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3일(목)
* 시작 기도
주님...
세상의 정의는 언제나 땅의 가치와 사람들의 객관적 가치가 기분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상성의 원리에 속하여 언제든지 변하고 왜곡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늘의 정의는 하나님께 속한 영원한 나라가 기준이 됩니다.
따라서 그 가치가 변하지 않고 항상성의 원리에 속하여 늘 주님의 뜻을 이루어갑니다.
이는 종말을 현재로 사는 자가 누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오니 저 또한 오늘이 주의 날이요 주의 재림을 사모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 주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렇게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곶감 빼먹듯 말씀을 골라서 취사선택하는 무뢰한이 되지 않도록 나를 성령으로 장악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호 2:14-23
제목 :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23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 나의 묵상
호세아서 2:2-13절까지는 음란한 여인 고멜과 음란한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였다.
이제 오늘 본문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깨닫고 돌이킬 때 하나님이 베푸시는 회복의 은총을 말씀하신다.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시고, 아골 골짜기를 통해서 소망의 문을 삼아 주신단다.
거친 들이란 히브리어 ‘미드바르’로서 광야를 의미한다.
광야는 사람이 살기에 결코 적합하지 않은 척박하고 황량한 땅이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마실 것도 없고 바라볼 것도 없는 곳, 오직 그곳에서는 위에 계신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곳이 바로 거친 들, 광야이다.
광야 자체는 고난의 장소이지만,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이 말로 위로하신다고 하신다.
말로 위로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마음 깊이 들어가셔서 말씀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거친 들, 곧 광야에서 최고의 위로를 해 주실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심판 없는 위로를 하시는 분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심판 없이 위로를 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를 기초로 세워진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거친 들에 데리고 가서 그의 마음 깊이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는 것이다.
엘리야는 바알 아세라 선지자 850:1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런데 아합의 아내 이세벨의 위협 앞에서 두려운 나머지 이스라엘의 최남단 브엘세바로 피하여 내려갔다.
거기서도 그는 하룻길을 더 내려가서 로뎀나무 아래 누워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였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시켜서 그에게 떡과 물을 공급해 주셨다.
물론 그것을 먹고 힘을 내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 떡과 물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의미한다.
떡과 물은 육신에 유익을 주듯, 예수님의 살과 피는 영혼을 살리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엘리야는 이 떡과 물을 마시고 40일 밤낮을 걸어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호렙산 곧 시내산에 도착한다.
그는 그곳에서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지만 그 바람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
바람 후에 지진이 있었지만 그 지진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지진 후에 불이 있었으나 그 불 가운데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
그런데 불이 지나간 후에 세미한 음성이 들리는데 그 소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세미한 음성 앞에서 엘리야는 자기 연민이 섞인 하소연을 한다.
(왕상 19: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결코 너 혼자가 아니다.
내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 7,000명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들은 바알에게 입도 맞추지 않은 자들이다.
그리고 그에게 마지막 사명을 주신다.
하나님은 그저 위로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40일 밤낮을 걸어서 거친 들이요 광야의 한 가운데인 호렙으로 그를 부르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친히 세미한 말씀으로 위로하시면서 사명을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요 또한 은혜이다.
광야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미드바르’는 말씀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다바르’에서 나왔다.
곧 광야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이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입을 것도 없으며 그 무엇으로 살아갈 수 없는 광야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
아골 골짜기의 유래는 이렇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첫 성 여리고를 점령할 때 아간의 범죄로 인하여 두 번째 전쟁인 아이성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패인을 알고 보니까 아간이 범죄한 것을 알게 되었다.
여호수아는 아간이 훔친 모든 물건들, 곧 은과 외투와 금덩이를 비롯하여 그의 자녀들과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가지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그곳에서 불사르고 돌을 던져 돌무더기를 높이 쌓았다.
바로 그곳이 아골 골짜기이다.
이처럼 아골 골짜기는 하나님의 심판의 장소이다.
그런 심판이 있는 자리에서부터 소망의 문을 삼아 주신다고 하신다(15절).
그 이유는 죄인인 아간이 돌에 맞아 죽은 무덤 곧 아골 골짜기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셨지만 죄가 되어 죽으셨다(고후 5:21).
다시 말하면 아골 골짜기의 심판을 통해서 소망의 문을 여는 것은 곧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다시금 온전히 회복되어 연합의 관계가 될 것임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들의 남편이 되고, 다시는 그들이 섬기는 우상인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에 장가들어 오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결코 부정한 그들에게는 정결하신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없으시기에 먼저 그들을 정결케 하시는 것이다.
그 정결케 하시는 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 심판은 결코 진멸이나 아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하시는 징계인 것이다.
이 징계는 자녀들이라면 누구나 다 받는다.
만약 징계를 받지 않는다면 그는 아들이 아니다.
(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우리의 참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그 징계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주시는데 그것은 곧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다.
우리의 유익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을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뜻은 하나님을 위하여,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희생시켜 하나님만 영광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 나타난다.
그 뜻은 곧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
그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때로는 고난도 주신다.
우리는 고난을 싫어하지만, 영생을 위하여 그 고난을 받아들이고 그 심판 안에 거하는 그 자리(십자가와 장사복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곧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요, 그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도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희생을 통하여 영광을 빼앗아가시는 이기적인 분이 아니시다.
우리를 온전한 당신의 자녀 삼으시기 위하여 때로는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주신다.
그 고난이 곧 징계로 사랑의 심판이다.
거친 들, 광야, 아골 골짜기는 무덤과 같은 곳이다.
그곳에서 생명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말씀과 함께 주님과 교제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나는 정말 교회라는 조직을 조직적으로 이끌어가는 데는 젬병이다.
교회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조직들, 곧 교역자회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 중직자회 안수집사회 권사회 등등.....
이런 모임들을 조직적으로 이끌어가려고 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물론 목사면 이런 것들도 멋들어지게 운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천성적으로 이런 것을 잘 이끌 줄도 모르고 이끌고 싶지도 않다.
나는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꼼수를 쓰지 않고 성도들에게 바른 복음을 전해서 그들로 하여금 영생을 누리게 하는 목사로써의 본질에만 충실하면 좋겠다.
그런 이유로 나는 김해에서 하던 목회를 그만 두고 선교사의 길로 돌아섰다.
그리고 지금은 돌고 돌아서 베트남 하이퐁에서 한인 목회를 하고 있다.
이런 나 역시 하나님의 심판 없는 위로를 원하는 자였고, 또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저 대과없이 사역을 잘 하고, 목회를 마무리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항상 나를 지배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내 생각일 뿐이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진짜 원하시는 복음이 증거되기를 바라신다.
지난 수년간 힘들고 괴로웠지만 오늘 내게 주신 ‘미드바르’ 곧 광야의 무덤에서 ‘다바르’인 말씀으로 잠잠히 거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 앞에 그저 두 손으로 입을 가릴 뿐이다.
복음을 알고 전한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넘어지고 자빠지는 나는 그저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잠시도 살 수 없는 자이다.
다만 날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기대하고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심판 없는 위로를 바라던 자가 여기 있나이다.
십자가 없는 영광만을 기대하고 소망했던 자가 여기 이렇게 무릎 꿇었나이다.
이 종을 주의 공의로 심판하소서.
죽기보다 싫었던 고난과 고통의 심판이 이제는 내게 기쁨이 되게 하소서.
오히려 그런 무덤의 상황이 닥쳐올 때 더 깊이 주의 말씀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그 말씀이 내 마음에 깊이 들어오셔서 친히 말씀하여 주옵소서.
주님만이 나의 생명이오니 오늘도 엘리야에게 주셨던 떡과 물을 내게도 공급하여 주옵소서.
오늘 주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 곧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주님의 구속 사건에 나도 연합하는 것이오니 오늘도 내 육신의 입술은 닫아 주시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에 나를 죽이고 무덤에 장사되어 그곳에서 주의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게 하소서.
주님이 지어주시는 성소에서 주님을 기쁨으로 만나 새 생명으로 살아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