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의한 청지기 3 (‘회개’로 읽는 누가복음 15~16장)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탕자의 비유와 다르지 않을뿐더러 15장 전체에서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로 주어지는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열심이 단계적으로 드러나고 16장에 이르러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회개’라는 은혜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런 점층적 구조 속에서 16장은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로 시작되고 있다. 청자인 모든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율법주의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앞에 두고 왜 굳이 제자들을 특정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십자가 사건 앞에서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가 성령이 임해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모습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본문에서 청지기 직무 정지의 이유로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주인이 하나님을 은유하고 있다면 주인의 소유는 두말할 것 없이 영생하는 참 생명이며 청지기(제자들)에게 맡겨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일 것이다. 따라서 불의한 청지기는 어떤 특정인이 아니라 예수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한 모든 사람이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좌·우편 자리를 탐하거나 예수를 부인하거나 혹은 팔아넘기며 자기 계산을 앞세우는 십자가 이전의 제자들처럼 예수 믿고 천국 가려는 모든 믿는 자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는 불의한 청지기인 것이다.
또한 16장 5~7절에서 말하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갚을 수 없는 생명의 빛을 은유하므로 청지기에게는 그 빚을 전액 탕감해 줄 능력이 없다.13)다만 불의한 청지기는 그 위기의 순간에 주인의 인자에 기대어 주인의 은혜와 자비를 온 세상에 폭로하고 유통해 버린 것이다. 달리 말하면 바리새인들은 빚진 자(죄인)를 정죄하고 빚을 독촉(율법주의)했지만 부활 사건 이후 제자들은 목숨을 내어놓고 빚진 자들에게 은혜의 복음을 선포했다. 이처럼 위기에 처한 불의한 청지기가 자신의 살길을 찾아 시한부 기한 동안 남은 시간과 재물을 전부 쏟아부어 빚진 자(죄인)들에게 살길을 마련해 주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야말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삼는 것이며 마침내 주님 앞에 서는 날 복음으로 살아난 이들(친구들)이 하나님 나라(영주할 처소) 문 앞에서 영접할 것이다.14)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것은 그가 대단한 구원자여서가 아니다. 여러 차례 밝힌바 자기가 주인이 아님을 알고 주인의 선하심에 의지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인의 선하심이란 바로 탕자의 비유에서 살펴보았듯이 죽음을 감수하고 자기의 것을 값없이 내어주는 그 아버지의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그 십자가의 사랑을 은유하는 것이다. 이런 선하신 아버지의 사랑에 의지해 복음을 전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이 지혜롭다고 칭찬해 마지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한부 선고(강압적·일방적 회개의 은혜) 앞에 서보지 못한 세상의 전도자들은 스스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어라.’라는 말씀을 지상명령으로 받아 행하지만 정작 성경은 ‘되어라.’라는 명령형이 아니라 “되리라”라는 수동태로 기록되어 작용의 주체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니까 성경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라고 기록하므로 주어는 당연히 증인이 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인 것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는 조건절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확고한 ‘자기 옳음(義’)과’ 충만한 ‘자기 열심’이 눈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능에 자신을 맡길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선하심이 전도자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며 불의한 청지기 역시 하나님(주인)이 죄인(빚진 자)을 가엾게 여기시는 자비에 의지해 복음을 전했던(탕감)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자기의 필요를 좇아 살다가 주인의 해고 통지를 받고 더 이상 기댈 것이 없는 ‘자기애(自己愛)의 파산’이라는 하나님의 은혜가 강권적으로 주어진 회개의 이야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회개한 성도의 삶이 어떤 은혜로 살아가게 되는지를 불의한 청지기의 모습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비록 자기가 살기 위해 결정한 선택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열어놓은 길이며 이런 은혜의 삶15)을 살아가는 자들을 위해 비유가 아닌 실재하는 모델로 자격 없는 사울을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으로 불쌍히 여겨 사울의 자의식을 파산 내어 바울로 세우시고 모든 믿는 자들의 본으로 삼은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1:16)라고 고백하고 있다.
과거 바울이 사울로 살면서 자기 의를 위해 율법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단죄하던 불의한 청지기라면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후(파산 선고 후) 자기가 주인이 아님을 알고 주인에게 의지하는 청지기로 바뀌었다. 이런 모습은 자기의 선택이 아니라 상황을 좇아 일어난 일이며 개종 후 자기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현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사도 중 작은 자”(고전15:9)로 살아가며 삶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연단)를 통해 마침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1:15)라고 고백하는 자리로 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전:23~28)라고 말하며 평생을 매 맞고 굶주리며 복음을 전하면서도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라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고백했던 것이다.
모든 믿는 자에 대한 이런 고난과 수난은 그리스 파트라스에서 X자 십자가에 매여 이틀간이나 고통받다가 죽은 안드레나, 로마 황제의 박해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베드로나, 칼로 헤롯왕에게 목 베임을 당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나,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지는 형을 받았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나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90대 노구의 고단한 삶을 견뎌낸 요한이나, 터키 파묵칼레에서 기둥에 매달려 돌에 맞아 죽은 빌립이나, 에티오피아에 통치자 풀비아누스에 의해 화형당한 마태(레위)나, 인도에서 창칼에 찔려 죽은 도마나,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밀쳐진 후 유대인들의 돌과 세탁업자들의 방망이에 맞아 죽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나,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살가죽이 벗겨져 참수당한 바돌로매(나다나엘)나, 페르시아 지역에서 톱에 잘려 죽은 시몬이나, 페르시아 지역에서 창과 화살, 도끼에 맞아 죽은 유다 다대오나, 에티오피아에서 돌에 맞은 후 목이 잘려 죽은 맛디아나 이들 열두 제자뿐만 아니라 참수형으로 목이 잘려 죽은 바울을 비롯해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2천 년의 세월을 따라 각양의 모양으로 순교와 박해를 당했다.16)
이런 고난에 대해 성경은 로마서 8장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밝히고 있다.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광명의 천사로 나타난 사탄과 그에게 잠식당해 자신을 의의 일꾼으로 자랑하는 거짓 사도들이 득세하는 세상이기에 내 믿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17)으로 살아가는 하늘 백성들은 이 땅에서 고단한 나그네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본문에서도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를 위해 내 것이라 여기고 산 삶에서 돌아서서 불의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 복음을 나누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것이다.(고후1:5)
13) 청지기가 빚진 자들을 불러서 100% 전액을 탕감해 준 것이 아니라 누구는 50%, 누구는 20%를 탕감해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가 복음을 전한다고 죄인이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 허용된 것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통로일 뿐이다.
14)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루어졌으며 이 땅에 속한 성도의 관점에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으며 장차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니 전도자로부터 복음을 듣고 회개한 모든 성도는 이미 하늘나라에서 전도자를 맞이할 것이다. 전도 역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성도에게 임해서 행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공로를 성도에게 전가하고 성도의 권한을 잘 행사한 것으로 칭찬하는 것이다.
15) 교인들이 성도라는 허영에 들떠서 은혜의 삶을 간구하지만, 은혜의 실상은 인간의 입맛과 달라도 너무 달라 입안에 넣는 순간 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리, 은혜가 은혜 되어서 그렇게 돼가는 것을, 하나님이 행하는 것을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는가.
16) 믿음의 선진들에 대한 순교나 고난에 관한 기록은 성경과 외경 그리고 유대 역사서와 전승으로 남아 있으며 순교 지역의 기독교 관련 자료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17)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새번역에서도 믿음의 주체를 사람의 행위에 두어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번역했지만, 내 힘이나 내 믿음의 분량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목슴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랑(주격)’이 내 삶을 이끌어간다는 은혜의 고백이므로 ‘주격적 소유격’인 “하나님 아들의 믿음”으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모든 성도는 내 믿음이 아닌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첫댓글 불의한 청지기가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 오네요 마치 출애굽기 12장10~20절의 내용과 같이 오버랩이 되면서 왜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이자 누이로 세웠졌는지가 다시한번 선명하게 확인이 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