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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사드(Novi Sad)
세르비아의 여러 민족의 혼성 자치주인 보이보디나 주의 주도.
노비사드는 세르비아 제2의 도시로서 보이보디나 자치지구의 행정, 경제, 문화, 사회, 과학, 관광의 중심지다. 한때 세르비아의 아테네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크게 융성했고 지금도 세르비아에서 아주 중요한 도시다. 노비사드에서는 유럽에서 가장 큰 음악축제인 EXIT를 비롯해서 많은 문화, 스포츠행사가 열린다.
면적 129.4㎢, 인구 250,439(2021 추계).
개관
노비사드는 세르비아 제2의 도시이며 보이보디나 자치지구의 수도다. 노비사드는 1694년 세르비아 상인들이 다뉴브강 일대에 식민지를 만들었을 때 건설되었다. 그 후 수 세기에 걸쳐 노비사드는 중요한 무역과 공업 중심지로 발전하였으며 그래서 세르비아의 아테네라는 별명을 얻었다.
노비사드는 1848년 혁명 때 크게 파괴되었지만 다시 건설되고 복구되었다. 오늘날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와 함께 세르비아 경제에서 중요한 공업과 금융 중심지다. 노비사드는 세르비아어로 ‘하얀 과수원’이라는 뜻이다.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주(州)의 주도. 베오그라드의 북서쪽 약 29km지점에 위치한 노비사드는 1748년 시(市)로 승격되었다.
지리
노비사드는 다뉴브강이 굽이쳐 돌아가는 지역에 위치한다. 노비사드의 주된 부분은 다뉴브강 서쪽 지역인 바치카에 있고 다뉴브강 동쪽 지역인 스렘 지역의 페트로바라딘과 스렘스카카메니차에는 거주하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다. 다뉴브강의 서쪽 지역은 판노비아평원 맨 남쪽의 고도가 낮은 지역인데 반해 다뉴브강의 동쪽 지역에는 프루슈카고라산이 있다.
노비사드는 해양성기후 지역으로 습한 대륙성기후 지역과 인접해 있는데 1월 평균 기온이 0.2°C이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가을은 봄보다 길다. 겨울은 아주 춥지는 않고 영하 이하인 날이 평균 22일이며 눈 오는 날은 평균 25일이다. 1월이 가장 추운데 평균 -3.1°C이다. 봄은 보통 짧고 비가 많이 오며 여름은 갑자기 찾아온다. 노비사드에서 가장 추웠던 것은 1963년 1월 24일의 -30.7°C였고 가장 더웠던 것은 2007년 7월 24일의 41.6°C였다.
노비사드는 다뉴브 강변에 위치해 있어 운하망이 발달해 있으며, 도로망과 철도망이 유럽의 동과 서, 남과 북을 잇는 중심에 위치해 있어 교통의 요지이다. 교통량이 많은 도나우 강 연변에 자리잡은 수송항이다. 베오그라드-부다페스트 철도가 지나며 바츠카 운하망이 이곳에서 도나우 강과 연결된다. 도나우 운하망, 도로, 철도를 경유하여 중부 유럽에 이르는 교통의 요지이다. 도시 면적은 702.7km2에 달하며, 추운 겨울이 길고 온난한 여름 날씨를 가진 습윤 대륙성 기후이다.
인구
노비사드는 세르비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고 보이보디나에서는 가장 큰 도시다. 노비사드의 인구는 계속 증가했다. 민족 분포를 보면 세르비아인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그 다음이 헝가리인이고 슬로바키아인, 크로아티아인, 루마니아인, 몬테네그로인 등이 그 뒤를 잇는다. 종교는 정교를 믿는 이들이 압도적인 다수를 이루고 나머지는 가톨릭, 신교, 무슬림 등의 순이다.
보이보디나 북부와 그 지역 주민의 1/5 정도를 차지하는 헝가리계 소수민족의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이다. 이 지역의 민족적 다양성은 세르보크로아티아어(語)·헝가리어·슬로바키아어·루마니아어·루테니아어 등으로 방송하는 노비사드 라디오 방송에서 잘 드러난다.
역사
노비사드에 인간이 거주한 것은 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5000년 시기의 거주지와 무덤이 노비사드 서쪽 도로 건설 공사 도중 발굴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다뉴브강 동쪽 지역에서도 옛 사람들의 거주지가 확인되었다. 노비사드에는 고대에 켈트족이 살았는데 기원전 1세기에 로마인들이 정복했고 로마 통치 시기에 거대한 요새가 만들어졌다.
서기 5세기에 훈족이 쳐들어와 요새가 파괴되었다. 5세기 말 비잔틴인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성인 피터의 이름을 따서 페트리콘(Petrikon), 또는 페트리코브(Petrikov)라고 불렀다. 세베리안, 오보트리트, 세르비아 등 슬라브족이 이 지역에 정착한 것은 6세기와 7세기 무렵이다.
중세에 이 지역은 오스트로고트, 게피드, 아바르, 프랑크, 서슬라브족, 비잔틴,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헝가리인들이 지배했다. 11세기와 12세기 사이에는 중세 헝가리왕국의 일부에 속했다.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이 지역에는 슬라브족과 헝가리인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오스만제국의 침략에 따라서 헝가리인들은 이 지역에서 물러났다. 1526년부터 1687년 사이에 이 지역은 오스만제국이 통치했는데 거주하는 주민들은 세르비아인들이었다.
17세기 말 로마가톨릭을 신봉하는 합스부르크 통치자들이 다뉴브강 동쪽 지역인 페트로바라딘에서 정교 신자들이 거주하지 못하게 하자 세르비아인들은 다뉴브강 서쪽 지역에 그들의 거주지를 건설하게 됐다. 그리고 그곳을 ‘세르비아 도시’라 불렀고 1748년에 오늘날의 이름인 ‘노비사드’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갖게 되었다.
18세기와 19세기 동안 노비사드는 세르비아인들이 사는 가장 큰 도시였다. 당시에 세르비아인들은 나라를 갖지 못했고 노비사드는 문화적, 정치적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세르비아의 아테네’로 불리게 됐다. 19세기 중엽에 주민의 절반 이상이 정교를 믿는 이들이었고 그다음이 가톨릭, 신교도들이었다.
1848~1849년 혁명기에 노비사드는 오스트리아제국 안에 있는 세르비아 독립지구인 세르비아 보이보디나의 일부였다. 1849년 헝가리 수비대는 노비사드를 철저히 파괴하였고 이에 따라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1867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강화에 따라 노비사드는 헝가리왕국에 속하게 됐고 노비사드는 급격히 헝가리화됐다. 세르비아인의 비중이 줄어들고 헝가리인들이 늘어났다.
1918년 11월 25일 보이보디나 지역과 세르비아왕국의 통합이 선언됐다. 1918년 12월 1일부터 노비사드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929년에 노비사드는 다뉴브바노비나 지역의 수도가 됐다. 1941년에 유고슬라비아는 추축국의 침공을 받아 분할되었고 노비사드를 포함한 북쪽 지역은 헝가리에 병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노비사드 시민 약 5,000명이 죽었다. 1942년 1월 21일부터 23일까지 사흘 동안만 1,246명의 노비사드 시민이 헝가리 경찰에 의해 피살됐는데 그중 800명이 유대인이었다. 1944년 10월 23일 추축국에 맞서 싸운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이 노비사드에 들어와 1년 3개월 동안 새 정권에 반대하는 수천 명의 세르비아인과 독일인, 헝가리인들을 죽였다.
1945년 이래 노비사드는 세르비아공화국의 한 지역인 보이보디나의 수도였다. 노비사드는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었고 1990년대에 유고슬라비아가 여러 나라로 쪼개지던 때에는 인구가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1992년 이후로 노비사드는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에 속했다.
1999년 코소보전쟁 때 나토군의 공습을 받아 다뉴브강의 세 다리인 제젤리교, 바라딘교, 자유교가 사라졌고 통신, 상수도, 전기 등의 시설도 파괴되었다. 2003년에 구유고슬라비아공화국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연합으로 바뀌었고 2006년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완전히 분리되면서 노비사드는 세르비아공화국에 남게 되었다.
17세기 말 터키의 압제를 피하여 세르비아 인들이 이 곳에 이주하면서 페스트로바라딘스키샤나츠라고 칭했는데 1748년 왕령으로 자유시가 되면서 현재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새로운 지방'이라는 뜻이다.
18세기 이전에 노비사드는 페트로바라딘스키샤나츠(페트로바라딘 수로)로 불리던 작은 어촌이었다. 도나우 강이 남쪽으로 만곡하는 곳에 세르비아인이 세운 페트로바라딘 요새가 있다. 요새는 투르크 제국과의 군사 접경지에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인들이 1699년부터 재건, 현재와 같은 거대한 구조가 되었다.
세르비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행정, 경제, 문화, 과학, 여행의 중심지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61년에서 1971년 사이에 보이보디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지에서 인구가 유입됨에 따라 도시의 인구가 역대 가장 크게 증가했다.
문화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노비사드는 세르비아의 문화 수도로서 ‘세르비아의 아테네’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시기에는 거의 모든 세르비아 소설가, 시인, 법률가, 출판인들이 노비사드에서 살며 일했다. 부크 스테파노비치 카라지치, 미카 안티치, 주라 야크시치 등이 대표적이다. 마티차스릅스카는 세르비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과학기관인데 1864년에 부다페스트에서 노비사드로 이전해왔다.
세르비아 국립극장은 남슬라브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으로 1861년 노비사드에 지어졌다. 노비사드는 오늘날 베오그라드에 이어 세르비아에서 두 번째로 큰 문화 중심지다. 많은 문화 행사와 음악 콘서트가 노비사드에서 열린다. 2000년 이후로 노비사드에서는 유럽에서 가장 큰 여름 음악축제인 EXIT 축제가 열린다.
세르비아 패션위크라 불리는 행사는 미술인, 음악인, 실내장식가, 멀티미디어 전문가, 건축가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세르비아 국립극장 외에 노비사드극장, 청년극장, 노비사드문화센터 등이 있다.
노비사드에는 많은 공립과 사립의 박물관, 미술관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1847년에 세워진 보이보디나 박물관으로 고대 이래의 세르비아 문화와 보이보디나 역사를 보여주는 소장품을 갖고 있다. 다뉴브강 동쪽 페트로바라딘 요새에 있는 노비사드박물관은 옛 요새의 역사를 보여주는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마티차스릅스카 갤러리는 노비사드에서 가장 큰 전시 공간이다.
2000년 이후로 노비사드를 찾는 관광객이 매년 꾸준히 증가했다. 7월에 열리는 EXIT 음악축제에는 유럽 전역에서 온 젊은이들로 도시가 붐빈다. 2017년에는 60개국에서 20만 명이 축제에 와서 35개 콘서트를 지켜보았다.
매년 5월 노비사드는 농업쇼가 펼쳐지는데 2005년에는 60만 명이 찾아왔다. 도심 한복판 바라딘교 근처의 관광객 선착장에는 다뉴브강을 따라 유럽을 여행하는 크루즈선이 기항한다. 노비사드에서 가장 잘 알려진 명소는 다뉴브강 동쪽의 페트로바라딘 요새다. 시내 중심가에는 기념물, 박물관, 카페, 상점 등이 밀집해 있다. 시내에서 약 20km 떨어진 남쪽에 프루슈카산 국립공원이 있다.
노비사드는 세르비아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826년에 창립된 세르비아 문화협회(마티카 스르프스카)는 지금도 계속하여 비(非)세르보크로아티아 민족과 같은 소수민족들의 언어로 교과서를 출판한다.
경제
노비사드는 세르비아에서 가장 비옥한 농업 지역인 보이보디나의 경제적 중심지이다. 1981년에 노비사드의 1인당 국민소득은 유고슬라비아 평균의 172%였다. 1990년대에는 유고슬라비아에 가해진 수출입 금지 조치에 큰 영향을 받아 전기 케이블산업, 금속공업, 공구산업, 화학공업 등이 크게 쇠퇴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경쟁력 있는 산업 시설은 정유소와 열 발전소다.
노비사드 경제는 2001년 이후 크게 회복되기 시작했는데 공업 중심 경제에서 제3의 분야로 옮아갔다. 국영기업의 사유화가 진행되어 사기업이 전체 기업의 95%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고 중소기업이 노비사드의 경제 발전의 주축을 이루었다. 제1은행, 보이보잔스카은행, 농업은행의 본사가 노비사드에 있으며 세르비아에서 세 번째로 큰 보험회사인 DDOR 노비사드도 노비사드에 있다. 그밖에 메이저 정유, 가스 회사와 밀을 거래하는 곡물 시장이 노비사드에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기계의 제조를 비롯하여, 조선·식품·직물 등의 공업이 성하며, 시 주변에서는 곡물·포도·야채 등이 재배된다. 노비사드는 비옥한 보이보디나 농업지대의 핵심부이며 해마다 국제적 규모의 농산물 축제를 개최한다. 산업으로 식품가공·제분·직물·도자기·비누·기름·전기기구·치과기구 산업이 발달했다. 농업 기계, 자동차, 트럭 제조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다.
노비사드의 대규모 정유공장은 강을 이용하여 석유공급을 받았는데 1978년부터는 나드를리안에 86㎞ 길이의 송유관을 연결하여 공급받고 있다.
정치
노비사드의 행정기구로는 시의회, 시장, 시 정부가 있다. 시장과 시의원들은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시의회 의석은 78석이며 시 정부는 11명으로 구성된다. 시장과 시의원들의 임기는 4년이다. 노비사드시는 노비사드, 페트로바라딘의 두 지역으로 나뉘는데 그 밑에 46개 구가 있다.
사회
노비사드에는 4개 대학교가 있다. 가장 큰 대학교는 노비사드대학으로 1960년 설립되었는데 14개 단과대학이 있으며 학생이 5만 명이 넘고 교직원은 약 5천 명이다. 그밖에 경영대학과 교육대학이 있고 성인 교육을 담당하는 노비사드개방대학이 있으며 프로테스탄트신학대학이 있다.
노비사드에는 종합일간지로 드네브니크가 있고 월간지로 보이보잔스키 마가진이 간행된다. 방송으로는 보이보디나 라디오텔레비전과 노보사드스카텔레비지야, 카날9, 파노니야, RTV모스트 등이 있다.
노비사드에서는 많은 국내 및 국제 스포츠 경기가 열린다. 1981년에는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노비사드에서 열려 한국여자팀은 단체전 준우승과 개인 단복식에서 3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장기, 유도, 농구, 배구, 펜싱, 가라테 등의 각종 국제대회가 노비사드에서 열렸다. 또한 마라톤, 수영, 사이클, 산악자전거 경기대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노비사드에는 축구, 농구 등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주변에 평야가 넓고 프루슈카산이 있어 사이클과 산악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많다. 프루슈카산 국립공원이 가까이 있어 시민들은 주말에 등산을 즐기며 매년 5월 첫 주말에는 프루슈카산 마라톤대회가 열려 많은 사람들이 참가한다.
노비사드에는 유대교 사원, 정교회, 가톨릭 성당 등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17개의 사원과 17세기의 페트로바라딘 요새(Petrovaradin Fortress), 구시가지, 노비사드 시 박물관, 보이보디나 박물관, 보이보디나 현대예술 박물관 등 많은 박물관들이 있으며 다양한 도시 축제들이 열린다. 다뉴브 강변에서 수영을 할 수 있는 슈트란드(Štrand) 강변과 도심 곳곳에 조성되어 있는 공원에서 휴양을 즐길 수 있다.
문화종합시설로는 노비사드대학교(1960), 미술전문학교, 세르비아 국립극장(1861), 박물관 등이 있다. 노비사드의 가장 큰 교육기관인 1960년 설립된 노비사드대학교는 철학, 법학, 교육, 약학 등 14개 학부와 3개의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다.
교통
노비사드에는 민간 공항이 없고 베오그라드 니콜라테슬라공항까지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다. 주된 대중교통 수단은 버스인데 JGSP 노비사드가 운영한다. 21개 시내 노선과 29개 교외 노선이 있다. 버스터미널은 자유거리의 북쪽 끝에 있는데 노비사드역과 인접해 있다. 원래 노비사드에는 트램이 있었는데 1958년에 선로가 철거되었다. 다뉴브강 위로 다리가 네 개 있다. 리버티교는 스렘스카카메니차와 시내를 연결하고 바라딘교와 제젤리교는 페트로바라딘과 시내를 연결하며 2000년에 지어진 도로-기차교는 주로 기차와 대형트럭이 이용한다. 노비사드항은 시 외곽에 있는데 세르비아에서 가장 큰 화물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