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미처 연락을 못 했죠. 꽃집을 개업하느라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았어요. 물론 계약이나 대출, 융자, 그런 복잡한 일은 헬렌이 도와줬지만 꽃집 청소도 하고 수족관도 넣고 또 어제는 온갖 나무와 꽃이 끝이 없게 들어와서 꼬박 밤을 새웠네요. 고운 흙이 군데군데 묻은 고동색 화분을 호스로 마치 아이를 씻기는 양 정성스레 씻겼네요. 화원 아저씨가 조언해주신대로 행운목과 홍콩야자와 마지란타는 꽃집 정문에서 오른켠에 두었습니다. 고무나무와 몬스테라는 잎 모양이나 가지가 비슷해서 아직 헷갈립니다만, 그래도 몇 주 전부터 열심히 공부했었으니까, 앞으로 잘 해나갈 거에요. 그리고 난은 특별히 잘 보이는 쪽에 구분하여 두었습니다. 왜냐구요? 헬렌,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입가가 민망할 정도로 웃고있진 않겠죠? 헬렌이 예상한 대로, 동양난은 빛이 가장 잘 드는 곳에 두었어요. 서양난보다 동양난을 더 좋아하는 당신을 위해서. 사지 않아도 좋으니까 부담갖지 말고 꼭 오기에요. 많이 있는 건 아니지만 사계란, 옥화. 그리고 헬렌이 처음 보는 한란도 있어요. 한란은 잎이 다른 난보다 훨씬 매끈하고 선이 날카롭지 않고 곱습니다. 노란 꽃이 자라는데, 그렇게 청초할 수가 없어요. 헬렌도 좋아할 거에요.
아무튼 어떻게 해서 정리를 대충 끝내고 뻐근한 허리를 켜니 해가 중천에 떠 있더군요. 신기하게도 졸리지 않았습니다. 순간 불면이 또 재발한 건가, 불안한 생각을 했지만 꽃집을 가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라서일 겁니다. 기분이 뿌듯해져서, 손님이 된 기분으로 정문에 서서 꽃집 전체를 바라보자 나도 모르게 경탄이 나왔습니다. 레몬색 햇빛이 창문으로 투과하여 물기에 젖은 나무와 꽃들을 하나하나 보듬어갑니다. 깨끗한 바닥에 통통한 장미 꽃봉오리가 비치고 튜울립도 비치구요. 하얀 카라가 고고히 아침을 쬐고 있습니다. 마치 발레 무용수처럼 보였어요. 내가 꽃집이 아니라, 보석당을 차린 착각에 빠졌죠. 상상해보세요, 헬렌. 말도 못하고 이변없이 자라다 이내 이변없이 죽는 꽃이 사람보다 더 감사하게 이 아침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이상하지 않나요.
여기서 보고 드리겠습니다아. 퇴원한 후로 헬렌이 준 약, 꼬박꼬박 먹고 있습니다. 불면증도 예전보다 심하지 않고 이유없이 우울해하지 않습니다. 두통은 아침에 일어날 때 한번, 오래 걸으면 한번, 그리고 가끔 어쩌다 한번, 정도입니다. 그리고 헬렌이 제일 걱정하는 것. 괴물에게 쫓기는 악몽 말이에요. 항상 그 악몽을 꾸면 나 발작을 일으켰다고. 실은 퇴원을 한 후에 약을 꼬박꼬박 먹어도 그것 만큼은 나아지지 않았어요. 어쩌면 헬렌의 지금 표정은 몹시 상해있겠죠. 하지만 염려말아요. 내가 갑자기 이렇게 편지를 쓴 건 이 얘기를 꼭 해주고 싶었거든요.
실은 요 며칠동안 어떤 남자가 날 쫓아다녀요. 아니 그렇게 느낄 뿐일까요. 어디를 다녀도 꼭 그 남자를 만나게 되요. 지하철을 타려고 플랫폼에 서 있다가 문득 옆을 보면 그 남자가 노선도를 읽고 있고, 길거리를 걷다 쇼윈도우로 고개를 돌리면 내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그 남자가 비춰져요. 과민반응이 아니에요. 정말, 하루에 그 남자를 못 보는 날이 없다니까요? 정말 내 뒤를 따라 다니는 것처럼…….
혹시 헬렌이 날 염려해서 붙여둔 사람은 아니겠죠. 눈매가 날카롭고 피부는 구리빛이에요. 언뜻 보기에도 마른 것이 눈에 확 틔어서 전체적으로 빈약해보이더군요. 항상 뭔가를 갈등하는 듯한 공황이 눈동자에 가득해요. 대체 어떤 고난이 그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 지. 아, 이상하죠? 낯선 사람을 궁금해하다니. 하지만 그 남자를 만난 뒤로 악몽을 좀처럼 꾸지 않습니다. 대신 포근한 솜털침대에 푹 뉘인 꿈을 꿉니다. 따스하고 기분좋은 꿈….
꽃집이 개업한 지도 삼 일이 지났습니다. 지금까지 온 손님 수는 딱 세 명. 무테 안경을 쓴 남자분이 장미 열 송이가 담긴 꽃다발을 사가셨고 저녁 쯤에 아이보리색 정장을 입은 말쑥한 여자분이 커다란 카라 한 대를 사가셨죠. 그리고 어제 낮에, 새로 생긴 도서관에서 온 사람이 화환 하나와 난을 주문하셨구요. 이 정도면 좋은 시작이죠, 헬렌? 내게도 점점 좋은 일이 생기려나봐요. 어차피 나 기억을 잃어서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살아야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아무래도 난 아직 젊은 것 같으니까, 언젠가 내 자신을 찾을 날이 올 거에요.
그런데 그 남자, 정말 헬렌이 붙여둔 사람 아니죠?
하긴 그럴 리도 없겠네요. 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길을 걷고 있는데 또 그 남자가 내 뒤를 밟고 있더군요. 이건 뭔가 안되겠다 싶어서 당당히 뒤 돌아서 말했어요. 왜 따라오는 거에요? 차라리 내 마음이 오해이길 바랬는데 아니나다를까. 그 남자가 굳은 얼굴로(가까이서 보니 호남아더군요)내게 다가오더니 불쑥 내 팔을 잡는 거에요. 비명을 지르려고 하는 순간, 날 향하는 남자의 애절한 눈동자에 가슴이 철렁했어요. 항상 날 궁금하게 했던 그 기이하도록 슬픈 눈동자, 날 악몽으로부터 구해준 그 눈동자.
겨우 토해낸 듯한 목소리로 그 남자가 말하더군요.
첫댓글 정말 재밌어요. 승희..정말 왠지 다른 이미지랄까? 순수해보여요-./사실적이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멋집니다d
왠지 슬프지만 현암군과 만나서 다행입니다.^-^건필하시길-
아아...승희 였나여???
현암군은 승희를 악몽에서 지켜주는군요//,, 좋은 글이었습니다, 건필하세요^-^
자체로도 슬프지만, 만남으로 인해서 더 슬픈 것 같아요..
아.. 너무 슬퍼요. 아.. 한숨만 나오네요 -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