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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아니하실지라도(롬8장37-39)
성경본문: 로마서8:37-39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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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6일(수) 인천서 제주로 가는 여객선 세월호 침몰 사건이 아직도 해결이 되지 못한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를 보면서 가슴 아픈 안타까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사고를 보고 들으면서 참으로 안타깝고 불쌍하고 어떻게 할 수 없는 실망과 원망과 심지어 분노까지 느끼게 돕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승객을 배 안에 탈출할 수 없게 배안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해 놓고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 18명은 자기들만 생명을 구할 수가 있습니까? 점점 드러나는 사건이지만, 하나에서 열까지 총체적인 부패와 안전 불감증으로 인하여 발생한 인재(人災)인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다음 글은 이 배를 타고 가다가 진도 근처 바다에서 사고를 당하여 실종된 단원고등학교 2 학년 김 정민 학생의 부친이신 안산동부지교회 김영삼 장로님이 쓰신 것입니다.
제목/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요나가 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회개하고 나온 것처럼
돌아와도 감사하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정민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받은 것에 감사합니다.
이번 일로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생사화복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항상 고백하고
우리의 생명이
영원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잠시 있다가는 나그네 인생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말씀과 기도의 현장,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복음으로
오직 전도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모두들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짧은 시와 같은 이 글을 들으시면서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이 사건을 보면서 왜 하나님은 이런 시련과 아픔을 믿는 성도의 가정에 주셨을까? 이렇게 잘 믿는 성도에게 그처럼 아픈 사건에 빠지도록 하셨을까?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보듯이 믿는 사람도 어려움에 빠질 수 있고 심지어 이와 같이 죽음도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무엇일까요? 그에겐 어떤 믿음과 담대함 그리고 그로 인하여 얻게 되는 유익과 확신이 있을까요?
이 장로님의 기도문을 읽다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장로님의 신앙이 이 극한 상황을 주님께 맡기며 나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닌가요! 장로님이 갖는 이 확신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이 시간 신실한 성도가 갖게 되는 이런 확신의 이유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 롬 8:37-39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사도의 외침은 무엇입니까? 성도는 어떤 경우에 놓이게 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여질 수 없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 상황은 사망, 생명, 현재의 일, 장래의 일, 능력, 높은, 깊음, 그 어떤 피조물이 방해를 하여 나와 하나님관의 관계를 끊으려 하는 심각한 상황의 경우를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저는 앞에서 읽어 드린 김영삼 장로님의 경우가 그런 경우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18년을 곱게 키워 장차 훌륭한 아들로 세상에 내 보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 아들이 수장되었습니다. 전혀 자신의 뜻과 상관이 없는 가운데 물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그것도 어처구니없는 상황 속에서 말입니다.
어떻게 진실한 성도들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확신을 갖게 될까요? 어떻게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의 온갖 잔인한 핍박 속에서도 찬송하면서 순교할 수 있었을까요?
1.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가리켜 부르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이름 석 자를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앎을 의미합니다. 다음 구절은 그 의미를 정확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 시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4편 기자는 말하는 이 구절,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어떤 의미입니까? 아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방법, 손으로 만져보는 방법, 입으로 맛보는 방법 등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여기서 “맛보아” 안다는 표현은 한 마디로 경험적이고 체험적인 것을 말합니다. 눈으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지고, 그리고 입으로 맛을 보아 구체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가” 를 아는 것입니다.
미시간 호수가 한반도 전체가 빠져도 남을 정도로 매우 넓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이 호수를 바다라고 표현합니다. 호수가 모래사장은 Beach(해변) 라고 말합니다. 처음 가 봤을 때 수평선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가서 물을 손으로 찍어 맛보았습니다. 짜지 않았습니다. 민물 호수니까요. 이것이 호수와 바다의 차이를 구분하는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이 아는 것의 중요성을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명한 대제사장 기도에서 첫 번째로 강조한 기도는 바로 영생에 관한 기도였습니다. 왜 영생에 관한 기도를 가장 먼저 하셨을까요? 영생을 알고 누리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원히 사는 것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영생의 정의를 그것은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믿고 또한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앎은 체험적인 앎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야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는 신비스러운 영적 체험을 의미합니다.
*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난 자들이니라.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이 놀라운 영적 비밀은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나야만 되어 집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 과정이 이루어 질 수 있습니까?
니고데모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 요 3:3, 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실 때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인식하고 확신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놀라운 십자가의 대속의 진리를 깨닫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그 진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해 주신 칭의의 선언입니다.
* 롬 8:33-34a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로 의로워진 하나님의 백성들 즉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예수 안에서 의롭다고 판결하심을 알고 있는 자이기에 더 이상 죄로 인하여 부끄럽거나 두려워하거나 고통 받지 않을 수 있고 이로써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이러한 믿음을 갖고 있기에 구원의 확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당하게 성도로서의 자긍심과 자신감과 확신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사랑하시어 아들까지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그 어떤 세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 롬 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2. 영원한 구원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봅니다. 그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
바벨론에 전쟁포로로 끌려간 다니엘과 그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여러분들은 아십니다. 왕이 부하들의 충성 경쟁 가운데 발생한 왕의 동상에 온 국민이 절하도록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동상에 절하지 않는 사람은 극렬한 풀무 불에 태워죽이겠다고 위협하며 절 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그 명령에 불복하여 절하지 않았습니다. 불복의 이유를 묻고 또 강요하는 왕 앞에서 세 친구들이 답변한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 단 3:16-18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 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것이 성도의 믿음이요 당당함이요, 확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이러한 확신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But even if he does not)!” 상황과 관계없이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처분에 온전히 맡기는 전천후 신앙입니다.
성도 중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환란을 당할 때 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라고 원망하면서 괴로워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혼란스러움이 결코 반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신앙으로 가는 경우가 되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도 자신이 당한 원인모를 고통의 상황, 환란의 때를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생이 고해와 같다는 표현이 맞는 말이 아닙니까? 다음 시편 말씀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 시 43: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 시 62:5-8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 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시로다(셀라).
결론
사이비 교도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간교한 교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현혹시켜 세상의 교회들을 비난하고 자신들에게 와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속여 그들을 이용하였습니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칙과 법을 어겨가며 사업을 했습니다. 그 결과 무고한 시민 200여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번 사건이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던 지 계속되는 구조 소식을 접하고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면서 온 국민이 정신적인 외상증상을 보이고 있다고 정신의학자들이 진단했습니다. 어떻게 성도들이 이러한 말도 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여기 성경 말씀에서 그 대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구원이 있음을 확신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주신 믿음을 다시 한 번 더 점검하고 구원의 확신으로 슬픔 가운데, 충격 가운데서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만이 우리의 유일한 위로요 구원이시기 때문입니다.
*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이델베르크 신앙 요리문답 1 번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과연 사나 죽으나 진정한 위로는 어디로부터 올까요? 누구일까요? 부모, 형제, 세상 권력과 돈과 명예 그 어느 것도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나를 위하여 집자가에서 희생되시고 부활로 영원한 영생을 주신 바로 그 분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이 세상의 온갖 고난과 환란 속에서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성도들은 이런 믿음을 순간순간 고백하며 이 찬송을 부르며 승리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찬송가 503장 고요한 바다로
(1)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2)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3) 내 걱정 근심을 쉬 없게 하시고 내 주여 어둔 영혼을 곧 밝게 하소서.
(4) 이 세상 고락 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 없을 때 큰 믿음 주소서. 아멘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일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우리 각자가 경험하겠습니까? 오늘날과 같은 발전된 문명사회 일수록 각종 사고가 집단화, 대형화 되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 믿는다고 사고가 없고 죽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부활 역시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확고한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믿음으로 인내하며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에 신앙생활의 긴장이 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그래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경제적인 이익으로, 질병으로, 심지어 죽음으로 어떠한 상황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를 끊임없이 속이고 공격하고 유혹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믿으시고 십자가로 마귀의 권세를 물리치고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로 승리하신 예수님을 순간마다 날마다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오실 영광스런 주님을 바라보고 이 환란의 때를 소망 가운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3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