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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2)
고전 3:1-9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 설 교 >
하나님의 일꾼
고전 3:1-15 / 연규갑목사(광성교회)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정 때에 세운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갔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곳에서 아주 귀중한 동역자를 만나게 됩니다. 저들은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였습니다. 저들은 또한 사도 바울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쉽게 함께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실라와 디모데가 사도 바울의 일행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곳 고린도에 있는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강하게 전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의 복음 전함을 싫어하여 훼방만 했습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은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라고 선언하고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행18:6). 그리하여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은 1년 6개월 동안이나 유하며 저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는 많은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사도 바울은 에베소를 거쳐 안디옥으로 갔습니다.
얼마 후에 사도 바울은 곧 제3차 전도 여정 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첫 번째 도착지가 에베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곳 에베소에 약 3년간 동안이나 머물면서 집중적인 복음 증거의 사역을 했습니다. 에베소의 사역에 거의 끝나 갈 즈음에 고린도 교회에서 글로에라는 사람이 사도 바울에게 왔습니다. 그는 한 장의 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편지에는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 일어난 어려운 문제에 대한 질문이 담겨 있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글로에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대하여 듣게 되었는데, 그 소식은 사도 바울의 마음을 심히 아프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당파와 그로 인하여 분열이 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사도 바울의 사역에 대한 불신과 오해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근친상간이 일어났지만, 교회가 이 일을 알면서도 그대로 넘어가는 도덕적인 해이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서로를 세상의 불신 법정에 고소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이 편지를 통해서 그런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에게 피끓는 목소리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잘못된 일들을 지적하고,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이 일들을 잘 해결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보내 온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인, 고린도전서입니다.
그 편지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이 가져야 하는 바른 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자가 마땅히 취해야 하는 자세는 무엇인지를 지적하면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끄러움이 없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당파 싸움에 대하여 책망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과 지도자들이 4개의 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1:12). 하나는 바울파였습니다. 둘째는 아볼로파였습니다. 셋째는 게바파였습니다. 넷째는 그리스도파였습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파당을 짓고 나누어졌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했다고 할지라도 교회가 파당을 짓고, 나누어지고, 서로를 시기하거나 대적하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가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어떤 의미에서든지 파당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교회가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결코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성령은 하나가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따라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들이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파당은 그 어떤 이유를 댄다고 할지라도 결단코 정당화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교회가 이러한 당파로 나누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나 주장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인데, 교회 안의 성도들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이나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은 먼저 교회를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은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육신적인 생각을 버리고 오직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꾼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덕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제목으로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기를 원합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꾼이기 때문입니다.
Ⅰ.성숙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믿음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믿음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구원이라는 결과와 영생이라는 선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의 사명을 위한 믿음입니다. 즉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그 정도에 따라서 감당하는 일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믿음이 크다, 작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믿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한 이 믿음은 성장과 퇴보를 반복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당연히 이 두 가지의 믿음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영원한데 사명에 필요한 믿음은 변합니다. 그리고 구원을 위한 믿음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인데, 사명을 위한 믿음은 우리의 경건과 비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믿음은 사명을 위한 믿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꾼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맡은 사명을 감당함에 필요한 믿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신령한 자들”은 ‘믿음이 성숙한 자들’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일함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자들입니다. 또한 “어린아이”는 바로 ‘저 신령한 자들에 의해서 양육을 받는 자들’입니다. 곧 영적으로 아직 미숙하여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명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인 자들입니다. 마치 한 가정에 부모와 어린아이가 함께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도 영적으로 성숙한 자와 미숙한 자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미숙한 어린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당파 싸움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일꾼이 가져야 하는 사명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즉 영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저들을 향하여 믿음이 성숙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꾼은 믿음이 성숙한 자여야 합니다. 믿음이 성숙하지 못하면 일을 이루기보다는 오히려 일을 망치고 일을 더 어렵게 만들고 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자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믿음이 성숙하기를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자기의 믿음에 걸맞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이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다 보면 그 일을 감당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시험에 들고 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꾼은 자신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서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믿음이 날마다 성숙되기를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성장을 꾀하고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따라갈 수 있는 자가 되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더 성숙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Ⅱ. 순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본문 5-7절에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맡은 일꾼들도 또한 여러 종류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꾼들 각자에게 맞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꾼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모습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저들은 자기 당파에 얽매여 다른 사람들을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분쟁을 일삼음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분란만 일어났습니다. 그렇다 보니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보다는 오히려 일만 만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사도 바울은 서로의 분쟁이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분쟁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볼로나 사도 바울 자신은 분쟁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세움을 받은 일꾼들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신 사명대로 열심히 씨를 심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볼로는 그가 받은 사명대로 열심히 물을 주어 자라게 했습니다(6절). 이것이 바로 일꾼이 받은 사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 하나님께서 이루어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는 자와 물 주는 자의 순종을 통하여 고린도 교회가 여기까지 자라게 하신 것입니다. 다만 저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대해 순종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가 진정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그 일꾼인 사도 바울이나 아볼로에게 집착하게 되는 것은 일꾼으로서 마땅한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꾼은 오직 주인의 명령에 따라서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오직 주인의 소관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 사명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요, 나에게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는 사명을 맡기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또한 그 사명을 감당할 능력까지 함께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다 보면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꾼은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하여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에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적당한 일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결과에 대하여 미리 조바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일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마땅한 결과를 내심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 앞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입니다.
Ⅲ.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 10절에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일을 하는데는 모두가 순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방법이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일을 시작하고 일을 진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순서와 절차에 따라서 일을 진행할 때, 그 결과가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문의 “지혜로운 건축자”는 ‘숙련된 건축자’라는 뜻입니다. 즉 이 사람은 집을 건축하는 현장에서 모든 일을 총괄하면서 감독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숙련된 건축자와 같이 올바른 방법과 절차를 사용했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고린도 지역에 왔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께서 이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자 하시는 분명한 뜻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행18:9-10).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 교회의 터를 아주 견고하게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11절).
바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이러한 사역을 지혜로운 건축자로 비유했습니다. 곧 자신은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일에 숙련된 건축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은 하나님의 그 뜻에 따라 지혜롭게 일을 처리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고린도에 있는 수많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고,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의 일꾼은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지식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함으로 인해 오히려 일을 망치고 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일꾼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일을 하시고자 하는가? 그리고 왜 이 일을 나에게 맡기셨는가?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시고자 하는가? 등을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일을 시작한다면 그 일은 실패로 끝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지혜는 아무렇게나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오직 성령께서 주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 외에는 하나님의 사정을 아무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서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깊으신 뜻을 오직 성령을 통하여 그 교회와 그 일꾼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을 통하여 깨달은 자만이 일꾼으로서의 사명을 올바로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자처한다면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그의 서신 1장 5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지혜를 구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넉넉하게 주실 것입니다. 마치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풍성하게 채워 주셨던 일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왕상3:12).
Ⅳ.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따라서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엄청난 은혜를 입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자는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하여 열심을 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주님께서 반드시 그 일에 대하여 평가하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4, 15절에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의 상(賞)은 영생이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이미 우리가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견고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미 과거에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할 때 우리는 구원을 얻었고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상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삶에 대한 주님의 보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으로부터 반드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의 일꾼들은 그 날에 주님 앞에 섰을 때, 반드시 남아 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불로써 우리의 모든 사명을 감당한 충성에 대하여 시험하실 때에 남아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다면 우리의 충성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무엇인가를 남기기 위해서 열심을 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대하여 열심을 다하여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선의 것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건강, 지식, 재능, 부와 명예를 다하여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을 주심에는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라고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도록 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열심에는 분명히 그 날에 남아 있는 열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 앞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남기기 위해서 우리는 올바른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을 내도 헛된 것에 힘을 쏟는다면 그것은 헛일이기 때문입니다. 불에 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아무리 열심을 내어 쌓아 보았자 그것들은 불에 의해 타고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것으로 열심을 낸 사람들을 수고는 했지만, 그 결과에 대하여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일꾼이라면 우리는 금이나 은과 같은 보석처럼 영원하고 그 날에 불로써 시험을 받아도 남아 있는 것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복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세상의 초등 학문이나 철학, 그리고 속임수와 같은 것을 위하여 아무리 열심을 내고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복음을 위하여 열심을 내고 충성하는 자에게는 금이나 은과 같은 보석처럼 그 날에도 당당하게 그 결과가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열심을 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위하여, 세상의 없어질 것을 위하여 열심을 내는 것은 아무런 열매를 남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 하는 것이면서, 또한 저 자신에게 하는 설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이 광성교회에 일꾼으로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함께 일꾼이 된 여러분들과 함께 우리 광성교회를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워가도록 하셨습니다. 복음으로 바로 세우고,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교회에 세워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은 광성교회의 일꾼으로 세우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서로에게 힘을 북돋아주고, 격려해야 합니다. 함께 힘을 모으고, 도와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더욱 아름답게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 이는 세상의 일꾼과는 다른 존재입니다. 세상의 일꾼은 주인에게 고용되어 주인으로부터 맡은 일에 대하여 일을 하고 그 대가를 받으면 그만입니다. 그 일이 어떤 일이든지 자신의 의중과는 상관이 없이 일만 하고 그 삯을 얻으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주인은 일꾼에게 일을 맡기고 그 일에 대하여 보상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꾼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단독으로 일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일꾼들에게 일을 맡기고 버려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일꾼과 함께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꾼은 자신이 지금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의 주체가 일꾼이 아닌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맡기셨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믿음이 성숙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이 없는 사명 감당은 아무런 열매를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꾼은 지혜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바르게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 날에 무엇인가 남기기 위하여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 그 사명을 올바로 감당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상급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책망과 함께 부끄러움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마25:14-30).
원하기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어 그 날에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면류관을 받아쓰고 별처럼 영원히 빛나는 영광을 누리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의 사람 육의 사람
고전 3:1-8 / 이종철목사
신령한 자란?
고린도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은 스스로를 신령한 자, 헬라어로 ‘프뉴마티코스’라 불렀습니다. 영의 사람, 성령에 취한 자들이란 뜻입니다. 1절에서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라 말씀합니다. 이미 2장 15절에서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말하면서 14장 37절에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이라 말씀합니다.
스스로를 성령의 사람이라며 도인이나 예언자처럼 거들먹거리는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영의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무엇입니까? 3절의 “시기와 분쟁”입니다. 서로 어떤 은사가 뛰어난지 시기하고 자랑합니다. 12장에서 14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파벌을 만들고 사람을 좇습니다. 영적이라거나 은사를 자랑하는 자들이 이상하게 사람 숭배 경향이 강합니다. 자신보다 더 힘센 자를 추종합니다. 7장에서는 자기 몸이 거룩하다 하여 부부간 잠자리도 거부합니다. 8장과 10장에서는 자기는 모든 지식이 있다고 하며 아무 거리낌 없이 우상의 음식을 먹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신령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참된 신령함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정말 신령한 자는 지식이 있다고 하여 자유롭게 모든 것을 먹는 자가 아니다. 나의 자유로움으로 인해 다른 형제자매가 실족하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는, 그런 사랑을 가진 자가 정말 영의 사람이다. 성령의 은사나 능력 중에 최고는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은사는 사랑하는 수단으로 주어졌고, 사랑 때문에 은사는 절제되기도 합니다. 화려하고 능력 있는 은사보다는, 말없이 섬기고 희생하며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가 더 신령한 사람입니다.
정말 신령한 자는 사람을 좇지 않습니다. 사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능력을 주셔서 사용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존경할 자는 존경해야 하지만, 숭배나 파벌의 차원까지 가서는 안 됩니다. 칼빈파가 생기고, 웨슬리파가 생기고, 장공 김재준파가 생기고 예장의 박형룡파가 생기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다들 성령의 도구일 뿐인데, 도구가 주인이 되었습니다.
성령은 자유하기에 사람이나 파벌에 매이지 않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는 과정에서 깨달은 최고의 은혜는 자유였습니다. 죄와 심판으로부터의 자유, 전통과 교리로부터의 자유, 권력과 사람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은혜가 너무 커서 루터는 자신의 이름마저 바꿨습니다. 원래 이름은 루더(Luder)였습니다. 그 아버지 이름이 한스 루더입니다. 헬라어로 자유가 ‘엘류테로스’인데 여기서 차용하여 이름을 루터로 바꾸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소위 신령한 자들은 아볼로파와 바울파로 분열되었습니다. 진짜 신령한 자인 바울과 아볼로는 이런 분파를 만들 생각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 추종자들입니다. 자신들을 자랑하기 위해 선진이나 스승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은 사람들이 자신을 숭상할까 두려워 공동묘지에 묻혔고, 자신의 묘비명도 새기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결국 그곳에 묘비명을 새기고 성역화했습니다. 루터는 19, 20세기 독일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독일의 민족 영웅이 되었습니다. “루터 영웅이여, 당신은 모루에 서 있도다. 분노하여 꾸짖는 소리에 헐떡이면서, 그리고 우리 모든 독일은 당신과 한편이고 당신 대장간의 조수입니다.”(1917년 베스트팔렌 달력)
물론 위대한 선진들의 정신과 신앙모범을 본받는 것은 좋고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이름으로 파벌을 만들고, 교리를 만들고, 그래서 세력을 형성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자유로우신 성령은 그때마다 영감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때로는 그들의 길을 따르도록, 때로는 그들의 길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 신령한 자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
신령한 자의 반대는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1절, 3절, 4절에서 이 단어가 반복됩니다. 헬라어로는 ‘사르키코스’입니다. 사륵스는 육신으로 번역되는데, 세상의 욕구나 한계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세상성’을 말합니다. 신령한 척하는데 실상 이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주의 영이 그 안에 거하기 때문에 지혜로워지고, 그래서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반면에 육의 사람은 어리석어져서 유치한 어린아이처럼 됩니다.
바울은 1절에서 이들을 마치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한다.”라고 말씀합니다. 밥이나 딱딱한 음식을 소화할 수 없어 젖이나 이유식을 먹을 수밖에 없다고 비난합니다. 어른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려운 것을 소화할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 강단이 이처럼 유치원 수준입니다. 설교의 수준과 질이 떨어집니다. 설교자 자신이 어린아이 수준를 벗어나질 못합니다. 구원의 초보만 반복하면서 마치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복음에서 벗어나는 것마냥 불안해합니다. 여전히 미신과 주술, 기적에 의존하지 성숙한 이성의 세계로 나가지 못합니다.
어른은 스스로 판단합니다. 이게 옳은지 그른지. 무엇이 중요한지. 어제 옳았던 것이 오늘 틀릴 수 있다는 것. 하나에서 다른 것을 응용하는 능력 등. 어린아이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불안해합니다. 자기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면 불안해합니다. 요한 사도가 무어라 말씀합니까?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요일 2:27)
이렇게 말하면 성령이 일일이 가르쳐준다고 생각해서 어떤 영적인 깨달음이나 초월적 지시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의 이성과 완벽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기도하면서 결정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생각입니다. 또 다른 극단으로 자신이 깨달은 어떤 계시의 빛을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단들이 주로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성숙하다는 것은 이런 계시나 깨달음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 때문에 자신의 지식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교회에 묻고, 설득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어른입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바울은 사람을 중심으로 파벌이 형성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설득합니다. 바울은 씨나 나무를 심은 사람에 불과합니다.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세웠던 일을 말합니다.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설명합니다. 아볼로는 바울과 함께 또는 그 이후에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헬라적 지식과 변론을 통하여 교육과 신앙을 다졌던 듯합니다.
이들은 단지 심고, 물주는 일만 했을 뿐입니다. 씨라는 생명체를 만들고, 이 씨가 싹이 나고 자라서 나무가 되고, 또 뿌리나 햇빛을 통해서 각종 양분을 주셨던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입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7) 그러니 결정적 일은 하나님이 하셨고, 영광은 하나님이 받아야 합니다.
단순한 자연의 진리인데 인간은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마치 자신의 공로인 것처럼 여깁니다. 인간은 관리자이며, 사역자일 뿐입니다. 대지나 그 안에 있는 보화나 씨앗이나 하늘이나 어느 것 하나 인간이 직접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셨고, 오랜 세월 끝에 자연이 준 선물입니다. 씨앗은 스스로 자랐지, 인간이 도운 것은 심고 물을 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조그만 수고를 가지고 전적인 소유권을 주장하고 주인이 되려 합니다.
인간의 삶은 이처럼 부당한 소유권 주장의 역사입니다. 아메리카 땅을 백인들이 강도처럼 빼앗았습니다. 미국 정부가 1854년 인디언 추장 시애틀에게 땅을 팔고 보호구역에 들어갈 것을 요구했을 때 했던 그의 연설의 일부입니다. 이 시애틀 추장의 이름을 따라 워싱턴 주의 시애틀이란 도시의 이름이 생겨났습니다.
“나의 부족은 물을 것이다. 얼굴 흰 추장이 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것은 우리로서는 무척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어머니인 대지와 맏형인 하늘을 물건처럼 취급한다. 결국 그의 욕심은 대지를 다 먹어 치워 사막으로 만들고야 말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대지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지의 아들들에게도 일어난다. 사람 역시 한 올의 거미줄에 불과하다. 대지가 풍요로울 때 우리의 삶도 풍요롭다.”
내 집, 내 땅이 실상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앞에 있다고 해서 내 바다가 아니고, 내 하늘이 아닙니다. 일본의 핵오염수 방류는 매우 이기적이고 육에 사로잡힌 자의 논리입니다. 태평양은 모든 인류의 바다이고 우리는 그 혜택을 누리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단 0.7% 차로 정권을 잡았으면서도 마치 자기 소유인 것처럼 전횡을 휘두르는 용산권력 또한 도적과 다름없습니다. 앞서서 이끄는 리더의 역할을 하라는 작은 사역이 그들에게 주어졌을 뿐입니다.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쌓은 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적으로 내 노력이나 노동의 대가만이 아닙니다. 선진들이 쌓은 것 위에, 사회의 시스템을 이용해 그 부가 주어졌습니다. 모든 것은 은혜이고, 그러므로 감사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전횡은 창조주의 것을 훔치는 행위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의 영광으로 바꾸었습니다.
다른 한편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다”(6)는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내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이루려 하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결정적인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을 기르십니다. 내 소유나 계획을 이루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기도하고, 우리의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일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 책임이 아닙니다. 일이 성사되었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감사하십시오.
우리는 다만 심고, 물을 줄 뿐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달으면 자유로워집니다. 겸손해집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염려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나 세력에 매이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하고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자가 진짜 영의 사람이요, 신령한 자입니다.
기적을 찾읍시다
고전 3:1-15 / 박조준목사
성경을 살펴보면 수를 셀 수 없이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으로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중에도 사람을 지으신 일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 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백 살때 아들 이삭을 낳게 된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해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습니다. 반석을 칠 때 생수가 솟았습니다. 하늘에 서 만나를 내려 이스라엘 민족이 먹고 살았습니다. 40년 동안 옷이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모 두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여 호수아의 군대가 이기고 너무 피곤해서 기도의 손이 내려오면 원수 아말렉이 이기는 광경을 보 고 아론과 훌이 모세의 양팔을 받들어서 종래 여호수아의 군대가 아말렉에게 승리한 것을 기억 합니다. 선지자들 시대만 보더라도 엘리야는 바알 선지들과 대결해서 갈멜산 위에서 제단에 불이 내리 게 하고 3년 반 동안이나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던 유대땅에 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었습니다. 이런 일을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예수님 때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수님 이 이 세상에 오신 일부터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처녀 몸에서 나셨습니다. 그가 전 도사업을 시작하시면서 말씀만 전파하신 것이 아니라 많은 환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물이 포도주 가 되게 하셨습니다. 떡 다섯 덩이와 생선 두 마리로 그처럼 많은 사람이 배부르게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그가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 지시고 죽 으셨고 무덤에 갇힌지 3일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이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는 한 마디로 기적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기적을 믿는 종교입니다. 옛날만 아니라 오늘도 우리 생활 주변에서 기적은 수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저는 믿습 니다. 그러나 애써 구하는 사람만이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기 적은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위하여 아름다운 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나의 평생에 선하 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매일 우리를 위해서 계획되신 기적을 베푸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그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 런데 그들이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우연의 일치다.예기치 못했던 행운이다. 뜻밖의 일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것들을 기적이라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렇 게 볼 때 우리 삶 속에서 수없이 많은 기적이 매일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 고 있는 사람만이 삶 속에서 그 기적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긴 일인데 우리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고, 모든 조건으로 볼 때 그렇게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실에 있어서 훌륭하게 해결된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기적이라고 저 는 믿습니다. 모든 조건이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파멸이나 재난으로 끝나야 하는 것이 당연한 데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어떤 거룩한 섭리에 의해서 아주 훌륭하게 해결되는 경우가 미치 지 못하는 어떤 거룩한 섭리에 의해서 아주 훌륭하게 해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 해서 기적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좋으신 분이십니다. 매일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적 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적을 셀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선한 일을 하고 계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 다. 그것은 우리가 그 시험에서 실재하시는 하나님의 선을 영적으로 감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의 미할 뿐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기적을 헤아려 세는 습관을 가지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적이 무엇이며 기적을 찾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기적을 찾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 육신 눈으로 보지 못했어도 계속 믿어야 합니다.그리고 어 떤 극적인 것만 찾으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놀랍고 신비한 환경에 둘러싸여 있는 아주 평범 한 것을 기대하세요. 그렇게 되면 마침내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지남에 따라 보잘 것 없 는 것처럼 보였던 사건이나 만남, 환경이나 경험들이 우리의 전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아,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었 다. 그것은 분명히 기적이었다 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자기의 능력을 사방에 과시하 시는 두목과 같은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 자신의 능 력에 제한을 두셨다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방법을 통해서 의지적 으로 자기의 능력을 제한하십니다. 가령 첫째, 자연법칙에 의지해서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 실 때 이 우주 속에 자연법칙을 만드셨습니다. 중력의 법칙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법칙 으로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하신 일이기 때문에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나 성격을 낮추지는 못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은 하나님 자신을 더욱더 영화롭게 할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능력을 제한하시는 이유는 그분 자신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제한된 힘은 향상된 힘인 것입니다. 무제한의 힘은 윤리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높은 빌딩에서 떨어 지면서 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코자 합니다. 저로 하여금 떨어져도 다치지 않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한다고 다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의 법칙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제 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을 통해서도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 간을 만드실 때 자유 의지를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인격을 가진 존재가 되기를 원하 시지 꼭두각시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하늘의 통치석에 앉으셔 서 보턴을 누르기만 하면 그에 따라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Computer와 같은 존재로 만드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 없는 기계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를 가진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과 자연법칙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손가락을 자르 고 새 손가락이 돋아나는 기적을 바란다고 해서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 과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자신의 본성을 좇아 하나님의 능력이 제한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몹시도 존경하시기 때문에 행동에 대한 인간 자신의 결 정에 반대하면서까지 인간의 의지를 지배하시려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가령, 내 생각대로 어떤 것을 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기로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 리들 생각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십니다. 하나님은 이 정도까지 우리 인간의 독립성을 존경하십니 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충고하시고, 우리를 지도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를 일깨워 주 시지만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하나님의 기적의 능력은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바라볼 때 기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마음에 명심해야 합니다. 기적은 우리 삶 속에 움직이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역사입니다. 그렇게 볼 때 지금도 우리 생활 주변에 매일매일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제 가정에서 자라는 손자 애들이 이제는 제법 자기 의사 표시를 합니다. 한번은 한사코 자동 차를 운전하겠다고 야단을 쳐서 제 앞에 앉히고 운전대를 잡혔습니다. 내가 운전대를 잡은 것을 알면 비키라고 자기가 운전한다고 해서 그러라고 하고는 그 애가 모르게 운전대의 한 부분을 제 가 잡고 운전을 해 나아가면서 커브도 틀고 정확하게 주차선에 들이대고 아주 기분이 좋아서 할 아버지, 나 혼자서도 운전 잘 하지? 하고 말하기에 나는 오냐, 참 잘 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내 손이 항상 운전대 밑부분에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위기에서 구원되었 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르게 인생의 운전대 밑에 그 분의 손을 넣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기적을 헤아리세요.
능숙한 기적의 발견자가 되세요. 그렇게 되면 우리 생애에서 매일매일 감격을 금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매일매일 수를 셀 수 없을 정도 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우리 삶 속 에서 그 기적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기적은 매일매일 일어나는데 문제는 그 기적을 찾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물 론 찾기 쉬운 기적도 있습니다. 교통 사고가 나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에 어느 한 분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것은 기적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행운이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은 그것을 우연이라고 부르지 않고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나의 평생이란 말은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내 생애의 매일매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게 나타나게 될 것이 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으로 이 지상에 사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하나님께서 우리 를 위해서 아름다운 일을 행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우리 속에서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할지 모르지마는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이 하나 님의 행하심을 무효화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매일매일 수없이 많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만이 그들의 삶 속에서 그 기적을 찾을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적들을 왜 우리는 보지 못하고 찾지 못합니까? 혹시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병에서 놓여나 회복이 되어 퇴 원하실 시간이 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병원에서 나오는 순간 사람들이나 하늘이 나 나무나 꽃이 다르게 보입니다. 우리가 입원할 때 영원히 피고 있던 꽃이라고 해도 그 꽃이 피는 모습을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주의 깊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그렇게 주의 깊 게 바라보지를 못했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볼 수 없도록 우리의 눈을 가립니까? 그것은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 우리의 공포, 염려, 근심, 걱정 같은 것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편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안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이상 꽃이 피는 것도 보지 못하고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적 을 발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도록 삶의 매일매일의 문제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응을 하게끔 우 리 자신을 방임해 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수많은 기적이 매일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우연한 만남, 예기치 않은 일 중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나와 더불어 어떤 일을 하시기로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둘이 모여야 가정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혼자서 기적을 이루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이 하시는 일에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긍정적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기적을 이루려면 둘이 필요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사도 바울은 농사하는 일을 예로 들어 이야기했습니다. 농사는 한 마디로 기적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심고 물을 주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고 합니다. 그러나 자라나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농사도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해주셔야 합니다.
둘이 모여야 기적을 이룹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적을 찾을 수 있습니까? 기적을 찾기 원하시면 우리의 삶 속에서 산을 찾으 십시오.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를 찾으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 리에게 이르시는 일단계적인 방법이 고통의 순간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수고함이 없이는 얻는 것도 없습니다. 모든 문제는 자체 내에 많은 기회를 잔뜩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분명히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그것이 바로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산 속으로 뛰어들게 하십니까? 우리가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 나가다가 곤란에 빠지는 일이 생기지 아니하도록 우리를 막기 위해서 산이 앞을 가로막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적지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산이 거기에 있다면, 그 산은 참으로 기적으로 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면 어떤 문제도, 어떤 산도 기적으 로 변화시킬 수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기적을 이룹니까? 문제에 매달리는 일을 그만두고 기적을 찾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우리의 믿음의 눈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아마 우리 생애에서 가장 큰 기적이 지금 당 장 일어날는지도 모릅니다. 믿음이 그렇게 소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 속에 들어오 셔서 우리에게 믿음의 눈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다 안 된다고, 못한다고 해 도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 고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는 신념과 확신이 필요합니다. 지금 중국 북경에서는 아시아 경기대회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마는 지난 주간에 여자탁구전을 보면서 우리 대표 현정화 선수가 잘 싸워 나가다가 상대방 중국 선수의 정신력에 눌리니까 모래 성처럼 무너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할 수 있거든 이란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하신 말 씀은 정말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 기적을 불러일으킵니다. -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1.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의심 말라 하시고 물 길 위를 걸라 하시네할 수 있다 하신 주 할 수 있다 하신 주 ∥: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 2.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나를 바라보시고 능력 준다 하시네 3.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주저 말라 하시고 십자가를 지라 하시네 아무리 어려운 자리에 있어도 희망을 가지고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결코 포기하지는 않 을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역사 학자 찰스 비어드가 은퇴할 때가 되어서 역사를 공부하면서 얻은 위대한 교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역사 를 공부하면서 네 가지를 배웠습니다. 첫째, 신이 어떤 사람을 파멸시키고자 할 때 신은 먼저 그들로 하여금 권력에 미치게 만든다 는 사실이요. 둘째, 하나님의 맷돌은 돌아가지마는 아주 보드랍게 간다는 것이다. 셋째, 꿀벌이 꽃에서 꿀을 도둑질 할 때 그 꽃에는 수정이 되어 열매를 맺게 하는 일이요. 넷째, 충분히 어두 워야만 별을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의미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젊어서 희망이 필요합니다. 나이 들어 늙었을 때에도 역시 희망이 필요합니다. 희망이 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유일의 것입니다. 희망이 없으면 문제들이 생겨서 우리를 가로막 고, 방해하고, 비틀거리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발을 헛디디게 합니다.
희망이 있습니까? 그에 게 있어서 꿈은 뿌리를 내리고 기회는 포착이 되고 문제는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해결되어 마 침내 장애물은 사라집니다. 여기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우리가 어느 감정에 지배를 받느냐?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두려움 대신에 용기, 절망 대신에 희망, 회의 대신에 확신, 미움 대신에 사랑, 의심 대신에 믿음의 감정을 가져야 합 니다. 긍정적인 가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틀림없이 그 마음 속에 아주 진실되고 생동감이 있는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을 목록으로 작성해 보세요. 그렇게 하면 우리 자신이 무엇이 문제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무엇이 문제인가를 알 게 되었다면 정신과 의사에게 갈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 꾸면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내세요. 활동을 함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몰아내세요.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고 말할 때 그 자신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세요. 그 분이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이끄십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겨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으로 가득 채우므로 모든 부정적인 생각이 없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아름다운 일을 계획하고 함께 일하므로 일마다 때마다 기적을 체험하는 감격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고전 3:1-15 / 한경직목사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三·十一)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十六·十八)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三·十五)
작년 十二월 첫 주일 이 장소에서 신앙 동지 三十 명과 함께 처음으로 예배한 후 어느덧 一년이 지난 오늘, 여러분과 같이 一주년을 맞게 되니 실로 격세(隔世)의 감이 불무(不無)합니다. 우선 이 자리가 상당히 변장되었습니다.
그 때는 이 장소의 일우(一隅)에 천리교 제단이 그냥 있었는데 오늘은 그 제단이 없을뿐더러 내부를 일신케 되었고 그 때는 물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되리라는 확신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틀을 세운 것은 사실이나 불과 三十 명 내외였는데 오늘은 이렇게 생각도 못했던 많은 三·八 이북의 교우와 남북 만주에 계시던 교우, 중국 각지, 그리고 일본 각처, 심지어 화태(樺太)에서 온 교우까지 모여 앉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十一장 三十三-三十六절의 말씀대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 판단하시는 것을 가히 측량치 못하며 종적도 가히 찾지 못하겠도다. 주의 마음을 안 자가 누구며 함께 의논한 자가 누구며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얻는 자가 누구뇨. 대개 만물이 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나니 영광은 세세 에 주께 있나이다. 아멘』 할뿐입니다. 실로 과거 一년 간 지내온 일을 생각할 때에 시편 一二七편 一절을 다시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여호와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것이요, 만일 여호와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지키는 자의 깨어 있는 것이 헛것이로다』
과연 하나님의 섭리가 계실 때에 이루지 못하신 것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성취되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이 뜻 깊은 날을 당하여 하나님의 크신 애호를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는 동시에「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제하(題下)에 교회의 본질의 여하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 집은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교회는 우리가 볼 적에 인간적인 듯하나 그것은 실로 신적(神的)인 것입니다. 지상의 교회란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조직하고 사람의 힘으로 성장하고 변체(變體)되고 부흥되는 사람의 기관 같지만, 실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교회는 본래 희랍어로「에클레시아」라고 하여 성별 된 자의 모임이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신부요, 그리스도의 터 위에 건설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 교회를 인간적으로만 본다면, 유대 땅 한 구석의 작은 촌 나사렛의 목수 예수를 중심으로 하고 十여 명의 갈리리의 어부가 모인 이 집단이 어떻게 모든 원수를 이기고 지금까지 생존을 계속하며 온 세계에 두루 전파되고 있습니까? 이는 이 집이 사람의 건이 아니요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인 까닭입니다.
고로 교회는 가견적(可見的)이나 또한 불가견적(不可見的)인 기관입니다. 즉 교회는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는 바, 보이는 부분이란 교파로 나누인 모든 지상의 지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는 외적 형상뿐이고 교회의 실체(實體) 곧 그리스도 위에 터를 잡고 열 두 사도의 초석 위에 건설된 교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이요 우리의 영원한 집인 하늘 나라로서, 여기에는 교파도 없고 국별(國別)도 없고 인종별도 없습니다. 세기를 통하여 모든 성도와 성남성녀, 산 자와 이미 세상을 떠난 자가 다 같이 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새 예루살렘이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마치 복국에서 떠내려오는 빙산의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큰 것 같이,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이 본질적인 것이요, 지상의 교회는 이 불가견적인 영원한 것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이는 이 지상의 교회는 흠도 있고 부패도 있고 분열도 있으나, 불가견적인 영적 교회는 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엡 五·二十七)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이 비록 약한 것이나 세상에 있을 동안 벗을 수 없는 외부 기관이 되는 것처럼, 이 지상의 현실 교회가 비로 결함이 있으나 이 보이지 않는 실체 교회와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고 보이지 않는 실체 교회는 외양으로는 약한 듯하나 실상은 강합니다. 이 기관에 군대는 없지마는, 과거 二천 년에 나라는 흥하고 쇠하기를 여러 번 거듭했으나, 교회는 여전히 꾸준한 성장과 발전을 해왔습니다. 교회에 대한 원수가 없는 것이 아니나, 그럴수록 더욱 더 커져 갔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태생 때부터 유대인들의 핍박은 말할 것 없고, 당시 세계를 통치하던 로마 제국의 기독교에 대한 불과 피의 압박은 교회로 하여금 죽음의 투쟁을 전개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투쟁의 결과는 로마 제국의 항복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주후 六세기 이후부터는 복구의 만족(蠻族)이 유럽 문명을 유인하기 시작했습니다마는, 그들도 결국 교회에게 항복, 교화되었고 근대에 이르러 독일의 나치스, 일본의 신도주의(神道主義)가 다 교회를 박멸하려 했으나, 저들은 망했고 교회는 여전히 발전했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하신 주의 말씀이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과거 二천 년 역사의 산 경험을 통하여 오늘의 유물주의와 반(反) 기독 사상도 멀지 않아 전멸될 것을 분명히 압니다. 과연 하나님의 경고한 터는 서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를 생각해 볼 때에 교회는 아주 타세계적(他世界的)인 듯하나 실상은 가장 현실적인 것입니다. 내세를 말하고 천당을 말하니까 타세계적인 듯 생각도 되지만, 그러나 내세의 구원은 현실에서 시작됩니다.
교회가 서 있는 곳에 개인의 중생과 구원이 있으니 이 개인적 구원이 점차로 사회적(社會的) 중생과 개혁에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서는 곳에 사회의 정치, 경제, 문호, 도덕, 각 방면에 새로운 부흥과 정화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교회는 건전한 국가의 초석이 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북미주 황야에다 청교도들이 세운 교회 없이 어찌 오늘의 미국의 부강(富强)을 몽상할 수 있습니까?
교회야말로 국가의 정신적 간성(干城)이며 황야에 헤매는 대중을 인도하는 진리의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며 암야(暗夜)의 행로를 밝히는 광명 한 등대이며, 거친 세해(世海), 죄악의 파도에 빠져 죽어 가는 인생들의 구원 선이며, 피곤한 자의 안식처이며, 수난자의 피난처입니다. 교회야말로 인간의 최고 이상의 상징이니 여기서 인간은 인간 이상의 존재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해방 받은 즉시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四十 년이란 긴 세월을 황야에서 헤맸습니다. 거기는 문자 그대로 거칠고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황야가 아무리 황폐했으나 거기는 시내산이 있었으니 시내산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찾았고 장래 국가의 기초가 될 계명과 모든 율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우리 대한이 일본 제국주의의 철사에서 벗어난 지 벌써 一년 유 여에 아직도 완전한 독립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황폐한 기간에 시내산을 찾아야겠습니다.
영적 시내산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을 찾고 그의 모든 계명과 율법을 배워 새 나라의 국민이 될 정신적, 도덕적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과도기를 지나가는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사명이요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교회
고전 3:1-3, 12:26-31 / 이동원목사
정반합(正反合)이란 말이 있습니다. 본래 이 단어는 철학 용어로서 사전적인 정의에 의하면 하나의 주장(정, 테제)과 그 반대되는 주장(반, 안티테제)과의 갈등을 통해 새로운 합이 창출된다는 것입니다. 본래 철학자 헤겔의 변증법을 도식화한 것으로 헤겔 본인에 의해서는 사용된 적이 없지만 헤겔 이후 그의 논리학을 해설하는 과정에서 붙여진 용어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사회 발전을 해석하는 매우 보편적인 패러다임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저는 오늘의 한국 사회의 갈등도 이런 틀로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한동안 우익 이데올로기 일변도였던 우리 사회가 최근에는 때 늦게 제기된 좌익 이데올로기로 갈등하면서 이제 새로운 합일을 찾기 위한 교차로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같은 패러다임을 우리의 신앙 발전 과정에도 적용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발전하면 우리의 감성의 영역이 빈곤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반작용으로 우리는 매우 극단적인 신비 신앙에 몰두하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의 신앙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만 발전하면 이성적인 판단이 결여되어 매우 비이성적인 신앙의 모습으로 기울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가지 대립적인 신앙의 형성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이성과 감성을 통합하는 보다 인격적인 신앙의 합일을 이루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됩니다.
초대 교회중 이런 두가지 극단의 신앙의 성향으로 갈등하고 있었던 교회가 고린도 교회이었습니다. 세속주의가 고린도 도시의 삶의 스타일이었다면 이 도시에서 기독교 신앙을 수용한 고린도 교회의 신앙 스타일은 신비주의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의 신앙인들은 누구나 세속주의와 신비주의라는 두개의 극단적 삶의 스타일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 당시 “고린도인처럼 산다”는 말은 도덕적인 기준을 포기한채로 매우 세속적인 죄에 몰두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무역항을 끼고 발전하던 상업도시로서와 로마의 검투 경기를 수용한 스포츠 오락도시의 영향으로 고린도 시민들은 황금과 오락에 빠져 죄의 안락한 심연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주후 50년경 그의 제2차 전도여행중 이 도시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유대인 회당과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을 중심으로 전도하던 그의 선교의 결실로 드디어 고린도 교회가 탄생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다음 선교지 에베소로 떠난 후 고린도 도시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인 교인들 가운데 더러는 교회 안에 들어왔지만 여전히 세속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부도덕에 빠져 들게 되었고, 더러는 죄에 빠지는 대신 신앙의 황홀한 감정에 몰두하는 신비적인 신앙을 형성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극단을 벗어나 건강한 신앙을 형성하도록 권면할 필요를 느껴 붓을 듭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서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고린도 교회에서 배워야 할 건강한 교회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1. 성령의 역동이 있는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사모했습니다. 그것은 잘한 일이고 당연히 그래야만 했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성령의 깊은 은혜속으로 나아가고 싶은 영적 욕구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거듭난 성도들의 지극히 자연스런 욕구라고 믿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런 욕구를 가지고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고 있던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고린도 전서12장에서 14장까지 무려 3장에 걸쳐 성령의 은사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의 바울의 권면은 대체로 한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영적인 일에 대하여 무지한 성도가 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라는 것이고, 셋째는 그러나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들일수록 교회안에서 덕과 질서를 세우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권면은 신령한 일에 대하여 무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전12:1의 말씀이 어떻게 시작되고 있습니까?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말합니다. 3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예수를 주로 믿고 고백하게 된 것 자체가 성령의 역사이었다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예수를 만난 우리가 성령에 관심을 갖고 성령의 은사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바울은 그래서 둘째 권면으로 그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가르칩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을 열거한 다음 본문 고전12:31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가르칩니다. 고전14:1에서도 “사랑을 추구하되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고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이어서 셋째 권면으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일수록 교회의 덕과 질서를 세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저는 지난 13년이상의 우리 교회 사역에서 우리의 신앙의 기초인 말씀사역을 충분히 다져 왔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조심스럽게 성령사역에 대하여도 사역의 지평선을 넓혀갈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몇주 전에 있었던 특별 심야 기도회도 그런 의도를 가지고 기획된 집회이었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성령에 대하여 목마르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우리 교회 안에서도 성령의 생수를 깊이 마시고 춤추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가지 중요한 우리 공동체의 윤리적 약속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은사추구는 철저하게 교회의 덕과 질서를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시대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성령 사역을 오픈하다 보면 교회내에서 영적 지도를 받으며 건강하게 은사를 추구하기보다 교인들을 데리고 무분별하게 여기 저기 은사집회를 돌아다니며 가정을 등한히 하고 자기가 속한 교회를 세우지 못하는 철없는 성도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고전14장 전체를 통하여 두가지 단어를 반복합니다. 덕을 세우라고 질서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운동이 비윤리적 운동으로 오해받지 않고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건강운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꿈꾸는 교회-그것은 성령의 역동이 있는 교회입니다.
2. 성숙을 필요로 하는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배우는 건강 교회의 두 번째 레슨은 무엇보다 우리 교회가 성숙한 교회가 되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들을 추구하는 남다른 열정을 가진 교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가 영적으로 미성숙한 교회, 따라서 더 자라가야 할 교회라고 진단합니다. 우리의 영적 성숙의 가장 현저한 표지는 남을 배려하고 공동체를 세울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는 이런 것들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조금 은사를 경험하고 받았다고 해서 안하무인처럼 행동하는 성도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특별히 방언의 은사를 체험한 성도들에게서 그런 모습들이 보인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고전14:19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은 결코 방언을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는 고전14:39에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은 은사중의 하나일 뿐이고 방언을 하는 것이 결코 영적 우월감의 표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12:30에서 사도는 어떻게 말합니까?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우리는 서로의 은사의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서로를 정중하게 배려하고 사역할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성숙인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성령을 사모하고 은사를 사모하는 교회이면서도 영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이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으로 자라나지 못한 성도들이 많은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고전3장에서 육신에 속한 자들이요 영적 어린 아이들이라고 말합니다. 영적 아이들의 가장 현저한 삶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아이들이 모여서 서로 어울릴 때 제일 많이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서로 싸우는 일입니다. 바울사도는 영적 성숙이 지체된 성도들의 모임에서 제일 두드러지게 관찰되는 현상이 바로 시기와 질투라고 지적합니다. 그것은 누구를 지도자로 따를 것인가? 혹은 누구의 은사가 더 우월한가? 따위의 이슈들이었습니다. 자, 고전 3:1을 보실까요?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3절에서는 이런 아이됨 혹은 육신성의 특성을 어떻게 지적합니까?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그래서 우리는 자라가야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자라갈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하는 것이 자라가는 것입니까?
3.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고린도 전서 12장을 가리켜 우리는 흔히 은사장이라고 부릅니다. 이 은사장이 어떤 교훈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까? 3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12-14장에 이르는 영적 은사의 교훈에서 바울 사도가 가장 여러 구절을 통해 다룬 은사는 방언의 은사였습니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내에서 고린도 성도들이 가장 귀하게 여겼던 은사가 방언의 은사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또한 그 만큼 방언의 은사를 둘러싸고 성도들 사이에 논난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방언에만 관심을 고착시키지 말고 더욱 큰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은사문제에 있어서 무엇보다 관심을 가지고 추구해야 할 가장 좋은 길을 추구하라고 촉구합니다. 이 제일 좋은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12장 다음이 어디로 연결되는 가를 주목하시면 됩니다. 13장-사랑 장이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은 가장 좋은 길, 가장 귀한 은사요 우리 모두가 그 무엇보다 먼저 추구할 것입니다. 고전 13장에 이어 연결되는 14장 1절이 무슨 말씀이었습니까? “사랑을 추구하며--”입니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는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행전18:7-8을 보십시오.“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침례)를 받더라”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하여 유대인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했을때 복음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회당 바로 옆에 있던 디도 유스도의 집에 초청하여 거기서 회당장과 여러 사람들이 마침내 예수를 믿고 고린도 교회는 태어난 것입니다. 유스도에 집에 모여 서로 몸을 부딪치며 복음을 이야기하고 함께 찬양하던 바로 그곳이 고린도 교회 탄생의 요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기독교 공동체가 그런 것처럼 회심자의 숫자가 많아지고 집에서 모이던 교회의 분위기를 상실하면서 고린도 교회는 급속히 사랑을 잃고 논쟁하는 교회로 분위기가 변질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 사랑의 요람으로 돌아가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주일 모임뿐 아니라 목장 교회를 강조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닙니다. 사랑은 동사입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의 장을 가질때 비로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12명 미만의 사람이 작은 교회로 모여 서로를 돌보고 그리고 구체적인 선교와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우리의 이웃들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사랑을 실천하는 일-그것은 방언보다 더 귀하고, 예언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랑을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신 주님은 이 사랑을 나눔을 위하여 우리로 공동체로 살라고 우리를 한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지체의 삶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다시 본문 12:26을 보십시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교회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의 본질인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의 말은 얼마나 진리입니까? “본질적인 것에 일치를, 비 본질적인 것에는 관용을, 그리고 모든 것에 사랑을!” 바울 사도의 고린도 교회에 대한 결론적 교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고전16:14입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입니다.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톤의 전기 작가가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그가 사역했던 곳들과 사람들을 만나 그가 거기서 무슨 설교를 했는지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이 작가가 가장 많이 들어야 했던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그가 무슨 설교를 했는지,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잘 기억 못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는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 우리 교회의 모습이 될 수 없을까요?
교회 안의 세상적인 사람
고전 3:1-4 / 지용수목사
사람은 자신의 기쁨을 위해, 즐거움을 위해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술집에도, 극장에도, 오락실에도, 댄스홀에도, 죄짓는 곳에도 갑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갔다가 후회하기도 하고 망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돈이 많으면 갈 곳도 많고 할 일도 많지만, 가보고 해 보아도 별 것, 별 데가 없습니다. 인생의 참 즐거움이 있는 곳이 없습니다. 바닷물은 마실 때는 시원해도 마시고 나면 더 목마릅니다. 세상에서는 아무리 찾아가서 누려 보아도 목마르고 결국 죽게 됩니다. 오직 교회에 참된 기쁨, 참된 즐거움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루 와도 좋고, 백 번 와도 좋고, 억 만 번 와도 좋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잘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큰 생명의 강수, 은혜의 샘으로 축복하실 것을 믿습니다.
저는 목사 고시 공부를 고등 고시 공부하듯 했습니다. 문을 닫아 걸고 목숨을 걸다시피 목사 고시 공부를 했습니다. 1등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목사 고시에 1등 하려고 고등 고시 공부하듯이 했는데, 합격자 발표만 하고 1등이 누구인지 2등이 누구인지는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금 섭섭했습니다. 그러나 1등을 하려고 열심히 공부했으니 불합격할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목사 고시에 4수, 5수를 하는 분도 계시는데, 저는 한 번만에 합격했습니다. 그러나 목회는 몰랐습니다. 제직회를 어떻게 하는지, 당회를 어떻게 하는지 몰랐습니다. 심방은 저희 교회의 목사님이 심방 오시는 것을 보아서 알았지만, 할 줄은 몰랐습니다. 첫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해 갔는데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 교회에 훌륭한 장로님, 참 귀한 장로님 여섯 분이 계셨는데, 그 장로님들에게 배워 가며 목회를 했습니다. 제직회 하기 전에 장로님께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장로님, 제직회는 어떻게 합니까? 순서는 어떻습니까?"
장로님들이 제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렇게 그 교회에서 4년 동안 목회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너무 큰 은혜를 주셔서 교회도 많이 부흥했고 또 교우들도 축복을 많이 받았고 사랑이 넘쳤습니다.
그러다가 양곡교회로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양곡교회에 오기가 싫었습니다. 제게 양곡교회의 첫인상이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제 아내의 가슴에 불이 타오르게 하셨습니다.
"아! 이곳은 할 일이 많은 곳이구나."
아내를 통해 제게 주시는 말씀이 하나님 말씀 같아서 제가 양곡교회로 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결정했으니 그 교회를 그냥 떠나오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이 제발 가지 말아 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어떤 교우는 사과 밑에 편지를 넣어서 보내고, 또 저희 아이들 이름을 부르면서….
정이 정말 무섭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거기서 떠나올 때 교우들도 울었지만 저도 얼마나 울었는지, 여기에 도착할 때까지 눈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4년 간 정들었던 교우들을 떠나오는 것이 얼마나 슬프고 마음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다시는 교회를 옮기지 않게 해 주세요. 다시는 천국에 갈 때까지 목회지를 옮기지 않고 목회하게 해 주세요.'
그때 양곡교회가 좋아서 그런 기도를 했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때 우리 양곡교회는 너무나 초라했었습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 모습의 절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왔었습니다.
어쨌든 성도를 떠나는 것은 아픈 일입니다.
제가 그 교회를 떠나 우리 교회에 와서 목회를 하면서도 3년 간은 그 교회 장로님들의 이름, 집사님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계속 기도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기도하지 못하고, 그저 매일 교회 이름을 부르면서 교회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를 떠나온 지 20년이 되었습니다. 햇수로는 21년째입니다. 그래도 저는 그 교회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교우들의 사랑을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떠난 지 5년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러니 교우들이 얼마나 그립고 그 사랑이 얼마나 넘쳤겠습니까?
그래서 1장 10절에도 '형제들아' 11절에도 '형제들아' 26절에도 '형제들아' 2장 1절에도 '형제들아' 3장 1절에도 '형제들아' 4장 6절에도 '형제들아' 라고 부릅니다. 하늘에 별이 수놓아지듯이 16장까지 그저 "형제들아! 형제들아!"하고 부릅니다. 바울의 마음에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랑이 막 흘러 넘쳤기 때문입니다.
왜 형제입니까?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 아버지의 한 형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도 하나님 아버지 한 분 아래 모인 형제들입니다.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여 친구들이여」
우리는 싸우면 안 됩니다. 시기 질투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입니다.
「얼굴은 달라도 하나님의 자녀 생각은 달라도 하나님의 자녀 다같이 믿는 하나님의 자녀」
우리는 다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끼리 미워하고 시기하면 아픈 일이고 남들이 웃을 일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끼리만 형제가 아닙니다. 피부가 달라도, 얼굴이 희든 검든 붉든 상관없습니다. 제가 호주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으니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서로 한 가족애를 느낍니다. 할렐루야!
참 신비롭습니다. 어디에 가도 십자가가 있는 교회를 보면 좋습니다.
이번에 시드니에서 그 교회 목사님께 제가 여쭈었습니다.
"호주인들의 교회는 좀 크지 않아요?"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도 있어요. 얼마나 뜨거운지 거기서 복음 찬송이 다 나와요."
그 말씀을 들으니 기뻤습니다. 호주인들의 교회가 잘 되어도 제가 기쁜 것은 모든 교회가 다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잘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호주에 가서 다섯 개 교회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는데, 대표 기도하는 분들마다 빠뜨리지 않고 드리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축복하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왜 그분들이 그런 기도를 드립니까? 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나라에 사니 나라의 소중함을 모를 것입니다. 나라를 떠나 보면 알게 됩니다. 호주인들이 기분 나쁘면 우리 교민들에게 "돌아가라!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라고 한답니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얼마나 서럽겠습니까? 서럽지만 꾹 참는답니다. 참지 않고 싸우겠습니까?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지구촌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 아니냐?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이니 이 호주는 내 땅이다."
모두 제 말을 듣고 기분 좋아했습니다.
제가 "호주는 내 땅이다! 우리 땅이다!"라고 복창하게 했더니, 얼마나 크게 외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호주 사람 앞에 가서 일부러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자리 잡고 사는 우리 교민들에게도 서러운 일이 많습니다. 미국에 사시는 의사이신 우리 나라 장로님 한 분이 자동차를 타고 달리다가 다른 자동차와 부딪쳤습니다. 쌍방 과실로 접촉 사고가 일어났는데, 미국인(백인)이 차에서 내리더니 "너희 나라로 돌아가! 왜 남의 땅에 와서 이렇게 성가시게 해. 너희 나라로 돌아가!"하며 화를 냈습니다. 그때 우리 장로님이 말했습니다.
"너도 너희 나라로 돌아가! 이게 어디 너희 나라냐?"
미국인이 놀라며 물었습니다.
"아니, 내 나라가 아니라니?"
"이 나라가 어찌 너희 나라냐? 인디언 나라지. 너희는 늦게 오지 않았느냐? 너도 너희 나라로 돌아가!"
그러자 미국인이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갔답니다.
사실 백인들보다 우리가 인디언과 더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뿌리를 찾으면 모든 땅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도 우리 교민들에게 설움이 많습니다. 우리가 잘 되어야 호주나 미국에 있는 우리 교민들이 대접을 받습니다. 우리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민들을 위해서도 잘 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이것을 아니, "우리 조국을 축복하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나라를 사랑합시다. 나라를 위해서 세금도 많이 내고, 손해도 좀 봅시다. 호주에서는 천만 원 정도 벌면 480만 원 정도의 세금을 냅니다. 나만 백억을 갖고 있으면 무엇합니까? 먹고살고 아이들 교육시키며 살면 되지 않습니까? 나라가 강하고 부유해야 우리도 빛이 나고 해외 교민들도 떳떳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니 고린도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고린도 교회가 잘 되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이 세운 교회가 많았는데, 제일 걱정이 되는 교회가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여러분은 제게 걱정거리 교인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제게 걱정을 주는 장로님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걱정이 되는 권사님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보면 그저 반갑고 자랑스러운 장로님, 권사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자랑했습니다.
'나의 면류관! 나의 면류관!'
데살로니가 교회를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자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걱정이 되었습니다.
왜입니까? 신앙이 자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린도 교회에도 훌륭한 교인, 성숙한 교인들이 많았지만, 어린 교인들이 더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육신에 속한 자'는 성령을 받지 못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2장 14절의 '육에 속한 사람'은 'The man without the Spirit, 성령이 없는 자, 중생하지 못한 자, 예수를 모르는 자, 불신자, 지옥 갈 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육신에 속한 자'는 천국 갈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았고,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어린 자들입니다. 신앙이 어려서 개구쟁이 짓을 하고 시기 질투하고 다투며 단단한 것은 먹지 못하고 젖만 먹는, 조금이라도 책망하는 설교는 듣지 못하고 복된 말씀만 듣는 어린 신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자라야 할 때는 자라는 것이 기쁨입니다.
신앙은 팍팍 자랍니다. 우리 육신의 키는 남자는 25년 간 자라고 여자는 20년 간 자랍니다. 저는 군에 가서 얼마나 자랐는지 모릅니다. 제가 입대할 때는 키가 참 작았는데 제대할 때는 얼마나 컸는지 아십니까? 5cm 자랐습니다. 제가 공부하면서 바쁘게 살다 보니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군에 가서 실컷 자고 잘 먹었더니 그렇게 자란 것입니다.
사람의 육신의 키가 자라는 데는 이렇게 20년, 25년이 걸리지만, 영적인 키는 4년 동안 자라면 거의 다 자랍니다. 물론 계속해서 성숙해지고 다듬어지고 성화되지만, 4년 간 자라면 거의 다 자라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3년 만에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교육받고 불 세례를 받으니 3년 만에 사도가 되고 교회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예수를 믿은 지 4년이 되었는데 아직 집사님도 되지 못하고, 전도도 제대로 못하고 새 신자와 똑같은 분이 계십니까? 그런 분은 답답한 신자입니다. 태어나서 4년째 생일을 맞이했는데도 기지도 못하고 계속 누워만 있다면 그 자녀는 부모에게 부담이 되는 자녀입니다. 그래도 부모는 그 자녀를 버리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지 못하면 하나님께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우리가 죽죽 자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신앙이 자란 신자는 교회를 돕습니다. 갓난아기는 비행기에서도 소리를 지르고, 식당에서도 소리를 지릅니다. 남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른은 남을 생각합니다. 신앙이 어린 사람은 자기 성질대로 싸우고 시기하고 문제를 일으키지만,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해서 교회를 편안하게 합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어린아이는 돈을 쓰기만 하고 벌지 못합니다. 장성해야 취직도 하고 사업도 해서 돈을 벌어 가정을 둡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성도는 남의 도움만 받습니다. 남을 위해 기도할 줄도 모르고 남을 돌보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라면 전도도 하고, 구역장 교사 성가대원 안내위원으로 봉사도 하고 남을 돕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 가운데 하나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할렐루야!
우리가 전도 열매, 풍성한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29절에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할렐루야!
우리의 신앙이 자라지 않으면 구원은 받았지만, 얻어지는 복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죽 자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다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브리스번의 홍요셉 목사님께 들은 간증입니다. 목사님의 눈이 너무 많이 상해 성경도 제대로 읽지 못하셨답니다. 목사님의 눈이 나빠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하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답니다.
"하나님! 제 눈을 좀 재창조해 주세요…."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에 주셔서 두 눈의 시력이 다 1.5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안경을 벗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홍 목사님이 전도를 참 많이 하십니다. 그리고 얼마나 겸손하신지 모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 눈을 치료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성장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경제가 성장하면 사람들이 달라집니다. 증권가에서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만 보아도 시세가 올라갔는지 내려갔는지를 알 수 있답니다. 시세가 올라간 날은 사람들의 걸음이 가뿐가뿐하고 눈이 빛난답니다. 그런데 시세가 떨어지면 풀이 죽어 걸음도 축 처진답니다.
제가 지난번에 일본 갔을 때 일본 사람들이 다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호텔에서나 백화점에서나 거리에서나 밝게 웃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얼굴이 어두웠습니다. 오래 전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그들이 활기찼던 것을 기억하고 도쿄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께 물었더니, 일본 경제가 곤두박질쳐서 형편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지난 10월, 11월 때처럼 회사 문을 많이 닫은 적이 이때까지 없었답니다. 실직자가 사상 최대로 많답니다. 그러니 회사의 근로자들이 회사를 살리기 위해 의논해서 스스로 월급을 인하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특별히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 중에 정신병자가 그렇게 많답니다. 한창 공부할 아이들이 마약하고 되는 대로 막 사니 부모들이 아이들을 생각하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회사를 생각해도 답답하고 아이들을 생각해도 답답하니 풀이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터를 생각해도 신바람 나고 자녀를 생각해도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경제도 성장하고 자녀도 성장해야 됩니다. 부부간의 사랑도 성장해야 됩니다. 신혼 여행이 얼마나 좋습니까? 물론 신혼 때도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번에 호주에 갈 때 공항에서 신혼 부부가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혼 여행 가면서 싸웠습니다. 하기야 라스베가스에서는 결혼식장 앞에서 신부가 웨딩 드레스를 입은 채 신랑과 싸우는 것도 보았습니다. 웨딩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신랑이 다 담배를 입에 물고 막 싸웠습니다.
그러나 대개 신혼 부부 때는 좋지 않습니까? 그 신혼의 사랑도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저희는 신혼 때보다 지금이 더 좋습니다. 저는 결혼하고 3일간은 좋았는데 3일 후부터 후회했고, 11년 동안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다 11년째부터 올라가기 시작해서 지금은 극에 달해 아내가 부엌에 있어도 같이 있고 싶을 정도로 제 아내를 좋아합니다. 제가 제 아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비행기 타도 아내의 손을 쓱 잡습니다. 제 아내도 가끔 제 손을 잡아 줍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부간의 사랑도 성장해야 합니다.
미국 중서부에 태풍이 불어 한 외딴 집의 지붕이 날아갔습니다. 이불도 날아갔습니다. 부부가 놀라서 일어나니 침대도 날아가고 있습니다. 그때 부인이 막 울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니오. 정신차려! 지금은 울 때가 아니야."
"너무 막막해서 우는 것이 아니예요. 기가 막혀서 우는 것이 아니예요. 너무 기뻐서 우는 거예요."
"지붕이 날아가고 침대가 날아가고 있는데 뭐가 기뻐?"
"당신과 외출하는 것이 처음이라, 20년 만에 이렇게 당신과 외출하니 감격해서 우는 거예요."
남편이 아내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었으면 지붕이 날아가도 남편과 같이 외출하니 좋다고 하겠습니까? 슬픈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부부간에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아내를 여러분이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사랑해 주겠습니까? 여러분의 아내를 여러분이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사랑해 주어야 됩니까? 여러분의 남편을 여러분이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사랑해 주어야 됩니까?
부부간의 사랑도 성장하고 모든 것이 성장해야 됩니다.
그러나 경제 성장, 자녀 성장, 부부 사랑의 성장보다 더 큰 성장, 더 복 있는 성장은 영적인 성장입니다.
세상의 성장은 성장해 보았자 땅에서 끝나고 말지만, 영적인 성장은 하늘에 상달됩니다. 하나님의 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장합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 안의 어린아이로 있지 않고 성장합니까?
젖을 떼야 됩니다.
아브라함이 낳은 이삭이 잘 자라 젖을 떼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창세기 21:8)
아브라함은 이삭이 젖을 떼자 "이제는 젖을 뗐다. 우리 이삭이 젖을 떼고 이제는 단단한 음식을 먹게 되었다."하며 잔지를 벌였습니다.
젖은 영양이 풍부해도 맛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우리 나이가 60이 되고 80이 되어도 매일 우유만 먹으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국수도 먹고, 비빔밥도 먹고, 피자도 먹고, 떡도 먹고, 쌈도 먹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교회에 쌈을 특별히 좋아하시는 집사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파란 채소에 쌀밥을 놓고 참기름으로 갠 된장을 얹은 다음 말아서 입에 넣으면 꿀꺽 넘어갈 때 그 맛이 천당입니다."
그 맛이 얼마나 좋은지 천당이랍니다.
그러나 아기는 기가 막히는 그 쌈도 먹지 못합니다. 쌈을 싸서 아기 입에 넣으면 아기가 죽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 먹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10년 믿었어도 신앙이 어린 사람은 쌈을 먹지 못하고 밥을 먹지 못하고 단단한 것을 먹지 못합니다. 신앙이 자라야 밥도 즐기고 교회의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성장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장하기를 바라십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자라지 않기를 바라겠습니까? 모든 부모는 자식이 쑥쑥 자라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성령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났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한복음 1:12-13)
예수를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아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라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라지 않고 계속 그냥 있으면 하나님께서 걱정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가 왜 자라지 않느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8절은 베드로전후서의 결론과 같은 말씀인데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합시다.
"자라 가라. 자라 가라. 자라 가라."
자라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라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 우리가 성장하려면 '나는 자라리라!'하고 각오해야 합니다.
학생이 편안한 마음으로 그냥 공부하면 절대로 일등하지 못합니다. '나는 이 학교에서 일등 하리라! 나는 일등 한다!'라고 작정한 아이가 일등을 합니다. 그렇게 작정한 아이는 이등을 하면 통곡을 합니다. 이등도 잘 한 것인데 막 웁니다. 그래서 결국 일등을 합니다.
모든 일에 일등 하려면 각오를 해야 됩니다.
미국의 저명한 은행의 은행장인 다우링이 상이 용사들의 초청을 받아 특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특강을 하면서 상이용사들을 막 공격했습니다.
"당신들은 패배주의자들, 남을 의지하고 국가의 연금을 축내며 되는 대로 먹고 마시며 놀기만 하는 나쁜 사람들입니다. 왜 열심히 일하지 않고 자꾸 의지하려고만 …."
나라를 위해 싸우다 부상당한 상이 용사들을 면전에서 그렇게 공격하니 그들이 화가 나서 그에게 맥주병과 재떨이를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당신들이 잘못하고 있고, 당신들의 자세가 잘못된 것입니다."라고 계속해서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상이 용사들이 미친 듯이 일어섰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한쪽 옷소매를 걷어올렸습니다. 쇠갈고리가 나왔습니다. 다른 소매도 걷어올렸습니다. 양팔 모두 가짜 팔이었습니다. 그는 바지도 걷어올렸습니다. 양다리도 다 나무다리였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습니다.
"여러분, 나는 열두 살 때 교통 사고를 당했는데, 눈 위에 10시간 동안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 바람에 두 팔과 두 다리를 다 잘라야만 했습니다. 나는 열두 살에 두 팔과 두 다리를 다 잃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의욕을 갖고 '이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리라. 남에게 신세지지 않고 살리라. 나는 성공하리라.'라고 각오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서 이렇게 은행장이 되었습니다. 양팔과 양다리가 없는 나도 노력해서 은행장이 되었는데 당신들은 나보다 낫지 않습니까? 왜 그냥 먹고 놀기만 합니까?"
모든 상이 용사들이 유구무언이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악조건에 있어도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것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우리 양곡교회가 아주 초라할 때도 저는 세계의 전도 챔피언, 말씀 챔피언의 꿈을 갖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 이만큼 들어 쓰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냥 편안하게 목회하면 하나님께서 들어 쓰지 않으십니다.
편안하게 신앙 생활하면 챔피언 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테니스든 골프든 야구든 축구든 취미로 해서 챔피언이 됩니까? 힘들고 어려워도 '나는 골프 챔피언이 되리라. 챔피언이 되고 말리라.'하는 각오로 해야 챔피언이 되는 것입니다.
김미현은 땅콩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키가 작습니다. 미국의 호텔에 묵을 돈이 없어 여관에 묵으며, 밥값을 아끼기 위해 전기 밥솥을 몰래 갖고 가서 밥을 해 먹었습니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골프를 했습니다.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골프 챔피언 된다!' 라는 각오를 갖고 골프를 했습니다. 그러니 마침내 챔피언이 된 것입니다.
세상의 일에도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헨리 포드가 말했습니다.
"공중에 수많은 아이디어가 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우리 머리 주위에 막 감돌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몰두하지 않아서 아이디어가 생기지 않지, 자신의 일에 몰두하면 한없는 아이디어가 생긴다."
의미 있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시는 일을 그냥 하시니 그저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잘 하리라!' 마음먹고 나가면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고 주일 지키고 천당 가면 되지.' 하면 평생 그렇게 살다가 가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 내가 전도를 제일 많이 하리라. 우리 교회에서 십일조를 내가 제일 많이 하리라. 나는 예수님의 인격을 닮으리라.'하는 높은 뜻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천만 명을 전도하려는 뜻을 세우고 '하나님, 저를 통해 천만 명을….'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방송과 문서를 통해 전도하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성장하려면 그 다음에는 계획을 세워야 됩니다.
박찬호 선수가 '하루에 천 번의 스윙을 한다. 내 몸을 해치는 술을 절대로 마시지 않는다. 나를 돌아보기 위해 매일 일기를 쓴다. 이 세 가지를 지키지 않으면 나는 절대로 잠을 자지 않는다.'라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때부터 아무리 피곤해도 일기를 쓰고, 아무리 피곤해도 스윙을 천 번 하고, 아무리 운동이 잘 안 되어도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박찬호 선수가 된 것입니다. "박찬호! 박찬호! 박찬호!"하는 선수가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성장하기 위해서는 계획을 세우고 나가야 됩니다.
'나는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한다. 하루에 성경을 몇 장씩 읽는다. 기도는 하루에 몇 시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는다. 나는 무슨 일(구역장, 성가대원, 교사 등)을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나가야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장하고, 말씀을 읽을 때 성장하고, 봉사할 때 성장합니다. 봉사하지 않으면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때때로 우리 부교역자들에게 '교회에 등록한 분에게는 6개월 안에 일할 수 있도록 일감을 찾아 주라'고 말합니다. 성가대원을 하든지, 교사를 하든지, 안내위원을 하든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랍니다.
지금 미국 보스턴에서 공부를 하고 계시는 우리 강 집사님에게서 어제 편지가 왔습니다. 미국에 가신 지 7개월이 되었는데, 편지를 세 장이나 써서 보냈습니다. 그분이 처음 우리 교회에 나왔을 때 저는 그분의 이름도 몰랐습니다. 잘 생긴 신혼 부부가 주일마다 1부 예배를 드리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1년 동안 그렇게 예배만 드리고 그냥 갔습니다. 하루는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그 부부를 제가 불러 세우고 말했습니다.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지요?"
"무슨 일을…"
"성가대원으로 일 좀 해요."
그분이 자기의 일주일 행복은 주일에 늦잠 자는 것이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어차피 1부 예배 드리러 나오니 조금 더 일찍 나와서 부부가 같이 성가대원으로 봉사해요."
목사가 그렇게 말하니 거절하지 못하고, 목사의 말이라도 거절하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만, 그분들은 거절하지 않고 다음 주부터 성가대원으로 봉사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받은 편지에 보니, 그 때부터 고통이 시작되었답니다. 주일마다 일찍 일어나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웠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축복이 되었답니다. 일찍 나와서 기도하고,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면서 기도하다 보니 믿음이 자라고 더 기도하게 되어 회사의 특혜를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것입니다. 미국으로 갈 때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보스턴으로 가게 되어서 제가 이희철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교회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집사님 부부가 그 교회에 가니 마침 40일 특별 새벽기도를 하고 있더랍니다. 유학생이라 새벽기도를 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공부보다 신앙을 우위에 두리라. 신앙을 1위에 두리라.'고 결단하고 부부가 같이 40일 특별 새벽기도회에 나갔답니다. 그 새벽기도회 때 성령의 불을 몇 번이나 체험하고 방언 은사를 받고, 부인 집사님은 오랜 지병을 깨끗하게 치료받았답니다.
지금 그 교회에서 기쁨으로 봉사하고 있으며 공부도 잘 하고 있다며 집사님이 감격해서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그 집사님이 일할 때, 성가대원으로 봉사할 때 성장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오늘 말씀이 하나의 기점이 되어서 많이 자란 분은 더 잘 자라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래 믿었지만 자라지 않은 분, 그리스도 안의 세상적인 사람, 영적인 어린아이는 오늘부터 잘 자라서 3-4년 후에는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사람의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숙하면 우리를 만나는 사람이 우리의 인격을 보고 '아, 예수님은 저런 분이구나! 하나님은 저런 분이구나!'하고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성숙한 교인은 예수님을 보여 주게 됩니다.
그러나 어린 성도는 세상 사람과 비슷해서 5년 동안 같이 생활한 사람에게도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합니다. 그런 교인은 5년간 옆에 있었던 사람에게도 자신이 교인인지 아닌지조차 분별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성숙한 크리스천은 하루를 같이 지내는 사람에게도 주님의 향기를 맡게 할 줄로 믿습니다.
귀한 성직자 한 분이 출장을 갔다 오니 자신이 일생 동안 모아 놓은 귀한 책들이 다 잿더미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집을 도와주는 집사님이 실수하여 서재에 불이 나서 그분의 모든 자료가 잿더미가 된 것입니다. 그분을 보자마자 집사님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하며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분이 집사님의 손을 잡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집사님, 그래도 할렐루야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일생 모은 모든 책과 자료가 다 불타도 평안하게 "할렐루야!"하니 그분에게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면 우리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우리의 이웃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우리는 구한 대로 응답을 받습니다. 하늘에서도 상을 받습니다.
경제 성장, 부부간의 사랑의 성장, 자녀의 성장, 군인의 진급, 회사원의 승진 등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런 일이 많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성장, 최고의 성장은 영적인 성장입니다.
우리와 우리 대한 민국의 모든 성도들,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장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꾼
고전 3:1-9 / 김태복목사
2006년 7월 필립핀 중동부 레이테(Leyte) 섬에서 발생한 대형 산사태로 매몰되어 주택 500여 채와 초등학교 건물이 사라졌고, 동시에 2,000여명의 주민들이 순식간에 죽음을 당하였다는 소식은 매우 가슴이 아프게 합니다. 이 지역에는 최근 10일 동안 2미터 가량의 비가 내린 것으로 집계됐는데 지진으로 산이 무너져 내림으로 어느 지역은 진흙의 깊이가 10미터가 넘는다고 합니다.
2006년도 초반부터 이런 대형 사건들이 터지기 시작하니, 금년도 한 해 동안 세계 모든 곳에서 얼마나 많은 끔찍한 일들이 터질까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 끝에 와 있으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즐길까, 무엇을 소유할까?”에 관심을 가질 때가 아니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주님을 맞이할까?”에 관심을 가질 때입니다.
과연, 마지막 때 끝에 와 있는 탓인지, 많은 교회들과 교역자들, 교회 지도자들이 시험에 들어서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사탄 마귀도 자기의 때가 얼마나 남지 않을 줄 알고 총력을 기우려 시험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므로 우리 교인 모두는 지금까지 잘 가꾸어 온 교회를 더욱 든든히 세워가는 일에 합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2장 10절부터 3장 9절까지에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세 종류의 나누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장 14절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했고, 3장 1절에 보면 ‘육신에 속한 자’로, 2장 15절과 3장 1절에 보면 ‘신령한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신령한 사람’은 어떠한 자들이며 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오늘 설교를 들으시면서 과연 나 자신은 그 세 종류 중에 어디에 속한 자인가를 배우심으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 일꾼들이 다되셔서 언제 주님이 재림하시더라도 다 칭찬과 상급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본문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이 나옵니다.
2장 14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육에 속한 사람’은 어떠한 자입니까? 헬라어로 말하면 ‘프쉬키코스’이고, 영어로 표현하면 ‘men of the flesh’입니다.
인간은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영과 혼과 육입니다. 그러나 동물은 혼과 육은 있지만, 영은 없습니다. 헬라어로 말하면, 혼은 ‘푸쉬케’라고 하고 영은 ‘퓨뉴마’라고 하는데 동물은 ‘푸쉬케’는 있으나 ‘퓨누마는 없습니다. 동물들 중에 영리한 것은 대단합니다. 곽선희 목사님이 말씀하시는데 소도 나름대로 영리하다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합니다.
과거 자기 아버지는 달구지를 타고 한 40리 길을 가셨다가 돌아왔는데 식구들이 나가보니 아버지는 달구지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더랍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소가 40리길을 혼자 찾아온 것입니다. 미련하게 보이는 소도 이처럼 영리한 구석이 있습니다. 개들도 영리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무엇보다도 동물들 중에 원숭이나 침팬지는 거의 인간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원숭이나 침팬지가 아무리 영리해도 영이 없습니다. 영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리 미개한 토인이라도 모여서 자기들의 신에게 예배를 드리지만, 원숭이나 침팬지들이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육에 속한 사람’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영은 가지고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씨앗과 같습니다. 씨앗은 그냥 놓아두면 싹이 않습니다. 몇 년이 가도 전혀 싹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씨가 죽은 것은 아닙니다. 생명체가 있습니다. 그 씨를 땅 속에 심으면 어느 날 싹이 나서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달걀이 아무리 유정란(有情卵)이라도 가만 놓아두면 병아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미 닭 품에 두면 어느 날인가 병아리가 되어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의 생명체는 가지고는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면 영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씨앗을 땅에 심으면 싹이 나고 달걀을 어미 닭 품에 두면 병아리가 나오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그 영이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즉,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의 생명체는 있으나 아직도 살아 있지 않은 사람, 성경적으로 말하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분들은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아직도 중생의 체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2장 14절 말씀을 보면 성령의 일을 받을 수 없음으로 믿음이 자라지를 않습니다. 씨앗에다가 아무리 비료를 주어 보십시오. 씨앗은 전혀 자라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 교회는 출석하지만 아직도 영이 살지 못한 분, 아직도 중생의 체험을 못한 분이 계십니까? 중생 받지 않고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3:3에서 “사람이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세례 받는 분들에게 언제나 중생을 설명할 때 전기를 예로 듭니다. 여기 지금 전등이 켜 있습니다.
그러나 외부에 연결된 전선을 끊으면 전등이 죽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는 전기와 전등의 관계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함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끊어졌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 영은 죽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영 사이에 연결하는 줄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마다 영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직도 영이 죽어 있는 상태에 계신 분이 이 자리에 계십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충성하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구원 받지 못하고 씨앗 그대로 상태인 ‘육의 사람’으로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줄이 되시는 예수님을 마음의 구주로 영접합시다.
그러면 놀랍지요. 예수님이 우리 속에 거하시는 순간에 씨앗이나 달걀, 전등이 사는 것처럼 여러분들의 영도 살기 시작할 것입니다. 유명한 설교가 휫필드는 청년 시절에 죄악 가운데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마음이 온통 시꺼먼 죄악으로 물들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먼저 그는 자기부정을 애썼습니다.
모든 사치를 마음으로부터 거부했습니다. 검소검약하게 살았고 일주일에 이틀간은 금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구제에 힘썼으며 밤마다 기도로 지새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이 헛일이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마음의 평안과 확신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한 웨슬레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영혼 속의 하나님 생명」이란 책자를 얻었습니다.
이 책을 읽은 휫필드는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써 주님께 매달렸고 성령께서 그의 마음 가운데 들어오셔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훗날 휫필드는 인디언들과 서인도제도의 사람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광부들과 런던의 부유한 귀족들의 접견 등등 참으로 많은 사람들과 많은 지역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네가 거듭나야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 영은 거듭나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을 뿐 영생의 싹이 나지 않는 줄 믿으시고 이 시간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심으로 여러분의 영이 영생의 싹이 나고 거듭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본문 안에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러면 좀 전에 말씀드린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자’와 어떻게 다릅니까? ‘육에 속한 자’는 씨앗으로 말하면 아직도 싹이 트지 않은 상태, 즉 중생 받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육신에 속한 자’는 씨앗으로 말하면 땅 속에 들어가 싹이 나기 시작한 상태요, 중생 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육신에 속한 자’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어떻습니까?
(1)밥 대신 젖을 먹는 영적 유아기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1-2절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나 지금도 못 하리라”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란 아직도 영적으로는 어린아이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딱딱한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젖과 같이 부드러운 음식만 먹어야 합니다. 젖이란 연약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위한 복음의 초보와 기본인 구원의 도리와 십자가의 구속과 같은 기초적이며 쉬운 복음의 말씀을 말합니다.
이처럼 어린 신자들은 어려운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고 예화나 유머스런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 수준입니다. 영적 유아기를 면치 못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또한 어린 아이들을 보면 자기들이 먹고 싶은 것만 편식하고 먹는 양도 작습니다. 한참 자라는 청년들을 보면 먹고 나면 또 배가 고픕니다.
그래서 라면도 끓여 먹습니다. 성숙한 신자는 교회에서 듣는 설교로만은 부족하여 기독교 방송 등을 통해서 설교를 듣습니다. 또한 스스로 성경공부 하거나 영적인 책들을 열심히 찾아 읽습니다. 여러분 중에 일주일에 한두 번 설교 듣는 것으로 족한 분들은 어린 아이 신자, 즉 ‘육신에 속한 자’인 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까이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되도록 힘쓰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말씀이라도 꿀 송이보다도 더 단 영혼의 양식으로 사모하고 좋아하는 심령이 될 때에 믿음이 날로 자라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성령의 지배가 아니라 육신의 지배를 더 받는 자들입니다.
3-4절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고 했습니다. 육신에 속한 어린 신자들은 하나님 중심의 방법인 성령으로 좇아 행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인 방법으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신자지만, 성령의 지배가 아니라 육신의 지배를 받고 사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어린 아이들을 보십시오. 이기적입니다. 저 밖에 모릅니다. 어느 때는 아빠고 엄마고 없습니다. 자기가 제일이고 우선입니다. 저만 위해 달라고 합니다. 머리로는 이래서은 안 된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형제들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에 움켜쥐고 내놓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자기를 칭찬하면 좋아하지만, 다른 형제를 칭찬하면 시기심으로 견디지 못해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이 같은 육신적인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시기심과 분쟁이었습니다.
3절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라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이 앞섰습니다. 4절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 중에 세상적으로 보면 나보다 못한 자가 잘 되는 것을 보고 시기심이 나서 못 견디어 합니다.
동료나 후배 신자들이 앞서가며 영육 간에 갑작스럽게 잘 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인간적인 생각에 시기심이 생기며, 더 나가서는 자신의 명예심에 까지 손상을 입었다고 여기게 되면 이상하게도 미움이 생기며 사사건건 못마땅하여 보이고 결국 실력 행사를 하여 견제 저지 하려는 시도를 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이런 육신에 속한 어린 신자들이 교회 안에 지도급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시험 들기가 쉽고 분쟁이 일어나기가 쉬운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이나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끼리 파벌을 만들어 세력화함으로 교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아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바라보아야지, 동료 성도들 앞에서 자신을 비춰보는 미숙한 행태의 육신적 구습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사실을 일찌기 말씀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자신의 시기심이나 교만 등 육신적인 모습을 십자가 아래 쳐서 복종시키는 경건의 연습에 힘쓸 때 성숙한 단계에 이를 줄 믿어야 합니다. 「강단 유머 백과」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지도급에 있는 분들끼리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공개하면서 비판합니다. 교인들도 덩달아 패가 져서 싸우다 보니 나중에 교회가 갈라질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중재하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썼으나 좀처럼 분쟁은 멎을 줄을 모릅니다. 결국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컴퓨터에 문제를 입력시켜서 해결책을 얻기로 했습니다.
이윽고 컴퓨터에서 답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시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모든 문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지 않고 사람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홍익의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 교회는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결코 사람 중심으로 운영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방법을 따르므로 든든히 서가는 교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본문 안에는 신령한 자들이 나옵니다.
신령한 자들은 누구입니까? 이미 위에서 다 설명이 되었습니다. 신령한 신자는 무슨 일이든지 인간의 생각보다는 성령으로 판단하고 성령을 좇아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교회에서 하는 설교로 부족하여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묵상합니다. 더 나가서는 자기만 먹지 않고 교사나 구역의 일군이 되어 남에게 요리하여 말씀을 먹입니다.
이것이 장성한 신자, 신령한 교인입니다. 교회에서도 모든 일을 할 때에 자기의 생각보다는 하나님 중심으로 행하고 교회의 덕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 대표적인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은 오늘 5-9절에서 너무나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 번 읽어 보십시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성숙한 고백입니까? 바울은 본문 5절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요, 하나님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하나님의 노예와 같은 존재에 불과할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께 사명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사환과 심부름꾼으로서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위해 섬기는 자들을 왜 경배의 대상으로 삼느냐고 반문합니다.
교회 지도자들 즉 목사와 장로나 중직자들은 단지, 하나님의 사역에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 하므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은 가지되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할 영광을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바울과 아볼로는 경쟁의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동역 관계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직무와 각각 다른 은사를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으로,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는 역할을 할 뿐,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아볼로는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취할 어떠한 영광이나, 공로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럽게 사명 감당한 축복과 상급이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8절 “각각 자기의 일하는 데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얼마나 시원하고 명쾌한 말입니까? 이는 신령한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요, 태도인 것입니다. 이러한 수준까지 이른 상태라면 무슨 교회의 분쟁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슴 아프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영적 유아기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교회 운영하고 신자들을 오도(誤導)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입니다.
아닙니다. 우리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성령으로 판단하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을 살므로 우리 교회가 더욱 든든히 서가는 역사가 계속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친구 목사님의 간증을 소개하면서 마치고자 합니다. 제가 작년에 집회차 다녀와던 남원산성교회의 김정명 목사님 간증입니다.
김 목사님은 음성나환자 교회에서 31년째 시무하고 계십니다. 지난번 동기회 때 친구 목사들이 “어떻게 그런 어려운 교회를 부임하게 되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은 처음에는 전혀 갈 마음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자기가 정읍 부근 신태인에서 목회를 할 때, 한 분이 찾아왔는데 음성나환자로 장로님이라고 하면서 어느 교회를 찾아가는 데 알려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친절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다시 오더니 자기는 어느 목사님을 청빙하고자 갔지만 마음에 안 들고 목사님이 마음에 드는데 우리 교회 청빙하고 싶더라고 하더랍니다. 그 교회는 당시 남원노회에서 두 번째 큰 교회였다고 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음번에는 수석장로란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 분은 얼굴이며 손이 더 증세가 심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분도 와서 얼마나 간곡히 부탁을 하는지요. 거절하노라고 너무나 힘들었답니다. 그런데 다음번에 는 잘 아는 선배 목사님이 충고하기를 “아니, 하나님이 부르시는지 어떻게 아는가? 기도도 안 해보고 무조건 거절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므로 찔림을 받고 기도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부임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열심을 다해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두 번이나 환상을 보여주시더랍니다. 한번은 자기 주민등록등본을 보여주시는데 자기 주소가 그 교회 주소로 옮겨 있더랍니다. 또 한번은 환상 중에 자기에게 그 교회 교적부를 주시는데 보니까 수석장로인 홍 장로님의 이름이 제일 먼저 적혀 있더랍니다.
이렇게 확실히 보여주시는데 더 이상 피할 길이 없어 마침내 그 교회 부임하여 31년째를 맞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분이 바로 신령한 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이 이 자리에 계시다면 어서 속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가 이 자리에 계시다면 빨리 성숙함으로 신령한 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종들이 패싸움을 할 때
고전 3:1-9 / 이정선목사
바울은 고린도의 교인들을 성도라고 불렀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거룩한 사람들이 되었다는 뜻 아닙니까? 순수하게 이론적으로 따지자면, 예수를 믿으면서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거듭난 새사람이 됩니다. 물론 한 순간에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고 교제가 깊어지면서, 그리고 신령한 지식과 믿음이 점점 자라면서 조금씩 거룩한 성품을 발달시켜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은 지 오래될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더 많이 갖게 되고 결국은 성도라는 이름에 걸맞은 인격과 신앙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론입니까? 아니면 실제로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까? 물론 우리가 획일적으로 그렇다 혹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찰하고 목격한 바에 의하면 예수 믿은 지 오래되었다고 더 도덕적이거나 인격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처음 믿었을 때 품었던 뜨거운 감격과 순수한 믿음이 훨씬 더 주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갈수록 더 아름다운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이 마땅한 이치인데, 그것이 안 되고 있는 우리의 이 현실을 어찌할 것입니까? 정말 큰 고민거리 아닙니까? 물론 이것은 우리만의 고민이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하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처음 와서 복음을 전할 때 새로 얻은 회심자들을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하는 것처럼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신령한 자들은 2장에서 말했던 신령한 자들과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2장에서 신령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를 구분했을 때는 하나님의 비밀을 받은 사람과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으로 나눈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 수준이 낮다고 할 수는 있지만 고린도 교인들 역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신령한 자들의 범주에 들어가야 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3장에 들어와서 그들을 신령한 자들처럼 대할 수 없었다고 할 때, 그 신령한 자들은 보다 성숙한 신자들이라고 해야 됩니다. 육신에 속한 자라는 표현 역시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하면 되겠지요?
처음에는 그들을 신령한 자들처럼 대하지 못하고 육신에 속한 자들처럼 대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영적으로 아직 어리니까요. 아무리 불고기가 맛있고 삼겹살이 맛있다지만 어린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삼겹살을 먹일 수 있습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젖을 먹이고 이유식을 먹이다가 차츰 어른들이 먹는 음식을 먹여야 합니다. 아이가 자랐는데도 계속해서 젖만 먹는다면 영양실조에 걸리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그런데 3절에서 바울이 뭐라고 말하는지 보세요. 그들이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제 나이로 치면 제법 컸고 삼겹살도 맛있게 먹어야 할 때인데, 아직도 젖이나 먹어야 할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지가 꽤 되었는데, 아직 그 인격이나 윤리적인 생활은 옛날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라는 책망은 예수 믿고 점점 없어졌어야 할 육신적인 성품들이 남아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그들의 삶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면 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 시기하고 다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신령한 자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다면 무엇이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그들의 고민과 의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고민과 의문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곤고한 자들, 사망의 몸에 갇혀 있는 자들이라는 바울의 탄식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비논리적인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그래도 고린도 교인들의 분쟁은 오늘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교회 안의 분쟁에 비하면 매우 양반입니다. 그들은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하면서 나뉘어 싸웠습니다. 그래도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가르쳐준 스승들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랬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의 스타일이 다르고 아볼로의 능력이 또 다르기 때문에 각자 사람들이 자기 취향에 맞는 지도자를 선택해서 추종할 수 있습니다. 돈 때문에 교회가 깨지고 무슨 비리나 추행으로 교회가 박살나는 것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지요.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매우 단호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이 연루된 문제이기 때문에 더 내버려둘 수가 없는 일이지요. 참으로 그들이 바울의 정신과 아볼로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면 그렇게 나뉘어 싸울 수가 없는 일입니다. 바울이나 아볼로가 언제 자기 세력을 구축하려고 한 적도 없고, 자기 사람을 중요한 자리에 심으려고 한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의 이름을 빙자해서 그렇게 나뉘어 다툰다는 것에 대해서 심지어는 분노와 모욕까지 느낄 일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바울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 것 같습니까? 또 아볼로의 입장이라면 무슨 생각이 들겠어요? 만약 바울이나 아볼로가 미숙한 지도자라면 이러한 상황을 개인적인 감정과 연결시킬 수 있겠지요. 바울의 입장에서는 아볼로와 비교된다는 것 자체가 모욕적일 수 있습니다. 아볼로는 바울에게서 배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로부터 예수의 도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볼로는 바울의 제자의 제자인 셈입니다. 또 바울은 사도 아닙니까?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파, 아볼로파가 생겼다는 것은 두 사람이 동등하게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볼로가 바울보다 낫게 생각된다는 뜻입니다. 바울로서는 대단해 섭섭한 일이지요.
아볼로의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한 건 물었습니다. 잘 하면 바울의 위상을 넘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이 고린도 교인들을 잘 구슬리면 초기 기독교 세계에서 흔들리지 않는 지도자의 위치를 확보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무엇이 더 교회를 나누고 싸우게 만듭니까? 교인들의 성숙하지 못함입니까? 아니면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욕망입니까?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교회 안의 분쟁들을 보세요. 모두가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 중심에 있지 않던가요? 만일 바울이나 아볼로가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고린도 교회는 그야말로 우스운 꼴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나 아볼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아볼로는 고린도에 발을 딛지 않았어요. 바울이 아볼로에게 고린도에 가서 일을 좀 해결해보라고 권했어도 아볼로는 아예 발을 끊어버렸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생긴 자기 계보를 발판으로 해서 출세를 해보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간다 해도, 일단 아볼로가 고린도에 나타나면 또 다른 오해와 불필요한 사건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볼로는 모든 문제를 바울에게 위임하고 완전히 손을 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아볼로보다 우월한 권위를 주장하면서 반란세력을 평정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누가 더 큰 일을 했거나 더 중요하거나 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밭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에 따라 신실하게 일한 일꾼들입니다. 동역자들이지요. 그래서 바울과 아볼로는 동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 마음으로 일 잘하고 있는 동지들을 자칫하면 서로 경쟁해서 싸우게 만드는 것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일꾼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의 비밀을 증거하는 본업보다도 자기들의 출세와 명성을 추구하도록 부추기는 것이 누구이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사탄인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사탄의 음모가 자행될 수 있습니다.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특히 교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분들이 명심하고 또 본받아야 할 것은 바울과 아볼로가 이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같은 위기라도 그것이 개인과 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고, 그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더 든든한 교제와 신뢰 위에 아름다운 교회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심고 물주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중요하다고 강조함으로써, 바울과 아볼로를 추종함으로 생겨나는 분쟁의 근거 자체를 무력화시켜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중요하지 않은 심는 일이나 물주는 일을 하는 사람을 추종하고 그것 때문에 갈라져 싸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공동체, 하나님의 교회에서 매우 가치 없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집에서 종들이 패싸움하는 꼴이 될 것이니 하나님이 그것을 어떻게 보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고 물주는 일을 함으로써 보상을 받는다면, 그것은 일을 맡기신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 자기 세력을 구축하고 권력을 차지함으로써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보상을 추구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얼마나 육신에 속한 사람을 벗어나서 신령한 자의 단계에 이르렀는가 하는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저 자신부터 돌아보면 아직 육신에 속한 상태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한 것을 봅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비밀을 받은 신령한 자들, 성도가 되었는데, 아직 욕망과 이기심을 따라 행할 때가 많다는 것이 심히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것을 우리가 인정하고 또한 벗어버리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면,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몸부림치는 것을 보시고 믿음과 능력을 더하여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할 때나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육신의 소욕보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하기 위해 애쓰고 실천함으로 날마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
고전 3:1-9 / 박조준목사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읽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기는 하지만 육신 적이고 인간적인 면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사람이니까 육신적인면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육신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인간성, 악이 일할 기회를 주며 죄에 대해서 공감하고 있는 부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을 책망하는 것은 그들이 육신으로 되어 있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인생관 가치관이 그리고 행동의 모든 것이 악이 지배하는 대로 내 맡기고 있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분쟁과 분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 사람과 이웃과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옳은 말씀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화합하며 사랑과 일치의 저신으로 사귐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불행하게도 이 교회에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파당이 생겼습니다. 어떤 이는 바울파, 어떤 이는 아볼로파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면서 당파심을 버리고 주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이런 말씀으로 권면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 이하를 보세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을 좀 도와서 일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일은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는 단순히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치고 심방하고 돌보는 것은 물론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생명이 인간의 심령 속에서 자라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동역자로 일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농사를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싹이 나고 자라고 꽃이 되고 열매 맺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농사짓는 것만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만사가 가만히 보면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실상은 하나도 없습니다.
시편 127편을 오늘 예배 시작때 읽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의미 깊은 말씀입니다. 서양 속담에도 '싸움은 사람이 하지만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이 결정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동양에 내려오는 말에도 '모사는 재인이요 성사는 재천이라' 했습니다. 성령 잠언 16장 1절에도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에만 성공할 수 있고 승리를 거둘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영역과 차원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농사도 하나님과 함께 지어야 성공합니다. 국토를 지키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해야 바로 지킬 수가 있습니다.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는 것도, 학생이 선생님에게 배우는 것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사업을 하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해야합니다. 판사가 재판을 하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 해야 합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도 하나님과 동역 해야 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도,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도, 자녀를 양육하는 일도 하나님과 동역 해야 합니다.
정치도 그렇습니다. 정치는 우리 인간들이 하는 일 중에 가장 귀중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한 민족 국가의 운명이 정치를 바로 하고 못하는데 큰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계에 나가는 사람이야말로 고상한 인격을 소유하고, 덕과 신의와 의리와 도덕적 성품을 가지고 사리사욕이 없고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을 가진 능력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옛날 사울 왕은 젊어서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는 정치를 잘 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교만해지고 시기하는 마음이 그의 총명을 가리게 되었을 때 그만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다윗도 젊었을 때는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동역할 때 실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실수를 범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동역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위대한 정치가는 하나님과 동역 했습니다. 우리는 영국의 글래드스톤이나 미국의 에이브라함 링컨같은 정치가를 기억합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과 동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있는 것을 알고 하나님과 동역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축복 받는 민족이 되려고 할 것이면 이와 같은 정치인들을 보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세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실 때에는 적군을 능히 물리 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 하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실 때 비참하게 패한 예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40년을 지나서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하게 되는데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했더니 철철 흘러 넘치는 요단강이 갈라져 건너가는 감격스러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난공불락의 도성 여리고성을 손 하나 대지 않고 매일 하루에 한바퀴씩 엿새동안 돌고 일곱째 되는 날 일곱바퀴 돌고 소리치니 그 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감격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약해요. 무엇이 좀 되는 것 같으니까 자기가 한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글세 우리가 철철 흘러 넘치는 요단강 물에 발을 대니까 물이 쫙 갈라서지 않아, 우리가 이런 일을 했다구 그것 뿐이야 그렇게 높고 견고한 여리고성, 사실 누구도 점령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그 성 주위를 돌고 소리를 지르니까 아 그 큰 성이 와르르 무너지잖아 굉장했지 우리가 큰 일을 한거야" 이것은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함께 하셔서 요단강을 건너고, 어리고 성이 무너진 것은 생각도 안하고 자기들의 힘으로 한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도움이 필요할때는 주님을 찾지만 그 일이 성취되면 주님은 다 잊어버립니다. 자기가 해서 된줄로 압니다.
그래서 그 다음 성 아이성에서도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호수아가 사람을 보내서 한번보고 오라고 해서 가 보고 왔습니다. 그리고 보고하는 말이 '거기에 가 보았더니 여리고성 하고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작은 성입니다. 그러니 우리 이스라엘이 다가서 고생할 필요는 없고 그저 넉넉하게 이삼천 명만 보내면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말 가운데는 "아, 우리가 그 난공불락의 도성 여리고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점령했는데 거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아이성쯤이야 문제 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보고를 듣고 삼천명의 군사를 아이성으로 보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아이성으로 올라갔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아이성 사람들아 다 일어나 반격하는 바람에 쫓겨 내려오게 되었는데 후퇴하면서 서른 여섯명이 죽었습니다. 얼마나 혼이 났던지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군대의 마음이 물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완전히 녹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왜 아이성 사람들에게 완패했습니까? 여리고 성을 점령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맥없이 졌습니까? 원인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슬엘 군대와 함께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아간 이었습니다. 이것 보세요. 하나님이 함께 하면 승리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니까 비참하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싸움은 사람이 합니다. 그런데 승부는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잠언 16장 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시편 37편 5절에 보아도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리라"고 했습니다.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교회 일이나 사회 일이나, 개인이나 단체나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일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개인이 무슨 사업을 경영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물론 사람의 머리로 생각하고 연구하고 계획하고 시작합니다. 물론 사람이 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축복하셔야 그 사업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를 하는 것도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이 말은 학생이 공부는 안하고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공부는 열심히 하면서 기도도 간절히 해야 하나님이 도우셔서 공부를 잘 할 수가 있습니다. 학생이 공부할 때도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동역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녀를 갖는 것도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키우는 것도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합니다. 어느 부모가 자녀가 잘못되기를 바라겠습니까? 다 잘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부모의 기대와 너무 어긋난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를 위하여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욥기 1장 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욥이 자녀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다라"고 했습니다. 전에 어거스틴이 인간적으로는 다재다능해서 사람들에게 인기를 누리며 살았는데 종교적으로 마니교에 속해 있으면서 육신의 향락을 일삼는 일을 하므로 그 심령이 어두움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얼마나 간절히 눈물로 기도했습니까? 그렇게 오랜 세월 아들의 심령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위해서 기도했지만 어거스틴의 생활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하루는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암브로스 감독을 찾아가서 절망 섞인 음성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감독님, 우리 아들 어거스틴을 하나님께서 버리신가봐요" 하면서 흐느꼈습니다. 이 안타까운 호소를 듣고 있는 암브로스 감독이 모니카에게 한 말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자매님, 눈물의 어머니를 가진 자녀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 말에 용기를 얻은 모니카는 계속 기도하므로 어머니가 세상 떠나시기 얼마 전에 어거스틴이 하나님께 돌아와 중생 했고 기독교 역사상 큰 공헌을 한 인물이 되지 않았습니까? 자녀를 양육하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 해야 합니다.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계획은 100년 살 것같이 하고, 사는 것은 하루 살고 마는 것처럼 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크게 계획해야 되지만, 하루하루 우리의 삶은 오늘 끝나는 것처럼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선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원수 맺지 않을 것입니다. 죄를 품고 그대로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형제와는 화목할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나를 데려가신다면 나는 오늘까지 최선을 다해서 일해야 할 것입니다. 부지런히 최선을 다해서 일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잠언 19장 21절을 보세요.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이런 계획 저런 도모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나 개인이나 우리 공동체로 이루어 진다해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우주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져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20장 24절에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라고 말씀했습니다.
잠언 21장 30~31절에 보면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지혜가 있다고 한들, 아무리 사람이 명철하다고 한들, 아무리 우리의 계획이 굉장하다고 한들 하나님을 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는 도대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We are only god's co-worker"라고 했습니다. 동역자는
1. 내가 할 일은 내가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책임은 사람이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역하는 사람은 씨뿌릴 때 씨를 뿌리고, 추수해야 할 때 추수해야 합니다.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심어주고 길러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우리 몸안에 맹장염이 생겼으면 맹장을 수술해서 잘라내야 합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이 치료하십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는 먼저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사람으로서 해야할 일은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은 때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네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고 물으십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법대로 해야 합니다.
내 법대로, 내 고집대로 할 것이 아니라 자연계를 지으시고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자연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따뜻한 지대에서 결실 하는 과일 나무를 추운 지방에 심어놓고 열매 맺게 하려면 그 나무에 맞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에 대한 법칙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이 법칙대로 지켜야 건강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대인관계에도 하나님께서 도덕의 법칙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법칙대로 사랑과 공의, 진실과 신뢰, 청결과 겸허, 인내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과 동역 하는 일입니다. 나라에서 법을 정하는 것도 하나님의 법에 맞도록 정해야 합니다. 내 당에 유리하도록 정하는 것은 악법 내지 불법입니다. 나중에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이 우주에 삽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역 하면 문자 그대로 푸른 하늘의 뭇별이 우리를 도와줍니다. 우리의 하는 일에 협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 산천초목, 금수들까지도 우리에게 대항합니다. 옛글에도 '순천 자는 흥하고 역천 자는 망한다'고 했습니다.
이조 500년의 역사를 보세요. 일시적인 권모술수로 큰 권력을 잡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제도로 말미암아 결국 자기 자신을 망치고 일족이 멸망한 예가 얼마나 많습니까? 역사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던지 이 일에 하나님이 동역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서 하나님이 동역 하실 수 없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역천의 길이요, 반란의 길입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에서 무슨 일이나 하나님과 동역 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 자들입니다. 무슨 일이나 하나님과 동역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을 넘치게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농부의 마음으로
고전 3:1-9 / 박조준목사
오늘은 주님의 날이면서 우리 민족의 대명절인 중추절, 추석 입니다. 가을의 중간이요, 가을 의 맑은 하늘에서 달을 볼 수 있는 명절입니다. 우리 민족의 거의 절반인 2천만 명이 이동한다 고 합니다. 가을은 추수의 계절입니다. 열매를 따는 것처럼 기쁘고 흐뭇한 일은 없습니다. 오곡 백과를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보람 있고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옛 사람은 춘화추실(春花秋實) 이란 말을 했습니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의 대질서요, 생명의 섭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농사하는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심었 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 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거름을 주고 김을 매고 물을 주고 가꾸는 수고를 하면, 가을에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을 보는 흐뭇함이 있고 곡식을 추수 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농사는 사람이 하는 것 같지만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하 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농사는 사람과 하나님이 동역하는 것이라 고 말했 습니다. 사실 밭 갈고, 씨 뿌리고, 거름 주고, 김매고, 물 주는 것은 사람이 합니다. 그러나 씨 에서 움이 트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익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 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만 하더라도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 게 하기 위해서 농사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면서 인생의 깊은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농사하는 일뿐이겠습니까? 모든 일에 농부의 마음으로 살아가면 안되는 일이 없다. 고 옛 사람은 말했습니다. 이농심행 무불성사 (以農心行 無不成事) 라고 했습니다. 농(農)은 천하의 대본이요 만업의 근본입니다. 농사가 잘되어야 인심이 후해지고 국민의 얼굴 표정이 밝아집니다. 금년에 태풍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한국의 곡창인 호 남지역에 별 피해가 없었고 날씨가 좋아서 평년작이 넘는 수확을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형편은 쌀을 자급자족하지 못해서 어떤 해엔 1천만 석의 쌀을 외국에서 수입해야만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농토를 확장하고 증수개발을 해서 우리 국민이 먹고도 남아서 북한에게까지 보내주어 나눠먹게 된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 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밥상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땀흘려 수고한 농부 들과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농부의 마음을 배 워야 합니다. 농부의 마음으로 사업을 하면 천하에 안되는 일이 없습니다. 1. 농부는 근면합니다.우리 국민 중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은 농부입니다. 쌀 한 알이 우리 밥상에 오르려면 농부의 손길이 적어도 백 번은 가야 한다고 합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김을 매고, 농약을 뿌려 벌레를 잡고, 추수하고, 방아 찧고, 가마니에 모두 넣어 도시로 운반해야 합니다. 쌀 한 알 한 알이 모두 피땀의 산물이요, 정성의 결과요, 노력의 결정 체입니다. 쌀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 것도 아니요 땅에서 혼자 솟아나는 것도 아닙니다. 농부들의 피와 땀의 소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제적인 절약의 차원 이전에 농부의 피땀을 생각해서라도 쌀 한 알이라도 아껴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 밥상에 떨어진 밥알을 그냥 버리면 밥알이 소리지른다고 했습니다.그러므로 집에서나 음식점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농부의 수고를 기억한다면 밥알 하나를 소홀히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음식점에서 30% 정도가 쓰레기로 버려 진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말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사상가 루소는 철학자처럼 사색하고 농부처럼 일하라. 고 했습니다. 의미 있는 말입니다. 우 리 선조들의 생활 좌우명은 한결같이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고 백 번 참으면 집안에 큰 변화가 있다. 는 것이었습니다.항상 부지런한 사람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근면은 성공의 어 머니요, 나태는 실패의 근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세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첫째는 거미와 같은 착취형의 인생이요, 둘째 는 개미와 같은 근면형의 인생이요, 셋째는 꿀벌과 같은 봉사형의 인생입니다. 개미는 부지런하 게 일을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저축합니다. 여러분, 혹시 개미가 일하는 행렬을 보신 적이 있 습니까? 눈꼽만한 그 미물들이 수백 수천에 긴 대열을 지어 먹이를 운반하느라고 근근자자하게 분망하는 광경을 볼 때마다 우리는 생명의 놀라운 신비와 생의 강한 의지를 느끼고 숙연한 마음 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개미는 길에서 서로 마주치면 반드시 머리를 맞대고 말을 건네며 인사를 합니다. 좁쌀알만한 그 미물 속에도 오묘한 오장육부가 있고, 정확한 방향감각이 있고, 협동의 지혜가 있고, 자기의 생활을 개척하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저는 가끔 시골에 가서 길을 가다가 개미의 행렬을 만나면 줄을 지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한참씩 들여다보곤 합니다. 보면 볼수록 신비하고 놀랍고 훌륭합니다. 우리는 개미한테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잠언 6장 6절에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했습니다. 개미는 부지런합니다. 개미는 나태와 방탕을 모릅니다. 개미는 남을 해하지 않습니다. 내 노 력으로 내 생활을 건설하고, 내 힘으로 살아가고, 자기의 노력으로 자기의 운명과 진로를 개척 해야 합니다. 이것이 존재의 근본원리입니다.이 땅 위의 만물을 보세요. 모두 자기의 힘으로 살 아갑니다. 풀과 나무도 제 힘으로 자라고, 새와 벌레도 제 힘으로 살아갑니다. 자주, 자립, 자 활은 우주만물의 근본법칙입니다. 우리는 남한테 의존하지 않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독립의 철학부터 배워야 합니다.독립과 고립은 다릅니다. 고립은 외톨이가 되어 외롭게 사는 것 입니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독립은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우리 나라가 지금 수출산업에 큰 문제를 안고 있는 것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술의 독립을 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가격경쟁에 큰 약점을 안고 있는 것입니 다. 독립하려면 먼저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독립할 능력이 없습니다. 부지런함은 만가지 선의 원천이요 게으름은 만가지 악의 근본이다. (일근천하무난사(日勤天下無難事)) 란 옛말이 있지 않습니까? 한결같이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게으르니까 일이 어 려워지는 것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에겐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그런데 개미는 생활 철학에는 한 계가 있습니다. 개미는 남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음과 동시에 남을 도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 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저축할 뿐입니다. 남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남 을 위한 봉사정신이 개미에게는 없습니다. 2. 농부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삽니다.농부가 부지런하게 일하는 것은 자기만 먹고 살기 위 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식량을 위해서 입니다. 농부에겐 다른 사람을 이롭게하는 이타의 덕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높은 생의 차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꿀벌에게서 발견합니다. 꿀벌은 협동과 봉사의 정신이 가장 강한 곤충입니다. 꿀벌은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이기와 이타의 놀 라운 덕을 지니고 있습니다. 꿀벌은 여러 꽃을 찾아다니면서 부지런히 화분을 수집합니다. 그는 그 화분을 먹고 내가 사는 동시에 정교하고 감미로운 꿀을 만들어 인간에게 봉사합니다. 같은 풀잎의 이슬을 먹으면서도 독사는 무서운 독을 만들고 꿀벌은 맛있는 꿀을 만듭니다. 참 으로 놀라운 우주의 신비입니다. 꿀벌은 협동사회의 모델입니다. 일하는 벌은 일에만 전심하고 여왕벌은 여왕벌의 직책에만 전념합니다. 꿀벌은 근면의 천재요, 협동의 선수요, 봉사의 화신입 니다. 꿀벌은 우리에게 나도 살고 남도 사는 철학, 나도 이롭게하고 남도 이롭게하는 생활의 원 리, 서로 번영하는 공존공영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다섯 손가락을 꽉 쥐어야만 주 먹의 힘이 생깁니다. 시멘트와 모래와 물이 서로 협동할 때 쇠보다 강한 콘크리트가 생깁니다. 봉사는 인생의 최고의 행동입니다. 봉사를 많이 하면 할수록 위대한 사람입니다. 내 시간을 내 고 내 정성을 모으고 내 노력을 바쳐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봉사라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개미형의 인간이 많아야 합니다. 일생일념의 정신을 가지고 자기의 일에 골몰 하고 몰두하고 전력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많아야 사회가 발전합니다. 일생동안 한 가지 일에 심 혈을 쏟고 정성을 기울이면 누구나 그 방면에서 대가가 되고, 선수가 되고, 권위자가 되고 일인 자가 됩니다.
그러나 그보다 꿀벌형의 인간이 더 위대합니다. 꿀벌은 꿀을 만들어 인간에게 봉 사합니다. 세상에 창조처럼 놀라운 것이 없고 봉사처럼 훌륭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중심의 생, 자기 위주의 유익과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생활을 하고 있 습니다. 그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 봉사입니다. 기업이나 사업을 하시는 분도 이 농부의 마음으 로 일해야 합니다. 이윤만 추구하여 국민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 행위는 멸시받아 야 할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자기 자신만 생각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의식 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도덕이요 윤리가 아닙니까? 장사에도 상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 이 타락하면 상술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3. 농부는 정직합니다. 그리고 정성스럽습니다. 농사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콩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납니다.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는 일이 없고 팥을 심었는데 콩이 나는 일이 없습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나고 적게 심으면 적게 납니다. 아무것도 심지 않으면 아무것 도 나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둡니다. 심지 않고 거둘 수가 없습 니다.농사는 자연을 상대로 합니다. 자연에는 추호도 거짓이 없습니다. 자연은 인간을 속이지 않습니다.나무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곡식이 우리를 속인 적이 있습니까? 흙이 우리를 속입니까? 자연은 정직합니다. 지난 주간 우리 집사님이 시작하는 기도처가 있는 강원도엘 다녀왔습니다. 그 산에 밤나무가 많았는데, 작년에는 미처 따기도 어려울 정도로 밤이 많이 열렸는데 금년에는 얼마 열리지 않았 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무도 한 해 힘껏 일했으면 그 다음 해엔 좀 쉬는 것입니다. 땅에는 자연비료인 퇴비를 주면 땅이 기름지고 좋아집니다. 물론 화학비료를 주면 당장은 힘이 들지 않 고 곡식을 많이 수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 땅은 산성화되어 결국 죽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자연은 정직합니다. 이 우주에는 허위가 없습니다. 거짓이 없는 자연을 상대로 일 하는 농부는 정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거짓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농부처럼 자연의 정직을 배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주신 말씀을 들어보세요.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곡식을 심고 일하는 대로 정성을 기울인만큼 곡식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이 정성입니다. 정성은 인간이 가지는 가장 밝은 빛이요, 아름다운 향기요, 숭고한 힘입니다. 우리에게 삶의 기쁨을 주는 것은 정성입니다. 정성스러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 어린 말씀과 행동은 우리의 생활을 훈훈하게 해 주고 우리의 정신을 즐거움으 로 채워줍니다. 정성없이 농사를 하면 곡식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정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남에게 속거나 배신을 당했을 때 우리는 인생을 저주하고 싶고, 살고 싶은 의욕 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배신과 절망으로 싸늘하게 얼어붙은 마음도 따뜻한 정성 앞에 는 저절로 녹아버리고 맙니다. 한문에 교사(巧詐)는 졸성(拙誠)만 못하다 는 말이 있습니다. 잘 하지만 꾀임수를 쓰는 것은 서투르면서 정성스러운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재간이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얼마나 쏟느냐 하는 것을 찾으십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20대 청년시절 미국 농장에서 귤을 따는 노동을 했습니다. 그때도 그 분은 귤 한 개를 따도 자기 일처럼 정성껏 따라. 미국 과수원에서 귤 한 개를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 를 위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외국인 과수원에서 품팔이 노동을 하면서 귤 한 개를 따더 라도 정성껏 따라는 것입니다. 정성의 반대는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나 성의 없이 되는 대로 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되는 대로의 무책임한 성격이 되고 마는 것입 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종들아 모 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며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 게 하듯 하지 말라 정직과 정성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얼마나 필요합니까? 농사뿐이겠습니까? 모든 일이 그렇다 고 믿습니다. 우리가 모든 생활에서 농부의 정직과 정성을 배운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달라지 겠습니까? 우리 민족은 재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고 정성이 부족합니다. 이것은 과거에 역사적으 로 눌려만 살았기 때문에 무슨 일이나 되는 대로 하는 무책임과 무정성의 습관과 태도가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 쌓여서 오늘 우리 한국인의 생활 자세로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여러분, 이제라도 우리 나라를 구하는 길은, 우리가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이기고 잘 살 수 있 는 길은 국민 하나하나가 무슨 일을 하든지 정직하게, 정성스럽게 하는 마음과 습관과 능력을 기르는 일입니다. 사람은 요행으로 성공하거나 요행으로 잘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잘 살려면 잘 살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하고, 행복하려면 행복해질만한 소지를 마련해야만 합니다. 그런 노 력을 하지 않고 행복과 번영을 바라는 것은 밥 먹지 않고 배불러 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 다. 농부의 마음으로 정직하게 삽시다. 농부의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입시다. 맹자는 지성에 동 하지 않는 자 없다 고 했습니다. 우리 국민 하나하나가 정직하게 살고 정성스러워질 때 행복의 태양이 환하게 우리를 비쳐줄 것을 믿습니다. 4. 농부는 순리대로 삽니다.밭에 씨앗을 심는다고 금방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씨를 뿌린 다음 움이 트고, 싹이 나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익을 때까지 기 다려야 합니다. 어린 묘목이 하루 아침에 정정한 거목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장과 성숙에는 반 드시 때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은 순리대로 자라납니다. 세 상의 모든 일을 순리대로 해야 합니다. 역리대로 하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순리는 흥과 성의 원리요, 역리는 망과 패의 원리입니다. 농부는 결코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다릴 줄 압니다. 이것이 귀합니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일반적으로 매사에 너무 급합니다. 순리와 인 내로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만리장성을 하룻밤에 쌓을 수는 없습니다. 로마가 결코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갓난아기도 열 달이 되어야 세상에 태어납니다. 아무리 바빠도 기다려야 합니다.한 나라도 마찬 가지입니다. 갑자기 중진국이 되고, 선진국이 되고, 복지사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점 진적 발전의 길을 걷습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옮기면서 점점 높은 단계에 올라가는 것이요, 작은 것이 수없이 모여서 서서히 큰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일에 최선을 다한 다음에는 조용히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 가서야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 를 맺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참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 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고 했습니다. 옛날 맹자의 말 가운데 있는 어느 제나라 사람은 곡식을 심어 놓고 빨리 크지 않으니까 너무 급해서 얼른 커서 열매를 맺으라고 하루는 아침에 나가서 전부 고개를 뽑아 놓았다고 합니다. 참아야합니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순리입니다. 때가 올 때는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때와 사람의 때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일에 당장 성과 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조급한 마음으로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여러 분, 이 세상을 농부의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농부처럼 부지런하게 살아갑시다. 농부처럼 정직하 게 살아갑시다. 농부처럼 순리대로 기다리며 살아갑시다. 그럴 때 인생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줄을 믿습니다.
전도란 무엇인가?
고전3:4-9 / 이훈구목사(금천양문교회)
서 론
지구상에 60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데 2/3에 달하는 자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이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4800만 명 중 천주교인 550만 명, 기독교인 850만 명 합쳐서 1400만 명이 하나님을 믿고 나머지 3400만 명이 다른 신이나 우상을 섬기고 이단 종교에 빠져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다른 신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과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탕자들을 부르시는 방법이 전도와 선교이므로 전도는 아무리 강조하고 반복하여도 부족할 뿐입니다.
행복 나눔 축제를 한 주 앞두고 전도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전도의 정의
1)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방법입니다.
고전1: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23-24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롬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3)예수님의 유언을 지키는 것입니다.
마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막16:15-18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4)받은 복을 이웃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2. 전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세
1)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로노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출32: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데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렘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롬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3)성령 충만함과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3. 전도의 결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고전3:6-7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4. 전도자가 받는 상급
고전3:8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계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단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결 론
전도가 힘들게 느껴지고 어리석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전도를 통하여 세상을 복음화 시키고 계십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전도하는 것은 하나님과 복음화 사역을 동역하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일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원하여 언제 어디서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여야 할 먼저 믿은 자들의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