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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회사에서 인정을 받는 형제님이 한 분 계십니다.
평일 늦게까지 그리고 주말에도 일을 했으며, 멀리 출장을 가는 기회도 많았습니다.
20년을 이렇게 회사에 온 힘을 다해 일했지요.
그런데 이렇게 회사에서 열심히 일할수록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한다고 했지만,
가족보다는 직장 동료와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긴 밤늦게 집에 들어오면 아내와 아이들은 이미 자고 있었고,
아내와 아이들이 아직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아침 일찍 사무실로 출근해야 했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오히려 자기 가족보다 사무실 동료의 가족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과연 가정이 편안한 안식처가 될 수 있을까요?
점점 집안에서는 자신이 낯선 사람 같다는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에게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고, 아내와는 사소한 문제로 인해 자주 다투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는 했지만, 결국은 가족의 존재는 잊히고 일 자체에만 더욱 더 매달리게 되었답니다.
과연 행복할까요?
어디에 중점을 두고 있는가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만약 가족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살았다면 어떻게든 가족과의 만남을 이루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로는 가족을 위한다고 했지만, 정작 몸으로는 직장의 일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혹시 어디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까?
사랑입니까?
일입니까?
물론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는다는 생각으로 사랑과 일 모두를 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지요.
그러나 분명히 중심은 확실하게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분의 이야기가 남 이야기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의 일과 주님의 일 가운데에서 항상 세상의 일에 중심을 두고 있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사랑 행위는
유다 이스카리옷의 말처럼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일과 대립되는 행동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신 주님이기에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이 행동을 그대로 놔두신 이유는
당신을 섬기는 일을 제쳐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전해주시기 위함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하면서도 그 첫째 자리에 주님이 안 계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지요.
유다 이스카리옷은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자신이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값으로 겨우 은전 30냥을 받은 것을 볼 때
예수님보다도 향유를 더 값진 것으로 판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이스카리옷이 배반할 것을 이미 아셨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과 함께하도록 두셨고, 또 중요한 자리라고 할 수 있는 돈주머니까지 맡아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계속해서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많은 사랑의 행위와 말씀으로도 유다의 마음은 돌릴 수가 없었지요.
어쩌면 우리도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계속 기회를 주시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주님을 첫째 자리가 아닌 맨 마지막 자리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스스로의 합리화만 시키면서 세상의 것들만 움켜잡으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유다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는지를 반성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힘내어 주님께 멀어졌던 내 마음을 되돌려 봅시다.
세상의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일이 훨씬 중요합니다.
- 인천교구 / 안식년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의로움이란?>
"저에게는 소중하게 간직하고픈 사랑이 있습니다.
작고 어린 소녀지만 언제나 저에게 많은 사랑을 준 그 아이..
그 아이는 저보다 세살 어린 소녀였습니다.
그때 미정이는 고등학교 2학년생이고 저는 21살의 청년이었습니다.
이름은...미정...
지금도 그 이름을 들으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제가 이토록 미정이를 사랑하는 이유는...
제가 입대를 일주일 앞둔 날이었습니다.
미정이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너무나 막막했습니다.
미정이는 마음이 너무나 여린 아이였습니다.
저는 큰 결심을 하고 미정이에게 말했습니다.
기다려 달라는 말을...
미정이의 맑은 눈에서 너무나 많은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미정이가 하는 말이...
“내가 18년 동안이나 오빠 만나기를 기다렸는데 그깟 2년 못기다리겠어...”
미정이는 웃으면서 이 말을 저에게 했습니다.
그러나 눈에서는 변함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미정이와 저는 논산으로 갔습니다.
훈련소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미정이에게 기다려 달라는 말을 했습니다.
미정이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오늘따라 미정이의 눈물이 너무나 슬퍼 보였습니다.
가끔 소포도 오고... 사진도 보내 오고..
그러나 면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미정이 말이
“내가 면회 안 가는 이유는 오빠의 군대 가기 전 그 모습을 간직하고 싶어서 그래...
지금 오빠는 많이 지쳐 있고 힘들어 하잖아..
나 오빠 그런 모습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아..
그러니까 오빠도 휴가 나오더라도 나 찾지 말고.. 알았지?”
그랬습니다.
저는 미정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휴가도 다 반납한 채 그렇게 2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제대를 1주일 앞둔 날...
내무반 선임하사의 추천을 받아 휴가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면 바로 제대를 할 수 있게 배려를 해주셨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드디어 미정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미정이가 있는 용인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수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미정이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친구들 말이 제가 입대하고 이틀 뒤에 미정이가 뇌종양으로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미정이는 제가 슬퍼할 것을 알고 제게 비밀로 하고 제대할 날을 숫자로 세어 천 통이 넘는 편지를 다 쓰고 하늘나라로 가버린 것이었습니다.
편지는 친구들에게 부탁을 하고...
미정이를 떠나보낸 강가에 갔습니다.
한참을 거기에 서있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훈련소로 들어가던 날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그날따라 미정이의 눈물이 왜 그리도 슬퍼 보였는지..
한참을 서 있다가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강가에 띄어 보냈습니다.
“미정아! 이제 오빠 제대해..
우리 미정이 기쁘지?
오빠 힘들 때마다 미정이 생각하면서 참았어..
이제 하루만 참으면 된다..
아! 처음이라서 쑥스럽다.
오빠 편지 같은 거 태어나서 처음 써 보는 거잖아..
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 알았지?
참! 잊을 뻔 했네.. 한 번도 말한 적 없었지?
나 너 사랑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편지를 미정이가 꼭 읽어 볼 수 있도록..
부대로 돌아왔습니다.
짐 정리를 하고 있는데 일병하나가 오더니 편지를 건네주었습니다.
편지 봉투에 쓰여진 말이 저를 너무나도 아프게 했습니다.
“오빠 미정이...
오늘이 오빠 제대하는 날이구나..
오빠 제대해서 늠름해진 모습 보고 싶었는데...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할래..
진짜 미안해..말도 안하고 가서..
나 용서해 줄 거지? 오빠 나 용서해줘...
오빠도 미정이가 슬퍼하는 거 싫어하잖아..
미정이두 오빠가 나 때문에 슬퍼하는 거 싫어...
오빠..나 부탁이 있는데.. 나 없다고 밥 거르지 말고.. 절대로 아프면 안 된다.. 알았지?
그리고 나 잊어줘.
난 오빠가 나 때문에 괴로워하고 힘들어 하는 게 너무 싫다.
알았지? 약속했다.
참! 잊을 뻔 했네... 한 번도 말한 적 없었지?
나 오빠 사랑해...”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보니 미정이도 제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미정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미정이를 잊지 못하니까요...
미정이가 그리우면 저는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흐르면 그게 미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독 눈물이 많은 아이...
제가 다가가 손을 잡으면 얼굴이 금세 붉어지는 아이..
지금 미정이가 살아 있다면 21살이 되었을 텐데..
저를 그토록 사랑했던 미정이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제 24살의 성숙한 남자가 됐습니다.
아직까지 미정이를 잊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눈물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꾸며낸 글일 것 같은데 그래도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 안에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정이는 자신의 죽음과 자신이 쓴 생명과도 같은 천 통의 편지로 이 글을 쓴 사람 안에 살게 되었습니다.
모든 음식이 살아서는 그 사람 안에 들어가서 살과 피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누군가도 내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 사람 안에 들어가면 살과 피가 되어서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정의란 값을 치르지 않고서는 어떠한 것도 없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한다는 것이 정의라고 여깁니다.
맞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벌을 받는다고 자신이 잘못해 놓은 일이 사라질까요?
이미 따 먹은 선악과를 다시 붙여 놓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오직 정의는 그 피해 본 사람의 용서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정의는 잘못한 쪽에서 치르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쪽에서 손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무화과 나뭇잎이 아닌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죽여 그 가죽 옷으로 입어야만 정의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의는 오로지 우리 죄를 위해 희생하신 하느님의 어린양의 죽음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께서만이 당신 의로움(정의)이신 어린양을 통해서 우리 손을 다시 붙잡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이사 42,6-7)
우리는 다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천 통의 편지이며 의로움이시고 순교하신 어린양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의롭게 됨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나에게 아드님을 제물로 보내시는 하느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내가 그 선물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혼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의로움이 나와 한 몸이 되게 됩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모두를 줄 수 있는 사랑>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아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두를 줄 수 없다면
아직 사랑이 무르익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3kg)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하였습니다(요한12,3).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자기의 아주 소중한 것을 바쳐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냄새가 가득했다는 것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집안에 가득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럴 때는 냄새가 아니라 향기라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 상황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하며 향유의 값어치를 계산하였습니다.
향유를 붓는 행위를 존경과 사랑, 믿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계산하였습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입니다.
유다의 눈에는 돈이 보일 뿐이었습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하면서 돈을 가로채던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자기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지금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바쳐드려야 함을 알지만 아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나의 시간과 능력, 재물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에 기꺼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부활의 생명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은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들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요한12,11).
‘좋은 일에는 항상 마가 낀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일수록 드러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생색내기는 정치꾼들이 합니다.
살리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죽음의 어둠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곳에 기쁨이 넘쳐나야 하는데 유다의 모습도 있고, 수석 사제들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생명의 문화’와 더불어 ‘죽음의 문화’가 함께 있습니다.
살리는 일에, 생명의 문화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 분노, 적개심, 두려움, 기득권을 누리려는 곳에 어둠의 그림자가 밀려옵니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이 있는 곳에 모두를 주고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나보다는 너를 위한 배려를 통해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고
마리아처럼 존경과 사랑으로 모두를 바칠 수 있는 한 주간 되시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베타니아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그러자 유다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라고 말합니다.
복음서 저자는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한 말은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장면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축제에 필요한 것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요한 13,27-29)
유다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일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는 돈주머니에 있는 돈을 가로채는 도둑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면서 공금 횡령도 했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마리아의 향유 값을 아까워한 것은
자기가 가로챌 수 있는 돈을 생각하면서 아까워한 것입니다.
도둑질과 공금 횡령과 탈세 등으로 부정 축재를 하는 사람이 대부분의 돈은 감추어 두고,
약간의 돈으로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내면서 '착한 사람'으로 소문난 경우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면서 속았습니다.
그렇게 '위선'으로 사람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을 이렇게 꾸짖으신 적이 있습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루카 11,39)
유다는 겉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착한 사람인 척 했지만,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한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마리아의 행동은 내 장례를 미리 행한 것과 같으니 그냥 놔두어라."입니다.
마리아 자신이 정말로 그런 뜻으로 그렇게 행동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알고 그랬다면 마리아의 예지력을 나타내고, 모르고 그랬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한 것이 됩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감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을 생각하다가 향유를 샀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아마도 마리아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적실 때에 슬프게 울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라는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마리아는 이미 향유를 다 부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이 말씀을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부은 마리아의 행동을 기억하여라."로 해석하기도 하고,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고 있었으니...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떻든 마리아 입장에서 생각할 때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께 최고의 존경과 사랑과 정성을 드린 일이었습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은 평소에 늘 해야 하는 일이고, 내 장례는 특별한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마리아의 행동은 특별한 뜻이 있기 때문에
마리아를 나무라지 말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거꾸로 생각할 필요도 있습니다.
"내 장례는 특별한 일이지만,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은 평소에 늘 해야 하는 일이니, 언제든지 소홀히 하지 마라."
예수님 말씀은, 특별한 경우에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주간과 부활절 전례와 행사가 중요하지만,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을 중단하면 안 됩니다.
평소에 하던 사랑 실천은 그대로 지속되어야 합니다.
이 내용을 좀 더 넓게 생각해서, 교회의 모든 일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전을 신축한다는 이유로 사랑 실천을 중단하면 안 됩니다.
성전을 지을 돈도 모자라는데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가라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성전 신축을 조금 뒤로 미루는 것이 옳습니다.
반대로, 가난한 이들을 돕는다는 이유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지만,
하느님 사랑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의 사랑이 다른 사랑과 대립될 수는 없습니다.
두 사랑은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은 하나입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죽음으로 치닫는 생명의 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죽음의 길, 영광의 길에서 잠시 멈추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조그만 마을 베타니아로 가신다.
예수님과 친하게 지냈던 마리아와 마르타, 그리고 라자로는 이 마을에 살았다(요한 11,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여행 중에 있을 때 그들을 방문하시어 정담을 나누곤 하셨고(루카 10,38-42),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시기도 하셨다(요한 11,1-44; 12,17).
예수님을 정찬에 초대한 나환우 시몬의 집 역시 이곳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정찬을 나누는데 어떤 여인이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발라주기도 하였다(마르 14,3-9).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 전에 이곳에 오시어 입성 준비를 하셨고,
예루살렘 성전을 두루 살펴보신 다음에 저녁이 되자 베타니아에 오시어 묵으셨으며,
그 이튿날 다시 성전으로 가셨다(마르 11,1. 11-12. 15).
라자로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진다.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을 향한 십자가의 여정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자신들에게 보여준 관심과 사랑에 대한 인간적인 예의에서 만찬을 준비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마리아의 향유 바름이 주목된다.
이 향유는 왕들이 사용하던 인도산 고급 향유로서, 한 리트라는 약 330그램 정도요 그 값은 약 300 데나리온이었다.
마리아는 이런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바르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는다.
여기서 향유를 바르는 행위는 무엇을 뜻하는가?
세 가지를 묵상해 볼 수 있다.
먼저, 향유를 발에 바름은 장례 준비로서 시체에 기름을 바르는 행위이다.
곧 마리아는 사실상 예수님의 죽음 준비 곧 생명의 신비에 참여한 것이다.
향유는 장사를 지낼 때에 정식으로(요한19,39-40),
혹은 예수께서 아직 살아 계시는 동안 미리 선취적으로(마르 14,8) 그분의 몸에 발라진 것이었다.
우리도 나의 죽음 준비와 함께 다른 이의 죽음 준비에 자신의 것을 기꺼이 쏟아 부어야 할 것이다.
다른 이의 죽음, 즉 허물과 실수, 잘못, 연약함, 부족함 등이 나를 통하여 걸러지고 받아들여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내가 다른 이의 이런 죽음의 상태를 받아들일 때
그 사람의 죽음에 나 또한 참여하는 것이고,
바로 그때 그 사람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야 할 생명의 길, 십자가의 길이다.
다음으로 왕들이 사용하는 향유를 바르는 행위는
예수님의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기 위하여(12,12-16), 왕다운 품위를 표현하는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기름부음 받은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돌아가듯이
또한 그분은 기름부음 받은 왕으로서 죽는다(18,33-40; 19,1-6. 12-16. 19).
이러한 구세주 왕의 입성 준비는 예루살렘에서 떨어진 한적한 베타니아에서 조용히 이루어진다.
위세 당당한 왕의 대관식과는 전혀 다르게 조용히, 소박하게,
그러나 온 집안에 향기가 가득하듯 충만하게 예수님의 입성은 준비되었다.
그분의 생명을 향한 죽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의 십자가의 길도 이처럼 ‘드러내거나’ ‘요란스럽지 않게’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랑의 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향유를 바름은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로 사랑을 체험한 마리아가
물질적인 양이나 가치를 넘어서서 자신에 대한 사랑에 감사와 지극한 사랑의 표시를 한 것이다.
마리아는 300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발에 발랐다.
여기서 우리는 유다와 마리아의 영적인 시각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이렇게 사랑은 대가없이 주는 것이요,
한없이 모두를 주는 것이며 끝까지 되돌려 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사랑은 고통과 슬픔까지도 함께 하겠다는 각오요, 전폭적인 수용이다.
우리도 말없이 다른 이들의 죄와 연약함을 사랑으로 감싸주고 받아들이는 영혼의 향유바름을 실행하도록 하자!
- 작은형제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람은 꽃이다 - 삶의 향기>
얼마 전 조카 주혁의 결혼식 때의 익살스런 장면에 많이도 기분 좋게 웃었습니다.
청년 사회자는 신랑(주혁)에게 신부(하윤)의 이름을 부르며 팔굽혀 펴기를 시켰습니다.
"하윤아, 사랑해! 하윤아, 사랑해!"
팔굽히면서 '하윤아'를, 팔펴면서 '사랑해'를, 땀을 흘리며 웃으면서 수없이 반복하는 모습을 보며
신부와 신부측의 부모는 물론 모두가 흐뭇한 표정이었고 식장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였습니다.
'하윤아' 대신 '예수님'을 넣어, '예수님, 사랑합니다'를 반복하면
우리 수도자들에겐 그대로 끊임없는 고백의 기도가 됩니다.
사람은 꽃입니다.
사람은 사랑입니다.
시(詩)는 꽃입니다.
시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감동입니다.
감동은 스며들어서 내 생각과 행동을 바꿔줍니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시인이 많은 나라가 한국일 것입니다.
하여 사람은 시(詩)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시같이, 꽃같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랑의 삶이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얼마 전 개인전을 열었던 민경숙(루시아) 자매의 도록을 봐도 반 이상이 꽃들을 대상한 그림이었습니다.
요즘 면담고백성사 때는 '보속'으로 '말씀처방전'과 함께 꽃꽂이 병에서 '꽃 한송이'를 뽑아 선물로 드립니다.
선물 받으면 모두가 본능적으로 꽃의 향기를 맡습니다.
꽃만 아니라 영혼들도 그만의 고유한 향기를 지닙니다.
자매들은 물론 형제들까지 꽃을 받아들 때 활짝 웃음 짓는 얼굴들은 그대로 꽃입니다.
저절로 '사람은 꽃이다'에 이어 '사람은 사랑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장면은 그대로 한 폭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그림이자 시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이 바로 그러합니다.
복음 서두에 등장하는 마르타와 라자로, 그리고 주인공인 마리아입니다.
재미있는 것이 요셉수도원의 서로 이웃한 세 피정집의 이름도 세 분의 이름을 따,
봉사자집은 '마르타', 남자형제들의 피정집은 '라자로', 그 중앙에 위치한 아름답고 향기로운 새 단체피정집은 '마리아'로 명명해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향유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향유 냄새라기보다는 향유 향기입니다.
참 아름답고 향기로운 시같은 그림 한 폭입니다.
마리아의 향기, 사랑의 향기, 삶의 향기를 상징합니다.
사랑은 감동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랑에 충격의 감동을 받으신 예수님이십니다.
반면 향유의 낭비에 안타까워하는 이스카리옷 유다에겐 이런 사랑의 향기가 전무합니다.
결국은 예수님을 팔아 넘긴 유다였습니다.
앞문은 세상의 이웃에, 뒷문은 하느님의 사막에 활짝 열려 있을 때 절로 아름답고 향기로운 영혼입니다.
제 방의 경우에서도 그대로 깨닫는 진리입니다.
앞문은 복도의 형제들을, 뒷창문은 사막의 상징과도 같은 불암산 정상을 향하고 있습니다.
장시간 밀폐되어 있을 때는 악취요 때때로 앞문, 뒷문 열어 환기 시킬 때는 싱그러운 내음의 향기입니다.
개인은 물론 공동체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사랑은 개방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의 사랑이 있어 앞문 뒷문 활짝 열린 삶이 됩니다.
이렇게 앞문, 뒷문이 사랑으로 활짝 열려 있을 때 영혼이나 공동체도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이를 노래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자작시의 다음 한 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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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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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사야의 주님의 종이 상징하는 바 예수님의 영혼이 바로 그러합니다.
늘 하느님과 이웃에 사랑으로 활짝 열려있던 아름답고 향기로운 영혼의 예수님이요,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반한 오늘 복음의 마리아와 우리 제자들입니다.
이사야가 묘사하는 주님의 종의 모습은 그대로 관상가, 신비가의 모델이자 우리의 이상형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내가 너를 빚어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이렇게 하느님과 이웃에 사랑으로 활짝 열려 있는 주님의 종이 되어 살 때,
비로소 주님의 빛과 향기를 발하는 아름다운 영혼들에 공동체입니다.
사람은, 삶은 꽃이자 시이자 사랑입니다.
하여 시편 성무일도를 끊임없이 바침이 좋습니다.
시편은 바로 시이자 기도이자 고백이고 노래입니다.
끊임없이 사랑을 가득 담아 시편을 노래할 때
하느님을 닮아 저절로 아름답고 향기로운 영혼으로 변모됩니다.
하느님의 최고의 시가 바로 예수님이요 시편들이요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사랑의 향유'를 봉헌하는 우리 모두를 당신 생명의 빛과 향기로 가득 채워 주시어,
아름답고 향기로운 시(詩)같은 인생(人生)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도다."
(시편 27,1ㄱ)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교회는 성주간 월요일과 화요일, 수요일, 그리고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걸쳐
이사야서 제2부(40―55장)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노래’ 네 편을 묵상합니다.
예수님의 삶이, 특히 그분의 수난과 죽음이 이 노래들에 나타난 종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네 노래 가운데 첫째 노래인 오늘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종을 부르십니다.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종을 선택하십니다.
해방을,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기 위해 종을 보내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주간에 봉독되는 다른 세 편의 종의 노래에서처럼,
주님의 종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의 수고는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종을 박해하고 마침내는 죄인으로 몰아 죽이고 맙니다.
그렇지만 그의 죽음은 다른 이들의 병고와 고통을 짊어진 죽음이었습니다.
그 죽음으로 그는 많은 이를 의롭게 합니다.
고통과 죽음이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
다른 이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주님의 종의 노래들에 담긴 새로움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성주간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이 노래들이 얼마나 깊은 진리를 담고 있는지를 봅니다.
불의와 폭력에 희생된 죽음,
그러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 받아들여진 죽음!
결코 외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온유한 종은 이 세상의 죄를 끌어안고 죽임을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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