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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하나님은 누구신가?
피택자 훈련교재(새신자반, 이재철 목사, 홍성사)
◆서론
▶우리가 성경을 통해 말씀을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1. 하나님(삼위일체)에 대한 참된 믿음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바른 앎(지식)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앎에서부터 우리가 맡게 된 직분에 대한 참된 삶도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만난 하나님을 바르게 그리고 더 잘 알기 위한 애씀,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바른 믿음이요, 참된 겸손이다.
2. 호세아 선지자 /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 / “깨달았느냐”(마 13:15), “깨닫지 못하느냐”(마 16:9), “깨달으라”(막 7:14). *호세아 선지자와 예수님께서 힘써 여호와를 알고 깨달으라고 외친 이유는 만남의 깊이와 성숙을 더해 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앎과 깊은 깨달음인 까닭이다.
3.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부터 우리 믿음의 대상인 주님과 관련하여 더 깊은 앎과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함께 ‘새신자반’ 여행을 시작하려는 이유다. 여기서 말하는 ‘새신자’란 ‘초신자’란 의미가 아니라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깨달아 진정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사는 자’란 의미다.
4. 이재철 목사님의 예) 37세가 되어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신앙에 관한 많은 질문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결과 참된 앎이 없는 자신의 추상적인 믿음으로는 삶에 대한 변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더 잘 믿고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성경을 통한 바른 앎에 대한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이 바로 ‘새신자반’이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1.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째 의무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식이 아버지를 알려 하지 아니하고 외면할 때 불효자가 될 수밖에 없듯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란 결국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 그런데 눈에 보이는 육신의 아버지도 제대로 알 수 없는 판에, 과연 우리가 보이지도 않은 하나님을 완전무결하게 알 수 있는가?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육체를 가진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어둠인 인간이 빛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장님이 손으로 더듬어 코끼리를 완전히 보려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영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 전까지는 절대로 하나님을 온전히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3.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참된 자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조명 아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겸손하게 그 분의 높이와 깊이 그리고 넓이를 알아가는 노력을 일평생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4. 그런데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았다’는 자만에 빠져 버릴 것이며 그 순간이야말로 실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 해답을 구하려 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없음을 잊지 말라.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최후의 인간 지식이다.”라는 토마스의 말을 가슴에 새겨야만 한다. 그 겸손한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바로 알아갈 수 있다.
5.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지식을 알게 하는 곳은 어디인가? 창세기이다. 왜 그런가? 창세기야말로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첫 계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창세기를 중심으로 알아보는 것이다.
6. 창세기에 계시된 하나님은 누구신가?
▶첫째,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1. 하나님께서 ‘창조주 하나님’이신 근거는 무엇인가? 창세기 1장 1절의 계시를 통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이 구절은 불과 ‘태초, 하나님, 천지, 창조’라고 하는 네 단어로 구성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지극히 간단한 문장이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겨보면 이 네 단어는 모두 인간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임을 알게 된다.
3. 도대체 ‘태초’가 언제인가? 이 우주가 언제 생겼는가? 과학 만능 시대라는 오늘날에도 이 질문에 대한 과학의 해답은 ‘모른다’는 것이다. ‘태초’가 언제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4.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신가? 인간이 과연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을 완전무결하게 아는 인간이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있을 수가 없다.
5. ‘천지’가 얼마나 큰지 아는 자가 있는가? 이 우주가 얼마나 광활한지 측량할 수 잇는 자가 있는가? 최신 과학 설비를 동원하여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가장 먼 별은 200억 광년 거리에 있는 별이다. 200억 광년의 거리란 1초에 30만Km를 날아갈 수 있는 빛이 200억 년 동안을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달려서야 이를 수 있는 거리다. 그런데 이곳 역시 ‘천지’ 중 지극히 적은 일부분에 불과할 따름이다. 따라서 ‘천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6. ‘창조’의 비밀을 온전히 아는 자가 누구인가? ‘창조’의 능력을 완전히 행할 수 있는 자는 또 누구인가? 사지백체가 우리 것이지만 돋아나는 흰머리를 스스로 막아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창조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든 인조 뼈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창조해 주신 뼈의 완전한 기능을 결코 대신하지 못한다. 마음만 먹으면 못 만들 것이 없다는 과학도 인간의 생명인 피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창조’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하나님처럼 ‘창조’를 행할 수 있는 인간 또한 이 세상에는 있을 수가 없다.
7.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운 네 단어로 구성된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이 말씀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의 대상이다. 성경의 첫 구절인 이 말씀을 믿느냐,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나의 창조주이심을 믿느냐, 아니냐에 따라 인생의 과정과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8.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믿지 않은 자에게는, 인간이란 지극히 우연하게 태어난 존재일 뿐이고 이 경우, 인간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만한 가치와 능력을 지니고 있는가?
9. 인간이 결코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없는 한 가지 예) 타인의 암을 잘 고쳐주던 최고의 의사가 결국 자신은 그 암으로 죽고 말았다. 남의 병을 고쳐주며 명성과 부를 얻고 즐기는 동안, 그는 자기의 몸속에서 독버섯처럼 퍼지는 암세포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기에는 너무나 무력한 존재일 뿐이다.
10. 반면 창세기 1장 1절을 믿는다면,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나의 창조주 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성경이야말로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사용설명서’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11. 이 세상의 모든 제품에는 반드시 그 제품을 만든 제조자가 있기 마련이며, 제조자보다 그 재품에 대하여 더 잘 아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제조자들이 자신들의 제품 속에 그 제품의 사용설명서를 넣은 이유다. 그 사용설명서를 제대로 읽고 따르는 자가 제품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다.
12.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 되심을 믿는 자 역시, 인생이란 ‘제품’에 대한 ‘제조자의 사용설명서’인 성경을 전폭적으로 믿고 의뢰할 뿐, 그 어떤 이의도 제기치 않는다. 그것만이 인생이란 최고의 ‘고가품’을, 망가뜨림이나 탕진 혹은 오용함이 없이 영원히 바로 가꿀 수 있는 길임을 아는 까닭이다.
▶둘째, 하나님은 ‘부성(父性)과 모성(母性)을 동시에 지니신 분’이시다.
1. 하나님께서 ‘부성(父性)과 모성(母性)을 동시에 지니신 분’이신 그 근거는 무엇인가? 창세기 1장 27절의 계시를 통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 사람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위력적인 형상을 지닌 남성상(男性像)으로만 이해해 왔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 중 한 부분일 수는 있겠으나 전체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만 아니라 남자와 여자를 함께 만드셨기 때문이다.
3.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인간과는 달리 남자와 여자의 형상을 모두 지니고 계신 분이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형상(形象)’이란 외적 모습이 아닌 속성으로서의 의미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의 형상을 함께 지니셨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는 부성(父性)과 모성(母性)을 동시에 지니셨다는 뜻이다.
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침공한 앗수르 산헤립의 대군(18만 5천 명)을 하룻밤 사이에 전멸시키는 등, 강력한 부성의 소유자란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말할 수 없이 큰 하나님의 위력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부성의 특성은 강한 만큼, 강한 것은 섬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강함은 섬세함 및 부드러움과 어우러질 때에만 참된 강함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부성뿐만 아니라 모성도 함께 갖고 계시는 까닭이다.
5. 부성이 갖고 있지 못하는 모성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에 대한 예) *고열에 시달리는 어린 자식이 밤잠을 설칠 때 그 아이의 침상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어머니, *철길에서 노는 아이를 향해 기차가 덮쳐들 때, 그 사지(死地)로 뛰어들어 아이를 살려내고 대신 죽는 어머니.
6. 어머니의 사랑은 이처럼 부드럽고 포근하고 그윽하면서도 끝없이 깊기만 하다. 그것은 아버지의 부성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모성만의 특징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위력적인 부성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모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감동적인가?
7. 성경말씀 중에는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 모성을 드러내는 말씀도 의외로 많은데 정말로 이런 말씀들은 모성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흉내조차도 낼 수 없는 말씀들이다.
*[시 121:1-4]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66:13]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마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8. 이재철 목사님이 직접 체험한 어머니의 모성에 대한 간증) 이재철 목사님이 아주 어렸을 때 6.25전쟁이 끝난 뒤 군인과 결혼한 뒤 논산에 살고 있는 누님의 가정을 어머니와 함께 방문했다가 한 겨울에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다시 돌아오는 때 일어난 일이다. 그때 목사님께서는 발이 너무 시려 참지 못해 울음을 터뜨리자 어머니께서 자신의 버선을 벗어 신겨주셨다. 그 결과로 자신은 따뜻하게 왔지만 어머니의 발은 맨발이라 새파랗게 얼어버렸다. 그 후로 오랫동안 동상 후유증으로 고생하셨다.
9. 그때 만약 목사님의 곁에 계신 분이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였다면 어땠을까? 발이 시리다고 우는 목사님을 향해 “사내가 그 정도도 참지 못하느냐”고 꾸짖든가, “사내 대장부는 이런 것도 참을 수 있을 만큼 강해야 한다”고 훈계하든가, 그것도 아니면 “당장 일어나서 땀이 날 때까지 제자리 뛰기를 하라”고 명령했을 것이다. 이것이 부성의 특징이다.
10. 그러나 모성은 다르다. 너 스스로 강해지라고 명령하기보다는 자기의 사랑으로 감싸고 품는다. 아니 자기의 생명을 송두리째 주어버린다. 사랑하는 내 자식의 발이 따뜻할 수만 있다면 내 발이 얼어터지는 것쯤은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부성과는 전혀 다른 모성만의 특징이다.
11. 그런데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모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시기에, 사랑하는 나를 살리시기 위하여 성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를 쏟아지고 몸이 터지는 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으셨다. 아니 내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 버리시기를 조금도 주저치 않으셨다. 바로 모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2. 그러므로 우리들이 그 모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 연약함을 딛고 굳세게 일어설 수 있는 것은, 당신의 모성으로 끊임없이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모성 덕분이다.
13. 모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 클레어 클로닝거의 [만화경]이란 책 안에 존 클레이풀이 전하는 어느 부부의 외아들에 대한 감동적인 에피소드가 있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하기 몇 주일 동안 학교에서 선물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만 아버지에게 드리는 그 날 뛰어나가다 넘어지면서 딱딱한 타일바닥에 코를 찧으면서 정성스레 만든 선물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14. 이때 깨어진 선물보다 더 크게 마음이 깨어진 듯한 아픔을 경험한 소년은 그 자리에 앉아서 펑펑 울었다. 그러자 이를 본 아버지는 달려가 소년을 껴안고 달래며 말했다. “얘야, 괜찮다. 별일 아니니 걱정 말아라.” 그러나 그 소년에게는 그런 말이 그의 슬픈 마음과 상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위로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소년은 더 서글프게 울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15. 그러나 소년의 슬픔을 제대로 이해했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지혜로운 어머니였다. 그녀는 소년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애야, 정말 큰 일이 일어났구나. 이를 어쩌면 좋지? 네가 그토록 열심히 만들었던 선물이 산산이 깨어졌으니....” 그러자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울음을 그치고 마음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자신의 슬픔을 이해주었기 때문이다.
16. 어머니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얘야, 나는 지금부터라도 네가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우리가 이 깨어진 조각들을 모아다가 집에 가져가서 다시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떻겠니?” 결국 어머니의 그 섬세한 사랑과 배려 속에서 힘을 얻은 소년이 그 깨어진 조각들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17. 우리의 인생이 실패하여 산산조각 났을 때 그래서 실패의 늪 속에서 절망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등이나 한번 두들기시면서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만으로 그치시는 분이 아니시다. 모성의 하나님께서는 그대의 절망 속으로 찾아오셔서 그대와 함께 속상해 하시고 그대와 더불어 아파해 주신다. 그리고 그 자비로운 손으로 그대 손을 어루만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8. “얘야, 정말 큰 일이 일어났구나! 이를 어쩌면 좋지? 네가 그토록 열심히 애쓰던 일이 이처럼 산산이 깨어졌으니... 그러나 얘야, 나는 지금부터라도 네가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이 깨어진 것들로 나와 함께 다시 시작하면 어떻겠니?”
19. 이처럼 우리가 그 어떤 실패의 질곡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그 그윽한 모성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20. 이처럼 하나님의 모성이야말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최대의 선물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다. 부성이 결코 미칠 수 없는 이 모성 때문에 가톨릭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라아를 신격화하여 ‘성모 마리아’로 섬기면서 모성에 대한 갈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 마리아가 도저히 흉내낼 수조차 없는 하나님의 모성을 완벽하게 지니고 계신다. 부성과 모성을 동시에 지니신 하나님, 바로 그 분만으로도 우리는 족하고도 남는다.
▶셋째, 하나님은 ‘복 주시는 분’이시다.
1.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분’이신 그 근거는 무엇인가? 창세기 1장 27절, 28절에서 그리고 창세기 5장 1절, 2절의 계시를 통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 1:27, 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창 5:1, 2]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2. 무엇이든지 ‘첫 번째 것’은 늘 중요하다. 왜냐하면 첫 번째 것이 나머지 모든 것의 성격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제일 먼저 행하신 행동은 인간을 향한 요구가 아니었다. 그 분의 첫 번째 행동은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었다.
3.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도대체 무엇을 주셨는가? ‘복’을 주셨다. 그것도 며칠 혹은 몇 달이 지나서가 아니라, 사람을 창조하시던 그날 즉시로 주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즐겨하는 분이심을 확인할 수 있다.
4.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제일 처음으로 주시기를 주저치 않으셨던 ‘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간단하게 한 마디로 말한다면, 복이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에프터 서비스(After service)”라 정의할 수 있다.
5. 값비싼 물건일수록 에프터 서비스는 철저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것 없이는 제품을 제품답게 사용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경우 조그마한 나라가 하나만 풀려도 그것은 위험한 흉기가 되고 만다. 그래서 사람들은 에프터 서비스가 보장되지 않은 제품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6. 그러니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우리 인간이랴?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에프터 서비스 없이는 결코 사람답게 존재할 수가 없다. 그것 없이는, 인간이란 서로가 서로를 해치는 흉물이 되고 만다.
7.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복을 구하는 것, 즉 기복(祈福)은 나쁘지 않다. 만약에 이것을 부정한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란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5장 2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먼저 받음으로,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8.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기복주의만은 철저하게 배격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복주의란 하나님이 아닌, 복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동차 주인이 메이커의 에프터 서비스를 자동차의 목적으로 삼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이 자동차를 구입하는 이유는 교통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함이고 에프터 서비스는 그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만약에 에프터 서비스 자체를 목적 삼아 허구한 날 정비소에만 서 있는 자동차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자동차가 아니다.
9.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피조물인 인간의 목적은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그것이 인간 삶의 목적이고, 복이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은총이다.
10. 그런데 이 사실을 망각하고 복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자는, 에프터 서비스를 목적으로 삼는 자동차가 자동차일 수 없듯이, 결코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가 없다. 그 대신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과는 무관한, 비인격적인 복이란 우상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에 불과하다. 우상이야말로 인간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흉기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한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훈련시키시는 분’이시다.
1.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시는 분’이신 그 근거는 무엇인가? 창세기 15장 13절의 계시를 통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 15: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2.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브람은 아브라함의 옛 이름)에게 앞으로 태어날 그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 할 것을 예언하고 계시는 장면이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면 곧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이라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민족,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신 ‘선민(選民)’들이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가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고 하나님께서 고백하셨던 바로 그 민족이다.
3. 하나님께서 이토록 사랑하시고 그토록 친히 지키시는 이스라엘이라면, 응당 이스라엘 민족은 대궐 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면서 비단금침으로 된 잠자리에 들어야만 될 것 같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아직 형성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예비하셨던 것은 혹독한 노예생활이었다.
4. 그렇다면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를 반드시 ‘훈련시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왜 사병보다 장교가 될 사람들이 더 길고 심한 훈련을 받아야만 하는가? 제대로 훈련 받은 자만이 강한 자가 되고 지도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능력을 타고났다 해도 훈련이 없다면, 그 능력은 능력으로 발휘될 수 없다. 정상을 정복하는 데에 왕도란 있을 수가 없다. 오직 훈련만이 비결이다. 이제껏 훈련 받지 않는 자가 올림픽 메달을 땄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5. 지독한 훈련을 통해 삶의 지혜와 능력을 터득하게 된 이재철 목사님의 예) 이재철 목사님은 대학 졸업 후에 유대인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그는 새벽같이 집을 나가면 하루 종일 쉴 틈도 없이 일하다가 거의 매일 어김없이 밤 12시에 집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처리하는 양의 업무를 다른 회사에서는 세 사람이 감당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유대인 책임자를 만나 자신에게 보조 직원을 뽑아 주든지, 사표를 받는지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6. 그때 유대인 지도자는 군인들의 지독한 훈련의 예를 들면서 훈련을 지독하게 잘 받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들을 더 잘 훈련시키며 통솔할 수 있는 유능한 지도자가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 목사님이 사병이 아니라 장군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미스터 리가 장군이 되기 원한다면 계속 뛰어야 합니다. 미스터 리가 직접 해 보지 않으면, 아무리 사람을 뽑아주어도 미스터 리가 그들을 통솔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미스터 리의 상관일 수 있는 것은 나 역시 그런 훈련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7. 그런 후 이 목사님에 대한 인정사정없는 유대인 지도자의 강훈련은 근 1년이나 더 계속되었다. 마침내 때가 되었을 때, 그는 이 목사님에게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한 사람이나 더 많은 보조 직원을 뽑아주었다. 이 목사님은 그 이후로 이제껏 살아오면서 어떤 일이든지 두려워 해 본적이 없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초창기를 그토록 강훈련으로 단련시켜 주었던 유대인들에게 아직도 감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8.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까닭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무력한 자로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숙달된 도구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의 훈련 앞에 내려놓음으로 강인한 하나님의 일꾼,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신뢰 받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
9.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고독한 훈련을 받았던 것도,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심지어는 미친 시늉까지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가혹한 훈련을 받았던 것도 모두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들이 그와 같은 하나님의 훈련에 자기를 온전히 맡김으로 위대한 지도자들이 될 수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0.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서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다면 우리는 아직 참된 하나님의 자녀일 수가 없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지금 전혀 뜻하지 않는 시련과 어려움 속에 처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훈련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믿으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리기 시작하셨음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11. 따라서 그 시련을 피하지 말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맞서라. 하나님께서 필히 우리를 아브라함처럼, 모세 혹은 다윗처럼 우뚝 세워주실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더욱 더 강한 훈련으로 연단시키는 하나님에 대한 기가 막힌 경구가 있다. “Don`t pray for an easy life, but pray to be a strong man ? 편안한 삶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고,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기도하라.”
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모두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구원 받은 모든 자가 다 하나님의 신뢰를 받는 일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훈련을 감당한 사람만 가능하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위대한 인물들이 다 그와 같이 훈련 받은 사람들이다. 이 사실을 믿는 자가 하나님의 훈련에 기쁨으로 자기를 내어놓는다.
13.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미친 시늉마저 해야 할 정도로 혹독한 훈련을 받을 때에, 그는 하나님을 원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했다. “[시 34:7-10]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4.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 체하지 않고서는 목숨을 부지할 수조차 없는 그 처참한 상황 속에서, 다윗은 어찌 이렇듯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양할 수 있었던가? 훈련자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을 더 강한 자로 세워주시기 위해 훈련시키고 계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훈련에 기꺼이 뛰어들게 만들었고 그 결과,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이스라엘 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스라엘 국기에 ‘다윗의 별’이 그려질 정도로 시공을 초월하여 사람들로부터도 존귀함을 얻게 된 것이다.
15.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제부터는 단지 편안한 삶만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훈련 속에서 강인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역사는 늘 이런 사람들에 의해 새로워진다.
▶다섯째,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1.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그 근거는 무엇인가? 창세기 17장 1절의 계시를 통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 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일 먼저 하나님 자신에 대해 일깨워 주신 것이 ‘전능성’이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아는가? 만약에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하셨다면 우리의 부모님과 별반 틀릴 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부모님 또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우리 역시 우리의 자식을 내 생명처럼 사랑하기 때문이다.
3.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인고로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과 결코 같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실 수 있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길 수 있다.
4.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능성을 제일 먼저 우리에게 가르치셨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우리는 유한한 존재임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돈 자랑은 돈 없는 자에게만 가능하다 자기보다 돈이 많은 자에게 돈 자랑을 하다가는 상대의 비웃음만 살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당신의 전능성을 강조하신 것은 인간의 유한함을 처음부터 강조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한순간도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망각치 말아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5.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간들이 마치 자신이 전능한 양 착각하고, 바로 그 착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단절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인간은 전능한 존재일 수 있는가?
6.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알게 된 이재철 목사님의 예) 90년 대 봄 이재철 목사님의 둘째 아이가 강남 YMCA 2층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다. 이때 아이의 양 턱뼈가 부러지고 아래턱과 입술 그리고 잇몸이 찢어졌다는 진단이 나왔다. 피가 계속 나왔기 때문에 아래턱, 입술 그리고 잇몸을 꿰매는 응급수술을 해야 했는데 마취가 불가능했다. 높은 곳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혹 뇌를 다쳤을지 모를 일이었는데 이럴 경우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7. 그래서 마취 없이 아이의 맨살을 꿰매는 수술을 감행했다. 아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아이의 온 몸을 침대 시트로 싸 감았고 장정 세 사람이 아이의 사지를 온 힘을 다해 움켜쥐었다. 나중에 보니 아이의 머리를 잡았던 부위에 피멍이 들 정도로 어른들은 힘을 썼다. 바늘이 맨살을 꿰뚫을 때마다 아이의 몸이 마치 도마 위의 생선처럼 튀었기 때문이다.
8. 그때 아이는 이 목사님을 애절한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아빠, 나 좀 꺼내주세요. 아빠, 제발 나 좀 꺼내주세요.” 하며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 어찌 아비된 마음이 편할 수 있었겠는가? 아이의 울음소리가 이 목사님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아니 아이의 턱과 잇몸에 바늘이 들어갈 때마다 이 목사님의 턱이 아프고 잇몸이 아렸다. 그러나 그때 목사님은 그렇게 몸부림치는 아이에게 “승국아, 이제 곧 끝나. 조금만 더 기다려”라는 말 이외에는,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9. 그때보다 더 자신의 무력함을 통감했던 적은 없었다. 그 아이는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다. 그 아들이 태어나던 날, 얼마나 감격했던가? 그 아이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해 주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그 아이가 나의 도움이 가장 절실하게 요청했을 때, 자신은 단 한 시간에 불과한 수술의 고통으로부터도 자신의 사랑하는 아이를 구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10. 이처럼 참으로 너무나 무력하고 유한한 존재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실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자식이 위급함에 빠졌을 때에 그의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은 차치해 두고서라도, 자신의 생명과 직결된 물이나 공기 한 모금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11. 그러나 이처럼 무력하고 유한한 인간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아버지가 되어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전능하시다는 것은 하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의 전능성을 힘입어 인간의 모든 유한함을 뛰어넘는 것이다.
12.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가? 마치 보석을 뿌린 듯 수많은 별들이 빛나는 밤하늘에서인가, 아니면 끝도 없이 펼쳐진 신비스런 바닷속에선가? 그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전능성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음은 분명하다.
13.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성은 실은,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사 새사람되게 하셨다는 데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이 있다면 우리 같은 죄인이 구원 받았다는 것이요,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전능성이 이룬 기적이다.
14. 우리 같은 죄인이 구원받아 새사람 되었다는 이 사실이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전능성인 것을 증거하는 이재철 목사님의 간증) 이 세상 사람은 다 몰라도, 나는 내가 얼마나 흉측한 삶을 살아왔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의 더러운 과거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인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아니었던들, 그 과거로부터 나는 절대로 목사가 될 수 없었다.
15.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죽음의 구렁텅이로부터,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를 구원해 내셨다. 어떻게 그 불가능한 일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 두말 할 것도 없이, 그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6. 그렇다면 영원한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실 정도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를 살려내신 하나님께서 그 전능하심으로 어찌 우리의 일평생을 또한 책임져 주시지 않으시겠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17.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 앞을 걸어가라고 하시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뒤에서 우리의 백 그라운드(Back Ground)가 되어 주시겠다는 뜻이다. 그렇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백 그라운드가 되실 때에라야 우리는 비로소 완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뒤에 계시는 그분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여섯째,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 하나님께서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신 그 근거는 무엇인가? 창세기 22장 13절, 14절의 계시를 통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 22:13, 14]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2.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그리고 100세에 얻은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칠 것을 명령하셨다. 그것은 실로 수행 불가능한 명령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은 한마디의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순종했다.
3.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건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그의 자녀에게 주신다고 하셨기에 그의 아들을 죽이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과, 설령 죽는 경우가 발생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당신 자신의 약속을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반드시 다시 살리실 것을 굳게 믿었다.
4. 이와 같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모리아 산으로 가서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믿었던 대로 이삭을 살려주셨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삭 대신 하나님께 번제로 바칠 제물인 양이 이미 예비 되어 있었다. 그 순간 아브라함이 창세기 22장 14절에 나오는 것처럼 ‘여호와 이레’라고 고백하였다.
5. ‘여호와 이레’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예비하신다는 뜻이다. 사글세 셋방에 사는 부부라도 자식이 태어날 때가 가까워지면 자식을 위해 기저귀며 옷가지 등을 미리 준비한다. 그리고 그 자식이 장성하여 결혼을 하려 하면 형편껏 혼숫감을 준비한다. 이것이 인지상정이다.
6. 하물며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죽음에서 살리시고 구원하신 전능자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를 위하여 미리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예비해 두시지 않으시겠는가? 이재철 목사님 역시도 자신의 삶 속에서 ‘여호와 이레’ 하나님에 의해 준비되어 있었던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웠었던지에 대해 [나의 고백 / 홍성사]이라는 책에서 상세하게 밝혔다고 했다.
7. 여호와 이레 즉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이재철 목사님의 또 다른 간증) 이재철 목사님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 자신은 일평생 돈을 모으기 위해 통장을 갖지 않을 것과 자기 이름으로 등기된 집을 소유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아내의 동의를 얻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달이 아내가 오래 전부터 부어오던 적금을 찾는 달이었다.
8. 이때 이 목사님의 사모님 역시 이 적금부터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위해 쓰기로 하고, 마침 형편이 어려워 등록하지 못한 신학생들을 위해 그 돈을 신학교로 보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 학생들을 위해 사모님으로 하여금 몇 년 전부터 적금을 들도록 예비하셨던 것이다. 아직 신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그들을 위하여 사모님을 도구로 사용하시어 등록금을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비하심이다.
9. 이처럼 우리를 향하신 오묘하신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모두 다 고백하려면 며칠 밤을 세워도 모자랄 것이다.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날마다 우리와 함께 하고 있기에 우리가 이렇듯 살아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10. 따라서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근심하지 말라. 지금 우리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절망하지 말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하시는 전능자이시다. 그러므로 그 분은 우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이미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고 계신다.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건을 연출하고 계시고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계신다.
11.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 근심하지도 말라. 그 대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먼저 확립하라.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해 두고 계신 그것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들에게 안겨주실 것이다.
▶일곱째,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그 근거는 무엇인가? 창세기 28장 15절의 계시를 통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2.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말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다. 그만큼 깊고도 넓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그 자식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 자식과 함께 언제나 할 수는 없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부모는 결코, 영원토록 자식과 함께 할 수가 없다. 부모는 반드시 그 사랑하는 자식을 남겨두고 먼저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한다.
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은 물론이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고 굳게 약속하시는 까닭이다.
4.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모양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가? “[사 52:12]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을 행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뒤에서도 우리를 호위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
5.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 앞에도 계시고 뒤에도 계실 수 있는가? 이 세상에는 수십 억의 인구가 살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개개인의 앞과 뒤에 개별적으로 계실 수가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면서 또한 빛이신 고로 가능하다. 그렇다. 빛이신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 것(전등, 태양빛)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분이시다.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빛이시다.
6. 땅속이든 바닷속이든 하늘 위든 그 빛이 이르지 않는 곳(공간)은 없다. 과거든 미래든 영원후든 그 빛이 닿지 않는 시간 또한 없다. 그러므로 그 빛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언제 어느 곳에 있든 우리와 늘 함께 하실 수 있다. 낮 동안에 땅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앞에도 뒤에도 태양빛이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 수십 억의 인구가 있다 할지라도 빛이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개개인의 앞에도 뒤에도 계시는 것이다.
7. 이 사실을 터득한 다윗은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했다. 시편 139편 5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이다. “[시 139:5-10]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8.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알았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자기의 계산과 어긋나는 결과 주어졌을 때, 재난이 닥쳤을 때, 절망하고 근심하며 불행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어떤 경우든지 불행이나 절망이 있을 수 없다.
9.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결코 불행일 리가 없다.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쁜 결과를 주시기 위해 그런 상황을 연출하실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계산과 방법으로 그대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이다.
10. 욥을 보라. 욥은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었다. 재산, 가정, 명예, 건강 등, 모든 것을 철저하게 잃었다. 그야말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처참한 형국이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그것이야말로 고통스러운 불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고 계신 중에 그 같은 사건들이 터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건들은 불행일 수 없었다. 오히려 욥을 연단하여 더 크게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11. 요나는 또 어떤가? 다시스로 가던 요나는 무서운 폭풍이 몰아치는 바닷속으로 내던짐을 당했다. 절망의 순간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던가? 아니다. 하나님이 요나와 함께 하고 계셨기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것은 절망일 수 없었다. 오히려 가야 할 자리, 있어야 할 자리인 니느웨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었다.
12. 이처럼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에만 비로소 ‘범사에’ 감사할 수 있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고 노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고 계시기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끝은 반드시 선한 결과로 귀결될 것임을 믿는 까닭이다.
13. 그래서 다윗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고백했다. “[시 23:4, 5]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처럼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상황 속으로 빠져들 때에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사망의 골짜기로 떨어졌다면, 그 골짜기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막대기와 지팡이를 경험케 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의 골짜기임을 알았던 까닭이다.
14.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 절망하며 근심하고 있는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지금 바로 이 순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하나님께서 지금 그와 같은 상황을 우리에게 연출하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불행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행복을 주시기 위함임을 잊지 말라.
15.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의 능력과 계획을 제한하고 재단하려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범치 말라. 그대의 생각이나 계획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하나님을 끝까지 그리고 전폭적으로 신뢰하라. 그때 비로소 창조주 하나님의 뜻하심이 우리 삶 속에서 아름답게 펼쳐질 것이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신 이 말씀을 진심으로 굳게 믿는 자들이 되자. “[사 55:8, 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17.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믿음이요 순종이며, 이 터전 위에서만 인간의 절망과 근심과 두려움은 종식된다. 아니 이 기초 위에서만, 인간은 참된 평강과 소망 그리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여덟째, 하나님께서는 ‘져주시는 하나님’이시다.
1. 하나님께서 ‘져주시는 하나님’이신 그 근거는 무엇인가? 창세기 32장 22절에서 30절까지의 계시를 통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 32:22-30]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2. 지금 야곱이 만나 함께 씨름했던 ‘어떤 사람(24절)’이란 바로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야곱은 그 장소를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이름 지었다. 본문은 야곱이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이겼다고 증거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승리자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그 의미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다.
3. 그런데 생각해 보라. 아니 어떻게 하찮은 인간이 하나님을 이길 수 있었다는 말인가? 천지를 창조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연약한 인간을 이기지 못하셨다는 말인가? 그 해답은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져주셨기 때문이다.
4. 져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재철 목사님의 예) 이재철 목사님에게는 4명의 남자 아이들이 있는데 종종 목사님과 씨름을 한다. 이때 결과는 언제나 아이들이 백전백승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그건 이재철 목사님이 일부러 져주기 때문이다. 만약 목사님이 힘을 다해 아이들을 쓰러뜨린 뒤 그 어린 아이들을 이겼다고 두 팔을 들고 기뻐 만세를 부른다면 그런 아빠는 온전한 정신을 가진 아빠일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아빠는 아빠이기 때문에 어린 자식과의 씨름에서 반드시 질 수 밖에 없다.
5.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으시다. 하나님께서 힘이 없는 인간에게 이기심을 기뻐하신다면 그 분은 참된 하나님일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연약한 인간에게 져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언제나 응답해 주신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요청과 요구를 해도 말이다.
6. 그렇지 않은가?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청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가? 하나님을 향하여 입만 열면 요청이요, 요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귀찮다 하지 않으신다.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신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는 ‘져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7.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져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의 모든 허물까지도 용서해 주신다. 우리는 과연 우리에게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몇 번이나 계속해서 용서해 줄 수 있을까? 같은 잘못을 범하는 자를 세 번만 계속해서 용서해 준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성자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8. 사람들은 전과가 있는 자들을 꺼려한다. 전과 몇 범만 되어도 사람들은 아예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도대체 어떠한가? 전과 수백 범, 아니 수천 범, 수만 범들이 아닌가? 매일 끊임없이 같은 죄를 반복하고 있지 않는가?
9.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같은 흉악범들을 어찌 계속하여 용서해 주시는가? 어찌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려 당신의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셨던가? ‘져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져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용서해 주신다.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고 먹보다 더 검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는 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져주신다.
◆결론
1. 이제껏 우리는 창세기를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함께 살펴보았다. 한마디로 좋으신 분이시다. 이처럼 좋으신 분이 또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좋으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셨다(막 14:36). 아빠라는 호칭 앞에서 아이는 아빠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갖는 반면, 아빠라는 호칭 앞에서 아빠는 아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진다. 아빠는 아이와 함께 하는 한, 아이는 아무 것도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빠’란 호칭보다 더 좋은 호칭은 없다.
2. 하나님께서는 누구신가? 바로 우리의 아빠이시다. 우리를 위하여 모든 책임과 의무를 다하시는 사랑의 아빠이시다. 모든 아빠는 자기 아이에게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 보인다. 그래서 우리의 아빠이신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계신다.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3. 하나님께서는 이 고백만으로는 양이 차지 아니하셨던지,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렇게 고백하신다. “[사 49:15, 16]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4.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에게, 단 한시라도 아이를 잊어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면, 한결같이 없다고 대답한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재미있는 TV 연속극을 볼 때 자식을 잊어버린다. 친한 친구를 만나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밤에 잠을 자는 동안에는 두말 할 것도 없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여성들이 자식을 생각하는 시간보다는 잊고 있는 시간이 훨씬 더 길다.
5. 그러나 우리 아빠이신 하나님께서는 여인이 그 젖 먹는 자식을 잊을지라도 아빠 당신께서는 잊지 않는다고 고백하신다. 바로 우리의 아름을 당신의 손바닥에 새겨두셨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이름을 써두셨더라면 언젠가는 지워져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새겨두셨기에 영원히 지지지 않는다. 내 이름을 손바닥에 새겨두시고 매일 그 이름을 들여다보시며, 내게 어떤 좋은 것을 줄까 생각하고 계시는 하나님 아빠의 고백은 얼마나 감격적인 고백인가?
6. 그러나 아빠께서는 그것도 부족하시어 이번에는 그대를 위해 사랑의 노래까지 불러 주신다.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7. 우리 때문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는 아빠,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잠잠히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아빠, 우리로 인해 즐거이 노래를 부르시는 아빠 - 그 하나님 아빠께서 우리와 함께 지금 함께 하고 계심을 우리는 알고 있는가? 우리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든, 그 하나님 아빠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동행해 주실 것을 우리는 믿고 있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더 이상 한숨의 골짜기에 머물지 말라. 지금 당장 하나님 아빠를 의지하고 굳건히 서라. 그것이 참된 용기요, 믿음이요,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