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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成均館)은 고려 말부터 이어진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이다. 한국의 옛 대학(大學)으로 그 명칭은 고려 충선왕 때 국학(國學)을 성균관으로 개명한 데서 비롯하였다. 공민왕 때는 국자감(國子監)이라 부르다가 곧 성균관으로 복귀되었는데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 조선 일대를 걸쳐 한국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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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연원
고려의 최고교육기관인 국자감이 고려 충렬왕 때 성균감으로 바뀌었다가 충선왕 때 성균관으로 바뀌었다. 그 뒤로도 몇 차례 개칭되었다가 1362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어 조선으로 이어져서, 조선 시대에는 성균관이 한양과 개성에 한 곳씩 두 개가 존립하였다. 한편 고구려 때부터 나라의 최고교육기관을 가리키던 이름인 태학(太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정삼품 대사성이 최고 책임자이다.
[편집] 입학 자격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우선적으로 성균관 입학 기회가 주어졌고, 그 외에 선발시험인 승보(升補)나 음서를 통해 입학할 수 있었다. 정원은 200명이었으나 유동적이었다. 또한 성균관 유생을 학생 또는 성균관 학생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대개 정원은 200명으로 여기에 미달하면 사학생도·유음적자(有蔭嫡子)·소과초시 입격자(小科初試入格者)·조관(朝官) 등에서 보충하였다. 학생은 기숙사 '재(齋)'에 반드시 머물며 학령(學令)의 교칙을 엄수해야 한다. 그들의 자치활동으로 재회(齋會)라는 집회가 있고 장의(掌議)·색장(色掌) 등의 회장과 간부진을 둔다. 장의는 재회를 절대적으로 선도하며 학령을 어긴 유생을 문책하여 출재(黜齋:퇴학)할 권한을 가졌다. 그리고 사문유사(斯文有事)나 토역(討逆)이 있을 때 장의의 발론으로 연명(聯命) 상소한다. 이를 유소(儒疏)라 하며 이 모임을 대의사(大議事)라 한다. 유소시에는 사학에서 호응하며 궐문 앞에 연좌하여 왕의 비답(批答)을 기다린다. 유소가 여의치 못할 때는 식사를 거절하는 시위로써 권당(捲堂)을 행하며 나아가 성균관을 비워버리는 공관(空館)이라는 동맹 휴학에 들어간다. 이것은 식자층의 여론을 환기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 밖에 유생은 대과(大科)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
[편집] 역사
1398년(태조 7) 조선 태조는 숭교방(崇敎坊 : 명륜동)에 성균관 건물을 준공하고 고려 제도대로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文廟), 유생들이 거처하는 재(齋)를 두었다. 태종은 땅과 노비를 지급하고 친히 문묘에서 제사지내고 왕세자의 입학을 명령하니 그 후 이것은 상례가 되었으며, 여러 왕을 거치는 동안 경기도 연해의 섬, 전라남도 해안의 어장과 많은 땅이 부속되었다. 규모는 성종 때에 완성되었는데, 향관청(享官廳)과 존경각(尊經閣 : 도서 창고)도 이때 증설되었고 현종 때 비천당(丕闡堂 : 과거장), 숙종 때 계성당(啓聖堂)이 세워졌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이 침탈된 이후 그 기능이 상실되었고, 명칭 또한 경학원으로 바뀌어 경전을 가르치는 사설 전문학원으로 전락하였다. 1945년 10월 17일 군정법령 제15호 제국대학명칭변경에 의해 경학원은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하였다.
명륜당과 부속건물에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敎)를 세웠는데, 1945년 광복 이후, 원래의 성균관이 가지고 있던 최고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근대적 형태의 종합대학인 성균관대학교로 이관되었다. 현재의 성균관은 유교 및 전통문화 전문 교육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1][2]
[편집] 구성
관원으로는 총책임자로 지관사(知館事 : 홍문관 대제학이 겸임)를 두고 그 밑에 동지관사(同知館事 : 겸직) 1명, 전임관원으로 대사성(大司成 : 정3품) 1명, 제주(祭酒 : 정3품) 2명, 사성(司成 : 종3품) 1명, 사예(司藝 : 정4품) 2명, 사업(司業 : 정4품) 1명, 직강(直講 : 정5품) 4명, 전적(田籍 : 정6품) 13명, 박사(博士 : 정7품) 3명, 학정(學正 : 정8품) 3명, 학록(學錄 : 정9품) 3명, 학유(學諭 : 종9품) 3명이 있었다. 이 중 박사 이하는 정원 외에 봉상시(奉常寺)의 관원과 사학(四學)의 훈도(訓導)가 겸직한 것이 있었다.
입학 유생의 정원은 200명으로 생원이나 진사의 자격이 있는 자라야 했으나 부족할 경우에는 사학의 생도 중에서 보충하였다. 뒤에 경비 부족으로 영조 때는 정원을 120명, 조선 말기에는 100명으로 한 일이 있다.
[편집] 유생운동
조선시대의 최고학부인 성균관 유생들이 집단적 행동으로 국정을 비판하거나 왕에게 상소한 운동. 1398년 유학 교육기관으로 개설되어 성종때에 그 체제의 탄생을 본 성균관은 역대(歷代) 제왕의 적극적인 보호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제학(大提學) 이하의 석학들이 깊이 관계하고, 뒤에 고관·대학자가 거의 모두 여기서 나와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재학중 인 유생들은 정주학(程朱學)의 입장에서 국정에 대한 비판자 역할을 하였고, 이교(異敎)를 사도(邪道)라 하여 배척하는 데 앞장섰으며, 국란(國亂)이 있을 때는 충의지심에서 집단 저항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당파싸움에 이용되기도 하였고, 보수적인 편견으로 새로운 종교·사상의 등장을 봉쇄하는 반동적 역할도 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을 간추려보면 아래와 같다.
- 1519년 기묘사화 때 성균관 유생들은 조광조의 사면을 항소(抗訴)하였으나 실패하였다.
- 1611년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를 논박하자 성균관 유생들은 정인홍을 청금록(靑衿錄)에서 삭제하였다.
- 1893년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하자 성균관 유생들은 동학 탄압을 상소하였고, 동학교도들은 이에 대항하여 광화문 복합상소(伏閤上訴)·보은대시위를 하게 되었다.
- 1902년 성균관 유생 신채호(申采浩) 등은 이하영(李夏榮)등의 매국음모를 규탄하였다.
[편집] 함께 보기
[편집] 주요 인물
[편집]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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