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천 여년 전부터 오매는 한약으로 사용되어왔다. 오매는 장미과 낙엽교목(落葉喬木) 매실나무의 미성숙한 녹색 과실(靑梅)을 연기와 불로 훈제하여 만든 것이다. 훈제한 청매의 색깔은 흑갈색(黑褐色)으로 변한다. 그래서 오매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인들은 오매를 매실(梅實) 혹은 훈매(熏梅)라고 불렀다. 일본의 화한약고(和漢藥考)에 보면 오매를 소연구조(巢烟九助)라고 칭했는데 그것은 훈제를 여러 차례하여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梅)는 양자강 이남 땅 사천과 호북(湖北)서부와 서장(西藏)동부 산간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상(商) 나라 때 매를 재배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약 4 천 년 이란 기나긴 재배 역사를 갖고 있다. 매는 주례(周禮)에 료()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아(爾雅)에 보면 남(枏)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설문(說文)에는 매(楳)라고 각 각 기록되어 있다.
춘추전국 시대에 매를 사랑하는 풍조가 성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매화와 매실을 선물로 사용했으며 제사때 예품으로 사용했다. 은상(殷商)나라의 출토문물(出土文物) 중 구리솥과 식기등에 매실을 그려넣은 것이 발견되었으며 죽통(竹筒)에도 매실을 그려넣은 것을 볼수 있다.
또 한나라 때 매화를 궁원(宮苑)에 심어 두었으며 남북조 시대에는 특별히 양주(揚州)와 남경 주위에 매화나무를 많이 심었었다. 수당 시대에는 매화를 심고 매화를 시로 읊는 풍이 유행했었다. 항주(杭州) 시내에 있는 서호(西湖) 속에 있는 가장 큰 섬안에 있는 고산(孤山)의 매화는 당나라 때 가장 명성을 떨쳤다. 송나라 때가 중국 역사상 가장 매화가 창성한 시기였다.
남송 때 시인 범성대(范成大)가 저술한 매보(梅譜)에 보면 매화에는 아홉개 품종이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명청 시대의 매화재배 규모와 재배수준은 아주 높았다. 사료에 의하면 서기 1474 년에 매화는 중국에서 조선으로 전래되었고 그 후 일본으로 전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878 년 구주(歐洲)로 수출되었고 서기 1908 년에 일본에서 미국으로 전래되었다고 한다.
현재 중국내에 230여 종의 다른 품종이 있다. 식용과 관상용으로 크게 대별할 수 있는데 식용매화는 청매와 백매(白梅)와 화매(花梅)가 있고 과실은 식용과 약용이 있다. 시경(詩經)에 보면 "표유매(標有梅), 기실칠혜(其實七兮)"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매화의 나뭇 가지에 그 열매가 일곱개나 달려있네" 라는 뜻으로써 이 시에 나타난 매실은 식용이다.
매화나무의 수명은 길다. 운남성(雲南省) 곤명온천(昆明溫泉) 조계사(曹溪寺)에 있는 원나라 때 심은 매화가 있으며 항주(杭州) 초산(超山)에 송나라 때 심은 800여 년 된 매화나무가 있으며 절강성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에 수(隋)나라 때 심은 1300여 년 된 매화나무가 있다.
호북성 황매산(黃梅山)에 있는 일 년에 두 번 꽃을 피우는 이도매(二度梅)는 진(晉)나라 때 심은 것으로써 1600여 년 된 것이다.
매화의 고향은 중국임으로 매화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은 중국내에 대단히 많이 있다. 광동(廣東) 대경령(大庚岺)의 나부산(羅浮山)과 무창(武昌) 동호(東湖)의 매령(梅岺)과 항주 서호의 고산(孤山)과 초산(超山)과 소주(蘇州)의 등위(鄧尉)와 무석(無錫)의 매원梅園)과 남경동교(南京東郊)의 매화산사(梅花山寺) 등이다.
매화가 한창 만발할 때 매화원 주위를 거닐며 매화를 감상하고 있으면 소흥주(紹興酒)의 바다같이 느껴지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이미 술에 취하여 있는 것 처럼 생각된다고 한다.
매화는 남경(南京)과 무한(武漢)과 소주(蘇州)의 시화(市花)이다. 매화는 서릿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지조가 굳고 고결하며 기백이 당당하고 씩씩하며 고상한 품질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역대 문인들이 매국죽난(梅菊竹蘭)을 사군자(四君子)라 칭했으며 매와 송죽은 "세한삼우(歲寒三友)라 칭했다. 다시 말하면 "송죽과 매는 어떤 역경에도 절개를 굽히지 않고 의지가 굳은 세 친구다." 는 뜻이다.
시인들은 매화에 대한 시를 읊고 화가들은 매화를 그리고 원예가들은 매화나무를 심는 아름다운 풍습이 오늘날 까지 계승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고대로 부터 꽃에 대한 시(詩) 중 매화에 대한 시가 가장 많다. 매화는 "화중기절최고견(花中氣節最高堅)" 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다시 말하면 "매화는 꽃중에서 가장 지조가 굳은 꽃이다" 는 뜻이다.
삼국지에 보면 어느 무더운 여름 날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대행군 할때 물이 없어 갈증을 해소할 길이 없었다. 군사들의 입안은 바싹 바싹 탔다. 군사들이 목이말라 고생하는 것을 보고 조조가 하나의 묘법을 생각해 냈다. 조조는 "조금만 더 행군하면 우리들 앞에 매실이 주렁 주렁 달린 매화나무 숲이 나온다" 고 군사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군장병들은 조조의 말을 듣자마자 시디 신 매화나무 열매를 상상하게 되었다. 군장병들의 입속엔 벌써부터 침이 고이기 시작하여 침을 흘리며 갈증을 면했다. 이것이 바로 "망매지갈(望梅止渴)" 에 대한 고사이다.
아미산지(峨眉山志)에 보면 조조의 망매지갈과 비슷한 고사가 실려 있다. 백운선사(白雲禪師)가 도행(道行) 할때 갈증이 났다. 먹을 물을 구할 수 없었다. 백운선사는 앞산 비탈길을 쳐다보며 그곳에 매화나무가 있을 것이며 매화나무에 시디 신 매실이 주렁 주렁 달려있을 것이라고 상상하였다. 즉시 백운선사의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사실 앞산 비탈길에 도착해보니 매화나무는 한 그루도 보이지 않했으나 백운선사의 갈증은 이미 가신지 오래였다는 고사이다.
신맛은 타액 분비를 자극시켜 준다. 매실의 신맛을 이용하면 조건반사가 일어난다. 여기엔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사실은 오매는 생진지갈(生津止渴) 작용이 있으므로 소갈(消渴)과 번열구건(煩熱口乾)등 증에 오매와 맥동(麥冬)과 석곡(石斛)과 사삼(沙蔘)과 생지(生地)와 옥죽(玉竹)과 천화분(天花粉) 등을 사용하여 치료한다.
북경명의 초수덕(焦樹德)은 당뇨병과 뇨붕증(尿崩症)과 갑상선기능항진(甲狀腺機能亢進 : Thyroidism) 등으로 구갈이 심한 환자에게 육미지황환에 오매와 오미자와 육계를 배합하여 치료한 결과 탁월한 효과가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아울러 염천지절(炎天之節)의 고온혹서(高溫酷暑)속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오매전탕(烏梅煎湯)을 음료로 복용시키면 생진청열 작용과 소서해갈(消暑解渴) 작용이 매우 크다고 보고했다.
오매는 지갈작용이 있으며 개위생진(開胃生津) 작용이 있으므로 한의학에서 위음부족증(胃陰不足症)의 치료에 사용된다. 서양 의학에서는 만성위축성위염(慢性萎縮性胃炎 : Chronic atrophic gastritis)에 해당된다.
천금요방 중에 있는 소식환(消食丸)은 소맥얼(小麥蘖)과 국(麴)과 건강(乾薑)과 오매를 사용한 것이며 송대(宋代) 의가(醫家)의 비위방(脾胃方)에도 오매를 사용했고 청나라 때 엽천사도 산감미(酸甘味)는 위음(胃陰)을 보해 준다고 말했다. 이상의 모든 처방들은 오매의 생진양음(生津養陰)의 공능을 이용한 것 들이다.
중국에 가보면 매실을 군음식으로 한 두개 입속에 넣고 오물 오물하며 시도 때도 없이 서양 사람들이 껌을 씹듯이 씹고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볼수 있다. 왜냐하면 오매를 씹음으로써 입안이 개운해지고 상쾌해지며 식욕을 증진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식료방법은 효과가 매우 크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다식손치(多食損齒)와 다담상골(多啖傷骨)" 이란 고인들의 훈계를 교훈으로 삼아 지켜야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매실과 같이 시디 신 음식을 많이 먹으면 뼈와 이가 상한다" 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