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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자십게(納子十偈)
이것은 성철스님이 수행자에게 스스로를 다짐하도록 게송의 형식으로 지어 주신 글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리는 시간을 경계하시는 말씀부터 무소유의 정신, 자기반성 등 치열하게 수행하도록 일깨워주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수행 시절 스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은 일반적으로 '이뭣꼬'라고 알려진 화두로서 '백일법문'에서도 대중들에게 제시한 것으로 보아 수행자들에 게 늘 권하시던 화두로 보입니다.
1. 無常(무상)
一片殘月照寒林(일편잔월조한림) 數莖白骨依蓬蒿(수경백골의봉호)
昔日風流今何在(석일풍류금 하재) 空使泥犁苦轉深(공사니리고전심)
한 조각 그믐달이 겨울 숲 비추니 몇 개의 백골들이 쑥 사이에 흩어져.
옛날의 풍류는 어디에 있는가? 덧없이 윤회의 괴로움만 더해 가는 데.
2. 安貧(안빈)
破衲蒙頭兀然坐(파납몽두올연좌) 富貴榮譽雲外夢(부귀영예운외몽)
甁甕雖無一粒米(병옹수무일 립미) 萬古光明照大千(만고광명조대천)
누더기 더벅머리로 올연히 앉았으니 부귀니 영예니 구름 밖에 꿈이로다.
쌀 독에 양식은 하나 없지만 만고의 광명은 대천세계 비추 네.
3. 精勤(정근)
運水搬柴古家風(운수반시고가풍) 種田搏飯眞活計(종전박반진활계)
夜半引錐猶自愧(야반인추유 반괴) 위[口+胃]然不覺淚沾襟(위연불각누첨금)
물 긷고 나무하는 일은 옛날 스님 가풍이요 텃밭 메고 주먹밥은 참 사는 소식이 라.
한밤에 송곳 찾아도 오히려 부끄러워 깨닫지 못함을 한숨지며 눈물로 적시네.
4. 貞節(정절)
喪身滅道色爲最(상신멸도색위최) 千纏萬縛入확[穫-禾+金]湯(천전만박입확탕)
寧近毒蛇須遠離 (영근독사수원리) 一念錯兮塵沙苦(일념착혜진사고)
몸 망쳐 도를 없애는 데는 여색이 으뜸이라 천번 만번 얽어 묶어 화탕지옥 들어가 네.
차라리 독사를 가까이 할지언정 멀리 둘지니 한 생각 잘못 들어 무량고통 생기도다.
5. 愼獨(신독)
莫道暗室無人見(막도암실무인견) 神目如電毫不漏(신목여전호불루)
盡矣虔誠極護衛(진의건성극 호위) 勃然怒罵掃脚跡(발연노매소각적)
어둔 방에 혼자서 보는 이 없다 말라 천신의 눈은 번개 같아 털끝도 못 속인다.
합 장하고 정성껏 받들어 모시다가도 갑자기 성을 내어 자취를 없애니라
6. 下心(하심)
法界盡是毘盧師(법계진시비로사) 誰道賢愚與貴賤(수도현우여귀천)
愛敬老幼皆如佛(애경노유개 여불) 常常嚴飾寂光殿(상상엄식적광전)
법계가 모두 비로자나 부처님인데 어느 누가 賢遇(현우)와 귀천을 말하는가.
모두 를 부처님처럼 애경하면 언제나 적광전을 장엄하리 라.
7. 利他(이타)
嗟嗟浮世極痴人(차차부세극치인) 種荊栽극[草-早+棘]望仙桃(종형재극망선도)
利己害人卽自決 (이기해인즉자결) 爲他損身是活路(위타손신시활로)
슬프다, 뜬 구름 같은 이 세상의 어리석은 중생이여
가시덤불 심어놓고 천도복숭 바라도다.
나를 위해 남 해침은 죽는 길이고 남을 위해 손해봄이 사는 길이네.
8. 自省(자성)
欲覓我是不得時(욕멱아시부득시) 便得四海大晏然(변득사해대안연)
唯見自非常悔謝(유견자비상 회사) 刀杖毁辱恩難酬(도장훼욕은난수)
내 옳은 것 찾아봐도 없을 때라야 사해가 모두 편안하게 될 것이니라.
내 잘못만 찾아서 언제나 참회하면 나를 향한 모욕도 갚기 힘든 은혜이니.
○ 貪著夢中一粒米(탐착몽중일립미) 失却金臺萬劫糧(실각금대만겁량)
無常刹那實難測(무상찰나실난측) 胡不猛省急回頭(호불맹성급회두)
꿈 속의 쌀 한톨 탐착하다가 金臺(금대)의 만겁 식량을 잃어 버렸네.
무상은 찰나라 헤아리기 도 힘든데 한 생각 돌이켜서 용맹정진 않을 건가.
○ 種豆生豆影隨形(종두생두영수형) 三時業果如鏡照(삼시업과여경 조)
痛自省察極勉勵(통자성찰극면려) 那得怨天更尤人(나득원천갱우인)
콩 심어 콩 나고 그림자는 형상 따라 삼세의 지은 인과는 거울에 비추는 듯.
나를 돌아보며 부지런히 성찰한다면 하늘이나 다른 사람을 어찌 원망하리 오.
○ 於我極惡者(어아극악자) 是眞善知識(시진선지식)
刀杖毁辱恩(도장훼욕은) 粉骨未足酬(분골미족수)
나에게 극악하게 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선지식이니
고통 주고 모욕 주는 은혜는 목숨 다해도 갚을 수 없으리 라.
不是心(불시심) 不是佛(불시불) 不是物(불시물) 是什마[摩-手+**](시십마)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고, 다른 물건도 아니니 이것은 무엇인가?
[성철스님] 무심(無心)이 부처다
무심(無心)이 부처다
불교라고 하면 부처님이 근본입니다.
"어떤 것이 부처냐" 하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로 대답할수 있지만
그러나 실제로 부처라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기는 좀 곤란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 원리 원칙을 생각한다면 곤란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번뇌망상 속에서 생활하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일체의 망상을 떠난 것을 부처라고 합니다.
모든 망상을 떠났으므로 망심이 없는데
이것을 무심(無心)이라고 하고 무념이라고도 합니다.
중생이란 망상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생이라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저 미물인 곤충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비롯하여 십지등각(十地等覺)까지 모두가 중생입니다.
참다운 무심은
오직 제8 아라야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끊은 구경각(究竟覺)
즉 묘각(妙覺)만이 참다운 무심입니다.
이것을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망상 속에서 사는 것을 중생이라고 하니
망상이 어떤 것인지 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통 팔만 사천 번뇌망상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구분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의식(意識)입니다. 생각이 왔다 갔다,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이것이 의식입니다.
둘째는 무의식(無意識)입니다.
무의식이란 의식을 떠난 아주 미세한 망상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식을 제6식(第六識)이라 하고
무의식을 제8식(第八識:아라야식)이라고 하는데,
이 무의식은 참으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8지보살도 자기가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고
아라한(阿羅漢)도 망상 속에 있는 것을 모르며
오직 성불(成佛)한 분이라야만 근본 미세망상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곤충 미물에서 시작해서 십시, 등각까지 전체가 망상 속에서 사는데,
7지 보살까지는 의식 속에 살고
8지 이상, 10지, 등각까지는 무의식 속에서 삽니다.
의식세계든 무의식세계든지 전부 유념(有念)인 동시에
모든 것이 망상입니다.
그러므로 제8 아라야 망상까지 완전히 끊어 버리면
그때가 구경각이며, 묘각이며, 무심입니다.
무심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은 거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본래의 마음자리를 흔히 거울에 비유합니다.
거울은 언제든지 항상 밝아 있습니다.
거기에 먼지가 쌓이면
거울의 환한 빛은 사라지고 깜깜해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망상은 맑은 거울 위의 먼지와 마찬가지이고,
무심이란 것은 거울 자체와 같습니다.
이 거울 자체를 불성(佛性)이니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니 하는 것입니다.
모든 망상을 다 버린다는 말은
모든 먼지를 다 닦아낸다는 말입니다.
거울에 끼인 먼지를 다 닦아내면 환한 거울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동시에 말할 수 없이 맑고 밝은 광명이 나타나서
일체 만물을 다 비춥니다.
우리 마음도 이것과 똑같습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고 제8 아라야식까지 완전히 떨어지면
크나큰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구름 속의 태양과 같습니다.
구름 다 걷히면 태양이 드러나고 광명이 온 세계를 다 비춥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도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면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서 시방법계(十方法界)를 비추인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일체 망상이 모두 떨어지는 것을 '적(寂)'이라 하고,
동시에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조(照)'라고 합니다.
이것을 적조(寂照) 혹은 적광(寂光)이라고 하는데, 고요하면서
광명이 비치고 광명이 비치면서 고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해인사 큰 법당을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무심의 내용입니다.
무심이라고 해서 저 바위처럼 아무 생각 없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동시에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또 무심은 바꾸어 말하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불생이란 일체 망상이 다 떨어졌다는 말이고,
불멸이란 대지혜 광명이 나타난다는 말이니,
즉 불생이란 적(寂)이고 불멸이란 조(照)입니다.
그러니 불생불멸이 무심입니다.
무심을 경(經)에서는 정혜(定慧)라고도 합니다.
정(定)이란 일체 망상이 모두 없어진 것을 말하고,
혜(慧)라는 것은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정혜등지(定慧等持)를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이 무심을 완전히 성취하면 또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성불(成佛)인 동시에 열반인 것입니다.
육조(六祖)스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무상 대열반이여! 두렷이 밝아 항상 고요히 비추는도다.
無上大涅槃 圓明常寂照
흔히 사람이 죽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데,
죽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은 열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면서 동시에 광명이 온 법계를 비추는 적조가
완전히 구비되어야 참다운 열반입니다.
고요함[寂]만 있고 비춤[照]이 없는 것은 불교가 아니고 외도(外道)입니다.
일체 망상을 떠나서 참으로 견성(見性)을 하고 열반을 성취하면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되는데,
이것을 해탈(解脫)이라고 합니다.
해탈이란 결국 {기신론(起信論)}에서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한 대로
"일체 번뇌망상을 다 벗어나서 구경락인 대지혜 광명을 얻는다
[離一切苦 得究竟樂]" 이 말입니다.
이상으로써
성불이 무엇인지 무심이 어떤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불교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 근본이 성불에 있는 만큼
실제로 적조를 내용으로 하는 무심을 실증(實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근본은 누구든지 다 평등합니다.
평등할 뿐만 아니라 내가 항상 말하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이지,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명경(明鏡)을 예로 들겠습니다.
이것은 새삼 내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고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말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명경은 본래 청정합니다.
본래 먼지가 하나도 없습니다.
동시에 광명이 일체 만물을 다 비춥니다.
그러니 광명의 본체는 참다운 무심인 동시에 적조, 적광, 정혜등지
(定慧等持)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 그대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중생이 참으로 청정하고 적조한 명경 자체를
상실한 것처럼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무리 깨끗한 명경이라도
먼지가 앉을 것 같으면 명경이 제 구실을 못합니다.
그러나 본래의 명경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먼지가 앉아 있어서 모든 것을 비추지 못한다는 것뿐이지
명경에는 조금도 손실이 없습니다.
먼지만 싹 닦아 버리면 본래의 명경 그대로 아닙니까?
그래서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은
명경이 본래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자성(自性)이 본래 청정한데 어찌해서 중생이 되었나?
먼지가 앉아 명경의 광명을 가려 버려서 그런 것뿐이지
명경이 부서진 것도 아니고 흠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다만 먼지가 앉아서 명경이 작용을 완전하게 못 한다 그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다운 명경을 구하려면
다시 새로운 명경을 만드는 게 아니고
먼지 낀 거울을 회복시키면 되는 것처럼
본래의 마음만 바로 찾으면 그만입니다.
내가 항상 "자기를 바로 봅시다" 하고 말하는데,
먼지를 완전히 닦아 버리고 본래 명경만 드러나면
자기를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라고 할 때
마음의 눈이란 것도 결국 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표현이 천 가지 만 가지 다르다고 해도 내용은 일체가 똑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無心)은
세속의 사상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예전의 고인들의 책이나 얘기를 들어볼 것 같으면
유교, 불교, 도교, 유불선 3교가 다르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유교라든가 도교 등은
망상을 근본으로 하는 중생세계에서 말하는 것으로
모든 이론, 모든 행동이 망상으로 근본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망상을 떠난 무심을 증득한 것이 우리 불교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유교니 도교니 하는 것은 먼지 앉은 그 명경으로써 말하는 것이고
불교는 먼지를 싹 닦은 명경에서 하는 소리인데,
먼지 덮인 명경과 먼지 싹 닦아 버린 명경이 어떻게 같습니까?
그런데도 유·불·선이 꼭 같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무심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십지등각(十地等覺)도 중생의 경계인데
유교니 도교니 하는 것은 더 말할 것 있습니까?
중생의 경계, 그것이 진여자성을 증득한 대무심경계와
어떻게 같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예전에는 유·불·선 3교만 말했지만
요즘은 문화가 발달되고 세계의 시야가 더 넓어지지 않았습니까.
온갖 종교가 다 있고 온갖 철학이 다 있는데
그것들과 불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동서고금을 통해서 어떤 종교, 어떤 철학 할 것 없이
불교와 같이 무심을 성취하여
거기서 철학을 구성하고 종교를 구성한 것은 없습니다.
실제로 없습니다. 이것은 내가 딱 잘라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양의 어떤 큰 철학자, 어떤 위대한 종교가, 어떤 훌륭한 과학자라고 해도
그 사람들은 모두가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에서 한 소리는 한마디도 없다, 그 말입니다.
내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불교에는 부처님이 근본인데
부처님이란 무심이란 말입니다.
모든 망상 속에 사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일체 망상을 벗어난 무심경계를 부처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무심이 근본이니만큼 불교를 내놓고는
어떤 종교, 어떤 철학도 망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지
무심을 성취해서 말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을 혼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만큼 불교란 것은 어떤 철학이나 어떤 종교도 따라올 수 없는
참으로 특출하고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망상 속에서 하는 것하고
망상을 완전히 떠난 것하고를 비교해서 생각해 봅시다.
다시 명경의 비유를 들겠습니다.
명경에 먼지가 앉으면 모든 것을 바로 비추지 못합니다.
먼지를 안 닦고 때가 앉아 있으면
무슨 물건을 어떻게 바로 비출 수 있겠습니까?
모든 물건을 바로 비추려면 먼지를 깨끗이 닦아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망상 속에서는 모든 사리(事理), 모든 원리,
모든 진리를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망상이 눈을 가려서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모든 진리를 알려면 망상을 벗어나서 무심을 증(證)하기 이전에는
절대로 바로 알 수 없습니다.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여 무심을 완전히 증득한 부처님 경계
이외에는 전부 다 삿된 지식이요, 삿된 견해[邪知邪見]입니다.
대신에 모든 번뇌망상을 완전히 떠나서 참다운 무심을 증득한 곳,
즉 먼지를 다 닦아낸 깨끗한 명경은 무엇이든지 바로 비추고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정지정견(正知正見)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의 모든 종교나 철학은 망상 속에서 성립된 것인 만큼
사지사견이지 정지정견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정지정견은 오직 불교 하나뿐입니다.
결국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알지 못한다고 하면
행동도 바로 못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눈감은 사람이 어떻게 바로 걸을수 있겠습니까?
먼지 앉은 명경이 어떻게 바로 비출수 있겠습니까?
망상이 마음을 덮고 있는데 어떻게 바로 알 수 있으며,
어떻게 바로 볼 수 있으며, 바른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른 행동이라 하는 것은 오직 참으로 무심을 증해서
적광적조(寂光寂照)를 증하기 전에는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부처냐? 하고 물었을 때
바로 앉고, 바로 보고, 바로 행하고, 바로 사는 것이 부처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다
바로 알고 싶고, 바로 보고 싶고, 바로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캄캄해서 눈감은 봉사가 되어 있는데
어떻게 바로 살 수 있겠습니까?
쉽게 말하자면 바른 생활을 하자는 것이 불교인데
망상 속에서는 바른 생활을 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오직 무심을 증해야만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지등각도 봉사입니다. 왜냐, 부처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십지등각이 저 해를 보는 것은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해를 보는 것과 같아서,
비단이 아무리 엷어도 해를 못 보는 것은 보통의 중생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십지등각이 사람을 지도하는 것도
봉사가 봉사를 이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바로 이끌려면 자기부터 눈을 바로 떠야 하고,
바로 알아, 바로 행동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추려 보면,
망상 속에 사는 것을 중생이라 하고 모든 망상을 벗어난 것을 부처라 합니다.
모든 망상이 없으니 무심입니다.
그러나 그 무심은 목석(木石)과 같은 무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울의 먼지를 완전히 다 닦아 버릴 것 같으면 모든 것을 비추는 것과 같으며,
구름이 걷히어 해가 드러나면 광명을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망상이 나지 않는 것을 불생(不生)이라 하고,
대지혜 광명이 항상 온 우주를 비추는 것을 불멸(不滅)이라 하는데,
이것이 무심의 내용입니다.
이 무심은 어떤 종교, 어떤 철학에도 없고 오직 불교밖에 없습니다.
또 세계적으로 종교도 많고 그 교주들의 안목도 각각 차이가 있습니다마는
모두가 조각조각 한 부분밖에 보지 못했단 말입니다.
불교와 같이 전체적으로 눈을 뜨고 청천백일(靑天白日)같이 천지만물을
여실히 다 보고 말해 놓은 것은 실제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불자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노력해서
실제 무심을 증해야 되겠습니다.
밥 이야기 천날 만날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직접 밥을 떠 먹어야지요.
그렇다고 해서 없는 무심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본래 무심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입장입니다.
내가 자꾸 "중생이 본래 부처다" 하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중생들밖에 없는데 중생이 본래 부처란 거짓말이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아까 명경의 비유는 좋은 비유가 아닙니까.
먼지가 앉은 중생의 명경이나
먼지가 다 닦인 부처님 명경이나 근본 명경은 똑같습니다.
본시 이 땅 속에 큰 금광맥이 있는 것입니다.
광맥이 있는 줄 알면 누구든지 호미라도 들고 달려들 것 아닙니까,
금덩이를 파려고...
우리가 '성불! 성불!' 하는 것도
중생이 어떻게 성불하겠느냐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아닙니다.
본래 부처입니다.
그러니 본래면목, 본래의 모습을 복구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란 것을 확실히 자신하고 노력하면
본래 부처가 그대로 드러날 것이니 자기의 본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하여 우리의 참모습인 무심(無心)을 실증(實證)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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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2013-Mar
[성철스님] 광수공양(廣修供養)
작성자: 조회 수: 2180
云何賊人 어떤 도적놈이
假我衣服 나의 가사장삼을 빌려 입고
裨販如來 부처님을 팔아
造種種業 자꾸 죄만 짓는가.
누구든지 머리를 깎고 부처님 의복인 가사장삼을 빌려 입고
승려탈을 쓰고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을
부처님께서는 모두 도적놈이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승려가 되어 가사장삼 입고 도를 닦아 도를 깨우쳐 중생을 제도하지는 않고,
부처님을 팔아 자기의 생활도구로 먹고 사는 사람은 부처님 제자도 아니요,
승려도 아니요,
전체가 다 도적놈이라고 “능엄경”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승려가 되어 절에서 살면서
부처님 말씀 그대로를 실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가까이는 가봐야 하고 근처에는 가봐야 할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는 못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의 정반대 방향으로는 안 가야 할 것입니다.
나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人身難得 사람 몸 얻기 어렵고
佛法難逢 불법 만나기 어렵다.
다행히 사람 몸 받고 승려가 되었으니
여기서 불법을 성취하여 중생제도는 못 할지언정
도적놈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 사는 그 사람을 도적이라 한다면,
그런 사람이 사는 처소는 무엇이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그곳은 절이 아니고 도적의 소굴, 적굴(賊窟)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무엇이 됩니까?
도적놈의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도적에게 팔려 있으니 도적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지요.
딴 나라는 다 그만두고라도,
우리나라에 절도 많고 승려도 많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도적의 딱지를 면할 수 있는 승려는 얼마나 되며,
또 도적의 소굴을 면할 수 있는 절은 몇이나 되며,
도적의 앞잡이를 면할 수 있는 부처님은 몇 분이나 되는지
참으로 곤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승려노릇 잘 못하고 공부를 잘 못해서
생함지옥(生陷地獄)을 할지언정,
천추만고의 우주개벽 이래 가장 거룩하신 부처님을 도적 앞잡이로 만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자신의 도적놈 되는 것은 나의 업이라 어쩌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지옥으로 간다 할지라도 달게 받겠지만
부처님까지 도적놈 앞잡이로 만들어서 어떻게 살겠느냐
이 말입니다.
어떻게든 우리가 노력해서 이 거룩하신 부처님을 도적의 앞잡이가 안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파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위 불공(佛供)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부처님 파는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 영험하여 명(命)도 주고 복(福)도 주고 하니,
우리 부처님께 와서 불공하여 명(命)도 받고 복(福)도 받아 가라" 하면서 승려는 목탁을 칩니다.
목탁이란 본시 법을 전하는 것이 근본 생명입니다.
유교에서도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의 목탁이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바른 법을 전하여 세상 사람이 모두 살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실정에서
목탁이 돈벌이에 이용 안 되는 절은 별로 없습니다.
부처님 앞에서 목탁 치면서 명 빌고 복 빌고 하는 것,
그것은 장사입니다. 부처님을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허물을 반성하여 고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허물 있는 줄 알면서도 반성하여 못 고치면
더 큰 허물을 빚는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참다운 불공이 되는 것인가?
내가 전부터 자꾸 불공 이야기를 해 오지만
우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교에서는 성경 한 권이며 지침이 되지만
불교에서는 팔만대장경이라 하여 듣기만 하여도 겁이 납니다.
장경각의 그 많은 경판은 엄청납니다. 저 많은 것을 보아서,
언제 어디서 불교의 근본진리를 찾을 수 있을까?
호호망망(浩浩茫茫)합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에는 전통적으로 정설이 있습니다.
경(經) 중에서 부처님 말씀의 근본이며,
가장 소중한 경은 “화엄경”과 “법화경”으로
이는 경(經) 중에서도 왕(王)이요, 불교의 표준입니다.
그 중에서도 “화엄경”이 “법화경”보다
진리면에서 더 깊고 넓다 합니다.
“화엄경”도 이것이 80권이나 되는데 어떻게 다 보겠습니까.
더구나 모두가 어려운 한문인데.
다행히도 “화엄경”을 요약한 경(經)이 또 한 권 있습니다.
“보현보살행원품”인데 “약(略)화엄경”이라고도 합니다.
“보현보살행원품”에 불교의 근본진리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불교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될 것인가가 모두 규정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불공하는 데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보현보살 십대원(十大願)의 광수공양(廣修供養)편입니다.
물론 다 알겠지만 거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신심을 내어
온 천하의 좋은 물건을 허공계에 가득 차도록 다 모으고,
또 여러 초등을 켜되 그 촛불 심지는 수미산 같고
기름은 큰 바닷물같이 하여 두고서
수많은 미진수 불(佛)에게 한없이 절을 한다면
이보다 더 큰 불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불공 중에는 가장 큰 불공으로 그 공덕도 또한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법공양(法供養)이란 것이 있습니다.
일곱 가지의 법공양 중에서도 중생을 이롭게 하라는 것이 그 골수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무리 많은 물자를 당신 앞에 갖다 놓고
예불하고 공을 들이고 하는 것보다도
잠시라도 중생을 도와주고 중생에게 이익 되게 하는 것이
몇 천만 배 비유할 수 없이 더 낫다고 단정하셨습니다.
비유하자면, 장사를 할 때
밑천을 많이 들여서 이익이 적은 것을 할 것인가,
아니면 밑천을 적게 들여 이익 많은 장사를 할 것이냐 하면
누구든지 이익이 많은 장사를 하려 할 것입니다.
많은 물자를 올려놓고 불공을 하려면 그 비용이 많이 들지만
이익 중생 공양(利益衆生供養), 즉 중생을 잠깐 동안이나마 도와주는 것은 큰 힘 안 들므로
밑천이 적게 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결국의 이익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비용 많이 들여서 하는 불공은 중생을 잠깐 도와주는
그 불공에 비교할 것 같으면
천 분의 일, 만 분의 일, 억만 분의 일로도 비유할 수 없을 만큼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이
"누구든지 나에게 돈 갖다 놓고 명과 복을 빌려 하지 말고
너희가 참으로 나를 믿고 따른다면 내 가르침을 실천하라" 하셨습니다.
중생을 도와주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행원품의 다른 곳에서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길가에 병들어 거의 죽어가는 강아지가 배가 고파 울어댈 때
식은 밥 한 덩이를 그 강아지에게 주는 것이
부처님께 만반진수를 차려 놓고 무수, 수천만 번 절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이 크다"고도 하셨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오직 중생을 도와주는 것이 참으로 불공이요,
이를 행해야만 참으로 내 제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요즘 학생들에게 불공하라고 자주 이야기합니다.
학생들은 "우리도 용돈을 타 쓰는 형편인데
어떻게 불공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공은 반드시 돈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정신으로, 또 물질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것이 모두 불공입니다.
우리가 몸, 마음, 물질 이 세 가지로 불공을 하려고 하면
불공할 것이 세상에 꽉 차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게을러서, 게으른 병 때문에 못 할 뿐입니다.
이렇게 불공하여야만 마침내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수련대회 때 3천 배 하고
백련암에 올라와 화두 가르쳐 달라고 말하면
"자, 모두 화두 배우기 전에 불공하는 방법 배워
불공부터 시작한 후 화두 배우자"고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모두 눈이 둥그레집니다.
우리는 돈도 없는데 부처님 앞에 돈 놓고 절하라는 이야기인가 하고.
그런데 나중에 그 내용을 듣고 나서는 "모두 불공합시다" 하면
힘차게 "네" 하고 대답하는데, 진정으로 그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별히 주의를 시킵니다.
그것은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은 착한 일이지만 자랑하는 그것은 나쁜 일입니다.
애써 불공해서 남을 도와주고 나서 자랑하면 모두 자신의 불공을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불공을 자랑과 자기선전을 하기 위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공이 아닙니다.
자기 자랑할 재료를 만드는 것입니다.
입으로 부수어 버리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러므로 '남모르게 도와주라!' 이것뿐입니다.
예수도 "바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학생들에게 이 말이 좋게 들리는가! 봅니다.
자주 오는 편지에 "스님께서 말씀하신 남모르게 남 돕자는
그 말씀을 평생 지키고 노력하겠습니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6· 25사변 이후 마산 근방 성주사라는 절에서 서너 달 머무를 때입니다.
처음 가서 보니 법당 위에 큰 간판이 붙었는데
'법당 중창 시주 윤○○'라고 굉장히 크게 씌어 있었습니다.
누구냐고 물으니 마산에서 한약국을 경영하는 사람인데
신심이 있어 법당을 모두 중수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언제 여기 오느냐?"고 물으니
"스님께서 오신 줄 알면 내일이라도 곧 올 겁니다" 했습니다.
그 이튿날 과연 그분이 인사하러 왔노라기에,
"소문 들으니 당신 퍽 신심이 깊다고 다 칭찬하던데,
나도 처음 오자마자 법당 위를 보니 그 표가 얹혀 있어서
당신 신심 있는 것은 증명되었지"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칭찬을 많이 하니 퍽 좋아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런데 간판 붙이는 위치가 잘못된 것 같아.
간판이란 남들 많이 보기 위한 것인데
이 산중에 붙여 두어야 몇 사람이나 와서 보겠어?
그러니 저걸 떼어서 마산역 앞 광장에 갖다 세우자고.
내일이라도 당장 옮겨 보자고."
"아이고, 스님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운 줄 알겠어?
당신이 참으로 신심에서 돈 낸 것인가?
저 간판 얻으려 돈 낸 것이지."
이 일화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주를 할 때 미리 조건을 내세웁니다.
비석을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석을 먼저 세워 줍니다.
그러면 돈은 내지 않고 비만 떼어먹기도 합니다.
"잘못되었습니다. 제가 몰라서 그랬습니다."
"몰라서 그랬다고? 몰라서 그런 것이야 허물 있나?
고치면 되지. 그러면 이왕 잘못된 것을 어찌 하려는가?"
그랬더니 자기 손으로 그 간판을 떼어 내려서 탕탕 부수어
부엌 아궁이에 넣어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남모르게 돕는다는 이 불공을 비밀히 시작한 지가 좀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또 단체로, 의무적으로 시켰습니다.
만약 내가 시키는 대로 불공할 수 없는 사람은 내게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불공하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예를 들었더니
어떤 학생이 이렇게 질문해 왔습니다.
"스님은 불공 안 하시면서 어째서 우리만 불공하라고 하십니까?"
"나도 지금 불공하고 있지 않은가.
불공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이것도 불공 아닌가."
불공하던 예를 또 하나 들겠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 변두리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나아졌지만,
어떤 분이 그런 동네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고 싶은데
어떤 방법으로 하면 소문도 안 나고 실천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우선 두어 사람이 그 동네에 가서 배고픈 사람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하고 명단을 만든 후,
또 다른 몇 사람이 그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쌀집에서 쌀을 사서 쌀표를 만들어
쌀 지고 다니면 소문만 금방 나 버리니,
한 말이든 두 말이든 표시한 쌀표만 가져가면 바로 쌀을 주도록 준비해 두지.
또 다른 사람이 명단을 가져가서 그 쌀표를 나누어주면 사람이 자꾸 바뀌니
어떤 사람이 쌀을 나누어주는지 모르게 되지.
또 누가 물어도 '우리는 심부름하는 사람이다'고만 답변하는 거야."
처음에는 쌀표를 주며 쌀집에 가보라 하니 잘 믿지 않더니,
쌀집이 별로 멀지 않으니 한번 가보기나 하라고 자꾸 권했더니,
가서 쌀을 받아오더라는 겁니다.
그 후 어린아이들이 학교에 와서 하는 말이
"요새 우리 동네에 이상한 일이 생겼어.
어디서 온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이 쌀표를 주어서 곤란을 면했는데,
누군지 알 수가 없어.
아마 그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왔겠지?" 하더랍니다.
또 마산의 어느 신도가 추석이 되어 쌀을 트럭에 싣고 나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숨어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신문에서 그걸 알고 그 사람을 찾아내어 대서특필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내게 왔기에 "신문에 낼 자료 장만했지?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더니
아무리 숨어도 신문에 발목이 잡혔다고 해명했습니다.
"글쎄, 아무리 기자가 와서 캐물어도 발목 잡히지 않게 불공해야지.
불공은 남모르게 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어느 동네에 부자 노인이 불공을 잘하므로
이웃청년이 와서 인사를 했습니다.
"참 거룩하십니다. 재산 많은 것도 복인데,
그토록 남을 잘 도와주시니 그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이 고약한 놈! 내가 언제 남을 도왔어?
남을 돕는 것은 귀울림과 같은 거야.
자기 귀 우는 것을 남이 알 수 있어?
네가 알았는데 좋은 일은 무슨 좋은 일인가?
그런 소리 하려거든 다시는 오지 말어."
이것이 실지로 불공하는 정신입니다.
남 돕기 어렵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남 돕기는 쉬운데
소문 안 내기는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꾸 예를 들어 말하는 것입니다.
남자보다 여자는 본시 몸도 약하고 마음도 약하며 입이 조금 가볍습니다.
그래서 자랑은 여자들이 더 많이 합니다.
왜 여자를 약하고 모자란다고 하느냐고 반문도 받습니다.
"힘 따라 짐을 져야 합니다. 키 따라 옷을 해 입혀야지요.
키 큰 사람은 옷을 크게 입히고,
키 작은 사람은 옷을 짧게 입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등입니다.
약한 걸 말해서 힘을 내도록 해야지요.
그래서 여자는 자랑하지 않게 더 주의해야 합니다."
이제 예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
미국의 보이스라는 사람이 영국의 런던에 가서 어느 집을 찾는데
안개가 심해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이곳저곳을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열두어 살 되는 소년이 나타나 물었습니다.
"선생님, 누굴 찾으십니까?"
"어느 집을 찾는데 못 찾고 있다."
"저는 이 동네에 사는데 혹 제가 아는지 주소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신사는 주소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집은 마침 제가 알고 있습니다. 이리로 오십시오."
어린이가 인도하여 안내해 준 집에 도착하니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집이었습니다.
하도 고마워서 사례금을 주었더니
그 소년은 사양하고 결코 받지 않았습니다.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선생님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저는 소년단원 회원인데
우리 회원은 하루 한 가지씩 남을 도와주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선생님을 도와드릴 수 있었으니, 오히려 제가 감사드리겠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서 소년은 달아나 버렸습니다.
신사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국에 와 보니 어린이도 남을 돕는 정신이 가득하여 돈도 받지 않고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고
남을 도우면서 오히려 일과를 할 수 있게 되어 고맙다고 하니,
이런 정신을 배워야겠다.'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와 미국에서도 소년단을 시작하였습니다.
온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이 정신은 뻗어나가
우리나라에도 보이스카웃, 소년단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이 소년을 찾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찾지 하고,
소년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이름 모를 소년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의 그 마을에 큰 들소 동상을 세우고 기념비에 이렇게 새겼습니다.
날마다 꼭 착한 일을 함으로써 소년단이라는 것을
미국에 알려준 이름 모르는 소년에게 이 동상을 바치노라.
간디 자서전을 보면,
그는 영국에 유학 가서 예수교를 배웠는데
예수교에서는 사람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그 후 불교에서는 진리에 눈떴는데
일체 생명 사랑하는 것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남의 종교를 말하는 것은 안되었지만,
비유하자면
예수교는 접시물이라면 불교는 바다와 같다 하였습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사람만이 상대가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그 상대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고, 짐승이고, 미물이고 할 것 없이
일체중생 이 모두 다 불공 대상입니다.
일체 중생을 돕는 것이 불공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실천하고 또 궁행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도적놈 소리를 좀 면할지 모르겠습니다.
6· 25사변 전 문경 봉암사에 있을 때,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향곡스님 청으로
부산사람들 앞에서 법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불공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불공이란 남을 도와주는 것이지
절에서 목탁 두드리는 것이 아니며,
결국 절이란 불공 가르치는 곳이라고.
불공은 밖에 나가서 해야 하며 남을 돕는 것이 불공이라고.
그리고 행원품 이야기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법문을 마치며 봉암사로 돌아왔습니다.
며칠 후에 부산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때는 각 도(道)마다 종무원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경남 종무원에서 긴급회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절에서 하는 것은 불공이 아니고,
절은 불공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라 하고,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이라 했으니
결국 이것은 절에 돈 갖다 주지 말라는 말인데,
그러면 우리 중들은 모두 굶어죽으라는 소리냐.
그 말을 한 중을 어디로 쫓아 버려야 한다고 야단들이니 앞으로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니 서울에서도 누가 내려왔습니다.
서울의 총무원에서 똑같은 내용의 회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말할까?
당신들 뜻대로 하자면 부처님께서 영험하고 도력 있으니
누구든지 돈 많이 갖다 놓으면 갖다 놓을수록 복 많이 온다고,
절에 돈벌이 많이 되는 말만 해서 자꾸 절 선전할까?
당신도 천년, 만년 살 것 같애?
언제 죽어도 죽는 건 꼭 같애.
부처님 말씀 전하다 설사 맞아죽는다고 한들 무엇이 원통할까?
그건 영광이지! 천하의 어떤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해도
나는 부처님 말씀 그대로를 전한 것뿐 딴소리는 할 수 없으니,
그런 걱정하지 말고 당신이나 잘 하시오!"
우리 대중 가운데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없습니까?
"방장스님은 법문해 달라 했더니
결국 우리 먹고 살지도 못하게 만드는구나.
절에 불공 안 하면 우리는 뭘 먹고 살란 말인가?"
걱정 좀 되지?
나도 걱정이 조금 됩니다.
물론 우리 해인사 대중뿐 아니고
다른 곳에서도 이런 생각 할 사람이 있겠습니다.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를 믿든지 예수교를 믿든지 자기의 신념대로 하는데,
예수교를 믿으려면 예수를 믿어야지
신부· 목사 같은 사람을 믿어서는 아니 됩니다.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부처님 말씀을 믿어야지
승려를 따라가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천당도 극락도 아닌 지옥입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을 중간에서 소개하는 것이지,
내 말이라고 생각하면 큰일납니다.
달을 가리키면 저 달을 보아야지,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대중도 다 알겠지만
승려란 부처님 법을 배워 불공 가르쳐 주는 사람이고,
절에서는 불공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불공의 대상은 절 밖에 있습니다.
불공 대상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다 불공대상 입니다.
이것이 불공 방향입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절에 사는 우리 승려들이 목탁 치고
부처님 앞에서 신도들 명과 복을 빌어 주는
이것이 불공이 아니며,
남을 도와주는 것만이 참 불공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실천할 때,
그 때 비로소 우리 불교에도 새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남의 종교와 비교, 비판할 것은 아니지만,
예수교와 불교를 비교해봅시다.
진리적으로 볼 때 예수교와 불교는 상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부 학자들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볼 때에도 예수교에서 보면
불교가 아무것도 아니고,
불교측에서 보면 예수교가 별것 아닐 것입니다.
서양의 유명한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도 "예수교와 불교가
서로 싸운다 하면 예수교가 불교를 공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마찬가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은 극단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리로 보면 그러하지만 실천면에서 보면
거꾸로 되어 있는 게 현실입니다.
예수교인들은 참으로 종교인다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불교인은 예수교인 못 따라갑니다.
불교의 자비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것인데,
참으로 자비심으로 승려노릇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남 돕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가 문제일 것입니다.
'자비'란,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사회적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승려가 봉사정신이 가장 약할 것입니다.
예수교인들은 진실로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갈멘수도원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정월 초하룻날 모여서 무슨 제비를 뽑는다고 합니다.
그 속에는 양로원, 고아원, 교도소 등
어려움을 겪는 각계각층이 들어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양로원'제비를 뽑으면
1년 365일을 자나 깨나 양로원 분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고아원'에 해당되면 내내 고아원만을,
'교도소'면 교도소 사람만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이 기도로써만 이루어지는데,
자기를 위해서는 기도 안 합니다.
조금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남을 위한 기도의 근본정신인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인입니다.
그들은 먹고 사는 것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양계와 과자를 만들어내 팔아서 해결한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자기들 노력으로 처리하고,
기도는 전부 남을 위해서만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어찌 하는가?
불교에서도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데,
소승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승은 남만 위해 사는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은 대승이지 소승이 아닙니다.
원리는 이러한데 실천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쪽 사람들은 내 밥 먹고 남만 위하는데,
우리 불교에서는 이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교를 본받아서가 아니라,
불교는 '자비'가 근본이므로 남을 돕는 것이 근본인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 기준을 남을 돕는 데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백련암에 찾아온 한 여학생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절을 했느냐?"
"스님, 저는 저를 위해 절하지 않았습니다.
남을 돕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절했습니다."
"왜 빙빙 돌기만 하느냐?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지 말고
직접 '일체 중생이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절해야지.
이것은 '모든 중생이 행복하게 해 달라고 비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는 거와는 다르지."
아무 생각 없이 절을 하지 말고,
절하는 것부터가 남을 위해 절해야 된단 말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더 깊은 사람이면
남을 위해 아침으로 기도해야 됩니다.
내게 항상 다니는 사람에게는 의무적으로 절을 시킵니다.
108배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면
날마다 아침에 108배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도 새벽으로 꼭 108배를 합니다.
그 목적은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다음 같이 발원하는 것입니다.
我今發心 내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하옴은
不爲自求 人天福報 제 스스로 복 얻거나 천상에 남을 구함이 아니요
願與法界衆生 一時同得 모든 중생이 함께 같이
阿多羅三三菩提 무상보리 얻어지이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중생들과 보리도에 회향합니다.
……廻向衆生及佛道
일체 중생을 위해, 남을 위해 참회하고 기도했으니
기도한 공덕이 많습니다.
이것은 모두 일체 중생에게 가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도 부족하여,
願將以此勝功德 원합노니 수승하온 이 공덕으로
廻向無上眞法界 위없는 진법계에 회향하오며
그래도 혹 남은 것, 빠진 것이 있어서 나한테로 올까봐
온갖 것이 무상진 법계로, 온 법계로 돌아가고
나한테는 하나도 오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인도에서부터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신라,
고려에 전해 내려온 참회법입니다.
중국도 중공 적화 이전에는 총림에서만이 아니고
모든 절에서 다 '참회'해 온 것입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서,
일체 중생을 대신해서 모든 죄를 참회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모두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불교 믿는 사람의 근본자세이며, 사명이며,
본분입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스님도 참 답답하시네. 내가 배가 고픈데
자꾸 남의 입에만 밥 떠 넣으라니 나는 굶으라는 말인가?"
인과법칙이란 불교뿐만 아니라 우주의 근본원리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입니다.
선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오고,
악한 일을 하면 나쁜 과보가 오는 것입니다.
병이 났다든지, 생활이 가난하여 어렵다든지 하는 것이
악한 과보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악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기억에는 없지만 세세생생을 내려오며
지은 온갖 악한 일들이 그 과보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선인선과라, 이번에는 착한 일을 자꾸 행합니다.
그러면 좋은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남을 자꾸 돕고 남을 위해 자꾸 기도하면,
결국에는 그 선과가 자기에게로 모두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한 기도가 되며,
남을 해치면 결국 나를 해치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도우면 아무리 안 받으려 해도
또다시 내게로 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고 생활하면 남을 내가 도우니
그 사람이 행복하게 되고,
또 인과법칙에 의해 그 행복이 내게로 전부 다 오는 것입니다.
생물 생태학에서도 그렇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남을 해치면 자기가 먼저 손해를 보게 되고,
농사를 짓는 이치도 그와 같다 하겠습니다.
곡식을 돌보지 않으면 자기부터 배고플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배고파 굶어죽을까 걱정하지 말고
부처님 말씀같이 불공을 잘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말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공할 줄 모르고 죄를 많이 지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지옥 문 앞에 서서 보니 지옥 속에서
고(苦)받는 중생들 모습이 하도 고통스럽게 보여서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대개 그 모습을 보면 '아이고, 무서워라.
나도 저 속에 들어가면 저렇게 될 텐데 어떻게 하면 벗어날까……'
이런 생각이 들 텐데 이 사람은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저렇게 고생하는 많은 사람의 고를 잠깐 동안이라도
나 혼자 대신 받고 저 사람들을 쉬게 해줄 수 없을까?
편하게 해줄 수 없을까? 하는 착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생각을 하고 보니 지옥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 순간 천상에 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착한 생각을 내면 자기부터 먼저 천상에 가는 것입니다.
요즘은 사회에서도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데,
우리 스님들은 산중에 살면서 이런 활동에는 많이 뒤떨어지고 있습니다.
오직 부탁하고 싶은 것은 부처님 말씀에 따르는 불공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석으로 부처님께 예불하면서
꼭 한 가지 축원을 합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축원문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세 번 하는 것입니다.
매일 해보면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좋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절을 한 번 하던 두 번 하던 일체 중생을 위해 절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기도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돕는 사람,
일체 중생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앞머리에서 말한
부처님을 팔아서 사는 '도적놈' 속에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서로 힘써 불공을 잘해서
도적놈 속에 안 들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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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2013-Mar
[성철스님]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작성자: 조회 수: 2849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有形), 무형(無形)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 등등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하므로 종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종말을 걱정하며 두려워하여 헤매고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본래 순금입니다.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 순금을 잡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하는 생각은 버리고 힘을 다하여 남을 도웁시다.
욕심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인 자기를 바로 보게 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 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겉 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면, 이는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대를 존경하며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현대는 물질만능에 휘말리어 자기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큰 바다와 같고 물질은 거품과 같습니다.
바다를 봐야지 거품은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다 함께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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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2013-Mar
[성철스님] 원수 갚는 방법
작성자: 조회 수: 2777
원수 갚는 방법 (성철스님)

'저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겨라.' (觀波怨家 如己父母)
이것은 원각경 (圓覺經)에 있는 말씀입니다.
중생이 성불 못하고 대도(大道)를 성취 못하는 것은 마음 속에 수많은 번뇌, 팔만 사천가지 번뇌망상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눈을 가려서 대도를 성취 못하고 성불 못합니다.
그러면, 팔만 사천가지 번뇌 가운데 무엇이 가장 근본되는 것이냐?
그것은 증애심(憎愛心),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선가(禪家)의 3조 승찬대사는 그가 지은 신심명 (信心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증애심만 완전히 떨어지면 대도(大道)가 명백하다.(但莫憎愛 洞然明白)
이 증애심이 실제 완전히 떨어지려면 확실히 대오(大悟)해서 대무심경계를 성취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심삼매에 들어가기 전에는 경계에 따라서 계속 증애심이 발동하므로 이 병이 참으로 고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불자들은 대도를 목표로 하느니 만큼 부처님 말씀을 표준삼아서 이것이 생활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가장 큰 원수 그런 사람을 부모와 같이 섬겨라 하면 너무나 무리한 요구 같습니다.
실제로 “나쁜 사람을 용서하라”거나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것은 또 모르겠지만, 원수를 부모같이 섬기라고 하니, 이것은 참으로 부처님이나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은 감히 이런 말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실 보면 불교에서는 용서(容恕)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용서라는 말이 없다면 잘못하는 사람과 같이 싸우라는 말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나는 잘했고 너는 잘못했다. 잘한 내가 잘못한 너를 용서한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상대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서 하는 말입니다. 상대의 인격에 대한 큰 모욕입니다.
불교에서는 “일체중생의 불성은 꼭 같다”(一切衆生 皆有佛性)고 주장합니다. 성불해서 저 연화대위에 앉아 계시는 부처님이나, 죄를 많이 지어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 있는 지옥중생이나, 자성자리, 실상(實相)은 꼭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아무리 나쁜 사랑이라도, 곁을 보고 미워하거나 비방하거나 한층 더 나아가서 세속 말의 용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부처님같이 존경하라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악한 사람이든지 선한 사람이든지 가장 죄 많이 지어서 무간지옥에 떨어져 있는 지옥중생도, 부처님같이 부모같이 존경하라 이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생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실례로 들어도 그렇습니다. 부처님 일생을 통해서 따라 다니면서 애를 먹이고 해치려고 별별 수단을 다 써서 괴롭힌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제바닷타(調達)입니다.
보통으로 보면 제바닷타가 무간지옥에 떨어졌느니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느니(生陷隔地獄)하는 말들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 방편입니다. 중생을 경계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어찌했던 그러한 제바닷타가 부처님에게 있어선 불공대천의 원수인데, 그러면 부처님은 제바닷타에게 어떻게 원수를 갚았느냐?
성불(成佛), 성불로써 갚았습니다. 죄와 복이 온 시방법계를 비춤을 깊이 통달했다.
(深達罪福相 偏照於十方)
착한 일 한 것이 시방세계를 비춘다고 하면 혹 이해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악한 짓을 한 무간지옥의 중생이 큰 광명을. 놓아서 온 시방법계를 비춘다고 하면 아무도 이해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가장 선한 것을 부처라 하고 가장 악한 것을 마귀라하여 이 둘은 하늘과 땅 사이(天地懸隔) 아닙니까 마는 사실 알고 보면 마귀와 부처는 몸은 하나인데 이름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다고 해도 그 사람의 자성(自性)에는 조금도 손실이 없고 아무리 성불했다고 해도 그 사람의 자성에는 조금도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와 부처가 한 몸뚱이면서 이름이 다를 뿐(同體異名)입니다. 비유하자면 곁에 입은 옷과 같은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떨어진 옷 때묻은 옷, 좋은 옷 등 온갖 옷을 다 입는데 좋은 옷을 입었으면 “아 당신은 참으로 거룩하다”고 하고 또 그 사람이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있으면 “에이 이자식 거지 같다”고 하는 식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옷을 입었어도 그 사람이 더 나은 것도 없고 아무리 안 좋은 옷을 입었어도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제바닷타가 아무리 나쁘다고 하지만 그 근본자성 본 모습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나중에 제바닷타가 성불해서 크게 불사(佛事)를 하고 많은 중생을 제도한다고 했습니다. 법화경(法華經)에 수기(授記)하지 않았습니까. 제바닷타가 성불한다고.
이것이 불교의 근본정신입니다. 나한테 조금 잘한다고 해서 “허허” 하고 조금 잘 못한다고 해서 “저놈의 자식” 하고 주먹으로 안되면 칼을 들고 달려드는데 이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긴다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 행동 공부하는 근본지침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불교에 들어오는 첫째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모든 중생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고 스승과 같이 섬겨라” 바로 이것이 근본 조건인데, 우리 불교를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소나 돼지같은 짐승까지도, 근본자성은 성불을 하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서, 부처님과 같이 존경을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불교 믿는 사람은 상대방이 떨어진 옷을 입었는지 좋은 옷을 입었는지 그것은 보지 말고 사람만 보자 이것입니다. 사람은 꼭 같지 않느냐 말입니다.
옛날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라에 큰 잔치가 있어서 천국의 큰스님네들을 모두 초청했습니다. 그 때 어떤 스님 한 분이 생활을 검박하게 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그 잔치에 초청되었습니다. 본시 생활 그대로 낡은 옷에 떨어진 신을 신고 대궐문을 지나 들어가려 할 때 문지기가 못 들어가게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좋은 옷을 빌려 입고 다시 갔더니, 문지기가 굽신굽신 하면서 얼른 저 윗자리로 모신다 말입니다. 다른 스님네들은 잘 차려진 음식들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이 스님은 음식을 자꾸 옷에다 들이 붓고 있습니다.
-스님 왜 이러시오. 왜 음식을 자꾸 옷에다 붓습니까?
-아니야, 이것은 날보고 주는게 아니야 옷보고 주는 것이지. 그리고는 전부 옷에다 붓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비유입니까 ! 허름한 옷 입고 올 때는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더니 좋은 옷 입고 오니 이렇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겉만 보고 사는 사람은 다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원 근본은 지옥중생이나 미물 곤충이나 악한 맹수나 점잖은 사람이나 누구나 할 것 없이 근본자성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큼 불성(佛性)만 보고 서로 존경하며 살지, 허름한 옷을 입었다고 해서 천대하거나 멸시하면 안된다 그 말입니다.
혹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법문하시면서 큰 짐을 지워 주시네 그건 부처님이나 하실 수 있는 것이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당장 주먹이 날아오고 칼이 나오는데 어쩌란 말이야. 이렇게 항의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지나간 실례를 몇 가지 이야기하겠습니다.
○ 첫번째 이야기
예전에 현풍 곽씨 집안의 한 사랑이 장가를 들었는데, 그 부인이 행실이 단정치가 못했습니다. 시부모 앞에서도 함부로 행동하고 의복도 바로 입지 않고 언행이 전혀 공손치가 않아, 몽둥이로 때리기까지 해보고 별 수단을 다 써봐도 별무 효과였습니다. 그렇다고 양반 집에서 마누라를 내쫓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사람이 맹자(孟子)를 펴놓고 읽다가 이런 귀절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본래 악한 것이 없이 착하다. 악한 이고 착한 이고 간에 누구든지 본성은 다 착하여 모두가 요순과 똑같다. (孟子道 性善 言必 稱堯舞)
여기에 이르러 그 사람은 활연히 깨닫고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까지 마누라가 하는 행동을 보고 나쁘다고 때리고 구박을 많이 했는데 그게 아니구나. 본래 요순같이 어진 사람인데 내가 잘못 알았구나. 앞으로는 우리 마누라를 참으로 존경해야겠다.
하고 마음먹었습니다.
예전 양반 집에서는 아침 일찍 사당(祠堂)에 가서 자기조상에게 절을 했습니다. 부처님께 예불하듯이. 이 사람이 다음날 아침, 도포 입고 큰 갓을 쓰고 사당에 가서 조상에게 절을 하고 나와서는, 제일 먼저 마누라한테 넙죽 절을 하는 것입니다.
마누라가 가만히 보니 남편이 미쳐버렸단 말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기를 보고 욕하고 때리더니, 도포 입고 큰 갓 쓰고 절을 넙죽넙죽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갑자기 미쳤나 하고 생각하는데
- 당신이 참으로 거룩합니다.
하면서 남편이 또 절을 하는 것입니다. 막 쫓아내는데도 한사코 따라다니면서 절을 하며 뭐라느냐 하면
-사람이란 본시 모두 착한 것이요. 당신도 본래 착한 사람인데 내가 잘못 보고 욕하고 때리기도 했으니, 앞으로는 당신의 착한 성품만 보고 존경을 해야겠습니다.
하면서 자꾸 절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를 한 달 두 달이 지나다 보니, 부인도 자기의 본래 성품이 돌아와
-왜 자꾸 이러십니까? 이제는 나도 다시는 안 그럴테니 제발 절은 그만 하십시오.
하게 되었단 말입니다.
-당신이 요임금 순임금과 꼭 같소. 그런 당신을 보고 내가 어찌 절 안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는 남편의 여전한 기색에, 결국 그 부인도 맞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날더러 요순이라고 하는데, 진짜 요순은 바로 당신입니다. 하면서 서로가 요순이라고 존경해 가며 살아가게 됐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내가 했던 말은, 부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두번째 이야기
내가 6 ·25 사변 뒤 통영 안정사 토굴에서 자고 있을 때 이야기 입니다.
하루는 진주에서 신도들 30여명이 와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한 신도가 30년동안 자기 영감하고 말을 안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금방 알 수 있는 사람이지만 이름은 들먹이지 않겠습니다. 내가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불교 믿는 부처님 제자라고 하면서 딴 사람도 아니고 아들 딸 낳고 함께 사는 영감하고 30년이나 말을 안하고 산다니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그랬더니 그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들 딸 몇을 낳고 난 후에 남편이 작은 마누라를 얻어 나가고 자기는 거들떠 보지도 않더라는 겁니다. 살림이고 뭣이고 싹 쓸어가 버리고 남은 자식들 데리고 먹고 살며 공부시키려니 그 고생이 말로 다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평생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분이 북받쳐서 말도 하기 싫다는 거였습니다.
다 듣고 난 다음에 내가 물었습니다.
-나에게 좋은 방법이 하나 있는데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까?
-예, 하겠습니다.
-그러면 법당에 올라가서 부처님께 3000배 절을 하되〈스님께서 시키는 대로 꼭 하겠습니다〉하는 원을 세우고 절을 하시오.
했더니 밤을 세워서 3000배를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길
-지금 당신은 당신의 남편이 작은 부인을 얻어서 나를 이렇게 만들고 괄시를 했다 하는 원한이 맺혀서, 30년 동안 말도 안하고 원수같이 지냈는데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영감도 본래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착한 사람이니까, 오늘 돌아가는 길로 당신 집으로 가지 말고, 가게에 가서 술하고 좋은 안주 사가지고 작은 부인 집으로 찾아가십시오. 부엌에 가서 손수 상을 차려서 영감님께 올리고 큰 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길 〈영감님 제가 죽을 죄를 졌습니다. 스님의 말씀이 영감님이 참으로 부처님 같다고 했는데, 내가 그것을 모르고 이제껏 말도 안하고 지냈습니다. 그 허물이 너무나 큽니다마는 아무쪼록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면 당신이 참으로 부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했더니, 그 사람이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영감이 보니 마누라가 미쳤단 말입니다. 아무리 얘기를 하려고 해도 막무가내던 사람이 술 받고 안주 만들어 와서, 절하며 잘못했다고 비니 하도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당신 도대체 어떻게 된거요?
-토굴에서 공부하시는 스님께 가서 영감 이야기를 하고 법문을 들었는데, 영감같이 착한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영감이 부처님과 똑같은 어른이라고 하십디다. 그래서 제가 지금 영감을 부처님이라고 생각하면서 절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영감이
-아! 불교가 그런 것인가
하고는 그만 크게 발심(發心)을 했습니다. 그 후로는 철저한 불교신도가 되어서, 부인이 새벽으로 기도하러 갈 때도 꼭꼭 같이 다니고, 나중에는 진주에서 신도회 회장까지 했습니다.
그러니까 근본은 상대방을 보되, 겉모습만 보지 말고 본래 성품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
보살계(菩睡戒) 서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넓게 바치는 진로업혹문이 모두 보현보살의 진법계다.'〈普照塵勞業感門盡是普賢眞法界〉
진로업혹문이란 중생의 나쁜 짓을 총망라 한 말인데, 아무리 중생이 나쁜 짓을 한다 할지라도 겉보기만 그럴 뿐 실제는 전부 보현보살 진법계다 이 말씀입니다.
겉모양은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성품만 보고 살면, 자성(自性)은 본래 청정하여 부처님이나 지옥 중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옷은 보지 않고 사람만 보고 살면, 자연히 원수라도 부모같이 안 섬길래야 안 섬길 수 없습니다. 원수도 원수가 아니고 부처님이니까 말입니다.
아무리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상대를 부모와 같이 부처님과 같이 섬겨야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와 같은 사상을 잘 알아서 실천해야겠습니다.
예전 인도에서는 조석(朝夕)으로 예불시간에 꼭 지송(持誦)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지르제타」라는 스님이 지은 150찬불송(一百五十護佛頌)이 그것입니다.
의정(義淨) 법사의 남해기귀전(南海寄歸傳)에도 보면, 의정법사가 인도에 갔을 때 전국 각 사찰에서 150 찬불송을 조석으로 외우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은심과부재 배덕기심원 존관원극경 유여극중은
(恩深過覆載 背德起深怨 尊觀怨極境 猶如極重恩)
베푼 은혜 천지보다 깊어도
그걸 배반하고 갚은 원수 맺는다.
부처님은 그 원수를
가장 큰 은혜로 본다.
쉽게 말하자면 어떤 상대를 부모보다 부처님보다 더 섬기고 받들고 하는데, 그는 나를 가장 큰 원수로 삼고 자꾸 해롭게 한다 말입니다. 이럴 때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그만큼 상대를 더 섬긴다는 말입니다.
원어존전해 존어원전친 피항구불파 불이피위은
(怨於尊轉害 尊於怨轉親 彼桓求佛過 佛以彼爲恩)
원수는 부처님을 해롭게 해도
부처님은 원수를 섬기기만 한다.
상대는 부처님 허물만 보는데
부처님은 그를 은혜로 갚는다.
존어원전친(尊於想乾親) ! 부처님은 원수를 섬기기만 한다 !
근본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에게 잘 해주는데 상대방은 내 잘 해주는 것은 하나도 없이 다 내버리고 자꾸 나를 해롭게만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섬기기만 하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상대가 나를 해롭게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저쪽을 받들고 더 섬긴다 이 말입니다.
심원해자심애호(深怨害者深愛護) !
나를 가장 해치는 이를 가장 받든다 !
이것이 부처님 근본사상이고 불교의 근본입니다.
전에도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교 믿는 사람 몇이 삼천배 절하러 왔길레 절을 할 때 그냥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일 반대하고 예수님 제일 욕하는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도록 그렇게 기원하면서 절하시오.
이렇게 말했더니 참 좋겠다고 하면서 절 삼천배 다 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부처님 제일 욕하고 스님네 제일 공격하는 그 사람이 극락세계에 제일 먼저 가도록 축원하고 절 합시다. 이제는 우리 불자들에게도 이런 소리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에 가고 안 믿으면 모두 지옥간다. 이렇게 되면 참 곤란합니다.
우리 불교는, 부처님은 안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착하게 살면 다 좋은 데 간다. 부처님 믿고 안 믿고 할 것 없습니다. 착한 일을 하기만 하면 좋은데 간다고 하지, 우리 부처님 믿어야만 극락세계 간다는 소리는 안 한다 말입니다. 그건 신사가 아닙니다. 우리 스님네들이 부처님 제일 욕하고 스님네 제일 욕하는 사람이, 극락세계 제일 먼저 가도록 축원하고 기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이 사실에 있어서 “저 원수를 보되 부모같이 섬겨라”이 말인 것입니다. 원수를 부모같이 섬길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고, 또 자꾸 그렇게 해 나갈 것 같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어 버립니다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게 되면 일체 번뇌망상과 일체중생의 병은 다 없어진다고.
중생의 모든 병이 다 없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이 부처 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불을 목표로 하고 사느니만큼 부처님 말씀을 표준삼아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 때 그 때 자기 감정에 치우쳐 살려고 하면 참 곤란합니다.
한편으로는 또 이런 의심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 큰일났네. 예수교에서는 치고 들어오는데 자꾸 절만 하고 있으면 불교는 어떻게 되느냐 말야, 상대가 한 번 소리지르면 우리는 열 번 소리질러야 겁이 나서 도망갈텐데, 가만히 있다가는 불교는 씨도 안 남겠다. 자 ! 일어나자.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럴수록 자꾸 절하고 그런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축원하는, 그런 사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선전하고, 그런 사상을 가지고 일상생활에 실천해 보십시오. 불교는 바닷물 밀듯 온 천하를 덮을 것입니다. 상대가 주먹질 한다고 맞주먹질하고 달려드는 것보다는, 저쪽이 주먹질할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부모와 같이 부처님같이 섬기고 그렇게 생활할 것 같으면, 그만 모든 사람이 그것에 다 감동이 되고 감복이 되고 해서, “불교가 그런 것인가 ! ” 하고, 불교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부처님 제자들이 부처님 말씀을 따라, 부처님 가장 욕하고 스님네 가장 공격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사람이 가장 먼저 극락세계에 가도록 그렇게 발원하고 기도하는 생활을 하면, 불교는 실제 온 천하를 다 덮을 것입니다.
그럼 장애는 어느 곳에 있는가? 저쪽에서 소리지른다고 이쪽에서 같이 소리지르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저쪽에서 주먹 내놓는다고 이쪽에서도 같이 주먹 내놓기 때문에 안됩니다. 저쪽에서 불지른다고 같이 불을 가지고 달려드니까 함께 타버리고 말 것 아닙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저쪽에서 아무리 큰 불을 가져오더라도 이쪽에서 자꾸 물을 들이붓는단 말 입니다. 어찌 당하겠습니까? 결국 불은 물을 못이기는 것입니다. 나중의 성불(成佛)은 그만두고 전술(戰術), 이기는 전술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불에는 물로써 달려들어야지 불로써 달려들어서는 안됩니다.
첩실(妾室)을 아주 미워하는 사람보고 첩실을 섬기라는 말보다도 “첩실 떼는 방법을 가르쳐 줄까?” 할 때, 이것은 전술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전술대로 하면 결국 첩살이는 도망가 버립니다. 이것도 일종의 방편인데, 흔히 전술로써 이렇게 말해주기도 합니다.
근본은 어다 있느냐 하면, 모든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자 ! 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법문의 총결산을 하겠습니다.
살상무구상청정(實相無垢常淸淨)
귀천노유사여불(貴廳老幼事如佛)
극중죄인극존경(極重罪人極尊敬)
섬원해자심애호(深怨害者深愛護)
모든 일체만법의 참 모습은 때가 없어 항상 청정합니다. 유정(有情) 무정(無情) 할 것 없이 전체가 본래성불(本來成佛)이란 말입니다. 옷은 아무리 떨어졌어도 사람은 성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늙은이나 어린이나 전부 다 부처님같이 섬기고, 극히 중한 죄를 지은 죄인까지도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동시에 나를 가장 해롭게 하는 사람을 부모같이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섬원해자심애호(深怨害者深愛護) !
나를 가장 해치는 이를 가장 받든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자세 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근본지침으로 삼고 표준으로 삼아서 생활하고 행동해야만,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있고 법당에 들어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은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기자는 여기에 있느니 만큼 우리 서로 서로 노력합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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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Apr
[성철스님] 마음의 눈을 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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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항상 하는 말이 모든 것이 마음이다 (一切唯心)라고 합니다.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心外無物) 동시에 마음이 곧 부처다(卽心是佛) 라고도 합니다.
불교는 그 교리 전체가 팔만대장경에 담겨있는 만큼 불교를 알려면
팔만대장경을 다 봐서야 불교를 알터인데 누가 그 많은 팔만대장경을 다 보겠습니까?
그렇다면 누가 불교를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결국 불교는 모르고 마는 것 아닙니까?
팔만대장경이 그토록 많지만 사실 알고 보면 마음“심(心)” 한 자에 있습니다.
가장 간단합니다. 팔만대장경 전체를 똘똘 뭉치면 마음 “심”한 자 위에 서 있습니다.
이 마음 “심” 한 자의 문제만 옳게 해결하면
일체의 불교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일체만법을 다 통찰할 수 있습니다.
그런 동시에 마음을 알게 되면 부처를 알고,
마음이 부처이니까 그래서 삼세제불(三世諸佛) 을 한눈에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이 마음에서 시작해서 마음에서 끝납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마음의 눈을 뜨자.” “마음의 눈을 뜨자.”하는 것 아닙니까?
그 뿐입니까
마음의 눈만 뜨고 보면 자기가 먼 천지개벽(天地開關) 전부터 벌써 성불했다는 것.
천지개벽 전부터 성불했으나 현재는 말할 것도 없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성불한 그대로 임을 알게 됩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결국 자성(自性)을 보는데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성불하는 방법이 여러가지 있습니다. 관법(觀法)을 한다.
주력(呪力)을 한다. 경(經)을 읽는다.
다라니를 외운다.
등등 온갖 것이 다 있지만
그런 여러가지 방법 가운데 가장 수승한 방법이 참선입니다.
참선(參禪) ! 견성성불하는 데에는 참선이 가장 수승한 방법입니다.
참선하는 이것은 자기 마음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에서만 참선하는 것이 아니고
딴 종교에서도 참선 많이 합니다.
참선 하겠다고 내한테 화두(話頭) 배우러 많이 옵니다.
며칠 전에도 예수교 믿는 사람들 셋이 와서 3,000배 절하고 화두 배워 갔습니다.
그 사람들한테 내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절을 하는데 무슨 조건으로 하느냐 하면 하느님 반대하고
예수 제일 많이 욕하는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도록 그렇게 축원하고 절하시오」
이렇게 말해주면 참 좋아 합니다.
이런 것이 종교인의 자세 아닙니까.
(우리 종교 믿는 사람은 전부 다 좋은 곳으로 가고,
우리종교 안 믿는 사람은 전부다 나쁜 곳으로 가고…)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신사 아닙니다.
나를 욕하고 나를 침해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을 더 존경하고,
그 사람을 더 도우고,
그 사람을 더 좋은 자리로 앉게 하고,
부처님께서는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선해야 된다는 것 마음을 닦아야 된다는 것
여기에 대해서는 예수교나 다른 종교를 믿어도 관심을 많이 가질 뿐 아니라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수도원의 아빠스(수도원장)라는 분이 내한테서 화두를 배운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요새도 종종 오는데 화두 공부는 해볼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와서 화두 배운다고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신네들 천주교에서는 바이블(Bible) 이외에는 무엇으로써 교리의 의지(依支)로 삼읍니까?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의 신학대전(神學大典)입니다.
-그렇지요 그 이야기를 들을려고 하는 말입니다.
아퀴나스가 그 책을 거의 완성하게 되었을 때 자기 마음 가운데 큰 변동이 일어나서,
그래서 다시는 그 책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손을 떼어버렸습니다.
결국 그 책은 미완성으로 남았습니다만
그래도 그 책이 하도 훌륭하므로 예수교에서는 그것을 신학교리의 큰 권위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 책이 처음에는 금덩어리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썩은 지푸라기인 줄 알고 차버린 그것에 매달리지 말고,
그토록 심경 변화된 그 마음자리,
그것을 한번 알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화두를 부지런히 부지런히 익히면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교 사람들도 참선은 누구든지 해야 된다고 해서
실제 하는 사람이 많은데, 불교 믿는 사람이 도리어 참선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 그 근본 공부인 선(禪)이란 것을 알아서
이 공부를 해봐야 되는데 딴 종교에서는 이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불교를 믿는 사람은 너무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내가 잘못 보았다면 다행이지만 그래서 딴 종교의 사람을 예로 들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참선을 하려면 무엇을 근본으로 삼아야 되느냐 하면 화두를 근본으로 해야 됩니다.
화두를 배워야 됩니다.
화두,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마음의 눈을 떠서 확철히 깨쳐야 알지
마음의 눈을 떠서 깨치기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 좋은 법문이 있습니다.
오색 비단구름 위에 신선이 나타나서(彩雲影裏神仙現) .
손에 든 빨간 부채로 얼굴을 가리었다.(手把紅羅扇遮面)
누구나 급히 신선 얼굴을 볼 것이요(急須著眼看仙人)
신선의 부채는 보지 말아라(莫看仙人手中扇)
생각해 보십시오. 신선이 나타나기는 나타났는데 빨간 부채로 낯을 가리였습니다.
신선을 보기는 봐야겠는데 낯가린 부채만 보고 신선봤다고 할것입니까?
모든 법문이 다 이렇습니다.
“정전백수자” (庭前柏樹子) 니 “마삼근”(麻三斤) 이니
“조주무자”(趙州無字)니 하는 것은 다 부채입니다.
부채 ! 눈에 드러난 것은 부채일 뿐입니다.
부채 본 사람은 신선 본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신선을 보려면 부채에 가려진 그 얼굴을 봐야지,
빨간 부채를 보고서 신선 보았다고 하면 그 말 믿어서 되겠습니까?
화투를 참구(參求)하는 근본자세가,
화두는 암호인데 이 암호 내용을 어떻게 해야 풀 수 있느냐 하면,
잠이 꽉 들어서도 일여(一如)한 데에서 깨쳐야만 풀 수 있는 것이지 그전에는 못 푼다는 것,
이것이 근본적으로 딱 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눈을 확실히 뜨면 이것이 견성인 동시에 뜰 앞의 잣나무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란 것은 팔만대장경이 그토록 많고 많지만,
똘똘 뭉치면 마음 “심(心)”자 한 자에 있습니다.
가장 간단합니다. 마음 “심(心)”자 !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 일체 만법을 다 알 수 있는 것이고,
삼세제불을 다 볼 수 있는 것이고, 일체법을 다 성취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 뭐냐 하면 자성을 보는 것인데 견성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공부 부지런히 부지런히 하여 화두를 바로 아는 사람,
마음 눈을 바로 뜬 사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냥 “견성하자” “성불하자”하면 너무 불교의 전문적인 것이 되어 일반 민중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자”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좀 가깝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또 사실도 그렇고. 그래서 “마음의 눈을 뜨자”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오늘 이야기를 가만히 생각해서 하나라도 좋고 반쪽이라도 좋으니,
실지로 마음의 눈을 바로 든 이런 사람이 생겨서
부처님 혜명(慧命)을 바로 잇도록 노력합시다.
* 법문 출처: 해인지 <해인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