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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을 보였으니
고전 4:6-13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고전 4:6-13 / 내가 지금까지 아볼로와 나를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은 여러분에게 어느 한쪽에 너무 치우치지 말 것을 당부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사들 가운데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치켜 세우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기록되어 있는 말씀만 잘 지키십시오. 7) 여러분이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자만합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 가운데 하나라도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이 모두 하나님께 받은 것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혼자 잘난 듯이 행동합니까? 그리고 마치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이나 달성한 것처럼 행세를 합니까? 8) 여러분은 이미 자기에게 필요한 음식을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멀리 뒤에 제쳐놓고 돈 많은 왕이 되어 왕좌에 파묻혀 있습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때가 이를 때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그 자리에 앉게 될 테니 말입니다. 9) 때때로 나는 이어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도들을 곧 사형당할 죄인같이 여기시고 그들 가운데서도 맨 끝에 끌어내 세상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다고 말입니다. 10) 그리스도가 우리를 어리석은 자로 만들었다고 여러분은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여러분이야 물론 매우 현명하고 지각이 있는 그리스도인이겠지요! 우리는 약하지만 여러분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평판이 좋지만 우리는 조롱거리에 불과합니다. 11) 바로 이 시간에도 우리는 굶주리고 목마르며 몸을 따뜻하게 해 줄 옷조차 없습니다. 우리들은 집도 없이 어디를 가나 냉대만을 받고 12) 먹고 살고자 지치도록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였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에게는 인내로 대하였으며 13) 비방하는 자들에게는 조용히 타일러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바로 이 순간에도 발밑의 먼지나 쓰레기 같은 취급을 당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분열을 하는 두 번째 원인을 고린도 교회의 영적 교만으로 보고 있습니다. 수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인내하며 겸손함으로 섬기는 사도들의 모습과 비교하면서 고린도 교회의 교만을 책망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영적 교만(6-8) 바울은 아볼로와 함께 복음을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도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기록된 말씀의 범위를 넘어서서 서로 대적하거나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라고 합니다(고전 1:19,31; 3:19-20). 여기서 “기록된 말씀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것은 말씀을 떠나 세상 지혜로 판단하지 말며 너희들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분쟁의 사전적 의미는 서로 시끄럽게 다투거나, 패로 갈라져서 다툼으로, 자기를 높이고 상대를 낮추어 서로 비방하며 대적하는 것입니다(고전 3:3).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요 3:27; 약 1:17).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자기도취에 빠져 영적 교만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사도들의 영적 겸손(9-13) 바울은 영적 교만에 빠져있는 고린도 교회와 자신이 복음을 전하다가 겪은 고난과 비천했던 모습을 비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라는 말씀처럼, 바울을 포함하여 여러 사도들을 가장 비참하고 보잘 것 없는 위치까지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오히려 자신을 방해하는 그들을 권면하고 축복하며 사명을 감당해 왔습니다. 사도들과 고린도의 성도들을 대조하며 교훈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하는 미련한 자들이며, 온유하게 복음을 전하며 약한 형제를 도와주는 약함과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처럼 비천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의 성도들은 기독교를 세속적인 지혜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지혜로움이라 표현했고, 강함이며 왕이나 된 것처럼 자만한 존귀로운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들처럼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박해를 받은 즉 참고 비방을 받은 즉 권면하며”(11-13) 사는 것이 주님의 참된 제자입니다(마 5:38-44; 골 1:24).
적용: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신이 비천한데에 처해있다고 합니다. 당신은 복음을 위해 비천한 상황에 놓여본 적이 있습니까?
신앙생활의 고삐가 느슨해져 이전의 열정과 활력이 줄어들기 시작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령의 죽음이 찾아들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심령이 죽은 다음에 다시 되살리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게으르고 둔감해지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합니다. 한시라도 기도와 말씀을 멀리하면 심령의 메마름이 어느새 내 마음을 지배하며 낙심과 불안을 불러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라고 하신 뜻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 설 교 >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고전 4:6-13 / 박덕기목사(송정중앙교회)
사도 바울은 고전 4:1절에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오늘날의 목회자 경시 풍조를 본받지 말고, 주님의 종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존귀하게 여기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의 종들은 말씀에 충성하고, 모든 직분 자들은 맡은 직분에 충성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인의 삶에 충성해야 하는데, 곧 성수주일, 기도 생활, 봉헌 생활, 전도 생활에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 성별, 은사, 학식은 제각기 다를지라도, 모두 다 충성할 수는 있고, 우리가 모두 위대한 사람은 못되어도, 충성스런 사람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본문 6-13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을 책망하며,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어떻게 충성했는가를 말합니다. 6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 외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교만한 마음을 먹지 않도록, 자기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다고 했는데, 이는 사도 바울이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고 하면서, 자신과 아볼로를 실례로 들어 교훈한 것을 말합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놀라우리만큼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경고하고 혹은 책망할 때, 자신을 포함해서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메튜헨리는 말하기를, 참다운 목회자는 너희들이란 말을 함부로 쓰지 않고, 언제나 우리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는 참다운 목회자의 겸손을 가르쳐 주는 말입니다. 목회자가 자신은 청중과 구별되어 거룩하고 완전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너무도 큰 착각일 것입니다. 목회자가 그 전하는 메시지에 자신을 포함시키지 않고, 그저 “여러분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당신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라고 하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포함시키지 않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도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 중에 있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러한 기도를 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목회자들은 자신의 설교에서 바로 자신을 책망하고 경계하고, 말씀에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위에 설 때, 말씀을 전파할 때, 두렵고 떨림이 없이 성도들에게 설교를 계속한다면, 멀지 않아 직업 설교가로 전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도 시절 총신대학 김희보 학장님이 강의 시간에 하셨던 말씀 중에, 지금까지 잊혀 지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은 속일 수 없고, 속아 주지 않는다.”라는 말씀과 “주의 종으로서의 실력을 갖추지 않고 목장에 뛰어드는 것은, 마치 황소가 옹기점에 들어간 것과 같다. 그래서 열심히 하면 할수록 틀린다. 옹기점에 들어간 황소가 움직일 때마다 옹기가 박살나듯이,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 어지럽히게 된다.”는 말씀이었는데, 저는 이 말씀을 지금까지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다음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말씀은 구약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는, 신약 정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인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당파를 만들어 사람을 자랑하고 있으니, 이는 구약 성경의 대강령을 넘어선 것이므로, 다시 성경으로 돌아서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말씀은, 신학적으로 개혁주의 보수 정통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통신학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신학적으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학적으로 ‘좌’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래 전 해외 토픽에 실린 글입니다 “예수는 신이 아니다.”는 기사인데, 영국 성서 공회 성직자중 절반 이상이 예수가 반드시 신이었다고 믿을 의무가 없다는 것입니다. 31명 중 11명만이 예수가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심을 믿고, 나머지는 모두 예수님을 신의 최고 대리인으로 보면 족하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상이 자유주의 신학의 한 단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을 철저히 배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경계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기도원적인 신비주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우’로 치우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단체의 예언집이라는 것을 보았는데, 하나님께서 몇 월 몇 일 누구누구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70년대에 마치 우후죽순처럼 전국에 걸쳐 많은 기도원이 세워졌습니다. 모든 기도원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기도원 가운데는 잘못된 곳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집회나 기도하러 갈 때도 소문만 듣고, 포스터만 보고 함부로 찾아갈 것이 아니라, 교역자와 의논하고 자문과 지도를 구하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지혜이며, 또한 성도의 예의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어떤 성도들은 그렇게 가지 말라고 하는 이단 집회에 가서 미혹에 빠지는데, 참으로 어리석고 불행한 인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7절에 “누가 너희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 했습니다. 이 짧은 문장에서 어거스틴은 ‘은총의 교리’ 전부를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한 때 어거스틴은 인간의 선행을 중심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고, 그래서 인간 의지의 자유를 가치로 하고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드디어 하나님의 은총이 승리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클레이는 말하기를 “인간은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교만하여 자랑하려고 하는 입술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는 말씀으로 자물쇠를 채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조금이라도 가진 것이 있다면,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8절에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부요하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사도 바울의 서신중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풍자적이라 불리는 부분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심령의 가난한 자리를 떠나, 진리에 배부르며, 마음은 부요하여 남을 지배하려 드는 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듯, 왕 노릇 하며 영적 교만을 떨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부활하여, 최후적으로 완성된 구원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 때에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된 왕 노릇을 하게 되는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영적으로 교만하여, 세상에서 왕 노릇 하려 들지 말고, 모든 일을 겸손히 행하였다가, 저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세세무궁토록 왕 노릇 할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9절에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신날하게 풍자하면서, 매우 생생한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로마의 장군이 큰 승리를 거두었을 때, 그에게는 모든 전리품을 거느린 개선군을 가두 행진시킬 수 있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의 승리와 공적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 행진을 개선식이라 했습니다. 그 개선행진의 맨 끄트머리에는, 잠시 후에 죽음에 던져질 한 떼의 포로들이 끌려가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들은 개선 행진이 끝나면 원형극장에 끌려가서, 맹수들과 싸우다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 교인들이 왕이나 된 것처럼 교만하고 자만하는 동안,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은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된 개선 행렬의 끄트머리에 끌려가는 미천한 사형수에 비한 것입니다.
10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삼중적인 대조를 보게 됩니다. 1)“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라는 말씀인데,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도만 전하고, 또 자기를 희생하여 예수 그리스도만 위하는 것을, 사람들은 미련하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를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이해시키며, 교회의 모든 것을 인간의 지혜와 수단으로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인들이 지혜롭고 라는 의미입니다. 2)“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라는 말씀인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약하여졌습니다. 혹시라도 주의 영광이 가려질까 보아서 싸울 것도 못 싸우고, 할 말도 다 못하고, 능욕과 멸시와 수욕을 당하면서 참고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와 진리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지 않고, 당파를 만들어 싸울 것을 다 싸우고,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것을 거침없이 하였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인들이 강하고 라는 의미입니다. 3)“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는 말씀인데, 앞에서 말씀한 대로 사도 바울은 개선행렬의 맨 마지막에 끌려가는 노예들처럼,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으로 던져진 사형수들처럼,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으나, 고린도 교인들은 존귀하여, 남을 판단하고 자기를 자랑하며 왕 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11-13절에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나는 사도 바울의 이러한 간증을 대할 때마다, 참으로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오늘날도 주님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종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저를 포함한 대다수 주의 종들이, 오히려 주님 때문에 대접을 받고, 주님 때문에 높아지고, 덕을 보며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 얼마나 죄송한 마음인지 모르겠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의 예수 칼럼에 ‘한국 목사론’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신라 시대의 불교 승려는, 사회 모든 계층에서 높은 인격적 존경을 받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중 밑에 상말이 붙기 시작했다. 물론 사이비 승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의 이미지는 어떨까? 나부터도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본 것이 없다. 학벌이 좋거나 아이큐가 높은 것도 아니고, 문벌 좋고 잘 생긴 것도 없다. 한국 목사는 대우가 좋다. 사실 이상으로 박식한 척하고, 애국심이나 공의나 희생은, 마치 전매특허나 맡은 것처럼 생각하는 분도 있다. 좀 더 겸손해야겠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를 마음속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일정한 한계와 선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우주 속의 삼라만상 모두에게 해당되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실 때 무질서하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질서와 한계를 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이러한 경계와 선을 넘으면, 그 자체가 말할 수 없는 재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바다가 일정한 한계를 넘어 육지로 침범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거대한 자연 재해가 일어날 것입니다. 또 태양이나 지구와 같이 일정한 궤도를 도는 행성들이, 이를 이탈하여 마음대로 움직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결과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두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남녀는 각기 구분된 한계와 선을 지켜야 하고, 운전자는 일정한 차선을 지켜야 하며, 사회생활을 하려면 그 사회가 정한 윤리와 도덕법이라는 일정한 틀을 준수해야 합니다. 만일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차선을 마음대로 위반하고, 가정의 울타리와 한계를 지닌 사람이 이를 벗어나 마음대로 행동하며,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법이나 도덕의 테두리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아간다면, 그 자체가 범죄일 뿐만 아니라, 본인은 물론 이웃에게도 대단히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영적인 일도 결코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즉 영적으로 거듭나 신령한 모습으로 성숙해간다는 것이란, 실상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울타리를 따라,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올바로 분별해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운전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자가 실력을 뽐내며, 마음대로 차선을 위반하고 다니는 것처럼, 교회에서도 대부분 헛된 계시와 은혜를 받은 자들이, 말씀 밖으로 나가 마음대로 행동하며, 성경에도 없는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신천지를 비롯한 모든 이단들이 이와 같습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운전을 잘하는 자는, 언제나 차선을 안전하게 준수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것 이외에는 말씀하지 않는다 하셨고, 성령께서도 자의대로 말씀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진리를 바로 깨닫고 성숙한 성도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거룩한 경계, 곧 기록된 말씀 밖으로 결코 넘어가지 않습니다.
2)“누가 너희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문벌이나 지혜 면에서 볼 때, 비천하기 짝이 없는 고린도 교인들을 거룩한 성도로 구별하여, 모든 은사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너희들은 어찌 그것이 스스로 얻은 것인 양 자랑하며, 다투고 싸우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됩니다. 우리들이 가진 것들 가운데 구원의 은혜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것들 중에서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시 89:11절에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고 했으며, 시 74:16-17절에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고 하였고, 시 65:8-10절에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고 했으며, 시 50:10-11절에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고 했고, 학 2:8절에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햇빛과 비와 공기도, 모두 하나님께서 무상으로 내려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생명과 건강, 가정과 자녀, 지혜와 재능, 시간과 물질, 어느 것 한 가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며 교만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한 신학교 교수님이 신학생들에게 이러한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아들이 집안 청소를 말끔히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무시는 침대 위에 “하루 노동의 대가로 수고비를 청구합니다.”라는 쪽지를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음 날 아들의 침대에는 이러한 쪽지가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네가 지금까지 잠잔 숙박비 공짜, 식사비 공짜, 옷과 학용품 공짜, 네가 아팠을 때 들었던 치료비도 공짜, 등록금도 은행에서 대출받아 준 것이지만 원금과 이자는 우리가 지불하는 것이니 공짜, 앞으로 있을 결혼 비용도 공짜...” 후에 이 쪽지를 본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부모님의 침대머리에 와서 용서를 구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은혜로 거저 주셨습니다. 그리고도 모자라 아들을 보내사 대속의 십자가 까지 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의 모든 것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은사와 축복들까지도 결코 자신의 것이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것들을 드릴 때에도, 결코 교만한 마음이나 생색을 내려는 마음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돌려드릴 뿐이라는 겸손한 마음과, 투철한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버지 같은 선생님
고전 4:6-21, 벧전 2:9-10 / 이종윤목사
오늘은 스승의 주일이다. `너희는 랍비(선생)라 칭함을 받지 말라`(마23:8-10)는 충격적인 말씀을 주님은 하셨다. 남을 책망하고 칭찬 받는 선생 되기를 좋아한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교사나 목사가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어떤 이는 사도로, 선지자로, 복음 전하는 자 ,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다.(엡4:11)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수고한 스승이 누구일까? 올바른 존경받는 스승은 어떤 사람인가? 교사 자격증이나 학위증서 소지자일까? 우리나라에 소위 선생님이라는 분들이 노동조합 같은 것을 만들고 대한민국을 조직적으로 파괴하고 있다.(태어나선 안될 나라, 북침 6.25, 이데오르기 교육)
I. 제사장, 선지자, 왕 같은 스승이어야
1.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은 말씀이 희귀하여(삼상3:1) 행실이 나빴다(삼상2:12)
말씀 없는 제사장은 자식도 백성도 죽인다.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대도 하는 제사장처럼 눈물을 흘리는 스승이 존경, 사랑을 받는다. 2.`너희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2:9)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b)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로 부르신 이유는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케 하기 위함이다.
선전한다는 말은 전도한다는 뜻도 있으나 찬양한다는 의미다. 사43:21의 인용문이다.
`낱낱이 이야기하다`, `말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능하신 일을 낱낱이 열거함으로 찬양한다. 하나님이 하신 일 즉, 구원사역을 낱낱이 선포하듯 선지자 스승은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케 한다. 3.성도들이 왕중왕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한다(롬5:17,8:32) 제자를 영육간에 보호하고 다스리는 왕 같은 스승이 필요하다.
왕은 백성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다르다. 고양이는 쥐를 좋아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학생을 밥통으로 아는 이는 학생을 좋아하지만 사랑치 않는다. 백성을 사랑하는 왕처럼 희생과 본을 보이는 스승이 필요하다.
II. 사도와 같이 겸손하고 권위 있는 스승이어야
사도는 그리스도의 목격자요 증인으로 보내심을 받은 이들이다.
1. 사도는 성령을 받고 권능의 사람이 되었다 말과 행위에 권위가 있었다. 권위주의와 권위는 다르다. 사도의 입에서 축복이 나올 때 성전 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가 일어나 뛰며 찬미했다. 사도의 입에서 저주가 나올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즉사했다. 이들의 권위는 세상권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권위, 말씀 권위, 섬기는 권위였다.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 되는 비천한 자리에 떨어짐으로 영적 권위가 더했다.(고전4:9f) 남을 지혜롭게 하기 위해 자기는 어리석게 되고, 남을 강하게 하기 위해 자기는 약하고, 남을 존귀케 하기 위해 자기는 비천해졌다. 2. 사도는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정처가 없고 수고하고 모욕, 박해, 비방을 당하면서 그러나 축복하고 참고 권면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4:11-13) 이것이 사도의 권위다. (방탄차를 타고 높은 곳에서 손을 흔드는 교황의 권위?는 사도의 권위가 아니다. 사도들은 자기를 부인함으로 권위가 있었다. 3. 사도는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므로 권위가 있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겸손과 말씀에 순종함으로 보내심을 받은 사도적 권위를 가졌다. 4. 사도는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지 않았다 남이 나를 칭찬했다면 그가 나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오실 때 참된 판단이 있다. 고로 겸손히 그 판단을 바라보고 동시에 사도적 권위는 있어야 한다.
III. 아버지 같은 스승이 되라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다`고 한다.(고전4:15) 그러므로 자기는 영적 아버지라 한다. 일만 스승(παιζαϒωϒοὺς)은 παιζίον(child) + ἄϒω(lead)의 합성어다. 아이를 인도하는 자다. 소년을 학교에 데려다 주는 노예를 말한다. 노예는 기쁨을 갖고 의지적으로 일하지 않는다. 억지로 의무 이상은 없다. 이런 스승은 많다. 그러나 복음으로 낳은 아버지 같은 스승은 많지 않다.(15절) 아버지 같은 스승은 누구인가?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 할 수 있는 자(16절) 예수 믿고 성품이 그리스도처럼 바뀐 이를 크리스챤이라 한다. 개성을 바꾸라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닮으려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빌3:8)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음 받은 자신을 본 받으라 한다. 아버지 선생님은 본을 보여야 한다. (TOEFL 시험 치러 주일에 가면서 나를 본 받으라 할 수 있나?) 2. 아버지 같은 선생님은 사도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한다(17절) 바울은 자기를 오해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을 위하여 디모데를 보내어 해명한다. 아버지 같은 스승은 자기를 본 받으라 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산다. 성품만 그리스도처럼 바뀐 것 아니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전파되기 위해 항상 산다. 3. 아버지 같은 선생님은 성령의 능력이 있다(20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20절)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성품이 변하고 말씀을 갖고 능력을 행한다. 無에서 有를 만드신 창조능력보다 더 큰 능력으로 죄인을 의인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불러주신 영적 아버지다. 회개치 않으면 매를 때려서라고 회개케 하시고 회개하면 사랑과 온유로 대하신다.
맺는 말
1. 하나님의 능력을 본 받은 아버지 같은 스승은 가정과 사회의 제사장으로서 가족과 민족의 죄를 짊어지시고 눈물을 흘리며 항상 기도한다.
2.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로서 백성을 보호하고 다스리는 왕으로서 그리소 신약에서 백성에게 복을 빌어주는 사도의 사명까지 감당한다.
3. 우리 성도들은 사도적 스승, 아버지 같은 스승되어 하나님이 맡겨주신 생명을 하나님 뜻에 맞게 키우자.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고전 4:6-13 / 지용수목사
오래전, 경부고속도로 천안 구간에서 큰 사고가 있었습니다. 술에 만취한 운전 기사가 트레일러를 몰고 중앙 분리대를 뚫고 넘어와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고속버스를 들이받았습니다. 그래서 열 다섯 명이 세상을 떠나고 열 여덟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 트레일러 운전 기사 분이 맑은 정신으로 자기 길을 잘 달려갔으면 자기도 무사하고 고속버스의 승객들도 모두 무사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자기 길의 한계를 벗어나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사람이 자기 길을 올곧게 가는 것이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남편이 남편의 도리를 잘 감당하면, 남편의 가야 할 길을 올곧게 가면 그 부모가 흐뭇하고 그 아내가 살맛나고 그 아이들도 건전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남편이 마약이나 하고 도박이나 하고 밤새껏 술이나 마시고 새벽에 집으로 들어오면 그 집안 사람 모두가 지옥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 주부가 주부의 길을 잘 가면 집안이 편안하고 아이들도 신바람 나게, 기쁘게 공부하여 3대가 복을 누립니다. 하지만 가정 주부가 주부의 한계를 넘어 댄스홀에 가서 아무하고 춤이나 추고 다니면 시부모가 가슴을 치고 친정 부모가 땅을 치고 남편이 초라하게 되고 아이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길을 바로 가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학생이 학생의 길을 잘 가면 부모도 기쁘고 사회도 밝습니다. 그러나 학생이 학생의 길을 가지 않고 한계를 벗어나면 학교의 걱정거리, 집안의 걱정거리, 사회의 그늘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땅히 가야 할 곳에 가지 않으면, 가서는 안 될 곳에 가게 됩니다. 학생이 아침에 가방을 들고 학교로 가지 않으면 학생이 가서는 안 될 곳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한계를 벗어나면 안 됩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카락 특히 여자의 머리카락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머리카락도 머리에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만일 머리카락이 볼에도 다섯 개쯤 붙어 있고 입술에도 열 개쯤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20cm 되는 머리카락이 입술에서 철렁이면 그 여자의 꼴이 뭐가 되겠습니까?
제가 서울의 한 교회에서 집회할 때의 일입니다. 새벽 집회 때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껍 뚜껑을 여니 컵에 20cm 가량의 머리카락이 척 걸려 있습니다. 머리카락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머리카락이 자기 한계를 벗어나 물 컵에 척 걸쳐 있으니…. 제가 그 물을 어떻게 마시겠습니까? 제가 그 머리카락을 들고서는 “여러분, 이것을 좀 보십시오.”라고 했다면 그 물을 준비한 권사님이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제가 그것을 조용히 처리하고는 물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머리카락이 아름답지만, 한계를 벗어나면 추합니다.
아내도 아내의 자리를 벗어나면 추하고, 남편도 남편의 한계를 벗어나면 추합니다. 자동차도 자기의 길을 벗어나면 낭패를 당합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도 항로를 벗어나면 불행을 당합니다. 우리 여객기가 항로를 벗어나 러시아 쪽으로 가다가 불행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출렁이는 바다에도 경계선이 있습니다. 배는 해로를 따라가야 하고, 경계선을 지켜야 합니다. 해로를 벗어나면 암초에 부딪쳐 침몰하게 됩니다.
전에 북한의 잠수함이 공작 요원을 태우고 우리 남한을 침투했다가 길을 잘못 들어 꽁치 그물에 걸려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제 길로 가지 않으면 망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교회에서 자기 위치와 분수를 지켜야 합니다. 특별히 말씀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비행기는 항로를, 배는 해로를, 기차는 레일을 따라가야 되듯이, 우리는 기록된 말씀의 한계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나 자신도 무사하고 복을 받으며, 다른 사람들도 나 때문에 피해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말씀의 한계를 벗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볼 때 걱정이 되었습니다. 말씀의 한계를 벗어나면 사고를 당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볼로와 함께 너희에게 본을 보이지 않았느냐? 기록된 말씀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가 한계를 벗어나 말씀 밖으로 나가서 서로 당을 지어 대적하며 자랑하고 교만을 떠느냐?” 라고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말씀의 한계는 은혜를 받을수록, 축복을 받을수록 더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은사를 받을수록, 은혜를 받을수록, 복을 받을수록 더 교만해졌습니다. 그리고 아볼로 파, 베드로 파, 바울 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소그룹도 많았습니다. 패거리를 만들어서 서로 자기 파, 자기 패거리 사람들을 자랑하고, 자기 지도자가 더 훌륭하다고 자랑하고, 자기들이 더 강하다고 자랑하면서 상대방을 낮추었습니다.
그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집입니다.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고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하는 곳이 교회인데, 서로 자기 파들이 잘나고 강하다고 하니,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마귀 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너희가 왜 기록된 말씀의 한계를 벗어나느냐?”하고 강하게 질책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연한이 깊어질수록,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축복을 많이 받을수록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고린도 교회에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여러분과 저, 이 지구촌에 있는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받아야 할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은 점점 겸손해져야 합니다. 처음 등록했을 때보다, 초신자 때보다 집사님이 되면 더 겸손하고, 안수 집사님이 되고 권사님이 되고 장로님이 되면 평신도 때보다 더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잘못되면 평신도 때는 90도로 머리 숙여 인사하다가, 집사님이 되면 60도로 숙여 인사하다가, 안수 집사님이나 권사님이 되면 10도만 까딱하다가 장로님이 되면 인사할 때 뒤로 넘어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뒤로 넘어가면 자빠져 망하게 됩니다.
갈수록 좋아지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망하는 사람, 패망하는 사람은 점점 교만해지는 사람입니다.
아기들은 부드럽습니다. 살도 뼈도 부드럽습니다. 노인들은 뻣뻣합니다. 그러니 곧 죽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왜 파멸의 길로 가는지, 왜 난 체하고 우쭐대다가 망하는지, 안타깝습니다.
우리 양곡의 성도들은 모두 겸손의 챔피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 중에, 구약에 기록된 말씀이나 신약에 기록된 말씀 중에 “교만한 자는 복이 있나니, 거만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오만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잘 난 체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한 곳에도 없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또 겸손한 자에게 은혜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 성경 여러 곳에 있습니다.
구약에 기록된 말씀이나 신약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온유하고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고 세워 주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할렐루야!
우리는 누구를 만나도 겸손해야 하는데, 겸손한 사람의 자세가 무엇입니까?
누구를 만나도 상대방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보다 낫지 않다고 생각되어도, 상대방이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어도 상대방을 높여 주는 것이 겸손입니다.
제가 이번에 묵었던 호텔의 식당은 얼마나 게으른지, 아침 9시에 문을 열어서 아침 식사를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공하는 호텔의 식당은 아침 6시에 문을 엽니다. 그리고 로비에서든 엘리베이터에서든 손님을 만나면 직원들이 정중하게 인사합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도 손님이 먼저 내린 후에 직원들이 내립니다.
그런데 이번에 묵었던 호텔의 직원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내릴 때도 자기들이 먼저 타고 먼저 내렸습니다. 방을 청소하는 아주머니들도 손님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안 되는 식당도 이유가 있고, 안 되는 호텔도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호텔 직원들이 인사를 하지 않았지만 제가 먼저 인사했습니다. 복도에서 만나도 본 체 만 체하는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도 제가 먼저 인사를 했습니다. 제가 묵는 방을 청소하는 아주머니는 제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해도 “예.”라고만 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만날 때마다 인사를 했습니다. 그때 아주머니도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해 주면 제가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그 방에서 나올 때 편지를 썼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자매님과 자매님 가정에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양곡교회 목사 지용수’
이렇게 쓴 편지와 만 원짜리 지폐를 베개 밑에 두고 나왔습니다.
아주머니를 높이는 것이 저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한계를 따라 사는 자의 길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 보고 계십니다.
내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내가 하나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두꺼운 우산을 써도 하나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디서나 겸손하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예뻐하시고 세워 주시고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제일 겸손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민수기 12장 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 시대 겸손의 챔피언은 모세였습니다.
그 모세를 하나님께서 구약의 대표 지도자로 높이 세워 주셨습니다.
바울은 신약 시대 겸손의 최고 대표자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 『죄인 중에 나는 괴수니라』,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는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학자입니다. 당시 최고 지성인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를 신약의 대표 지도자로 세우신 줄로 믿습니다.
가장 깊은 바다에 가장 많은 물이 출렁입니다. 얕은 바다에는 물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겸손할수록 더 많은 축복과 은혜가 출렁이게 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도 바울이 없어도, 아볼로가 없어도 자기들끼리 하나님을 잘 믿을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들에게 사도 바울이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그들을 풍자적하여 비꼰 말입니다. ‘너희가 영적으로 배부르고 은사가 넘쳐 우리 없이도 너희가 왕 노릇을 하는구나. 그래, 잘 해 봐라.’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왕 노릇 하는 것은 왕 같은 제사장인 우리의 마음, 우리의 긍지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에서는 겸손이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왕 노릇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후 천국에서 하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 왕의 왕이시지만 다른 사람을 높이십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끌려온 여자에게 침을 뱉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여러분의 남편이, 여러분의 이웃이 실수해도 “더러운 사람!”하고 침 뱉으면 안 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침 뱉지 않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수한 사람에게 침을 뱉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에게 침을 뱉지 않습니다. 아내가 실수해도, 남편이 실수해도, 이웃이 실수해도 용서하고 새 출발하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야 자기도 용서받습니다. 내 아내, 내 남편, 내 이웃을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것은 조건입니다. 내가 내 아내, 내 남편, 내 이웃의 허물을 용서할 때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의 용서 없이 살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용서 없이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사람에게도 침 뱉으면 안 됩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의인입니까?
예수님께서도 돌을 들지 않으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자에게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범죄치 말라.”
말씀의 한계는 남편이, 아내가, 이웃이 아무리 못할 일을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침 뱉지 않고, 그를 존중하며 새롭게 나아가도록 도와 주고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 저런 인간이 다 있나?”라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도 귀히 여기십니다.
모든 사람을 겸손히 대하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와 축복을 많이 받아서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든든하게 되었습니다.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셔서 받은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들이 지혜롭고 잘나서 누리는 줄로 알고 감사를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여러분, 자식이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부모는 답답합니다. 제자가 선생님께 감사할 줄 모르면 선생님은 가슴을 치게 됩니다.
한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운동장에 떨어져 있는 휴지를 보고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이것 좀 주워라.”
“교장 선생님이 주우세요. 왜 우리보고 주우라고 하세요?”
교장 선생님이 가슴을 쳤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감사가 없으면 가슴 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에 주실 것을 다 주셨는데, 영육간에 은사를 다 주셨는데, 방탕한 사람들을 구원하여 보배 피로 씻어 주시고 성령을 주시고 방언을 주시고 예언의 능을 주시고 영적으로 부유하게 해 주시고, 또 세상의 것도 다 채워 주시고, 이제 것과 미래 것까지 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받아 놓고도 받은 줄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받지 않은 것처럼 뻔뻔스럽게 살았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너희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기에 받지 않은 것처럼 하느냐? 왜 감사가 없느냐?”라고 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구약에나 신약에나 ‘감사하라’는 말씀이 하늘의 별처럼 가득합니다.
특별히 시편 136편 1절에서 2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주 위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말씀이 26절까지 매 절마다 계속됩니다. 할렐루야!
우리 성도의 한계는 잘 되어도 감사하고 안 되어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잘 되어도 감사하고 안 되어도 감사하는 것이 성도의 한계입니다.
잘 되어도 감사하고 안 되어도 감사하고 순종하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이번 대전 집회 때 저는 참 행복했습니다.
행복하게 목회하는 그 교회 목사님이 입만 여시면 교인들을 자랑하셨습니다. 교인들이 이렇게 귀하고, 귀하고, 귀하고…하시는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니 그 교회에 보배가 꽉 차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한번은 식사를 하시다가 목사님이 예쁘장한 한 여자분을 가리키며 “목사님, 저 권사님은 정말 보배입니다….”라며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17년을 하루같이 꽃꽂이를 한답니다. 그리고 매주 한 번은 장애인 복지 센터에 가서 장애인들을 목욕시켜 준답니다. 자기 아들딸을 씻겨 주기도 어려운데, 한 주도 빠짐없이 장애인들을 씻겨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교회 구역장으로서도 귀하게 충성하고 있답니다. 남편이 모 회사 중역으로 귀한 가정의 주부인 권사님이 겸손하게 충성하니 그 모습이 빛이 났습니다.
수요일에 점심 식사를 할 때도 목사님이 식사 대접하시는 분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오래 전 그 교회를 지을 무렵 그 가정이 너무 가난하여 셋방에서 살았답니다. 1톤 트럭에 고구마, 감자, 무, 배추 등을 싣고 이 동네 저 동네에 다니면서 “무 왔습니다! 고구마 왔습니다! 감자 왔습니다!”하며 팔았답니다.
그때도 부인은 믿음이 좋았는데 남편은 교회에 다니지 않았고 술꾼이었답니다.
그런데 부흥회가 있는 날, 아내가 남편을 억지로 교회에 모시고 나왔답니다. 교회 건축을 앞두고 있을 때였는데 강사 목사님이 “교회 건축을 위해 헌금을 하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헌금하는 것은 손해가 아니라 복을 받는 길입니다.”라는 설교를 하신 후에 그 자리에서 작정 헌금을 하게 하셨답니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이 다 작정을 했지만, 그 권사님은 남편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술꾼이니 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날 밤 남편 몰래 목사님을 찾아와서 얼마의 헌금을 드리더랍니다.
그런데 다음 주일에 헌금함에서 천만 원의 작정 헌금이 나왔답니다. 그 권사님의 남편이 작정한 것이었답니다. 당시 천만 원은 엄청난 돈이었고, 더구나 그 가정의 그 돈은 부자의 2억, 3억 원보다 훨씬 더 큰돈이었답니다.
목사님은 그분이 술기분으로 작정을 한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 가정에 심방을 가셨답니다.
“아니, 어떻게 천만 원이나 작정하셨습니까?”
“강사 목사님이 교회에 헌금하면 잘 된다고 해서 했습니다.”
“아, 그러세요?”
“목사님, 너무 걱정 마세요. 우리가 사과 밭의 열매를 샀는데, 그것이 잘 되면 천만 원은 될 것입니다. 그러면 헌금하면 되지요. 내년에 잘 되면 집을 사고요.”
그러더니, 사과도 따기 전에 빚을 내어서 천만 원을 헌금하더랍니다. 목사님은 ‘이것 큰일났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사과가 잘못되면 새 신자를 잃게 되고, 그 권사님은 또 얼마나 골탕을 먹겠습니까? 목사님은 부담이 되어서 날마다 사과 밭의 사과가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태풍이 불어서 사과가 다 떨어지고 말았답니다.
목사님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답니다. 심방 대원들을 데리고 그 가정에 심방을 갔더니 태풍에 떨어진 사과를 박스에 넣어서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더랍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눈물이 막 흐르더랍니다. 목사님도 울고 심방대원들도 울었답니다. 복을 받으려고 빚을 내어 헌금을 드렸는데 복은커녕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런 일을 하셨나요? 하나님, 이 집은 어떡하라고….”하며 울고 있는데, 술꾼 아저씨가 “목사님, 울지 마세요 금년만 해입니까? 내년에 잘 되면 되지요.”라고 하더랍니다. 목사님이 그 말에 감동을 받았답니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른가 봅니다.
그 다음 해에는 사과가 정말 잘 되었답니다. 그 다음 해에도 잘 되었답니다. 또 다음 해에도 잘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 가정이 집도 사고 부유하게 되었답니다.
해마다 그 가정에서 여름 성경학교나 수련회 때 수박을 한 트럭씩 사 주어서 교사들과 학생들이 배를 두드리며 먹고도 남는답니다.
상황을 보면 불평할 일밖에 없지만 감사하는 그 가정에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복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답답한 일이 생겨도 감사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일이 안 되어도, 속이 상해도 감사하면 마귀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여러분 가정에 다툼이 있습니까? 마귀가 들어온 것입니다.
남편이 밉습니까? 마귀가 들어온 것입니다.
아내가 밉습니까? 마귀가 여러분 집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마귀를 쫓는 길은 감사뿐입니다.
우리 교회의 한 여집사님이 친한 친구의 꾀임에 빠져 일억 원 정도의 돈을 투자했는데, 다 날리고 말았습니다. 어느 책에 보니 여자에게 큰돈을 맡기면 큰일난다는 글이 있었습니다. 여자는 분위기에 약하고 감정적이라 어떤 일을 할지 모른답니다.
우리 여집사님이 그렇게 큰돈을 날렸는데도 남편인 우리 안수 집사님은 아내에게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답니다. 2억을 날리지 않고 그 정도로 날린 것에 감사했답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큰돈은 맡기지 않고 생활비만 준답니다. 지금 그 집사님은 회사의 별이 되어 있습니다. 아내가 큰일을 저질렀어도 이혼하지 않고 잘 사니 아이들도 잘 자라고, 그 부인 집사님도 ‘내가 이렇게 훌륭한 남편을 이제까지 잘 몰랐구나.’하고 남편을 존경하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이 된 것입니다.
돈 얼마 때문에 싸우고 뜯는 가정이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마귀가 좋아하며 그 가정을 집어 삼키게 됩니다. 돈을 잃은 것만 해도 아픈데 가정까지 잃어서 되겠습니까? 이미 잃은 것만 해도 손해가 많은데, 서로 싸우면 더 귀한 것을 잃게 됩니다.
남편이 실수해도 더 큰 실수를 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면, 남편의 실수가 그 정도인 것에 오히려 감사하고 감사하면 마귀가 그 가정을 결코 삼키지 못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되어도 감사하면 시험 들지 않고, 아무리 시험 들어도 감사하면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에게도 감사의 조건을 찾으면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불평하려 하면 불평거리도 많습니다. 같은 아내를 두고도 감사하면 감사할 것이 많지만, 불평하려면 불평도 한이 없습니다.
남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교회도 불평거리를 찾으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나 좋지 않은 교회도 감사거리를 찾으면 감사할 것이 많습니다.
저도 한 번 봅시다.
이 지용수 목사를 두고도 여러분이 감사하려고 생각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목사님을 귀히 쓰셔서 세계에 보내시어 교회를 일으키시는구나. 우리 목사님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구나.’하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평하려고 하면 ‘아니, 우리 목사님은 홍길동인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교회는 지키지 않고 매주 돌아다니기만 하시고… ’하며 얼마든지 불평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을 세워 놓고도 감사하려면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고, 불평하려면 얼마든지 불평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5절에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예 감사만 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터져도 감사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이 말씀의 한계입니다.
“너희는 불평하라.”는 말씀이 신구약 성경에 한 곳도 없습니다. 기록된 말씀 가운데 “불평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원망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한 말씀도 없습니다.
“범사에, 환난 가운데도, 시험 가운데도 감사하라. 시련을 만나거든 기뻐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감사할 때 향기가 나고 아름답습니다.
1988년 뉴욕에서 마라톤 경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전 미국 시민의 사랑과 레이건 대통령의 특별한 칭찬을 받은 린다 다운이라는 여사가 있습니다.
그는 장애인으로 태어나서 다리를 쓰지 못합니다. 걷지도 못하고 뛰지도 못하는 그가 목발을 짚고 마라톤 연습을 하여 그 경기에 참가했습니다. 목발을 짚고 몸을 흔들면서 11시간을 달려 42킬로 195미터를 완주했습니다. 미국 시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격려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친히 전화를 했습니다.
“장하오. 장하오. 자랑스러운 미국의 시민이오.”
그때 린다 다운이 말했습니다.
“각하, 저는 제게 강한 의지력과 인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었지만, 강한 정신력을 주시고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하니 전 미국 시민이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불평하는 아내가 예쁩디까? 불평하는 자식이 예쁩디까? 천만에요. 감사할 때 예쁩니다.
우리가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마귀는 물러가서 좋은 것은 더 좋게 되고 좋지 않은 것도 좋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128편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니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천사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지 않았느냐? 정처 없고 헐벗고 목마르고 굶주리고 매맞고, 그리고 후욕을 당하면 축복하고, 핍박을 당하면 참고, 비방을 당하면 권면하니 우리가 세상의 더러운 것과 찌기같이 되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견디고 감사하며 사는데, 너희는 배부르고 존귀하고 모든 것을 다 누리면서도 어찌 그리 받지 않은 것 같이 사느냐?”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말씀의 한계를 따라 늘 겸손하게, 또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며 나아갈 때 사탄이 접근하지 못하여 승리의 깃발을 날리며 귀하게 살 줄로 믿습니다.
바람풍 선생과 바담풍 제자
고전 4:6-13 / 이정선목사
‘모범이 되는 것은 가르치는 아주 좋은 한 가지 방법이 아니라 유일한 방법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훈장이 바담풍 하면 학동들도 바담풍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이 바담풍 해도 학생들이 알아서 바람풍 해야 된다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런데 선생이 아무리 바람풍이라고 해도 학생들이 바담풍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르치거나 지도하는 사람이 자주 하는 실수나 빠지기 쉬운 유혹 가운데 하나는 솔선수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시하고 명령을 내리는 것은 쉽고 편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해라. 서로를 존중하고 섬겨라. 이렇게 얼마든지 말로 가르치고 지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한번은 탱크부대와 함께 훈련을 했습니다. 저는 하사였는데, 고참이 되면 소대장하고 많이 싸워요. 그런데 우리 옆 소대장이 자기 소대원들에게 탱크 밑으로 포복해서 기어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분대장인 하사가 못하겠다고 버텼습니다. 둘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소위가 시키는데 하사가 못하겠다고 하니까 이거 군대의 명령체계가 뭐가 됩니까? 둘이서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데, 소위는 왜 못하겠다는 거냐? 하사는 왜 그런 걸 우리한테 시키는 거냐? 소대장은 시키면 해야지 말이 많아. 그러니까 분대장이 하는 말, 소대장이 먼저 해라. 그러면 우리도 따라서 하겠다. 그러니까 소대장이 철모를 벗어서 땅에 홱 내동댕이치면서 탱크 밑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소대장 체면에 부하들 앞에서 탱크 밑으로 기어들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또 군대는 명령에 의해 유지되는 체제이기 때문에 굳이 모범을 보일 필요가 별로 없어요. 그냥 지시하면 돼요. 그러나 규율이 확보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소대장처럼 망신만 당하기가 딱 알맞아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이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모범이 된다는 것은 희생과 포기를 의미합니다. 자기 손발로 힘들게 움직여야 하고, 권위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사람을 가르칠 수 있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만약 소대장이 솔선수범해서 탱크 밑으로 기어들어갔는데 병사들이 못 들어가겠다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가 이 일에 본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 일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말한 것이지요. 바울은 심는 사람이었고 아볼로는 물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성장시킨 주인공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하기를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 중요하지 심고 물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거나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결코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또 바울과 아볼로는 서로 경쟁하고 다투지 않았습니다. 서로 존중하고 양보하면서 각자의 재능과 역할에 따라 협력했습니다. 그리고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말처럼, 그들은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충성스럽게 일했습니다. 말로만 떠들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습으로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르침을 받은 고린도교회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훌륭한 스승 아래서 훌륭한 제자가 나고 유능한 지휘관의 군대가 강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법칙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러는 것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말처럼 말이지요. 그렇게 겸손했던 스승 아래서 교만에 극치를 달리는 교인들이 나왔습니다.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는 스승들을 보면서 제자들은 서로 나뉘어 싸웠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바울의 진단에 의하면 고린도교회가 서로 나뉘어 싸우게 된 것은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교만을 지적하기 위해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은 고린도교회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늘 던져야 할 질문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누가 너를 특별한 사람으로 또는 남보다 더 똑똑하고 잘난 사람으로 구별해 주었느냐는 말입니다. 지금도 어떤 나라에는 계급제도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의 기반이 되고 있는 월드와이드웹(www)의 개발자 팀 버너스리가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작위를 받은 사람들이 꽤 되지요? 제임스 본드로 유명한 숀 코네리와 로저 무어도 기사 작위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도 기사 작위를 받았지요.
물론 현대사회에서는 만인평등사상이 사회를 지탱하는 토대가 되어 있기 때문에 작위를 받았다는 것이 사뭇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만, 과거의 계급사회에서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신분이 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평민들보다 우월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누가 너희를 그렇게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준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희가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라도 받았느냐는 식으로 묻습니다. 너희가 스스로 대단하게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길 권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바울이 누가 너희를 구별하였느냐고 할 때, 이 누구는 하나님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교회에서 누군가를 특별하게 높일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서로를 존경해야 합니까?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과 된 후의 삶의 방식에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는 세상의 가치관과 법칙에 따라 삽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치와 방법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미묘한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세상을 떠나 외딴섬이나 산속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교회라는 두 사회에서 동시에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두 가지 법칙 사이에서 묘기를 부리듯 삽니다. 일요일에는 충실하게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철저하게 세상의 법칙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거 썩 좋은 방법이 아니지요? 어떤 사람들은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나님의 가치를 따라 살려고 애씁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의 가치와 법칙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사람들이 바로 진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부류가 더 있겠지요? 바로 세상의 법칙과 기준을 교회 안으로까지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바로 고린도교인들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바울이 바람풍이라고 외쳐도 여전히 바담풍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니에요? 세상의 법칙이 약한 자를 밟고 출세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법칙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 법칙이었습니다. 설령 세상에서는 교만하고 서로 싸우더라도 교회에서는 겸손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최소한 지켜야 할 도리가 아니에요?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교회 안에서 교만해버렸습니다. 교회 안에서 당을 짓고 싸워버렸어요.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법칙과 세상의 법칙이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습니까? 사실 공존이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가치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는 서로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 속에서 세상의 법칙이 하나님의 법칙에 정복되어서 월요일부터 토요일에도 하나님의 법칙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법칙이 너무 강해서 하나님의 법칙이 설 자리가 없습니까?
물론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살거나 또는 완전히 세상의 법칙대로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일반은총에 의해서 어느 정도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살거든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사회가 유지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온전히 하나님의 법칙대로만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의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좌표와 방향성은 설정될 수 있겠지요. 얼마만큼 하나님의 법칙을 따르려고 하는지, 또 어느 쪽을 향해서 움직이고 있는지 얘기할 수는 있을 것 아닙니까?
다시 그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 고린도교인들 중에는 세상에서 똑똑하고 잘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많은 노예들을 부리는 부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신분이 높은 귀족들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자기를 남보다 우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그런 권리를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 2:3)고 말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살아가는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낮게 여겼단 말이지요.
이어지는 질문들도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일종의 소유권 분쟁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소유권 분쟁이에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능력과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고 말합니다. 성경의 맨 처음 구절이 무엇입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는 선언입니다. 칼빈주의 5대강령 첫 번째 항목은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구원을 위한 자가발전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어느 정도의 타협의 산물이 아니라 완전한 항복에 의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육신, 가족과 재산, 자연환경, 그리고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가족도 있고 재산도 있어요. 그런데 이것들이 다 어디서 난 것들입니까? 부모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벌었으니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무엇을 가지고 왔던가요? 아무것도 없이 왔잖아요? 손에 쥔 것은 없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그 가능성이 실현된 것이 지금 내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그 가능성은 누가 주신 것입니까? 아니, 우리 목숨은 누가 주신 것입니까?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이웃에게 인자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실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의 세 번째 질문이 그것입니다.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대체로 인간의 교만은 자신이 가진 것에 비례합니다. 자신의 재산이나 권력이나 학문이 많다고 생각할수록 교만하기 쉽습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공헌이 크다고 생각될 때 교만하게 되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면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한 순간에 가져가실 수도 있습니다. 욥을 보세요.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잖아요? 그렇지만 욥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하나님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실까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인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얼마나 비천하게 살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신세타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비천한 처지에 처하게 될 만큼 스스로 겸손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 스승으로서 이렇게 겸손하려고 하는데 왜 너희는 그렇게 교만하느냐는 책망입니다.
사도는 만물의 찌꺼기처럼 취급되고 온갖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반면에 고린도교회는 부유하고 풍족한 가운데 교만한 마음으로 서로 나뉘어 싸우고 있습니다. 누가 더 행복한 사람입니까? 누구를 더 행복한 사람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가치관과 믿음 아니겠어요? 우리가 진심으로 자신을 돌아본다면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겸손한 것이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거든요. 교만이 자신을 망치고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우리를 하나되게 하시는 축복이 이 자리에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고전 4:6-21 / 박조준목사
본문 말씀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서 가장 요긴한 것 중에 하나입니다. 인간이 직면하 고 있는 것은 인간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뿐만 아니라 아볼로, 고 린도 교인 모두가 겸손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항상 놀라울 정도로 겸손했습니 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경고하고 혹은 그들을 비난할 때 언제나 자기를 포함시키며 말했습니다. 참된 전도자는 거룩한 자리에서 죄인들을 향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죄인에게, 같은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사람들을 도와주고 구원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그들을 책망할 것이 아니라 그들에 게 호소하는 태도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비판의 태도가 아니라 동정적인 입장을 취해야 할 것입 니다.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을 향해서 밖에 넘어가지 말라 고 바울이 주의하는 말을 했지만 그것 은 바울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 자기의 교훈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교만을 정죄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 게 호소하고 있는 것은 사람의 충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질문합니다. 7절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 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라고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 짧은 말씀 속에서 은총의 교리 전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한 때 어거스틴은 인간의 선행을 중심으로 생각했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 의지의 자유를 기치로 하고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드 디어 하나님의 은총이 승리하였다 라고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셨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구 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일이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고, 또 한편 하나님께 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도저히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고린도 교인들의 근본적인 잘못은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고 있다는 사실을 잊 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흔히 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은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죄라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습니다. 잠언 16장 18절에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했습니다. 교만은 다른 모든 정신적 인 것이나 도덕적인 죄를 짓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결국 죄란 자기 본위에서 생기게 되는 것인 데,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 자기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곧 교 만의 죄입니다.
그래서 잠언 16장 5절에 보면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 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잠언 29장 23절에는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 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시편 101 편 5절에 보면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 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교만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가령,영적 교만이 있습니다. 모든 죄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영적인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보다도 자기 자신의 덕을 더 내세웁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옛날 바리새인들이 그처럼 영적으로 교만했었습니다. 스스로 자만 으로 가득했었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어떤 이는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의롭다고 생각합 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더 잘 섬긴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말하자면 신앙적인 교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만 하나님을 바로 섬 긴다고 교만하게 여기다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성적인 교만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2절에 보면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 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좀 배워서 다른 사람보다 그 방면에 아는 것이 많으면 자 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지식을 얻는 것도 하나님에 의해서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내게 이처럼 지식을 주셨는데 이것을 가지고 어떻 게 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할까 하고 생각하며 그 방면으로 힘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물질적인 교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재물을 누가 주셨습니까? 신명기 8장 18절 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고 했습니다. 재물 얻을 능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재물이 많다고 해서 교만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이 주 신 것인데 자기 스스로 얻은 것처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역대하에 보면 부와 귀가 주께로 말 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 때문에 교만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인 지위에 대한 교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 가운데 하 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옛날 파사 나라 재상 하만이 교만해서 유대 사람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인사를 잘 안 한다고 그 사람과 그의 가족, 나아가서 온 유대인 을 학살하려는 음모를 세웠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준비해 놓은 기 둥에 자기가 매달려 죽었습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교만해서 자기 궁전 높은 꼭대기에 올라 자기 궁중을 내려다보며 내 능력과 지혜로 이 모든 성을 건설한 것이 아니냐? 하고 호언 장담했습니다. 그 말 을 한 지 얼마 안 되어 느부갓네살 왕이 미쳤습니다. 들로 나가서 소처럼 풀을 먹고 그 머리털이 독수리 머리털처럼 되어 지내다 갔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벨사살 왕이 교 만해서 천여 명의 고관 대작과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쓰던 기명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그런 데 그 날 저녁 메데와 파사의 연합군이 쳐들어와 벨사살 왕은 죽고 온 나라는 망하고 말았습니 다. 교만하던 헤롯이 충에게 먹혀 죽은 것을 기억하십니까? 기독교 사상은 노예 사상이라고 비웃던 니체라는 철학자는 미쳐서 죽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독일의 히틀러가 이 니체의 초인간의 사상을 정치에 인용해서 독일 민족은 초인간적 민족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 습니다. 큰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마지막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왜요? 하나님 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습니다. 사실 교만은 모든 죄 의 근본입니다. 교만하므로 많은 다른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반드시 망합니다.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미워하십니다. 사람들도 교만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교만한 사람도 교만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겸손해야만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 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성경에는 겸손에 대한 권면이 많습 니다.
야고보서 4장 10절에 보면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고 했고, 잠언 16장 19절에 보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 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했습니다. 미가서 6장 8절에는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했습니다. 우리 주님도 산상보훈에서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는 것이었고, 마태복음 11장 28∼29절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 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4장 11절에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 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기독교 윤리에 대해서 언급하는 로마서 12장에서 제일 먼저 주신 말씀이 이 말씀 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 각을 품지 말고 (겸손한 생각을 품으라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 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서도 첫 부분은 교리편이고 다음 부분이 윤 리편인데, 거기서도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 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은 제일 먼저 겸손을 가르칩니다. 성경은 겸손을 최고의 덕으 로 가르칩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삼덕을 말합니다. 지, 인, 용(지혜, 어진 것, 용기)입 니다. 겸손이란 말은 없습니다. 서양에서 특히 헬라의 윤리 사상을 보게 되면 이 세 가지에 다 하나를 더 가합니다. 그것이 절개입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사덕을 말합니다. 그러나 겸손에 대 해서는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제일 먼저 겸손을 가장 귀한 덕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가르친 것만이 아니 고 주님께서는 친히 겸손을 보여 주셨습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친히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겸손의 도, 종의 도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뿐 만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성육신의 지상 생활 전체가 겸손에 대한 산 교훈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 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겸손을 친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 게 성경은 겸손을 최고의 덕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 를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낮은 곳에 물이 고입니다. 겸손한 곳에 겸손한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 가 모입니다. 낮은 데 이슬이 많이 내립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산꼭대기에 이슬이 내리지 못합 니다. 겸손한 마음에 은혜의 이슬이 내립니다. 병은 비어 있어야 기름을 넣을 수가 있습니다. 겸 손하게 빈 마음이라야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을 부어 넣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7장 15절에서 우리는 이런 말씀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 성케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겸손한 자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같이 해서 그 마음을 소성케 하십니 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위대한 인물이 많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도 제일 위대한 인물이 누굴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마 모세일 것입니다. 모세는 아주 겸손하다고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신약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누구라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마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그는 겸손했습니다. 자기는 죄인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모든 성도 가운데 지극히 작은 사 도보다 더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겸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 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반면에 교만한 자의 기도는 물리치십니다. 그래 서 바리새인이 성전에 들어가서 드리는 교만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나 세리 가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라고 한 겸손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겸손한 과학자가 새로운 진리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아이작 뉴우톤의 유명한 이야기를 잘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이 우주에 대한 진리는 저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가 지고 놀고 있는 어린 애들이 바다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더 적을 것입니다. 위대한 과학자는 사 실 겸손합니다.그래서 유명한 교부 크리소스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뿌리요, 어머니요, 기초다. 옳은 말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 생활은 첫째도 겸손 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 어떤 나이 많은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지식이 너무 적어서 성경 을 그저 그대로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을 다니고 신학교에 가서 철학을 배우고, 비교 종교학 을 배우고, 성경 비판학을 배우게 될 때 지식이 너무 많아져서 성경을 그대로 못 믿었습니다. 그 러다가 지금 와서는 내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다시 깨달아서 이제는 그저 성경을 그대로 믿습니다. 많이 알수록 겸손해집니다. 어떤 여자는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청소도 하기 싫어하고 그릇 닦는 것도 싫어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대학 출신이기 때문에 취직을 못하는 경우가 있 습니다. 대학 출신으로 막일을 할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해서 그럽니다. 미국에 이민 가서 사시는 분들을 보면, 여기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나오고 박사 공부하 던 사람도 구멍가게하고, 세탁소하고, 공장에 다니고, 생선가게하고 구두수선하고 다 합니다. 우 리 나라에서 이런 정신으로 산다면 미국까지 이민 가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대만 의 경우를 보면 우리 나라 경상도만큼의 조그만 섬입니다. 인구는 우리 나라의 절반이나 되는 2 천여만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어디서든 부지런히 일합니다. 직장은 두 개씩 가지고 식 구마다 일합니다. 우리 나라같이 중공업, 대기업은 없지만 중소기업이 발전해서 누구나 일할 수 있고 기회가 있어 부지런히 일합니다. 국민 소득이 우리의 3배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기업인들이 대만에 가서 배워 오고 있습니다. 전에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선교한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에서 병원을 처음으로 지을 때 손 수 일을 하면서 병원을 지었습니다. 그는 철학 박사요, 문학 박사요, 의학 박사요, 바하 음악의 연주자로 세계적인 권위자였습니다. 이런 분이 손수 일을 했습니다. 그의 옆에는 흑인 청년 하나 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슈바이처 박사가, 청년, 그저 그렇게 서 있을 것이 아니 라 기왕이면 나와 같이 일을 하는 것이 어때요? 하고 말했더니 그 흑인 청년 하는 말이 나는 그 런 일 안 합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인데 그런 일은 안 합니다. 그런 일은 공부 안한 사 람이나 하는 거죠 라고 했습니다.그때 슈바이처 박사가 나도 학생 시절에는 청년처럼 그런 생각 을 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공부를 많이 한 다음에는 아무 일이나 다 하게 됐어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공부는 할 수 있을 때까지 하십시오. 공부를 많이 할수록 겸손해집니다. 어떤 젊은 학생은 보 자기에 떡을 싸서 심부름을 좀 하라고 하면 창피하게 어떻게 들고 다니냐고 심부름을 거절한답니 다. 보자기 들고 심부름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심부름을 안 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공부를 많이 할수록 겸손해집니다. 열매가 없는 가라지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서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많은 벼 이삭은 고개를 숙입니다. 고개가 숙여질만큼 공부를 더해야 합니다. 저 유명한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면, 한번은 단테가 연옥엘 가서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구석에 가보니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모두가 등에다 무거운 돌을 지고 허리를 꾸부리고 서 있 습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습니다. 아니,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무거운 돌을 지고 허리를 꾸부리 고 서 있습니까? 그때 안내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 저들은 너무 교만해서 한 번도 허리를 굽혀 본 적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낙원에 올라가는 문은 낮아서 허리를 굽혀야 되기 때문에 지금 그 연습 을 하느라고 저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머리와 허리 굽히는 것을 배웠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사실 너무 교만해서 예수 못 믿는 분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아, 교회에 가보니까 여자들 무 식하고 가난한 사람들, 어린 애들이 나오는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곳에 가서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 박사나 장관이나 회장이나 사장이나 나온다면 모르지만요 라고 말합니다. 성지에 가면 예수님이 나셨다는 곳을 기념한 예배당이 있습니다. 큰 예배당인데 문은 아주 좁고 낮습니 다.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데 그것도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님께로 나아가려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겸손한 사람의 특색이 몇 가지 있어요. 소극적으 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불평과 원망이 없습니 다. 적극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순복을 잘 합니다. 어디를 가나 봉사를 잘 합니다. 범사에 감사합 니다. 마음이 늘 평안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와 정반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겸손해질 수 있습니까?
내 교만을 알아야 합니다.우리가 다 교만합니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착각합니다. 사람이 제 잘난 맛에 산다 는 속담이 있습니다. 교만합니다. 이것을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면해서 나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전에 욥이 의인이었지만 큰 환난을 당하게 되고, 그 어려움이 오래될 때 불평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하 나님을 뵙게 되었을 때 그는 자기의 교만을 회개했습니다. 내가 전에는 하나님께 대하여 귀로 듣 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내 눈으로 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 가서 예배하다가 높고 높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환상을 직면하 게 될 때 제일 먼저 뭐라고 말했어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죄인 인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음이라 고 죄를 회개했습니다. 바울이 회개하기 이전에 다메섹으로 내려갈 때 어땠어요? 아주 교만했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앞에 가서 환상 중에 예수님을 만나 보게 될 때 주님께 꿇어 엎드렸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 그 다음부터는 겸손해졌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도가 된 것입니다. 교만은 만죄의 근본이요, 죄의 어머니입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근본이요, 어머니입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 다. 지난 날 우리의 교만을 회개합니다. 그리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십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 받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스승을 기억하라
고전 4:10-16 / sub목사
교회의 절기 중에 공식적으로 “스승의 주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스승의 날’에 맞춰서 ‘스승’에 관한 설교를 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로부터 배웠고, 배우고 있고, 앞으로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신앙에 관한 모든 것을 누군가로부터 배웠고 배우고 있고, 앞으로 배워야 한다. 그러니까 교회에도 “가르치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행8:30~31)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성경 내용을 “지도해주는 사람”, 즉 스승이었다.
교회에서나 세상에서나 “가르치는 자”는 존경을 받아 왔다. “군사부일체-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은 하나다”는 말처럼, 스승을 임금과 아버지의 위치로 높게 보았다. 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마라”는 말도 있는데, 그만큼 스승을 존경하고, 신뢰하라는 의미이다.
“스승”이 뭐 길래 그런 존경과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스승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를 가르쳐서 인도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승은 크게 두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가르치는 사람, 둘째, 인도하는 사람. 단순히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은 스승이 아니다. 그렇다고 앞길을 인도해주기만 하는 사람도 스승이라고 할 수 없다. 또 아무리 가르치고, 인도한다고 해도, 나쁜 것을 가르치고 나쁜 길로 인도하는 하는 사람을 스승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욕 잘하는 방법”, “도둑질의 노하우”, “컨닝의 모든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스승”이 아니다.
이렇게 “스승”의 자격은 까다롭다. 좋은 것을 가르쳐야 하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인생의 방향을 알려주고, 격려하고, 삶 전체를 지도하는 사람, 나의 인생 전체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을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래서 “선생은 많으나 스승은 없다”고 한탄하는게 아닐까?
이런 스승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사랑받고 존경받는 위대한 스승 바울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지도했는지, 스승으로서 어떤 충고를 하는지 살펴보자.
우선 고린도 교회에 대해 좀 알아둘 필요가 있다.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라는 상업 도시에 세워진 교회로,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교회였다. 그 문제들을 이 시간에 다 언급할 수는 없고, 오늘 설교와 관련된 문제점을 이야기 하자면, 성도들 간에 “팬덤”으로 인한 분열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좀 유치 할 수도 있지만, 고린도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성도들이 다투는 이유 중에 하나는 누가 진정한 스승이냐는 것이었다. 한쪽에서는 “바울이 갑(甲)이다”, 반대편에서는 “무슨 소리냐 아볼로가 진리다” 이렇게 누가 최고냐를 두고 다투고 있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3장의 주된 내용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이렇게 “누가 최고의 스승이냐”는 문제로 다툰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쓰게 되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바울과 아볼로)는 그리스도의 일꾼-종이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충성이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당신들한테 인정받고 존경받고, 팬을 확보하려고 이 일을 하는게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는 의미다.(4:1~2)
바울은 철저하게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생각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일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바울은 “사람들(성도들)”의 인정을 받고, 인기를 끌기 위해서 일 하는게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바라고 기대하는게 있다면, 오직 하나님의 인정이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바울을 판단할 자격이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
종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주인뿐이다. 그러므로 바울을 판단하는 사람이 누구든, 어떤 판단을 하든, 판단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자기가 바울의 주인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바울은 심지어 자기도 자기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4:3~5) 왜냐면, 자기를 판단하는 그 순간, 자신이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바울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바울을 좋게 판단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성도들은 바울을 판단(평가) 하면서, 자기들이 마치 바울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이 행세했다. 이는 곧 자신이 바울을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인데,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가 하나님이 되겠다는 뜻이 된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바울과 아볼로를 판단하면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 하는게 아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과 아볼로의 가르침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은혜를 깨달아야 했다. 바울은 말한다. “누가 너희를 구별했느냐?”(4:7),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희를 구원한 분이 누구냐고 묻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구원한 분이 누구인가?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분이시다.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마치 자기가 잘나서 구원 받은것 처럼 우쭐하고, 교만에 빠져서는 안된다. 마치 자기가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바울과 아볼로를 판단해서는 안된다.
바울과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세상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로 전락하고(4:9), 어리석은 사람 취급을 받고, 약해지고, 비참해지고(4:11),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정처 없이 떠돌고, 수고하고, 모욕을 당해도 축복하고, 박해를 받아도 참고 견디고 있다.(4:12~13) 고린도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말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 배부르고, 풍성하고, 왕 노릇한다(4:8),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다고 생각한다(4:9),
웃기지 않은가? 고린도교회에서 가르치고, 복음을 전한 “스승” 바울은 모진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참고 견디고 있는데, 정작 바울에게 가르침을 받은(다른 말로 하면 바울의 도움을 받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이 바울보다 나은 사람인 것처럼 바울을 평가하고, 이러쿵 저러쿵 점수를 매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신앙 수준이 바울을 평가할 정도로 대단한 것일까? 아니다! 정 반대다. 실상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어린아이처럼 연약하고, 가볍다.(3:1)
그러면 바울은 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입방아에 오르면서도, 고린도 교회를 향해 편지하고, 그들을 가르치는 것일까?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는 이유는, 성도들을 사랑으로 가르치기 위해서이다(4:14)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자식처럼” 사랑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듯이, 그렇게 고린도교회와 성도를 사랑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영적인 자녀였다.(4:15)
바울은 스승으로서, 아니 스승의 차원을 뛰어넘어, 아버지의 마음으로 고린도교회를 향해 편지를 쓴 것이다. 이 마음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과, 사명, 하나님을 위한 책임감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영혼들을 끝까지 돌보고, 잘 가르치겠다는 처절하도록 뜨거운 가슴 때문에 편지를 썼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당부한다.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4:16) 바울이 잘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흠잡을 데가 없어서 자신만만하게 이야기 하는 것일까?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 무한한 헌신을 했기 때문에?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 아니다. 바울은 자신이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애쓰는 모습! 예수님을 닮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 바로 그 모습을 본받으라는 의미다.
은석교회의 바울은 누구인가? 중고등부의 스승은 누구인가? 누가 여러분을 위해 고난당하고, 자존심 상하고, 남몰래 눈물 흘리고, 상처 받고, 속 썩고, 그러면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여러분을 지도하고 가르치고 있는가?
여러분들 옆에 앉았다. 바로 “선생님”이다. 여러분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처럼 선생님들을 두고 판단하고,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이 선생님들의 주인, 선생님들의 하나님이라는 말 밖에 안된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선생님과, 선생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다.
선생님들이 원하는 것도 오직 그거 하나뿐이다. 여러분 잘 가르쳐서 과외비 받는거 아니다. 존경받고 인정받으려고 하는거 아니다. 인기 끌고, 칭찬 받으려고 그러는거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일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불살랐듯이,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몸부림쳤듯이, 우리의 선생님들도, 여러분들을 위해 헌신하고 땀 흘리고, 눈물로 기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여러분들의, 임무는 “판단”이 아니다. 판단은 오직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맡기라! 우리는 선생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발견하면 된다! 그 일을 위해 힘쓰자!
우리를 위해 수고하시는 선생님들의 헌신과 은혜, 수고를 기억하며, 선생님을 위해 기도하고,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문자에 답문도 잘하고, 때로는 먼저 안부를 묻기도 하고, 공과공부 시간 때 집중해서 잘 듣고, 같이 밥도 먹고, 그런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고,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만 명이나 되는 스승이 있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여러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 때문에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고전4:15 ver.쉬운성경)
스승을 넘어 영적인 아버지가 되시는 선생님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중고등부가 되자. 그때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고, 선생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참 뜻을 발견하게 된다.
옛 사람을 벗어 버려라
고전 4:10-11 / 조용기목사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11)
제 말을 따라서 고백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기쁩니다. 저는 즐겁습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모든 것이 잘됩니다. 옆에 계신 분도 당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 여러분 입술의 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오늘 심리학자가 말하기를 우리 말하는 네 말이 우리 두뇌의 98%를 좌우한다고 그럽니다. 말하는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좋은 말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부간에 이혼하려면 서로 쳐다보고 비난을 계속하면 석달 이내에 이혼한답니다. 말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서론>
오늘 저는 “옛 사람을 벗어 버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십시오. 옛 사람을 벗어 버려라! 어느날 저녁 예수님께서 쉬시고 계시는데 유대인 지도자 중에 한사람인 니고데모가 어둠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당시 니고데모는 유대인 산헤드린 회원중에 한사람이었는데 이 산헤드린 회원이란 유대인의 국회와 같습니다. 굉장히 엄격한 율법주의자들인 것입니다. 한 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는 반드시 내고 십계명을 다 지키는 굉장히 자만스럽고 거만하고 교만하고 고집불통인 이런 유태인이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 왔을 때 예수님을 거역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혀 죽인 당사자들이 이 바리새 사두개 교인 이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중에도 마음이 깨어지고 온전한 사람이 있어요.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와서 “주님, 하나님이 당신을 보내지 아니하셨으면 당신이 행하는 이런 일은 사람으로서는 결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쳐다보시고 당장 하신 말씀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다른 굉장한 율법의 진리를 말씀할 줄 알았는데 거듭나라는 것입니다. 이 니고데모가 “예? 거듭나라고요? 나같이 나이 많은 노인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서 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거듭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다른 설명을 해봤자 너희들 못알아 듣는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해도 너희가 못알아 듣는데 하늘나라 일을 말하면 어떻게 알아 듣겠는가? 나를 쳐다보고 믿으면 구원을 받고 거듭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올 때 하나님을 심히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서 그들을 물어 죽이게 한 것입니다. 불뱀이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물매 수많은 사람이 독이 올라 죽을 때 그들이 회개하고 모세에게 살려달라고 하니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구리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달면 그를 쳐다보고 믿는 자마다 치료받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빨리 구리로 뱀을 만들어가지고서 그 머리를 장대에 박아서 높이 매달고 “뱀에 물려서 죽어가는 사람마다 쳐다보라!” “웃기는 소리하네! 저것 쳐다본다고 나을턱이 뭐냐?” 그런 사람은 죽고 순종해서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은 독에서 해방되어서 다 살아난 기록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여러분 우리가 학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믿는 것도 아니고 이성적으로 과학적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정도의 하나님 같으면 우리 대학교수 정도밖에 안되려고요? 하나님은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시기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고 그를 쳐다본 사람마다 독에서 해소된 것처럼 나도 매달려야 하겠다. 내가 모든 세상 죄를 짊어지고 매달릴 터이니 나를 쳐다보는 사람마다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나를 쳐다보므로 거듭나는 것이다.” 오늘 영국의 BBC방송국에서 제게 인터뷰를 하러 런던에서 여기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라왔어요. 제가 주일날 보통 인터뷰를 안하는데 그 머나먼 길을 저와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 방송을 하려고 왔으니 안만나 줄 수가 없지요. 그런데 거기서 하는 말이 “왜 이 교회가 이렇게 발전을 했느냐? 다른 교회들은 다 지금 뒷걸음치고 있는데 왜 오순절교회 또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이렇게 무시무시한 속도로 발전을 했느냐? 왜 그러느냐? 이유가 뭐냐? 한마디로 말해 달라!” 그래서 제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다른 교회는 신학을 설교한다. 교인들에게 학문을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 교회, 우리 오순절교회는 생명을 전달한다. 그것이 다르다. 학문을 공부하는 것하고 생명을 받는 것하고 그게 다르다.” 그래서 그게 뭐냐고 물어서 “학문이라는 것은 배 등따숩고 배부른 사람들이 학문을 말하지만 현재 배고픈 사람은 밥먹어야 되고 현재 아픈 사람은 치료 받아야 되고 현재 고통당하는 사람은 해방을 얻어야 되는데 오늘 우리가 전도한 사람은 전부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 당하고 괴로운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와 의와 치료와 구원과 은혜와 축복을 전한다. 우리 교회 오면은 학문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 하나님 도움을 가져온다.” 몇 번이나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받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와서 학문을 배우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학문을 말해 줄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학문을 말하지 않고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려 죽을터이니 나를 바라보고 믿으면 중생하고 영생을 얻는다.” 생명을 전달을 해준 것입니다.
<본 론>
1. 용서와 의를 받음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걸머지는 것을 말합니다. 학문 대상이 아닙니다. 구경 대상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의 사람이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하나가 되어 멸해지고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용서와 의의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당 내 천당, 예수님 내 주여 내 중심에 오셔서 예수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떨어져서 학문의 대상이 아닙니다. 연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나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내가 산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러니까 죄없는 예수님이 죄덩어리인 나와 끌어안고 하나가 되버렸습니다. 그러니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도가 내 죄를 청산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의를 선물로 받아서 의로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골로새서 1장 13절로 14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려 돌아가셨다는 것을 우리 생각 속에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 그 내 생각속에 깨달아 알아야 되고 그 다음에는 내가 상상하면서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내 모습을 자꾸 꿈꿔봐야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만화를 보고서 만화에서 자기가 만화에 있는 주인공처럼 된 것을 상상하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마음에 상상하고 꿈꿔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여러분이 마음 속에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를 믿어서 하신 일을 힘입어 우리 주께 나가면 구원함을 얻는다는 말씀대로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중얼거릴 것은 입술로 중얼거리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서 옛사람 벗어버렸다. 너희 사망의 옛사람아 너는 나와 상관없다. 너는 내가 벗어버렸다. 나는 해방과 자유를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용서와 의가 된다. 입술로 중얼거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내가 걸머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우리가 걸머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어렵게 어떻게 걸머지느냐. 우리 생각 속에서 내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생각하므로 내가 상상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상상하고 꿈꿔 보므로 내가 마음 속에 그것을 믿음으로 내가 입술로 그렇게 되었다고 고백하므로 여러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장사지낸 바 된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의를 선물로 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 성결케 하는 성령을 받음
둘째로, 불결한 사람이 예수와 합하여 십자가에서 죽었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옛 사람을 벗어 버렸고 성결케 하는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된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러운 옷은 어떻게 합니까? 더러운 옷은 벗어가지고서 목욕통에 가서 빨래통에 옷을 집어 넣어 버리잖습니까? 요사이는 세탁기가 있어서 어떠한 옷이라도 쉽게 세탁기에서 빨게 되니까 참 좋지요. 금년에 제가 보니까 중증장애인들이 사는 곳에 가보니까 장애인들은 옷을 세탁할 수 없으니까 빨래가 태산같습니다. 그리고 입고 있는 옷이 한번 입으면 한달씩 입으니까 옷이 아니라 퇴비에요. 퇴비! 그래서 내가 뭘 해주기를 원하느냐 물으니까 이 옷 빨래 좀 해 입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돈을 내어서 세탁소를 차려 주었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세탁소 갔지요. 큰 회전용 세탁기계를 설치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들은 얼마든지 옷 컴온! 돌리면 돼요. 돌리면... 아예 순복음식으로 깨끗하게 되가지고서 깨끗한 옷을 입습니다. 옛날에 더러운 옷은 지나갔어요. 보라, 이제는 새옷을 입느니라.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옛사람을 청산해 버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상상하십시오. 나의 더러운 옛사람은 더러운 말, 더러운 행동, 더러운 삶의 옛사람은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상상하여 꿈꾸고 나는 더러운 옛사람은 다 죽어서 벗어버렸다고 꿈꾸고 믿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정결하게 되었다. 깨끗하게 되었다. 의롭게 되었다. 그리하면 그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걸머짐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죽음을 걸머지면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여러분의 생활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몸에 어떻게 짊어지느냐. 몸에 짊어지는 것이 예수님과 나와 함께 죽었다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믿고 말하면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부활의 생명이 여러분 삶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6장 11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정결케 해주는 것입니다.
디도서 3장 5절로 7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이 예수 믿고 용서와 의와 거룩함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우리 속에 들어온 성령의 역사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훌륭해서 내가 잘나서 내가 기도를 많이해서 내 힘으로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해입니다. 성령이 기도도 하게 만들어 주시고 의롭게 살게 해주시고 승리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이 숨을 쉬면 성령님을 숨쉬고 있는 것입니다. 숨쉬는 것과 같이 성령님이 같이 계신 것입니다. 구만리 장천 멀리계신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함께 숨쉬는 것과 같이 성령이 여러분 속에 들어와 있고 여러분 곁에 함께 계신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성령은 보혜사인 것입니다. 보혜사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보혜사 돕는 자가 여러분과 함께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구만리 장천 멀리 계신 것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도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도 성령을 통해서 여러분과 같이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상하고 꿈꿔보고 나와 함께 죽었다고 꿈꿔 보고 믿고 입으로 말하면 같이 계신 성령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3. 치료와 나음을 받음
셋째로, 병든 사람이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짐으로 예수와 함께 옛 사람이 죽고 병도 다 청산되어 버리고 새사람으로 치료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병든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 치료받은 새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 믿으면 낫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여러분의 병을 짊어지고 채찍에 맞아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돌아가시므로 청산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의 병이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통해서 청산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 예수님을 걸머지면 우리의 병도 예수와 함께 청산되어 버린 것입니다. 병을 벗어버린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이기 때문에 여러분께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병을 짊어진 것을 생각하고 그 다음 꿈꿔 보고 그리스도가 내 죄와 질병을 담당한 것을 꿈꾸어 보고 그 다음 믿고 예수님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다고 입술로 고백하면 성령이 여러분 고백을 통해서 여러분 가운데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치료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백 안하면 안돼요. 여러분, 남이 듣고 내가 듣도록 입술로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성령의 능력으로 와 계셔도 입술로 아무말도 안하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말도 안할 때 병낫는 것 봤습니까? 예수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니까 나았지요. 네 침상을 걸머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니까 침상을 걸머지고 집으로 돌아갔지요.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니까 나왔지요. 예수님이 계셔도 말 안하면 안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바람같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데 말을 해야 해요.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행복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행복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나는 기쁩니다. 나는 즐겁습니다. 나는 평안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말씀한대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입술로 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러므로 여러분 먼저 생각하시고 상상해 보시고 꿈꿔 보시고 믿고 그 다음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좋은 날이다. 좋은 일이 생겨난다. 말하고 직장에 가십시오. 좋은 일이 일어난다. 오늘 나는 축복을 받았다. 오늘 나는 승리한다. 말함을 따라서 성령께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로 5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지불한 대가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 큰 대가를 지불한 것을 우리는 놓쳐 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나의 옛사람도 죽고 장사지낸 바 되고 이제 내가 산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입니다. 옛사람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사람을 살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한번 우리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천당 내 천당 예수 영생 내 영생
예수님 내 주여 내 중심에 오셔서 예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여러분,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그 다음 말하면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난 10월 22일 순복음가족신문에 우리 교회 종로중구대교구의 백원민 장로님의 간증이 실렸습니다.
장로님은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했는데 1972년 무렵 갑자기 몸이 야위기 시작하여 힘이 없어 병원에 진찰을 받으니까 신경성 위염이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더욱 몸이 무겁고 피곤해서 정밀 검사를 해보니까 만성간염에 비장이 붓고 신장이 나쁘다는 진단을 받고 직장을 사직하고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병이 낫지 않고 점점 심각하게 되어서 복수가 차서 배가 남산만큼 불러지고 손과 발이 두꺼비 손발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의원에도 가보고 여러 가지 방법을 해보았지만 별 차도가 없어서 절망하고 있을 때 고향친구가 “야~ 너 서울에 있으면서 여의도순복음교회 나가봤냐? 그곳에 나가면 산다.” 그러니까 천당가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너무 아프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우리 교회 나왔어요. 당시 교회 나와서 저녁설교를 듣고 마음에 위로를 받고 주님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보혈의 찬송을 테이프로써 틀어 보혈의 찬송만 늘 듣다가 갑자기 성령이 임하여서 마음에 죄책이 떠오르므로 뒹굴면서 2,3시간 회개하고 자복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마음이 평안해져서 밤에 잠을 자는데 꿈에 제가 와서 안수기도를 해주더랍니다. 그 이튿날 화장실에 가니까 가래떡 만한 그 무엇이 몸에서 나오고 난 다음에 몸이 굉장히 편안해지고 전과 같이 고통이 없어지고 아주 날라갈 듯 합니다. 이래서 병원에 가니까 의사들이 깜짝 놀라면서 “아직까지 살아 있어요?” “살아있는게 뭡니까? 이제 안아프다. 조사한번 해보라”고... 조사를 해보니까 의사들이 두 번째 놀랐어요. 병증세가 하나도 없어요. 다 사라졌어요. 그래서 장로님은 남선교회 전도실에서 봉사하며 일해서 장로까지 되었는데 요사이 교회 와서 늘 하는 말이 병고침의 기적을 간증하는 시간을 갖고 세월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면 예수와 함께 병든 옛 사람을 청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 병이 무슨 병이든간에 요사이 우리 한국 사람중에 제일 많이 죽는 병이 첫째 암이고, 둘째 고혈압이고... 암과 고혈압 우리 사람을 죽이는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그러나 그 암이 걸렸든 고혈압이 되었든 무슨 병이든지 옛사람을 예수님 십자가에서 벗어서 청산해 버려서 낡은 옷을 던져 버렸는데 뭐 옷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새옷으로 갈아 입는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생각하고 상상해 보고 꿈꿔 보고 믿고 그 다음 입술로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의 십자가에 함께 못박혀서 병든 옛사람은 청산해 버렸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는 나음을 입었다.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자매님 한분은 기도를 할줄 모르는데 뇌암이 걸렸어요.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의사들이 소위 수술해서 나을런지 안나을런지 50%, 50%다. 그러니까 이 자매님이 50%, 50% 그것 믿고 수술할 리가 있겠느냐. 그 돈 있으면 하나님께 헌금 드리고 나는 기도하겠다. 기도를 할줄 모르니까 주기도문을 만번을 외웠다고 그러던가? 계속 주기도문을 만번을 외우니까 그 다음 머리 아프던 것이 사라져. 그래서 병원에서 조사해 보니까 나아 버렸어요. 옛사람이 사라진 것을 청산한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나니... 여러분 실제적으로 여러분의 진실한 모습은 나음을 얻은 사람인 것입니다. 병든 자가 아닙니다. 무슨 병을 가지고 왔든지 그것은 옛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요,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인 것입니다. 번지수가 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병보고 말하십시오. 번지수가 틀렸다! 너하고 상관없다. 나는 새사람이 되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므로 예수님과 함께 병든 옛사람이 죽고 치료와 건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4. 축복과 부요를 받음
넷째로, 저주받고 무능한 사람이 예수님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저주받고 태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값은 사망이요, 죄의 값은 저주이기 때문에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저주받고 태어난 것입니다.
시편 51편 5절에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태어날 때부터 저주받은 우리는 이 저주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로 오시면 우리 저주를 청산해 버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같이 부자가 어디 있습니까? 순전히 가난하게 된 것은 여러분 때문에 가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이 가난했으니 나도 가난해야지.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저는 아주 가난하게도 살아보고 또 교회에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부자로도 지금 살아보고 두가지 삶을 다 살아보았는데 부자로 사는게 낫더라고... 왜냐하면 가난하게 살때는 남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 보고도 못도와줘요. 지금은 내가 도와줘요. 내가 있는대로 도와줘요. 왜, 내가 있으니까. 없는데 쥐꼬리도 없는데 뭘 도와줘요. 오늘 영국 BBC인터뷰 하는 사람도 그 질문을 하기에 내가 말했습니다. “우리 60년 전에 이 세상에서 제일 못사는 거지였다. 바로 60년 전에... 나는 그때 산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잘산다. 왜냐, 예수님 덕분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나는 제일 못살때도 살았고 지금 우리 한국이 잘살 때도 지금 살고 있는데 그때보다 지금이 좋다! 그러니까 우리처럼 좋아지려거든 예수를 잘 믿어라. 영국도 이제는 타락을 하고 있는데 도로 회개하고 돌아와서 예수를 잘 믿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제가 말을 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여러분은 자유를 얻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 가난의 종을 멥니까? 저주의 종을 맵니까? 예수님이 청산한 것을 다시 걸머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십시오. 말씀하십시오. 나는 예수 안에서 복받은 사람이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종의 멍에를 지지 않는다. 가난함과 저주를 짊어지지 않는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가난은 결코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난을 짊어지고 살아온 세대의 그림자를 돌아보면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남자가 32.4세, 여자는 35.1세로 평균 33.7세에 불과한 것입니다. 워낙 못먹어서 한국 사람의 평균 수명이 33살이에요. 2008년 세계보건기구(WHO)의 “세계보건통계 2008”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기대수명이 78.5세입니다. 여러분 평균 78.5세는 다 살아요. 일흔살 된사람 한번 손들어 봐 주십시오. 일흔살 된 사람... 전부 어린 애들만 모였어요. 아직 전부 어린 애들이야. 그러니 아직 여러분 살 날이 푸르청청 합니다. 한국인의 평균 기대수명이 78.5세로 남자는 75세, 여자는 평균 82세입니다. 여자가 독하기는 독해... 82세까지 살아요. 그러나 북한은 대포를 쏘고 야단법석을 하더니만 얼마나 못먹고 못사는지 평균 나이가 66세로 남자 64세, 여자 68세. 그 나라에게는 환갑잔치할 필요가 있어. 환갑을 산 사람이 힘들기 때문에... 일본은 평균 수명이 82.5세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오래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앤듀 매튜스라는 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종교적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은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라고 했지 우리에게 가난해지라 굶으라 말 안했다.” 그 말 맞지 않습니까? 성경에 가난한 사람 먹이고 헐벗은 사람 입히라고 했지 가난하라! 헐벗어라! 그렇게 말안한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저주받고 무능한 인간은 예수님을 통해 가난과 저주를 벗고 부요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된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5. 부활 영생의 새 사람을 입음
다섯째, 죽어 영혼이 지옥 갈 사람이 예수와 더불어 죽음의 옷을 벗어 버리고 부활의 영생의 새 옷으로 갈아 입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지옥 안가요.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천당 내 천당! 그러니 예수님과 내가 생각으로 하나되고 꿈으로 하나되고 믿음으로 하나되고 말로써 하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구주요, 나는 예수님 안에 예수님 내 안에 계신다. 예수님 영생이 여러분 것이고 예수님이 부활이 여러분 것인데 여러분 왜 지옥간다는 말인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2절로 19절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예수님 안에서 이 땅에만 살다가 끝장이라고 하면 얼마나 불쌍한 일인 것입니까?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0~22)
고린도후서 4장 10절로 11절 같이 읽어 보십시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라. 마음에 끌어안고 등에 걸머지고 머리에 이고 어떻게 그렇게 하냐. 생각을 통해서 너 생각속에 내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생각해라! 따라 말씀하세요. 내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예수와 함께 살아났다고 생각하고 꿈꾼다. 나는 예수와 함께 부활한 사람이다. 나는 이것을 믿는다. 그리고 말로 시인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다. 나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치료받았다. 나는 축복받았다. 나는 천국영생을 얻었다.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함께 죽고 장사지낸 바 되고 함께 부활해서 함께 천국에 올라갔으니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이지. 종교를 얻은 것 아닙니다. 내가 오늘 BBC방송 인터뷰 기자에게 말한 것이 그것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의식이 아니다. 율법이 아니다. 생명을 얻는 것이다. 생명을... 의로움을 얻고 거룩함을 얻고 치료의 생명을 얻고 축복의 생명을 얻고 천국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기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롬 10:10)
독일의 문호 괴테가 쓴「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는 문학가이자, 법학가이고, 철학자이자 신학자였습니다. 이처럼 많은 학식과 지식이 있음에도 그는 인생 문제에 부딪혀 해결하지 못하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희망을 잃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마침 부활의 종소리가 나면서 “네 문제로 내가 죽었고 너도 나와 함께 부활했다.” 하나님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네 문제로 내가 죽었다. 너 죄 때문에... 너 불결한 것 때문에.. 너 병 때문에... 너 가난 때문에... 너 저주 때문에... 너 지옥 때문에 내가 죽었다. 그래서 내가 청산하고 부활했으므로 내 부활을 통해서 너는 살아났다. 너의 죽음은 내가 책임지고 나의 부활은 너에게 선물로 주었다. 아~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지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파우스트는 그 말씀을 듣고 기쁨과 소망이 넘쳐나서 새 삶을 시작했다는 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삶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옛사람을 걸머지고 몸 찢고 피 흘려 우리의 옛 사람을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은 죽고 장사지낸 바 되고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나는 새사람이 되었다.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길인 것입니다. 우리가 새사람을 입고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이것을 자꾸 연습을 해야 돼요. 자꾸 생각하고 자꾸 꿈꾸고 자꾸 믿고 자꾸 말해야 돼요.
이번에 광저우에서 개최된 아시안게임에서 박태환 선수가 3관왕으로 출전한 7개 종목 모두에서 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박태환 선수 수영 때문에 내가 잠도 못잤어요. 응원한다고... 이로써 그는 지난해 로마 세계선수권대회에서의 부진과 슬럼프를 깨끗이 씻었는데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박태환 선수는 이번 아시안게임의 성과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끊임없는 반복과 연습으로 승리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폴란드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역시 한 연주회에서“당신은 정말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입니다.” 라고 하니까 고개를 흔들면서 “아니요~ 저는 천재가 아니라 단지 연습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했을 따름인 것입니다.” 그말 참 참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 설교 참 은혜롭게 합니다.” 그러면 제가 속으로 말합니다. “은혜를 듬뿍 담아서 설교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민을 하는지 아느냐?” 고민을 안하면 그런 설교가 안나오거든요. 오늘 제가 이 설교를 여러분께 할 때 날보고 10번 이상 이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구석에서 구석까지 다 아는거에요. 무엇이든지 집중을 하고 노력을 하면은 되는 것입니다. 운동이든 예술이든 탁월한 경지로 오르기 위해서는 반복해서 연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닌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으로 입으려면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자꾸 생각하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꿈꿔 보고 마음에 믿고 입술로 고백해야 됩니다. 나는 새사람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의로운 사람, 거룩한 사람, 치료받은 사람, 축복받은 사람, 영생복락을 얻은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 자꾸 반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연습이 여러분의 것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 론>
우리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으로 갈아입으려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몸에 믿음으로 짊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아침, 점심, 저녁 할 것 없이 걸머져야 됩니다. 가슴에 안고 등에 짊어지고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이라고 입에 중얼거리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믿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승리를 와서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상처는 여러분의 치료입니다. 그의 고뇌는 여러분의 평온이고 그의 신음은 여러분의 노래입니다. 그의 아픔은 여러분의 위로이고 그의 수치는 여러분의 영광입니다. 그의 죽음은 여러분의 생명이고 그의 고통은 여러분의 구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으로 갈아입으려면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우리 몸에 믿음으로 짊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따로 있고 나 따로 있지 않습니다. 예수와 나는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입니다. 예수 부활 내 부활입니다. 예수 승천 내 승천입니다. 예수 천국 내 천국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강하고, 지혜로운 사람
고전 4:10-13 / 이규왕목사
인간은 하나님과 달리 상대적인 존재로 누가 큰지 작은지, 누가 높은지 낮은지, 누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대해 알려면 어떤 기준을 설정하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비교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와 같이 비교를 당할 때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 상대방을 낮추는 교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어디를 가든지 자기를 높이는 교만한 사람은 많으나 상대방을 높이는 겸손한 사람은 별로 많지 못한 것이 세상은 물론 교회의 현실입니다.
그 결과 자신이 상대방보다 더 잘할 수 있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잘하고 있는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일에 혈안이 되어 상대방을 비방하고 중상하고 모함하는 일을 정치인이나 지성인이나 종교인을 막론하고 아무런 죄 의식조차 느끼지 않고 자행하기 때문에 갈수록 인물부재의 시대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인적 쇄신을 하겠다고 칼을 갈지만 새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며, 새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청문회를 통해 난도질을 하고 나면 역시 흠만 남게 되는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온 세상이 그렇게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은 그렇게 살지 말고 남을 높이고 남의 허물을 용서하고 남의 장점을 칭찬하고 남의 단점을 도와서 보완해 나간다면 우리 사회나 교계는 이보다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해 아래 특별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점에 본을 보이시기 위해 존귀하신 하나님이 겸손히 당신을 낮추시고 사람이 되신 것이며, 제자를 삼으시고 일꾼을 삼으실 때에도 그 대상자들이 한결 같이 무능력하고 허물과 약점이 많은 사람들이었다는 공통점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잘한다고 자기를 자랑하고 내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택하시고 부르시고 들어 쓰시는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교만하지 말고 겸손한 일꾼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의 교회는 어떤 사람이 필요하며 오늘 나는 교회 안 밖에서 남을 높이는 겸손한 사람인가? 아니면 남을 깎아내리는 교만한 사람인가?를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1. 고린도 교회의 형편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의 관계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앞에 이미 본을 보인 적이 있었습니다.
(고전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그것은 바울이 자기가 사도라고 자만하지 않고 아볼로의 수고를 인정하고 높이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의 씨를 뿌리면 아볼로는 그 뿌린 씨 위에다 물을 주면 그것을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울이 아무리 좋은 씨를 심었다고 할지라도 아볼로가 물을 주지 않았으면 헛수고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바울은 고린도 교우들에게 성경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본을 보이신 정신을 교회의 지도자는 물론 성도들이 본받아 남을 비판하지 말고 남의 약점을 담당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짓밟지 말고 붙들어 주어야 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롬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롬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살전 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는 그와는 정반대로 교만하기 그지없는 교회임을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전 4:6)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전 4: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고전 4: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여기서 ‘대적하여’라는 말은 상대방 위에 올라서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자기가 높아지기 위해 다른 사람을 높이지는 못 할망정 깎아내리는 것은 보통이고 짓밟고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고린도 교회가 교만하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것을 고치도록 가르치고 명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더욱 교만해졌다는 점입니다.
(고전 5: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여기서 ‘오히려’라는 말은 ‘더욱 더’라는 말의 비교급으로 청개구리 우화처럼 교훈하고 책망하면 고치는 것이 아니라 역행의 길을 가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고린도 교회가 바울이나 베드로나 아볼로 와 같은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을 좋아하고 본받으려고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지도자를 우상화하는 대신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지도자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비난하고 음해하는 교만한 모습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 지도자들 때문에 분열하거나 작당하지 말 것이며, 어느 특정 지도자를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이미 금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전 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게 하므로 자기가 추종하는 종교 지도자들로 말미암아 자기들도 신분상승의 효과를 기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마음에 거리낌이 없이 자기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지도자에 대해서는 음해에 가까운 비난이나 험담도 서슴없이 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도들이 좋은 지도자들을 멘토로 삼고 존경하고 따르고 본받으려는 순수한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다른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비난하고 깎아내리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인 교만한 마음인 것입니다.
2. 그리스도 때문에 강하고
바울 사도는 그와 같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통해서 역공을 하였습니다.
첫째는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라는 말로 이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라는 본질 문제라면,
둘째로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라는 말은 실제의 삶의 문제라면,
셋째로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라는 은사는 받은 자가 아니라 주신 이에게 영광을 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받은 자가 자기를 높이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노력이나 수고나 지혜로 말미암아 얻은 것처럼 자기를 자랑하는 교만한 마음을 갖고 왕 노릇하고 있었습니다.
(고전 4: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배부르며’ 라는 말은 동분사 완료 수동형으로 단지 일용할 양식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만족시키다’는 뜻으로 영적인 자만을 풍자한 말입니다.
이는 고린도 교인들은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보다 잘 먹고 잘살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그로 말미암아 고린도교회는 자만에 빠져서 스스로 왕이 되었고 더 나아가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왕이 되기를 원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왜 왕처럼 살면 안 되는지 그 이유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정반대의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은 다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부요하고를 막론하고 심령의 상태가 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부요해졌다면 그로 말미암아 내가 왕이 되어서는 안되고 나를 풍요롭게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왕이 되심을 자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 유명한 존 맥아더 목사님은 만일 우리에게 좋은 부모가 계시다면, 우리가 좋은 나라에서 태어나 산다면, 좋은 재능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게 주신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을 위해 사용하도록 잠시 우리에게 맡기신 주님의 차용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망각하고 교만하게 되거나 하나님 대신 자신을 자랑하고 왕이 되려고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내가 강한 자가 아니라 정반대로 나약하고 어리석은 자인 것입니다.
(고전 4: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우리가 살고 있는 땅위에 수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요한 계시록에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일곱 종류의 교회들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는 그 일곱 교회 중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와도 같은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 때문에 강해지고 부요해졌을 때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을 읽노라면 때로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 역설적인 표현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와는 정반대로 남을 끌어내리고 짓밟고 그 위에 올라서야만 내가 남보다 높아질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과연 성경 말씀대로 나를 낮추는 것은 자살 행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예수님이 앞서가신 십자가의 길이요, 승리의 길입니다. 본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당신을 낮추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을 뿐 아니라 백성들이 왕을 삼으려고 하는 것을 거절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죽이는 겸손한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낮추신 일입니다.
(고전 4: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여기서 ‘구경거리’라는 말은 극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행 19:29)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고 한 것처럼 핍박자들은 바울 사도를 구경꺼리고 만들었습니다. 그 극장의 수용 능력은 대략 2만5천명을 수용할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만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바울처럼 구경거리가 되어 원형극장에서 맹수의 먹이가 되거나 아니면 검투사의 칼에 찔려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즐겼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만 믿지 않았으면 과거 자기가 배운 기술이나 사회적인 지위나 모은 재산을 가지고 왕처럼 얼마든지 편히 잘 먹고 잘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것 때문에 그같이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의 일행은 그것을 거절하거나 도망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원하여 그 길을 가는 것을 기쁨으로 자원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자, 약한 자, 비천한자, 비방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고린도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게, 존귀하게 왕처럼 사는 길을 택하고 남을 비방하고 짓밞고 교만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고전 4: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물론 그 때문에 외형적으로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정처 없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자구책으로 손으로 천막을 만들어 팔아 자비량 선교를 하며 온갖 모욕을 당해야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바울의 일행을 볼 때 존귀하게 여김을 받지는 못할 지언정 사람 대접이라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먹다 남은 음식물 찌꺼기처럼 비천하게 대우하였습니다.
(고전 4: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그렇다면 과연 고린도 교인들과 전도자 바울의 일행을 비교할 때 누가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이고, 누가 미련한 삶을 사는 것일까요? 예수를 믿고 누가 축복을 받은 사람이고 누가 저주를 받은 사람처럼 보일까요?
물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더 존귀하고 축복받은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남을 깎아내리는 교만한 삶을 살았으나 바울의 일행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남을 축복하고 권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고전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고전 4: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여기서 ‘축복하고’라는 말은 남을 높이고 칭찬한다는 뜻으로 항상 그렇게 살았음을 뜻하는 동분사 현재형입니다. ‘권면하니’라는 말은 초청하다 격려하다 위로하다는 뜻으로 보혜사라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과연 고린도교회의 성도들과 전도자 바울의 일행을 하나님 앞에서 비교할 때 누가 진정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며 누가 행복한 사람이며 누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됩니까?
정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아니라 전도자 바울의 일행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이유는 다른 것은 몰라도 마음의 상태가 하늘과 땅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내가 아직 남을 도울 형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믿음이요 마음인 것입니다.
(고후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결 론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같이 왕처럼 사는 것을 축복이요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삶이고 또 하나는 바울처럼 자기를 부인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를 자청하는 사람들을 반기시지 않고 제일먼저 그들에게 말씀하신 제자의 도가 바로 자기 부인이었습니다.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논할 수 있는데 하나는 다른 사람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일이고, 또 하나는 어려운 현실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과거 어느 때보다 사람들이 총체적인 불안과 위기의식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 원망불평을 일삼고 남을 짓밟고 내가 높아지려고 하고 내가 살려고 하는 이기주의의 세파에 우리의 신앙이 다 휩쓸려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꼼꼼히 읽노라면 이스라엘이 분명히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비롯해서 사십년의 광야 생활을 보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왜 사람이 되시되 비천한 나라의 백성들과 같은 모습으로 삼십 삼년이라는 짤막한 삶을 사시는 동안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으셨을까요?
너 나를 막론하고 다 편안한 것을 좋아하지만 우리의 육체를 돌아볼 때 맛있고 영양가 높은 음식만을 즐기고 노동은 고사하고 운동조차 하지 않고 빈둥거리게 되면 반드시 비만과 더불어 성인병이 찾아오고야 마는 것이 상식입니다.
타락한 인생의 영혼은 더 말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우리의 영혼에 자장가를 불러 기도하는 운동 전도하는 운동 성경 공부 운동 제자훈련과 같이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도록 만듭니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거나 희생을 원치 않고 항상 건강하고 부요하고 머리가 되는 것을 원하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부담스러운 신앙생활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강조하고 교회와 선교와 구제를 위해 헌금을 강조하는 교회를 수준 낮은 교회로 폄하하기도 하였습니다.
우선 교회에 가면 마음이 편안하고 신바람이 나는 축제적인 예배가 가장 이상적인 예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참석하고 나면 스트레스가 날라 가고 마음이 즐겁고 평안해야 한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다만 주일에 예배 한 시간 참석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돈과 시간을 오로지 육신의 안일만을 위해 사용합니다. 육체는 물론 영적으로도 병들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결코 지혜로운 삶이 아닙니다.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내가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않고 저절로 은혜로 받는 구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넘어 더 좋은 영생의 나라로 가기 위한 중간 여정이 우리의 삶이라면 그 길은 성화라는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요 훈련과 연단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길을 통해서 영적인 불순물을 제거하고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정금 같은 신앙으로 우리를 훈련하고 연단하여 주 예수 안에서 보다 더 강하고 보다 더 지혜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 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욥 7: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오리라"
그러므로 나를 높이기 위해 남을 깎아내리는 삶을 살지 말고, 다소 현실이 어려워도 낙심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거기에 담겨진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찾아 믿음으로 인내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고난 중에 오히려 자신의 내면에 영적인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도 높은 신앙으로 무장하여 주안에서 강하게 지혜로운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적합한 방법을 선택하라
고전 12:4-11 / 정근두목사(울산교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인 여러분, 그리고 하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이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이웃 여러분, 우리 울산교회가 실시하는 가장 큰 행사, 공동체전도축제가 이제 한 주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구역별로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주간의 마무리가 아주 중요합니다. 특히 내일부터 한 주간은 “마치 이전에 전혀 기도하지 않았던 것처럼” 기도에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는 벌써 모든 것을 단념하고 앉아 계신 분은 없습니까? 축제를 한 주간 남겨두고, 전도는 아무래도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어울리지, 나는 적격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습니까? 개인 전도를 단념하고, 시간과 정력을 다른 데 투자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물론 더 이상 복음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복음은 중요하고 진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이 아주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을 향한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도 인정합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아니라고 믿을 뿐입니다. 더 이상 자신의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은 왜 이런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복음을 전하는 방법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 초대장과 복음을 소개하는 전도지를 들고 거리에서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관심 없다는 표정을 분명하게 짓습니다. 차라리 급전(急錢)을 쓸 수 있다는 전단지를 나누어주는 사람에게는 무표정하다가도 전도지인 것을 알면 인상을 씁니다.
그래서 아파트 문을 두드려 봅니다. 열어주는 집이 거의 없습니다. 일부러 말을 분명하게 하지 않아서 무슨 말인지 몰라서 문을 열도록 하는 분도 있고, 아니면 아예 “물 한잔 마십시다. 화장실 좀 씁시다.” 이렇게 부탁을 해서 문을 열도록 한 다음, 일단 문만 열리면 한 발을 현관에 들여놓아 못 닫도록 하고 몇 마디를 해보지만 그것도 쉽지 않은 방법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가 내린 결론은 전도란 자신이 갖지 못한 어떤 특별한 성격과 기질을 가진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전도의 가장 큰 장애물의 하나는 이와 같은 오해의 문제입니다.
먼저 오해는 복음을 들어야 할 구도자 측에서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서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 교인들에 대해서 그 나름대로의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정확한 하나님의 모습과 교회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는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풍성히 주시고자 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면 그 분과 교제 하는 것을 세상에서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면 누가 하나님과 사귀는 것을 마다하겠습니까? 남을 보살피고 섬기는 일에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신앙인을 보고 멸시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오해는 복음을 전해야 할 신자들 측에서도 있습니다. 사실 전도를 열심히 하는 교회일수록 전도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언젠가 승산 없는 전쟁에 소집될 것을 두려워하면서, 전도하면 부담이 되고, 못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죄의식을 갖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공동체 전도 축제를 앞두고 지금껏 고생하셨습니다. 교회가 제시하는 매뉴얼에 따라서 참여하신 분들도 고생하셨고, 손발로 움직이지 못한 분들이라도 마음고생이 많았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주변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전해주고 싶은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 여러분에게 맞지 않는 전도방법을 받아들이느라 열정이 식어버린 분들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교회의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복음을 받아야 될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신자들을 먼저 낙담시키고 탈진하게 만드는 것이 교회가 개발한 방식인지, 아니면 저쪽 적군들이 개발한 방식인지 가끔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좌우로 한번 둘러보십시오. 여러분하고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습니까? 기질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자라난 배경도 다 틀립니다. 그리고 지금 처해있는 현장도 다 다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분의 특별한 목적에 맞게 만드셨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나름대로 개성을 살려서 그 분이 주신 임무를 세상에서 완수토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그의 진리를 전하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다양하게 만드셨기에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우리에게 맞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기를 바라십니다. 축제를 꼭 한 주간 앞둔 오늘 여러분들은 여러분에게 어울리는 방법이 무언지를 생각해 봅시다.
전도에는 하나의 바른 길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이 놀라운 사역에 동참하실 수 있습니다. 이웃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1절 표준 새번역과 개역개정판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는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십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그 뜻대로” 누구의 뜻대로 입니까? 성령의 뜻대로, 그의 역사하심을 더욱 신뢰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설계하신 그대로 움직이십시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특별한 능력들을 주셨습니다. 지금 말씀드릴 몇 가지의 유형 가운데 여러분에게 어울리는 전도유형은 어느 것일까요?
첫째는 베드로와 같은 1) 정면 대결형 접근법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무슨 일을 하든지 주저하지 않고 총력을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주님이 물어보셨을 때 서슴치 않고 대답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대답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순간적으로 자기가 아는 대로 대답하고 그런 대답을 함으로써 살면서 어떤 의미가 뒤따라야 할 것인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행동부터 하면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고백은 백점짜리 고백을 하고나서 주님께서 고난의 길을 걸으시고 사람들에게서 버림받고 죽임을 당할 거라는 이야기를 하니까 그 자리에서 주님의 메시야 사역을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옵니다.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설사 물 위를 걷는 일이라도 주저하지 뛰어내리는 사람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해치려고 하면 그들의 목이라도 베어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그가 옳다는 확신일 뿐입니다. 그를 막을 자가 없습니다. 담대하게 돌진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절에 그가 대변인으로 선택된 것은 당연한 인선입니다.
몇 주 전에 예수님을 못 박았던 적대적인 도시 한 가운데서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전할 사람으로 하나님은 베드로를 선택하셨습니다. 수 천 명의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과 그 죄는 용서 받지 않고는 답이 없다는 것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베드로 그가 적격자였습니다.
이런 접근법을 들으면 가슴이 뛰고 나도 그렇게 해야지 그런 생각이 듭니까? 아니면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해’하는 마음이 듭니까? 자기에게 어울리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내가 누구에게 진리를 바로 증거 하겠습니까? 하나님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기회만 주시면 저는 한다면 합니다.”
그러나 도전적이면서 좀 더 조용한 방법도 있습니다. 2) 지성적인 접근법입니다. 바울 역시 진리를 들고 언제든 사람들과 맞대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의 접근 방법의 우수성은 복음의 메시지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제시하는데 있었습니다. 그가 쓴 어떤 서신 서를 읽어보시면 여러분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의 대표작 로마서를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만이 답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설득력 있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의 논리적이고 조직적인 사고는 놀라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는 대단한 학식을 갖춘 사람입니다.
당대 유대나라에서 제일 알려진 스승 가운데 한사람에게서 사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게다가 타고난 논객처럼 보입니다. 특별히 글로 썼을 때는 더 무게가 있는, 힘이 실리는 그런 사람입니다. 누구와도 이론적인 대결을 해서 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테네에 있는 철학자들에게 보내실 이보다 더 적절한 사람을 생각해 낼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17장을 보십시오. 아테네 시민들은 우상을 많이 섬겼습니다. 그런데 한 곳에 가보니 그 비석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 엄청 난 이름의 신들을 다 섬겼는데 그렇게 섬기면서도 아테네 사람들은 걱정이 되었던 것 같아요. 혹시 열심히 섬겼는데 알지 못해서 못 섬긴 신이 있을까 싶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비석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비문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알게 하노라 하면서 사시고 참되신 유일한 하나님에 대해서, 그분이 보내신 구원자에 대해서 그는 아테네 사람에게 설교했습니다. 그것을 기해 많은 사람들이 감동되어 주께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마 아테네의 청중들에게 베드로를 보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자기 논지를 결정적으로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무조건 믿고 받아들여야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테네 사람들을 코웃음 치게 했습니다. “우선 행동부터 해라 그러면 복 받는다”는 말이 먹혀들 사람들이 따로 있지 아테네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아테네의 청중들은 도대체 왜 믿어야만 하는지부터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구도자들은 복음 선포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설명을 기다립니다. 근거가 있어야 움직이고, 증거가 있어야 발걸음을 떼어놓는 사람들이 의외로 우리 가운데서도 있습니다.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지 논리정연하게 설명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무얼 믿습니까?’라고 논리적으로 설득해야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 번째로 3) 간증형 접근법도 있습니다. 어떤 소경의 경우죠. 요한복음 9장에는 예수님이 그 눈을 뜨게 한 소경이 나옵니다. 이 소경은 베드로나 바울만큼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인생에 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확신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나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가오시더니 동전 한 푼 던져줄 줄 알았는데 동전은 던져주지 않고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구걸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 새 삶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사건 때문에 이스라엘의 종교계가 발칵 뒤집혀진 것입니다. 갈릴리 나사렛 사람인 그가 이런 일을 할 수는 없다는 거죠. 그래서 이 소경의 부모에게 바리새인들이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당신, 대답 한번 해보시오. 정말로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이 당신 아들의 눈을 뜨게 했소?”
아버지는 입장이 난처하여 “아 내 아들이 장성했으니까 직접 물어보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잘못 말했다가는 유대인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게 되니까 아들에게 공을 넘깁니다. 그 소경은 신학적 논쟁은 벌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죄인인지 아닌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 9:25).
자기의 경험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은 보는 그것입니다.” 남과 논쟁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에게는 무리입니다. 다만 자기 체험에 근거하고 유대인으로 신앙적 상식에 기초한 논지를 펼칩니다.
“아니 그런데 당신들 참 이상한 사람들이군요.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했는데 왜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시오. 하나님이 죄인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 봤소? 창세기 이후에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해 줬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데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 오지 아니하였으면 내가 눈뜨는 일이 있을 수 있소?”
그렇게 다그치니 바리새인들은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네가 완전 죄 중에 소경으로 태어나서 누구를 지금 가르치려 하느냐?” 욕하면서 그냥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이런 사건들을 준비하시고 이런 사람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도 하나님이 여러분의 생애에 어떤 일을 하실지 들어야할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만 기억하십시오. 효과적인 간증은 꼭 극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하신 일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여러분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어떻게 역사했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이 축제를 위해서 동참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드라마틱한 죄를 짓지 않았어도 오히려 우리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 동질감이 있는 그들도 내가 변한 것처럼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누구에게 다만 얼마만큼 상세하게 이야기를 해줘야 좋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길가다가 말고 중고등학생 보이니까 “너 중학교 다니니? 고등학교 다니니?” 우리 집사님 한 분이 그렇게 물으시데요. 저는 지나오면서 슬쩍 보면서, 보다 나은 방법이 없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학생은 길가에 서서 집사님의 이야기를 들어줄 기분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열심을 다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아이 입장에서는 황당한 아줌마 다보겠네 이러지 않겠어요? 뭔가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서 접근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가 분명히 있습니다.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그것이 문제지요.
어떤 사람들은 4) 대인관계형 방법도 있습니다. 마태는 정면 대결이나 지적인 도전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자기 삶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 잔치하는데 맛있는 거 먹으러 오라” 그 이야기만 했습니다. 본래 우리 팀미팅은 그렇게 하는 것 아닙니까? 정면대결이나 지적인 도전이나 개인적인 간증을 가지고 나서는 것은 자기에게 너무 부담스러웠을지 모릅니다. 마태는 지금껏 맺어온 우정을 더욱 발전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친구들을 참으로 염려해서 하는 일이었고 그들에게 감동을 주어서 그리스도의 요구를 신중히 받아드릴 기회를 주고자 한 일입니다. 관계를 맺고 잘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정이 주는 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친구들의 삶에 가장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자기 친구가 권하면 교회를 가겠다고 한 통계가 있습니다. 친구는 소중합니다. 우정에 기초해서 이야기를 하면, 들을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을 데리고 와서 밥을 먹으며 이야기 하는 것은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듭니까? 그렇게 한번 시도해 보십시오.
손을 내밀어 잡아 주고 싶은 친구와 커피를 마시면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그러나 3년, 5년, 10년 동안 만나지 않다가 전화해서 불러놓고 커피만 끓고 나면, 여러분의 이야기를 하겠다고 부글부글 속이 끓어서는 안 됩니다. 첫날은 아무 이야기를 하지 말고 친구가 어떻게 살았는지 한번 물어보고 들어주십시오.
사람들마다 다 말하고 싶어하는 사연들이 많기 때문에 일단 여러분이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그리고 ‘오늘 잘 만났다 다음에 또 보자.’ 그러고 나서 첫날은 헤어져도 괜찮습니다. 무엇을 말해야 될지 성급하게 서두르지 마십시오. 인내심 있게 다른 사람의 관심사를 다 들어주십시오. 내일도 해가 뜰 것이니까요. 축제는 틀림없이 내년에도 합니다.
어떤 분은 동네에서 가장 완고한 대장 할아버지를 만나서 계속 들어줄 만큼 들어주고 “이제 다음에는 내가 이야기할 차례입니다.”라고 하면 그동안에 들어준 게 있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대인 관계형 복음전도는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고 식사를 함께 하고 대화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를 즐기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방법입니다. 꼭 바깥에 있는 친구들만 아니라 아직 복음을 모르는 식구들이나 친척들에게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다가갈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또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5) 초대형 접근법입니다. “가보자, 우리 한번 가보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죠? 우리 하나님은 놀랍고도 흥미진진한 방법으로 평범하면서도 예사로운 사람들을 즐겨 사용하십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전도자가 되기에는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에, 여자이죠, 게다가 도덕적인 행실이 드러내 놓을 만한 것이 없는 사람 아닙니까? 그 사람 이야기를 누가 들으려고 그러겠어요? “너나 잘해라” 동네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고 싶은 대상 아닙니까? 유대인 남자 예수와 대화를 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점심을 준비하러 간 사이에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접근해서 대화를 하였습니다. 시간이 얼마가지 않아서 그 남자가 평범한 유대계 선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예언자적 통찰력과 권위 있는 답변은 메시야라는 것을 믿기에 충분했습니다.
믿어지니까 그 여자가 어떻게 했습니까? 물동이를 그냥 내버려 두고 동네로 쫓아 들어간 겁니다. 가서 “동네 사람 여러분! 마을 밖 우물곁에 놀라운 분이 한분 계십니다. 우리가 믿고 기다리던 메시야가 왔습니다!”고 소리쳤습니다. 내 과거에 대해서 다 말해줬다고. 화려한 과거라곤 하나도 없는데 그렇게 선동해가지고 동네사람들 다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게 인연이 되어서 예수님이 그 동네에서 이틀이나 묵었어요. 그러고는 이틀 후에 동네사람들이 그럽니다. 이제는 우리가 네 말을 듣고 믿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그가 세상의 구주신 것을 앎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선동가들도 가끔 필요하거든요.
친구들을 전략적으로 교회행사에 모시고 오십시오. 봉사활동도 좋고 친선체육대회도 좋습니다. 어떤 종류의 행사가 그 친구에게 어울릴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교회가 이런 걸 하니까 무조건 사람들을 데리고 가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번 프로그램에는 누가 초대하기 가장 적합할 것인지, 이 멜로디에는 누가 춤을 잘 출 것인지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예배가 어울릴 사람은 예배로 바로 모시고 오는 것이고, 음악회, 영화관람, 연극공연, 환자들 섬기는 일 등 상대가 관심 있게 생각하는 방향으로 연결하면 되는 것입니다. 부디 그들의 시각과 관심에서 먼저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우물가의 여인처럼 사람들을 동원하는데 은사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초대형 전도방법은 수고한 자신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나 길 잃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입니다. 다음 주에 모시고 오는 것이 좋을지 그 다음 주가 좋을지 복음진리가 필요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십시오.
마지막으로 6) 봉사형 접근법이 있습니다. 도르가, 다비다의 경우입니다. 사도행전 9장 36절에서,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은” 여인으로 소개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의 봉사를 잘 했던 사람입니다. 특별히 같은 동네에 어려운 과부들을 위해서 옷을 만들어 입힌 일로서 알려져 있는 여인입니다.
봉사형 접근법에는 도르가를 능가할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그녀의 행위만 보아도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병들어 죽자 사람들은 숨 떨어진 그녀를 포기하지 않고 베드로를 통해서 다시 살려내었습니다.
이 방법이 어울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몸으로 섬기는 것, 그것이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잘 할 수 있는 특별한 은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천성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어려운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섬기는 기쁨을 맛보도록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일일이 다 인정해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섬기는 그 자체가 기쁨인 사람들이 성도들 중에서는 반드시 있습니다.
다른 모든 방법보다 섬기는 방법은 상대방에게 부담감을 덜 주는 방법입니다. 다만 열매를 거두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복음 전도법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봉사형 전도자들은 아무도 다가설 수 없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으로 다가가는 전도자들을 막을 장애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어떤 완고한 사람도 이 사랑 앞에는 녹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손이 모자랄 때 도와주고 아플 때에 음식을 해서 갖다 주고, 이런 일로서 다가서는 것입니다. 올데갈데없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머물도록 해주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 맺겠습니다. 여러분은 바울과 같은 지식이나 베드로 같은 용기나 사마리아 여인 같은 동원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음식을 만들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놀거나 자동차를 고치는 데는 선수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을 통해서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는데 사용하기를 바라십니다.
저는 학교의 교사가 전도하기 위해서 다른 학교 교문 앞에 가서 전도지 돌릴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반 아이들 있잖아요. 의사 선생들이 바쁜 의사 생활 하면서 따로 전도하겠다고 주일날 시간 내는 것 보다는 자기한테 날마다 찾아오는 오십 명, 백 명 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이런 다양한 접근 방법가운데서 여러분 자신에게 어울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어쩌면 여러분들을 위해서는 제 7의, 제 8의 방법이 필요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고 싶어 하십니다.
여러분을 지금껏 여러분이 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지금 여러분의 환경 속에 세워 주신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고 한번 순종해 보십시오. 그동안 마음에 품었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제 다가서야 할 때입니다.
다음 주일부터 여러분의 소중한 분들을 위한 잔치가 열립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수고가 이 축제동안에 아름답게 열매를 맺기를 기도하며 행동하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스승 존경 제자 사랑
고전 4:14-21 / 최성규목사
2010년 5월 15일은 29번째 맞는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스승의 날에 스승의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아서 꽃조차 받지 않으려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교육현실을 보여주는 아픔입니다. 교육이 바로 서고,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교육이 바로 서려면 교육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교육(敎育)의 교(敎)자는 효도 효(孝)자에 칠 복(扑)자가 더해진 것입니다. 효를 때려서라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교육은 영어로 ‘에듀케이션’(education)입니다. 이 말의 라틴어 어원을 살펴보면 “끄집어내다”라는 뜻입니다. 교육이란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끄집어내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교육은 주입이 아닙니다. 사람들 안에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가슴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머리를 채우는 것을 교육으로 생각합니다. 그 결과, 학력이 좋으면 교육을 잘 받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무엇을 가르치느냐는 교육에서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교육의 본질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 선조들이 참된 교육자였습니다. 우리의 부모세대들은 먹고 사느라 힘드셨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지식교육’은 못 시켜도 ‘사람교육’은 시키셨습니다. 지금의 교육은 달라져야 합니다. 보통 교육을 바꾸고자 하면 교육 내용, 즉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만 고민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가르치는가”입니다. 배운 것은 잊어도 가르친 분은 기억합니다. 우리 인생을 결정짓는 것은 교육 내용이 아니라, 가슴 깊이 만난 스승입니다. 스승에 따라 교육 내용도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누가 교육계를 책임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성경교육을 금지시킨 이후 미국은 도덕적으로 타락했습니다. 바른 가치관이 무너졌습니다. 국가 전체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교육이 무너졌습니다. 하나의 정답만을 요구하는 주입식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지배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이 바뀌려면 무엇보다 교육이 바뀌어야 합니다. 교육을 바꾼다는 것은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교단에 노동자가 아니라, 스승이 서야 합니다. 학교에 학생이 아니라, 제자가 있어야 합니다. 교육 내용이 지식이기 이전에 사람됨이어야 합니다. 교육이 바뀌면 나라가 바뀝니다. 바른 교육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봄으로, 우리 자녀에게 밝은 내일을 열어줍시다.
첫째, 좋은 스승
성공과 행복을 동시에 누리는 사람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빨리 인생의 목적을 찾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입니다. 배운 것 없는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자 세계 선교의 꿈을 가졌습니다. 장애자인 헬렌켈러가 설리번 선생을 만나자 삶의 의지가 생겼습니다. 부족한 저도 조용기 목사님을 스승으로 만나자, 성령운동과 교회부흥의 소명이 생겼습니다. 좋은 스승과의 만남은 멋진 미래와의 만남입니다. 절망의 환경 속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좋은 스승일까요? 스스로를 스승으로 아는 분입니다. 자신을 선생으로 아느냐, 스승으로 아느냐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선생은 ‘어떤 일에 경험이 많거나 아는 것이 많은 사람’, ‘남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나와 있습니다. 반면에, 스승은 ‘자기를 가르쳐주는 사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스승은 ‘남’이라는 다수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가르쳐주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스승은 제자를 일대일의 관계로 봅니다. 그러므로 교단에 서는 모든 분들이 스스로를 스승으로 자각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자녀를 제자로 봅니다. 먼저 우리가 “스승님” 하고 부릅시다. 학부모들이 먼저 “스승님”으로 존경합시다. 교회학교 교사들도 “스승님”으로 존경합시다.
좋은 스승은 바른 삶을 전수합니다. 시골의 한 스승이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잘못 놓인 돌 때문에 물에 빠졌습니다. 옷 갈아입기 위해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그 돌은 바로 놓고 왔느냐?” 아니라고 대답하자 어머니는 “그래서 무슨 선생이냐, 빨리 돌부터 바로 놓고 오너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날 이후, 스승은 달라졌습니다. 지식이 아니라, 바른 삶을 가르치는 데 힘썼습니다. 좋은 스승은 삶으로 가르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아비의 심정으로 가르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4:15-16). 이는 스승 되신 예수님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3년 반을 동거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몸소 행하심으로 모델이 되어주시고, 멘토가 되어 주셨습니다(요 13:14-15). 우리도 본을 보이는 좋은 스승이 됩시다. 좋은 스승은 동시에 좋은 제자입니다. 제자 되고 제자 삼는 사람이 좋은 스승입니다. 히브리어 ‘라마드’라는 말에는 ‘가르치다’와 ‘배우다’라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성경적인 정신은 가르침과 배움이 하나입니다. 잘 가르치려면 잘 배워야 합니다. 잘 배우는 사람들이 잘 가르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교육현실은 반대입니다. 모 일간지에 “임용 땐 최고 실력, 교사되면 열정, 노력 뚝”이라는 기사가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스승은 제자들보다 더 공부해야 합니다. 말만 거창한 스승이 아니라, 능력 있는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고전 4:20). 스승의 열심과 배움, 그 자체가 제자사랑입니다.
둘째, 좋은 제자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고 말합니다. 누구 책임인지 묻기 이전에 누가 피해를 보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 피해는 제자들, 바로 우리 자녀가 받습니다. 교단에 무력한 교사, 눈치나 보는 교사, 아이들의 잘못에 눈 감는 교사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이오. 교실이 아니라 난장판이 될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도 교권이 바로 서야 합니다. 그 시작은 스승존경입니다. 스승을 존경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스승을 존경하는 제자가 좋은 제자입니다. ‘존경하는 스승이 있는지’ 자녀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학교 스승만이 스승이 아닙니다. 세상 살아가는 데에 있어 가르침을 주는 모두가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승으로 알고 존경하는가’입니다. 존경심은 꿈이요, 목표입니다. 존경하는 스승이 있으면 그 분을 알아가려고 합니다. 닮아가려고 하고, 기억하려고 합니다. 존경하는 스승은 제자의 가슴에 있는 불과 같습니다. 그 불이 있는 사람은 고난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꿈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됩니다.
성공자가 되기 원하십니까? 세상을 바꾸는 자,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가장 먼저 할 일은 스승을 모시는 것입니다. 스승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존경하는 스승이 있냐?”는 질문에 “있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성공자입니다. 스승을 존경할 때, 최소한 스승만큼 자라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존경하는 스승을 뛰어넘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스승을 존경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섬겼고(민 11:28), 엘리사는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습니다(왕상 19:21). 열두 제자는 예수님을 섬겼고, 누가와 디모데는 바울을, 마가는 베드로를 섬겼습니다. 내 생각, 내 고집, 내 판단을 다 버리고, 스승존경을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스승존경이 스승의 능력을 물려받는 지름길입니다. 제자 엘리사는 갑절의 능력을 얻었습니다(왕하 2:9-10). 자녀가 잘되기를 원하면 스승을 존경하는 좋은 제자로 키웁시다. 우리 인생이 잘되기 원하면 겸손하게 스승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라”고 했던 옛 가르침을 되새깁시다. 이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3:16-17).
아무리 부족해 보여도 스승은 스승입니다. 아무리 못나 보여도 제자는 제자입니다. 스승을 존경하고, 제자를 사랑합시다. 배움이 무너진 사회는 야만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 받은 자와 교육 받지 못한 자의 차이는 산 자와 죽은 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스승을 존경하고 제자를 사랑할 때, 교육이 살아납니다. 교육이 살아날 때, 사람다운 삶을 삽니다. 나라가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