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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천황 - 중국에서의 연구동향 [조육대]
5000년 전 중국의 하북성 탁록에서는 산하를 뒤엎을 만한 전쟁이 발생하였다.
역사에서는 이를 [탁록대전]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은 바로 황제[黃帝], 염제[炎帝], 치우[蚩尤]의 세 위대한 시조가 대표하는 부락의 내부에서 일어난 것으로서, 원시사회 말기 부락간에 생존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그 때에는 민족이나 국가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긴 자는 왕이 되고 진 자는 도적이 된다.는, 정통사학가들의 비유물주의 관점이 적용되지 않았어야 했음에도 지금까지 비유물주의적 사관에 의해 판단되어 왔다.
치우가 비록 전쟁에서 지기는 했지만 그도 우리 조상 중의 한 사람이므로, 마땅히 공평하게 평가해서 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
최근 관련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황제가 치우와 큰 싸움을 벌였던 장소는 지금의 탁록현 반산진의 황토원이다. 당시 치우군이 주둔했던 [치우채]를 보면 지형에 따라서 남채, 중채, 북채의 세 요새가 있으며, 현재 이 흙으로 된 요새는 아주 잘 보존되어 있고, 치우성에는 아직 담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치우채 아래에 있는 유물관리인이 석촉, 동촉, 구려족의 전형적인 도기등을 수집 하였다.
외이에도 탁록에서는 일련의 치우와 관련된 전설이 채집되었다.
탁록에는 3기의 치우분이 있는데, 남치우분이 치우의 진짜 무덤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탁록은 이미 두차례에 걸쳐 중국 탁록 염황치 삼조문화[炎黃蚩 三祖文化] 학술연구 토론회를 개최한 바 있는데 이 회의에서 경륜과 지식이 풍부한 전문가들은 치우가 위대한 선조중의 한사람이 라는것과 탁록이 중화민족의 발상지이며, 근본을 존중하며 뿌리를 찾아 조상을 알현하는 성지[聖地]라는 공통된 인식을 보였다
치우- 도깨비형상과 치우[윤열수]가천박물관 학예실장
우리 생활 주변에 도깨비 설화는 물론 도깨비의 형상은 사 신앙[邪 信仰] 등에서 매우 다양하게 등장한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도깨비는 용이나 호랑이만큼 무섭고 두려운 존재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친숫한 느낌을 주는 존재이다.
권선징악의 설화에 나타난 한국 도깨비의 모습은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도깨비에 대해서 한국인 들은 누구나 자신들이 전문가라고 자신 있게 생각하지만 막상 도깨비의 근원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중국측 기록에서 치우천황[蚩尤天皇]은 도깨비 부대를 이끌고 황제족[黃帝族]과 73번 싸워 모두 승리하였으나, 74번째 싸움인 탁록지전[탁鹿之戰]에서 패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고 한다.
그 후 동이계열 종족들이 말을 듣지 않자 황제가 치우상을 그려 천하를 진정시켰고, 재앙을 물리치는 벽사신상[邪神像]으로 삼았는데, 아마 도깨비를 치우 천황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치우의 형상[形象]을 그린 도상[圖象]은 중국 중심의 문헌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남아있지는 않으나, 술이기[述異記] 문선[文選] 사기[史記] 한비자[韓非子] 관자[管子] 등의 문헌을 통해 어느 정도는 유추해 볼수 있다.
양나라 임방[任昉]의 <술이기>에 의하면 치우는 뿔이 있고, 동두철액[銅頭鐵額]이며, 이발[耳髮]은 검극[劍戟]과 같다. 눈이 네 개이고 팔이 여섯 개이며, 사람의 몸인데 소의 발굽을 지녔다, 고 한다. 그 이후의 귀면와, 해치 등 도깨비의 형상에는 이런 특징들이 아주 잘 어우러져 있다.
치우천왕과 도깨비의 관계는 산해경[山海經] 대황남경[大荒南經]등 여러곳에서 확인이 되고, 우리 생활속 한국인의 마음속엔 일찍부터 도깨비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도깨비의 특징이 치우천 황의 특성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음을 본다.
고구려 고분에 등장하는 도깨비는 삼국시대 귀면와에서 꽃을 피웠고, 그 맥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문헌 속에서의 치우는 대부분 황제와의 관계속에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황제의 이야기중 치우의 역학이 어떠한가에 따라 치우의 형상이나 출현 모습이 약간씩 달라지고 있음도 볼 수 있다.
현존하는 우리 도깨비의 얼굴 형상들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여 보면 대체로 용의 얼굴과 유사하다. 용과 도깨비의 유사성은 어디서 기인하며 그 관계는 어떠한 것일까?
그리고 치우 천황과 용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이는 앞으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검토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치우 - 탁록전쟁과 동아시아 상고문명권의 재편과정 고찰 - 박선식
탁록전쟁은 동아시아 상고시기의 전쟁으로서 한.중 두 민족의 시원[始原]과 그에따른 문명권의 변화상을 추정케 하는 단초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전쟁의 발생원인과 경과과정 그리고 결과에 관한 양국의 기록은 매우 다르다. 정밀한 연구과정에 의해 정확히 밝혀지겠으나, 기존 역사자료의 재해석과 관련 고고학적 성과를 견주어 일말의 해결가능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탁록전쟁이 발생한 시점은 대략 서기전 27세기경으로, 한국 고고학 편년으로는 신석기시대 말이지만, 북한에서 서기전 30세기경의 비파형 청동창끝 발견이나 천문관측 고인돌판 발굴이 있었고, 반구대 암각벽화의 고래잡이 조직과 그 도구인 쇠뇌와 대형작살 등은 탁록전쟁에서의 금속무기 사용과 대규모 군사동원에 대한 설득력을 갖게 한다.
탁록전쟁의 원인에 대해 사마천의 <사기>는 신농씨[神農] 계 유망[楡罔]의 통찰력이 부족하여 일대 혼란국면이 있었다고 하고 있으나, 위서시비가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의<삼성기> <태백일사>등의 기록에는 황제가 신시 이래의 교화이념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정벌했음을 분명히 하는 등 탁록전쟁의 원인과 그 경과과정에 관해 오히려 <사기>보다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의 기록물을 찬찬히 헤아려보면, <사기>에 담긴 기록은 사실의 본질이 가려진 것임을 헤아리게 된다.
<태백일사>등의 기록에 따르면, 본래 신농은 고시씨로부터 비롯됐던 인물로, 소전의 후예인 헌원도 그와 같은 계보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치우를 구려[九黎]의 임금이라고 기록한 여러 사료에 따라 우리측 기록을 면밀히 검토하면, 치우는 구려의 이념인 교화 및 치세이념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치우와 훤원이 다같이 자기 후예들을 당대 최고 지성인 자부선생의 문하에서 수학케 한점, 훤원이 전쟁을 하면서 동문수학한 대요의 무리[치우계열]에게 동맹적 관계를 제시한점 등은 연맹국인신시 안에 있었음을 짐작케 하여 특별히 주목된다.
그런 가운데 치우는 유망정권의 난맥상을 지켜보며, 본래 같은 계보로부터 비롯됐던 신농지국[神農之國]을 경장[更張]하고자 서진[西進]계획을 추진한다. 그 같은 계획은 기존의 신시후예를 포괄하는 신정[新政]체제의 구현을 꾀하는 것으로, 필자는 이를 신시대아주의[神市對我主義] 곧 신시글로벌리즘으로 평가하고자 한다.
그리고 당시 치우의 이념에 맞서 싸운 헌원은 서토 소아주의[西土小我主義], 여기서의 서토를 북애자는 <규원사화>에서 <中土>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헌원세력이 동방세력의 반대집단인 점을 착안하여 태백일사의 표현대로 <서토>로 하고자 함, 에빠진 서토 쇼비니즘의 주창자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기나긴 대회전은 이념적으로 신시 글로벌리즘 대[對] 서토 쇼비니즘의 문화 대충돌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후 신시계열은 약 300년간 서토세력과의 소강기를 거친뒤, 다시 분화과정을 겪었다. 이는 신시 문화권의 재평과정으로서, 신시세력은 다시 단군왕검을 정점으로 하는 신시 문화권의 새로운 정착기를 갖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치우 대에 표면화된 신시 글로벌리즘은 단군왕검 대에 안정기로 접어들었고, 이후 산동지역과는 사뭇 다른 한민족 문화기를 열었다고 헤아려진다.
박선식-군사학회 연구위원
치우 - 고고학 발굴 자료로 본 치우의 금속사용 역사 - 나선화
고고학은 과거 인간이 남긴 물질적 흔적, 즉 유적[遺蹟], 유구[遺構], 그리고 유물[遺物]을 통하여 인간의 과거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문헌 기록이 적거나 불확실한 상고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데 크게 기여한다. 따라서 동방 최초의 금속 사용자라는 치우에 대한 기록도 이러한 고고학 발굴자료를 통해 그 사실성이 검증될수 있다.
지금까지 치우의 기록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된 발굴조사는 없었으므로 이직은발굴자료와 연구자료가 부족하여 치우가 생존하였던 시기의 사회상을 복원하는데 많은 제약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헌자료를 보완할 수 있는 많은 잠재력은 가지고 있다.
치우[蚩尤]가 황제[黃帝]와 겨룬 시기를 하[夏]나라 시작 연대와 비교하면 대체로 기원전 23-24세기경의 인물로서, 치우가 로산의 금을 얻어 다섯가지 병기를 만들었으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史記,管子인용),치우씨 형제들은 모두 동두철액[銅頭鐵額]이었다..치우때는 쇠를 달구어 병기를 만들었다..야련을 시작한 사람은 치우이다..[述異記, 太平御覽]
등 수많은 금속사용 기록이 있는데, 과연 당시가 청동기 시대였을 것인지를 고고학 발굴 성과를 통해 검증해본다.
인류는 기원전 7-6천년 경 근동[近東]과 소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구리제품을 사용했고, 중국의 용산문화[龍山文化], 제가문화[齊家文化] 등과 같은 신석기시대 문화들에서 헝동과 청동을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감숙성[甘肅省 東鄕 林家, 馬家窯期]에서는 기원전 2천 5백년으로 편년되는 주조[鑄造]칼이 출토된 바 있다.
요서지방과 내몽고 일대에서도 하가점 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라고 불리는 청동기 문화가 방사성 탄소연대에 의해 기원전 24세기부터 기원전 14세기까지 존재했었다. 또한 최근에는 요녕성[遼寧省 建平縣 紅山 牛河粱] 유적에서 기원전 3천년 경에서 청동기를 제작하였다는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어 주목된다. 시베리아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3천년경의 아파나시예보 문화로부터 시작된다.
이런 주변 상황과 유물을 비교해볼 때 치우와 황제가 서로 자웅을 겨루었던 시대는 아직은 단순한 바늘, 송곳, 칼, 장식품 등을 생산하였고, 단검이나 도끼와 같은 비교적 큰 규모의 물품은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동기 시대에 진입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현재까지의 발굴성과로는 기원전 17.8세기에 중국본토지역이 본격적인 청동기 시대에 접어드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그러나 앞으로 활발한 발굴조사를 통해 더 많은 자료가 축척된다면 치우 시기에도 풍부한 청동기가 사용되었음을, 그리고 치우시대 문화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선화:이화여대 박물관 관장.
치우 - 단오의 <적령부(赤灵符)>와 치우천왕[蚩尤天王]: 박희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소외된 치우천왕을 되살리는 일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 일이자, 동북아시아 상고사의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는 일이다. 기록 속에 등장하는 치우천왕은 주로 무신[武神]으로 나타나는데, 치우천왕에 관한 가장 다양한 기록을 보여주는 우리측 사서는 <규원사화>와 <한단고기>이고 , 중국 측 자료는 <산해경>이다.
여기서 <규원사화>와 <한단고기>는 학자들간에 위서시비에 휘말려 있고, <산해경>은 중국에서는 고대사 연구가들이 많이 활용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재야 사학자들이 인용하는 문헌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듯 고대사의 문헌자료에 대한 검정과 발굴성과를 통한 고대사의 정립에 발목이 잡혀있을 때, 이웃 중국에서는 우리가 잊은 상고사를 자신의 역사로 편입하고 있다.
일찍이 <규원사화>의 저자인 북애자가 지금 세상에는 치우씨에 관하여 자세히 캐묻는 사람이 없다. 이는 국사책이 흩어진데도 원인이 있기는 하나 후대의 학자들이 소홀히 했다는 질책은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고 염려했던 현상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하여 이 글은 <규원사화>와 <한단고기>를 포함한 여러 사서와 문집에 나오는 치우천왕에 관한 기록의 진위보다는, 그 기록들이 담고있는 상징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 또,민간에 전승되는 신화나 풍속은 문자의 힘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민속, 특히 단오풍속에 만아있는 치우천왕 연관내용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는 치우천왕을 찾고자 한다.
먼저 단오풍속의 출발과정에서 부적의 기원이 된 치우천왕과 적령부의 관계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단오풍속인 차부적, 차륜병, 애호, 각저희 등을 통하여 오늘까지 전승되고 있는 염제신농,황제훤원의 상징코드를 읽어, 태양의 아들인 치우천왕과 태양의 아들을 표방한 황제훤원과의 전쟁인 탁록전쟁이 대립이 아닌 포용과 조화의 모습으로 단오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천문학적 접근을 통하여 살펴본다. 또 다양한 기록을 통해 붉은색이 가지는 벽사의 의미와 치우천왕의 상관관계에서 적색이 치우의 상징색으로 된 연원과 치우천왕이 수행하는 군신[軍神]으로서의 기능성을 살펴보고, 끝으로 령[靈]과 룡[龍]의 문자학적 개연성을 통해 밝혀지는 치우천왕의 형상이 용으로도 표현되고 있다는 점을 통해, 우리나라 귀면와가 적령, 즉 적룡의 형상을 한 치우천왕을 새긴 것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고자 한다.
이와같이 적령부를 통하여 치우천왕의 실체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 신화, 민속, 문자학, 미술사학, 그리고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지만, 본인은 이 글이 해답이 아니라 나와 상고사를 연구하는 여러분께 던지는 새로운 질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면 한다.
박희준: 치우학회 학술위원장
치우 - 치우에 관한 한.중 기록의 분석 [오정윤]
우리나라측의 치우에관한 자세한 기록은 위서 논쟁에 휘말려 있는 <桓檀古記>의(삼성기) (태백일사) 와 조선 숙종때 북애자가 저술한 규원사화[揆園史話] 정도 뿐이다. 반면 치우는 사기[史記]를 비롯한 중국 기록에 많이 남아 있다.
먼저 치우가 활동했던 시대를 확인해 보면 <삼성기>의 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에 치우는 바로 14대 자오지환웅으로 서기전 2706년에 임금의 자리에 올라 서기전 2598년에 물러날 때까지 109년 동안 재위하였으며, 중국측의 죽서기년[竹書紀年]과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에는 동시대인인 황제훤원이 서기전 2698년에 임금의 자리에 올라 서기전 2599년에 물러날때까지 100년동안 재위하였다고 전한다.
치우[蚩尤] 의 이름은 한국측에서 치우씨, 자오지, 지위천 등으로 불리우며 『옛천자의 이름』이라고 하는데, 중국측은 치우[蚩尤]라고 표기하고 『해신[海神], 수신[水神]의 성격을 지닌 치미[ 尾]』[何光岳] 『뱀, 용, 이무기의 의미와 검은 소 (물소)의 의미가 결합된 이름』[王大有] 이라는 뜻이 있다고 하는데, 치우족의 토템과 관계 있는 듯하다. 치우의 생김새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구리머리에 쇠이마[銅頭鐵額]』를 하고, 어깨에는 외날 칼[儉], 몸통은 갑옷[鎧], 양손에 모[矛], 극[戟]을 지닌 전형적인 기마무[(騎馬武士]의모습으로 기술된다. 이런 중무장의 모습을 처음 본 중토[中土]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치우를 괴물처럼 묘사하였고, 그 형상이 도깨비, 도철,치미등 여러 가지로 전해진 듯하다
금속의 사용에 대해서는 태백음경[太白陰經]에 『복희[伏羲]는 나무로 병기를 만들고 신농[神農]은 돌로 병기를 만들었으며, 치우는 금속으로 병기를 만들었다.』고 하여금속무기의 원조가 치우임을 밝히고 있었다. 실제로 치우 시기인 서기전 27세기경의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이미 청동이 사용되고 있었음이 고고 유물로 밝혀지고 있으며, 치우가 사용한 금속무기들은 당시로서는 월등한 무력이었을 것이다. 탁록전투는 동아시아 지역이 황제집단과 치우집단으로 양분되어 패권을 다툰 최초의 국제 전쟁으로서, 그 승패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측이 서로 자기 쪽이 이겼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현재의 기록만으로는 정확히 누가 이겼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치우의 무덤에 대해서 한국 측은 중국의 기록을 인용하여 『산동 동평군 수장현에 있다.한서漢書]』고 기록하고 있으며, 중국 책에는 이외에도 진나라 때부부터 치우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한나라 선제는 치우사[蚩尤祠]를 지었고, 한무제는 장안에 치우사를 지어 병주[兵主]로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상의 기록에서 보이는 양측의 공통점은
1.치우는 금속병기의 발명자
2.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으로 구려[九黎], 구이[九夷]의 수령《한국 기록에는
신시시대 14대 환웅인 자오지라고 명기》
3.치우집단으로 풍백, 우사를 언급
4.치우의 후예로 구려(九黎), 삼묘(三苗),
구이(九夷) 동이(東夷),묘만(苗蠻), 북만(北蠻)등을 거론
5.치우의 시대에
대해서 양쪽의 기록의 연대가 거의 동일 등이며,
양쪽 기록의 다른 점은
1.치우를 중국측은 흉폭하고 난을 일으켰다(作亂) 고 하였지만, 한국의 기록에
는 천도(天道)를 준수하고 애민(愛民)과 영토개척의 이상을 지녔다고 묘사되고,
2.탁록전투에서 중국측은 치우세력이 패퇴하여 뿔뿔히 남쪽,북쪽,서쪽으로 흩
어졌다고 하였지만, 한국 기록에는 황제헌원이 패퇴하고 항복하면서 신시(神
市)의 규범(規範)을 준수하겠다고 서약한 뒤 물러났다고 전한다.
따라서 치우에 대한 연구는 단순하게 한 영웅의 이야기를 캐나가는 작업에 그치는 게 아니라,현재 한국, 중국, 티벳, 중국남부의 여러 민족인 묘족, 이족, 여족, 요족, 장족의 상고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조명하는 출발점으로서의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으므로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오정윤-한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치우 - 치우천왕과 민족사관 [박성수] 정신문화연구원교수
환인.환웅.단군은 일제식민사관학에 의해 한때 말살의 위기에 놓였다가 8.15광복으로다시 살아났다. 일제식민 사학자들은자국(일본)의 상고사는 무비판적으로 시인하면서,한.중 두 나라의 상고사는 역사가 아니고 (허구적인 날조)라고 부정했다. 이같은 일제식민사관의 역사 훼손은 해방후 역사.고고.인류학 등 여러분야에서의홣발한 연구를 통하여 상당부분 복원되었으나, 한.중.일 3국의 각각 오래 전해 내려온사대주의 사관, 중화사관,황국사관이라는 자기중심적인 역사관 때문에 아직은 미흡한 단계다.
어떤 역사가도 순수하게 객관적인 역사기술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과학적으로 역사사실을 밝혀낸다 하더라도 사실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고 그 해석속에서 역사가의 주관이섞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은 나라에 따라 달리 보이기 마련이고, 사료가 희소한 상고사에 있어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치우천왕은 환웅시대의 인물이다. 그런데 치우천왕에 대한 원천적인 역사 왜곡은 중국의이른바 중화사관에 의해 자행되었고, 일제가 단군을 말살하기 이전에 이미 조선왕조의사대주의 사관에 의해 이 왜곡된 치우상이 그대로 수용되었다. 즉,사마천은 치우천왕을 (중국의 통일을 방해하는 일개 지방 폭군)으로 매도하였고, 끝내 헌원의 (정의의 칼에 맞아 죽는 반역도)로 평가하고 있다. 이후 훤원은 중화민족의 시조로 추앙되었으며 치우는 우리의선조로 인식되다 보니,그 이기고 진 사실이 한.중. 두 민족의 자존심과 연결됨으로써, 우리는 지난 1천년간 겉으로 중화사관의 중압에 못 이겨 훤원의 우위를 시인하여 왔다.
그러기에 치우는 귀면와라든지 장승,벅수,수살막이,심지어는 미륵으로 까지 둔갑 되어 전해 내려 왔던것이다. 그리고 소국을 자처하면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등 삼조선만을 인정하면서 그 이전의 환웅.환웅의 역사는, 많은 석학마저도 황당한 전설로 내어 던져 버렸다. 그러나 다행이 치우천왕은 우리나라 특유의 군신신앙으로 살아남아 있다.
그리고 불행중 다행으로 이런 집권층의 사대주의 사관에 반대하는 자주적.민족저주의적 사관을 가진 지식인들이 있어 (규원사화)(환단고기)와 같이 당시의 왜곡된 국가 사관에 도전하는 역사기술을 남겼다. 그들은 (고기)를 토대로 환웅은 환국(환인)이라는 실존국가에서, 풍백 운사 우사와 3.000명의 무장집단을 이끌고 태백산 부근에 이주하여 온 배달유민들의 지도자로 이해하였다.
치우천왕의 문제는 이처럼 중국의 중화사관과 일본의 황국사관 그리고 한국의 민족주의 사관이 교차하는 사각지대라 할 수 있고, 그 국제 정치적 의미는 미묘하다. 그속에 약육강식의 비수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일이다.
치우 - 蚩尤는 누구인가?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 원장
蚩尤는 黃帝와같은 시대인물로서 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書經> 呂刑篇에 보인다. 그리고 <管子> <列子> <莊子> <山海經> <戰國策> <韓非子> <抱朴子> <史記> 등과 같은 옛 중국고전에 광범위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초기 동양문화상에서 蚩尤의 위치와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말 해준다.
현대 중국역사학자들은 上古시대의 동북아시아에서 華夏族.東夷族, 苗蠻族이라는 세 개의 대표적인 部族集團이 있었다고 본다. 華夏族은 시조인 黃帝族이 발전하여 오늘의 漢族이 되었다. 東夷族은 중심세력이 黎에서 九黎, 九夷로 발전하였고, 그 後裔가 바로 오늘의 韓民族이다. 따라서 夫餘나 句麗라고 할때의 餘와 麗는 모두 東夷의 九黎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苗蠻族은 중국 남쪽 지방에 중국 남쪽 지방에 거주한 종족으로 역시 九黎族의 後裔인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黃帝가 西方의 陜西省을 中心으로 黃帝族을 지배하고 있을 당시 東方에서는 蚩尤가 九黎國의 天子로서 東方의 帝國을 이끌고 있었다. ꡒ九黎國의 임금을 蚩尤라 한다(九黎之君 號曰蚩尤)ꡓ 『書經.孔傳』 ꡒ 蚩尤는 고대의 天子이다.(蚩尤古天子)ꡓ『書經.』ꡒ 阪泉氏 蚩尤는 炎帝의 后裔이다. (阪泉氏蚩尤 姜性 炎帝之后裔也 )ꡓ 『史記..五帝本紀』 등의 기록이 이를 증명해 준다.
따라서 원래 치우란 이름은 ꡒ 우주를 다스린다.ꡓ라는 뜻의 治宇나 東方을 다스린다는 뜻의 治隅였을 가능성이 높다.
黃帝와 蚩尤가 싸움을 벌린 鹿은 蚩尤가 다스리는 九黎族의 영토였으며, 黃帝族이 서방에서 동쪽으로 전진하는 과정 중에 中原에 거주하는 蚩尤가 거느리는 黎族과 苗族의 저항을 받아 발생한 전쟁이 鹿戰爭이다. 따라서 黃帝는 도덕주의자가 아닌 무력주의자. 침략자였다.
蚩尤가 黃帝와 싸울 때 거느렸다는 風伯 雨師는 檀君이 나라를 다스렸을 때 거느렸던 風伯 雲師 雨師와 일치하는 등 蚩尤가 우리 韓民族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증거는 많다.
우리가 東夷 九黎國의 天子 蚩尤의 후손이l라면 우리 韓民族의 뿌리는 上限線을 檀君보다 더 위에서 찾아야 할 것 이며, 사대사관이나 식민사관에 매여 있지 말고, 우리 자신의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고 복원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올바로 확인 할수 있을 때 통일의 위업과 민족의 번영을 기약하고 나아가 21세기 문화의 시대를 주도적으로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내용출처 : http://historyworld.org/ |
첫댓글 언제까지 공부 안하고 생각 안하고 이런 글이나 퍼올건지...ㅉㅉ 지겹지도 않나요?
공부좀 하세요.
언제까지 생각도 안하고 '짱개종놈'들과 같이 부화뇌동하는 무뇌아의 무개념 댓글을 달지...ㅉㅉㅉ 지겹지도 안냐요?
반성좀 하세요.
공부좀 해서 다른 얘기나 근거도 좀 찾아볼 수 있도록 노력하시길 바래요^^ 솔직히 공부 지지리 안한티 엄청 나거든요. 아무런 근거도, 증거도 없는 허무맹랑한 얘기 지어내면서 거짓된 애국심 발휘하기 보다는 그 정력 좀 더 긍정적인 곳에 쓰시길 바랍니다. 창피하지도 않아요? 어디가서 '나 이런거 한다'라고 말하면 뒤에서 엄청 무시받을텐데 말이죠. ㅉㅉㅉ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가 있죠? 이런 등신같은 소리 지껄이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서 인생 낭비하기 보다는, 제대로 역사를 배워서 그 중국 정부의 논리를 깰 수 있는 논리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정신 차리세요.
'짱개 종놈'의 수장 이세민이 눈깔 빠지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학문도 없고, 반론다운 반론도 없고, 비아냥 대며 마냥 우기는건 딱, 짱개 종놈스탈이구먼~바로 너 규쌩쥐 너말이야~응? ^^
토론이 무엇인지 부터 인지하고 들이대길 바란다.
그리고 제대로 들이댈때는 공부 많이한 티내는 너의 논리도 얘기해 주기 바란다.
또한 중공 논리가 무엇인지, 중공 논리를 깰수 있는 논리가 무엇인지도 얘기해 주기 바란다.
(공부 많이한 티내고 쥐새끼처럼 꽁무늬 빼면 참 쪽팔리겠죠~잉^^
댁 수준으로 토론을 논하다니 참 우습군요^^
여기서 댁같은 멍청이와 시간 낭비하기 싫습니다. 한심해요.
댁 스스로 학교도 가보고 책도 찾아보고, 자신의 의견과 다른 의견들도 찾아서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이것부터 이해해보시길.
인터넷에 숨어서 바보같은 얘기나 지껄이기 보다는 밖에 나가서 학생들 혹은 교수들과 교류하며 스스로 소논문이라도 써서 의견 교환해보는게 어떨까 싶네요.
너무 불쌍해서 드리는 진심어린 충곱니다.
일단 글 내용에 대해서는 좀 차지한다고 하더라도 댓글이 꽤 보기에 좋지 않군요. 규쌤님과 中國님은 상호비방하는 것을 그만두셨으면 합니다. 특히 中國님의 경우에는 일전에도 제 경고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자꾸 이러시면 저도 어쩔수 없이 카페 규칙대로 처리 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이상 분란을 만드시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그에 맞게 대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