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울렸다.
P였다.
반가웠다.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왔는데 보고 싶다고 했다.
아무리 바빠도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갈 수밖에 없는, 아니 달려가고 싶은 그런 친구였다.
내가 무척이나 신뢰하고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을지로'에서 그를 만났다.
여전히 건강한 모습에 활력이 물씬 풍겼다.
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진지한 눈빛과 성실한 삶의 모습이 무척이나 좋았다.
그는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역시 그 친구다웠다.
서울에서의 '비즈니스 미팅'은 잘 끝났다고 했다.
성과도 좋았고, 미팅 결과에 만족한다고 했다.
나는, 그가 하는 일이라면 의당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커피를 마시며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온갖 주제들의 얘기 보따리를 주저리 주저리 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1시간이 10분처럼 짧게 느껴졌다.
KTX의 출발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원래 부킹한 열차표를 취소하고 3-4시간 후의 고속열차로 다시 예약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네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간만에 소주도 한 잔 하고 싶은데 시간이 어떤가" 하고 물었다.
당근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시간이 없어도 내야할 판이었다.
내가 오케이 싸인을 보내자 P는 그 자리에서 KTX를 취소하고 다시 예약했다.
자리를 옮겼다.
유서 깊은 '설렁탕집'이었다.
뭉근하고 뜨끈한 설렁탕 뚝배기에 큼지막한 수육도 함께 주문했다.
맛있는 음식에 시원한 소주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멋진 하모니요 찰떡궁합이었다.
환한 미소와 함께 소주 몇 잔이 오갔다.
각 가족들의 근황에 대해서도 유쾌한 안부를 주고 받았다.
친구도 나와 같이 딸과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나이는 우리 애들이 조금 많은 편이었다.
아들 얘기를 하면서 친구가 그랬다.
"아들 덕분에 머지 않아 '하와이'에 가게 생겼네"
"하와이 좋지. 진짜로 멋진 곳이야. 그런데 아들과 하와이가 무슨 연관이 있는가?"
내가 물었다.
그가 상세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가슴 뭉클한 '속사정'이 있었다.
듣고 보니 정말로 멋진 인연이었고 운명적인 사랑이었다.
딸은 대학을 졸업한 뒤에 대기업에 취업해 잘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P의 아들은 본디 엄청난 '학구파'인 데다가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하여 그 결정에 박수를 보냈다고 했다.
군대까지 마친 다음에 혼자서 미국 동부로 날아갔단다.
그동안 유학준비를 잘 했었고, 영어도 곧잘 했기에 적응하는덴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며 학업성적도 매우 좋았다고 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운동도 열심히 하는 '열혈청년'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같은 클라스에서 공부하는 어떤 숙녀와 친하게 지냈다고 했다.
처음엔 연인 사이는 아니었고, 같은 전공에서 함께 공부하며 연구과제도 같이 하는 친구 사이였단다.
방학을 맞이하여 그 여학생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아들은 기숙사에서 계속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여학생이 아들을 초대하여 처음으로 그녀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고 했다.
집에 가보니 한국 같은 아파트가 아니라 엄청나게 큰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이었으며 부모님 두 분도 현역 '닥터'로 일하고 있는 단란하고 유복한 가정이었다고 했다.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할 만큼 거리가 멀어 처음엔 하루 이틀만 머물다 올 예정이었으나 운명의 장난인지 때마침 미국 전역에 '코로나 사태'가 심각하게 돌변하면서 기숙사가 갑자기 폐쇄되는 바람에 졸지에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단다.
안에 있던 자들은 못 나갔고, 밖에 있던 자들은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누구도 예견할 수 없었던 '비상시국'이었고, 급박한 조치들이 하루가 다르게 내려졌다고 했다.
선택의 여지 없이 그 클라스메에트 집에서 2달 이상을 한 가족처럼 지내게 되었다고 했다.
여학생의 부모도, 키가 크고 핸섬하며 젠틀한 P의 아들을 매우 아껴주셨고 친아들처럼 대해주셨다고 했다.
그 집에서 두 달 이상을 함께 지내면서 미국 부모님의 허락과 인정 하에 비로소 '친구'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했단다.
젊은 청춘들의 아름다운 사랑, 얼마나 가슴이 설렜겠으며 코로나고 뭐고 간에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겠는가.
연일 봄바람에 꽃잎이 휘날렸을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기저질환'을 앓던 사람들이, 특히 미국에서 수도 없이 죽어나갔지만 청춘들의 사랑과 관계는 하루가 다르게 깊어만 갔단다.
주말에는 '미국부모'가 둘을 위해 직접 '가든파티'를 열어주기도 했고, 둘의 사랑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다고 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고 가까스로 '기숙사'에 돌아와 공부를 계속했지만 각종 강의나 연구활동 그밖에 '캠퍼스 라이프'가 제대로 돌아갈 리는 없었다.
당연했다.
최대한 조심하면서 숨을 죽인 채 1년여를 보내며 코로나 '사태추이'를 지켜보았는데 더 이상 '미국'에 머물기가 어렵고 위험해 아들은 휴학계를 내고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그당시엔 '미국'보다 '한국'이 훨씬 더 안전했으니까.
'예방접종', '사회 안전망', '사망률', '격리 시스템', '국민들의 협조와 마스크 착용', '원칙준수' 등등 모든 면에서 한국이 세계적으로 칭송을 받고 있을 때 미국은 마치 후진국 같은 엉성한 모습을 연출하던 때였다.
전 세계를 강타했던 엄청난 '리스크' 앞에서 미국의 자존심은 무참하게 무너졌다.
낭패였다.
냉혹하고 무서운 '생사문제'가 터지자 미국은 더 이상 '샤프'하지도, '스마트'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았다.
P 부부도, P의 아들도 그런 미국보다는 안전한 한국이 더 좋겠다는 판단이 들어 협의 끝에 급거 귀국했단다.
거기까지는 나무랄데 없이 순조롭고 좋았다.
그러나 청춘들의 '사랑'이 문제였다.
하루 이틀, 일 주 이 주, 한 달 두 달이 흐르자 서로가 너무나도 그리워하며 '상사병'이 생길 지경이었단다.
통화는 매일 했지만 어디 통화만으로 그 애타는 그리움을 달랠 수 있었겠는가.
시간이 흐를수록 '코로나 사태'는 전 세계를 더욱 혹독하게 옥죄고 있었고 국가 간 정기 비행노선들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었다.
바야흐로 세계 각국이 빗장을 걸어잠그기 시작했고 그 탓에 세상이 꽁꽁 얼어붙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아들의 애인이 미국 부모님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필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고 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 정부에서 지정한 모처로 가서 꼬박 2주 간 배달된 도시락을 먹으며 혼자 격리를 해야 했지만 그런 외로움이나 힘겨움 조차도 그 젊은 미국 숙녀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다고 했다.
P도, 그의 아내도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노라고 했다.
듣는 나도 그랬다.
정말로 대단한 용기였고, 절절한 사랑이었다.
격리가 끝나자마자 숙소 앞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P의 아들과 그의 애인은 눈물겨운 상봉을 했단다.
그리고 인천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KTX를 타고 집으로 왔는데, 아들의 애인을 처음 보았지만 P의 눈엔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던 예쁜 아이 같았다고 했다.
그동안 사진도 자주 보았고 아들에게서 많은 얘기를 들었던 까닭에 전혀 낯설지도, 생소하지도 않았단다.
P 부부는 이역만리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단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이 엄혹한 상황을 뚫고 달려와 준 미국처자를 따뜻하게 포옹해 주었다고 했다.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말고는 그 어떤 말로도 '놀라움'과 '고마움'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고 했다.
'반가움'과 '그리움' 때문인지 미국 숙녀도 집에 도착해서 한동안 계속 눈물만 흘리더란다.
그래서였을까?
P에겐 이 청춘들의 사랑이 더 예뻐 보였고 무지 아름답게 느껴졌노라고 했다.
"휴우우~~"
P의 말을 경청하는데 내 가슴도 점점 벅차올랐다.
집에서 '웰컴파티'를 하면서 동영상 통화로 양가 부모님이 서로 인사도 나누었고, 아들이 통역을 해주어 부모님들이 상호간의 의견과 기대 그리고 청춘들의 사랑에 대한 축복을 주고 받았다고 했다.
내 가슴까지 저릿해 졌고 울컥했다.
연인들은 P 아내의 차를 자가용 삼아 한국의 다양한 장소를 여행했고, 그렇게 재미있고 꿈결 같은 한 달을 보낸 뒤에 미국 처자는 본국으로 돌아갔단다.
P도 나중에 들은 얘긴데, 그녀가 귀국하고 나서 자신의 부모님께 처음으로 '결혼얘기'를 진지하게 꺼낸 모양이었다.
어느날 미국 부모님이 P에게 전화를 했더란다.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고 자녀들의 '학업이 마무리 되면' 미국 동부와 한국의 중간 지점인 '하와이'에서 만나고 싶다면서.
P가 그랬다.
그쪽 부모를 아직 본 적은 없지만 아들의 얘기, 예비 며느리의 행동거지와 매너, 그분들의 사진, 통화할 때 느껴지는 상대방의 품격 등을 감안해 보았을 때 매우 다복하고 젠틀한 분들 같다고 했다.
"일생 동안 열심히 살아온 자네 복이다. 축하한다 친구야. 장차 파란 눈의 금발 며느리를 맞게 되겠구나"
나는 진정으로 친구에게 축하를 전해주고 싶었다.
친구도 환하게 웃었다.
자신의 기쁜 내면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내 영어 실력이 모자라 그 미국 아이와 대화는 잘 안 되지만 행동이나 예의범절이 남다르더라고. 속도 깊은 것 같고. 뼈대 있는 집안에서 품격 있는 부모를 보며 자란 까닭에 밝으면서도 매너가 돋보이는 애였어. 아들과 잘 맞겠다 싶네. 나보다 내 아내가 더 좋아하는 걸 보면"
감사했다.
잔잔한 감동이 일었다.
P와 둘이서 권커니 자커니 몇 번의 건배가 이어졌다.
기분도 좋았고 행복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P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의 가족, 그의 사업, 그의 인생관, 그의 진정성에 나는 마음을 담아 축하를 보냈다.
사는 곳이 달라 자주 만나지 못했던 듬직한 친구 P.
그를 몇 년만에 다시 만났더니 그새 이런 저런 변화가 적지 않았다.
그랬다.
우리도 번개처럼 나이를 먹었고, 아이들도 어느새 혼기가 꽉 찼으니 무리도 아니지 싶었다.
P 부부의 건강을 당부하며 우리는 '서울역'에서 힘차게 포옹을 나눴다.
그가 플랫폼으로 내려가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계속 손을 흔들었다.
그를 보내고 전철로 돌아오는 길.
세상은 이미 깊은 어둠 속에 잠겼고 하늘을 찌를 듯한 마천루의 불빛들이 밤하늘에 아름답게 드리워진 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날따라 유달리 서울이 멋져 보였다.
"와우, 자주 보는 서울의 야경인데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왠지 달리 보이고 특별한 정감으로 와닿은 날이 있었다.
내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그리고 감사가 샘솟았다.
한 평생 성실한 삶을 엮어온 친구에게도, 그의 착한 가족들에게도, 그리고 P 아들의 아름다운 연애와 뜨거운 '러브 스토리'에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 마음껏 사랑하거라".
"세상의 비루함을 이겨내는 최후의 명약은 눈부신 사랑에 대한 알뜰한 맹세와 언약 그리고 실행 뿐이지.
사랑을 위한, 사랑에 의한 수많은 애태움과 설렘들이 유사 이래 지금까지 무수한 인생과 삶의 풍경들을 만들어 냈단다.
때로는 사랑 때문에 '불치병'에 걸리기도 하지만 정제와 절제로 향기롭게 꽃 피워낸 사랑 때문에 세상은 지금까지 내내 아름답게 빛날 수 있었고 세대를 이어 건재할 수 있었다.
나도,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 세상이 영속하며 번영할 수 있었던 비결은 사랑 뿐이라고 믿으며 살고 있단다.
뭇 생명체들의 선망과 질투가 느껴질 정도로 예쁘고 뜨겁게 사랑하거라.
단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이, 오늘 이 '하루'가 우리에게 임한 '기적의 전부'일 테니까.
진정으로 너희들에게 축복의 박수를 보낸다"
브라보.
"God bless you !!!"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