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0일, 토요일 새벽.
05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이번 여행지는 경남 '창녕군'이었다.
그 중에서도 창녕의 자랑인 '화왕산'과 '우포늪'이었다.
'창녕'은 '달성'과 '고령'의 아랫쪽에, '창원'과 '함안'의 윗쪽에 있다.
또한 '청도'와 '밀양'의 서쪽에, '합천'과 '의령'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 경남의 중심부로서 아름답고 유서 깊은 고장이다.
특히 양파와 마늘이 유명한 곳이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등산장비를 점검한 뒤에 본격적으로 산행에 나섰다.
23년도의 마지막 주말인데다가 이른 시간이라서 산객들이 별로 없었다.
호젓하고 한적하여 발걸음이 더욱 가벼웠다.
중턱쯤에 이르자 경사가 급해지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하면서 한 발 한 발 여유있게 전진했다.
자고로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순 없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먹거리의 보고인 그곳을 애써 무시한 채 짐짓 의연한 척하며 지나갈 참새가 어디 있겠는가.
본능에 역행하는 그런 케이스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참새에겐 단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나에게도 참새와 비슷한 '루틴'이 하나 있다.
나무를 괴롭히는 거대한 '칡줄기'을 보면 그냥 지나치기 힘들다.
나무들이 속수무책으로 칡의 공격을 받고 있는데, 말도 못하는 걔네들이 생존을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산과 들엔 칡을 포함해 각종 '넝쿨식물'들이 흔하다.
그 중에서도 번식력이 가장 강하며 짧은 시간에 주변을 초토화 시키는 게 바로 칡이다.
요놈들은 도무지 공생을 모른다.
All or nothing이다.
정말로 무자비하다.
나무를 휘감아 고사키고 주변의 대지를 장막처럼 뒤덮어 많은 식물들을 싸잡아 말살시킨다.
생장속도와 번식력도 상상을 불허할 정도다.
나는 트레킹을 떠날 땐 늘 칼을 갖고 다닌다.
배낭 안엔 '거버 나이프' 같은 작은 단도와 다기능 '소형 칼'이 들어 있다.
자동차 트렁크엔 묵직하고 큼지막한 '정글도'나 '벌목도'가 항상 비치되어 있다.
작심하고 작업할 때가 아니면 좀처럼 '정글도'나 '벌목도'를 차에서 꺼내지 않는다.
무겁고 커서 불편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뒤돌아 본다.
지난 이십여 년 간 웅포(고향)에 있는 선산을 조금씩 관리했었다.
애시당초에 선산엔 소나무 말고도 온갖 가시넝쿨, 아카시아, 쥐밤나무, 토복령, 참나무, 노간주나무, 칡 등이 혼재되어 그야말로 볼썽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고향에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거나 마을행사가 있을 때만 잠간 방문하는 형편이라 산을 본격적으로 관리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리 선산이 마치 머리카락을 자르지도 않고 좀처럼 목욕도 하지 않는 떠꺼머리 노숙자 같은 모양새였다.
그랬으므로 주인 없는 임야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되게 불편했다.
시골에선 전답이나 산지의 관리상태가 엉망이면 대개 동네 사람들이 속으로 주인을 욕하곤 했었다.
연로하신 부모님의 잘못도 아닌데 그런 누를 끼쳐드릴 순 없었다.
그건 막심한 불효일 터였다.
누가 임야관리를 지시했거나 시킨 것도 아니었지만, 할 사람이 없다면 차일피일 미루지 말고 적극적으로 내가 나서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게 마음 먹은 다음엔 고향에 가기만 하면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쪼개 연장을 들고 숲 속으로 갔다.
언제나 나 혼자였다.
눈에 띄는 대로 가시나무와 잡목들을 차근차근 베냈다.
무성한 칡순은 원뿌리를 찾아 깔끔하게 제거했다.
나무, 풀, 가시, 잡목이 엉키고 설킨 야산에서 '산일'을 해본 사람이라면 잘 알 거라 생각한다.
일하는 내내 숱하게 찔리고 긁혔다.
어느 땐 옷이 찢어지고 피부에 핏물이 뱄다.
시골일은 으당 그럴 것이라 예상했던 터였으니 상관 없었지만 실제로는 더 심했다.
대도시 사람들, 특히 산과 들에서 다양한 일과 경험을 안 해 본 사람들은 시골의 자연을 왕왕 '목가'와 '여유' 그리고 '낭만'의 컨셉으로 얘기하며 너스레를 떠는데 내가 보기엔 참으로 비현실적이면서도 우습기 짝이 없다.
실상은 절대로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산이나 들에 나가 일을 해보라.
풀, 가시, 각종 벌레들, 땀, 독사, 거미줄 등등 실로 가관이다.
특히 산에서는 한 시간 이상 견디기 힘들 것이다.
오랜만에 간 고향.
밥 먹고, 차 마시고, 쉬고, 잠만 자고 와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내 눈엔 일이 보였다.
그것도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보였다.
그게 문제였다.
성격적으로도 눈에 보이는 일을 타인에게 미루거나 핑곗거리를 찾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거의 매번 고향에 가면 짬을 내 연장을 들고 조용히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무수한 땀을 쏟았다.
평소에 쓰던 근육이 아니었기에 톱질도 무지 힘들고 뻐근했다.
그렇게 서너 시간씩 열정적으로 임했다.
그래도 하산할 땐 마음속에 보람과 뿌듯함이 밀려들었다.
다시 수도권에서 열심히 살다가 몇 달 뒤에 고향에 가보면, 선산이 주인 없는 집구석 같진 않을지라도 상당 부분 '도로 아미타불'로 변해 있었다.
칡과 가시는 그런 존재였다.
정말로 징그러웠다.
그렇다고 마음 먹은 선산관리를 힘들다며 중도 포기하거나 중단할 내가 아니었다.
지난 삼십여 년 간 그렇게 묵묵하게 조금씩 조금씩 조상이 물려주신 임야를 간벌했고 정리했다.
비로소 육칠 년 전부터 해병대 헤어 스타일처럼 샤프하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단정하게 머리를 깎은 청년의 뒷통수처럼 깔끔하고 청정한 숲으로 조금씩 변해 갔다.
시원하고 반듯했다.
아직도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멋지고 예쁘게 자리잡았다.
그것만으으도 감사했고 행복했다.
나에게 '칡'이란 '애증의 대상'이었다.
매년 초봄인 3월에 칡을 캐서 칡즙을 만들고 있다.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우리 단골 건강원에서 직접 캔 100-150킬로 정도의 칡과 대추와 몇가지 약재를 함께 넣고 달여 칡즙을 만들었다.
양도 무지 많았다.
우리도 복용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절반 이상을 나눠주고 있다.
모두가 좋아했다.
특히 여성들의 건강증진에 효과가 만점이었다.
일견 고마운 칡이기도 하지만 칡은 산을 병들게 하고 망치는 주범 중 하나였다.
'조림'과 '육림'의 입장에서 보자면 산에 패악질을 일삼는 패거리의 대빵 같은 존재였다.
삽시간에 온 산하를 뒤덮을 기세로 맹렬하게 쭉쭉 뻗어 나간다.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속도도 놀라웠다.
나무를 한번 휘감으면 필경 그 나무는 몇 년 안에 죽고 만다.
예외는 없었다.
짧게는 30-40년, 길게는 50-60년 이상 그 긴 성상 동안 애지중지 키웠던 나무들인데, 그런 꼿꼿한 거목들도 칡이 한번 올라타면 끝내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그런 칡의 특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매번 산행 시마다 칡이 눈에 띄면 나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말도 못하는 나무들이 저놈들 때문에 얼마나 괴롭고 힘들까 싶었다.
나도 병이다.
많은 일행들과 산행을 할 땐 어쩔 수 없지만 소수가 함께 가거나 아내와 단 둘이서 트레킹을 할 땐 가던 길을 멈추고 배낭 안에서 '거버 나이프'를 꺼냈다.
나무처럼 엄청나게 성장해 버린 칡 줄기를 보면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상대를 힘들게 하고 괴롭혔을까 싶다.
나이프로 칡 줄기의 밑둥을 친다.
크기도 작고 가벼운 단도라 아무리 세게 쳐도 한두 번, 서너 번으론 택도 없다.
열 번, 스무 번 넘게 풀 스윙으로 쳐내야만 겨우 절단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래에 사진을 올릴 테니 한번 보시라.
칡이 아니라 차라리 나무라고 해야 맞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놈들이다.
이번의 '화왕산' 산행과 '우포늪' 트레킹에서도 나의 속도가 자꾸만 느리고 더뎠다.
칡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었으니까.
가다 뒤돌아 보고, 가다 뒤돌아 보던 아내가 내게 한마디를 던졌다.
"아이고 또또또...세상의 모든 나무를 혼자서 구할 태세네 정말. 칡과의 전쟁도 유분수지. 이젠 그만 좀 해. 천지신명도 당신의 그 마음을 잘 아실 테니까. 가시에 찔려가면서까지, 게다가 우리 산도 아닌데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겠어?"
아내도 안타까워서 그런다는 걸 내가 왜 모르겠는가.
잘 안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기 힘든 걸 낸들 어쩌겠는가.
팔자다.
둘이서 깊은 숲길을 걷거나 산에 가면 벌써 이십 년도 넘게 내가 '동일한 행동'을 하고 있으니 아내가 그런 말을 할만도 했다.
자연은 기뻐도, 슬퍼도, 아파도 말을 못한다.
그냥 처해진 환경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라도 생존과 성장을 위해 그야말로 눈물겨운 노력을 경주할 뿐이다.
그런 감정이입 때문인지 죽어가는 나무를 보면 내 마음이 더욱 저릿해 지고 아프다.
놀라운 번식력으로 농촌과 산촌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멧돼지'는 이미 오래 전에 '유해동물'로 지정 되었다.
칡도 그렇다.
훗날 서울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나는 2개의 '퇴치단체'를 구성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고 싶다.
하나는 '멧돼지 퇴치단'이고 다른 하나는 '칡 퇴치단'이다.
지원자가 얼마나 될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고향에 가면 최선을 다하고 싶다.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유해 동,식물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기나 할까?
한강에서 한 바가지의 물을 퍼낸 것과 같은 격일 테지.
전혀 표시도 안 나고 변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반드시 길이 있다고 믿는다.
한 초롱의 물로 언제 사막을 '푸른 초장'으로 만들 것인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힘차게 가자.
그 한 초롱의 물을 무시한 채 '사막의 강'과 '광야의 길'을 논한다면 그런 '고담준론' 자체가 더 우스꽝스럽고 한심할 테니까 말이다.
본디 인생이란 게 그래서 만만치 않은 것이다.
가능한 한 입은 닫은 채 삽질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보면 어떨까 싶다.
'우공이산', 이 말이 진리라고 믿는다면 말이다.
'창녕'의 '화왕산'과 '우포늪', '합천'의 '황매산'을 다녀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어깨가 욱신욱신 쑤셔댄다.
열심히 칼질을 했던가 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사진 몇 장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