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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스바하바 원문보기 글쓴이: 스바하바
인연 19
제 5장 물소리 바람소리
가을비가 오려는 듯 차창에 빗방울이 날벌레처럼 붙기 시작했다. 고명인은 브러시를 작동하여 빗방울을 닦아냈다. 그러자 시야가 멀리 드러났다. 추수가 끝나버린 들판은 언제 보아도 황량했다. 예전에는 움막 같은 볏단들이 들판을 지켰는데, 지금은 기계가 추수를 하면서 알곡만 챙기고 볏짚은 잘게 간 뒤 논에 뿌려 썩히는 모양이었다.
“볏짚이 필요해서 마을로 나가 봤지만 구하기 힘들더군요. 소를 기르는 농가에서 다 가져가 버렸고, 남은 것들은 기계로 갈아서 논에 버렸다고 해요. 그래서 고령의 농가까지 가서 겨우 구했지요.”
겨울을 나려면 큰절에서도 볏짚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겨울을 보내고 이른 봄에 먹는 봄배추를 덮거나, 올해 새로 이식한 나무를 감싸주거나, 추위를 타는 화초를 보호하는 데 상당한 양의 볏짚이 사용되기 때문이었다.
“스님, 속가 고향이 농촌이십니까.”
“태어나기는 농촌에서 태어났고 학교는 도회지로 가 다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늘 농촌과 도회지, 두 곳 모두 추억이 있습니다.”
승용차가 해인사 인터체인지를 벗어나 88고속도로에서 광주 방향으로 진입했다. 혜각이 송광사를 먼저 들르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일타스님의 첫 수행처는 송광사인 모양이었다.
“일타 큰스님을 생각하니 공연히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큰스님께서는 은사인 고경 노스님께서 입적하시자 바로 송광사 선방으로 가셨는데, 한 달에 걸쳐서 탁발을 하시면서 걸어갔다고 합니다. 첫 행각 때부터 고행을 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고 선생이나 나는 지금 편안하게 가고 있으니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만행 길에 들어선 혜각은 이미 일타스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있는 듯했다. 편안하게 가는 자신을 자책하는 것도 스승을 추모하는 마음이 절절하기 때문일 터였다.
“마음 같아서는 삼보일배를 하고 싶지만 어디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습니까.
잘못하면 사람들에게 비웃음의 대상이 돼버리니까요.”
“스님, 삼보일배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세 번 걷고 한 번 절하며 가는 것을 말합니다. 티벳 스님들은 오체투지로 삼보일배하면서 몇 천리 길을 간다고 합니다.”
“왜 그런 고행합니까.”
“제가 티벳의 설산을 갔을 때 한적한 시골길에서 그들을 만나 물어 본 적이 있습니다.”
“무어라고 하던가요.”
“그냥 해맑게 웃기만 했습니다. 전혀 고통스러운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본 웃음 중에서 그렇게 맑은 웃음을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것이 그 스님의 대답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스님은 그런 웃음을 얻기 위해 고행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말이 없었습니다. 해맑은 웃음을 한 번 지어보임으로 해서 저의 물음에 대답을 한 것입니다. 순간, 저는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 더 묻지 않았습니다.”
“염화미소란 것도 그런 것입니까.”
“글쎄요, 미소의 힘이라 할까요. 그 스님이 오체투지 중이어서 고개만 들고 미소 지었는데, 그때 저는 바로 이분이 부처님이구나 하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미소를 짓는 순간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비록 한 순간이지만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꽃을 꺾어와 빈 병에 꽂아 놓습니다. 꽃은 누구에게나 마음을 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꽃이 미소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혜각은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래 읽은 책이어서 책 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그 내용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미소의 힘’을 얘기하는 책이었습니다. 책은 저에게 한 순간이나마 부처님이 되게 했습니다. 첫 장부터 공감의 미소를 짓게 했으니까요. 저자는 슬픔으로 괴로워하는 한 여인에게 슬픔에게도 미소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슬픔 이상의 존재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고명인은 출출했지만 휴게소를 지나치면서도 감히 식사를 하자는 제의를 못했다. 일타스님이 송광사까지 탁발하면서 갔다고 하니 자신도 최소한 한두 끼 정도는 굶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서였다.
88고속도로는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여서 승차감이 좋지 않았다. 더구나 중앙분리대도 없는 2차선 도로였으므로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들이 돌진해오고 있다는 느낌에 공포감이 들기도 했다.
전라도부터는 더 굵어진 빗방울이 차창을 세차게 때렸고, 비구름으로 덮인 올망졸망한 산들이 선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도로는 노면이 거칠어 통행료가 아까울 정도였지만 가을비에 젖은 산야의 풍광은 모처럼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었다. 먼 산 속의 조그만 암자 같은 절들은 마치 숨바꼭질하듯 비구름 자락에 가리어 보일락 말락 했다.
묵묵히 가을 풍경을 감상하고 있던 혜각이 갑자기 합장을 하면서 말했다.
“사과할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스님, 말씀하십시오. 저는 스님이 가라는 대로 운전하겠습니다.”
“송광사로 가려 했는데 문득 사형(師兄)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문중의 좌장이신 혜인스님이지요. 일타 큰스님의 맏상좌이신데, 스님이 지금 수덕사 선방에 계십니다. 마침 오늘이 목욕하는 날이니 가면 만나 뵐 수 있습니다. 선방 수좌들은 목욕하는 날만 외부 손님을 맞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제로서 인사드린 지가 너무 오래 되어 뵙고 싶습니다만 고 선생은 어찌 하시겠습니까.”
“스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스님이 가자는 대로 움직일 생각입니다. 갑자기 저도 일타 큰스님의 맏상좌 분이 어떤 분인지 궁금해집니다.”
“고맙습니다.”
그렇다면 88고속도로의 종점인 광주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남원까지만 88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전주로 빠져나가 전주에서 다시 서해안고속도로를 찾아 들어가 홍성인터체인지로 나가는 길이 지름길일 것 같았다.
고명인은 지도책을 덮고는 물었다.
“맏상좌라고 하면 세속의 장남 같은 존재입니까.”
“그렇게 보면 됩니다. 세속의 장남이 재산 같은 것을 상속받는 위치라면 승가의 맏상좌는 은사의 유지를 받들고 기리는 데 수장을 말하지요.”
“법상좌라는 말은 또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법을 받은 상좌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 수법제자라고도 하지요. 그러나 법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은밀하게 전해지는 것이므로 법상좌라는 말은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게송으로 남기는 전법게(傳法偈)라는 것이 있긴 있습니다만.”
“사형께서 수덕사 선방을 찾아 안거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수덕사는 만공 큰스님이 계셨던 곳입니다. 만공 큰스님은 일타스님의 전 가족이 출가하는 데 불연(佛緣)의 원천이었던 스님이시지요. 그러니 그런 분위기를 좇아 사형인 혜인스님께서 수덕사 선방에 안거하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명인은 불연의 원천이라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
“만공스님께서 말하자면, 일타스님 가족을 불문에 귀의하도록 한 구심력이었군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친가만 보더라도 재가시절에 일타스님의 아버지는 불명을 법진, 어머니는 원만성이라고 만공스님에게 받았거든요. 그리고 일타스님의 누나인 응민스님은 금강산 법기암으로 가 출가한 이후 만공스님의 지도를 받았고요.”
고명인은 빗줄기가 다시 잦아들어 브러시가 차창을 닦는 속도를 줄였다. 가을비치고는 제법 기세를 보이더니 어느 새 제풀에 꺾이듯 수그러들고 있었다. 비가 그치면 날씨는 더 추워질 것이 분명했다. 고명인은 문득 뜨거운 국물이 생각나 전주로 가는 국도변에 차를 세웠다.
“스님, 공양 시간이 좀 지났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예전 스님들은 탁발을 못하면 굶기도 했다는데 공양시간이 좀 늦었다고 미안해
할 것은 없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이지요.”
고명인은 혜각을 순두부집으로 안내했다. 전주 하면 비빔밥이지만 가을비가 내린 뒤끝이라 뜨거운 국물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혜각은 뚝배기에 담긴 순두부를 뜨다 말고 또 응민스님 얘기를 꺼냈다.
“친가 쪽입니다만 일타스님 집안에서 가장 먼저 출가한 분이 바로 응민스님입니다. 더구나 응민스님은 말년에 수덕사 견성암에서 제자들을 지도하며 정진했던 분입니다.”
응민의 속가명은 김경희(金敬喜)였다. 1937년 공주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한 응민은 공부를 더 하고 싶어 일본으로 유학하고자 했지만 결혼할 것을 강요하는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혔다. 향학의 길에 고비를 맞은 응민은 외할아버지인 추금스님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러자 추금스님은 참 공부를 하려면 불문에 들어 정진하라고 조언을 해주었고, 응민은 그길로 금강산으로 들어가 대원(大願)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고 말았다.
집을 떠난 딸의 소식을 궁금해 하던 가족들은 이듬해 응민으로부터 108염주를 목에 건 사진한 장과 짧은 편지 한통을 받았다.
“한 생각에 검은 머리 한 다발 끊는 일 아까울 것이 없나이다. 이 세상 모든 것 다 버릴 것인데, 구할 것 많은 복잡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에서 법의 꽃을 피우는 일은 진실로 그 가치가 무한합니다.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응민 자신이 먼저 출가했으니 이제 가족 모두가 불도를 이루자는 응민의 결연한 서원이 담긴 편지였다.
이후 응민은 걸어서 수덕사로 와 만공스님의 회중(會衆)이 되었다. 당시 수덕사 선방에는 1백여 명의 수좌들이 수덕사 조실로 있는 만공의 지도를 받고 있었는데 만공이 수좌들에게 주는 화두는 ‘만법귀일 일귀하처’였다. 만공이 이 화두를 즐겨 주는 것은 서산의 천장암에서 한 소년에게 말문이 막혀 쩔쩔맸던 일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천장암에서 경허에게 점검 받으며 정진하고 있을 때 한 소년이 찾아와 하룻밤을 묵으면서 만공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던 것이다.
“모든 이치가 한 곳으로 돌아간다는데 그 한 곳은 대관절 어디로 간다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이것만 알면 만사에 막히는 것이 없다 하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만공은 분명하게 대답을 못했다. 그런데 그 소년은 만공을 크게 발심케 한 보살의 화신이나 다름없었다. 만공은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으므로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는 천장암을 빠져나와 온양 봉곡사로 가 노전을 보면서 ‘만법귀일 일귀하처’를 화두 삼아 용맹 정진한 끝에 오도를 이뤘던 것이다.
응민이 만공의 지도를 받으며 정진하던 어느 날이었다. 만공이 북을 두드려 선방 수좌들을 큰방으로 모아놓고 질문을 하나 던졌다. 경허가 남긴 임종게의 선지(禪旨)를 얘기해 보라는 질문이었다.
마음달이 외로이 둥글어
그 빛과 모든 상을 삼키니
빛과 경계를 함께 잊었거늘
다시 이 무슨 물건인고.
心月孤圓
光呑萬像
光境俱忘
得是何物
그러나 큰방에 모인 수좌들은 누구 하나 대답을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묵묵히 앉아 있기만 했다. 이에 만공스님이 ‘밥값 내놓으라’고 고함을 치려 할 때였다. 뒷줄에 앉아 있던 응민이 일어나 답했다.
“빛이 비추는 바가 없으면 경계 또한 있는 바가 없습니다. 마치 거울로 거울을 비추는 것과 같아서 상(相) 가운데에는 불(佛)이 없습니다.”
만공의 굳었던 얼굴은 금세 풀어졌다.
“방울대사가 이번 안거 기간의 대중들 밥값을 내는구나.”
‘방울대사’는 만공이 지어준 응민의 별호였다. 목소리가 은쟁반에 옥이 굴러가는 듯하다고 하여 ‘방울대사’라고 별호를 지어줄 만큼 만공은 정진 잘하는 응민을 누구보다도 아꼈던 것이다.
실제로 응민은 수덕사 선방시절, 들고 있는 화두를 놓치지 않으려고 아무리 반가운 도반이 와도 만나지 않으려고 반드시 몸을 피했는데, 만나면 말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화두가 달아날지 모른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랬다.
그러니 만공스님으로부터 ‘정진제일 수좌’라는 칭찬을 듣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소문은 속가까지 돌아 가족들에게 더욱더 불심의 씨를 뿌렸다.
정찬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