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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은 자에게 구할 것
고전 4:1-5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전 4:1-5 / [그리스도의 사도] 여러분은 아볼로와 내가 하나님의 감추인 비밀을 맡은 그리스도의 일꾼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일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3) 그런데 나는 어땠습니까? 충실한 일꾼답게 일해 왔다고 여러분은 보십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든 또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습니다. 나 자신의 판단도 믿지 않습니다. 4) 내 양심에 조금도 거리끼는 일이 없다고 해서 내가 죄 없는 사람이라고 내세울 생각도 없습니다. 나를 판단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5) 그러므로 주께서 오시기 전에 어떤 사람이 좋은 일꾼이냐 하는 것을 성급하게 결론짓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주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있는 그대로 속속들이 드러나 비로소 모든 사람이 왜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해왔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자 한 일에 따라 칭찬을 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분열의 원인이 지도자들의 인간적인 판단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강조하며, 교회의 지도자들은 무엇을 결정하든지 세상 지혜로 판단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꾼(1)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이 성숙하지 못한 어린 아이 신앙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혹여나 교회 지도자들을 업신여기지 않을까 염려를 합니다(고전 3:1-2).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을 그리스도의 일꾼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라고 가르칩니다. 사도를 사도답게 전도자를 전도자답게 인정하고 섬길 것을 당부합니다. 일꾼은 일반적으로 섬기는 자라는 의미의 헬라어 디아코노스를 사용하지만, 본문에서는 배의 가장 낮은 곳에서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 노를 젓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후페레타스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는 그리스도 아래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뿐만 아니라 전도자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과시하며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있는지를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일꾼의 자세(2) 바울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맡은 자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한 집안의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 또는 청지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충성은 사전적 의미로는 국가나 임금, 윗사람 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한다는 뜻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청지기는 게으르지 말고, 자신의 사명에 충성을 다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일꾼(3-5)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분열하는 것은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인간적 판단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들의 판단은 세상적인 기준에 따라 평가되었고 그에 따라 계파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1:10-17). 바울은 이런 상황을 지적하며 서로를 판단하지 말 것을 권면하며, 모든 판단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것이라고 합니다(계 20:12-13). 이때 모든 사람들의 행위와 마음속에 품었던 것들까지 잘잘못이 가려져 상벌이 내려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기 위해서는 주님의 일꾼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으며,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적용: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웃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충성’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주 안에서 충성스러운 자입니까? 판단하는 자입니까?
인간의 생각보다 불안정하고 방황하는 속성을 지닌 것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변덕을 다스리려면 수학을 공부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진지해질수록 더욱 마음이 안정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참된 경건만큼 영혼을 균형있게 안정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참된 경건은 다른 무엇보다도 영혼을 더욱 진지하게 만들고 더 열심히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평화를 누리도록 도와줍니다. 경건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매우 민감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 설 교 >
문제들을 극복하는 지혜
고전 4장 / 이동원목사
오늘 우리가 고린도전서 4장을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입니다. 우린 아직도 고린도교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문제 넘버 원, 첫 번째 문제를 아직 계속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다양한 문제들 앞에 직면해 있었으나 이 문제를 극복하고 문제를 넘어서서 마침내 성숙 할 수 있었던 그런 교회였습니다. 이 고린도 교회가 부딪혀 있었던 첫 번째 문제는 소위 분열의 문제, 혹은 분쟁의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몇 가지 중요한 요인으로 분석이 됩니다. 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나뉘어졌느냐? 첫째는 그 사람에 대한 소속, 지도자에 대한 소속, 누구를 따라가야 되느냐? 바울을 따라가느냐? 베드로를 따라가느냐? 이런 사람에 대한 소위 소속감의 문제였고 둘째는 사람의 지혜를 높이는 그런 경향들, 어떤 지도자가 더 똑똑하냐 누가 더 많이 아느냐? 사람의 지혜를 높이려고 하는 경향,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사람의 역할의 몰이해 특별히 지도자들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 누구의 역할이 더 중요하냐? 안 중요하냐 이런 문제들, 그 다음에 네 번째는 사람들에 대한 판단 결국 누가 더 나은 지도자냐 이 사람에 대한 판단, 이런 판단의 경향이 고린도 교회 안에 다양한 그룹들을 그룹핑을 분파의식을 촉진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4장에서 우리는 이 사람들에 대한 판단의 경향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가 해결해야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은 도대체 누구냐? 바울은 이 고린도전서 4장에서 영적 지도자들에 대한 중요한 세 가지 이미지를 소개합니다. 결국 영적 지도자 가 누구냐는 것은 이 세 가지 이미지를 온전히 우리가 종합할 때 영적 지도자가 누구냐 하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 가지 이미지란 첫째는 노예의 이미지입니다. 노예.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사형수,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검투사, 로마가 지배하던 시대에 많이 존재했던 원형 경기장에서 이 야수들과 더불어 싸움을 하고 있었던 이 검투사들, 사형수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 검투사들, 세 번째 이미지는 아버지. 이 세 가지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우리의 영적 지도자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4장에서 소개한 이 세 가지 이미지를 중심으로 해서 우리 같이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첫째는 노예입니다. 노예, 그들은 종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 지도자의 결국 어떤 역할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그들이 결국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이냐, 우리가 1절을 다같이 읽겠어요,1절과 2절입니다, 1절과2절 다같이 시작,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자들 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네,1절과2절에 그 영적 지도자에 대한 두 가지 표현이 등장하는데요, 한 표현은 뭐냐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표현입니다, 일꾼, 또 하나는 맡은자 라는 표현입니다, 맡은자. 먼저 일꾼이라는 표현을 생각해보겠어요. 여기서 일꾼이라는 것은 본래 로마시대에 군함, 싸우는 전투함 같은 큰 배 들이 있으면 배 밑창에는 노예들이 노를 젖습니다. 노를 젖는 사람, 이걸 휘패레테스라고 부르는데 거기서 이 단어가 나온 거예요, 일꾼이라는 말이, 영어로는 저 아래층에서 노를 젖고 있는 사람이다. 언더로얼, 그래서 아래에서, 저 아래층에서 노를 젖고 있는 사람, 혹시 과거에 벤허 라는 영화를 보신 분은 벤허가 일시적으로 노예가 되어서 배 밑창에 들어가서 열심히 그 노예틍에 섞여서 노를 젖고있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일꾼이라는 단어가 나왔어요. 거기 이제 감독이 있습니다. 네 감독이 있고 제일 높은 사람은 선장이고 그 다음에 또 감독이 있어요, 감독이 뭐 신호를 주면 시작 그러면 노를 막 젖기 시작해요, 중지 그러면 스톱하고, 오른쪽 하면 오른쪽으로 노를 젖고 왼쪽 그러면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젖는 그 노예들, 그 노예들 가운데 그 노예들 가지고 누가 더 높으냐, 낮으냐를 따지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노예들은 그냥 노를 젖고 있는 사람, 감독이나 배 위의 캡틴인 선장의 명령에 따라서 단순히 노를 젖고 있는 사람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노예들을 가지고 누가 높으냐, 낮으냐, 누가 나으냐를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오직 그들에 있어서 역할이라는 것은 뭐냐면 명령에 따르는 것 뿐이예요. 결국 영적 지도자들은 누구냐? 그것은 그리스도가 부른 사람들이고 주님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일꾼들이다, 일꾼들이다. 이런 표현을 썼어요. 그 다음에 또 하나의 표현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맡은 자 라는 표현입니다. 1절에 하나님의 비밀을 뭐예요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절에도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 맡은 자들, 오이코노모스, 히랍어로 오이코노모스 라는 단어인데 이것을 영어로 번역을 한다면 집을 관리하는 사람, 하우스 매니저, 혹은 하우스 키퍼,집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혹은 스튜어드라는 낱말로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청지기다. 집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스튜어드가 있어요, 스튜어드, 스튜어디스가 있는데 그 분들은 거기서 열심히 손님들을 섬기고 서브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본래 이 단어가 본래 히랍어 단어로 씌어졌을 때 그 뜻은 뭐냐면, 특별히 가장 중요한 역할이 뭐냐면 부지런히 집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것이 아니예요. 그건 다 주인의 양식이지만 주인이 맡겨준, 주인이 분배하는 배급하는 양식을 잘 받아 가지고 제 때에 양식을 부지런히 공급하는 사람, 그게 맡은 자 라는 것이다, 맡은 자. 결국 영적 지도자들이 하는 일이 뭐겠어요?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맡긴 것, 맡겨주신 그것을, 맡겨주신 것이 뭐냐? 여기 계속 죽 보면, 우리가 여기서 맡은 것이 뭐냐?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다 그랬어요, 하나님의 비밀, 특별히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서 에서 이 비밀을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로 쓰고 있지만 와도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말씀을 맡은 자. 영적 지도자들이 하는 일이 뭡니까?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이 배고프지 않도록 부지런히 이렇게 공급하는 사람, 그것이 맡은 자죠,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는 특별히 뭐 자기가 양식을 만들어내는 사람도 아니예요. 그냥 주인이 맡겨주신 그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이 말씀을 그대로 나누어주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지도자들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바울이 두 가지 표현을 썼어요. 어떤 표현입니까? 일꾼이고, 맡은 자다. 일꾼이고 맡은 자. 일꾼과 맡은 자도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경쟁은 있을 수 있어요. 누가 더 잘 하냐, 거기에 판단이라는 분위기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로 이 판단이라는 것은 두 가지 소스로 판단이 야기 될 수 초래될 수가 있습니다. 우선 내가 나를 판단해 보고 내가 이 일을 제대로 하는거야 뭐야, 내가 이런 판단이 있을 수 있어요, 또 하나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판단될 수가 있습니다. 좋은 일꾼이다, 농땡이 치는 일꾼이다. 이런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판단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근데 이 판단 때문에 일꾼들 나름대로 어떤 열등감을 가질 수도 있고 아파할 수도 있고 괴로워 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첫 번째 부분에서 고린도전서 4장에서 일꾼들이 경험하고 있는 판단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이 결론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거예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판단자는 자기 자신도 아니다, 주변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가장 유일한 판단자, 그리고 절대적인 판단자가 계시다. 그리고 그 분이 그 분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판단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일꾼들이 그 분을 바라보고 나를 가장 완벽하게 판단해 주실 그 분, 그 분을 바라보고 묵묵히 충성을 다 하는 것이 일꾼들의 자세다. 또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자꾸만 그 때가 이르기 전에 일꾼들 가지고 자꾸만 판단하게 되면 그 일꾼들 힘만 뺀다는 얘기죠.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주고 하나님의 때에 저 분들이 올바른 판단을 받을 수 있는 자로 세워 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주변 사람들, 영적 지도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이어야 한다는 것을 바울 사도는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이 두 가지 잘못된 판단, 자기가 자기를 판단하려는 경향, 또 이웃들에 의해서 매우 객관적이지 못한, 혹은 정확하지 못한 판단을 받을 때 이것을 어떻데 극복해 나갈 수가 있느냐? 3절4절의 교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근데 이런 말씀을 읽고 나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반성이나 평가의 무용론을 바울이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일꾼들이 서로 모여서 교육적인 의미에서 서로를 평가한다는 것, 이것은 자기발전과 성숙을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판단하는 판단, 그것이 궁극적인 판단이거나 그것은 완전한 판단일 수는 없다. 우리 사람이 지나치게 자기자신을 너무나 판단하려고 할 경우에 자학의 경향에 빠져 들어갈 수가 있어요. 내가 왜 이래, 왜 이래 그러다가 난 아무 것도 못해, 이런 자학의 늪 속에 빠져 들어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은 작은 일이다. 나도 되도록 나 자신을 그렇게 판단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4절에 그 이유는 내가 자책 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 내가 생각할 때 내가 굉장히 잘해요. 그렇다고 해서 정말 잘 한거냐?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건 완벽한 판단자가 나를 판단해 주시는 그 날 비로서 나의 모든 사역의 마지막 결과가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합니까? 4절에서 나를 정말 가장 완벽하게 판단해 주실 분은 누구라고 그랬어요? 주님이시다. 다만 나를 판단하실 분은 주님이시다. 5절 다같이 읽겠어요, 시작,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첫째로 우리가 영적 지도자들을 어떻게 우리가 바라봐야 되느냐? 첫 번째 이미지 그것은 종이다, 노예다. 누구의 종 이예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리스도의 종이다. 나를 부르신 분, 나를 고용한신 그 분, 그러니까 영적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누구를 바라봐야 되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 지도자들 자꾸만 나만 바라보면 내가 자격있나? 내가 목자 자격있나? 아 자꾸 생각하다가 아! 자격없지, 그래 나는 못해 그래 두 손들고 항복하게 된단 말이죠.
그러나 나를 불러주신 분이 주님이시니까 주님이 하라는 대로만 하겠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노예 된 사람들의 사역의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나를 불러 주셨고 주님이 나에게 명령하시니까 노 젖기 시작 그러면 젖는 거예요, 그냥 오른쪽, 왼쪽 그대로 하는 거예요. 그 분의 명령을 따라서 우리는 순종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하나님의 비밀의 말씀을 공급해서 섬기는 거예요. 묵묵히 그 일을 최선을 다해서 충성스럽게 감당한다면 주님 오시는 그 날, 주님이 나에게 상급을 주실 것인 줄 믿습니다. 때로는 사람의 칭찬이 없어도, 그래서 내가 실망되는 순간이 있어도, 실망하지 말 것은 그 분이 마지막 날 나에게 칭찬을 주실 것을 우리는 모두 믿을 수가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영적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요, 두 번째 이미지, 영적 지도자들의 두 번째 이미지는 이것은 우리가 영적 지도자들에 대한 고난의 측면을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의 고난, 피할 수 없는 어떤 고난, 모든 영적 지도자들이 반드시 겪어야할 어떤 고난의 이미지를 우린 두 번째 이미지를 통해 볼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9절과 10절에서 볼 수가 있어요. 우리 9절10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생각컨데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다. 여기서 9절에 보시면요, 내가 생각컨데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다, 맨 마지막에 두셨다. 이건 이런 이미지를 생각해 보시면 되요. 로마 사람들이 세계를 정복하고, 승리한 사람이 되어서, 개선의 퍼레이드, 개선의 행진을 지금 열면서 축제를 열고, 개선 군인이 되어서 입성을 합니다. 장군부터 좍 서서 들어오겠죠. 맨 뒤에 누가 끌려오냐면 포로된 사람들이 끌려와요. 포로된 자들이 맨 마지막에 끌려와요. 근데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포로 중에서 쓸만한 건강한 포로들을 데려다가 로마는 그 당시에 검투사로 많이 써먹었어요, 검투사. 그래서 이제 콜로세움, 유명한 로마의 원형 경기장, 이런 경기장에 들어가서 검투사로 싸우는 자로 양성시켜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구경거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야수, 야생 동물들, 사자 같은 동물들을 튀어나오게 하고 그 사자와 더불어 사람이 싸우게 만듭니다. 그때 원형경기장, 그 주변에 둘러싸인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건 뭐예요? 구경거리다. 마치 영적 지도자들이, 그런 모습이다. 그런 꼴이다.
바울이 자기자신을 때때로는 그렇게 느낀 것이다. 이것이 뭐 영적 지도자들의 모든 삶의 현장을 대표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때때로는 그렇게 구경꾼이 되는 인생을 살아간다. 내가 생각컨데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 복음 전하다 붙들려서 감옥에 들어 가기도 하고, 사람들이 밤낮 쳐다보기도 하고, 뭐 감옥에 안 가도 영적 지도자가 되면 감시하는 자가 많아요. 괜히 째려보죠 다 이렇게, 사 생활이 없어지고 자기의 모든 삶이 드러나고 노출되고 또 구경거리가 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피할 수 없는 어떤 고난, 복음 때문에 받아야만 하는 어떤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가 쿼바디스 같은 과거의 명화, 영화를 봐도 거기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겪어야 했던 그 무수한 고난의 상은 고나의 발자취, 고난의 걸음걸음들을 우리는 기억하게 됩니다. 오죽하면 바울이 그런 말을 했어요, 내가 사도인 내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자같이 그렇게 포로로 끌려다니며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마지막에는 결국 야수의 동물처럼 그렇게 죽어서 피투성이가 되서 삶을 끝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바울이 그런데 이런 고난의 삶을 지도자들이 살고있는데 그 당시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삶은 어떠했느냐 바울이 그것을 대조하고 있어요, 비교하고 있습니다. 8절 한번 읽어보세요. 바울이 굉장히 섭섭해하고 있는 거 같아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서 4장 8절 다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 하며 우리가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하기를 원하노라. 자, 사도들은 복음 때문에 이런 고난을 받고 역경 속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가 바울이 봤을 때 어떻게 느꼈냐면, 너희들은 이미 배부르다, 너희들은 이미 부요하다, 너희들은 왕 노릇 하려고 한다, 모여서 밤낮 뭐 하냐면 영적 지도자들을 판단이나 하고 앉아 있단 말이죠. 바울이 나으냐, 베드로가 나으냐, 그리고 나는 바울 따라가겠다, 누구는 베드로 따라가겠다, 바울과 베드로는 그런 생각도 안 하는데 교인들 스스로가 말이죠 나누어서 영적 지도자를 판단하고 말이죠, 배부른 모습처럼 앉아서, 복음을 위해서 싸우고 나가서 전도하고, 사람 살리고, 영혼을 구원하고 그 일 하기도 바쁜데 말이죠 그런 일 안하고 지도자들 앉아서 판단하고 그것이 그 당시 고린도교인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없죠, 옛날에만 있어요, 그런 일은, 네, 저는 반드시 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영적 지도자들이 이런 고난을 꼭 받아야 한다고 생각지 않아요. 그러나 피할 수 없이 받아야 하는 어떤 고난에 대한 각오와 결단은 모든 영적 지도자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라면 , 우리 주님보다 나을 것이 없잖아요. 우리 주님도 고난의 길을 가셨는데, 그러나 고난으로 끝난 것은 아니예요, 고난 건너편에 영광이 그 분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러나 영광에 앞서서 그 분은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었습니다. 십자가는 고난, 그리고 그 후에 예비된 영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영광은 원하지만 뭘 원하지 않아요? 고난은 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우리의 궁극적 지도자가 되시는 그 분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라면 복음을 위해서 수호하기를 원하는 모든 종류의 영적 지도자들은 어떤 고난을 반드시 각오해야 됩니다. 피할 수 없이 우리가 각오해야 되는 어떤 고난이 있어요. 이게 그냥 뭐 구경거리 정도가 아니라 바울이 어떻게 느꼈냐면, 더 아주 극단적인 언어를 여기 13절에서 쓰고 있는데요, 1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13절 다같이 시작,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두 가지 표현을 썼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인들이 제일 싫어했던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해요. 하나는 뭐냐면 먼지고 또 하나는 때, 목욕탕에 가서 밀리는 때, 그런데 그 표현을 썼어요. 때로는 세상의 더러운 것 취급을 받고 먼지 취급을 받고, 만물의 지꺼기 같이 되었다. 그런 취급을 받을 때도 있었다 이 말이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했단 말 이예요, 비방을 당한즉, 그는 비방을 당하면서도 권면 하고, 네, 12절에는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면서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견디고 참으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 이예요. 저는 어떤 의미에서 지금도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다보면 이런 고난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빌리 선데이 라는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가 있었는데요 이 전도자가 사역 초기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이 분이 아주 말을 잘하는 그런 전도자였어요. 그러나 좀 야성적인 스타일에 전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렇게 틀이 잡히지 않은 그런 설교자로서, 젊은 목회자로서, 어떤 개척교회 비슷한 어떤 작은 교회에서 일을 할 때였습니다. 초기 경험이었는데, 한 번은 아주 열렬하게 자기 깐에 침을 튀기면서 열심히 설교를 끝냈는데 저 뒤에 나와서 이제 교인들과 인사를 건네는데 어떤 교인들은 와서 "아! 목사님 그런 열렬하고 뜨거운 설교를 처음 들었습니다" 아 칭찬을 맡아 하는 거예요, 그 옆에 이제 아주 나이 많은 목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옆에서 쿡쿡 찌르면서 "기도해!" 그러더래요 "뭐라고 기도할까요?" "교만하지 말게 하소서" 그래서 교만하지 말게 하소서! 그 다음에 어떤 교인이 오더니 "목사님! 무슨 설교를 그렇게 무례하게 하십니까? 시험 들게 하십니까?" 그래서 옆에 있는 목사님을 쳐다보니까 목사님이 또 "기도해!" 그러더래요, 그래서 "뭐라고 기도할까요" 그러니까 " 낙심하지 말게 하소서!" 네, 사역을 하다보면 칭찬을 받을 때고 있고, 격려를 받을 때도 있고, 낙심할 때도 있고, 이 목사만이 아니예요, 여러 이 목자들도 마찬 가지예요, 영적 지도자들의 반열에 서서 사역을 하다보면 이런 일들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또 너무나 억울하다고 생각되면 도망가고 싶은 생각도 나고, 언젠가 제가 얘기했지만 제가 성경인물 중에서 제가 제일로 좋아하는 인물은 요나 입니다, 요나. 그 이유가 왜 그래요? 요나 같아서 그래요. 나하고 비슷해요. 어떤 때는 막 도망가고 싶어요. 내가 왜 목사를 해 가지고 목사 안 하면 그럴 필요도 없는데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여러분도 그럴거에요. 목장에서 열심히 사역하고 섬기다 보면, 이따금씩 가슴 아픈 일도 경험 하다보면 내가 이거 괜히 목자를 해 가지고 고생한다. 생각될 때가 있어요, 도망가고 싶은 때가 있고, 그러나 우리 주님이 고난을 받으셨다면, 내가 그의 제자라면 우리가 나중에 얻을 그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라면 이 만한 고통과 고난쯤이야 견딜 수가 있어야 한다. 고통을 통과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 저는 이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 일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일 세기의 아주 유대나라의 이스라엘에 이단자가 한 사람 일어났습니다. 기적을 행하고, 말씀도 잘하고, 자기를 다시온 메시야 라고 부르짖으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다녔어요. 그러나 그의 삶이 너무 호사스럽고 왕과 비슷한 삶을 살았어요. 근데 한번은 어떤 젊은 그리스도인 이 그에게 도전을 했어요, 도전을 "나는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 왜 그대는 못 믿는가?" 그랬더니 이 젊은 청년이 이단자에게 유명한 말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 선생이여! 당신의 손을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당신의 손에 만약 못 자국이 있다면 당신이 나의 구세주라고 나도 고백을 할 것이요" 우리는 우리의 손에 있는 못 자국 그것을 오히려 훈장처럼 생각하고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받는 고난, 저는 이 것이 모든 복음의 사역자들에게 반드시 가져야 할 삶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바울도 이런 고백을 했는데, 나는 구경거리처럼 취급을 당한다, 죽이기로 작정된 사람처럼, 사형수처럼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축복하겠다, 나는 참겠다, 견디겠다 복음을 위해서, 이것이 바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종들이고 영적인 사역자들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자, 우리가 두 가지 이미지를 봤어요, 첫째는 노예, 두 번째는 검투사, 혹은 사형수, 마지막 이미지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의 사이에 있어서 스스로를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아버지, 14절과 15절에 나와 있어요. 같이 읽겠습니다. 14절15절 시작,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서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여기에 15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되, 무슨 말이냐 하면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많은 스승들이 있을 수 있다. 그렇죠,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보면 나에게 깨우침을 주고 도움을 주는 많은 스승들이, 선생님들이 우리 주변에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러나 너희들과 나와의 관계는 특별한 관계가 아니냐?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고, 처음으로 교회를 세웠고, 그래서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 관계는 그냥 영향을 미치는 선생님들과의 관계 정도가 아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일종의 내가 영적인 아비와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냐? 하지만 아비로서 바울이 그들에게 존경받고 싶어서 바울이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책망 할 수가 있다는거죠.
그 책망을 받겠느냐 이 말이죠, 그 책망을 받겠느냐, 고린도 교인들은 많은 문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문제를 넘어서서 성숙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주어진 충고나, 이 따끔한 교훈을 그들이 제대로 수용 할 수가 있느냐? 그래서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아비라면 내 책망을 받아달라 이 말입니다.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이예요. 마지막 절 한번 보세요. 21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21절 다같이 시작,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20절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 왜 이런 말을 합니까? 고린도 교인들은 말만 그냥 많이 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능력에 있다, 여기서 능력이란 의미는 삶이라는 의미예요. 너희들의 삶이 중요한 것이다. 정말 하나님의 능력이 너희들의 삶을 바꾼 흔적을 가지고 인생을 사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 말만 많단 말 이예요. 말만 많다고, 이따금씩 진정한 성숙을 나타내 보이지 못하고 판단만 하고, 비판만 하고, 이런 분위기를 유도하는 교인들이 종종 있어요, 종종 있어요.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은 바울은 그것이 교만함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교만함,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18절에서 그것을 지적합니다. 18절 같이 읽습니다. 19절 시작,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 졌으나. 우리가 고린도서를 읽어보면 바울이 아주 여러번, 이 교만에 대한 강조를 합니다. 그 다음절에도 나와요 19절에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게 속히 나아가서 뭐예요 교만한 너희들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다. 너희들이 얼마나 말 잘 하느냐 올바른 소리하는 것처럼 너희들이 말 잘 하냐, 그걸 보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능력을 알아보겠다. 너희들의 삶의 현장을 보여 달라 이 말이에요. 정말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제대로 살고 있는지 제대로 전도하고 있는지 뭐 전도도 안 하고 영혼도 사랑하지 못하고 돌아다니면서 말만 하고 파벌만 만들고 말이지 고린도 교회 안에 이런 교인들이 있었단 말이죠. 바울이 가슴 아파 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나를 아버지로 안다면 내가 복음을 전해서 너희들이 예수님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내가 아버지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더냐, 내 말을 들어다오 이 말입니다, 내 말을 들어다오. 한 가정에서도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어버지하고의 좋은 관계, 특별히 성장과정에 있어서 부모의 충고와 교훈을 제대로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싫은 소리여도 부모가 하는 잔소리, 부모의 교훈을 좀 받고 고치고 이게 성숙이란 말 이예요. 바울이 그런 뜻에서 내가 아비와 같은 심정에서 말한다. 듣겠느냐 이 말이죠. 교만하지 말고 말만 너무하지 말고, 정말 하나님의 능력이 지배하는 삶을 보여달라. 바울이 가슴아파서 하는 소리죠. 그 말씀 붙들고 살아가기보다도 바울이 설교 더 잘 해, 베드로가 설교 더 잘 해, 앉아서 말이지 영적 지도자 판단이나 하고 앉아있고, 따지고 앉아있다 말이죠. 이게 그 당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현장이었어요. 그것이 현장이었어요. 이런 현장은 어느 교회, 어느 역사 속에나 있을 수가 있는 모습입니다. 특별히 머리가, 신앙적인 지식이 축적될 때 우리가 이 판단의 유혹, 또 교만한 자리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위대한 설교를 들었느냐가 중요함 것이 아니라 그 설교를 붙들고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단 말 이예요, 어떻게 사느냐. 오늘 설교 잘했다, 오늘 설교 그렇지 뭐, 오늘은, 겨우 반응이 그거란 말이지. 설교의 판단을 위해 설교가 선포됩니까? 선포된 말씀, 그 말씀 붙들고 어떻게 내 삶 속에 적용하느냐, 살아가느냐 이것이 중요한거란 말이죠.
헨리 나우엔의 책방에 가도 이 나우엔의 많은 책들이 있는데 요즘 그 영성 운동에 큰 별처럼 많은 감동처럼 글을 남기신 분 이예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만은, 최근에 돌아가셨어요. 이 분이 테레사 머더, 테레사 수녀를 인도로 방문했을 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그렇게 성안 스러운, 성자같은, 예수님같은 삶을 살 수 있었던 비밀은, 비결은 뭡니까?" 그 때 나우엔이 들었던 대답은 아주 평범한 대답이었어요, 아주 평범한 대답, 그러나 오랫동안 그것을 생각하게 된다고 말해요. 테레사가 이런 말을 하더래요 " 무슨 비결이 있겠습니까? 그냥 주님 말씀 따르려고 노력을 했죠, 그리고 주님의 종들의 말씀, 주님의 종들의 말씀을 주님 따르려고 애썼고, 주님의 종들이 준 말씀을 따르려고 노력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단순한 삶, 그게 크리스찬 라이프예요, 뭐 별거예요? 그런데 왜 이렇게 아는게 많은지 그냥 핏대 올리고 떠들고 소리지르고 말이죠, 앉아서 판단이나 하고 앉아있고 삶이 없어요 삶이 없어요.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고린도 교회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제가 첫 시간부터 계속 강조했습니다만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이 말을 잘 받아들였어요. 반항하지 않았어요, 반발하지 반항하지 않았어요, 잘 받아들이고, 고쳤습니다. 그래서 성숙한 교회가 되었어요. 저는 우리교회도, 그리고 이 시대의 교회들이 이런 성숙한 교회가 되고 성숙한 교인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칭찬 받읍시다
고전 4:5 / 강성찬목사
한해의 마지막 주일을 지키며 한해 동안 살아온 우리들의 삶을 어떻게 평가받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가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것은 주님의 관점을 가지고 내 인생을 평가하고 결산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미국 회사에 다니시는 분인데 상당히 출세해서 높은 지위에 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분은 여행을 자주 하시는 분이에요 비행기를 타고 많이 다니시는 분이십니다. 출장을 다니시는데 어떤 공항에 도착했을 때 비행기 연결이 되지 않아서 시간이 좀 늦어졌습니다. 비행기가 연착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이런 일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가 지연되었구나 뭐 조금 기다리면 되겠지 하고 느긋하게 마음먹고 다리를 쭉 뻗고 핸드백에서 책을 꺼내서 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마치 핸드백 속에 치즈 크랙커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보면서 이 치즈 크랙커가 먹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먹으려고 손을 뻗치려고 하는데 바로 그때 한 신사가 옆에 와서 앉더래요 그래서 와서 앉는 모양이다 했는데 앉자마자 그분이 자기 치즈 크래커 하나를 집어 먹더래요 야... 이상한 사람 다 있다. 그 다음부터는 자꾸만 신경이 책으로 안가고 옆 사람에게 신경이 쓰이는 것이에요 그래도 하나가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고 그냥 놔두고 그 다음에 자기가 두 번째 것을 먹었대요 그러니까 세 번째 것을 먹더래요 또 양해도 구하지 않고 그냥 먹어버리는 것이예요 그래서 자기도 네 번째 것을 먹었습니다. 이제 하나밖에 안 남았는데...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은 읽지 않고 자꾸만 옆 사람만 힐끗 힐끗 보는 거에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다섯 번 째 것을 낼름 이 신사가 짚더래요 그러더니 두 개가 요렇게 붙어 있는 건데 그 가운데 반을 딱 뜯더니 반쪽은 놔두고 자기가 반쪽을 먹더래요 아! 그래서 속으로 열 받은 거에요 너무나 괘씸해 가지고 사람이 도대체 이럴 수가 있나 그래서 반쪽을 탁 집어 갖고 옆에 사람에게 간접적으로 싸움을 걸 순 없고 불쾌하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 바닦에다가 탁 팽개쳐 버렸답니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이제 비행기가 출발한다는 방송이 나와서 비행기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들어가서도 분이 새겨지지 않는 거예요, 세상에 그렇게 무례한 사람이 어디 있나,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가고 인제 진정을 하면서 자기 핸드백을 딱 열었답니다. 열어보니까 왠 걸 자기 치즈 크랙커가 그 대로 다 있는 거에요, 그러자 갑자기 그 신사가 다르게 생각이 되는 거예요, 조금 전까지 만해도 열 받았던 그 인간, 하다가 야! 역시 멋있는 신사로구나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판단이라는 것은 그렇게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너무나 쉽게 속단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비록 나쁘게 평가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끝난 것처럼 좌절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조금 칭찬했다고 해서 내가 정상에 도달한 것처럼 그렇게 너무 흥분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은 흔히 타인에게 칭찬과 호평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판단은 외모만을 보기 때문에 정확하지 못합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지 못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 사람들이 타인의 마음속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타인이 나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나에 대한 판단은 정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3절)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처지를 헤아리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옛날, 홀어머니가 아들 하나를 열심히 키우고 가르쳤습니다. 잘못이 드러나면 언제나 종아리를 걷어 회초리로 때리며 가르치고 키웠습니다. 장성하여 과거를 치루고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은 아버지가 되었는데도, 어머니는 자식이 잘못하면 종아리를 걷게 하고 회초리를 드시는 것입니다. 종아리를 맞고 있던 아들이 어깨를 들먹거리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민망해진 어머니가 "매가 아파서 우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울고 있던 아들이 "그전처럼 매가 아프지를 않습니다. 어머니 기력이 쇠해지셨는데 앞으로 제가 잘못할 때 어머니 안계시면 누가 이렇게 가르쳐 주겠습니까? 그게 서러워웁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매를 맞으면서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하는 아들의 자세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래도 소망이 넘치는 세상이 될 줄로 믿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타인은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신은 자기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서는 자기가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전부는 아닙니다.
어떤 신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자였고 예수를 잘 믿었으며 헌금도 많이 하여 교회에서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루는 비몽사몽간에 이상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상급을 주시는데, 전도를 많이 한 신자에게는 별이 많이 붙은 면류관을 주시고, 헌금을 많이 한 신자에게는 보석으로 지은 집을 주시어 자기 교회의 신자들은 아이들까지 다 상을 탔는데 자기에게만은 아무 것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 신사는 너무나 서운해서 막 울다가 깨 보니 꿈이었습니다. "아, 내가 믿기는 해도 적게 믿었고, 헌금은 많이 했으나 내 형편으로는 적었으며, 더구나 교만한 마음으로 바치지 않았는가? 이제부터는 좀 더 잘 믿고 좀 더 주의 날에 많이 바쳐야겠다." 그 후로 그는 참 신자가 되었다 합니다.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아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에 의해서 자신을 판단합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지려던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모두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양심의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타락했기 때문에 양심의 판단도 정확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가 그 동안 봉사해 오던 청지기 직책을 수행하는 데 큰 실수가 있었음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바울이 안심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무죄하다는 것은 그가 자기의 일을 평가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시니라'(고후 10:13).
미국 독립전쟁의 수훈자이며 제1회 제2회 대통령이었던 죠지 와싱턴은 그의 어머니 "마리 포루"에게서 어린날 성경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또한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교훈 밑에서 자랐습니다. 이같이 하여 자란 죠지는 솔직하고 정직한 어린이었으며, 학교에 있어서는 성적이 우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선생님들에게 많은 귀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학교 동무 중에 "밧슬"이라는 악동이 있어서 늘 죠지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밧슬"이 어떤 날 혼자서 다른 많은 동무들에게 몰매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죠지는 용감히 그 악동인 밧슬을 위해 싸워주었습니다. 그러는 참에 돌연히 선생님이 나타났습니다. 싸움을 하는 것은 누구냐! 하는 꾸지람에 동무들은 모두 겁에 먹고 흩어져 버렸지만 죠지만은 그대로 선생님 앞에 나아가 "접니다"하고 분명히 대답하였습니다. 선생은 왜 싸움을 하였는가를 물어서 알고는 죠지에게 "공부를 잘하는 애는 무엇을 하든지 굳세고 정직하구나"하고 칭찬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타인에게 받는 심판이나 자신에게 받는 심판이 정확하지 못함을 아는 바울은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고 권면합니다.
사람들의 경의와 칭찬이 주의 일을 하는 데 힘을 북돋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으로 발전하기가 힘듭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10)합니다.
어느 날 왕은 신하들에게 암초가 많은 해변에 등대를 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낙성식 날 왕 자신이 읽을 수 있도록 건축자의 이름을 눈에 잘 띄게 등대의 기초석에다 새기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그 날이 왔고 존경받을 그 이름은 금으로 새겨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 받으며 읽혔으며 왕의그칠 줄 모르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곧 그 이름은 격렬한 파도 때문에 지워져 버리고 윤곽만 남게 되었으며 그 대신 왕의 칭호와 이름이 그 곳에 깊게 새겨졌습니다. 건물을 지은 자는 잠시 동안 자기 이름이 빛나도록 시멘트를 바른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그는 화강암으로 된 기초 석에 진짜 소유주의 이름을 새겼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왕이시며 진정한 소유주이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린 사람'은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더욱 커지고 그리스도의 사라지지 않을 영예를 확실하게 나누어 갖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사라지지 않는 이름-잭슨-예화뱅크))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인간의 비난을 초월해야 합니다. 바울은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이 최후의 심판자이심을 알았습니다. 인간이 최후의 심판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고린도의 일부 교인들에게 맹렬히 비난받던 바울에게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날에 판단 받은 것보다 주의 날에 판단 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판단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주의 판단에 신경을 쓰고 달려갈 길을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가지고 시종 일관하였습니다. 오직 주님의 판단만이 정확하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사람의 판단이나 자신의 판단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때에는 사람의 일에 보이지 않는 일까지도 밝히 드러내실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사람이 아닌 예수의 판단에 합당하도록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고' 사람이 행한 대로 '칭찬'하십니다.
성도의 큰 잘못 가운데 하나는 이 세상에서 칭찬과 상급을 다 받으려는 경향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때가 이르면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시어 칭찬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가 되면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심판하십니다. 어두움에 감추인 잘못까지도 심판하십니다. 이 세상에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우리들의 은밀한 행위와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행동의 원리들까지도 주님은 심판하십니다.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는 근시안적인 인간의 판단에서 이야기를 시작한 바울은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전지하신 주님의 판단으로 그의 논증을 이끌어 갑니다. 타인의 심판이나 자신의 심판보다 주님의 심판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권면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심판하시고 칭찬하실 것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때에는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3).
젊은 피아니스트 한 사람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연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잘 훈련된 그의 손가락을 통하여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 나오자 청중은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이 젊은 대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연주가 끝나자 청중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터뜨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맨 앞줄에 앉은 노인 한 사람만은 예외로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그 피아니스트는 고개를 떨어뜨린채 무대에서 걸어 나갔습니다. 무대 감독은 그의 연주를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대답했습니다. "전 잘하지 못했습니다. 실패한 거예요." 무대 감독이 다시 말했습니다. "저 청중을 보세요, 한 늙은이를 제외하곤 모두 일어서 있지 않습니까? 그 젊은이는 침통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저 노인이 나의 선생님이십니다."
이 피아니스트가 자기 선생님의 칭찬을 갈망했던 것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열망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행 13:22)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 1: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 2:3)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때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읍시다.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요 8:29)하십니다
우리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각광을 받아가며 일을 하든지 또는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 곳에서 숨어서 일하든지, 믿음, 근면, 감사와 사랑으로 우리들의 소임을 다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 입어 우리들의 주님이 기뻐하실 일들을 이루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도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교향곡을 작곡하고자 했던 루돌프라는 젊은 음악가가 비엔나에 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그가 원하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쓰고 고치기를 여러 번 반복하면서 그는 그의 작품을 몇몇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그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아주 우수한 작품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루돌프는 그 작품이 걸작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더욱 심혈을 기울여 곡의 완성도를 위해 힘을 다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작품은 무대에 올랐습니다. 교향악단은 그의 곡을 아름답게 연주해 주었습니다. 마지막 연주가 끝난 후 청중들은 우뢰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머리가 하얀 노인 한 분이 그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면서 말했습니다. "잘했다. 루돌프, 정말 잘했어!" 젊은 음악가는 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습니다. 그 노인은 자신이 그처럼 본받기를 원했던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대할 때, 우리는 주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종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도 격려가 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소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고 생명의 면류관 받을 줄 믿습니다.
충성으로 봉사합시다
고전 4:2 / 강성찬목사
충성 (pistov" 피스토스) 한다는 것은 '믿을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충성과 신앙(pistiv" 피스티스)은 대응되는 낱말로 신앙인은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충성은 참된 사역자의 필수적인 자세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청지기는 작은 일이든지 큰일이든지 그가 맡은 일에 충성하되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그 일은 자기의 기분과 판단에 따라 해서도 안 되고, 행동이 게을러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회피해서도 안 됩니다. 오직 그 주인의 뜻과 지시에 따라 그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가 (마 25:23)의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는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자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재능에 따라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주인의 달란트를 받지 못한 종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즉 그들은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일해야 할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모든 재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가 소유하는 성령의 은사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갖고 있는 재능, 즉 선천적인 소질이나 기술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각각 지능적인 면에 남다른 재능이 있는 자도 있고, 운동 신경이 발달하여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는 자도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예수를 믿고 성령을 통해 받는 은사도 역시 각양각색입니다(롬 12:6, 7). 그러나 그 모든 재능과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 한 분에 의해서 주어진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긴 목적은 주인의 재산을 유용하게 관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종들이 맡은 재산은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인을 위해서 재물을 잘 관리하여 재산을 보호하고 증식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달란트는 오늘날 하나님께서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나누어주신 성령의 은사와 상통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받은 각양 선한 은사들을 사용하여 주님을 섬기고 주의 교회를 위해 충성해야 합니다.
오랜 후에 주인은 돌아오고 재산 맡은 종들과 회계를 하게 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의 회계 보고를 들어봅시다. 그는 주인이 맡긴 돈 때문에 그가 장사를 할 수 있었고, 돈을 더 벌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고 고백했듯이 이같이 보고는 충성스런 하나님의 일꾼들의 자세를 대표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바로 이러한 성도들의 직임을 다한 신앙 고백을 근거로 행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인은 자기의 재산에 다섯 달란트의 이익을 끼친 종이나 단지 두 달란트의 이익을 남긴 종이나 차등 없이 상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주인의 상급이 성취한 일이 양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의 성실도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일을 배당받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일에 얼마만큼 성실하게 임했는가가 문제될 뿐입니다. 주인은 충성된 모든 종들에게 동일한 상으로 갚아 주십니다. 맡겨진 일을 잘 해낸 종들은 칭찬과 상급은 물론 주인의 신용을 얻었습니다. 특별히 두 달란트 받았던 종의 태도는 우리에게 신중한 고려를 요합니다. 비록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자보다는 보잘것없는 일을 맡았으나 그것을 경이 여기거나 불평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것은 그로 하여금 더 큰 일을 맡을 수 있는 신임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주인은 충성을 다한 두 종에게 더 많은 일을 주리라 약속했던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가 보여 주는 하나님께 악한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가지고 이윤을 남기지 않고 묻어 두는 자입니다. 곧 하나님께 악한 자란 하나님이 주신 재물과 능력과 권력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 맺는 일을 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자는 하나님을 악한 분으로 만드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합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지옥 형벌에 처하게 됩니다.
달란트 비유는 주인의 뜻을 올바로 깨달아 주인의 것을 가지고 주인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해 줍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주인 되신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돌리며 그것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이 의무를 다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열납되는 선한 자로 여김 받을 수 있습니다.
요셉을 봅니다(창39:1-6) 요셉은 자기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하여금 가정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손에 위임했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작은 일이라도 맡은 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최선을 다하는 충성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외국에 팔려가 종살이를 하면서도. 억울하게 오랫 동안 감옥에 갇혔어도 그때마다 충성했습니다
우리도 작은 일부터 충성하며 봉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명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맡은 일에 충성
(눅 12: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의 나라와 함께 다시 임하시는 것은 도적이 몰래 임하는 것같이 예상하지 못한 때에 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나라를 구하고 바라는 사람들은 그의 나라가 임하는 순간까지 항상 깨어 있어서 준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간마다 반응하고 순종하는 것이 준비된 사람의 자세입니다. 감각이 살아 있고 반응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맡기실때 지혜로운 자에게 맡기십니다. 지혜로운 자란 분별력 있는 사람, 생각이 있는 사람, 통찰력 있고 신중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무슨 일을 맡겨도 서둘지 아니하고 능숙하게 일을 해냅니다. 일을 그르치지 아니합니다. 바로 이러한 자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유업을 맡기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일에는 착오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들이 지혜를 구할 때 후하게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약 1:5).
하나님께서는 유업을 맡기실 자로 지혜와 함께 진실한 자를 찾고 계십니다. 약삭빠른 지혜로 주인의 재산을 유용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그 배의 이익을 남겼던 것처럼 오히려 주인의 재산을 더욱 불리는 그러한 진실한 종을 원하고 계십니다. 진실한 자는 꾸밈이 없습니다. 속이지 않습니다. 성실하게 일합니다. 자기의 원대로 일하지 아니하고 맡기신 주인의 뜻대로 일합니다. 자기를 기쁘고 편하게 하지 않고 주인을 기쁘고 편하게 해줍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재산과 집에 대하여 충성된 청지기는 그 집 전체를 관리함에 있어 분수에 맞는 경영과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인의 가족들이 불편함 없이 잘 지낼 수 있도록 배려를 해야 하며, 다른 종들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모든 불화나 불만을 철저히 해결하여 위로와 확신을 주는 것이 '그 집을 맡은' 청지기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지기에게는 영적인 권위와 함께 도덕적인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충성된 종은 자신에게 충성 합니다. 충성된 종에게는 주인의 사랑과 상급이 주어지고 불충한 종에게는 주인의 진노와 형벌이 주어집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주께서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오신 후에 우리가 어떠한 판단을 받을지에 대해서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외국에 나가서 학위를 다섯이나 따운 사람이 무단 횡단 하다가 사고로 죽었다고 합니다
학위는 다섯이나 있는 지 몰라도 기본적인 교통 질서를 지키지 못하고 자기에게 충성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충성된 종은 가정에 충성 합니다.
디모데전서3:5절에"사람이 자기집을 다스릴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라고 말했습니다. 직분자는 자기가정을 잘 돌아볼 줄 알아야 직분자로서 충성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16:14절 이하에 나오는 '루디아'라는 여인은 자기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장사차 빌립보에 온 '루디아'는 사도 바울을 자기 집에 모셔서 잘 대접하고 온 가족을 예수믿고 구원받게 했습니다. 그와같이 그는 자기 가정을 위해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가정의 영혼을 돌보는 사람은 참으로 충성된 종입니다.
충성된 종은 자기 직업에 충성 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에 충성하지 못하면 교회일을 바르게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직업에 충성하는 자는 더 큰일을 맡을 수 있는 소망있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자기 직업에 충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는 목자로서 충성했으며 전쟁터에서는 군인으로서 믿음으로 충성했습니다. 왕이 된 후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충성했으며 그런 일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꼭드는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처음부터 자동차 사업에 대성할 포부를 가지고 자동차 공장의 직공이 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연히 그는 자동차 공장의 직공이 되어 그 일에 흥미를 가지고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동안에 한 계단 한 계단 승진하게 되었고, 마침내 세계 제일의 자동차 기업주가 된 것입니다. 그날 그날의 자기 일을 충실히 해나가는 사람에게 반드시 좋은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 스탠다드 석유회사에 아치볼드라는 직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출장을 갈때마다 호텔에 가면 숙박계에 ‘한통에 4$ 스탠다드 석유라’고 적는 것었습니다. 이것은 자기 회사의 석유가격 이름이었습니다. 또 말하는 기회만 있으면 ‘한 통에 4$ 스탠다드 석유’라고 먼저 앞세우곤 하여 별명이 ‘한통에 4$’가 되었습니다. 석유왕인 사장 록펠러가 이 말을 듣고 평사원인 아치볼드를 불러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록펠러는 아치볼드가 회사에 대한 열심과 충성심이 대단한 것을 발견했고, 후에 록펠러의 뒤를 이어 사장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아치볼드는 가장 유능한 사장으로서 회사에 크게 공헌했다고 합니다.
영국 런던의 워커 미술관에는 콘트러라는 화가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그 그림은 폼페이라는 도시가 베스비우스 화산의 폭발로 인해 그 화산재에 묻혀 전멸당하는 비참한 모습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화산재와 용암이 비와 눈처럼 폼페이 성에 내렸습니다. 사람들은 화산재와 불을 피해 성 밖으로 몰려 나갔습니다. 이들로 인해 대환란이 야기되었습니다. 이 혼란 속에서도 성문 곁에서 묵묵히 서 있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그 성의 문지기였습니다. 뜨거운 화산재와 불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그 혼란속에서도 자신의 맡은 일에 충성하고자 그는 서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바로 '충성'이었습니다. 충성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잃어버리지 않는, 다시 말해서 죽음을 이기는 사명감인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
(계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서머나 교회에는 사탄의 하수인 노릇하던 유대인들의 핍박이 심하여 경건하게 믿고자 하는 자는 항상 순교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서머나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던 '폴리캅'(A.D. 155-165)이 이곳에서 순교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 교회의 형편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믿음을 붙든 성도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십니다. 생명을 내놓았으므로 생명을 대가로 받는 영생의 상급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보상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죽도록 충성한 자에게 주십니다.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면류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약1:12)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9:25), 자랑의 면류관(살전2:19) 의의 면류관(딤후4:8) 영광의 면류관(벧전5:4) 등이 있습니다.
이 면류관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그의 충성에 따라 주는 상급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영생의 세계에서 받을 영광과 상급의 여러 면을 표시한 것입니다. 물론 이 상급은 계급이나 신분의 차등을 말하는 것을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와 평등, 평화의 나라이므로 계급 사회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 나라는 오직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자녀로서 기업을 누리며 사는 나라입니다. 아무튼 이 면류관은 죽도록 충성하는 자가 받습니다. 자기 생명을 그리스도보다 더 중히 여기는 사람은 결코 순교할 수 없습니다.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반드시 핍박을 받아 생명을 잃어야 죽도록 충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의 고비도 마다하지 않을 때 그것이 그리스도께 대한 진정한 충성이요,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제 생명을 주께 드리는 일을 결단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의와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일꾼'<uJphrevta" 휘페레타스>은 노예선의 밑창에서 노 젓는 노예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노수에 견주어 충성해야 할 자임을 나타냅니다. 우리도 이러한 자세로 충성하며 봉사해야 합니다.
서머나 교회 폴리갑은 86년간 주님이 함께 하심에 대해 충성다했습니다.
다니엘을 봅니다. 그는 사자의 밥이 되어도 신앙과 기도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하다가 결국은 사자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충성됨을 보신 하나님께서 사자의 발톱을 봉하시므로 생명이 보존되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기 편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의 일입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러시아 황제 짜르에게 지극히 충성하는 한 나무꾼을 포로로 잡았는데, 그 나무꾼은 짜르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조금도 버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 나폴레옹의 군사들이 그를 위험인물로 생각하고 총살령을 내렸으나 나무꾼은 평온해 보이기만 했습니다. 죽음을 내다보면서도 조금도 변치 않는 그의 충성심에 감탄한 한 장교는 그의 총살 명령을 취소하고 그의 팔에 나폴레옹을 뜻하는 N자를 새겨 주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팔에 N자가 새겨지자 그 나무꾼은 도끼로 그 팔을 잘라 버리며“내게는 짜르황제에게 속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무꾼은 짜르 황제에 대해 매우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충성 충(忠)자를 분석하면 중심(中心)입니다. 즉 중심으로 일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어물어물 넘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사람이 보는데서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없는 데서도 더 잘하는 사람이 충성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집에 있을 때나 떠나 있을 때나 똑같은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교육하고 선교하며 봉사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한해를 살며 충성으로 봉사하는 달을 맞이하였습니다
작은 일에 맡은 일에 죽도록 충성하며 사명감당하며 영광돌리는 모두가 됩시다.
충성된 일꾼
고전 4:1-6 / 김태복목사
지금은 매주 고린도서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고전1장부터 4장까지는 교회의 분쟁문제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교회 분쟁의 원인 중의 하나가 앞장서서 일하는 일꾼들에 대한 지나친 비판 때문임을 설명하면서 그 해결책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문제는 누가 일으킵니까? 주일날만 와서 예배드리고 돌아가는 교인들은 결코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교회 일에 앞장서서 일하는 일꾼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는 언제나 앞장서서 일하는 일꾼들이 건강한 신앙자세로 일하는 교회요, 건강한 신앙의 일꾼들이 앞장서서 일하도록 만드는 교회입니다. 반대로 병든 교회는 앞장서서 일하는 일꾼들이 병든 신앙자세로 일하는 교회요, 건강한 신앙의 일꾼들이 일하는 것을 비판하고 상처를 입히는 교회인 것입니다.
사실, 어느 교회는 당회가 두 파로 나누어서, 한쪽이 찬성하면 한쪽이 반대한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을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일꾼이라고 하더라도 자기의 파가 아니면 비판하고 방해하는 모습을 보였을 것입니다. 가령 고린도 교회에 앞장서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일꾼이 바울파에 속했다면, 아볼로파에 속한 사람이 볼 때는 못 마땅하여 비판하고 사사건건 반대했을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분파적으로 나가면 아무리 선하게 일해도 전부 편견으로 봄으로 선한 일꾼들이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차츰 건강한 교인들은 빠져 나가거나 뒤로 물러서고 병든 교인들이 주장질하는 교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건강한 믿음의 일꾼들을 많이 양육하고 그런 일꾼들이 앞장서서 일하도록 넓은 일터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건강한 믿음의 일꾼들을 어떻게 양육하고 일하도록 만들어 줍니까?
오늘 본문에서 배우고자 합니다.
1. 건강한 교회 일꾼은 그리스도께서 세운 줄 믿어야 합니다.
1절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1절에서 말하는 ‘일꾼’이란 헬라어로 ‘휘페레테스’라는 말로, ‘휴퍼’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under’ 곧 ‘밑’이라는 말하고, ‘페레테스’라고 하는 말은 ‘노를 젓는다.’라는 말입니다. 바울 당시, 큰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들을 말합니다.
주인은 자기 생각대로 노예들을 이곳저곳 앉게 하고 자기 생각대로 중간 지도자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하는 주인이라도 노예들은 감히 불평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라는 배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들의 하나인 것입니다. 일꾼들이란, 캄캄한 배 밑창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무조건 명령대로 노 젓는 노예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선장들이 택한 사람들이요, 선장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노 젓는 노예는 밖을 못 봅니다. “저어라”면 젓고, “빨리 저어라”면 빨리 젓고, “멈춰라”면 멈출 뿐입니다. 그 명령이 자기 마음에 들면 젓고, 아니면 멈출 수 없습니다. 또한 어느 노예든지 “나는 이 자리가 싫고 저리로 보내주십시오.”라든지 “내가 저 사람보다 실력이 있는데 왜 저 사람에게 십장 일을 맡기는가?”라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오직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 일꾼이 되었습니까? 담임목사나 당회가 세웠습니까? 아니면 세례교인들의 투표에 의해서 되었습니까?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그렇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보면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시고 구별하여 임명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일꾼은 하나님이 맡기신 줄 믿을 때 건강한 믿음의 일꾼이 됩니다.
또한 각각의 직책도 하나님이 세우신 줄 믿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는 목사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어느 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 장로들이 자기보다 학벌이나 사회적인 지위나 실력 면에 못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직책을 하나님이 주실 줄 믿고 순종하고 협력하는 자세가 건강한 믿음의 자세입니다.
언제도 말씀드린 대로, 우리 교단 총회장을 세 번 역임한 이자익 목사님은 원래 조덕삼 장로님의 머슴이었습니다. 그러나 조덕삼 씨는 그가 신앙이나 머리가 뛰어난 줄 알고 자기보다 먼저 장로가 되는 것을 허락하고 신학교까지 공부시킨 후에 자기 교회 담임목사님을 모셨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자익 목사님보다 조덕삼 장로님의 그릇이 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조 장로님은 자기 집 머슴 출신을 자기보다 앞서 장로가 되게 하고 신학교를 졸업하게 한 후 자기 교회 담임목사로 모실 수 있었습니까? 교회의 목회자나 일꾼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 교회 모든 일꾼은 하나님이 세우신 줄 믿고 그 직책을 귀히 여기고 서로 적극 협력하심으로 우리 교회는 앞으로도 더욱 든든히 서가는 건강한 믿음의 교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건강한 교회 일꾼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우리가 무슨 비서나 사원, 혹은 종업원에게 일을 시킬 때 가장 신용하는 자에게 갖가지 중요한 비밀을 맡기는 것입니다. 공장의 기술, 거래처, 은행의 예금 구좌, 금고를 여는 방법, 그 외에 가장 중요한 비밀을 다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귀한 일꾼이냐, 아니냐를 알려면 ‘얼마나 주인의 비밀을 많이 맡았느냐’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자기의 일꾼들에게 하나님은 갖가지 성경의 깊은 이치와 경륜, 하나님의 신령의 은사를 알게 하시고 맡기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맡은 자’란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인데 ‘오이코노’는 ‘집’이란 뜻이고, ‘모스’는 집사란 말입니다. 주인의 재산과 종들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 곧 집사를 말합니다.
그런데 청지기가 가장 명심할 것은 재산을 잘 관리하여 이익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특히 주인이 원하는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요, 특별히 주인이 원하는 비밀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청지기는 열심히 수고함으로 주인의 사업이 잘 되게 합니다. 그런데 그 청지기의 약점은 말이 많은 것입니다. 주인의 사업적인 비밀을 마음대로 떠듭니다.
더 나가서는 주인의 가정의 비밀을 여기저기 옮깁니다. “주인이 몰래 만나는 여자가 있다.” “자녀가 이혼직전에 놓여 있다.”는 등 함부로 떠듭니다. 주인이 그런 말을 들으면 그 청지기를 당장 해고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청지기는 사업은 잘 못해도 얼마나 입이 무거운지 무슨 비밀이라도 일생 지키는 것을 물론이고, 주인 가정의 문제는 일체 입을 다뭅니다.
주인은 그런 청지기는 일생동안 신임하고 무엇이든지 맡길 것입니다. 그만큼 비밀을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가 봅니다. 때로는 당회에서 아주 비밀스러운 일을 의논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너나없이 약속하기를 ‘당분간 이런 문제는 비밀로 하자. 절대로 부인에게도 말하지 말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교회 안에 그 이야기가 전부 퍼집니다.
그러므로 비밀은 없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비밀을 맡은 자들로 잘 관리하고 지키어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여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함부로 가감하지 않아야 합니다. 더 나가서는 자기의 주장을 나타나기 위해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어느 분은 자기에게만 주신 특별한 계시나 환상, 혹은 꿈을 너무나 함부로 떠듭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더 이상 보여주시거나 들려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받은바 은혜도 간증이나 전도할 때 외에는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어느 남녀가 사랑하는 사이인데 여인이 너무나 입이 가벼워서 친구들에게 어제 밤에 남자가 ‘자기를 포옹했다, 입을 맞췄다.’라고 떠든다면 그런 여인에 대해 점점 정이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우리 목회자들은 대단히 조심스럽습니다. 말씀을 준비할 때나 전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할까 해서 조심스럽고, 혹은 하나님 말씀보다는 내 말이 더 앞설까 해서 조심합니다. 사랑하시는 청지기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이 맡기신 비밀들을 잘 지키고 관리하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건강한 교회 일꾼은 충성을 다하는 자입니다.
2절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충성은 ‘신실’'로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신앙을 나타내는 신실이나, 충성을 나타내는 ‘피스토스’는 모두 한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충성’이란, 자기에게 주어진 이 세상에서의 시간, 그리고 모든 재능, 모든 소유물을 총동원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직분을 맡은 자가 가장 구할 기도제목은 충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구하다’는 ‘찾아 헤맨다’란 뜻입니다. 가능하면 찾는다는 말이 아니고, 꼭 필연적 욕구를 가지고 이를 이루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청지기들이 혼신을 다하여 찾아야 될 것은 바로 충성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일꾼들은 어떻게 충성합니까?
세 가지 자세로 충성해야 합니다.
(1)은혜 갚은 심정으로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충성할 때에 반드시 명심할 것은 어떤 대가나 축복을 바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감격이 없습니다. 오직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심을 감사하여 은혜 갚는 심정으로 충성해야 감격이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9:15에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의 불을 받아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을 체포하여 고문했고 심지어 초대교회 기둥 같은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요, 다메섹으로 가던 이유도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엄청난 죄인을 부르시고 구원시켜 주셨을 뿐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워주신 은혜는 아무리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 갚기 위해 바울은 죽도록 충성했던 것입니다.
(2)작은 일에 충성입니다.
마25장에 보면 칭찬받은 청지기들은 작은 일에 충성했던 자들이 입니다. 그것이 큰 일, 큰 축복을 체험하게 되는 첩경이 됩니다. 그러나 작은 일이라고 무시하는 사람은 큰일도 맡기지 않으십니다. 어느 시골교회 목회자는 자기 양떼는 돌보지 않으면서 허구헌날 큰 교회 갈려고 정치만 하고 다닙니다. 어느 분은 돈을 왕창 벌은 후에 큰일을 하겠다고 벼르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적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큰일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느 분은 아주 작은 일에 충성을 다 하다 보니 점점 하나님을 맡기시는 것을 체험합니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가 늙어서 죽을 날이 가까웠을 때 사람들은 그의 후계자 문제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가 그의 후계자를 지목했을 때는 전 미국과 세계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쉬브라고 하는 무명의 사람을 후계자로 지목하였기 때문입니다. 쉬브는 초등학교 학력밖에 없었고 청소부로 회사에 입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그런 거대한 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까?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해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큰 공장의 한 부분 정원 관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부분의 정원 관리 뿐 아니라, 공장의 여러 구석진 곳까지 청소하였습니다.
이를 인정받아 정식 사원으로 채용되었습니다. 그 일에도 얼마나 땀흘려 충성했는지 나중에는 카네기의 비서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그가 카네기의 비서가 된 후, 바로 그의 눈과 손과 발이 되고 입이 되었습니다. 카네기가 움직이는 곳에는 쉬브가 있고, 쉬브가 있는 곳에는 카네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카네기가 자기 혼자서 밤이 늦도록 사무실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문밖에 쉬브가 서 있습니다.
카네기는 놀라면서 “오! 쉬브군! 자네 왜 아직도 퇴근하지 않았는가? 너무 밤이 깊지 않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쉬브는 조용히 웃으면서 “사장님! 사장님께서 저를 언제 부르실지 알 수 없는데 어찌 자리를 비울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카네기는 그처럼 전력을 다해 충성하는 사람에게 회사를 물려주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믿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3) 변함없는 충성입니다.
시종 여일한 충성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어제나 오늘이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불변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충성은 자기 이해득실 따라 달라집니다. 내게 유리하면 충성하고 불리하면 충성을 피합니다. 또한 주인의 상황에 따라 충성의 자세가 변합니다. 주인이 자기에게 잘 해주면 충성하고 아니면 충성을 멈춥니다.
아닙니다. 진정한 충성은 내게 불리하든지, 주인이 힘이 없어지든지,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는 입장에 있어도 충성하는 것입니다. 금년은 개해입니다. 사람들이 개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신탕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개는 자기 주인에게 변함없이 충성합니다. 주인이 가난하든지, 주인이 도둑이든지, 주인이 노인이든지 관계하지 않고 충성합니다.
어느 때는 주인이 화가 나서 발로 배를 찰지라도 끝까지 떠나지 않고 충성을 보입니다. 우리 친구 목사가 동기회 모였을 때 설교하면서 재미있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 친구는 작년에 은퇴하면서 교회 사택에서 아파트로 이사 가면서 가장 큰 고민은 기르던 개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10년 동안 기르면서 정이 든 개지만, 아파트로 가져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팔수도, 버릴 수도 없습니다. 할 수 없이 동물 병원에 가서 안락사를 시키고 부부가 산에 묻으면서 울었답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교인들이 돌아갔을 때는 울지 않던 목사가 개가 죽었다고 우는 자신이 한심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친구 목사가 그 말이 이해가 된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교회에서 많은 반대를 만나면서 거의 모두가 자기를 싫어하더랍니다.
그런데 자기가 기르던 개만은 얼마나 자기를 반기는지, 깡충깡충 뛰어오르면 반가워함으로 큰 위로를 받고는 했다고 합니다. 그 개가 죽으면 자기도 울 것 같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때로 충성 면에서는 사람은 개만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신년도 맡은 직분이 무엇입니까? 충성하되 하나님이 맡겨주시는 대로, 작은 일에, 변함없이 충성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건강한 교회 일꾼은 다른 이를 판단하지 않는 자입니다.
3-5절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 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을 판단함으로써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었고,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권한을 스스로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기독교인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가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만 눈에 발견하고 판단합니다. 어떤 분은 이야기 중에 거의 70-80%가 남을 비평하고 판단합니다. 경계할 사람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항상 말씀을 통해서 옳고 그른 것을 배운 탓인지, 다른 이를 보면 벌써 쉽게 판단이 됩니다. “그 사람 회개해야지, 아니면 하나님이 매를 때리실지 몰라.” “기도생활을 하지 않더니 시험 들었군요.” “그러니까 가정을 구원시키지 못하지.” 심지어는 나이 많은 성도가 돌아갔을 때 “그 집사님은 과연 천국 갔을까?”라고 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정죄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죄를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남을 비판하는 자는 하나님이 비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하나님도 그 허물을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판이나 판단으로 앞장 서 일하는 선한 일꾼들이 상처를 받는다면 그 죄는 너무나 큰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일하는 일꾼들이 반드시 명심할 것은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3절에 보면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판단에 휘말리어서 낙심하거나 열심히 하던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남을 정확히 판단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자기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여.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던지 간에 자기 신앙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지금은 판단받을 시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판단을 받을 때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입니다. 그 때에 주님이 분명 잘한 것과 못한 일을 판단하고 칭찬과 책망, 상과 벌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고 그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만약 어느 사람이 여름에 과수원에 가서 열매를 보고 익지 않았다거나 맛이 시다고 판단하고 비판한다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많은 교인들이 지금 광야를 지나가면서 한참 성숙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데, 마치 미숙하여 잘못된 양, 마음대로 판단해 버리므로 그 일꾼이 상처를 받거나 실족해 버린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범죄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아닙니다. 앞장 서 일하는 일꾼들을 판단하거나 비판하기보다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마십시오. 그러면 어느 날인가 무르익은 열매, 더 귀하고 성숙한 일꾼이 될 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일본 작가 미우라 아야코가 쓴 「빙점(氷點)」을 읽어보신 분들이 적지 않으실 줄 압니다. 그 여성 작가는 사실은 아주 불행한 젊은 날을 산 분입니다.
불치병인 폐결핵을 앓았을 뿐 아니라 24세 때부터 결햇 척추 카리에스와 대상 포진, 직장암, 파키슨 병 등으로 온 몸에 기브스를 하고 13년 동안 베드에 묶인 채 살았습니다. 그 긴 세월을 병상에서 남의 손에 의해 대소변을 받아내며 산 사람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만약 그 때에 누가 "이 여자는 얼마나 범죄를 했으면 저런 형벌을 받을까?"라고 판단했다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미우라 아야코 여사는 병상에서 하나님을 발견했고 세례를 받았으며, 그리고 기적 가운데 퇴원한 후에는 1959년에는 좋은 남자와 결혼까지 했습니다. 더 나가서는 장편 「빙점」으로 소설 공모에 응함으로 1천만 원의 상금을 받았을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을 줌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부가 출석하는 이시히가와 로쿠죠 교회를 그 작가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7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불행한 가운데 있거나 오늘 신앙적으로 나태 가운데 있거나 더 나가서는 범죄의 자리에 있더라도 결코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어떻게 성숙한 자가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하시는 날이 최종 평가의 날이요, 그 평가도 주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그 날까지 하나님이 맡기신 직책에 최선을 다해 충성하심으로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주님으로부터 좋은 판단을 받아 칭찬과 상급을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맡은 사람의 자세
고전 4:1-5, 히브리서 3:1-6 / 박조준목사
오늘 우리는 2002년 6월 마지막날, 마지막 주일을 마지 했습니다. 세월은 빨리 지나 갑니다. 금년도 절반을 산 셈입니다. 우리는 6월 하면 50여년전에 있었던 6·25 동란 한국전쟁을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때를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되겠고, 다시 그런 민족의 참극이 일어나도 안되겠습니다. 어제 서해안에서 북한의 함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어 내려와 총격전이 생기고 사상자가 생기게 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금년 6월은 우리 민족으로 잊을 수 없는 축제의 달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세계인의 잔치인 월드컵 행사가 열려 한달 동안을 온 국민이 감격과 흥분 속에서 지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우리 대표팀이 16강에만 들었으면 한이 없겠다고 기대하고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표팀이 16강에서 8강 그리고 4강에까지 진출하게 된 것은 대회역사상 이변이요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세계인이 깜짝 놀라고 한국인을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13억 인구의 대표인 중국 팀이 손을 들고 돌아갔습니다. 이제 한국대표팀이 세계의 강호들을 꺾고 4강에 우뚝 서게 된 것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실력입니다. 우리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데는
첫째, 훌륭한 감독 히딩크의 용병술을 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이번 한국민 에게 뿐만 아니라 세계인에게 축구계의 영웅으로 부상했습니다. 히딩크 감독에게 치하를 드립니다.
둘째는 우리 선수들의 결사적인 최선의 분투였습니다. 그래서 세계의 언론들은 소위 '한국형 축구'를 극찬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을 역동적인 나라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사력을 다해 4강에 올라 한국의 위상을 올려놓은 우리 선수들에게 큰 박수를 보냅시다.
셋째는 우리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응원이었습니다. 6월 한달 우리 온 국민의 화제는 월드컵이었습니다. 경기하는 날에 구장을 메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대형화면을 마련한 다른 구장, 거리, 광장을 메운 수백만의 인파는 월드컵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경우였습니다. 우리의 응원은 새로운 응원문화를 창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계 언론은 우리의 응원하는 붉은 물결을 본국에 보내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수백만의 인파가 그렇게 질서를 잘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안전사고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기간동안 범죄율이 25%나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도둑도 감동해서 도둑질하는 것을 잊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청결입니다. 경기가 끝난 후 젊은이들이 뒤처리를 하고 청소하는 모습이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니까 결과가 더 좋았습니다. 세계를 감동시켰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 민족의 표정이 변화했습니다. 보통 우리는 표정이 별로 없이 무뚝뚝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월드컵을 치르면서 우리 팀이 기대 이상으로 선전하면서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우리 민족의 표정을 완전히 바꿔 얼굴에 웃음을 띠고 사는 명랑한 미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모두가 함께 뭉쳐 4,700만이 하나가 된 것을 과시했습니다.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정말 놀라왔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안될 일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더구나 세계적인 경제 평가 기관에서 우리 나라의 경제 신용도를 두단계 높여 A 판정을 한 것도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정치 하나만 잘해주면 대한민국은 명실공히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주인이시고, 우리는 일꾼, 맡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맡은 사람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충성'이란 말의 성경 적인 뜻은 '믿음'이란 말과 통합니다. 영어로 'faithful'이란 말을 씁니다. '신실하다, 성실하다, 신의가 있다. 믿을 만 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충성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미쁘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에 믿을 만 하고, 의지할 만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약속을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 21장 4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을만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녀된 우리도 다를 사람이 믿을 많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사람에게 아무리 지식이 많고, 아무리 재간이 많고, 돈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하더라도 이 충성의 요소가 결여되면 그는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히브리서 3장 1절에 보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면서 '예수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 같다'고 말하면서 6절에 "그리스도는 그의 집을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인정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슨 일을 맡았던지 맡은 사람의 자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정신입니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도 그 국민의 주인정신이 얼마나 강하냐 약하냐 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국민의 주인정신이 강하면 그 나라는 반드시 흥하고 번영합니다. 그러나 국민의 주인 정신이 약하면 그 나라는 쇠퇴하고 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맡은 것을 의식하고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지 주인처럼 살아야 합니다. '나는 주인이다' 이 말처럼 힘찬 인생의 선언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은 내가 선택하고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나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남이 내 인생을 살아 줄 수 없는 것처럼 내가 남의 인생을 살아 줄 수도 없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요 내 길은 내가 가는 것입니다. 내 삶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좌우되거나 결정될 수도 없거니와 되어서도 안됩니다. 내 삶을 내 의지로 결정하는 것이 자유인이요 독립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가정의 주인입니다. 우리 가정의 행복과 불행은 나 자신에 달려 있습니다. 한 집안을 일으키느냐 못 일으키느냐 하는 것은 나의 의지, 나의 노력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입니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치국의 근본은 제가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파괴되면 우리 사회가 파괴됩니다. 우리의 가정이 건강하면 우리 사회도 건강해 집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직장의 주인입니다. 인간을 흔히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고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어떤 직장에서 일정한 지위와 직책을 가지고 일하면서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속해 있는 직장을 사랑하고 그 직장을 번영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지 하나님이 내게 맡긴 일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맡은 일에 열과 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직장이 번영하고 내가 행복하게 직장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민족의 주인이요, 나라의 주인이요, 역사의 주인처럼 살아야 합니다. 주인 가운데는 두 가지 종류의 주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참 주인이요 다른 하나는 거짓주인입니다. 참 주인은 주인의 구실을 할 줄 아는 주인이요, 주인의 자격과 실력을 갖추고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주인입니다. 그러니까 실질적인 주인입니다. 거짓주인은 구실을 못하는 주인이요, 주인의 도덕적 책임과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주인입니다. 이런 사람은 명목상의 주인이요, 형식상의 주인입니다. 그러니까 거짓 주인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주인 노릇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한번 엄숙히 물어 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내 삶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내 가정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내 직장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내 나라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물음 앞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정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주인정신입니다.
그러면, 주인정신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내 힘으로 내 미래를 개척하였다는 강한 정신입니다. 주인이란 말의 반대되는 말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노예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손님이라는 말입니다. 주인에게는 주인정신이 있고, 노예에게는 노예정신이 있습니다. 주인정신은 독립정신이요 노예정신은 굴종의 정신입니다. 노예는 주인에게 예속되어서 주인에게 복종하고, 지배를 받으며 삽니다. 제 발로 서서 제힘으로 살아갈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노예처럼 불쌍한 존재는 없습니다. 노예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노예에게는 인권이 없습니다. 사람이면서도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최대의 악은 노예제도입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노예제도가 노예정신을 없애야 합니다.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남한테 의존하지 않는 것부터 배웁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배울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자주정신입니다. 지난날의 우리 국민은 숙명론과 팔자의 철학과 운수의 관념과 체념의 패배주의의 악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 힘으로 내 삶을 개척 할 수가 없다. 모든 일은 숙명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인간의 길흉화복, 흥망성쇠는 하늘이 이미 정한 것이다' 라고 믿어서 그리 좋은 운이 돌아오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상에서는 체념과 방관, 탄식과 패배주의, 무사안일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숙명론적 인생관부터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운명은 절대로 다른 사람에 의해서 결정 될 수 없습니다. 구하면 주시고, 찾으면 찾고, 문을 두드리면 반드시 성공과 승리의 문이 열립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덴마크의 탁월한 지도자요, 시인이요, 사상가요, 교육자요, 목사였던 그룬드비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민 성격에 의해서 다시 한번 위대해 집시다. 덴마크 사람의 조상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바이킹이라는 해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럽 사람들을 약탈하고, 살인하고, 방화하고, 유린했습니다. 온 유럽인들이 바이킹을 가장 무서워했습니다. 덴마크 사람은 과거에 바이킹으로 유명했었고 폭력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덴마크 사람은 그런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훌륭한 국민성에 의해서 다시 한번 더 위대해 집시다."라고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한국은 경제력이나, 국토의 넓이로, 많은 인구로 유명해 질 것이 아니라 훌륭한 국민성에 의해서 다른 나라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유명해져야 합니다. 세상에 위대한 국민성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민족이 정말 훌륭한 민족이 되려면 먼저 위대한 국민성을 가져야합니다.
우리는 자주사회의 자주인 입니다. 자(自)는 '스스로 자'입니다. '스스로'라는 말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번 우리 국민이 붉은 티셔츠를 입고 거리로 나와 질서를 지키며 응원을 한 것은 스스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인이 놀랐습니다. 스스로는 힘의 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깨닫는 것이 자각이요, 스스로 서는 것이 자립입니다.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 자치요, 스스로 규율을 지키는 것이 자율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존중하는 것이 자존이요, 스스로 주인이라고 믿는 것이 자주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남이 하라고 해서, 남이 본다고 해서 하는 것은 타율입니다. 타율은 맡은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주님의 일을 맡은 사람은 숙명론자가 아니요, 노력주의자입니다. 성공과 승리, 행복의 열쇠는 내 손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나의 미래도 내가 책임집니다. 인간의 운명이란 팔자의 산물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루를 살아도, 무슨 일을 해도, 주인정신을 가지고 삽니다. 주인에게는 주인정신 있고, 손님에게는 손님정신이 있습니다. 주인정신은 무엇이고 손님 정신은 무엇입니까? 주인정신은 책임정신이요, 손님 정신은 방관정신입니다. 책임과 방관의 자세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있습니다.
방관은 남의 일처럼 바라보는 무책임한 구경꾼의 자세입니다. 방관은 책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방관은 손님의 입장에서는 것이요, 구경꾼의 자세요, 제3자의 위치에서는 것입니다.
책임이 무엇입니까? 내가 맡아서 해야할 일입니다. 어떤 결과의 원인이 내게 있다고 느끼고 거기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여기 어느 집에 불이 났습니다. 사람들은 둘러서서 구경만 합니다. 그러나 그 집주인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뛰어들어 불을 끄고, 물건을 꺼내고, 집안 식구의 생명을 구출합니다. 방관과 책임이 이렇게 다릅니다. 손님정신과 주인정신이 이렇게 틀립니다.
책임이란 말을 영어로 Responsibility라고 하는데, 대답한다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부르면 대답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에게는 부름의 원리와 대답의 원리가 있습니다. 아들이 나를 부르고, 아내가 나를 부르고, 이웃이 나를 부릅니다. 민족이 나를 부르고, 조국이 나를 부르고, 정의가 나를 부르고, 약사가 나를 부르고, 사명이 나를 부르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십니다.
왜 나를 부릅니까? 필요하기 때문에 나를 부르는 것입니다. 청년 이사야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는 소리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하나님을 뵈었읍이로다" 그때 스랍중에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핀 숯을 손에 가지고 그에게 날아와서 그의 입에 대며 '보라 이것이 네 이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했습니다. 이일이 있은 후에 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 청년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 대답해야 합니다.
부르시는데 대답하지 않는 것은 비겁하고 무책임한 것입니다. 그것은 맡은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부르면 대답해야 합니다. 12사도는 주님의 부르심에 대답하고 따라 나섰습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의 부름에 대답하고 나섰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진리의 부르심에 대답했습니다. 나이팅겔은 사랑의 부르심에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부르면 대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필요해서 나를 부르실 때 그 부르심에 용감하게 대답하는 것이 책임감입니다. 책임은 인격의 엄숙한 응답입니다. 응답하려면 성실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성실과 용기의 덕이 없는 사람은 불러도 응답할 줄 몰고, 책임을 느낄 줄을 모릅니다. 책임은 인격의 척도요 표준입니다.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책임을 질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람다운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으로서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책임사회의 책임적인 인간입니다.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 모여야 책임 사회가 됩니다.
무책임하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부끄러운 일입니다. 무책임하다는 것은 사람의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요 인간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맡은 사람의 자세는 주인정신의 자세요, 주인 정신은 책임정신입니다. 주인은 강한 책임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영국 속담에 '하인 열 사람의 눈보다 주인 한 사람의 눈이 밝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주인의 시력은 1.2고 하인의 시력은 0.2가 되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책임의식 문제입니다. 책임을 느끼면서 보는 것과, 책임의식 없이 보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구실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책임을 다 하는 것이요, 사람이 사람의 구실을 못한다는 것은 자기의 책임을 다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는 직위에 따르는 책임을 우리는 직책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직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한 나라에는 국민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잘되고 못되는 것은 국민 각자에 책임이 있습니다. 자손은 조상을 원망하고, 후배는 선배를 원망하고, 국민은 대통령을 원망한다면 그 나라의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나라가 바로 서라면 국민 하나 하나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주인의 눈으로 보고, 주인의 귀로 듣고, 주인의 머리를 생각하고, 주인의 가슴으로 느끼고, 주인의 손으로 일해야 합니다. 방심상태로 보면 보아도 안보이고, 들어도 안 들리고, 머리가 있어도 생각이 안나오고, 가슴이 있어도 느낌이 없습니다. 세상에 주인정신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손님의 방관정신을 버려야 합니다. 방관정신은 무책임 정신입니다. 방관자는 스스로 책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온 것은 의미 없이 온 것이 아닙니다. 각자에게 맡겨진 심부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명적 존재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각각 책임이 잇는 것입니다. 책임을 안다는 것이 사람으로서의 시작이요, 책임을 행한다는 것이 사람으로서의 끝입니다. 스스로 책임을 저버리는 것은 스스로 사람의 특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맡긴 심부름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인의 마음으로 살아야지, 손님으로 살면 안됩니다. 우리 하나 한가 가정을 책임지면 가정이 서고, 교회를 책임지면 교회가 제구실을 하고, 나라를 책임지면 대한민국이 부강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삼천리 금수강산을 주인처럼 섬겨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나라를 이룩하는데 우리 하나 하나가 책임을 바로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맡은자의 할일은
고전 4:1-5 / 남 호목사
나폴레옹의 군대가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의 일입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러시아 황제 짜르에게 지극히 충성하는 한 나무꾼을 포로로 잡았는데, 그 나무꾼은 짜르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조금도 버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 나폴레옹의 군사들이 그를 위험인물로 생각하고 총살령을 내렸으나 나무꾼은 평온해 보이기만 했습니다.
죽음을 내다보면서도 조금도 변치 않는 그의 충성심에 감탄한 한 장교는 그의 총살 명령을 취소하고 그의 팔에 나폴레옹을 뜻하는 N자를 새겨 주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팔에 N자가 새겨지자 그 나무꾼은 도끼로 그 팔을 잘라 버리며 “내게는 짜르황제에게 속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무꾼은 짜르 황제에 대해 매우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은 우리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들은 맡겨주신 하나님께 충성스럽게 일해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란 말은 ‘휘페레테스’라는 말인데 이 뜻은 하인, 고용인, 조수, 보조자라는 뜻입니다. 즉, 자기의 의지나 자기의 뜻이나 자기의 학문을 주장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하는 일을 잘되도록 보조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는 자라는 뮈스테리온이라는 말은 신비, 비밀을 말하는데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음을 믿는 자, 속죄되고, 의인되는 사실, 하나님과 화목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시민이 되는 것이 신비스러운 일이요, 감추어진 일들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우리들에게 맡기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과 하나님의 비밀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으니 충성할 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충성스러운 일꾼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일을 맡기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어떤 장로님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가 있었는데 IMF 때 4,500명의 직원 중 700명을 줄였다고 합니다. 장로님에게 어떤 사람을 남겼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장로님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을 남겼지요,,,”
사람들도 충성스러운 사람을 끝까지 남겨서 일하게 하고 하나님도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 자기의 비밀을 맡겨서 일을 시킵니다.
오늘은 어떠한 사람이 충성스러운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Ⅰ. 사명을 바라보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사명이란(使命, 부릴사, 목숨명) 맡겨진 일, 사신이 받은 명령, 목숨을 걸고 감당해야 될 일을 말하는데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일을 위해서는 내 목숨을 아깝게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행20:24)
빌1:12 바울은 자기가 당한 고난이 복음전도에 유익하게 되었다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간증합니다. 복음에 유익하다면 얼마든지 고난을 감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롬8:28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면 성도들은 자연 좋은 것입니다.
성도들이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일이 있어도 그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성도들에게 최선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흑인목사 마틴루터 킹 목사는 비폭력적 시위, 연좌 농성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흑인문제를 호소했습니다. 킹 목사님은 1968년 4월 4일 사살되기까지 30회 이상 체포되었고, 가슴을 칼을 맞는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4살 된 장녀 쿄커가 유치원에서 울며 돌아왔습니다. 누군가 “요커 아버지는 교도소 갔대”라며 놀린 것입니다. 그때 킹 목사님 부인은 요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여러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교도소에 가신 거란다. 집도,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것들이 마련되도록 열심히 일하는 거란다”
킹 목사님은 부인과 슬하에 네 명의 자녀를 두었고, 아이들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 후에 킹 목사님이 체포될 때, 요커는 TV뉴스를 보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때 동생 마티가 다음과 같이 위로했습니다. “울지 마, 요커누나 아버지는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가신거야. 모두 구하면 돌아오실 거야”
킹 목사님은 흑인들의 인권문제와 가난에 헤어나게 만드는 일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줄 알고 30회나 감옥에 들어갔고, 비난과 조소를 받으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일하다가 결국 순교했습니다. 충성스럽게 일하는 사람은 킹 목사님과 같이 자기가 맡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세상의 어떤 일에도 간섭을 받지 않고, 생명을 걸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믿으시기 때문에 일을 맡기셨습니다. 목사의 일, 전도사의 일, 안수집사의 일, 집사의 일, 교사의 일, 구역장의 일, 기관의 일, 봉사의 일, 성도의 일 등이 그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므로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지 늘 연구하고 기도하고 힘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바울은 사명감당하다가 매를 맞았습니다. 감옥에 갔습니다. 어떨때는 돌에 맞아 주위 사람들이 죽었다고 인정하고 모두 돌아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 전도하러 나갔습니다. 감옥에서도 원망하지 않고 기도하며 찬미를 불렀습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았습니다. 순교 직전에“주여 이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자기 사명을 위해서 생명을 잃으면서까지 말씀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킨 스데반은 분명 충성스러운 종이었습니다.
Ⅱ.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일해야 합니다.
자기를 잘 아는 분은 하나님과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는 분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시요, 혀에 맺힌 말까지 아시고 우리들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신 분입니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은 자신이 잘 압니다. 자신의 연약한 곳도 알고, 부족한 것도 알고, 자신의 약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일하는지,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하는지, 최선을 다하는지, 다른 사람은 잘 모르지만 자신은 압니다.
제가 부산에서 어렵게 공부하고 있을 때, 그곳 목사님 댁에 장로님 한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점잔케 생긴 분이시고,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조리가 있고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의 말을 듣고 목사님이나 사모님 저까지도 모두 감동이 되고 은혜가 되었습니다. 말씀의 내용은 이런 작은 교회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 내가 이 교회를 도와야 될 사명이 있는 것 같은데 미군 부대에 들어와서 일할 사람 몇 사이 교회가 큰 도움이 될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다른 것 필요 없고, 이력서를 영문으로 번역해야 하니 번역비하고 인지대만 주면 몇 사람 취직을 시켜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목사님은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모아 그 장로님께 넘겼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다시 오신다는 사람이 지금까지 오지 않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양과 같았는데 속은 사람을 헤치는 이리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 사람은 가난한 목사님 댁에 있는 돈을 가져가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가끔 생각해 봅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4:4에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부끄럽게 일하지 않았다는 말은 최선을 다해서 일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아무개야 너 부끄럽지 않느냐”라고 물을 때, “예. 부끄럽지 않습니다” 라고 우리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Ⅲ. 주님께 칭찬받게 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볼 때,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지 않고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사람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일을 했는지 알고 계십니다.
마25:14- 주인이 타국에 갈 때 그 집 종들을 불러다가 한 사람에게는 5달란트, 한사람에게는 2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계산을 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가 보고하기를 “받은 즉시 열심히 일해서 5달란트 더 가지고 왔습니다” “주님은 잘하였도다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두 달란트를 받았던 자도 보고했을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하고 칭찬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이 보고하기를“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 알았음으로 달란트를 감추어 놓았다가 가져왔습니다. 보소서” 이때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내 돈은 취리하는 자에게 주었다가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그리고 무익한 종이라고 불리우고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일을 맡은 자들이기 때문에 주님께 칭찬 받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칭찬을 받기 위해서는 주님의 마음을 알고 성실하게 일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사명에 대해서 언젠가는 평가를 받을텐데 그 때 우리는 반드시 칭찬 받아야 하겠습니다.
미국 스탠다드 석유회사에 아치볼드라는 직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출장을 갈때마다 호텔에 가면 숙박계에 ‘한통에 4$ 스탠다드 석유라’고 적는 것었습니다. 이것은 자기 회사의 석유가격 이름이었습니다. 또 말하는 기회만 있으면 ‘한 통에 4$ 스탠다드 석유’라고 먼저 앞세우곤 하여 별명이 ‘한통에 4$’가 되었습니다.
석유왕인 사장 록펠러가 이 말을 듣고 평사원인 아치볼드를 불러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록펠러는 아치볼드가 회사에 대한 열심과 충성심이 대단한 것을 발견했고, 후에 록펠러의 뒤를 이어 사장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아치볼드는 가장 유능한 사장으로서 회사에 크게 공헌했다고 합니다.
청지기
고전 4:1-5 / 이종윤 목사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를 마땅히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로 여겨야 합니다.
I.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다.
일꾼( , servant, helper, minister)은 Minister(장관)이란 뜻도 있으나 머슴 또는 노예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물결을 헤치고 나가는 교회라는 배를 젓는 노예의 역할, 그리스도의 종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사람의 종의 역할도 해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되었다'고 합니다(고후4:5). 이러한 우리의 섬김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므로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가족, 이웃, 민족국가, 하나님, 교회를 섬기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II.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다.
청지기( , steward, manager, treasurer)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우리가 맡은 자(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다음과 같은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첫째 종으로서의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종이지만 다른 종을 감독하고 관리하는 중간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데 이를 잘 수행해야 합니다. 둘째 순종하는 청지기여야 합니다. 주인의 명령 말씀을 듣기 위해 항상 주인에게 가까이 해야 합니다. 셋째 보고자 청지기여야 합니다. 주인에게 모든 점을 보고해야 하는데 특히 부족한 점을 보고할 때 다음에 더 잘하게 됩니다. 넷째 관리자 청지기여야 합니다. 모든 것이 주인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 곧 예수의 복음을 맡은 청지기로 그것을 잘 관리하여 더욱 증가시켜야 합니다. 다섯째 보호자 청지기여야 합니다. 주인의 가족, 우리 가족, 회사를 우리 회사라 하는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여섯째 주인으로서의 청지기 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 주인 출타 시 주인 사역을 대행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 더 조심하고 더 지혜롭게 되어야 합니다.
III. 청지기로서 우리의 책무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2). 우리가 충성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첫째, 종이 아니라 주인인체 할 때 충성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랑, 칭찬을 버려야 합니다. 둘째, 게으른 자, 희롱하는 자는 충성할 수 없습니다. 셋째, 주인의 재산을 오용(남용)하는 자 충성할 수 없습니다. 넷째, 가족 중 누구도, 재산의 어느 부분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 악을 보고도 못 본체 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여섯째, 주인이 올 것을 잊은 사람도 충성할 수 없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충성한 청지기가 받을 상은 아주 큽니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눅 12:37). 왕 중의 왕 되신 주님이 나를 대접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반면에 맡겨진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도적, 신성 모독자, 살인자처럼 불충한 자가 됩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적은 일에 충성하여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시기(마 25:21)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꾼
고전 4:1-5 / 김윤기목사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는데 그런 문제는 교인이 많아서 인 것 같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당파가 있었고(고전1:12), 바울을 비평하는 소리가 많았습니다. 그 비평의 소리는 1)외모가 단정치 못하다(고후10:17) 2)사도의 자격증이 없다(고후3:1) 3)말이 시원치 않다(고후10:10) 4)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고후1:23) 5)지식이 볼 것 없다(고후11:6) 6)신비 체험이 없다(고후12:2)등 등입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에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바울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일꾼은
1. 사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여겨야합니다
서구의 사람들은 '나'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나'를 무척 강조하는 데도 서로서로 협력해서 공동체의 삶을 잘 이루어 나가는 반면 ,우리나라는 '우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우리'를 많이 내세우면서도 협동이 잘 되지 아니합니다. 그 원인이 무었입니까?
이에 대한 어느 정신과 의사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오랜 임상 생할에서 환자들의 의식세계를 분석해 본 경험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우리'의 개념은, 나와 상관이 없는 한 개체를 포함한 '우리'가 아니고 혈연, 지연, 학연 관계로 맺어진 '우리'의 개념이기 때문에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이웃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타적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나'보다 '우리'를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동심이 '나'를 강조하는 서구인들보다 부족합니다. 정신과 의사의 지론에 따르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먼저 '우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우리'의 개념이 아닙니다. 혈연, 지연, 학연을 초월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생의 의미, 목적, 소망을 가진 자들로서의 '우리' 개념입니다.
본문 그대로 인용하면 우리는 일꾼입니다. 누구의 일꾼인가 하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신약 성경에 일꾼이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로마서 16:1 같은 데서 집사(diakonos)를 일꾼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 오늘 본문의 일꾼이라고 번역된 낱말은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휴페레테스'(huperetes)로서 아래서(hupo)+배젖는다(eretes)의 합성어로 배 밑창에 들어가 노를 젓는 종, 즉 노예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벤허란 영화를 보면 수 십명의 노예들이 양편에서 북소리에 맞춰 노를 젓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북을 빨리 치면 빨리 저어야 하고 느리게 치면 느리게 저어야 하고 약하게 치면 약하게 젓고 강하게 치면 강하게 저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 함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종속되어 그분의 시중을 드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하므로 교회의 직분이 누구에게 소속되어 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목사직이나, 장로직이나, 권사직이나, 집사직이나, 교사직이나, 구역장직이나, 기타 여러 교회의 직분들은 그 직분의 이름이나, 내용이나, 성격이나, 목적이 전혀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한 것이어야 됩니다. 다른데서는 전혀 사용할 수 없고, 사용될 수도 없습니다. 신령한 영의 직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꾼이란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는 맡은 자입니다. '맡은 자'란 흔히 청지기로 번역되는 '오이코노모스'로 전적으로 주인의 뜻을 받아 주인의 재산과 사람들을 관리하는 직책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하수인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아 관할하는 자들입니다. 성서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심오한 진리를 맡은 관리인'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올해에 그리스도의 일꾼과 종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만을 위한 관리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에 감추어 있다가 이제 나타내어진 것(계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구원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 신앙의 복음, 사죄의 복음, 부활의 복음, 영생의 복음 곧 하나님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실상 비밀의 복음입니다. 그 이유는 주신 자와 받은 자만이 아는 생명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비밀의 내용은 '복음'입니다. 이 비밀은 우리의 죄를 씻어내고 자유케 하는 비밀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비밀로 되어 있지 아니합니다. 그 깊은 하나님의 지혜가 모두 알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그 내용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밀이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겨지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알려진다"(마 11:25)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나타내시고자 하는 자들에게만 알려집니다. 특별히 어린 아이와 같이 순결하고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들에게만 알려지는 비밀입니다.
복음 외에 비밀로 간주될 수 있는 것 또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소망에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가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비밀입니다.
누가 나를 신임해서 책임을 맡길 때, 책임감으로 마음은 무거우면서도 상당한 긍지와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누가 나를 신임하고, 중요한 일을 위임해 주었을 때 뿌듯한 긍지를 느낍니다. 어떤 일을 맡아 하면서 조금 벅차고 힘이 들더라도 그 일을 맡긴이가 나를 인정해 줄 때는 덜 힘이 들고 오히려 힘이 솟아납니다. 다른 일보다 더 열심을 내게 됩니다. 그 일을 나에게 믿고 맡겼을 때 말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임하고 우리에게 비밀을 맡겨 주셨다는 데 대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줄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신임하시어 천국 비밀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함으로 그 직을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3.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비밀을 맡은 자들, 즉 우리들에게 비밀을 맡겨 주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충성입니다. 2절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2:10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충성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것이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 2:2에서 디모데에게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충성되지 못한 자들에게는 그 내용이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충성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충성을 '피스토스'라고 하는데 이말의 뜻은 '충성스러운', '믿음직하고 신뢰할 수 있는'입니다. 즉, 충성된 사람이란 폴커너(Falconer)가 말했듯이 "이러한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믿으면 박해에도 실패에도 굴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심령은 그리스도께 확고히 이어져 있어서 어떠한 신변의 위험도 그를 그 충성의 길로부터 유혹할 수가 없으며 또한 어떠한 거짓된 가르침의 유혹도 그리스도교 진리의 곧은 길로부터 그를 벗어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충성은,
1) 감격적인 보은의 충성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에게 베푸신 말로 다할 수 없는 구원의 은사에 감격하여, 터져 나오는 충성입니다. 바로 고린도후서 9장 15절에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자원적이요, 자발적이요, 능동적이요, 창조적이요, 생산적이요, 불가항력적인 충성이 일어나게 됩니다. 충성의 동력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입니다.
2) 작은 일에 충성입니다.
주인의 달란트를 맡은 자는 작은 일에 충성하였습니다(마25:21, 23). 그것이 큰 일, 큰 축복을 체험하게 되는 첩경이 됩니다. 곧 지극히 적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에게 한 것이 되고 맙니다(마 25:40).
3) 변함없는 충성입니다.
시종이 여일한 충성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불변하시기 때문입니다(히13:8). 그가 베푼 구원의 효력이 불변하고, 그의 약속과 축복이 불변하고, 우리를 향한 그의 역사가 불변하기 때문입니다. 꾸준한 충성입니다.
저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Andrew Cannegie, 1835-1919)가 늙어서 죽을 날이 가까웠을 때였습니다. 그의 후계자 문제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카네기에게 집중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마침내 뉴스감이 되어 계속해서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가 그의 후계자를 지목했을 때는 전 미국과 세계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쉬브'라고 하는 무명의 사람을 후계자로 지목하였기 때문입니다. '쉬브'는 초등학교 학력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처음 카네기 회사에 입사했을 때는 그 회사의 청소부였습니다. 그가 청소부로서 맡은 일은 큰 공장의 한 부분 정원 관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부분의 정원 관리 뿐아니라, 공장의 여러 구석진 곳까지 청소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평범한 진실이 나중에 그 회사의 정식 사원으로 채용되는 요건이 되었습니다. 남달리 열심히 일했던 그는 이것이 알려져 그 회사 간부들에 의해 나중에 사무직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가 사무직을 맡은 후 빈틈없는 그의 충성이 또 인정을 받아, 마침내 카네기의 비서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그가 카네기의 비서가 된 후, 바로 그의 눈과 손과 발이 되고 입이 되었습니다. 카네기가 움직이는 곳에는 쉬브가 있고, 쉬브가 있는 곳에는 카네기가 있었습니다. 카네가가 움직이는 곳에는 언제나 펜과 메모지를 들고 서 있는 쉬브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카네기가 자기 혼자서 밤이 늦도록 사무실에서 생산 과정에 대한 연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나왔습니다. 그 때 그 사무실 문밖에 쉬브가 서 있음을 보았습니다. 카네기는 놀랐습니다. "오! 쉬브군! 자네 왜 아직도 퇴근하지 않았는가? 너무 밤이 깊지 않았는가?"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쉬브는 조용히 웃으면서 "사장님! 사장님께서 저를 언제 부르실른지 알 수 없는데 제가 어찌 자리를 비울 수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는 청소부로 그 회사에 들어와서 마침내 저 유명한 카네기 회사를 이어받는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그 비결은 사심 없는 충성이었습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충성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는 그 회사 청소부로부터 회사의 구석구석 공간을 다 알고, 사원이 되어 그 회사의 일들을 피부로 맛보고, 사무직 사원으로 회사의 내용을 기록으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카네기의 비서로, 사장의 눈과 귀와 손과 발과 입이 되는 동안에 벌써 그는 카네기 강철회사를 자기 삶에 새기고 말았습니다. '충성'이라고 하는 간단한 삶의 무기로 그 회사와 운명을 함께 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가 저 유명한 카네기의 후계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람의 일꾼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일꾼이며,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실입니다. 우리는 감격적인 보은 때문에 그리고 작은 일에 변함없이 끝까지 신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연말 결산
고전 4:1-5 / 김성광목사
A. 하나님과의 연말 결산에 대하여
1. 연말 결산
며칠 전 신문을 보니 우리나라의 신용불량자 수가 무려 252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가고 이자를 갚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연체로 인한 빚이 천만 원 이상이 되는 사람이 절반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두 결산을 잘못해서 빚어진 결과입니다.
언젠가 ‘우리나라 대통령의 결산’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임기의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위임 당시에는 국민적인 영웅이었지만, 마지막에는 미국으로 망명을 가야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부인이 저격을 당해 세상을 떠난 후, 그 역시 저격을 당해 부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마약에 빠져 여러 차례 구속이 되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임기가 끝난 후, 감옥에서 옥살이를 해야 했고, 노태우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IMF라는 오점을 남겼고, 차남인 김현철 씨가 수감되었습니다. 현 김대중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두 명의 아들이 각종 이권청탁에 연루, 수감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대통령을 하더라도 결산이 중요합니다. 무엇이든지 처음보다는 마지막이 더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결산을 잘못해서 인생을 비극적으로 끝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결산을 잘 해야 합니다.
연말이 되면 회사에서는 회계장부를 감사하고, 정부도 관계기관의 국정감사를 합니다. 개인이나 모임, 단체도 반드시 결산이 있습니다. 이 결산을 잘할 때, 그 결산을 통해 보람도 얻을 수 있고, 살아가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살면서 이 땅의 결산도 잘 해야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생사화복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결산입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의 결산을 우선적으로 먼저 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국의 작가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 1564~1616)는 “끝이 좋으면 만사가 좋다.”라고 말했습니다. 시작보다 마지막이 더 중요합니다.
지난 열한달 동안 게을렀고, 충성하지 않았고, 잘못과 실수를 많이 했다 할지라도 이번 한달, 올해의 마지막달은 최선을 다해 올바로 살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칭찬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한 해를 잘 결산해서 행복하게 될 수 있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고, 보람도 느낄 수 있습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고전 4:1)
오늘 본문말씀은 교회 내의 분열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린도교회에게 사도 바울이 보낸 권면의 편지입니다. 타락하고 방탕한 고린도에 교회가 세워지자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출석하는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지식도 뛰어났고, 은사도 풍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의 뿌리와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서로 비방하며 헐뜯고 자기들만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분쟁과 싸움과 다툼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은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교훈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절 말씀에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 앞에 직분을 맡았고, 사명을 맡았으니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일꾼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명예나, 권세나, 그 밖에 자기를 내세우는 다른 것들을 통해서 분쟁과 싸움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데에 앞장서서 일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께만 판단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결산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12월 연말 결산의 시간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충성했는가?’,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직분을 얼마나 잘 감당했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판단하실까?’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판단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더 나아가서 ‘과연 나는 하나님께 칭찬과 상급을 받을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바로 중요한 결산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연말 결산의 첫째는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B. 하나님과의 연말 결산
1.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 충성, 불충성 결산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여기에서 ‘맡은 자’라고 하는 것은 청지기의 직분을 말합니다. 주인으로부터 일을 맡은 청지기, 관리인, 집사를 말합니다. 주인의 재산과 소유물을 관장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주인입니까? 온 우주와 생명의 주인이요, 생사화복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맡았기 때문에 그 맡은 것에 대해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충성’이란 무엇입니까? 충성은 헬라어로 ‘피스토스’(πιστóζ)라고 하는 데, 이 말은 ‘신실한’, ‘진실된’, ‘믿을만한’이라는 뜻으로 믿음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과연 주인에게 성실하게 충성하여 신실한 종이라고 칭찬을 받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군대에서 ‘충성’이라는 단어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장군이나 수하들 중에 국가에 충성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서 우리에게 실망을 주곤 합니다.
충성은 글자 그대로 목숨 걸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잠언 28장 20절 말씀에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충성하면 그 결과로 축복이 주어집니다. 충성하는 자에게 보람이 있습니다. 충성하는 사람에게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5장 말씀의 달란트 비유를 통해 충성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한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겨놓고 먼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주인이 돌아와 종들을 불렀습니다.
주인에게 자신의 맡은 직분대로 충성을 다하고 열심히 일한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열 달란트를 드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칭찬을 받고 더 큰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한 달란트를 그냥 가지고 왔다가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한 달란트를 뺏어서 열 달란트 가진 종에게 주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는 자에게 더 주시고 충성된 자에게 풍족하게 주십니다. 또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에게 더하여 주십니다.
영국의 설교가 존 버니언(John Bunyan ; 1628~1688)은 “심판의 날에 모든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을 당한다. 사람들은 심판의 날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열매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 날에는 ‘너는 믿었느냐? 믿지 아니하였느냐?’ 하는 것으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너는 충성했느냐? 실천했느냐? 아니면 실천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충성을 해야 합니다. 충성이라는 단어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것에 충성하면 원하는 성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것으로 충성하면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나라에 충성하여 정치를 하면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매사에 충성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건강도 이루어집니다.
미국 텍사스대학교 행동과학연구소의 벤저민 아믹 박사는 ‘일과 건강’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조사를 했습니다. 평소에 수동적이고 게으른 사람과 평소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을 비교해 본 결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이 10년을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게으른 사람, 수동적인 사람은 일찍 죽는다는 것입니다.
장수하기 원하십니까? 부지런하시기 바랍니다. 게으른 사람은 일찍 갑니다.
<USA TODAY>라는 잡지에서 미국의 56%나 되는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을 만큼 신앙생활을 했는가?”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 결과 46%는 솔직하게 “나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못했습니다.” 하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26%는 “나는 하나님 앞에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대답을 할 때에는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인정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을 축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을 사랑하시겠습니까?
‘예배 출석에 대해 나는 충성을 다했는가? 하나님 앞에 맡은 직분에 충성을 다했는가? 하나님 앞에 받은 축복에 대해서 예물을 드리고, 십일조, 감사, 건축, 물질로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했는가?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해서 전도함으로 충성을 했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반문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한달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한 달 동안 열심히 예배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지 못한 물질도 마지막으로 다 드리시기 바랍니다. 전도하지 못한 것도 열심히 전도해서 2002년을 잘 결산하면 2003년에는 하나님께서 갑절의 축복을 여러분에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장로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이 장로님은 교회에 별로 충성하지 않았고 또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교회를 열심히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예배시간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교회의 모든 봉사를 도맡아 하는가 하면, 전도도 열심히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어리둥절하여 장로님에게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그 까닭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장로님은 자신이 꿈을 꾼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꿈에서 천국을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꿈속에서 장로님은 천사와 함께 천국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배가 고파 어떤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천사와 함께 식사를 하러 들어간 식당에서 그는 아는 집사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평소에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장로님이 그 집사님의 식탁을 보자, 식탁 가득히 탕수육, 잡채 등 맛있는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장로님은 속으로 집사님이 저 정도로 먹고 있으니 나는 얼마나 더 좋은 것이 많이 나올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장로님의 식탁에는 겨우 자장면 한 그릇만 나왔습니다. 장로님은 화가 나서 천사에게 따졌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많이 먹어야 하지만, 당신은 별로 하는 일이 없으니 그것만 먹어도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장로님은 천사의 말을 듣고 자신의 친구 장로님이 생각났습니다. 그 친구도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을 게을리 했었습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그 친구의 소식을 물으니, 천사가 그 친구는 배달 나갔다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꿈에서 깬 장로님은 교회에 충성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뒤늦게 후회하지 마시고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2.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 잘했다고 교만하지 말고, 못했다고 낙심하지 말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관심거리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누구보다 자신의 성적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누구보다 자신의 성공여부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고, 스스로 자신에 대해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최후의 판단이 됩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 말씀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에 대해서만 비방을 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 그만큼 자신도 비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에 너무 집중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 ; 1809~1865)은 “만약 내가 사람들의 비판을 듣고 그에 따라 행동을 취했다면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비판보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에 생각과 행동을 집중시키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해 충성함으로 감당하면 그것이 그에게 보람이 되고 성공이 되어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훌륭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
링컨이 ‘노예해방운동’을 할 때, 그의 주변 사람들은 이를 모두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참모들과 수하들은 링컨이 계속 그 일을 주장하면 총 사퇴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하고는 밤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음 날 링컨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응답하신대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유가 없는 나라는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신념대로 행동하여 노예를 해방하고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받은 사명을 감당할 때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판단에 귀 기울이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마지막에 승리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대개 건강치 못한 사람들, 마음이 약한 사람들, 신경과민증에 걸린 사람들, 이렇게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비판을 잘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들에 대해 얘기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자신의 건강을 지키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에도 충분히 바쁜데, 다른 사람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일 뿐입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했느냐, 헌신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성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패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실패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성공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고 배울 것을 찾는 겸손한 마음을 지녔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업에서도 성공하고 인생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에서 벗어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잘난 척하고, 예쁜 척하고, 착한 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왕따’를 당합니다. 그런데 그 ‘왕따’로 인해 마음속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사고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경기도 파주시에 사는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이 친구들이 자신을 괴롭히고 아무런 이유 없이 왕따를 시킨다고 하여 목을 매달아 자살을 했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조롱하면 그 상처가 커져, 결국 죽음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보다 칭찬을 하고, 격려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는 그런 삶의 자세를 가져야 사회도 잘 되고, 나라도 건전하고, 국가도 발전합니다.
우리나라의 정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여당과 야당이 서로 힘을 합쳐야 하는데, 서로 비판하고 싸우기만 한다면,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통령 후보들은 대통령 후보들다운 인격을 가져야 하고, 격려할 줄 알고, 위로할 줄 알며, 서로 힘을 합쳐 협력할 줄을 아는 지도자가 나와서 정치를 할 때, 우리나라에 희망이 있을 것을 믿습니다.
3.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 하나님의 판단, 칭찬과 상급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고린도전서 4장 5절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판단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에는 어두움에 감춰진 것을 드러내시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신다고 했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도 모두 자연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칭찬을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칭찬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에파이노스’("επαινοζ)라고 하며, ‘상급’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칭찬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상을 주십니다. 상급을 주시고 보상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할 자를 축복하시고, 칭찬할 자를 칭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연말 결산을 잘하고 충성함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8절 말씀에 “자기의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께서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두게 하시고,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는 일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 적당히, 게을리 하지 말고, 충성함으로 열심을 다할 때 그것을 통해 생각보다 더 큰 결실과 열매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번 월드컵을 통해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놀랐던 일은 운동선수들의 몸값이었습니다. 스페인의 축구선수 피구(Luis Figo)는 연봉으로 약 700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축구선수 지단(Zinedine Yazid Zidane)의 일년 몸값은 약 837억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365일로 나누어 계산해보니 지단이 하루에 버는 돈은 약 2억 3천만 원입니다.
여러분, 공만 잘차면 되는 축구선수의 몸값이 7백억, 8백억이라면 여러분의 몸값은 얼마입니까? 하나님 앞에 충성해서 꼭 필요한 일꾼이 되어 교회의 장로, 권사, 집사로서 직분을 잘 감당하면 앞으로 하나님께서 7백억보다 더욱 많이 몸값을 계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의 몸값이 아주 높아져 갑절로 풍족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아서 꼭 필요한 일꾼이 되면 하나님께서 몸값을 엄청나게 높여주십니다. 전도 열심히 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금의 어려운 상황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30배, 60배, 100배로 채워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김창옥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는 교회 집사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보다 세상의 친구들과 어울려 좋은 음식을 먹으러 다니는 재미로 세상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주일에도 오전 예배만 드리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 아무리 멀리 있는 곳이라도 달려가서 그것을 먹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난소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1999년에 수술을 받고 항암주사를 9번 맞고 회복이 되어 퇴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2000, 2001년, 해마다 재발을 하여 입원하고 퇴원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2002년에 또 재발을 하여 입원을 하여 치료를 받고 퇴원을 했는데, 퇴원 후 혈액 수치가 위험 수치인 730이 나왔습니다. 그는 더 이상 항암치료도 받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습니다.
그는 ‘이제는 기도해야 되겠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사와 약물에만 의지하던 그가 더 이상 가망이 없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에 결단을 하고 강남금식기도원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마음속에 7일 작정금식기도를 하라는 감동을 받아 7일을 금식했습니다. 그동안 항암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체력이 약해져 있는 상태여서 마치 굶어 죽을 것만 같은 걱정과 두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걱정과는 달리 예배드리고 기도를 드리자 힘이 솟았습니다. 그렇게 7일 금식을 마치는 마지막 날, 예수님과 팔짱끼고 기도원 주변을 산책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순간 마음속에 병이 나았다는 확신이 들면서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한번만 살려주시면 이제는 하나님 앞에 충성하겠습니다.’ 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암에 걸려서 한번만 살려주시면 충성하겠다고 기도하지 마시고, 암에 걸리지 않은 상태에서 충성하겠다고 기도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평소에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다가는 언젠가 그의 인생에 ‘어느 날 갑자기’가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미리미리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꿈을 꾼 집사님은 병을 고침 받았다는 확신과 기쁨에 삶의 의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금식을 마치고 집에 가서 보호식을 하면서 힘을 낸 후,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았더니 의사가 암이 깨끗이 고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교회에 더 열심히 봉사하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고, 얼마나 하나님 앞에 충성을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하나님 앞에 겸손하면,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십니다. 병을 고쳐주십시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은총을 받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C. 연말을 맞아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한 해 동안 충성했나를 돌이켜 보는 연말 결산의 시간을 갖는 성도가 되자
여러분, 지난 열한달 동안에 하나님 앞에 예배로 충성하지 못하고, 물질로 충성하지 못하고, 기도로 충성하지 못하고, 전도로 충성하지 못했다면 이번 한 달 동안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연말 결산을 잘 마무리하여야 합니다.
가정생활 결산이나, 직장, 사업장의 결산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연말 결산입니다. 이것을 먼저 해결하여 하나님과의 연말 결산을 잘하면 하나님께서 직장 문제도 해결해주시고, 가정 문제도 해결해주시고, 자녀의 문제도 해결해주시고, 모든 것을 아름답게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12월 한 달 동안 하나님 앞에서 연말 결산을 잘하여 더 나은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질로 돌아가라
고전 4:1-5 / 이정선목사
때때로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데 아무리 애를 쓰고 궁리를 해도 쉽게 해결이 되지 않을 때, 그 문제의 본질적인 면에 접근해서 다루게 되면 의외로 쉽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 위기가 닥쳐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가 종종 부부싸움도 하고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상당히 심각한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습니다. 가령 남편이 직업을 잃었다거나 또는 아내가 남편 몰래 계를 들었다가 곗돈을 날렸다고 합시다. 이런 상황에서 부부간에 신뢰나 애정이 큰 손상을 입게 될 것이고, 날이 갈수록 갈등과 긴장이 심화될 것입니다.
이제 남편은 아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아내는 남편에 대한 존경과 의지하는 마음이 없어져서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소한 일가지고도 다투게 되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과거에는 사회적인 이목이 그런 긴장 속에 있는 관계를 그나마 유지하게 하는 강제적 규범으로 작용을 했는데, 그 기능이 약화되면서 쉽게 그 관계가 깨뜨려지게 됩니다. 요즘에는 이혼들을 참 많이 하잖아요? 옛날에는 부부 사이에 문제가 없어서 이혼을 안 했겠어요?
자, 이렇게 위기에 처한 부부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남편이 새로운 직장을 알아본다거나 아내가 절약을 한다거나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 깨진 신뢰가 회복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치유하기 위해서 부부 사이의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옛날 연애 시절에 얼마나 죽고 못 살 정도로 그리워하며 사랑했었는지 그때 사진을 보면서 그 시절을 회상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별 볼일 없는 집안이라면서 결혼을 반대하는 가족들에게 그 사람이 얼마나 성실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가졌는지 잘 설득해서 기어이 결혼 승낙을 얻어냈을 때의 감격도 되살려봐야겠지요.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기쁨과 커가는 아이들의 재롱으로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던 시절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부부란 두 사람이 만나서 그냥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라 수많은 사연들과 감정들이 이루어낸 매우 소중하고 값진 결정체란 말이지요.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것(잠 19:14)이라는 말씀이나,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마 19:6)이라는 말씀은 부부의 근본적인 개념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이처럼 부부 관계가 얼마나 소중하고 또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남편이 직업을 잃은 것이나 아내가 곗돈을 날린 것은 그렇게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본질적인 가치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문제에 집중하게 되면 문제가 더 커지고 문제만 중요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본질을 보게 되면 문제는 아주 작아집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하면서 서로 나뉘어 싸웠는데, 그 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것은 누가 훌륭한 지도자이고, 누가 더 인기 있는 사역자인가 하는 평가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품평회 하듯이 목사를 평가하고 비교하는 수가 많아요. 어느 목사는 능력이 많다, 어느 목사는 설교를 잘한다, 어느 목사는 공부를 많이 해서 유식하다, 이런 식으로 자기 취향에 맞는 목사를 선호하고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 아닙니까?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럼 너희들이 그렇게 따지고 구분하는 교회의 사역자란 게 무엇인지 그 본질을 한번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겨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바울과 아볼로, 베드로 등을 말합니다. 본질적으로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여기서 일꾼이라는 단어는 노예라는 뜻인데, 가장 아래층에 있는 자들, 즉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노예라는 뜻입니다. 영화 벤허를 보면 벤허가 억울하게 노예가 되어 갤리선의 노젓는 노예가 되잖아요? 그 노예들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노를 젓는 임무만 있을 뿐입니다.
바울이 자신이나 아볼로, 베드로를 그리스도의 노예, 노예 중에서도 가장 아래층에 있는 노예라는 단어를 써서 묘사하는 것은 사역에 있어서 그들의 역할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기는 데 있어서 완전히 그리스도께 예속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유능하고 똑똑해도 그들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개척했다고 바울의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아볼로가 가르쳤다고 아볼로의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입니다. 여기서 맡은 자라는 단어는 청지기라는 단어입니다. 청지기는 집사예요.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서 신임을 얻고 그 집의 집사가 됩니다. 즉 그 집안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책임을 가진 사람이 된 거지요.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특별히 하나님의 비밀을 맡아서 관리하도록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오늘날에는 분업화가 이루어지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도 역할을 나누어 담당하는 것이 효율적지만, 바울이나 아볼로 같은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비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였습니다.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사역자들의 궁극적인 임무는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셔서 구원으로 초청하시는데 그 일에 쓰임받도록 부르심을 입고 수종드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일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 일 자체가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가 없지요.
그래서 그렇게 책임을 맡은 사역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충성이라는 말은 믿을 만하다, 신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을 믿을 수 있던가요? 예측이 가능한 사람이지요.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또 내일 다르면 그 사람을 어떻게 예측해요? 그런 사람에게 무슨 일을 믿고 맡길 수 있어요? 우스운 얘기지만 교회 안에 그런 분들이 참 많아요. 기분이 좋은 때인지 은혜를 받은 때인지 모르지만, 교회 일에 아주 열심을 낼 때가 있어요. 그래서 목사가 믿고 일을 맡겨놓으면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완전히 딴사람처럼 바뀌어가지고 맡은 일에 책임감도 없고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팽개쳐버려요. 목사 입장에서 보면 죽을 노릇 아니겠어요?
일을 맡기는 사람과 일을 맡아서 해야 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어디서나 마찬가지 아니에요? 직장이든 무슨 조직에서든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능력보다도 충성입니다. 능력이야 어차피 우리의 능력으로 될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바울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능력이 없어서 그런 얘기를 했겠어요?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판단 받는 것을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거든요. 바울이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의 일꾼이고 그에게 일을 맡기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고용이 되었다면, 즉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일을 맡겼다면 고린도 교회의 평가에 신경을 많이 써야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목사가 나는 이 교회에 고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일을 맡기셨으므로 교회나 교인들의 평가에 상관하지 않겠다고 하면 매우 현실성이 없거나 아주 꽉 막힌 사람이 되어가지고 교회에서 쫓겨나기 딱 좋겠지요.
물론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다르다면 쫓겨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따라야죠. 우리가 굳이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다르다고 구별할 필요가 없겠지요.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되니까요. 어쨌든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역자는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하고 하나님께 평가를 받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목사가 평판이 좋아야 하겠지만, 너무 평판에 의지하게 되는 것은 세속적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겠어요?
바울은 매우 당당한 사람이었습니다. 4절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다.” 누가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어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지만 털지 않아도 먼지투성이로 사는 게 우리 모습이잖아요? 정직하게 살면서 자기 책임을 다하고 사는 사람만이 이런 얘기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바울은 무슨 특수한 유전자를 타고났거나 그의 몸에 천사표 피가 흘렀던 것이 아니에요. 그도 역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절규했고, 또 자신을 가리켜 죄인의 괴수(딤전 1:15)라고 하기까지 했어요. 그만큼 그는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케세라 세라 하는 식으로 살아가지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말 못하지요.
그러나 그런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우리의 목적도 아닙니다. 바울의 그 다음 말을 보세요. 그렇다고 해서, 자책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해서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도 자기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자신의 정직하고 자책할 것 없는 삶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면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진짜로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기가 자신을 판단할 권한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이 스스로 평가는 할 수 있겠지요. 바울도 죽음을 앞두고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자신의 일생을 그렇게 평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최종적인 평가와 판단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미래를 위한 평가, 발전을 위한 평가를 해야죠. 올해 잘못한 것이 있다면 내년에 다시 그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평가를 합니다. 판단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런 평가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 또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지요.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주께서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래야 진짜 평가가 되지 않습니까? 최종적인 판단과 평가를 하실 수 있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주님이 일을 맡기셨으니까 평가도 주님이 하시는 것이 마땅하지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는 얘기는 뭔가 하면, 너희들이 멋대로 바울은 어떻고 아볼로는 어떻네 하는 식으로 평가를 해서 그것을 분쟁의 근거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옳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어두움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지도 못합니다.
오늘 이 말씀이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교회의 사역자로 부름받은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인가요? 우리는 목사가 아니더라도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이 아닙니까? 달란트를 받은 것은 목사만 아니지 않아요? 오늘 우리가 교회를 섬기고 또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과 임무들이 있다면 그것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직장에 맨날 지각하고 게으름이나 피우는 사람을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우리가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이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십니다. 또한 그분이 우리에게 각자 해야 할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비판 하나에 울고 칭찬 하나에 웃기보다 주님의 평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도록 하십시다.
충성스러운 일꾼의 잣대
고전 4:1-5 / 황광민목사
지난 화요일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하시는 분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 분은 북한이 건너다 보이는 압록강변에서 선교하는 분입니다. 북한에서 탈출하여 식량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에도 열심히 하고 있고, 북한에 식량을 일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석교교회에서도 작년에 월 15만원씩, 금년에는 월 20만원의 선교비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연말에는 북한에 식량 보내는데 써달라고 200만원을 보냈습니다.
그 분이 이번에 오셔서 간략하게 선교보고를 해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보내준 돈으로 교인들에게서 옥수수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루로 만들어서 옥수수 가루 20톤을 북한으로 보냈습니다. 물론 한국의 교회가 보낸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밝힐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중국의 조선족들이 동포를 위하여 보내는 것으로 한다고 합니다. 이번에 10톤씩 차 두 대에 실어 한 차는 광산지역에, 한 차는 유아원을 위하여 보냈다고 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여 왔습니다.
그곳에는 겨울이 되면 기온이 영하30도 이하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금년 겨울도 몹시 추웠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다가 얼어죽었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 가서 낯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물론 탈북자들을 도와주고 복음도 전해주는 일을 하는 것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크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하나님의 일군들에게 충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군들은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3-5절에는 충성스러운 사람을 위한 잣대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자기 자신 스스로 판단하여 충성 되이 여기고 스스로 만족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충성스러움의 판단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봉독한 말씀을 중심 하여 <충성스러운 사람을 위한 잣대>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일군은 어떤 사람인가?
충성스러운 일군을 위한 잣대에 대하여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의 일군은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절의 말씀을 봉독 하였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입니다.
여기서 일군은 사역자를 가리키기보다는 종이란 뜻에 가깝습니다. 일군은 주인의 소유물처럼 주인이 위임한 일을 할 뿐 입니다. 따라서 일군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군들이 지나치게 높이 평가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일군들이 하찮은 존재로 여겨져서도 안됩니다. 그들이 비록 일군이지만 그리스도의 일군입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위임받은 귀중한 사람들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비밀은 신비종교에서의 비밀교의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비밀들'이라는 복수의 뜻은 복음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구원의 내용에 대한 포괄적인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군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결코 하찮게 여길 대상이 아닙니다. 스스로도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자존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의 일군들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일군들은 과대평가 되어도 안되지만 과소평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둘째, 그리스도 일군의 덕은 충성입니다.
2절의 말씀을 보면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실, 충성입니다. 그리스도 일군들은 자신의 일을 독자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명령에 충성스럽게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일군의 제1덕목은 충성입니다.
충성 忠자를 분석하면 중심(中心)입니다. 즉 중심으로 일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어물어물 넘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사람이 보는데서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없는 데서도 더 잘하는 사람이 충성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집에 있을 때나 떠나 있을 때나 똑같은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주인이 없을 때는 어물어물하고 시간만 때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결과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지혜로운 일군들은 주인이 없을 때 더욱 열심히 일합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또 충성은 끝까지 충성하는 것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형편이 좋을 때만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처지가 되어도, 손해가 되어도 주님을 따르는 것이 충성입니다.
전도의 사람 최권능목사가 만주에서 복음을 전할 때의 일입니다. 송화강 유역에서 발길 닿는 대로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인적이 없는 전인미답의 원시림이 바다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원시림을 헤쳐가며 최권능목사는 몇 백리에 하나씩 있는 마을에 찾아가 예수천당을 외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어느 날 최권능목사는 오랫동안 먹지 못해서 수척해진 몸을 이끌고 전도한 일가를 찾아 숲속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의식이 가물거리며 곧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그가 가까운 냇가에 이르렀을 때 거의 아사지경이었습니다. 그는 냇물을 움켜 마시고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보니 냇가에 싸놓은 소똥 속에 소화되지 않은 콩알이 들어 있었습니다. 최권능목사는 그 콩알을 주워서 물에 잘 씻어서 그대로 먹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셋째, 충성스러운 일군을 위한 잣대
그러면 이제는 충성스러운 일군을 위한 잣대가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3-5절 사이에는 판단의 기준이 3가지가 나타나 있습니다. 즉 다른 사람의 판단, 자신의 판단, 그리고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판단 중에 어느 것이 충성스러운 일군을 위한 잣대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느니…" 바울은 다른 사람에 의해 판단 받는 일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 스스로의 판단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판단만 소중하게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 언젠가는 다 드러나고 말텐데, 그 때 하나님께 칭찬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는 것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을지라도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는 일을 크게 보지 않는다, 즉 개의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일을 하되 칭찬 받기 위하여 일하지 않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의 일군은 사람들의 칭찬이나 받으려고 일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인정받고 칭찬 받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성도여러분! 남을 칭찬하는 일에 인색하지 마십시오. 어떤 분들은 남을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고 싶으면 차라리 낮잠을 주무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칭찬할 면과 비난할 면이 있습니다. 그 두 가지 중에 칭찬할 면을 찾고 칭찬하는 것이 훌륭한 자세입니다.
칭찬은, 인정해 주는 것은 사람의 열의를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키우기 위해서는 칭찬해 주는 것, 격려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슈와브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결코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다. 사람을 일하게 만들려면 장려가 필요하다. 나는 사람을 추켜 올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깎아 내리는 것은 대단히 싫어한다. 마음에 드는 일이 있으면 진심으로 찬성하고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의 방법은 어떠한가? 이와 정반대는 아닌가? 마음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송두리째 공박하고, 마음에 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칭찬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자신을 그러한 사람들의 칭찬에 연연하지 않고 초월하겠다는 것입니다. 누가 칭찬을 하든 안 하든 개의치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일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성스러운 일군의 훌륭한 자세입니다. 누가 칭찬해 주면 좋은 일이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마십시다. 사람들이 원래 칭찬은 인색하니까 그런 것이려니 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일하십시다.
바울은 또한 2절 하반 절과 3절에서 자기 스스로의 판단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 아멘. 자기가 자기를 판단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나를 심판하실 이도 오직 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판단, 자기 분석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자화자찬으로 끝나는 것이 보통입니다. 사람마다 자기는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은 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판단은 자랑으로 끝나고 맙니다. 바울도 이를 인정했습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바울이 온전한 사람이겠습니까? 책망 받을 일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스스로 판단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스스로는 자책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판단하지 말고 공정히 판단하실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성스러운 일군의 잣대입니다.
저민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칭찬은 아름다운 옷이다. 그러나 그 옷은 다른 사람에 의해 입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옷은 그대에게 잘 맞지 않을 것이다. 칭찬은 달콤한 음악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입으로 결코 가락을 맞출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의 입으로부터 나와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귀에 가장 듣기 좋은 소리가 된다. 칭찬은 풍부한 보물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그 액수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그대를 부유하게 만들지 못한다." 자화자찬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칭찬을 위하여 일하시는 충성스러운 일군이 됩시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를 심판하실 이는 오직 주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을 들어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칭찬이 있으리라." 아멘. 하나님이 주시는 칭찬이라야 진정 좋은 칭찬입니다.
물론 성도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자기 자신의 판단에도 옳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성스러운 일군의 잣대를 삼아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잣대는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 그것이 중요합니다. 자칫 다른 사람들의 눈에 인정받으려는 잣대로 살면 체면윤리에 빠질 염려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이나 의식하는 사람이 됩니다. 알아주면 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안 하는 사람이 됩니다. 드러난 일을 하고 숨겨진 일은 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는 훌륭한,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의 일군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자기 자신의 판단을 잣대로 삼으면 의식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런 잣대를 가지고는 충성스러운 일군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의 일군을 위한 잣대는 하나님의 판단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감추일 것이 없습니다. 언젠가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체면으로 한 것도 드러납니다. 외식으로 한 것도 드러납니다. 남의 눈 때문에 마지못해 한 것들 다 드러납니다. 성도는 이것을 잣대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칭찬 받아야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그 칭찬만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칭찬도 순간적입니다. 자신의 자랑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화자찬은 욕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받을 칭찬, 그것만이 성도의 영원한 유산입니다. 그때까지 참고 열심히 충성합시다. 그때까지는 서로 판단도 하지 맙시다. 오직 주의 판단과 칭찬을 잣대로 삼고 열심을 다하여 잘했다고 칭찬 듣는 충성스러운 일군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 4:1-5 / 지태일목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때를 따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고, 또한 여러 가지 은사와 재능, 직분을 주셨는데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자녀로 삼아 주실뿐 아니라 충성되이 여겨 이미 교회의 일꾼들이 되었고, 또한 오늘 새로이 귀한 직분을 받게 되는데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합니까? 오늘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권면하신 말씀을 통해 이미 일꾼된 우리 모두와 오늘 임직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은혜 나누기를 바람니다.
1. 먼저 사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겨야 합니다.(1절)
서양의 사람들은 '나'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나'를 무척 강조하는 데도 서로서로 협력해서 공동체의 삶을 잘 이루어 나가는 반면, 우리 나라는 '우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우리'를 많이 내세우면서도 협동이 잘 되지 아니합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임상실험을 통해 분석한 어느 정신과 의사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우리'의 개념은, 나와 상관이 없는 한 개체를 포함한 '우리'가 아니고 혈연, 지연, 학연 관계로 맺어진 '우리'의 개념이기 때문에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이웃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타적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나'보다 '우리'를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동심이 '나'를 강조하는 서양 사람들보다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도 먼저 '우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라고 했습니다.
먼저 여기서 '우리'는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일반적인 '우리'의 개념이 아닙니다. 혈연, 지연, 학연을 초월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같은 생의 의미와 목적과 소망을 가진 자들로서의 '우리' 개념입니다.
그 다음에 “여길찌어다” 그랬습니다. 여기서 ‘여긴다’는 말은 특수한 말로 ‘그렇게 알라, 그렇게 알아 다오, 그렇게 인정하라’는 명령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지식적으로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인격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라” 그랬습니다. 누구의 일꾼인가 하면, 그리스도의 일군이라 그랬습니다.
특별히 일꾼이라는 말에는 아주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의 ‘휴페레테스’(huperetes)로서 아래서(hupo) + 배젖는다(eretes)의 합성어로 배 밑창에 들어가 노를 젓는 종, 즉 노예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배가 지금처럼 동력 엔진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노를 저어야 움직일 수가 있었습니다. 커다란 배는 노예들이 배 밑에서 두 줄로 앉아서 2단, 3단까지 노를 저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벤허란 영화를 보면 수 십명의 노예들이 양편에서 북소리에 맞춰 노를 젓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북을 빨리 치면 빨리 저어야 하고, 느리게 치면 느리게 저어야 하고, 약하게 치면 약하게 젓고, 강하게 치면 강하게 저어야 합니다.
열심히 노를 젓는 그 사람들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이 배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노를 젖는지 알지 못합니다. 선장만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저어라’하면 젓고,‘멈추라’하면 멈출 뿐입니다. ‘왜 젓는 것입니까?,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물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방향도, 행선지도, 목표도, 목적도, 의미도.... 전부 선장에게 달려 있습니다. 노예는 배 밑에서 노를 저어 순종할 뿐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일군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배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배의 항로를 지시하는 선장이고, 교회의 모든 일꾼들은 이 배의 선장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종입니다. 노젓는 사람이나, 키 잡는 사람이나 다 선장이 아니라 그 배의 일꾼들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노를 젓되 앞에서 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석진 뒤에서 젓는 사람도 있고, 선장처럼 키를 잡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의 신분을 잊지 말고, 종의 자세로 겸손히, 그리고 섬기는 자세로 해야 할 것입니다.
이솝 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새 무리 가운데 유달리 큰 참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깃털도 예쁘고, 소리도 크고, 노래도 잘 불렀습니다.
그 참새는 스스로 너무 잘났다는 생각에 다른 참새들을 무시했습니다. 시시해서 같이 놀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참새들 보다 좀더 큰 메추리한테 가서 같이 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메추리는 ‘웃기지 말라. 너는 메추리가 아니다. 그러니 참새들 한테 가서 놀아라’하고 참새를 쫓아 버렸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돌아와서 다시 참새들 틈에 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참새들 역시 ‘우리를 무시하고 갔던 놈을 어떻게 다시 받아 주겠느냐’하며 그를 쫓아 버렸습니다. 결국 그 참새는 아무 것도 못하고 평생을 고독하게 살다 죽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고독한 사람이 있습니까?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독한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비우고 겸손히 자신을 낮출 때 참 일군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1절 하반절을 보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라 그랬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직분이 누구에게 소속되어 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 함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종속되어 그 분의 시중을 드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무슨 직을 받았던지, 목사직이나, 장로직이나, 권사직이나, 집사직이나, 교사직이나, 성가대직이나, 구역장직이나, 기타 여러 교회의 직분들은 그 직분의 이름이나, 내용이나, 성격이나, 목적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한 것이어야 됩니다. 교회밖에서는 전혀 사용할 수 없고, 사용될 수도 없습니다. 신령한 영의 직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꾼이란 사실입니다.
2. 두 번째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1절)
먼저 여기서 “하나님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에는 감추어 있다가 이제 나타내어진 것, 계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구원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 신앙의 복음, 사죄의 복음, 부활의 복음, 영생의 복음 곧 하나님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실상 비밀의 복음입니다. 그 이유는 주신 자와 받은 자만이 알 수 있는 생명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그 내용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복음이 비밀로 되어 있지 아니합니다. 그 깊은 하나님의 지혜가 모두 알려지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복음의 진리의 오묘한 비밀을 맡은 청지기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 했습니다. 여기서 '맡은 자'란 흔히 청지기로 번역되는 '오이코노모스'로 전적으로 주인의 뜻을 받아 주인의 재산과 사람들을 관리하는 직책, 관리인입니다.
사실 우리는 누가 나를 신임해서 중요한 책임을 맡길 때, 책임감으로 마음은 무겁지만 상당히 뿌듯한 긍지와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 일을 맡아 하면서 조금 벅차고 힘이 들더라도 그 일을 맡긴 이가 나를 인정해 줄 때는 덜 힘이 들고 오히려 힘이 솟아납니다. 다른 일보다 더 열심을 내게 됩니다. 그 일을 나에게 믿고 맡겨졌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임하고 우리에게 비밀을 맡겨 주셨다는데 대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줄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신임하시어 남들이 알지 못하는 천국 비밀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함으로 그 직을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2절)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비밀을 맡은 자들, 즉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충성입니다. 2절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2:10에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충성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것이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2:2에서 디모데에게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충성되지 못한 자들에게는 그 내용이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도 분명히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였습니다.(2절)
여기서 '충성'이란 말의 성경적인 뜻은 '믿음'이란 말과 통합니다. 헬라어로 충성을 '피스토스'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충성스러운', '믿음직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입니다. 영어로 'faithful'이란 말을 씁니다. '신실하다, 성실하다, 신의가 있다. 믿을 만 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들을 볼 때 충성이라는 말은 믿을만한, 충성스러움, 신뢰할만한, 신실한, 꾸준한, 즉 충성스러운 일꾼들은 꾸준해야 합니다.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해야 합니다. 박해에도 실패에도 굴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의 심령은 그리스도께 확고히 이어져 있어서 어떠한 신변의 위험도 그를 그 충성의 길로부터 유혹할 수가 없으며 또한 어떠한 거짓된 가르침의 유혹도 그리스도교 진리의 곧은 길로 부터 그를 벗어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충성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미쁘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미쁘시다는 것은 믿을만 하고, 신뢰할만한 하고, 의지할만 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약속을 지키시기 때문에 믿을만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 21:4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을만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녀된 우리 성도들은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사람에게 아무리 지식이 많고, 아무리 재간이 많고, 돈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하더라도 이 충성, 즉 신실, 믿을만한 요소가 결여되면 그는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쓸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3:1절에 보면 “예수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 같다'고 말하면서 6절에 보면 "그리스도는 그의 집을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슨 일을 맡았던지 맡은 사람의 자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충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신실, 믿을만함, 변함없음, 시종여일함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충성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희생없이 충성없고, 충성없이 희생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2:10 ‘네가 죽도록, 죽기까지 충성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리라 말씀하심니다.
우리 모두 충성스러운 일꾼들로 주님께 인정을 크게 받으시기를 바람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전에 주님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충성할 때 주님은 기뻐하시지만 백성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면박과 비판과 비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맡은 일을 중단한다면 사람 때문에 일하고, 사람 때문에 그만두는 불충한 일꾼이 되고 맙니다.
사실 바울은 대단한 종이요 일꾼이었지만 고린도 교회로부터 별의별 이야기를 다 들은 사람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장점, 은사와 재능도 많았지만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는데 교회에 당파가 있었고(고전1:12), 바울을 비평하는 소리가 많았습니다. 바울에 대해 비평하는 소리는 1) 외모가 단정치 못하다(고후10:17) 2) 사도의 자격증이 없다(고후3:1) 3) 말이 시원치 않다(고후10:10) 4)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고후1:23) 5) 지식이 볼 것 없다(고후11:6) 6) 신비 체험이 없다(고후12:2) 등 별의 별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3절에서 바울은 3절에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충성함에 있어서, 내가 긍지를 가지고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잘한다, 못한다, 겸손하다, 교만하다, 성공했다, 실패했다......무슨 소리를 하든지 내게 다른 사람의 판단은 작은 것이다, 개의치 않는다, 내가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의 긍지가 그것들을 다 포용하고도 남는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었으면 사람의 판단보다도 주님의 판단을 더 크게 여길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갈1:10절에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충성하기를 원한다면 사람들의 판단과 비난을 너무 의식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충성된 종은 사람의 마음에 맞는 종이 아니라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 마음에 맞는 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본문 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오직 주님뿐이심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 되었다고도 하지 말고, 안되었다고도 하지 맙시다. 바울의 고백처럼 다 이루었다함도 아니요 다 얻었다함도 아님니다. 누가 칭찬 좀 한다고 해서 성공한 것처럼 자만하지 말 것이고, 누가 좀 섭섭해 한다고 해서 또한 섭섭한 말을 들었다고 해서 실패한 것처럼 절망하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잘 됐는지, 못됐는지는 그리고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는 그 날에 가서 주님이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 대해서나, 나에 대해서나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마지막 5절에 보면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다만 오늘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충성을 다 할 것입니다.
이 시간 초대 안디옥교회의 교부였던 익나시우스의 기도를 소개하고 마치고자 합니다. “영원한 말씀이신 독생자 예수님, 우리에게 참된 관대함과 고결함을 가르쳐 주옵소서. 상처 입은 일에 구애됨이 없이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휴식을 구하지 않고 일하는 것을 가르쳐 주옵소서. 대가를 구하지 않고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옵소서. 우리의 대가를 구하는 마음이 너무 앞서 있기에 그처럼 피곤에 지쳐 있는 것입니다. 주님, 대가를 구하는 마음이 없이 희생하는 법을 가르쳐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 또한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미 귀한 직분을 받으신 분들, 특별히 오늘 집사님으로, 권사님으로 임직을 받으실 모든 여러분들! 오늘 우리는 사람의 일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꾼인줄 믿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가룩하고 오묘한 비밀을 맡은 자들입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구할 것은 충성뿐입니다.
그저 주님만을 바라보고(오늘 부를 여선교회 찬양처럼) 묵묵히 충성, 봉사하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고귀한 직분과 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고, 사도 바울처럼 높은 긍지를 새롭게 느끼면서, 시간적으로 오늘도 내일도, 처음이나 나중이나, 사역적으로는 적은 일이나 큰 일이나, 환경적으로 괴로우나 즐거우나 평안하거나 슬프나 즐거우나 일이 잘되나 못되나 늘 신실함으로 변함없이 끝까지 충성 다하시기 바람니다.
그래서 훗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마 25:21) 하는 칭찬받는 충성스러운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충성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고전 4:1-5 / 김철현목사
세상에는 약 3만 가지가 넘는 직업이 있다고 합니다. 수많은 직업들을 가지고 각자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 직업에 만족하지는 않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직업>이라는 단어를 영어에서 찾아보면 일반적인 직업을 의미하는 occupation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리고 고학력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전문적인직업을 나타낼 때 profess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본래 이 단어는 세 가지 직업에만 쓰이던 말입니다.<법률가>와<의사>, 그리고<성직자>에게만 사용하던 말입니다. 특별히 이 세 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에서 존경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변호사는 내 인권과 재산을 보호하고 맡아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존경해야 합니다. 의사는 내 건강을 맡아 주고 내 생명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역시 존경해야합니다. 그리고 성직자인 목사는 내 영혼을 맡아 주는 사람입니다. 영혼을 위해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존경해합니다.
원래는 이렇게 세 가지 직업에만 profession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만 지금은 교사나·문필가등 학문적 소양을 필요로 하는 지적 직업에 두루 profession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토록 법률가나 의사, 성직자라는 세 가지의 직업이 다 중요합니다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셋 다 위험한 직업입니다. 언제 위험해지느냐하면 이 셋이 돈을 벌자고 덤비면 문제가 됩니다. 만약에<의사>가 병 고칠 생각보다 돈을 벌자는 생각을 먼저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환자를 볼 때"저 사람은 여기만 잘 고쳐주면 좀 더 오래 질 높은 삶을 살겠구나."이렇게 생각해야 되는데"저 사람을 째면 돈이 얼마 나오겠구나."이 생각부터 한다면 큰일 아닙니까! 어느 의사 부부가 싸움을 했습니다. 부인이 자꾸 돈 달라고 보챕니다. 의사가 돈이 없다고 못 줍니다. 그러니까 부인이 하는 소리가"한 사람만만 째면 되잖아!"하더랍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소리 높여 대답합니다."아, 쨀 사람이 있어야 째지!"사실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판단을 해서 수술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돈을 목적으로 한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무조건"쨉시다."한다면 이거 보통 문제냐 말입니다. 또 <변호사>가 인권을 생각해서 변호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돈독만 올라 있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의뢰인은 어떻게 되든지 나는 수임료만 받아 챙기면 된다는 심정으로 일을 한다면 누가 존경하며 일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목사>가 기업경영인 이상으로 돈에 욕심을 내고 교회를 돈 버는 목적으로 사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의 정체성과 사명의식을 잃어버릴 때 사람은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외는 있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런 위험 속에 노출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정체성을 확실히 알아야겠습니다. 그래야 사명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자기의 정체성과 동시에 우리의 정체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 지어다"바울은 자신의 정체를<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일꾼>이라는 단어에 대해 좀 생각해보겠습니다. 헬라말로는<휘페레타스>라고 하는데 뜻은"배 밑에서 노를 젓는 자"라는 뜻입니다. 당시 배의 구조는 3층 혹은 4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배의 맨 밑바닥에는 여러 개의 노가 있고 한 사람이 하나씩 맡아 노를 저어야만 배가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일꾼이란 바로 이 배의 가장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하급의 노예를 의미합니다. 자기의 의사와는 상관이 없이"저어라"하면 무조건 젓습니다. "멈춰라"하면 멈춰야합니다. 이 배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는 모릅니다. 알 바도 아닙니다. 싸우러 가는지 항복하러 가는지, 죽으러 가는지 살러 가는지, 동으로 가는지 서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왜 저으라고 하느냐?","언제까지 젓느냐?"하고 물을 권리도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신호에 따라서 빨리 젓고 늦게 젓고 할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이 노를 저어서 내게 주어질 보상이 무엇일까?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은 꿈에도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이야기 하는 일꾼의 의미입니다. 내 지식이라는 것은 필요 없습니다. 내 판단이라는 것은 쓰여 질 수가 없습니다. 내 자신의 전부를 다 바쳐버립니다. 생명도, 운명도, 명예도 다 맡겨 버립니다. 이 일꾼의 모습이 가장 잘 나타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셨겠지요. 그 영화에 보면 이 노예들이 노 젓는 장면이 나오는데 딱 그렇습니다. 이것이 노를 젓는 일꾼입니다.
자, 오늘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일꾼 되었다면 마찬가집니다. 교회 일 하는데 있어서"이거 왜 해야 합니까?", "어디로 갑니까?","언제까지 할 겁니까?","꼭 해야 됩니까?"하고 일일이 따지고 들지 말아야 됩니다. 사실 괜히 물으려고 들면 몸도 마음도 시끄러워집니다. 어쨌든 주님과 운명을 같이 하자는 것이라 생각하고 저어라하면 무조건 저으면 됩니다. 정말 궁금해서 못 견디겠어서 생각이 있다면"주님의 뜻이냐, 아니냐.","주님의 말씀이냐, 아니냐."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게 주님의 뜻이다 싶으면 묵묵히 끝까지 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나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답게 일하는 사람의 특징은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교회를 가도 말이 많은 사람은 그 교회에서 제일 일 안 하는 사람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묵묵히 끝까지 감당하며 사는 것을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이것을<충성>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비롯한 우리 모두의 정체성을 이런 의미에서<그리스도의 일꾼>이라 하였고,
또 하나의 정체성을<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밝힙니다. 이 말은 헬라말로<오이코노모스>라고 하는데 한 집안의 사무를 관장하는<집사>혹은<청지기>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일꾼>에게는 자기 의견은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무조건,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묵묵히 끝까지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을<타율적 충성>이라고 합니다.
반면에<집사>혹은<청지기>에게는<자율적 충성>이 있습니다. 그에게 권리도 있고, 능력도 주어지고 상당한 권한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기도 하고, 자기가 일을 만들면서 하기도합니다. 자기 의지대로 자발적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율적 충성입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중요한 것은 주인은 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오직 주인을 위하여 일해야 할 것입니다. 주인을 위해서 권리를 사용해야하고, 주인을 위해서 권한을 누려야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의 뜻을 알아가면서 주인의 뜻을 받들어 충성을 다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는 정체성의 의미는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서 궁극적으로 충성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자, 이제<그리스도의 일꾼>이요,<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한 마디로 말하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여러분, 누구든지 일을 맡는 것은 쉽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되는 것도 쉽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신실과 성실을 다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한 번쯤 충성하기는 쉽지만 일평생 충성하기는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무엇보다도 충성을 구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을 맡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충성의 마음입니다. 헌신의 자세입니다. 변함없는 노력입니다.
사람들이 일을 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참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맡은 일을 입으로 모조리 해치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만 들어보면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당장에 일이 끝날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일을 맡기는 맡아 놓고 마음속으로만 골백번 결심하고 다짐하다가 끝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이 두 사람 다 충성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충성이란 마음과 실행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생각과 다짐만으로 충성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행동하는 결과까지 이루어져야 충성입니다.
<충성>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찾아보면<피스토스>라고 하는데 이와 비슷한 단어가 있습니다. <피스티스>라는 단어입니다. 그 뜻은<믿음>이라는 뜻입니다.<피스토스>라는<충성>이라는 말과<피스티스>라는<믿음>이라는 단어는 같은 데서부터 나온 말입니다. 이 말은 두 단어가 관련이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 의미를 생각해 보면 충성이란 믿음에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주인을 믿고, 또한 주인이 나를 믿을 수 있을 때에 충성이라는 행동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성은 다르게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이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믿을만할 때에 복을 주십니다. 내가 아무리 잘 났다 해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내가 미덥지 못하면 그 무엇도 주실 수가 없습니다. 돈만 주면 망가지는데 어떻게 주시겠습니까? 지식만 주면 교만해 지는데 어떻게 주시겠습니까? 잘살게 만들어 주자니 교회 안 나올 텐데 어떻게 잘살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그래서 달라한다고 무조건 다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을 수 있을 때 주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주어졌다면 하나님께서 내 믿음과 충성을 보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과 충성의 판단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판단과 나 자신의 판단은 언제나 미흡한 것입니다. 믿을 것이 못 됩니다.
바울이 오늘 그것을 알았기에 남의 판단도 자신의 판단도 삼간다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3,4절이 그 말씀입니다. 특히 4절에서 결론을 내립니다."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세상을 살면서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분명히 아름다운 일입니다. 어쩌면 인간적인 판단으로만 본다면 이 이상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설 때는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그것으로 접어두어야 합니다. 자기스스로의 기준으로 보상을 바라거나 결과를 기대하면 그 최선의 의미마저도 희미해져 버리고 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최선을 다한 그 일의 성격마저도 하나님이 분석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대로 그것만이 옳고 거기에 기준을 두고 충성을 다한다고 하는 사도바울의 자세를 배울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면 충성을 생각하며, 충성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을 때 구원에 이른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믿을 만할 때, 우리의 충성을 믿을 수 있을 때 복을 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작은 일에 충성했을 때 큰일을 맡기십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진실하고 온전한 충성을 다할 때 그것으로부터 오는 큰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충성을 이루어 나가는 성령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