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교회.
글쓴이/봉민근
오늘날 신자들의 특성은 교회에는 가지만 기도하지 않고
말씀은 들으나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잊어버리며
모이기는 하나 사랑을 나눌 줄을 모른다는 말이 있다.
한 주일이 가도 성경을 펴지 않으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찬송하는 입이 닫혔으니 어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믿는 자 누구나 교회가 부흥하기를 바라나 전도하지 않고
사랑을 말하나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자를 찾기 힘든 공동체가 되었다.
교회에서도 돈 있는 자는 언제나 주류가 되고 그 앞에는 아부꾼들이 줄을 서지만
가난한 자는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비주류가 되어 예배당 구석에 앉아할 말이 없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위로하는 자 없고
다 의인처럼 행세하니 죄인을 찾을 수가 없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줄도 모르고 험담을 일삼는 이들이
그것이 죄인인지도 모르고 기득권을 내세우며 끼리끼리만 희희낙락하고 있다.
예배를 드리는 횟수는 많으나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복음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지 않고 있으니
민방위 훈련장 같은 교회가 되어 가고 있다.
세상 윤리나 예절을 가르치는 강연장으로 전락한 교회에 생명력이 있을 리 없다.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돌아서서 자기 갈길 가기에 바쁘니 수많은 사람들이 아는 이 없이 교회만 다닐 뿐이다.
이러고도 어찌 형제의 사랑을 나누는 믿음의 공동체라 할까!
사랑이란 말만 할 뿐 그 사랑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볼 수도 없는 교회가 되어 가고 있다.
도무지 한 영혼을 향한 끝없는 사랑으로 전도하지 않으니 어찌 복음이 전해질까!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려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 주셨건만
죽어가는 한 영혼에 대한 아픔이나 눈물이 없다.
교회에 다니다가 실족하여 교회를 떠나도 찾아가 위로하고 권면하는 이 가 없다.
행함은 어디로 가고 자기 지식을 가르치는 일에만 급급하다.
오늘날 교회는 복음을 잃어버렸다.
전도란 말은 귓가에만 맴돌 뿐 우리의 삶에서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이를 찾기가 힘들다.
예수님의 보혈을 잊어버린 교회에 인간의 냄새만 가득하니 어찌할까!.
유능한 목사만 있고 예수님의 말씀이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까!
☆자료/ⓒ창골산 봉서방
카타콤의 순교자 중에서
우리는 보석을 싫어하는 자들이 아니다.
다만 영원한 보석을 원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재물을 싫어하는 자들이 아니다.
다만 썩지 않는 재물을 원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명예를 싫어하는 자들이 아니다.
다만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최고의 명예를 원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즐거움을 싫어하는 자들이 아니다.
다만 영생의 즐거움을 원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술을 싫어하는 자들이 아니다.
다만 천국에서 마실 포도주를 원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다만 거룩한 신부가 되기 위해 잠시
바보처럼 보이는 길을 선택한 자들이다
회심의 열매
회심한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만족을 얻지 못한다.
세상에서 즐겼던 것은
모두 헛되고 괴로운 것이며
인간적인 위대함은 배설물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이제는 생명과 영원을 추구하고
은혜와 영광을 바라며
썩지 않을 면류관을 향해 달려간다.
그는 주님을 찾겠다고 굳게 마음을 다잡는다.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한다.
이전에는 신앙생활을
그저 되어가는 대로 하면 되는 것으로 여겼지만,
이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에는 세상이 이끄는 대로 살고
세상을 먼저 섬겼다.
- 조셉 얼라인의 [회심의 은혜] 중에서
회심은 기준을 바꾸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의 것이 기준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것을 기준으로 삼는 삶입니다.
신앙은 기준을 바꾸는 것이며,
회심은 그 기준이 하나님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회심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회심하는 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듣는 섬김
우리는 서로 듣는 일을 통하여 오는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듣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정신 분석학 훈련을 받을 필요는 없다.
가장 중요한 요건은 자비심과 인내이다.
듣는 일을 잘하기 위하여
정확한 대답을 해야 할 필요도 없다.
사실 그러한 생각이 듣는 일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우리가 듣는 일에 집중하기보다는
대답하는 일을 더 염려하기 때문이다.
인내심이 없이 절반밖에 듣지 못하는 자세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실례가 된다.
- 리처드 포스터의 [영적 훈련과 성장] 중에서
예수님의 몸 전체가 귀였다는
명제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에수님은
우리의 사정을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들어주는 섬김이
어떤 면에서 가장 어렵습니다.
자기의 말을 먼저 하려는 시대에
침묵하며 오히려 들어주는 섬김은
영혼을 주께 인도하는 지름길입니다.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은 다릅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를 알고 채우려는 길입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길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길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얻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비움으로써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는 길입니다.
내가 성공하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낮아짐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길입니다.
누리는 길이 아니라 비우는 길이요,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입니다.
- 이훈의 [예수께로 가는 길] 중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믿고 삽니다.
십자가는 추상적인 선포나 선언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내 삶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십자가를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로 변명을 해도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면 거짓입니다.
스스로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면
십자가는 포기요. 비움이요. 자기 부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은 좁은 길이며 생명의 길입니다.
죽어 있으면 못하는 것들
살아 있기에 사랑한다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기에 다정하게 손을 잡아줄 수 있습니다.
살아 있기에 행복하게 웃을 수 있습니다.
살아 있기에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습니다.
살아 있기에 쿨하게 양보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기에 뜨겁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기에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송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기에 천천히 산책하며 걸을 수 있습니다.
살아 있기에 꽃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살아 있기에 책을 읽으며 감동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기에 잘한 사람을 칭찬해줄 수 있습니다.
살아 있기에 마음의 선물을 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기에 서운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기에 노을을 바라보며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살아 있기에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살아 있기에 동물들을 쓰다듬어줄 수 있습니다.
잘 읽어보세요.
죽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단 한 가지라도 있는지.
만약 살아있는데도 이런 일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죽은 사람과 뭐가 다른가요? 성경은 그런 사람을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이라 합니다. 한 마디로 '산송장'입니다.
오늘은 지금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의미에서 위에 적은 몇 가지라도 실천해 보려고 합니다.
ⓞ최용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