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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9월 중국 태항산 트레킹에
송가인 팬클럽 고문님이 동행했더랬습니다.
어찌나 열성이고 재미있으시던지,
저도 송가인 팬클럽에 가입했습니다.
송가인 노래 한번 들어 보시지요
https://youtu.be/saTDoBo90Mk
의사 출신인 70세의 송가인 열성팬 옵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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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송가인 팬클럽 Again에서 가져 온 글인데
나름 정리가 잘 되어 있어, 우리나라 대중가요 이해에 도움이 될 듯합니다.
[글쓴이] 고인돌 서울(maxl****)
https://cafe.naver.com/songgain/139383
팬클럽에 가입하지 않았다면 이 링크가 열리지 않으므로,
풀어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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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시각] 2019.08.27. 10:24
요새 일본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저 같은 대중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중엔 노래와 가인님 관련사항도 있습니다.
앞뒤를 둘러보아 조각난 회상과 상상이 적지 않습니다.
트로트의 짧지 않은 역사에서 기인한 것이라 보듬어 살펴봄직도 합니다.
우선 트로트의 시작입니다.
두루 아는 대로 트로트는 한국 민요의 영향을 받은 일본음악 엔카와 관련이 많습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의 연구와 논쟁이 있는데
저는 ‘트로트는 한국과 일본 양자에 걸쳐 동시에 발생 발전한 것으로
개인적으로는 한국적 요소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고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노래 자체입니다.
한국 최초의 히트곡은 ‘희망가’ 와 ‘사의 찬미’라고 합니다.
이 노래들의 가사는 어둡고 슬픕니다.
특히 대표적 히트곡인 ‘사의 찬미’는 처절합니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눈물로 된 이 세상 나 죽으면 그만일까...’
어떻게 이런 노래가 최고의 히트곡이 되었을까 싶지만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를 감안하면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트로트로 한정하면 최초 최고의 히트곡은 고복수님의 ‘타향살이’가 됩니다.
이 노래는 더 구체적으로 당시의 현실을 반영합니다.
토지와 생계와 나라를 잃은 사람들은 고래로 살아온 땅을 떠납니다.
간도와 만주 중국과 일본 미국과 하와이, 기타 세상의 모든 곳으로.
또 잔인할 정도로 강요된 토지정리와 착취적 개발 사업은
수백 수천 년 고정된 농경사회를 흔들어 사람들을 사방으로 흩어 놓았습니다.
이 속에서 들리는 ‘타향살이’는 지금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강렬한 정서를 주었을 것입니다.
뺏기다시피 고향을 잃은 해외와 국내의 한국인들은
타향살이를 닳아 없어지도록 듣고 불렀습니다.
한국 대중가요와 트로트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고난에 처한 모든 나라와 민족이 그랬듯
한국도 일본과의 슬픈 사연으로부터
현대 대중가요를 일구었던 것입니다.
2
트로트와 일본과의 관계는 해방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도 지속됩니다.
이미자 조용필 김연자 계은숙님들의 일본 활동은 유명합니다.
우리 대중은 그런 활동이 있었다는 것만 알지
왜 한국가수들이 일본의 엔카 무대에서 그렇게 각광을 받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여기엔 앞으로 연구해볼만한 무언가가 있는 듯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 엔카 시장의 한국 가수 최고 히트곡인 조용필님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그렇습니다.
이 노래는 일제의 귀환을 상징하는 노래로 일본 우익의 각광을 받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사실 여부야 검토해보기 전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어쩐 일인지 일본은 한국 가요에 관심이 많습니다.
시장의 한 부분을 반드시 한국 가요에 할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트로트가 일시 쇠퇴한 이후 이 전통은 케이팝으로 이어집니다.
2천 년대 초기부터 일본은 케이팝의 가장 중요한 시장으로 떠오릅니다.
어쩌면 한국 시장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일본 또한 케이팝을 수용하고 대신 반드시 일본어를 첨부하여 노래하게 합니다.
여기엔 어딘가 통제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흔적은 방탄소년단에서 극렬하게 폭발합니다.
방탄소년단의 원폭장면 의상 착용 시비가 그것입니다.
일본은 왜 그렇게 방탄소년단을 미워했을까요.
이 사건은 방탄소년단이 일본시장을 벗어나 세계시장을 석권하던 시기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일본은 이것, 일본 시장의 통제를 벗어나 비상하는 한국 케이팝 현상이 싫었다는 해석이
유력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다소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면
일본은 트로트와 케이팝으로 이어지는 한국 대중가요를
자신들의 시장을 통해 전유하려했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이는 한편 공개적으로 다른 한편 그보다 훨씬 많은 비공개적 루트를 통해
한국의 경제 사회를 통제하려 했던 일본의 행태와 맥을 같이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본의 의도는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현 시기 무역 분쟁을 일으킨 일본은 오히려 한국의 반격으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으며
일본이 방탄소년단을 통제하기는커녕
방탄소년단이 오히려 소외되고 억압받는 일본 팬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통제자와 통제받는자가 역전되고 있습니다.
20세기 초 사의 찬미와 타향살이로 출발한 한국 대중가요는
100년 만에 다른 지평을 넘어섰습니다.
트로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선두는 다름 아닌 송가인입니다.
왜 그럴까요.
3
저는 가인님이 미스트롯에 등장한 첫날부터 지평을 달리한 가수가 탄생했다고 확신했습니다.
‘트로트 100년의 해방과 완성’ ‘시대의 효성’ ‘반도의 혼, 신의 노래’라는 앞서의 글들이 다 그것입니다.
우선 가인님은 작곡가나 기획사와 무관하게 성장한 가수입니다.
때문에 그 속에 있을 수 있는 일본의 흔적과 전혀 무관합니다.
또 가인님은 어떤 가수보다 철저하게 대중에 의해서 부상한 가수입니다.
시스템과 인맥의 개입이 가장 적은 가수인 것입니다.
역시 흔적을 극소화하는 요소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가인님의 소리와 노래 자체입니다.
철저한 국악과 판소리의 바탕과
무속을 포함한 철저한 한국 전통에서
철저한 개인적 연구가 만들어 낸 이 소리는
정말로 새로운 소리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소리를 트로트의 정통이라 느낍니다.
이 새로움은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트로트의 본질, 트로트의 가장 깊은 내면을 비로소 드러낸 것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은 송가인을 역사적 사건이라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한 개인이나 한 분야의 문제를 넘습니다.
100년의 현대사를 지낸 한국 사회의 모든 부분이 조합되어
대중과 가수와 예술이
무의식적이지만 총체적으로 질적 비약을 이룬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시대의 한국인은 이제 우리 자신의 노래를 부르고 싶었고
1막의 고된 여정을 완수하고 잠시 돌아보는 시간에
우리 본래의 소리로 자신을 확인하며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그 자리에 송가인이란 놀라운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그 깊은 회한, 그 높은 흥과 신명, 그 맑고 청아한 소리의 가닥들,
그 작고 예쁘고 우렁차고 그윽한 큰 애기의 열창 장면.
어떻게 사람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정 달라진 시대와 달라진 노래의 지평 아닐는지요.
가인님. 예인의 길이 어렵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해왔습니다.
연예계는 단 하루 단 한 시간도 사연 없는 순간이 없으며
아무 때 아무데서나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중은 추측할 수도 계산할 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혹간 혼돈이 일어도 오히려 한 발 물러 돌아 살핌은 약이 되기도 한답니다.
그 자리에서 더욱 정갈하게,
노래를 사랑하고 대중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여 노래하소서.
그리하면 우리는 그 품에서 열광하고 응원하고
때로는 지지고 볶아 소란스레 뛰어 놀 것입니다.
우리의 딸, 우리의 누이, 우리의 디바, 우리의 영웅이여,
다만 그렇게 언제까지라도 노래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