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을 피했다고 좋아하긴 했지만, 2007년 우리를 누르고 결승에 올라 우승을 차지했던 이라크가 껄끄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깔끔하게 이길 줄은 몰랐다. 이란 전하고는 달리 이라크는 무력했다. 똑같이 연장전까지 치렀지만 하루 더 휴식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조별 예선 마지막 호주 전에서 베스트 멤버로 꾸역꾸역 승리를 차지한 결과가 이리도 달콤할 줄이야. 결승전마저도 상대보다 하루 더 쉬고 경기에 임하니 체력적으로 이점이 있다.
(△ 득점을 기록한 김영권과 이정협)
1. 점점 안정되는 공격과 수비
이라크 전에서 전체적인 경기력은 우즈벡 전보다 훨씬 안정감이 있었다고 평가할만하다. 결정적인 기회를 거의 내주지 않았고, 2골을 기록하면서 편안하게 경기를 주도했다. 4강전에서의 안정적인 경기력 덕분에 언론과 팬들 사이에서는 우승에 대한 이야기들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는 듯하다. 경기력은 안정적이었으나 상대인 이라크가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이번 대회를 통틀어 첫 번째 세트피스 골이 터졌다. 김영권의 두 번째 골은 세트피스에서 직접 넣은 골은 아니지만, 세트피스 기회를 살린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매 경기 득점을 따내긴 했지만 쿠웨이트, 오만 등 상대적 약팀을 상대로 대량 득점에는 실패했던 공격적 아쉬움을 생각해보면 반길 만한 일이다. 우리의 경기력이 많이 나아진 만큼 결승 상대인 호주와의 경기 양상이 조별예선과 같을 것이라고 쉽게 예측할 순 없지만, 점유율에서 밀릴 경우 세트피스는 유용한 득점루트가 될 수 있다. 호주가 신장에서 유리한 면이 있다곤 해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득점 루트이다.
(△ 벌써 A매치에서 3골이나 기록한 이정협)
2골을 기록한 것은 반길만한 일이지만, 공격적으로 완벽했던 경기는 아니었다. 특히 실점 이후 적극적으로 라인을 끌어올리는 상대를 두고도 배후 공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했다. 전진하는 수비의 뒤를 노린 긴 패스는 손흥민, 이근호, 남태희 그리고 이정협까지 빠르고 저돌적인 선수들을 이용하여 찬스를 만들 수 있다. 상대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린 상황에서는 그 뒤를 노려 상대를 부담스럽게 해야 한다. 선수를 겨냥한 패스는 상대 수비가 전부 지켜보고 있다가 전진하면서 끊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수비 중 공을 걷어낼 때 무작정 차내는 것이 아니라 전진한 상대의 뒤를 노린다면, 공을 걷어낸 이후에도 계속 압박을 당하면서 위기를 맞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수비의 배후공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려면 패스를 받는 선수와 주는 선수 모두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받는 선수는 먼저 뛰어 들어가야 하고 주는 선수는 공을 빼앗은 후 빠르게 공간을 향해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중요한 것은 수비 라인의 움직임이다. 대표팀이 수비를 잘해내고는 있지만, 한 번 수비에 몰리고 나면 좀처럼 상대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종종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역습을 진행하는 순간에 수비 라인을 끌어올리는 속도가 늦기 때문이다. 수비 라인을 조정함으로써 우리가 공을 다툴 공간을 정할 수 있는데, 수비 라인을 낮은 위치에 계속 두면서 우리 골대 앞에서 지속적으로 공이 머무르는 상황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당연히 수비적으로 좋은 상황은 아니다. 지난 조별예선과 8강 경기에서도 공통적으로 노출된 문제이기도 했다. 애초에 우리가 이란처럼 수비적 자세를 유지한 채 역습에 의존하는 팀이 아니란 점을 생각해보면, 라인의 높이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슈틸리케 감독 역시 지난 우즈벡 전, 이라크 전에서 라인을 끌어올리라는 제스쳐를 여러 번 취했다. 감독 역시 문제점은 잘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대회 중 부족한 점들을 하나씩 잘 보완하고 있기에 수비의 라인 컨트롤 문제는 결승전에서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
(△K리그 챌린지 경기를 관람 중인 슈틸리케 감독)
2. 슈틸리케 감독의 용병술
슈틸리케 감독의 장점 중 하나는 주관을 갖고 선수를 기용하는 것이다. 팬들은 선수 선발과 기용에 있어 협회의 압박을 받지 않는 외국인 감독이라는 점을 높게 사고 있다. 이정협을 깜짝 발탁하면서 의구심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정협의 발탁은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사우디 전까지 포함하면 벌써 A매치에서 3골이다. 호주 전과 이라크 전 모두 선제 결승골을 기록했으니 골의 순도도 무척 높다. 94년 아시안게임에서 네팔을 11:0으로 이길 때에 들어갔던 한 골과는 무게가 다르다. 이정협의 활약으로 굳이 제로톱을 구사할 필요가 없어졌고, 이동국-김신욱이 있을 때처럼 경기를 이끌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특히 4강전이 있기 전 이정협을 다독이며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책임은 내가 진다.’는 말은 우리 팬들의 마음에 쏙 들었다.
많은 팬들이 이정협과 같은 '신데렐라'를 보면서 훈훈함을 느끼고 있지만, 슈틸리케 감독의 강점은 팬들이나 언론에 흔들리지 않는 선수 선발 및 기용에도 있다. 박주영을 대표팀에 선발했던 것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번 대회에서도 꾸준히 김영권과 장현수를 기용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라크 전 득점 이후 김영권에 대한 비난 여론은 사라졌지만, 이전 경기까지 김영권을 경기장에서 보기 싫다는 반응은 정말 흔하게 봐왔다. 쿠웨이트 전에서의 부진이 일차적인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유독 김영권이 미움을 받았던 것은 아마 홍명보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2014년 브라질에서 알제리 전에서 어설픈 수비로 대량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장현수 역시 쿠웨이트 전 실수를 범한 이후 팬들과 언론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슈틸리케는 자신의 소신에 따라 두 선수를 기용했고, 그 선택은 지금까지 승리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이라크 전에서 각각 골을 기록하며 이정협도, 김영권도 슈틸리케 감독의 신임에 부응하는 모습이다. 주변의 염려와 비난도 모두 이긴 채, 나를 믿어주는 감독과 함께 좋은 경기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장현수 역시 곽태휘의 부상 회복 후 주로 교체 출전하고 있지만, 경기장에 들어서서 수비의 안정감을 높이는 미드필더로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협회는 물론이고 여론의 압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선수를 기용하는 슈틸리케 감독은 선수들 입장에서도 무척 고마운 지도자일 것이다. 당연히 팀 내 분위기는 좋을 수밖에 없다. 경기 전 선수들과 손을 마주치며 힘을 불어넣는 장면은 그가 어떤 감독이 되고 싶어하는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듯하다.
(△ 경기 전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슈틸리케 감독)
3. 강하는 팀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팀이 강팀이다.
이번 아시안컵에서 새삼 실감하고 있는 말이다. 경기력은 들쭉날쭉했으나 매번 이기면서 결승까지 올랐다. 더구나 경기력은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 이제 ‘강팀’이라는 말이 아예 근거가 없는 말도 아니다. 브라질은 월드컵에서 오히려 토너먼트 단계에 들어서야 조직력이 향상되면서 나은 경기력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우리 대표팀도 대회가 진행될수록 점점 경기력이 좋아지고 있다. 이라크와의 준결승전은 과정도 깔끔한 편이었기에 언론의 칭찬과 팬들의 응원도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우리가 ‘이기는 팀’이었기 때문에, 강팀이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과정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호주와의 결승전마저 확실히 이겨야 진정한 ‘강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조별 예선에서도 우리보다 호주가 나았던 점은 분명히 있었다. 우리가 이길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어야 할 결승전을 앞두고 너무 들떠있다는 것은 문제이다. 27년만의 결승전 진출 자체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아시아에서 우리나라 축구가 갖는 위상을 생각해보면 지난 세월 동안 ‘당연한’ 일을 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결국은 우승을 해야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어려움을 뚫고 결승전까지 온 것은 분명히 칭찬받아야 할 일이지만, 우리의 목표는 분명히 우승이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했던 ‘강팀’이다. 결승 진출 자체로 인해 정신 자세가 흐트러져선 안 된다. 물론 팬들과 언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벌써부터 슈틸리케에 대한 수없는 칭찬이 쏟아지고 있다. 결승전 진출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마치 우승한 것 같은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호주는 이라크보다 분명 강한 상대이고 우리는 이번 대회에서 가장 어려운 상대를 만났다. 설레발 칠 상황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 아시안컵 우승과 함께 대표팀 경력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
계속된 승리로 자신감은 충전되었다. 불과 2주 전에 호주를 이긴 경험도 있다. 우승을 반드시 할 것이라고 보장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이제 우승이 코 앞이다. 적당한 자신감은 상대를 누르기에 꼭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자만심이 되어서는 곤란하겠지만, 그것을 제어할 ‘형님’들이 이번 대표팀에는 함께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우승을 확정지은 것은 분명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길 바란다. 특히 이번 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하는 차두리 ‘형님’을 위해서라도 우승으로 마무리할 수 있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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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잘봤습니다 굿
감사합니다~
전후반 공수간격이 벌어지는 문제는 기성용 윙어기용으로 해소를 하는 모습이더군요.
오만전부터 호주 쿠웨이트전까지 라인이 내려앉으면서 수미와사이에 많은 공간을 허용했었는데 기성용을 윙으로빼고 장현수를 넣는 용병술로 중원을 커버
기성용에게 수비부담은줄이고 박주호 기성용 패스줄기를 전방으로바꾸면서 닥공체제 전환.
기가막힌 용병술인것 같습니다.
동감입니다. 기성용이 어차피 볼줄인건 마찬가지이니 전진 배치하면서 중심을 앞쪽으로 옮기는 건 좋은 포진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