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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도종환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 시에서 한 시 사이도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 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 시에서 다섯시 사이
― 시집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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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도종환 시인이 대구에 내려와 범물동 한 작은 카페에서 소박한 문학 강연을 한 바 있다. 시집 1만부를 팔면 스타시인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지금의 시문학 풍토에서 그 대접을 받는 시인이라야 ‘창비’와 ‘문지’를 통 털어 김용택 정호승 안도현 신현림 최영미 황지우 이성복 정도이다. 물론 도종환 시인도 몇 손가락 안에 포함된다. 이런 인기시인을 소규모 카페의 강연회장에 모시기가 쉬울 리 없다. 이번 강연은 김용락 시인이 이장(이사장이 아니고 이장)으로 있는 <버스종점이 있는 마을>에서 초대해 성사된 것인데, 아마도 오래전 ‘분단시대'라는 동인활동을 함께한 인연이 작용했던 것 같다.
<버스종점이 있는 마을>은 2년 전 수성구에서 시작된 풀뿌리 문화예술운동으로 말 그대로 삶의 저변에서부터 인문학 인프라를 구축해보자는 몇몇 사람의 소박하지만 용기 있는 뜻을 모아 출발하였다. 동네 주민들과 함께 인문학의 지평을 열어가고 대중과 함께하는 문예운동을 펼치고자 하는 취지의 이 운동이 지난번 21회를 맞은 것이다. 강연과 질의 방식으로 2시간 동안 진행된 이날의 강연은 시인이 최근 펴낸 열 번째 시집『세시에서 다섯시 사이』가운데 몇 편을 중심으로 시의 탄생과정과 배경을 소상하게 설명하고, 오후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의 인생과 삶에 대한 태도를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사실 서정적인 시어로 진솔한 삶을 녹여내 아름다움과 감동을 주는 시인의 시는 읽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치열했던 시간을 다 보내고 이제 머지않아 어둠이 찾아오겠지만 시인은 남은 시간을 소중히 받들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사랑과 연민으로 긍정과 희망을 노래하고, ‘해가 다 저물기 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러분의 생도 아름답기를 바란다’며 강연을 마쳤는데, 모두들 초롱초롱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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