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효정 악기’라는 글자는 머릿속에 항상 예쁜 소녀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곤 했었다. 그런데 그런 예쁜 이름으로 국내뿐 아니라 전세계 현악기 제조에 있어서 ‘메이드 인 코리아’로 위상을 높이고 있는 ‘효정 바이올린’은 이름에서 풍기는 그런 가냘픔이 아닌, ‘외유내강’을 뛰어넘어 막중대사를 감당하고 있는 굴지의 현악기 제조사였다.
여유 없이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잠시 도심을 떠나 여유를 누리고픈 마음은 일반적일 것이다. 경제적·시간적·정신적인 모든 여건들이 제공할 수 있는 총합으로 ‘여유’는 그러나 그리 쉽사리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유의 가치는 빛나고 그것을 달콤함·행복함·꿈결 등에 비유하면서 동경의 대상으로까지 끌어올리나 보다.
효정 바이올린 매장이 있는 부평으로 향하는 1호선은 우리에게 잠시의 ‘여유’를 제공했다. 기차를 타고 한가롭게 떠나던 그 기차여행으로 믿고 싶을 만치 가을의 따사로운 햇살 속에 흘러가는 차창의 풍경들은 평화로웠다. 어릴 적 경인선의 전원모습은 아니지만 인천을 향해 가는 역들은 적당히 낡아있었고 시골의 어느 간이역 같은 분위기도 풍겼다. ‘뿌우’하고 연기를 뿜어내기만 한다면 춘천이나 부산, 아니면 적당히 떠나고 싶은 어느 곳으로 가는 기차라고 상상하기에도 충분해 보였다.
♠ 타고난 손재주에 예술성을 입혀서
부평역 가까운 곳에 위치한 ‘효정 바이올린’ 직매장은 나지막한 건물을 이웃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매장에 들어서자 바깥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겉모습이 아담한 것에 비해 매장 내부는 상당히 넓었으며 아기자기 하게 용도별로 나뉘어져 있었다. 레슨실과 수리실을 비롯하여 2층에는 현악기의 공정을 위한 공장도 함께 자리잡고 있었는데, 열심히 바이올린을 매만지며 구슬땀을 흘리는 기술자들 속에 효정 바이올린 신효철 대표의 모친도 친히 공정에 참여하고 계셨다.
효정 바이올린의 신 대표에게 제일 먼저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효정 바이올린이라는 이름은 제 이름의 효에 정을 덧붙여서 만들었습니다. 정은 특별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발음과 느낌상 편하게 하려고 만들게 되었습니다. 효정, 부르기 쉽고 예쁘지 않습니까?” 의외였다. 기대했던 답이 전혀 아니었다. 혹시 신 대표의 딸 이름이 ‘효정’이었어도 좀더 이야기가 될 뻔했는데……. 하지만 효정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공통적인 부분인가 보다.
“1986년에 부천에 ‘효정악기’라는 이름으로 현악기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국내 바이올린 제작에 대한 여건이 너무 열악해서 시작 때부터 어려움이 많았지요.” 그는 악기 제작자를 직접 양성 교육을 시켜야 했으며 현악기를 생산하기 위한 재료 특히, 국내산 나무는 악기제조에 적당치 않아서 고품질의 악기를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또 1988년 올림픽 개최 이후 국내 인건비의 상승으로 효정 악기는 또 한번의 어려움을 맞게 되었다. 더 이상 인건비를 맞추다가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거나 제품 가격의 인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소비감소가 예상되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처하게 된 것이다.
“저는 국내에서의 현악기 생산에 대한 처음 생각을 완전히 보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건비와 제작경비가 싼 동남아 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처음에 중국을 염두해 두기도 했지만 그 당시 수교가 되지 않은 상태여서 포기해야만 했었지요.” 신 대표는 여러 후보지를 두고 고민한 끝에 1989년 스리랑카에 효정 바이올린 공장을 세우게 된다. 스리랑카 현지에 현악기 제조공장을 세운 것은 국내에서는 최초의 해외 직영공장의 설립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세간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스리랑카는 현악기 제작을 위해서는 입지적으로 아주 훌륭한 여건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먼저 항만이 가까이 있어서 재료와 완제품의 수송이 용이했습니다. 그리고 인건비가 저렴한 것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은 참 선하고 인상이 좋아서 믿음이 갔지요. 일을 가르치며 잘 따르고 성실히 일하는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리랑카는 또한 유럽과도 훨씬 가까워서 유럽산 목재를 수입하는데도 비용이 절감되어 고품질의 악기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