드를 보내라. 그런 마음의 열과 같은 생각이 생겨서 정신을 다른데 팔 수가 없어요. 수표를 10파운드를 적어서 조지 뮬러 고아원으로 부쳤습니다. 그러고 잊어버렸는데, 그 해 12월 31일 날짜가 지나기 전에 조지 뮬러 고아원에서는 경리를 고아원에 헌금한 사람들에게 보고서를 다 내어주는데 자기에게 날아온 보고서에 10파운드를 어디에 썼는가 보니까, 거기에 조지 뮬러가 자기 체험을 옆에 적어놓았습니다. ‘오늘은 돈도, 양식도 모두 바닥이 났다. 그렇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이번에도 반드시 채워주실 것이다.’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가 10파운드를 안 보냈으면 조지 뮬러 고아원은 완전히 금식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을 터인데 그 날 그 시에 그 10파운드가 들어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확한 응답을 해주신 것입니다. 아이들이 굶고 있었고 조지 뮬러가 기도했기 때문에 빨리 수표를 보내도록 하나님께서 자기의 마음을 독촉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비하심은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절한 때에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십시오. 기도를 하면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 성자가 되어야만 응답 해주시는 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믿으면 희한한 기적이 일어나는데, 몇 년 전에 제가 일본의 아키타에서 성회를 인도했는데 그 때 기도 응답을 받은 성도님의 간증이 기억이 납니다. 쿠시나가 다카미라는 여집사님의 7살 된 아들이 탈모증에 걸렸으므로, 병원에서 온갖 치료를 다 받아도 의사선생님이 “얘는 선천성 탈모증으로 머리가 빠지고 대머리가 되고 머리가 안 날 것이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 그 집사님은 굉장히 고통에 빠졌는데 자기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대머리가 되어서 들어가면 애들에게 조롱을 받아서 학교 공부를 못할 것입니다.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동리에 집회 하러 온다는 얘기를 듣고 집사님과 아들이 제게 와서 안수기도만 받으면 머리가 날 것을 믿었습니다. 그것도 믿음인 것입니다. 기도해서 성령께서 믿음을 주셨어요.
그래서 아침 일찍 성회가 열리는 회관 앞에서 아들과 같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제가 회관으로 차에서 내려서 들어가려고 하는데 럭비 선수처럼 뛰어와서 그냥 제 옷자락을 확 잡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나는 돌은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좌우를 살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우리 좀 살려주십시오. 우리 원래부터 이렇게 체면 없이 막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아들이 대머리가 되어서 학교 들어가지 못하게 되므로 목사님이 기도를 해주셔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빨리 그 머리에 손 얹고 “이 대머리는 나음을 얻으라. 대머리가 되게 하는 원수 귀신은 물러가라.” 그런데 제 뱃속에서부터 믿음이 솟아올라요. 믿음이란 머릿속에서 뱅뱅 도는 믿음도 있고, 뱃속에서 올라오는 믿음도 있어요. 뱃속에서 믿음이 올라와요. 그래서 “나았어요.” 그 말하고 집회에 들어가서 집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집회 마치고 나오는데 또 서서 돌격을 해오려고 하기에 “올 필요 없어요. 나았어요. 나았어.” 아 그래서 좋다고 그 엄마와 아들은 집에 갔는데, 낫기는 뭐가 나았어요? 이쪽에 남아있던 머리도 다 빠져버렸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았다는 그 말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알고 번들 머리에 매일같이 기름을 바르고 잘 간수를 했는데 석 달이 지나자 희한하게 보슬보슬 머리카락이 나오기 시작하더랍니다. 하 그래서 좋다고 박수를 치고 야단을 했는데 현재는 머리숱이 너무 많아서 숱을 골라내야할 정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이처럼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었으면 부리나케 응답이 안온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환경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도 그거는 바람과 파도는 3차원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요. 하나님의 약속은 4차원의 세계에서 일어나니까 하나님을 쳐다보고 믿는 것입니다. 동서남북을 바라보아서 의지할 때가 없으면 하늘을 바라보라. 그런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동서남북을 바라봐도 희망이 없고 의지할 때가 없을지라도 이 땅과 이 세계를 변화시키고 창조하는 하나님 말씀을 우리 손에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이 엄청나게 놀라운 기적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보고라는 것을 거의 다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을 더 가까이 읽고 성경을 가지고 기도하면 여러분의 하는 일에 굉장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까 찬송 부를 때 그 찬송에 제가 감동을 느꼈는데, 물 위로 바다가 갈라지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바닷물 위로 걸어가게 하신다. 물 위에, 바닷물이 갈라질 줄 알고 나갔는데 안 갈라지면 끝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또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까? 하는 것을 다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 세 전에 택하시고, 주님께서 예정하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을 모시고 사는 자랑스런 백성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이제 이 세상에 살 때, 하나님 갈 동안에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처럼 가시와 엉겅퀴에 찔리고 할퀴어지고 이마에 땀을 흘리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찾으면 산다
고전 2:9-10 / 조용기목사
<서론>
‘하나님을 찾으면 산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한 평생을 살면서 좋은 일만 체험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큰 돌멩이와 작은 돌멩이를 물에 던지면 둘 다 물 밑으로 가라앉지만 다른 점은 빠지는 소리입니다. 굵은 돌은 풍덩, 작은 돌은 퐁당 소리를 낼 따름입니다. 고통의 크고 작음만이 다름이 있지 고통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최근 안전지대라고 여겨지던 우리나라도 지진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진을 당하고 나니까 그 동안 지어진 건물들이 내진설계가 되어 있는지, 또 원자력 발전소의 노후 시설은 문제가 없는지, 다시 점검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진을 겪지 않았을 때는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을, 지진을 겪고 나니까 다시 점검하고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안할 때는 세상 정욕에 잠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흔들리는 지진을 겪고 나면 그제야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정욕에 잠이 들어 혼돈 속에 휘말려 갈 때 고통은 세상 잠에서 깨어나 삶에 진리와 빛을 주시는 주 예수님께로 찾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고통이 내게 다가오고 있다 할 때 우리는 그 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 본론>
1. 우리의 삶의 과정에 상상을 뛰어 넘는 시련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과정에 상상을 뛰어 넘는 시련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 시련을 잘 이겨내면 좋거니와 그렇지 못하면 심한 낭패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전도서 7장 13절로 14절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 사람이 알아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난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고난을 당한다 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그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파스칼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인생은 불쌍한 우주의 고아”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도움을 부탁할 곳조차 없는 고아와 같은 삶을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난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고난 중에도 우리는 혼자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누가복음 12:29-30)’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기도로 구하여 하나님이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시편 9편 10절에 ‘야훼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우리가 주님 의지하고 주님을 찾으면 주님은 우리를 버려놓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2.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고난의 풍랑이 다가옵니다. 그때는 예수님을 잠에서 깨워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고난의 풍랑이 다가옵니다. 그때는 예수님을 잠에서 깨워야 돼요. 예수님과 같이 있으면 고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도 고난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자는 사람은 예수님을 잠에서 깨워 일으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다 폭풍 속에서도 말씀 한마디에 폭풍이 잠잠해지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4장 39절에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부패한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니까 살아서 나왔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사로의 누이 동생 둘에게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라비를 살리러 왔는데도 살릴 것이라고 믿지 못해서 주님 앞에 변명을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변명을 듣고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주님께서 벼락같은 호령을 하시니까 마르다가 놀래가지고서 오라버니를 장례 지낸 묘의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사람들 때문에 합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항상 같이 계시고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했다는 것을 증명해주기 위해서 이 말을 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있을 때 마음에 의심을 하고 있으면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능력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우리와 같이 계신 예수님은 우리가 믿을 때 그 믿음을 통해서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가 마음속에 믿어야 돼요. 그러면 마귀는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부정적인 마음을 갖게 하고 불신앙을 갖게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마귀를 쫓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오중복음을 늘 인정하고 예수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죄와 허물을 사함 받고 의로움을 얻고 거룩함을 얻는 것을 감사하고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병이 나은 것을 마음속에 인정하고 예수님 십자가에서 우리 저주를 다 청산하고 아브라함의 복을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에게 죽음이 다가오더라도 예수님은 사흘 만에 죽음도 음부도 이겨내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겨내지 못했으면 부활을 못하지요. 부활한 것이 이겨낸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사망과 음부가 누르지 못합니다. 우리는 죽어도 예수님이 대합실로 만들어 놓은 낙원에 들어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재림할 것을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으나 마귀는 항상 이것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오중복음을 마음에 믿고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있을 때라도 귀신을 쫓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귀신은 여러분을 부정적이 되게 하고 자꾸 불안하게 만들고 불신앙하게 만들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물러가라! 악한 귀신아 물러가라!” 한번 두 번만 하지 말고 4번 내지 5번 동안 그러면 끈질긴 귀신도 쫓겨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네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라”고 말했습니다. 요사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귀신을 내버려둡니다. 안 쫓아내니까 귀신이 잠자리에 같이 들어가서 자고 같이 밥 먹고 같이 행동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서 낙오되고 예수님 기적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귀신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만히 앉아 계시지만 여러분에게 귀신이 붙어서 있는 사람 많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연히 대결해야 쫓겨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고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면 성령과 같이 행하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앉은뱅이와 절름발이가 낫고 병이 고침을 받고 즐거움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여러분이 환경을 다스려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입니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 네가 말하기를 야훼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입술로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입술로 하나님 말씀을 고백하면 그 말씀이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많이 읽고 될 수 있으면 많이 마음속에 간직하여 외워두었다가 어려울 때 그 말씀을 입으로 고백하면 굉장한 도움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시험과 환난은
시험과 환란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우리는 그때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서 대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험과 환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평안할 때 하나님 별로 찾지 않습니다. 시험과 환난을 당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로 13절에 보면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요?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이렇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안을 주고 재앙을 주지 아니하고 미래의 희망을 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는 더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던지 평안을 주고 재앙을 당하지 않기를 원하시고 내일의 희망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로써 그러므로 주님을 깨워야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작가 맥스 루케이도는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 왕국에서 대단한 존재다. 왜냐하면 당신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몸을 일으켜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너 같이 별 수 없는 사람이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친히 일어나셔서 그 말씀을 따라 역사해 주시니 얼마나 기도가 위대합니까? 우리가 땅에서 기도하면 하늘의 하나님께서 일어나신다니 이 얼마나 놀랍고 멋진 일입니까?
예레미야 33장 2절로 3절에 ‘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야훼 그의 이름을 야훼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는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일을 행하시고 성취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만날 때 우리는 부르짖어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자복하며 믿고 순종함을 환난을 만났을 때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시편 71:20-21)’라고 시편 기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67절에 보면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우리가 고난당하면 고난에서 건져줄 자를 찾습니다. 하나님은 찾는 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찾지 않는 사람에게 따라다니면서 돌봐주지 않습니다. 욥기에 보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기 42:5)’ 좋을 때는 그냥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귀로 듣지만 시련과 환난을 당하면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 발버둥을 치고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기 42:5)’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좋은 일은 좋아서 좋고 나쁜 일은 좋게 만들어주니 좋습니다. 그 나쁜 일을 당했을 때는 회개하고 자복하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좋은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 결 론>
하나님이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였으면 우리 영혼은 벌써 침묵 속에 잠겼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부르짖을 때 주님께서 나를 붙잡아 주셨으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 주의 위로가 성령으로 우리 영혼에 평안과 소망으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50년의 긴 세월을 목회하면서 언제 가장 하나님 곁에 있고 신령한 생활을 했나보면 고난당할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고난을 당하게 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회개하고 자복하게 하고 헌신하게 만들고 그 다음에는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생활에 시련과 환난이 다가오거든 하나님께서 좋은 일을 해주시기 위해서 징조를 보였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무 고난도 없으면 그냥 오케이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무엇을 해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에 소원하는 꿈이 있을 때, 그 꿈이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지 않습니까? 야곱의 열한째 아들인 요셉이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약속을 받았습니까?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를 향해서 절하고 곡식단 거두는데 열한 곡식단이 자기를 향해서 절을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이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지 않습니까? 언제 꿈이 이루어졌습니까?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기 위해서 붙잡아서 마른 우물에 던졌을 때 요셉은 기가 막혔습니다. 아버지의 피를 나눈 형제간인데 자기를 죽이려고 마른 우물에 던졌다. “이 자식 이 꿈이 이루어지는지 어디 보자.” 이러면서 마른 우물에 던졌습니다. 요셉으로서는 치명적인 마음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고통이 다가오면 꿈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꿈이 조금 후에 아라비안 대상들에게 물건을 이스라엘에 와서 팔고 애굽에 들어가서 또 물건을 가지고 가는 장사꾼에게 삼십 냥을 주고 팔아먹어 버렸습니다. 마른 우물에 들어간 것도 고통스러웠는데 끄집어내서 종으로 팔아먹었습니다.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만 더 큰 고통이 다가왔기 때문에 더 큰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에 가서 가정 종이 되어서 살만하니까 또 모함을 받아서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시위대 뜰감옥에 투옥이 됐습니다. 축복이 아니고 자꾸 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감옥 에서 떡 장관, 술 장관을 만나게 되고 그 꿈을 해석해주어서 그 소문이 바로왕에게까지 들렸는데 바로왕이 꿈을 꾸고 해석하지 못해서 괴로울 때 요셉이 그 곳에 가서 꿈을 해석하고 일격에 국무총리가 된 것입니다. 나중에 형들이 다 와서 자기 앞에 절하고 자기가 꾸었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소원하는 꿈을 가지고 있으면 그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고난이 다가와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당하고 나면 괴롭지요. 어떻게 도움을 받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고난을 보내어서 좋은 일이 일어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94편 17절로 19절에 ‘야훼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다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야훼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우리가 백척간두진일보라고 벼랑에 떨어져서 미끄러져 죽을 수밖에 없는 막다른 골목에 처할 때 그때 주님이 손을 내밀어 여러분을 붙잡아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좋은 일을 많이 체험하는 사람들은 나쁜 일 많이 겪은 사람인 것입니다. 나쁜 일에서 당하여서 죽는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 성령께서 좋은 일로 건져 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북한 김정은이가 원자탄을 만들어서 협박 공갈을 하니까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기다려 보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이 오히려 선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나의 삶 속에 개인적으로 다가오는 시련도 그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매달리면 그 시련이 좋은 것이 이루어지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합쳐서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매일같이 하루를 맞이하기 전에 여러분 가슴속에 오중복음의 십자가 은혜를 꼭 가르치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에게 가르치십시오. “너는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죄와 허물이 사함을 받고 구원받고 성령 받은 사람이 되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너는 병 고침을 받았다. 예수님이 저주를 당하여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도록 해주셨다. 예수님이 죽었다 부활하심으로 너도 예수님 안에서 부활의 생명을 얻고 낙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이와 같은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이다.” 그것을 꼭 마음에 꼭 주장하십시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서 여러분에게 해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성령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꼭 그것을 주장하시고 그 다음에는 귀신을 쫓아내십시오.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에 나에게 시험과 환난을 가져오는 원수 귀신은 물러가라.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을 때도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을 절대로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주시고, 그다음 다른 병들을 고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귀신 쫓아내시고, 보혜사 성령님을 꼭 모셔들이십시오. 그러고 하나님의 치료의 은혜가 넘치도록 여러분 축복해주시고, 여러분이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크고 좋은 일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시련도 당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원망과 불평과 탄식하지 말고 감사와 찬송을 부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친 세상에서 실패가 다가올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이 계심으로 버림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얼마나 심하셨습니까? 그 십자가 고통이 그 십자가 고통이 여러분의 축복으로 변하여서 여러분 발 앞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아멘.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
고전 2:9-13 / 조용기목사
<서론>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세상의 부모는 자녀들의 삶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삶의 필요한 것들을 예비하십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능력 있고 좋은 부모를 만나서 걱정 없이 사는 젊은이들을 보고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고 말을 합니다.
< 본론>
1. 죄인들과 병든 자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오늘 이 세상에 사는 죄인들과 병든 자들은 어디를 가야 되나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진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도 아닌 저들은 어디를 가야 되는 것입니까? 죄인은 죄를 씻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예비해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이 용서와 의를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 손발을 씻습니다. 손과 발이 더러워지기 때문에 깨끗이 씻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영적인 생활도 죄를 짓지 않고 의롭게만 살 수 없습니다. 자꾸 넘어지고 쓰러지고 그렇게 하는데 뭐 낙심을 하고 ‘나는 아무리 해도 믿음을 가질 수 없이 죄를 지으니까 교회를 그만 나가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손발이 더러워지면 원망하지 않고 늘 씻는 것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죄를 지으면 여러번 회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회개를 합니다. 성경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요한일서 1장 9절에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병든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병든 자도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께로 나와야 됩니다. 예수님이 치료를 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항상 용서와 치료를 온몸에 담고 다니시며 죄인을 구원하시고 병든 자를 모두 다 고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죄와 병을 고치기 위해서 당신 몸에 이 은혜를 담고 다니는 것처럼, 오늘도 지금 이 자리에 여러분을 용서하시는 예수님, 여러분을 치료하시는 예수님이 곁에 계십니다. 우리가 마음에 영을 다해서 기도하면 곁에 계신 예수님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에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은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고 병든 자의 병을 고치시어 우리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예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앓는 병은 마귀가 눌러서 생긴 병입니다. 마귀를 내어 쫓으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임하며 치료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셔서 잘못된 것을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2절로 25절에 보면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사흘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하면 견디지 못합니다. 밥을 안 먹고 사흘 동안은 그렇게 힘들지 않게 견딜 수가 있지만 물을 안 마시고 사흘 동안 견디면 갈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수르 광야에 들어와서 사흘 길을 땀을 흘리며 걸으면서 물을 마시지 못했으니 굉장히 괴롭겠지요. 그런데 마라에 이르러서 그 곳에 물을 마시지 못한 것은 물이 써서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는데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쓴 연못가에 그 쓴물을 달게 하는 나무를 준비해 놓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을 때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것을 예비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만히 세상을 살아오면서 한번 뒤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반드시 어려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이 예비해놓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주 급하게 돈이 필요한데 그 돈이 어디서 나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하나님이 이 돈이 필요할 줄을 알고 계심으로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실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예비할 것을 믿고서 기도하고 간구하면 하나님이 예비한 손길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비하신 하나님,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졌더라. 그보다도 신약성경에 와서 더 재미있는 것은 그가 그 어머니와 가족들이 함께 결혼식에 초청을 받았는데 결혼식에서 손님이 많이 와서 그런지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잔치를 하는데 주음식인 포도주가 떨어져서 낭패에 이르러서 예수께서 포도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어머니가 알고 예수님께 와서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어머니 왜 나에게 부탁을 합니까?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는 것도 시와 때를 따라서 하시는 것입니다. 한참 있으니 그가 종을 불러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 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물을 변해서 포도주로 만들어서 그 잔치가 잘 되기를 원했었습니다. 이 일을 볼 때 세상에 모든 것을 주님은 예비해놓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십니다. 심지어 죽어서 저세상 건너가면 그 곳에서도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놓으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걱정거리가 없는 사람은 이 성경 구절을 달게 받아들이지, 걱정거리가 있는 사람은 “안 당해봤으니 저런 소리 하지, 당해봤으면 저런 소리를 못한다.”고 그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절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주님께서는 풍성한 대로 모든 쓸 것을 준비하고 계시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주님께서 응답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면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34편 9절로 10절에 ‘너희 성도들아 야훼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야훼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말씀하셨습니다. 젊은 사자가 굶주린다는 것은 굉장히 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늙은 사자는 기운이 없어가지고서 굶어서 죽습니다. 그러나 젊은 사자는 여간한 사냥꾼이 아닙니다. 젊은 사자는 굶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다른 짐승을 잡아먹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시기를 이 젊은 사자가 굶주린 단계라는 건 굉장히 퍽질한 상태인 것입니다. 젊은 사자가 굶을 때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굶주리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이든 사자는 사냥을 못해서 굶을 수 있지만 젊은 사자는 사냥 실력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젊은 사자는 굶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젊은 사자가 굶주리는 일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굶주리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굶주리지 않는다.” 우리가 담대히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7편 9절은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날 때 대개 사람을 찾아 도움을 청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시편 146편 3절로 5절에 보면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야훼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서 부족함이 없이 채워주기를 기다리면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우리의 관계
하나님의 우리의 관계를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1절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가 세상에 살면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이 많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같이 함께 함이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믿고 알면 두려움을 무서워할 리가 없습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 하나님이 대가를 주고 우리를 샀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연히 굴러들어온 떡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아시고, 원하셔서 우리를 당신의 소유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이 자리에 앉으신 여러분 다 하나님의 소유물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입니다. 굉장히 비싸게 사셨기 때문에 굉장한 보물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상당히 가치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OECD 경제협력개발기구의 최근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일과 삶의 균형 부문에서 38개국 중에 36위로 사실상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주당 근무시간 50시간 이상인 노동자의 비율이 OECD의 평균보다도 10%나 높은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하면 허리가 휘청하도록 일을 많이 하고 먹고 사는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시간 동안 일하면서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아마도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한국사람 각자 각자가 다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27편 1절은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라고 말씀하신 것 같이. 사람이 아무리 수고하고 애를 써도 하나님이 지키시지 아니하시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사야 43장 1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그 말을 똑똑히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일본 식민지로 고생했고, 6.25사변을 통해서 고통을 당했고 그러므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많습니다. 이 세계 인류 중에 두려워하는 마음을 많이 가진 이가 우리 한국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두려움에서 해방되야 되겠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우리를 지키실 것입니다.
3. 우리는 왜 평안할 수 있는가?
우리는 왜 평안할 수 있습니까? “물 가운데에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하고, 강을 건널 때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하게 하겠다.” 여호수아 3장 13절에 보면 ‘온 땅의 주 야훼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 하나님께서는 홍해 바닷물을 갈라놓아 이스라엘이 무사히 건너오게 하심과 동시에 요단강의 물도 갈라놓고 갈라진 강을 백성들이 건너가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조금만 생각하면 느낄 수 있는 것은 보통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바다도 가르고, 강도 마르게 하고 당신의 계획한 뜻을 위해서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 곧 그들을 위해서 해야 되는 일이 생기면 엄청난 기적도 행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불꽃을 불 가운데를 지난 때에도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사르지 못하리라.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의 세 청년 우상숭배를 하지 않으면 타는 불못 가운데 던져 넣으라고 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유대 젊은이들이 우상에 절을 하지 아니하니까 왕이 대노해서 그들을 불 연못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을 던져 넣었는데 가만히 보니까 네 사람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왕이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세 사람이 불꽃 가운데 있어도 머리칼 하나 타지 않고 그들은 손과 손을 잡고 춤을 추는데 넷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같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타협하지 아니하고 목숨을 내놓고 불꽃 가운데 뛰어 들어가니까 하늘의 보좌에 앉아 있던 예수님이 뛰어 내려와서 그들과 함께 춤을 춘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는지요.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다니엘 3장 25절-27절)‘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물이 사람을 침몰하지 못하고 불이 인생을 태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위기에 처해 있어도 우리와 같이 계시는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2절로 4절에 보면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야훼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플로렌스 쉰은 20세기 초 미국에서 화가와 작가로 활동했는데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성공과 긍정적인 삶에 대한 책을 써서 지금까지 수천만이 넘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자는 평소 다음과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합니다. “나는 주님의 딸이니 나의 부유한 아버지께서 부유함을 나에게 쏟아 부어 주신다. 나는 주님의 딸이다.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아는 것이 성공적인 삶의 비결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 하세요. “나는 주님의 자식이다. 나의 부유한 아버지께서 부유함을 나에게 쏟아 부어 주신다. 나는 주님의 자녀다.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입으로 늘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 될 것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태복음 7장 11절)’.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너희는 자식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 지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결 론>
우리의 삶에는 크고 작은 문제 속에 둘러싸이고 심신에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삶의 과정에서 우리가 잘 살고 행복하게 살려면 고난을 메꿔줄 물건들이 대단히 많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고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싸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의 형편을 다 아시고 필요한 것들을 예비해 놓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로 10절에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러나 믿음으로 인생을 살면서 성령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눈 먼 봉사로서 하나님이 준비해주신 것을 보지 못하고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아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는 매일같이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의 일어서고 앉음을 살피시고 우리 마음에 희망과 꿈을 심어 주시고 희망과 꿈을 따라 기도하고 믿을 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같이 계신 하나님께서 역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고 구체적인 꿈을 꿔야 되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살지 말고 우리 삶에 필요한 목표를 분명히 꿈꿔야 된다. 꿈꾸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편리하게 세상을 삽니다. 백년 전만 하더라도 대서양을 건너고 태평양을 내 집처럼 왔다갔다 건널 줄 몰랐습니다.
제가 지난 주일날 비행기를 타고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고 또 동부로 비행기를 타고 건너가서 교회성장세미나를 하고 금요일 날 비행기를 타고 어제 밤 5시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14시간을 앉아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 망망한 대양을 비행기를 타고 나는데 기후가 나쁘면 굉장히 비행기가 춤을 추는데 그 따라서 춤을 추면서 살아서 건너갈 수 있을까?'' 생각이 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인생이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느냐? 꿈을 꾸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꿈을 꾸고 하나님 앞에 입을 벌리면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옛날 살던 사람들과 비교해서 얼마나 잘 살지 않습니까? 비행기가 있지요, 자동차가 있지요, 전화기가 있지요. 요사이 핸드폰 때문에 해외여행가면 고통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거기 사진기를 붙여놓아서 모조리 전부 사진사가 되어서 사진찍자고 하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바쁜데 핸드폰 때문에 더 바빠요. 그러나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서 생활은 점점 발전되고 향상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오늘은 어제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아지고 향상되려면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말씀을 읽고 마음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이 들어오고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꿈을 꾸면 그 꿈을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성령으로 도와주시고 꿈을 믿고 나아가면 너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생겨나기 때문에 우리가 패배하지 않습니다. 요사이는 우리가 주님을 믿었음으로 더 깊이 믿고, 더 크게 믿어서 우리도 살고 남도 살릴 수 있는 우리들이 되십시다.
예비하시는 하나님
고전 2:9-10 / 조용기목사
할렐루야~ 옆에 계신 분들에게 “주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부르셨기 때문에 교회에 나올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이 자리에 계십니다.
<서 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예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세계적인 피겨 퀸으로 정상에 오른 우리나라 김연아에 선수에 대해 최근 미국 언론은 “빙판의 카리스마 여왕”이라고 극찬했습니다. 미국 언론 LA 타임즈는 가장 뛰어나고 인상적이며 카리스마 넘치는 선수“딱 하나, 김연아”뿐이라고 말했습니다. Only one, Yuna Kim. 이러한 김연아 선수 뒤에는 어머니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김연아 씨의 어머니 박미희 씨는 김연아를 키워낸 이야기를 담은 자신의 책에서 “연아는 내 전공이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모든 시간과 정성을 자기의 지식을 그 딸에게 쏟아 부어 넣었습니다. 그녀는 딸이 6살 때 스케이팅에 남다른 소질이 있다는 것을 코치로부터 들은 뒤, 자신의 공부를 과감히 포기하고 친구들과의 사교모임도 다 포기하고 온전히 일주일 내내 딸을 스케이팅 레슨에 데려가서 훈련 받는 것을 세심히 지켜보고, 딸의 성장을 위해서 전 생애를 바친 것입니다. 12년 동안 끊임없이 딸의 뒷바라지에 온 헌신을 한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학창시절의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연아에 대해 공부했고 연애할 때보다도 더 뜨겁게 연아에게 헌신했다.” 이처럼 세계적으로 뛰어난 선수 뒤에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고, 예비하는 부모님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헌신하고 예비하는 어머니가 없이는 그 화려한 김연아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예비하는데 하나님은 하물며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예비하셨습니까? 좋은 정부는 국민의 생활과 노후대책을 위하여 예비하는 정부가 좋은 정부입니다. 정치 잘한다. 참 훌륭한 정치가다. 뭘압니까? 국민을 잘먹고 잘입고 잘살도록 병든 사람들 나이 먹은 분들을 돌보아 주는 대책을 잘 세우는 정부가 좋은 정부인 것입니다.
복지국가란 국민전체의 복지 증진을 모아 국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보는 국가를 말합니다. 지난 2007년 미국의 “비즈니스위크”지(誌)에서는 영국의 레세스터 대학교(University of Leicester)에서 조사한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는 행복한 국가의 순위를 발표했습니다. 그 첫 번째로 북유럽의 덴마크가 선정되었는데, 덴마크는 부와 자연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교육의 질이 높고 국가를 통해 건강보험 체계 등이 잘 갖춰져 있었습니다. 덴마크에 이어 2위는 스위스, 3위 오스트리아, 4위 아이슬란드, 5위 바하마 등으로 이들 나라는 대부분 국가를 통해 건강의료보험과 교육 복지 시설이 잘 갖춰진 나라를 말합니다. 반면 우리가 세계 최강대국이라고 알고 있는 미국은 수많은 빈곤층과 불충분한 건강보험 제도 등으로 23위에 그쳤습니다. 그러면 복지국가를 논한다면 우리 나라는 몇 등이나 되겠습니까? 너무 떨어져서 헤아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바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아서 우리나라가 복지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좋은 정부는 국민의 기본 생활과 건강 증진, 노후대책을 준비하여 모든 국민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론>
1. 예비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것들 위에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막연하게 지어놓고 막연히 불러서 살다가 죽으라. 그렇게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천지창조를 먼저 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첫날에 빛을 창조하시고, 이튿날에 궁창을 셋째날에 바다와 땅, 식물, 넷째날에 해와 달과 별, 다섯째날에 새, 물고기, 여섯째날에 동물과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창세기 2장 8절에 “야훼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우리 생각으로는 사람을 먼저 지어놓고 “아, 네가 빛이 필요하겠구나. 네가 궁창이 필요하겠구나. 해와 달과 별이 필요하겠구나..” 그렇게 할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매일 꼴찌에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큰 소리하지만 자연이 다 말하기를 “내가 너보다 먼저 났다. 내가 너보다 나이 많이 먹었다.” 우리보고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있을 것 다 준비해 놓고 그 다음에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것입니다. 좋은 부모는 어린아기를 가진 이후 아기를 순산하기 전에 아기가 필요한 것을 다 예비해 놓고 아기를 순산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흉악한 자들이 되었을 때도 우리를 그냥 내버려 놓지 않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성경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죄와 멸망만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도 이미 2천년 전에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로 5절에 보면 곧 창세 전에 우리 구원이 갑작스럽게 준비된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이미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것을 아시고 구원을 예비한 것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러분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아닙니다. 태어나기 십년 전도 아니고 백년 전도 아니고 천년 전도 아니고 만년 전도 아닙니다. 천지 만물이 생기기 전에 이미 여러분을 택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은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경영의 깊은 것은 우리가 계산할 수 없습니다. 창세전에 이미 여러분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연히 아버지, 어머니가 만나서 날 낳은 것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시간과 공간이 생기기 전에 이미 우리를 세상에 보내도록 계획하신 것입니다. 우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굉장히 여러분은 하나님께 중요합니다. 중요하지 않으면 창세전에 여러분을 계획하고 낳을 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는 마음에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세상을 뜨시기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죄 덩어리”라고 말했었습니다. 나는 그말 인터뷰할 때 직접 들었습니다. 우리가 알기에 한경직 목사님은 목사님 중에도 목사님이요, 가장 거룩하고 청렴하게 사신 주의 종입니다. 그런분이 인터뷰에 나는 죄덩어리라고 말했으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 덩어리가 아니라 “온통 죄”입니다. 죄에요. 죄덩이 같으면 괜찮아요. 완전히 죄 근본 죄로 완전히 뭉쳐진 것이 우리 인간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을 받으라 하면 받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절대 구원받을 수 없으니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냥 보내신 것이 아니라 예비하셨습니다. 만세 전에 예비하셨습니다. 자 천지와 만물도 우리 위해서 예비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은혜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죄 없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고통 당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다 청산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죄의 빚을 2천년 전에 이미 예수님이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실 때 청산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은혜 가운데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믿기만 하면 여러분의 죄는 청산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선한 행위를 해야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도 하나님 미리 다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왜냐하면 천국과 지옥이 없으면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죽고 난 다음에 영원히 한곳에 두루뭉실이 되어 사람은 살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러분 콘도 하나 없이 산다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하늘나라에 예수님이 콘도를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영원한 있을 곳인 것입니다. 주님이 예비하시니 얼마나 좋은 곳으로 예비했겠습니까? 깜짝 놀랄 정도. 그러한 집을 주님이 예비해 놓았기 때문에 걱정도 말고 근심도 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도 예비해 놓았습니다. 천당에 올라갈 자격이 없는 사람은 주님께서 쓰레기 청소장인 지옥도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48절로 49절에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우리 시골에 살 때 가을이 되면은 시간이 좀 있으니까 농부들이 미꾸라지 잡으러 갑니다. 논두렁에 가서 물이 마르기 전에 미꾸라지를 잡으면 미꾸라지를 한바케스 잡아와요. 그래서 미꾸라지를 씻어서 이제 요리를 하는데 우리 어머니가 요리하는 것 보면 미꾸라지를 잔뜩 바구니에 담아서 소금을 확 뿌려 가지고서 쓱쓱쓱 비비면 미꾸라지가 뛰는데 보통 뛰는게 아니에요. 소금치듯 한다는 이 말만 읽으면 옛날에 우리 어머니가 미꾸라지 위에 소금치는 것 늘 기억이 납니다. 미꾸라지도 소금을 치어 갈아 놓으면 뛰는데 지옥은 죽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영원히 소금치듯 하며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지옥에 갈바에야 차라리 이 세상에 안태어나는 것이 백번 좋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은 예비하신 하나님이시다. 예비하지 않고 갑자기 무슨 일을 하시는 일은 절대 없으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비하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역사적으로 하나님 그렇게 하시지요. 우리 구약성경을 보면 출애굽 때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이 예비하셨습니다. 3백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홍해가에 왔으니 그 넓은 홍해를 어떻게 건너갑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좌절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다시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잡으러 뒤에서 뛰어 오니 샌드위치가 된 그들은 오도가도 못하고 절망 아닙니까?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과정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길을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출 14:15~16)
그 넓은 바다가 쫙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바다 밑에 대로를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예비해 놓은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깜짝 놀랄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서 수르광야에 들어가서 사흘 길을 걸어가는데 물을 마시지 못해서 혀가 말라서 입천정에 붙었습니다. 물을 달라고 부르짖고 외치는데 물을 발견했는데 쓴 연못물입니다. 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어요. 모두다 통곡하고 탄식하고 원망할 때 모세가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그 연못가에 나무를 예비해 놓은지라 그 나뭇가지를 꺾어서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배불리 물을 마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출 15:23~25)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목이 마를 것을 아시고 쓴 연못물이지만은 그것을 달게 하는 나무를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케이스를 여러분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주님이 예비한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데 예비해 주지 않습니다. 이미 예비한 것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우리 눈을 뜨게 하고 예비한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망하는 시간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광야를 지나갈까 탄식할 때 주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 등을 예비한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야훼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출 16:13~15)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셨는데 이 만나라는 양식을 하루 이틀 주신 것이 아닙니다. 10년, 20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무려 40년 동안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조금 도와주시다가 안도와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 만나로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물을 마시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단위로 우리를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실 때도 조금 살다가 죽으라고 지은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도록 지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도움을 주실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3. 지금도 예비하시는 하나님
그러면 옛날에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데 지금은 우리를 도우시지 않느냐.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십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문제를 당합니다. 문제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고난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티가 하늘로 올라감 같이 사람은 고난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말한 것입니다. 좀 더 많이 당하느냐. 좀 더 적게 당하느냐.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다 고난을 당합니다. 고난 당할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이기고 나올 수 있는 길을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다고해서 고난 안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데 왜 우리집의 개가 죽었습니까? 예수 믿는데 왜 고양이가 도망쳤습니까?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다 고난을 당하되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는 늘 피할 곳을 가지고 있습니다. 피난처가 하나님인 것입니다. 환난을 당한 자 다 내게로 오라고 주님께서 청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 가면 능히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 은 세관에서 근무하다가 직장을 잃었습니다. 그는 패배감에 사로잡혀 집에 와서 낙심하여 부인에게 장탄식을 하고 “내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라고 당신 시집 잘못 왔다. 돈많은 남자에게 시집갔으면 호의호식 할 것인데 나에게 와서 고생하게 되었다.”고 그렇게 말하니까 그 아내가 실망스러운 소식을 받아들이면서 “잘됐어요. 당신이 평소에 그렇게 좋아하던 글을 쓸 수 있겠네요.” 이 사람은 소설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세관직원이 되어서 바뻐서 소설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부인이 “당신이 그렇게 쓰고 싶은 소설 쓸 수 있는 시간을 하나님이 허락해 주셨어요. 기뻐하세요.” 그러면서 아내는 “그 동안 모아 놓은 돈이 1년은 걱정하지 않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고 통장을 내놓는데 보니까 그 적은 월급 중에서도 또 월급을 뜯어내 모아 가지고서 1년은 먹고 살 수 있도록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좋은 아내를 만나면 이렇게 복이 떨어져요. 나쁜 아내를 만나면 통장이 아니라 빚을 잔뜩 지는데 이 아내는 그렇게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에 크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나다나엘 호손은 “1년 안에 내가 멋진 글을 쓸 수 있을까?”하며 걱정하니까 부인이 “걱정하지 말고 나하고 같이 기도하자.” 하나님께 앞에 꿇어앉아서 하나님 도움을 청했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난 다음에 그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장편 소설을 얼마있지 않다가 발표했습니다. 그 소설 읽은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 소설은 대히트를 치고 미국이 낳은 소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꼽혔습니다. 그 소설이 “주홍글씨”라는 소설인 것입니다. 안 읽어봤으면 제목이라도 읽어봤을 거에요. 아주 낙심하고 절망에 처한 그때에 그는 그 위대한 작품을 쓸 수가 있는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다가오면 하나님은 고난과 동등 그 이상의 축복을 줄려고 보낸 것이라고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아무 의미없이 고난 당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보면 아브라함이 모라아산에서 그 아들 이삭을 재물로 드리라고 할 때 그는 순종해서 아들을 데리고 가서 재단을 만들고 장작불을 펴놓고 이삭을 묶어서 재단위에 얹어 놓고 칼로써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고함쳤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에게 손대지 말라. 네 외독자, 외아들 이삭을 잡아서 재물로 드리라고 할 때 순종하는 것을 보니 네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입으로 그냥 사랑한다는 것하고 사랑을 보여주는 것하고는 틀립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는데 그냥 사랑은 사랑하는지 안하는지 모르지요. 외아들 이삭을 재물로 드리라고 할 때 그것을 실천하는 아버지는 좀처럼 많지 않습니다. 아마 아브라함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절대 못해요. 나는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아들을 잡아서 재물로 어떻게 드리겠습니까? “하나님 날 잡아가소.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게 솔직한 내 마음에 평가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아브라함도 우리하고 견줄 수가 없어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위대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재물로 드리라고 할 때 기꺼이 그 아들을 놓아서 묶어놓고 재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한번 물어보십시다.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얼마나... 증거를 대야 되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 그러면 끝입니다. 그 이상 더 사랑을 증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냐. 안하느냐. 그것은 질문하면 안됩니다. 마귀가 와서 하나님이 너 사랑한다 안사랑한다. 그런말 아에 붙이지도 못하게 하십시오. 독생자를 주셨고 이삭은 안 죽였지만은 예수님은 실제로 십자가에서 못박혀 몸찢고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저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실제로 우리 위해서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보여주실 뿐 아니라 직접 그 실천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50여 년 목회를 해 오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놓은 길로 이끌어 주시며,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예비하신다는 것을 뼈속으로 체험했습니다. 저는 원래 어렸을 때부터 의사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그래서 부산 광복동 병원에서 한동안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비 오는 날, 날이 비가 오니까 마음이 울적한데 오후에 비가 그쳐서 저는 광복동 사거리를 걸어 부산역전까지 나갔습니다. 그곳은 아직 전쟁의 피해에서 복구가 되지 않아 모든 것이 파괴된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파괴된 역전 앞에 천막이 쳐있는데, 들어가 보니까 한 미국 청년이 열렬히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한국에 6.25 전쟁때 미 해병대를 와서 전쟁을 하고 한국에서 살아 미국에 돌아갈 때 “하나님 날 살려준 은혜를 갚기 위해서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일하겠습니다.”그래서 미국에 가서 신학교 들어가서 공부하고 선교사가 되어서 나왔어요. 그래서 예배를 폐하고 난 다음 내가 안수기도를 해달라고 그랬습니다. 그는 안수기도를 해주고 난 다음 그가 나보고 말하기를 “영어하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은데 당신 영어를 잘하니까 자기 통역이 되어 주겠느냐.”고 그랬습니다. 내가 그 설교에 감동을 많이 받아서 “그렇게 하지요.” 그래서 병원에 와서 내 짐을 다 정리하고 캔 타이스 목사님 있는 집으로 들어가서 옆에 있는 방에 같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얼마 있다가 한국 여자하고 사랑을 하게 되어서 한국 여자가 미국으로 들어가자고 자꾸 꾀니까 그만 나는 팽개쳐 버리고 미국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정말 그 당시에는 직장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 보다 힘들때인데 모처럼 있는 직장도 놓쳐 버리고 자기는 그냥 미안하다면서 나를 부산에 월드미션 루이스퍼 리처드 목사님이라는 나이 많은 선교사에게 부탁한다고 하고 떠나 버리는데 그 집에 내가 가니까 꿔온 보리자루처럼 할 일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그냥 아침저녁으로 집에 내방하면서 설교도 듣고 기도도 같이하고 했는데 그분이 나보고 하는 말이 “너 아직 나이 젊고 앞길이 창창한데 이렇게 지낼수가 없다. 서울에 가면 순복음신학교라고 있는데 그리로 내가 너를 보낼테니까 거기가서 신학공부를 해라.” “나는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어떻게 내가 서울에 가서 신학공부를 합니까?” “네 돈을 내가 대줄테니까 신학공부를 해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어요. 그래서 억지로 떠밀려서 서울로 갔습니다. 내가 사명을 받아 간 것이 아니라 올데 갈데 없어서 갔지요. 신학공부 할 때까지는 돈을대서 밥먹여 주고 있을 곳 마련해 주고 돌보아주겠다니 왠 떡입니까? 그래서 서울로 왔어요. 그런데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가을에 제가 편입생으로 들어왔는데 편입시험을 치러 오는데 우리 어머니 나이된 여자가 시험을 같이 쳤어요. 그래서 내가 시험치면서 “저 여자 팔자가 기구하구나. 나는 젊어서 올라왔는데 늙은 할머니가 신학교 온것보니 정말 팔자가 기구하구나.” 그때 여러분 팔자가 기구하지 않은 사람은 학교에 신학교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기구한 사람이 신학교 들어왔는데 그래서 신학교 시험을 쳐서 둘이가 다 신학교 들어와서 공부를 하면서 소개를 하는데 들어보니 최자실 목사님. 진해에서 차들 공장이라고 큰 공장을 경영하고 부자로 살다가 망해가지고서 서울로 도망을 쳐 왔어요. 그래서 서울에서 순복음교회 나가다가 그 목사님의 안내를 받아서 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 팔자가 기구하니까 격려해 주면서 신학을 졸업 맡고 이제 나는 도울때가 아무데도 없습니다. 부산에서 오는 도움도 이제 끝났습니다. 어디 갈데가 없어서 방황하고 기도하고 있는데 우리 최자실 목사님이 대조동에 가서 교회도 세우고 고아원도 세운다고 허스름한 집을 하나 빌려놓고 고생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가서 좀 도와주겠다고 애들에게 찬송도 가르켜 주고 기도도 같이하고 도와주는 그 바람에 둘이가 뜻이 맞아서 우리 교회를 세우자. 그런데 나는 천막살 돈도 없고 땅 빌릴 돈도 없는데 하나님이 최자실 목사님을 통해서 천막도 사게 하고 땅도 사게 마련하게 하고 우리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적게 생각해야 되고 나중에는 창대하리라. 시작은 미미해도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씀대로 시작할 때는 아주 미미하게 시작해도 끝을 도와주셨어요. 그래서 천막교회를 시작해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데 아 굉장히 성령이 역사하셔서 많은 영혼이 구원받고 하나님 역사가 일어나는데 그 이상 우리가 나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존 허스톤 목사님이 아프리카에서 한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한국으로 와서 저를 찾아 왔어요. 그래서 저하고 같이 일하자고 그래서 같이 일하자고... 그래서 나, 최자실 목사님, 존 허스톤 목사님 삼총사가 힘을 합쳐서 복음을 전하는데 교인이 한 500여명이 되었어요. 굉장히 눈부시게 발전했는데 더 이상 대조동에 있을 수가 없는데 서울시내로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 어떻게 들어옵니까? 그런데 존 허스톤 목사님이 미국 선교부에 이야기를 해 가지고서 오늘날 서대문에 있는 그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것 내가 지은 것 아닙니다. 나는 공짜로 따라왔어요. 그래서 허스톤 목사님이 날보고 “서대문으로 나가자. 이 교회는 여기 두고 서대문에 나가서 우리 계속 거기서 목회하자. 가만히 보니까 더 이상 여기서 자랄 수가 없다. 서대문으로 나가자.” 제일 처음엔 제가 나가려고 생각 안했습니다. 그러나 자꾸 꾀기에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서 나간게 아니라 꾀어서 허스톤 목사님이 자꾸 꾀기 때문에 내 마음이 변동이 되어서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돈도 없고 배경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이라 자신이 없어요. 그러나 허스톤 목사님은 괜찮다고 나가자고 그러고 무엇보다도 최자실 목사님이 떠난다고 그럽니다. 그러면 내 스폰서가 떠나버리면 나는 어디 갑니까?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나도 따라 갔습니다. 그래서 서대문에서 목회를 시작한 것이 교인이 천명이 되고 3천명이 되고 6천명이 되고 만명이 넘으니까 서대문에 있을 수가 없어요. 서울시 교통과에서 우리보고 주일날 대책을 세우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서대문 일대가 교통마비가 되어 버렸어요. 너무나 사람이 많이 와서.. 그리고 그때는 7부예배, 8부예배까지 봤는데 제가 혼자서 감당하지 못하겠어요. 하다가 하다가 안돼 나중에 강단에서 설교하다가 쓰러졌으니까. 죽을동 살동 모르고 해야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밖으로 나오자고 하니까 밖으로 나올 장소도 없고 돈도 없어요. 우리교회 만여명의 교인들이 나와도 전부 경상도, 전라도에서 서울에 살러 온 사람들 돈 한푼도 없는 사람들이 왔어요. 열심히 교회는 나오지만 돈은 한푼도 없어요. 전부 현재동, 아현동, 판자촌은 우리 순복음교인들이 다 점령한 것입니다. 그런 처지에서 어디에 교회를 짓고 나갑니까? 그런데 마침 여의도로 김현옥 시장이 들어와서 개발하는데 외상으로 땅을 준다고 해서 제가 서대문에서 여의도로 나오려고 하는데 참 배짱이 적어요. 우리 한국 속담에 외상이면 소도 잡아 먹는다고 그랬는데 나보고 한 10만평 가져 가라고 그래요. 여의도 10만평 가져가라. 외상으로... 돈은 천천히 갚으라고 그래요. 그런데 이 마음이 너무 작아서 아니요. 3천평만 주십시오. 아~ 3천평?? 쯧쯧쯧.. 그러면 좋다. 3만평. 3만평. 아니요. 3천평만 주십시오. 그때 3만평이라도 가졌으면 요사이 박쳤지.. 여기 보십시오. 하나님이 일일이 다 예비하셔서 인도해 주셔도 내가 간이 작아서 못 따라 가는거지. 네 입을 넓게 열라고 했는데 나는 조금밖에 안 열었어요. 그래서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짓고 고생은 많이했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목회를 50년 동안 하고 졸업을 하고 난 다음에 요사이는 시간만 있으면 과거에 걸어온 길을 쫙 돌아보면 모든 일에 주님이 예비해 주셨습니다. 제가 불광동에서 서대문으로 서대문에서 여의도로 나온 모든 일에 하나님이 개입 하셔서 하나님이 다 예비해 주셔서 오늘날 이 교회가 되었지 저의 힘으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말 최자실 목사님이 살아 계시면 제가 이제 효도를 좀 실컷 하겠는데 효도할 생각이 들어올 때가 되니까 천당가 버리셨어요. 그러니 자식들이 샘이 차면 벌써 부모는 가버려. 내가 늘 마음에 괴로운 것은 나를 위해서 그렇게 수고를 많이 해주신 최자실 목사님, 존 허스톤 목사님, 이 세상에 더 살지 않고 천국가 버리고 삼총사 중에 저만 남았습니다. 저도 언제갈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남아서 우리가 이룩한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비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도 자식을 위해서 예비하는데 하나님이 구약성경을 통해서 신약성경을 통해서 예비한 것을 우리에게 다 증명해 주고 저같은 목사도 50년을 통해서 예비한 하나님을 체험했지 않습니까? 여러분 생활을 위해서 예비한 것을 믿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그 예비한 길을 보여달라고 기도하고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로 10절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눈으로 못보고 귀로 못듣고 마음으로 생각 못한 저 건너편에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당회장 이영훈 목사를 볼 때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이영훈 목사가 우리교회 당회장이 될줄은 나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서대문에서 제가 목회할 때 이영훈 목사님의 아버님, 어머님이 우리 교회 제직이었습니다. 아버님은 장로였고 어머님은 권사까지 되셨다가 전도사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영훈 목사가 교회 뜰에서 구슬치기 했어요. 내 사무실 근처에 오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예비하셔서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 당회장으로 세우시고 설교 잘해요. 나는 매주일 2부예배는 이영훈 목사님 설교 듣고 은혜 받고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4부예배에 제가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한 일인 것입니다. 예비하신 하나님 얼마나 감사합니까?
마태복음 7장 7절로 11절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좋은 것을 주십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 나쁘게 보이고 우리 생각에는 나쁜 것처럼 생각이 되지만 두고 나중에 보면 다 합동하여 좋게 되는 것을 알수 있는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이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긍정적인 믿음으로 기도하고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대를 초월해서 예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고 근심하고 낙심하고 뒤로 물러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 잡지인 “생명의 삶”금년 1월 호에 실렸던 이야기 입니다.
영국 선교사 글레디스 에일워드(Gladys Aylward)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중국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 군대가 중국 북부를 침략했을 때, 그는 100여 명의 고아들을 데리고 양챙으로 급히 피신을 했습니다. 그녀는 고아들을 산속으로 데려가면서 안전하게 피신할지 몰라서 굉장히 고민을 했었습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다음 날, 그가 고민하고 있는데 13살 밖에 안 된 소녀가 선교사에게 홍해수가 갈라졌던 일과 모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선교사를 오히려 격려했습니다. 자기가 데려온 고아가 선교사를 격려했습니다. 그 많은 애굽의 군대 앞에서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서 군대를 다 구출해 주신 것이 우리 고아들 하나님이 돌봐 주시니 걱정하지 말라고 선교사가 보고 그래서 그 선교사 “야 정신 차려라. 나는 모세가 아니야! 내가 모세인지 아느냐?” 그러니까 그 애가 하는 말이 “물론 선교사님은 모세가 아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똑같은 하나님이에요.” 와~ 저는 그 이야기를 읽었을 때 마음에 감동이 왔습니다. 나는 여러 가지 일이 다가오면 모세는 그렇게 했지만 나는 못한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못한다. 다윗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못한다. 그런 변명을 했는데 아 이 소녀가 나보고 하는말 같아요. 그래 너는 모세도 아니고 아브라함도 아니고 다윗도 아니지만 너가 믿는 하나님은 똑같은 하나님이야. 문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네게 문제가 있어. 마음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내게 있구나. 내가 모세처럼 믿고, 아브라함처럼 믿고, 다윗처럼 믿으면 하나님은 똑같이 역사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산이 아무리 높고, 바다 물이 창일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놓인 어떤 문제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을 찾으면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예비해 주시는 하나님께 마음에 감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난 다음 원수를 갚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러면 참 고약한 사람입니다. 은혜를 감사함으로 갚아야지 은혜를 원수로 갚고 은혜를 나쁜 것으로 돌려 갚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벌 받을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고 예비해 주신 것을 체험했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은 풍성하시고 영광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쓸 것은 채우시는 것입니다.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모든 쓸 것을 다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래 전에 기상 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대형 허리케인이 카리브해에서 발생하여 플로리다 주를 강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 있는 작은 호숫가에 찰스 시어즈(Charles Sears)라는 사람이 아내와 자녀 세 명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재난이 닥쳐오니까 갑자기 하룻밤에 물이 불어서 온 동네가 물에 잠겼습니다. 대형 허리케인으로 호수의 제방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들의 보금자리가 물에 잠기고 가족들은 가까스로 높은 지역에 있는 고목나무를 찾아 나무에 기어 올라 갔습니다. 그러나 물은 점점 차올라 고목까지 잠기게 되고 그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또 그곳도 차여서 나중에는 가지를 잡고 목만 물 밖으로 내서 발버둥 쳤습니다. 폭풍우는 계속되고, 물은 계속 불어나는데 살아나갈 가망이 없다고 느껴지자 찰스는 절망적으로 말했습니다. “이젠 틀렸어! 이제 우리 서로 우리 가족들 다 이별을 하자.” 찰스는 자기 부인을 보고 “내게 시집와서 고생 많이 했오. 천당에 가서 편안히 잘 사세요. 얘들이 내가 너희를 잘 못 키운 것 용서해다오. 이제 아버지하고 우리하고 너하고 다 떠날 시간이 왔다.” 그런데 그 부인이 하는 말이 “여보, 왜 그런 소리를 합니까? 우리가 지금 이 나무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한번 안했잖아요. 주님께 살려달라면 주님이 살려 주실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 찬송 불러요.” 어려울 때는 남자보다 여자가 강해요. 사실 남자가 겉으로 큰소리 하지 여자보다 100배 못해요. 여자들이 지혜롭고 총명하고 담대해요. 그래서 그 부인이 찬송가 432장을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음치가 되어서 노래를 못불러요. 나도 노래 좀 부르면 참 좋겠는데 내 노래 음치니까 우리 다같이 한번 불러 보십시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이 노래를 부르고 나니까 갑자기 하나님이 그들과 같이 계신 느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살 수 있다는 소망이 떠오르는데 가만히 보니까 저 위에 호숫가에 대놓는 빈배가 있었는데 그 배가 자기들 향해서 떠내려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가 나무 귀퉁이에 그 배를 끌어다 식구들이 다 타고 배를 저어가지고서 안전한 지대로 나가서 온 가족이 다 구출을 받았습니다. 그 후, 찰스 가족이 겪은 일이 가이드포스트에 실려 많은 사람들이 읽고 큰 은혜를 받기도 했습니다. 온 미국 전국에서 그들에게 편지가 오고 연락이 오고 간증을 들으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두려워 말고 항상 예비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구하고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도 안 해보고 절망하지 말고 구하고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찬송은 우리가 보통 때 부를 때는 감격없이 부르지만 물이 목까지 차여 가지고서 애들이 물이 머리 위에 차일지 모를 그 순간에 이 찬송을 부른다는 것은 정말 기막힌 감격인 것입니다.
우리 3절, 4절 다같이 찬송해 보십시다.
너 쓸 것 미리 아시고 주 너를 지키리 구하는 것을 주시며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어려운 시험 당해도 주 너를 지키리 구주의 품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결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이 예비한 길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여러분 일생을 정해 놓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손금처럼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귀하지 아니하면 만세전에 여러분을 택할 턱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주님 중심으로 살고 고난 당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찾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문제의 해결을 예비해 놓으시고 하나님 기쁘게 그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과 탄식하지 말고 예비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령
고전 2:9-15 / 장경동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양면으로 균형을 완벽하게 이루고 있습니다. 균형은 양면이요, 곧 대칭입니다. 사람과 그 안에 있는 영, 하나님과 성령님, 사람의 지혜와 성령의 가르침, 육에 속한 사람과 신령한 사람, 균형은 좌우, 상하 복합적으로 이뤄야 합니다. 십자가는 좌우균형, 상하의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인생사에 있어서도 부부간의 균형(좌우균형), 부모, 자식 간의 균형(상하균형)을 복합적으로 이뤄야 합니다. 이렇게 균형 잡힌 사람을 오늘 본문에서 신령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두고 보기에도 아깝게 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생각도 마음도 말도 행동도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에 보면 양면 대칭이 너무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와 하나님의 영, 성령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지혜라고 똑 같은 것이 아닙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사람 즉 신령한 사람이 다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신령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신령한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 엡1:3 “찬송 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먼저 영혼의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신령한 은사 : 롬1: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세상에는 육신의 것이 있고 신령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전12: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신령한 것(은사)을 알기 원한다는 겁니다.
세 번째 신령한 식물 : 음식을 먹어도 신령한 식물이 있습니다. 고전10:3-4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신령한 식물은 말씀(예수그리스도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을 말하고, 신령한 음료는 성령을 말 합니다. 성령의 샘솟는 기쁨이 넘쳐 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번째 신령한 몸 : 고전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다섯 번째 신령한 노래 : 신령한 노래는 찬송입니다. 엡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여섯 번째 신령한 예배 :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찌니라”
신령한 자가 받을 은혜와 축복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1.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한, 생각지도 못한 축복을 주십니다.
고전2: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 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아는 지식과 믿는 믿음은 다릅니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일 뿐 신뢰의 대상이 아닙니다. 신령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수양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아브라함에게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한 상상하지 못할 은혜와 축복인 것입니다. 내 인생의 뒤안길에 하나님 앞에 순종치 못해 받지 못한 축복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인생을 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갔다면 하나님이 가라고 지시한 인생보다 더 나은 길 이었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순종 하는 자가 신령한 자입니다.
2. 신령한 자는 하나님을 정확하게 압니다.
고전2:10-11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 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 하느니라” 호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 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을 안다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바로 신령한 자라는 증거입니다.
3. 신령한 자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고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신령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4.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만 분별이 됩니다.
고전2:13-14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친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 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 함이니라” 고전12:7-11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 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여러분은 신령한 사람입니까? 말로 말하지 말고 신령한 은사로, 신령한 삶으로 나타내십시오.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5. 신령한 자는 남은 판단해도 자신은 판단 받지 않습니다.
고전2:15“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아니 하느니라”성령의 가르침에 따라 순종해서 살아가는 삶이므로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자
고전 2:10-14 / 박성복목사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세상의 지혜가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으며, 세상의 영을 받은 자가 있고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중에는 육에 속한 자가 있고 영에 속한 자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가 되시고 영에 속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영을 받은 자는 세상일을 열심히 하며, 육의 만족을 위해서 세상의 지혜로 애를 쓰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영을 만족케 합니다. 오늘 여러분, 내 영혼이 예배를 통해서나 말씀을 통해서 만족하여 지기를 바랍니다. 2013년도에는 육도 만족해야 되겠지만 영을 만족케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을 만족케 하는 것은 말씀이 아니고는 영을 만족케 할 수 없습니다. 육을 만족케 하는 것은 물질이며 세상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영을 받아서 활동하는 자가 많지만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는 심히도 적습니다.
그래서 오늘 12절에 보면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은 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영을 받은 자라고 하면 육에 속한 자이고, 육에 속한 자는 세상 지혜를 말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학문과 지식과 기술 등 이런 것이 전부 다 세상의 영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의 깊이를 파고 들어가고 그 하나님께 연합된 종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 인간이 노력하고, 연구하고, 인간이 배우고, 인간이 발표하고 하는 이것들은 전부 다 세상의 영을 받아야 되는 것들입니다. 오늘날 과학이 최첨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주 시대가 열리고 있는데, 세계를 정복하다가 우주까지 정복하게 되는 시대가 오는 것은 과학의 발달에 의한 것입니다. 이제는 의학이 발달해서 사람의 인체까지 리모델링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래서 장수하게 하고 수명연장을 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이런것들은 모두 세상의 영을 받은 자들의 하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로 인해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활용하여 잘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 두 가지의 사람이 있고, 두 가지의 영이 있고, 두 가지의 지식이 있고, 두 가지의 역사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육의 것도 알아야 하고 그것을 가져야 되겠지만 영의 것을 모르면 큰일 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것에 더 비중을 많이 두기 바랍니다. 여러분, 육의 영을 받은 사람을 보면 얼마나 약삭빠르고 영리한지 모릅니다. 어려운 일을 잘 처리하고, 손익계산을 너무나 잘해서 손해 보지도 않고, 자기의 이익만을 누리고, 풍요롭게 살아가게 되는데 그런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런것들은 전부가 다 없어질 영광이요, 없어질 지혜요, 끝이 나면 폐기처분 할 지혜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멍청한 데가 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지혜가 있고, 아무리 명예가 있으며 아무리 영광이 있어도 세상 지혜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육의 일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진리 앞에서는 이 사람들은 매우 비판적입니다. 트집을 잡고, 불신하며, 냉소적이고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영적인 사람을 비난하며 또한 대결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것에는 좀 미달된 것들이 있고, 좀 모자란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연합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의 영을 받아 육에 속한 자가 되기보다는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아서 하늘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12절 하반절에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여기에 ‘우리’라고 하는 것은 복수를 나타냈으니 한 사람이 아니고 단체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사람은 세상적으로는 조금 우둔한 것 같고, 어리석게 보일 때도 있고, 때로는 손해 보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영을 받은 자와는 다릅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선별한 자들이며 하나님이 아끼는 자들인데 이들을 이미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 이전에 예정을 하셨고, 계획을 하고 계셨지만 그 계획들을 감춰놓았다가 때가 될 때에 자기 사람에게 그 계획을 전해주시고 역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또는 별 볼 일 없는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자기 사람에게 준다고 하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입었다는 것이고 은혜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창세전에 예정하셨다고 하셨으니, 이미 우주도 만들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 비밀한 것을 숨겨놓았다가 자기 사람에게 알려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기 사람이 누구냐면 오늘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자 중에서도 특별히 선택한 자에게 비밀을 줍니다. 오늘 여러분, 이런 비밀의 소유자가 꼭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는 ‘내가 하나님의 비밀을 소유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것을 내가 깨달았다는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5절 26절에 보면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말씀을 이루는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공개를 하시는데도 일반 공개가 있고 특별 공개가 있습니다. 일반 공개는 하나님의 백성 중에 누구에게나 알려주고 누구에게나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공개는 아무에게나 알려주지 않고 사랑을 입은 자에게, 자기 사람에게만 은혜를 입혀서 알려주는데 이것은 특별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바울에게 주신 은혜는 특별 은혜입니다. 베드로에게 주신 은혜도 역시 특별 은혜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에게 주신 은혜도 특별 은혜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일반 은혜보다도 특별 은혜를 받은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시대의 선구자가 됩니다. 여러분, 이왕 예수를 믿을 바에는 인정받도록 믿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왕 사람이 교제를 하려면 인정받도록 해야 됩니다. 마음을 내놓고 믿을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믿을 수 있는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세와 만대”라는 것은 수천만 년 전인데 하나님이 이미 오래전에 묶어 놓았던 비밀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때가 되므로 그것을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냈다고 그랬습니다.
그 1차적으로 나타난 특별한 비밀은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획했던 대로 사도들을 통하여 십자가 부활의 비밀을 공개했습니다. 그 당시 율법 시대 사람들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불러다가 그 비밀을 공개했습니다. 2차는 신원의 종들을 통하여 나타날 영육구원의 비밀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모든 역사가 마지막 부분에 영과 육의 축복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러면 끝나게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놓쳤던 것을 마지막 아담이 회복하게 됩니다. 마지막 아담이 이것을 회복할 때에 어떻게 회복하실 것인지에 대한 것이 수천 대를 흘러내려 오다가 사도들을 통하여 딱 공개를 합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공개를 할 때 그 공개하는 것이 1차와 2차로 나눠지는데, 은혜 시대와 신원의 날의 두 시대에 공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그래서 본문 7절과 8절에 봐도 “이 비밀은 만세 전에 미리 정해놓았다”고 했습니다. ‘만세 전’이라는 것은 ‘영원전’입니다. 이미 영원전에 미리 정해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혜를 세상 관원들이나 지식자들이나 세상의 명예를 가진 자들이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 비밀을 하나님께서 깊숙이 숨겨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 중에서 특별히 선택을 입은 자들에게 공개하는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그 비밀을 왜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감추어놓았을까요?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 어느 때에, 어느 역사를, 어느 종에게, 어떻게 주어서 이루시겠다고 하는 프로그램이 이미 짜여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의 프로그램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며 그의 계획하신바 대로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열심을 내겠다”라고 한번 해보십시오. 잘 안 됩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와야 되게 되어 있습니다. “야, 내가 이제 금년에 작년보다 예수를 잘 믿어보겠다. 봉사 좀 하며 살아 보겠다”라고 해 보십시오. 잘 안 됩니다. 여호와의 열심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니 그 모든 것 하나 하나가 내가 하고 싶다고 하면 우리는 뒤쳐져 버립니다. 그러니까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가만히 봐보십시오. 직분을 줬다고 해서 그 직분대로 다 하지를 않습니다. 여호와의 열심을 안 받고는 인간의 열심으로는 안 됩니다. 한 번 해보십시오. 그래서 인간 작심은 삼일이 지나면 도로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주시는 열심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사명의 충성은 날이 가면 갈수록 더하게 되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영글어집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우리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신령한 은사를 입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영을 받았지만 특별한 은혜를 입어야만이 깊은 것을 들춰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것을 허락해야 됩니다. 허락하지 않고는 도저히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보니까 만세전에 미리 정해놓았다가 이것을 때가 될 때에 공개하는데 관원들도 알지 못했다고 그랬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숨겨놓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알지를 못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발견되는 자를 통하여 하게 되는데 그 발견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 속에서 발견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기록도 성령의 역사 속에서 기록하게 되고, 이 말씀을 풀어서 해석할 수 있는 것도 성령의 역사 속에서 풀어내게 되는데 그래야 풀이가 완벽합니다. 유다서 19절에 보면 ‘육에 속한 자는 성령이 그 속에 없다’고 아예 못을 박아버렸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배우고 가르쳐주기 때문에 계시를 할 수가 있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감춰놓은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게 된다고 그랬습니다. 여기 ‘깊은 것’은 원어에는 ‘바도스’라고 하는 단어를 썼는데 ‘하나님의 깊은 것’입니다. 그 분이 남이 알지 못하도록 숨겨 놓은 것, 남에게 알려주지 아니한 것을 여기에 ‘바도스’라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달한다’고 했는데 ‘에류나오’라는 단어인데 ‘찾아내다, 관찰하다, 발견하다’는 단어 입니다. 이는 그 분만이 아는 비밀을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자만이 알도록 깊이 감춰 놓았는데 성령의 역사로 그것을 찾아내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귀한 것을 찾아내고, 깊은 것을 발견하고 하는 것은 다 성령의 역사가 그 속에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것은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깊은 것은 아무나 발견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에게 아낌없이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분의 사랑을 입은 자가 아낌없이 받게 되고 그 받은 자는 또한 자기가 사랑하는 성도에게 공급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춰 놓은 것을 찾아내어 자기가 사랑하는 자에게 배급을 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 모든 것을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람에게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 분의 사랑을 입은 자가 받고, 그 받은 것을 또 그 사랑하는 자에게 아낌없이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낌없이 주는 것은 누구에게 주느냐면 절대로 갈급해 하는 자에게 주게 되어 있습니다. 목이 마른 자가 물을 찾을 때에 물을 주게 되고, 배가 고픈 자에게 빵을 주듯이, 자기 사람이라도 갈급해야 주게 됩니다. 제가 얼마전에 어떤 분을 만나봤더니 너무나 말씀이 갈급해서 못 살았는데 이 말씀을 듣고 나서는 속이 후련하다고 그러더라고요.
오늘 여기 본문 13절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지혜는 오늘날 학문이 발달하고 과학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세계에서 성형수술 1등이 한국이더라고요. 외형도 전부다 뜯어 고치고, 이제는 몸속의 장기도 뜯어내서 바꿔 끼우고 할 수 있도록 이렇게 발달하였으며 이렇게 좋은 시대가 됐습니다. 여러분, 아마 세계에서 물가가 비싸기로 대한민국에서 청담동이 제일 비싼 것 같아요. 우리가 비싼 환경속에 있으면 우리도 비싸게 놀아야 돼요. 여러분, 제가 얼마전 신문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지난 토요일 날 중앙일보를 한 번 있으시면 찾아 보십시오. 저는 잘 모릅니다만 SSG마켓과 고메이494라는 업소가 있어요. 그것이 청담동에 있는데 강북에 있는 사람들이 성지순례같이 다녀간답니다. 제가 청담동에 사니까 관심 있게 읽어봤습니다.
거기가면 사과 하나에 18,500원이랍니다. 여러분, 놀라지도 않네요. 저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50㎖짜리 간장 1병에 350,000원이랍니다. 그 두 마켓이 청담동에 있는데 기자가 저녁때도 아닌 점심때에 갔더니 줄을 섰는데 15분이나 서 있다가 들어갔대요. 그리고 그 가게에 들어가니까 앉을 자리가 없더라고 그래요. 강북에 사는 사람들이 그곳이 어떤 곳인가 하여 성지순례를 오듯이 사지도 않으면서 막 줄을 서고 다녀간다고 그래요. 사과 하나가 어떻게 생겼길래 18,500원이나 하고 50㎖짜리 간장 하나가 350,000원이라면 한 숟가락에 몇 만원짜리입니까? 아마 제가 말했다면 ‘아, 목사님이 뻥튀기 많이 한다’ 그러겠지만 지난 토요일인 2월 2일 중앙일보에 난 기사 내용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지혜를 받은 사람들은 그걸 사 드시는지 몰라도 하늘의 영을 받은 사람은 사먹으라고 해도 그걸 못 사먹습니다. 왜? 그렇게 낭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걸 먹으면 창자가 금으로 광이 난다든지 얼굴이 환히 밝아서 밤에도 불 없이도 다닌다든지 그러면 사야죠. 세상의 영을 받은 자들은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만 그런 것은 다 허무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생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구원이 이뤄지지도 않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할 수 있는 사람, 깊이 숨겨있는 것이라도 찾아낼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도 하나님께 “제게 좀 더 지혜를 주셔서 더 많은 하나님의 비밀을 찾아내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늘 드립니다만 그러고 보니까 저를 통하여서 찾아낸 말씀의 비밀이 참으로 많더라고요. 바울이 찾아내지 못한 것도 찾아냈고, 베드로가 찾아내지 못한 것도 찾아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도와 주시기만 하면 이보다 더한 일도 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깊은 심해(深海)에 들어가서 찾아내야한다거나 깊은 동굴 속에 들어가서 찾아내야 한다면 못 찾아내겠지만 말씀 속에 있다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만대로부터 감춰진 비밀이라도 반드시 찾아 낼 수 있을 줄 압니다.
오늘 여러분, 이런 역사는 육에 속한 자는 상상을 할 수 없으며, 땅에 속한 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은 자 중에서 특별히 은혜를 입은 자가 되면 그분의 비밀도 찾아내게 되고, 그 찾아낸 것을 자기만 갖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자에게 또 주게 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동인교회가 없으면 살 맛이 안 난다고 하는 것은 사랑하는 자들이 여기에 앉아있다는 말 아닙니까? 저는 그렇습니다. 제가 먼저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너무 감사하고 좋아서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어서 나눠줘야지’하고 주일을 기다리고, 또 수요일이나 금요일을 기다리다가 서로 나눠서 먹으니까 영적으로 흡족해지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여 찾아내는 성도들이 되었을 때는 그 얼굴이 화사하게 됩니다. 길가에서 만원짜리를 발견하고 기분이 나쁘다면서 인상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동전하나를 주어도 얼굴이 펴지는데 하물며 영생의 보화를 캐내고서 가져가는 자는 얼굴이 펴야 그 말씀이 자기 것이 됩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저절로 얼굴이 화사하게 펴져야지 번데기같이 쭈글쭈글 하면 이 자리에서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저 봄 동산에 눈 녹듯이 모든 것 다 흘려 버리고 얼굴이 화사하게 웃어야 하고 그 웃을 때의 아름다운 모습이 적어도 일주일이 가도록 웃어야 됩니다. 오늘 여러분, 성도와 성도가 교제하면서 한번 인사하는 것이 일주일을 가게 해야 됩니다. 또 서로 손잡고 인사하는 것은 복이 전달하는 것입니다. 도둑놈하고 손잡아 보세요. 밤에 남의 집에 문 열리는 곳만 찾아다니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신령한 것을 찾아내고, 신령한 것을 발견하고, 신령한 것을 받아갈 때는 내 마음이 달라져야 하고 얼굴 빛이 달라져야 하며 기뻐져야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 본문에 보면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친 것으로 하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함이니라’고 했으니 영에 속한 자가 아니고는 영에 속한 것을 모르게 돼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도 영의 속한 자가 아니면 시대의 흐름을 모르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 정말로 이 말씀을 들을 때에 내 마음이 시원해지고, 이 말씀을 들을 때에 내 마음이 흐뭇해지기를 바랍니다. 잠언 25장 13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와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고 했는데 자기를 보내는 자에게 얼마나 충성한 종인지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5절에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자에게 냉수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먼 땅에서 온다는 것은 주님나라에서 오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 소식이 목마른 자에게 냉수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5장 1절에 보면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의 사람들중에는 돈에 목이 마른 사람은 많이 있어도, 진리의 생수가 갈급하여 목마른 자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목 마른 자들에게 이 말씀을 주므로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와 같이 시원한 갈증을 풀어주는 말씀이 되기를 바라며, 그런 말씀을 저와 여러분들이 소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육의 사람이 될 것이냐 영의 사람이 될 것이냐라고 할 때에 우리는 반드시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의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요, 육의 사람은 땅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의 사람은 땅에서 잘 살기만을 위해서 노력하지만, 영에 속한 우리는 내세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고 내세를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우리는 오늘날 세상 어둠 속에서 살지만은 빛을 가져야 되고요 세상 악인들 속에서 살지만은 하나님의 보호로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하나님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입은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에게도 중요한 사람에게는 비밀을 주는데, 심지어 하늘의 비밀은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소유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은 분명히 하늘의 영을 받은 자 중에서도 특별한 은혜를 입은 자가 되어, 하나님의 비밀을 가진 자들로서 시대를 분별하면서 이제 오실 주님을 증거하는 시대의 선구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일, 성령의 은혜
고전 2:10-16 / 이윤재목사(한신교회)
가정의 달을 맞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와 가장 오래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연히 “토지”를 쓴 박경리가 쓴 “어머니”란 시를 읽었습니다. 박경리, “어머니”.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 사별 후 삼십여 년 꿈 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 고향 옛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서울 살았을 때의 동네를 찾아가기도 하고 피난 가서 하룻밤을 묵었던 관악산 절간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알지 못할 곳을 애타게 찾아 헤매기도 했다. 언제나 그 꿈길은 황량하고 삭막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한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꿈에서 깨면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 했다. 불효막심했던 나의 회한 불효막심의 형벌로써 이렇게 나를 사로잡아 놓아주지도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
박경리의 어머니는 죽은 지 이미 30여년이 되었지만 박경리는 여전히 어머니의 꿈을 꿉니다. 그가 꿈만 꾸면 언제나 어머니와 함께 했던 곳을 헤맵니다. 그러나 헤매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퍼뜩 “아, 어머니가 없지” 하고 정신이 차리면 자기 생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낍니다.
죽어서도 함께 사는 사람,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우리 자식들, 그 생명의 인연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끊지 못한 것일까? 놀랍게도 성경은 우리의 영혼의 세계에도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성령님을 어머니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한 것 같습니다. 성경이 성령을 말할 때는 늘 어머니의 은유로 말합니다. 요14:16,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예수님은 예수님이 떠난 빈 자리에 다른 한 분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분을 “보혜사”라고 부릅니다. 보혜사란 “옆에 있는 분”이란 뜻입니다. 다만 옆에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옆에서 위로하시고 옆에서 말씀하시는 분으로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4:18,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14:17,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슴이라”. 누가 우리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까? 인간적으로는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어머니처럼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고 또 우리안에 계신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은 그 분이 “생명의 숨”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숨을 쉬고 삽니다. 성경은 성령을 “숨”, 히브리어로 “루아흐”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이 말을 “입김, 콧김, 숨, 하나님의 신”이라고 부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의 신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신은 숨입니다. 호흡이요 입김입니다. 숨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성령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계십니다. 숨은 생명입니다. 성령님도 생명입니다. 누구나 숨을 들이쉬고 내뱉지 못하면 죽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그래서 1968년, 웁살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성령이 없이는 하나님도 사라지고 그리스도도 과거에 머물게 된다. 성령이 없으면 복음은 죽은 문서요 교회는 하나의 조직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 권위는 지배를 위한 권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성령이 없으면 선교는 자기 선전에 불과하고 예배는 자기 도취가 되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도덕적 노예생활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성령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분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성령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믿습니까? 성령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믿습니까? 오늘 말씀은 그것을 말씀합니다.
먼저 성령은 다 아신다
오늘 말씀이 성령님에 대하여 말하는 첫 번째는 성령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 믿음의 중요한 목표입니다.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더 멀리 계시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쉽게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토끼, 집토끼 이야기가 있습니다.
산토끼를 연구하는 한 생물학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산에 올라가 산에서 놀고 있는 산토끼를 연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산토끼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여기 저기 뛰어다니고 숨어 다닙니다. 할 수 없이 산토끼를 잡아 집으로 가져와 우리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산토끼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잠은 어떻게 자는가? 생활습관은 어떤가? 오랜 시간 산토끼를 연구한 생물학자는 산토끼에 대한 긴 보고서를 냈습니다. 이 정도면 산토기에 대한 연구는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보고서를 읽은 노 학자가 조용히 한 마디 했습니다. “산토끼를 연구한 것이 아니라 집토끼를 연구했군”. 그렇습니다. 산토끼는 산에 있는 토끼입니다. 산토끼를 연구하려면 산에서 뛰어 노는 산토끼의 있는 그대로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산토끼를 잡아 집안 우리에 가둬 놓고 연구했으니 그는 산토끼가 아니라 집토끼를 연구한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본래 모습대로 아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롬11:32절이 말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멀리 계시고 또 깊은 데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의 방식과 하나님의 지혜의 방식입니다. 성경이 쓰여진 고린도 사람들은 헬라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지혜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혜의 방식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13절입니다. 고전2:13, “이것을 우리가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친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분별하느니라”. 헬라사람들은 인간의 지혜로 진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혜로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을 배워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을 통해 깨닫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가 알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어서 압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갈4:9입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 알려집니다. 그 일을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보는 말씀을 통해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기도는 들리는 말씀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요14:26절입니다. “보혜사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르치고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을 깨닫게 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곳뿐 아니라 인간의 깊은 곳을 알게 합니다. 11절입니다. 고전2: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하나님이 깊은 곳에 있듯이 인간도 깊은 데에 있습니다. “열 길은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겉으로 볼 때는 작아 보여도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중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 아내의 마음이랍니다. 어떤 분이 아내를 이해하려면 아내의 말의 숨겨진 뜻을 알아야 한답니다. 가령 아내가 콧소리로 “자기 나 사랑해?”하면 이 말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고 “나 갖고 싶은 거 있는데 사 줄 거야?”하고 묻는 것이랍니다. 아내가 “자기, 나 얼마나 사랑해?”라면 “나 비싼 거 샀는데 괜찮지?”라는 뜻이랍니다. “어머, 쓰레기 봉투가 벌써 다 찼네”라는 말은 “그렇게 앉아만 있지 말고 빨리 갖다 버리라”는 뜻이랍니다. 아내가 “나, 화 안 났어”하면 실제 화가 안난 것이 아니라 “나 지금 엄청 열 받았어”라는 뜻이고 “당신 맘대로 해”하면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돼. 그렇게 하기만 해 봐라”의 뜻이랍니다. “차가 너무 지저분하네”하면 “그렇게 게으름만 피우고 있지 말고 빨리 차 청소하라”는 뜻이고 아내가 목소리를 착 가라앉히며 “당신, 나하고 이야기 좀 해요”하면 그날은 죽는 날이랍니다. 남자들은 겉으로 나타난 말만 듣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말을 잘못 알아 듣습니다.
성령님은 사람의 깊은 곳도 이해하게 합니다. 2004년 2월, 태국으로 단기선교를 떠난 단기선교팀이 메콩강에서 사고를 당했습니다. 두사람의 학생이 메콩강에서 배를 타다가 배가 뒤집혀 순교했습니다. 제가 새벽에 그 이야기를 듣고 기도하는 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메콩강에서 죽은 두 학생의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그들 역시 울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중학생, 하나는 막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한 후였습니다. 그리고 제 가슴이 아프기 시작했는 데 마치 칼로 도려내는 것과도 같은 아픔이었습니다. 다음 날, 제가 두 학생의 부모에게 연락하고 찾아갔습니다. 저는 부모를 알지도 못했고 만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부모를 만나 성경을 펴는 순간 제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러다 말겠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20분이 지나도 30분이 지나도 눈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말은 한 마디도 못하고 마치 엄마잃은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울자 부모도 울었고 우리는 오랫동안 말없이 붙잡고 울었습니다. 처음보는 부모를 보고 한 마디로 못하고 울기만 하다니 저로서는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부모와 이야기하는 가운데 부모가 메콩강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제가 선뜻 “제가 메콩강에 다녀오겠습니다” 했습니다. 그 해 8월, 저희 부부는 약속대로 태국 메콩강으로 갔습니다. 물어 물어 사고의 현장으로 갔을 때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메콩강의 북정물이 되어 거칠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비내리는 강가에 앉았는 데 또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자녀 잃은 부모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다시 부모를 만났는 데 그들이 제 손을 잡고 말합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처음 뵙자 마자 눈물을 흘려서 처음에는 놀랐습니다. 그러나 계속 목사님이 우시는 가운데 저희 마음이 한없이 자유했습니다. 또 우리 자식들만 위해 태국까지 다녀오시니 이제 저희들이 힘을 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치유가 된 것입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우리가 말 몇 마디로 사람을 위로하거나 격려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감동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사람을 진정으로 위로하게 하고 사랑하게 합니다. 다시 11절입니다. 고전2: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사람의 깊은 곳을 알게 하신 분도 성령님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게 한다
성령님이 하시는 두 번째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11절 후반절을 보겠습니다. 고전2:11, “이와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그리고 12절을 보겠습니다. 고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많은 일들을 경험하고 삽니다. 성공한 일, 실패한 일, 잘한 일, 못한 일, 우리는 대부분, 일의 표면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일의 내면, 깊은 뜻은 잘 모르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하나님과 무관하게 일어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일의 표면이 아니라 일의 내면입니다. 이것이 어떤 일인가 보다 이것이 왜 일어났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는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나에게 하나님의 일이 되도록 돕는 일입니다. 제가 한번은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가 샤워를 하려고 세면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새 비누가 하나 있는데 아무리 문질러도 거품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 비누가 거품이 안 나오지?” 했더니 말합니다. “비닐 껍질을 안 벗겼잖아요”. 자세히 보니 투명한 비닐 껍질을 안 벗겼습니다. 껍질을 안 벗겼으니 거품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일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비누와 같습니다. 모양은 그럴싸 해도 껍질이 그대로 있으면 거품을 낼 수 없습니다. 껍질을 벗겨내야 합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 눈의 껍질을 벗겨내고 사물의 내면을 보게 하고 사건의 껍질을 벗겨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갑자기 어려운 일을 당합니다. 두 달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새벽기도했는 데 건강하던 남편이 갑자기 암이 생겨 입원합니다. 교회에서 여신도 회장으로 한참 재미있게 신앙생활하는 데 갑자기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납니다. 그렇게 잘 지내던 교인으로부터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오해를 받고 악성루머에 시달립니다. 그때 느끼는 첫 번째 생각은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일을 겪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내가 잘못이 없는 데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아무리 고민하고 생각해도 해답은 없습니다. 아직 껍질로 감춰있습니다. 이렇게 물어야 껍질이 벗겨집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 일을 통해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때 임하는 것이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고난을 먼저 없애주는 분이 아니라 고난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갖게 하는 분입니다. 그 다른 생각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입니다. 지금까지는 내 생각으로 생각하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고난을 당하고 우리가 힘들 때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는 상황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하는 은혜입니다. 내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보게 하는 은혜입니다. 생각을 바꿔주시고 시각을 교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밑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도 보고 옆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도 보고, 땅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도 보는 것입니다.
헤럴드 쿠시너가 쓴 <왜 선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천성적으로 착한 쿠시너는 모든 교인들로부터 존경받는 훌륭한 목사였는데, 어느 날 3개월 된 어린 아들이 중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서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놀랍게도 ‘조로증’이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습니다. 3개월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가 노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10살이 되기 전에 팔순 노인처럼 늙어버려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쿠시너 목사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들의 고통을 가슴에 끌어안고 오랜 시간 동안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날 다음과 같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째, 땅에 있는 사람들 중 기쁨만 누리는 사람도 없고 슬픔만 있는 사람도 없다. 둘째, 인생의 고난을 나 혼자만 당하는 것 같지만 모든 사람이 다 겪는다. 셋째, 이 땅에 우연한 일은 없으며 내 머리로 이해는 안되지만 고통가운데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계획이 있다. 넷째, 하나님이 문을 닫으실 때 반드시 하나의 문을 닫고 또 하나의 문을 여신다. 다섯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일어나며 우리는 결국 하나님안에서 승리한다. 이것이 성령이 주시는 감동이었습니다.
요즘 제가 경험한 것입니다. 평온한 교회는 잔잔한 바다와 같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볼 때는 잔잔해도 속으로 들어가보면 급한 조류와 차거운 파도가 있습니다. 이번에도 어떤 일로 급한 조류가 몰아쳤습니다. 제가 새벽이 나와 기도하는 데 작은 환상이 보였습니다. 제가 아기처럼 걷는 데 걷다가 넘어지고 걷다가 넘어집니다.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와 같습니다. 제가 눈을 뜨고 생각했습니다. 왜 아이가 걷다 넘어지고 걷다 넘어질까? 왜 내가 아기처럼 걸음마를 할까? 그러다가 생각했습니다. “아, 나는 아직도 어린 아기구나”. 내 영적 상황을 보여주는 환상이었습니다. 그렇게 아침 저녁으로 노력해서 조금 큰 줄 알았는 데 아직도 저는 아이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 또 하나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이는 넘어지면서 크는 것이 아니야?”. 지난 월, 화, 이틀간 목회자 들과 함께 충남 옥천에 있는 목회자 수양회에 다녀왔습니다.
거기 있는 데 우리 교회 집사님 한분이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요즘 힘드시죠?” 제가 “괜찮아요” 했더니 집사님이 말합니다. “목사님, 다 성장통이잖아요. 아이들은 넘어지면서 크잖아요. 교회도 부흥하려면 아픔이 있잖아요”.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본 환상을 집사님도 보았나? 무엇보다 우리에게 다가온 고난을 성장통이라고 해석한 집사님의 해석에 감사했습니다. 목회자도 아니고 평신도가 그렇게 고난을 해석한 것도 대견하고 그렇게 목회자를 위로한 것도 감사했습니다. 그때 제가 정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이는 넘어지면서 자랍니다. 넘어지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지만 걷기 위해 넘어지는 것은 필요하고 좋은 일입니다.
지금 넘어져 있습니까? 걸음마하는 것입니다. 다 자랐으면 걸음마도 안 합니다. 지금 자라고 있고 지금 크고 있고 지금 되고 있기 때문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넘어져서 그대로 주저 앉아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장통입니다. 자라기 위해서 넘어진 것입니다.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마귀는 넘어질 때 네가 실패해서 넘어졌다고 하고 성령님은 자라기 때문에 넘어졌다고 말합니다. 마귀는 넘어질 때 일어나지 말라고 하고 성령님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성령의 은혜로 받으면 실수는 해도 실패는 없습니다. 성령의 은혜로 받으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성령님이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몇 년 네팔 선교에 가서 경비행기로 에베레스트 상공을 난 적이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로 올랐더니 8,000미터 히말라야가 다 제 발밑에 있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바뀌지 않습니다. 문제의 에베레스트는 항상 내 앞에 입을 벌리고 서 있습니다. 문제를 이기는 방법은 문제보다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서워 할 것 없습니다. 산을 옮길 것이 아니라 내가 높이 날면 됩니다. 내가 비행기타고 높이 날면 모든 것이 다 내 발아래 있습니다. 성령님은 가장 놓으신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말헸습니다. 눅1:35,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리니”. 성령님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입니다. most highest power, 그 분과 함께 동행하면 어떤 문제도 내 발 아래 있습니다.
성령은 기도하게 하신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게 한다면 해결도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게 합니다. 언제나 원리가 방법을 낳습니다. 13절 다시 보시겠습니까? 고전2:13,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분별하느니라”. 원리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일도 없고, 해결하지 못하시는 일도 없고, 하나님의 주권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일도 없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관아래 있다”. 그러면 방법은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우리가 평생 훈련할 것이 이것입니다. 모든 것을 영적으로 보는 훈련, 모든 일을 영적으로 해결하는 훈련, 영적으로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영적인 방법입니다.
지난 두 달동안 우리 교인들이 많이 기도했습니다. 100일 기도 대행진을 통해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간증과 응답도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작년 11월부터 올 2월까지 한끼 금식하던 어느날 제가 한 장로님 댁을 방문했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이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데 우리 교회 1층 현관에서 샘이 솟더니 생수가 콸콸 쏟아졌습니다. 그 물이 흘러 마당으로 흘렀는 데 거기 있는 많은 쓰레기, 오물들이 쓸려 나갔습니다. 우리 교회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날 것 같아요”.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놀라운 부흥을 주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저는 그 환상을 믿고 100일 기도 대행진을 선포했습니다. 한 젊은 집사님이 100일 새벽기도를 작정했습니다. 마침 목장식구들이 부산에 2박 3일로 여행을 가서 자신도 가고 싶은 데 문제는 새벽기도를 이틀 빠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듣고 감사했습니다. 세상에는 고민도 많은 데 새벽기도를 안 빠지는 고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집사님, 하나님이 다 아시니 다녀오세요”.
지난 주에는 어떤 권사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다 나았어요. 제가 평소에 머리가 욱신거리고 옥죄고 아팠거든요. 언제나 목사님 안수 받아보나 했는 데 몇 주전 권사님들 소풍가는데 목시님이 차에 오셔서 기도하셨지요. 소풍 잘 다녀오라고. 제가 목사님 붙잡고 계신 손밑에 제 머리를 살짝 댔거든요. 그런데 그때부터 마음이 평안해지면서 머리가 안 아파요. 지금은 약도 안 먹어요”. 병을 위해 기도한 것도 아니고 소풍 잘 다녀오라고 기도했는 데 그 의자에 머리를 갖다 대기만 해도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혈루병 여인의 믿음이었습니다. 약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여러분, 영적인 문제는 영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믿습니까? 기도할 수 있는 데 왜 염려하십니까? 하나님이 모르시는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역사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니잖습니까? 갑자기 병이 나고 갑자기 사업이 안되고 갑자기 오해받고 갑자기 시험드는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마다 분노하겠습니까? 그때마다 사람과 다투겠습니까? 그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겠습니까? 그때 기억해야 할 믿음의 원리가 이것입니다. 고전2:13,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분별하느니라”. 무슨 문제를 영적으로 해결하지 못할까요? 못 해결한다면 하나님도 아닙니다.
몇 년전 케냐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오래전 케냐 마우마우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선교사 두 사람이 그 지역을 통과하여 나이로비를 돌아오고 있었는 데 ,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차가 고장나더니 멈춰섰습니다. 선교사들은 차 속에서 불안한 밤을 보냇습니다. 자기전 성경을 폈는 데 시편 4:8의 말씀이 나왔습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말씀을 붙잡고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나이로비로 왔는 데 한 케냐 목사가 그들을 방문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폭동 지역사람들이 당신들 차에 접근하여 당신들을 죽이려고 갔는 데 차에 열 여섯명이 에워싸고 있어서 무서워 그냥 돌아갔노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선교사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열여섯 사람이라고요? 우리는 둘 밖에 없었는데”. 선교사는 16명이 무엇일까 긍금하게 여기면서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모 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중보기도팀이 있는 데 이들이 매일 케냐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그들이 몇 명이냐고 물었는 데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16명이예요”. 두 선교사가 폭동지역에 있을 때도 16명이 기도하고 있었고 하나님이 그 16명을 폭도들에게 보이게 해 그들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최고의 방법임을 믿습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모든 일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일이고 따라서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해결해야 함을 믿습니까? 최고의 영적인 방법이 기도임을 믿습니까? 기도는 성령의 은혜가 임하는 통로입니다. 엡6:18절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다같이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괴로워하고 방황하는 그 시간에 겸손히 하나님앞에 나와 회개기도헤야 합니다. 우리가 머리를 써 인간적인 해결방법을 찾는 그 시간에 하나님앞에 나와 무릎을 꿇으면 어떨까요?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영적인 문제 풀립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삶
고전 2:10-16 / 이영화목사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강림절을 기념하여 지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하신 말씀을 믿고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함께 모여 기도하던 중에 성령이 불같이 임하게 되어 성령의 충만함으로 제자들과 초대교회가 그 사명을 감당한 것처럼 우리들도 약속하신 성령을 사모하며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성령강림절을 기념하여 지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성령의 시대가 올 것을 이미 구약의 욜2:28-29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라는 말씀으로 예언되어진 말씀이며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는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분명히 성령을 보내시고 우리가 성령을 받아 그 능력으로 세상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면 누구든지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과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가운에 오늘 말씀을 보면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10절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속에 있는 생각은 영 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다시말해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더라도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능력이십니다. 할렐루야! 성령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까지도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실 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살며 하나님의 자녀 답게 그리고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하기는 이시간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약속하신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계속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 성령을 받아야 함에는 이유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12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 어떤 것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고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내가 잘해서 내가 능력이 있어서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였지만 성령을 받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도 내가 가진 지식이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이 영,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일은 영으로라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13절에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우리 안에 성령을 받아 살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되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되면 예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을 바르게 분별하며, 하나님의 일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한번 받았다고 끝이 아니라 내 속에 온전히 거하도록 늘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한 번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이 충만했다가도 성령의 능력이 다 소멸 된 것처럼 무능력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 가운데 항상 모시고 살아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까요? 첫째로 성령을 충만히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러분 충만하다는 것은 어떤 극도로 흥분한 상태나 아니면 더 이상 성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그 어떤 성숙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에 온전히 지배를 받는 상태로 다시 말해 다른 어떠한 것도 들어 올 수 없이 가득한 상태로 나의 모든 본성을 철저히 성령의 능력에 굴복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 성령이 충만함을 보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술에 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행2: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여러분 술에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술에 지배를 받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술에 취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그래서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을 보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술에 취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술에 취하는 것은 방탕한 삶일 뿐입니다.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고 하였으며 고전6: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사실 술의 가장 큰 단점은 이성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 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나아가 여기서 술이란 단순히 마시는 술이라기 보다는 ‘세상의 정욕’ 들을 말합니다. 세상에 썩어 없어질 것에 취하지 말고 성령에 지배를 받아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이며 하나님의 영을 받은 영생을 얻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성령을 받으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담대해집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심령에 은혜가 넘치며 감사와 기쁨이 충만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가치관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며 그로인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되 우리는 충만히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충만히 받는다는 것은 계속 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은 주님 품에 안길 때까지 계속하여 성령 충만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이 충만해야 세상에 미혹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예배를 귀히 여기며 감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이 충만해야 적극적인 사람이 되며 성령이 충만해야 얼굴이 밝아집니다. 여러분 술에 취한 사람이 특징이 무엇입니까? 대개 말이 많아지듯이 성령 충만하면 기도를 많이 하게 되고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술에 취하면 노래를 잘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찬양이 늘 끊이지 않습니다. 술에 취하면 마음이 넓어집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마음이 넓어져서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성령을 받되 충만히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두 번째로 모든 믿는자들은 삶 가운데 늘 성령을 좇아 행하여야 합니다.갈5: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도는 늘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살면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이것은 결국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이 되고, 그것은 곧 믿음 없는 삶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자연적으로 성령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을 따라 살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롬8:5-7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여러분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지만 성령을 좇아 살면 육신의 일을 따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원하기는 모두가 이 성령을 좇아 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세 번째로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살전5: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소멸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무엇입니까? ‘죽음’ 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성령이 없으면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울왕이 어떠했습니까? 그가 기름부음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삼상10:6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그리고 10절에 보면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이렇게 성령이 충만한 행동을 하니까 그를 알던 주위 사람들이 사울을 보고 하는 말이 ‘사울이 선지자냐?’ ‘언제 선지자가 되었느냐?’ 고 놀랄 정도였습니다.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하나님은 그에게 성령을 먼저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초대왕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울왕에게서 성령이 떠나버릴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삼상15장을 보면 사울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전쟁에서 탈취한 전리품 가운데 좋은 짐승을 가져온 것을 두고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삼상15:22-23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이 경고를 들은 사울왕은 사무엘 선지자의 옷자락을 잡고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돌이켜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도 왕이 그렇게 하니까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결정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오히려 사울왕을 이미 버렸다고 하시면서 사울왕을 대신할 한 왕을 세우게 하셨는데 사무엘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기름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이새의 막내 아들 다윗을 찾아가 그에게 기름을 붓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삼상16: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기름을 붓는 순간 다윗에게는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14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우리에게서 성령이 떠나면, 성령을 소멸시켜버리면 무능한 성도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성령을 소멸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하면 성령이 소멸됩니까? ‘소멸하다’ 는 말은 원어적으로 ‘끄다, 억눌려 버리다, 죽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성령의 활동을 통제하거나 억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소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늘 순종하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내 정욕대로 살아서도 안 됩니다. 사울 왕의 경우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할 때에 하나님의 신이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육체의 생각이 가득하다면 성령을 소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령님은 거룩하시고 정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령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육체의 생각이 들어올 때마다 우리는 즉시 회개함으로써 항상 우리 마음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항상 하늘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령이 떠나가면 얼마나 우리가 비참해 지는가를 잊지 아니하시고 절대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네 번째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 안에서 구원의 확인을 받게 되기 때문에 성령님을 근심되게 하면 안됩니다. 육신의 부모님에게 불효중의 하나가 부모를 근심시키는 일입니다. 가장 큰 효도가 무엇입니까? 부모님에게 걱정과 근심을 끼쳐드리지 않는 것, 마음을 평안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근심 시켜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을 근심되게 하는 일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앞서 우리가 육신의 생각과 욕심대로 사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 성령님도 근심하신다는 것을 사63: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하나님께서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시고 어려울 때 구원시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반역하여 하나님을 저버릴 때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우리가 살아간다면 성령님은 근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님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면 우리는 마땅히 회개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한 일이 있다면 지금도 하고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엡4:31 이하에 보면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구체적은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데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라고 하신 말씀처럼 이런 일들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들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삶과 성령과 상관없이 사는 삶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의 무당들도 크게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가 ‘세습무당’ 인데 부모가 무당이면 자녀가 이어받는 경우입니다. ‘학습무당’ 이 있습니다. 이들은 대개 점집을 차려놓고 배워서 하는 무당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강신무당’ 이 있습니다. 귀신의 영이 직접 내려서 하는 무당입니다. 이들 세계에서도 이런 무당이 진짜 무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습무당이나 학습무당은 흉내를 내지만 강신무당은 때로는 작두를 타거나 신기한 현상들을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인들도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세습교인’ 이 있습니다. 모태신앙들이 여기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학습교인’ 이 있습니다. 배워서 아는 신앙, 지식적으로 아는 신앙, 이성적이면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신앙으로 아무런 능력이 없는 머리로만 믿는 그런 신앙입니다. 그런가 하면 성령 충만한 교인이 있습니다. 늘 성령과 동행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어떠한 환경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세상을 힘있게 이기며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들은 어떠한 교인입니까?
여러분 오늘 특별히 성령강림절을 맞이하며 더욱 성령을 구하시고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성령 충만하여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며 십자가에서 이루신 주님의 놀라운 역사에 쓰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의 영
고전 2:10-16 / 이종철목사
성령의 등장
성령은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 매우 친숙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처음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시 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처음부터 성자 하나님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역사적 예수 논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인정되는 과정이 교리사요, 오랜 기간 많은 교회회의에서 확정되었습니다. 성령도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신약의 문서 중에 성령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는지 말씀하는 초기 기록에 해당합니다. 초대교회가 처음에 성령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성령은 영어로 ‘홀리 스피릿’ 곧 거룩한 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거룩한 이라는 수식어 없이 그냥 ‘프뉴마’, 곧 ‘영’이라는 단어만 사용합니다. 문제는 이 ‘프뉴마’가 성령만 지칭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11절의 “사람의 속에 있는 영”이라고 할 때도 프뉴마를 사용합니다. 12절의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에서 영도 프뉴마입니다. 복음서나 다른 성경에서는 귀신, 곧 ‘더러운 영’이라고 할 때도 이 프뉴마를 사용합니다.
그러면 성령과 세상의 영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프뉴마’란 단어가 아니고 그 기원입니다. 이 프뉴마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느냐, 세상으로부터 왔느냐, 아니면 마귀로부터 왔느냐입니다. 그래서 일반 영과 구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거룩한 영, 곧 성령이라고 구분을 짓기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는 구약으로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구약에서도 ‘영’을 사용하는데 성령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루아흐’이고, 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프뉴마’입니다. 프뉴마는 ‘바람’이라는 뜻이 담겼습니다. 그래서 프뉴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꾸는 게 더 적절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바다를 가르시고, 폭풍을 일으키시고, 예언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할 때 이 영, 곧 하나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장풍을 쏘아서 천지를 뒤집고, 사람을 조정하는 능력을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악한 자나 세상도 자신의 능력을 이 ‘바람’ 곧 ‘프뉴마’로 표현했습니다. 심지어 스토아 철학도 신과 같은 존재인 로고스가 있고, 이 신이 구체적으로 사물 속에서 작용하는 수단으로 ‘프뉴마’를 언급합니다. 동물을 비롯한 만물의 형체를 구성하는 것이 이 프뉴마입니다.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는 물질도 프뉴마입니다. 하나님도 이 프뉴마를 사용하여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인식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능력인 줄 알았는데 신약시대에 이분이 인격체이며, 하나님의 능력 정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임이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령 하나님을 보혜사라 부르고, 성령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입니다. 계시는 점진적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완전할지라도, 부족한 인간의 인식이 더디게 깨닫다 보니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바울의 서신서에서도 성령의 인격성이 드러납니다. 로마서 8장 26절입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오늘 본문에서도 13절의 “성령께서 가르치신다”라는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쳤기에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능력이나 물건처럼 취급받기도 합니다. 성령을 선물처럼 주고받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성령 충만하라는 말씀은 어떤 액체나 기운이 가득찬 느낌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이렇게 물질 취급 받아도 화내지 않으시는 겸손하신 분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내는 자기 부정의 하나님입니다. 창조부터 생명의 섭리, 구원, 선교, 해방, 지혜, 심판 등 실제적인 모든 일을 묵묵히 감당하시는 참된 섬김의 하나님, 무명의 하나님입니다.
성령의 역할
사도 바울이 여기서 성령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는 하나님의 지혜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이 스스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이 사실을 오늘 말씀 곳곳에서 반복합니다. 7절입니다.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 11절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3절입니다.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16절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성령께서 알려주셨기에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도라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참된 지혜라는 것을 바울 스스로 깨달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는 것,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것, 그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요한1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요일 2:27)
성령이 직접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다 보니 13절의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는 말씀이나 15절의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는 말씀이 나옵니다. ‘신령한 자’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의 비밀이나 지식을 깨달은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좋아했던 말이고, 자신들을 그렇게 신령한 자처럼 여겼습니다. 바울은 참된 신령함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영적이라는 모든 것은 십자가 아래로 지나가지 않으면 결코 신령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는 신령함은 교만과 자기자랑과 정죄와 분열로 빠지기 십상입니다.
성령의 역할과 관련하여 고린도 교인들이나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 체험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확신을 준 것은 바로 이 성령의 나타남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임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바로 성령의 나타남에 있습니다. 그곳에 성령의 임재가 있어서 예배에 찬양과 감동이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 병고침이나 방언이나 예언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주의자들과 싸우다 바울이 결정적으로 내놓는 증거가 바로 이 성령입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갈 3:2) 하나님의 영이 역사 했다는 것은 그 공동체를, 그 복음을 하나님의 받으셨다는 뜻 외에 달리 무엇입니까? 예컨대, 제가 말씀을 전할 때 병자가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나고 어떤 놀라운 신비적인 일이 일어난다면 제 말을 신뢰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성령의 임재를 복음과 교회의 결정적 증거로 봅니다.
인간의 영혼이란?
성령의 사역이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영’, 곧 인간 영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프뉴마’란 단어가 사용될 때 이를 성령으로 번역할 것이냐, 아니면 인간의 영혼으로 번역할 것이냐는 쉽지 않습니다. 그냥 단어로만 결정할 수 없고, 문맥에서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성경에서는 인간 영혼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보여줍니다. 기독교 교리에서는 인간을 육신과 영혼으로 구분합니다. 죽으면 인간의 몸은 썩지만, 영혼은 하늘로 간다고 믿습니다. 이런 이분법적 구조는 헬라 철학의 영향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적 사유에서는 인간을 육신과 영혼을 나누지 않고 온전한 한 존재로 취급합니다. 구약 성경은 인간의 몸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몸이 없는 영혼은 귀신이지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영향이 바울에게서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굳이 인간을 영혼과 육신으로 나누려는 경향이 없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에서는 인간을 육과 영과 혼으로 구분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단으로 정죄된 삼분법을 바울이 믿었느냐? 아닙니다. 이 구절은 문맥상 그냥 ‘온 존재’라고 표현하면 되고, 당시 헬라 인들의 생각을 빌어 썼을 뿐입니다.
이런 혼동은 바울이 기본적으로 히브리적 사유 안에 있지만 활동하던 문화권은 헬라 문화권이기에 발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인간의 영혼을 지칭하는 듯한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합니다. 11절입니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여기 사람의 영은 ‘프뉴마’를 사용합니다. 14절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퓌시키코스’(프쉬케)를 사용합니다. 15절입니다 “신령한 자는” ‘프뉴마티코스’(프뉴마)를 사용합니다.
‘프쉬케’는 헬라인들이 영혼으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영혼은 불멸이며, 이 영혼이 인간의 육신에 갇힌 모습이 헬라 인들의 인간 이해입니다. 프쉬케는 광의적으로 인간 목숨을 지칭할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영혼과 육신의 이분법을 받아들였느냐? 아닙니다. 바울은 인간존재 규명에 관심이 없습니다. 바울이 관심하는 것은 영적(프뉴마)이냐 육적(사륵스)이냐입니다. ‘사륵스’는 세상성으로 번역할 수도 있는데 인간이 유한한 육체를 가지고 살면서 생기는 세상적 욕망이나 가치를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세상 인간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영적(프뉴마)으로 분류합니다. 오늘 말씀의 ‘신령한 자’입니다. 신령하다는 것은 내가 어떤 불멸의 생명을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성이 회복된 자입니다. 관계성은 연결입니다. 관계성이 회복되어 이제는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있고, 그 능력이 역사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성이 끊어지면 이 영도 사라집니다. 바울의 관심은 영혼의 존재유무나, 어떤 철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했느냐 하나님께 속했느냐입니다. 어쩌면 매우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구분입니다.
사실 인간의 영혼이 독자적이고 불멸이면 부활도 필요 없습니다. 몸의 부활이 필요한 이유는 몸을 입어야 온전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죽고 난 이후 하늘나라에 가 있는, 부활 이전의 ‘나’는 누구냐? 입니다. 그 ‘나’는 자아의 그림자, 아니면 의식의 잔영과 같은 것입니다. 그냥 통칭 이를 영혼이라 부를 뿐입니다.
우리의 영원성을 결정하는 것은 영혼 자체의 불멸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약속이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성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연결되었다는 증거가 바로 성령의 존재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다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 8:9).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과 동행하며, 그 영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성령님, 어디 계세요
고전 2:10-16 / 이정선목사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고 하지요. 바울도 같은 얘기를 합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지금 이 말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지혜를 하나님이 드러내 보여주셔야만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에게 알도록 해 주시는 담당자가 누구인가 하면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영이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모두 통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멤버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고 드러내는 역할을 맡아 행하십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성령의 역할이 매우 강조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직접 접촉하는 하나님은 바로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삼위 하나님 가운데서 오늘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물론 우리가 삼위 하나님을 굳이 분리해서 사고해야 할 필요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과 접촉한다고 해서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과 접촉함으로써 당연히 삼위 하나님과 관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직접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우선 성령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전달해 주시는지 한번 봅시다. 바울이 12절에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전수받은 사도들을 가리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가지고 있는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구체적이고 확실한 계시는 성경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텍스트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만이 하나님의 계시인 것은 아니지요. 계시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제가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강도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목사님이 아주 농담도 잘하시고 재미있는 분이었어요. 하루는 교회 직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날 저녁에 전화가 왔는데 수화기를 들었더니 다짜고짜로 ‘이 개새끼야!’ 하고 끊어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부목사님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혹시 아무개 목사님이 그런 것 아니야? 솔직히 말해. 내가 계시를 받으면 알 수 있어.” 모두들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기도원 같은 곳에 가보면 예언은사를 받았다는 분들을 종종 만날 수 있는데, 그분들이 주로 많이 사용하는 말이 계시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특정인에게 어떠한 내용을 알려주실 수 있어요. 그렇다면 그것도 계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계시의 교과서는 성경입니다. 오늘날 성경보다 우월한 계시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과 어긋나는 계시가 있다면 그것은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만 가지고도 완벽한 계시가 됩니다. 환상을 보았다거나 음성을 들었다는 경험을 성경의 권위보다 더 앞세우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완전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주신 온전한 계시이고, 설령 환상이나 음성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하더라도 그것은 특정한 경우에 특정한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나 우선순위에서 성경과 비교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을 통해서 다 주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계시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도 해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새로운 일을 행하셔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누가 전화로 욕했는지를 알려주시는 것 따위를 계시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계시는 인간의 비밀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주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이 성경이 어떻게 주어졌습니까? 성경을 기록한 것은 사람들입니다. 구약 성경은 모세나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했습니다.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왕도 상당한 부분을 기록했지요.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저자를 성령 하나님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 성경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아서 성경을 기록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하나님의 감동으로 라는 말은 원래 하나님의 숨으로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그 코에 하나님의 숨을 부어넣으시니까 아담이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담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숨이지요. 마찬가지로 성경을 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숨이 들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영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숨은 누가 그 역할을 하셨겠어요? 바로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비밀을 전수받을 수 있게 된 거지요. 그래서 성경은 바울도 기록하고 베드로도 기록했지만, 궁극적으로 성령께서 기록하셨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또 중요한 게 있어요. 그것은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그 계시를 깨닫도록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기록케 하신 성경, 즉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접하고 읽을 때 그것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도록 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에요. 자,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백날 읽어도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성경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기도 해요.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은 말하자면 성경 박사들이었어요. 성경의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을 때 그 성경 박사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성경을 제일 잘 안다는 사람들이 성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마음을,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분변할 수 없어요. 하나님의 비밀은 신령한 것, 즉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육에 속한 지혜나 노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고, 오직 신령한 것으로만, 그러니까 성령의 조명하심으로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15절,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씀은 소위 신령하다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판단할 수 있고 남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특권이 주어졌다는 뜻이 아니에요.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하고 나와서 신령해졌다고 그렇게 오만하게 처신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하다는 것은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진리를 분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진리이고 거짓인지를 알게 된 거지요? 그러니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잖아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여기서 아무에게도는 나 이외의 타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하지 못한, 즉 육에 속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잖아요. 무엇이 진리인지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있는 우리를 보고 맞느니 틀렸느니 하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 보시면 말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이 말도 이 세상의 지혜를 가졌다는 사람들 중에 누가 주의 마음을 눈꼽만큼이라도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지요? 왜요?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의 마음을 가졌다고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감동시키시고 인도하셔요. 그러니까 우리가 한 길 사람 속은 잘 모르지만 하나님 속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잖아요?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처럼 중요한 일이 없는 거예요.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을 때도 우리의 아이큐만 가지고 읽어서는 아무런 유익이 없지만,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서 하나님의 비밀을 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도 우리의 귀로 들어서는 아무런 감동도 없고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강연보다 나을 것이 없지만, 성령께서 우리 속에 찾아오셔서 우리 귀를 열어 주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매 순간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참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지 않겠어요? 그것이 정말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 아닙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성령은 어디 계십니까? 성령께서 여러분과 늘 동거하시나요? 성령께서는 우리 몸을 성전 삼아 내주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 안 보여서 성령께서 계시는 줄도 모르고 그냥 살지는 않습니까? 아주 간단하고 중요한 팁 하나를 가르쳐 드릴게요. 언제라도, 또는 중요한 순간이나 답답할 때 마음 속에다 이렇게 속삭여 보세요. “성령님, 어디 계세요?” 그리고 성령님께 말씀드리세요. 또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세요. 그렇게 성령님과 교제하고 인도하심을 따름으로써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된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숙한 신앙
고전 2:15-23 / 김홍도목사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본문 말씀에 의해서 보면 세 가지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육에 속한 사람(natural man)
고린도전서 2:14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 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육에 속한 사람들이란(natural man)-자연히 그대로 있는 사람입니다. 중생하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다 중생했으면 좋겠는데 영에 대하여는 캄캄한 교회는 다녀도 혹 이렇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 육신에 속한 사람(carnal man) 고린도전서 3:1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을 다른 말로 하면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중생은 했으나 아직도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해서 육신의 소육을 따라 사는 사람-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셋째, 신령한 사람(spiritual man) 고린도전서 2:15에 보면,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성숙한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중생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성장하여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아니하고 영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연인 그대로인 육에 속한 사람이 되어서도 안되고 중생은 했으나 성령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고 늘 육신의 지배를 받으면서 사는 육신의 사람에 머물러 있어서도 안되겠습니다.
영의 지배를 받지 못하는 상태에 있으면 늘 마귀한테 속고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한 신자들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성숙한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성경말씀은 신명기 18:13에 보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4:13에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성장하고 발전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48에도 보면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온전해지도록 나가야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5년, 10년 예수를 믿어도 늘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설교 말씀도 수없이 많이 들으나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적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온전한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날마다 성숙하고 발전해야 됩니다.
그러면 성숙한 신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를 어린아이와 갇다고 했는데 육신에 속한 일은 고린도전서 3:3에 보면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했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의 표적은 시기, 분쟁, 당파심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있는 교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하면서 자기한테 이로운대로 생각하고 당파를 만들고 써클을 만들면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략하고 싸웠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육신의 생각과 정욕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육신에 속한 일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영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인들은 "네 뜻도 아니고 내 뜻도 아니고 오직 주님의 뜻"으로 뭉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니 서로 시기, 질투할 것 없이 우리가 하는 맡은 부서에서 열심히 일하면 하나님이 상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성숙하지 못한 신자들이 있게 될 때에 교회는 쪼개지고 분열됩니다. 하나님은 육신에 속한 어린아이와 같은 신자를 성숙한 신자로 만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육신의 고통과 채찍으로 우리의 육신의 고집과 이기심 육성(肉性)을 깨뜨리십니다.
모세가 아무리 40년 동안 바로의 궁전에서 공부를 많이 하고 똑똑했다 할지라도 그는 육성대로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동안 육신적으로 말할 수 없이 고생하면서 시련과 고통을 겪은 다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영적인 성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낼 수 있는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야곱은 상당히 지혜와 수단과 꾀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얍복"강가에서 형이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죽이러 온다는 말을 듣고 "얍복"강가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부르짖으며 기도하다가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내리쳐 위골이 되었을 때 그 때에 야곱은 육성이 깨지면서 자기는 항복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참 신자가 되어서 그 다음에 비로소 이스라엘이라 고 하는 참 축복을 받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야곱의 환도뼈는 신체에서 제일 강한 부분인데 그것이 부러지면서 신체적으로는 약해졌지마는 영적으로는 강한 사람이 되고 성숙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영적으로 성숙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물질의 환도뼈, 건강의 환도뼈, 자존심의 환도뼈, 어떤 이에게는 자식의 환도뼈를 쳐서 하나님 앞에 항복하게 만들고 영적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도 편안하고 잘 살기를 원하시지만 육신만 편안하다가 영적으로 병들어서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육신적으로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영적으로 온전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고통의 방망이로 두드리시고 깨뜨리신다고 하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비밀을 깨달았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12:10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적으로 육신적으로 약하다고 느낄 때에 무능하다고 느낄 때에 영적으로는 강해지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장 가깝게 매달리게 되는 때는 바로 우리의 환도뼈가 얻어 맞을 때입니다.
어떤 이가 이렇게 기도한 것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붙들 수가 없습니다. 다만, 당신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탄원뿐입니다. 기도마저도 내 힘으로 할 수 없고 그저 탄원뿐입니다. 믿음도 없습니다. 그대로 믿을뿐이옵니다." 이것이 진정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라고 느껴집니다. 언젠가 인간의 고집의 환도뼈 육성의 환도뼈가 위골되지 않으면 성숙한 신자, 영적인 사람은 못되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자는 잠시도 자기 만족이나 자기 신뢰나 자기 희열을 즐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되는 것입니다.
2.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해지려면 혼적으로는 어린아이처럼 바뀌어져야 합니다. 한 번은 제자들이 서로 누가 더 높으냐 하고 시기하고 다투다가 예수님께 이러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태복음 18:3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단순하고 진실해질 때 영적으로 성숙해 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큰 자, 성숙한 자는 그 마음이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고 단순한 자입니다. 구원의 진리 영적인 진리는 인간적인 면에서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겨지고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믿는 자에게만 나타내지는 것입니다(마 11:25).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면서(고전 l:18) 세상 지혜와 총명은 하나님이 폐하셨다고 했습니다.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요 세상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해서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에 인간의 정신은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은 무섭게 자기 중심적이고 인본주의적이고 육적이고 이기주의적이고 반신적(反信的)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이성과 슬기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반대 방향으로 나갑니다. 인간의 지혜나 슬기가 장성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고 영적인 면이 약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오만한 인본주의적인 지혜나 슬기를 깨뜨려 겸비하게 낮아지게 한 후에 악의 지혜와 슬기로 장성하던 옛날의 과정과는 반대로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해지게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믿는 사람이나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사람은 말이 많고 의문이 많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아주 유치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믿음이 자라게 되면 그 이론 많던 것이 다 없어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면 단순해지고 어린아이와 같아집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다 어린아이와 같으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물으시겠지만 그러나 인간적인 지혜와 슬기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만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지혜로 살게 됩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슬기입니다. 고린도전서 l:25에 보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호랑이와 사자는 자기 힘으로 살지만 양은 목자의 돌보심으로 삽니다. 우리 신자들은 어린 양과 같이 자기 수단 방법이 없어도 하나님이 목자가 되어 주셔서 키워주시고 보호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호랑이와 사자는 이 땅에서 다 멸종해 가고 있지만 양은 점점 이 땅을 덮어 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아질 때 영적으로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숙하게 자라려면
<3. 습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 말씀을 하시다가 누가복음 8:6에 "더러는 바위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생명도 습기가 있어야 됩니다. 말씀의 씨가 자라고 성숙한 신자로 자라려면 습기가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눈물과 땀과 피를 말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생전 하나님 앞에 눈물 한번 흘려보지 않은 사람, 땀이 나도록 기도 한번 해보지 않은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상적인 고통으로 인해서라도 눈물을 많이 흘려 본 사람이 영적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괴테가 말한대로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듯이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온하고 평탄하고 생전 땀 한 방울 눈물 한 방울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수분이 없으면 생명이 못살고 아름다운 꽃도 열매도 맺을 수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적인 면에서도 꽃을 피고 열매를 맺으려면 땀과 눈물과 피의 수분이 있어야 됩니다. 군인들이 훈련할 때 땀을 흘리지 않으면 전쟁할 때 피를 흘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할 때 땀을 흘리면 가난이 물러가고 찬송할 때 땀을 흘리면 기쁨이 오고 기도할 때 땀을 흘리면 능력을 받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도 성장하려면 반드시 습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숙한 신자가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고 중생을 했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육신에 속한 욕망대로 살아서 시기 질투 당파 싸움을 일삼아서도 안되겠고 늘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으로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가 되고 피와 땀과 눈물의 수분으로 성장하시는, 영적으로 성숙한 우리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