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르주아 <시청 진격-아르콜다리> 1830년, 캔버스에 유채, 145 x 192 cm, 베르사이유 미술관
Prise de l'H?tel de ville - le Pont d'Arcole : Am?d?e Bourgeois
다리스토리 : 기술과 예술을 넘어서 The Story of Bridges : Spanning Technology and Art
나폴레옹과 아르콜 다리: 7월 혁명의 심장이 되다
Napoleon and Pont d’Arcole: At the Heart of the July Revolution
19세기 초 프랑스. 나폴레옹의 제1제정이 끝나고 왕정복고가 시작되었다. 부르봉 왕조가 부활한 것이다. 그러나 집권한 왕당파가 경제공황에 제대로 대응을 못하자 의회에는 자유주의자와 좌익세력이 늘어났다.
이에 왕당파는 세력확장을 꾀하며 노골적으로 선거에 간섭하게 되면서 1830년 ‘7월 혁명’을 자초한다. 그리고 왕정복고는 막을 내린다.
이 그림은 아메데 부르주아 Am?d?e Bourgeois (1798-1837)라는 프랑스 화가가 1830년 7월 혁명 직후에 그린 그림이다.[1] 7월 28일 시민군이 시청으로 진격하는 장면을 담았다.
그림의 제목이 말해주듯 다리가 주인공이다. 개선문처럼 생긴 다리의 주탑 근처에 한 젊은이가 삼색 국기를 두 손으로 들고 돌진하고 있다. 강 건너 시청 광장에서 왕실 경비대가 총을 쏘아대고 있다.이 용감한 국립공과대학 ?cole Polytechnique 학생은 곧 총탄을 맞고 쓰러질 것이다.
그림의 전면에는 강둑의 난간을 방패 삼아 건너편 시청의 탈롱 장군의 군대와 교전 중인 시민군이 그려져 있다. 옷을 잘 차려 입은 부르주아와 허름한 복장의 노동자들이 함께 싸우고 있다.
심지어는 제복을 입은 현역 군인들마저 합세해 싸우고 있다.왼편에는 부상당한 시민의 발목을 치료하는 의사도 보인다. 모든 계급의 시민이 하나되어 혁명에 동참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림의 오른 쪽에는 또 하나의 삼색기가 선명하다. 청색 블라우스와 붉은 치마 그리고 흰색 앞치마로 상징되는 한 평범한 여인의 복장이 그것이다. 바구니에는 빵과 와인 병들이 담겨있다.
이 여인은 총을 들지는 않았으나 부상자를 돌보고 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있다. 혁명군을 응원하는 시민의 마음일 것이다. 들라크루와의 유명한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2] 에서처럼 프랑스와 자유와 여인은 하나다.

19세기 초반의 아르콜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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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브 인도교’라는 이름의 현수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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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시청과 시테 섬을 연결할 다리의 필요성은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으나 19세기에 들어 결국 샤를 10세 시절에 실현된다. 7월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828년 보행자 전용 현수교가 건설된 것이다.
(샤를 10세는 이 다리로 말미암아 2년 뒤 자신이 축출되는 운명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당시는 프랑스 전역에서 현수교가 크게 유행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 곳에 현수교가 건설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샤를 10세는 다리 공사를 당시 파리 시내에 있던 다리 세 개를 운영하던 드자르댕 Alain Desjardins 에게 위임했다. 다리 설계는 프랑스 현수교의 대부 세겡 Marc Seguin 이 맡았다.

이 현수교는 중앙에 주탑이 있는 2경간 현수교로 총 길이는 92미터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체인 케이블은 두 개의 반 현수곡선으로 양안의 교대에 설치된 주철 프레임을 통해 고정되었다. 다리의 양편에 각각 두 본의 체인 케이블이 사용되었고, 체인은 직경 4.8 센티미터 길이 3미터인 철봉을 연결하여 제작되었다.
교대와 교각 그리고 주탑 모두 석재로 건설되었다. 높이 7.6미터에 폭이 3미터인 주탑의 중앙에는 2.7미터 넓이의 아치가 있고 약 6미터의 높이에 케이블을 연결하는 구멍이 냈다. 수직 행어는 2.5 cm 크기의 정사각형 단면 바를 사용했다. 다리 난간은 주철로 제작되었다.[3]
경간이 세 개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현수교에 익숙한 눈에는 다리의 형태가 다소 낯설긴 하지만 다리의 미관이 그리 나쁘지 않다. 당시는 이런 형식의 현수교를 흔히 볼 수 있었는데 강폭도 그다지 크지 않고 보행자와 마차만 다녔기에 가능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다리 중앙의 주탑은 개선문 형태의 기념비적인 구조물로 무게감이 있어 주변 건축물과의 조화도 괜찮은 편이다. 1828년 12월 21일에 개통된 이 다리의 공식 명칭은 “그레브 인도교 Passerelle de Gr?ve”였다.
다리가 연결되는 시청 앞 “그레브 광장”을 따른 자연스러운 이름이다.
그런데 이 다리의 이름은 7월 혁명이 끝난 후 돌연 “아르콜 다리 Pont d’Arcole”로 바뀐다.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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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콜 다리 위의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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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그림은 프랑스의 저명한 신고전주의 화가 그로 Antoine Jean Gros (1771-1835)가 그린 나폴레옹의 초상이다. 그림의 제목이 <아르콜 다리 위의 보나파르트>다.
1796년의 이탈리아 원정에서 깃발을 휘날리며 적진의 포화를 무릅쓰고 다리 위로 진격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담고 있다. 청색 제복에 붉은색과 흰색이 뒤섞인 화려한 허리띠로 프랑스의 삼색기를 상징하며 “공화국의 구원자” 나폴레옹의 영웅상을 강조하고 있다.
그로의 그림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영웅의 이미지가 용맹스럽고 근육질인 용사의 이미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림의 이미지는 대신 지적이고 감성적인 예술가의 이미지다. 장발로 풀어헤친 머리와 섬세한 이목구비 그리고 창백한 얼굴은 군인보다는 시인이나 음악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적극 활용했다. 어쩌면 정치적 선전에 이용될 수 있는 문화와 이미지의 힘을 가장 확실하게 깨닫고 있던 인물이 아마도 나폴레옹이지 않았을까.

그로 <아르콜 다리 위의 보나파르트> 1801년, 캔버스의 유채, 130 x 94 cm, 베르사이유 미술관
이 그림의 제목에 등장하는 아르콜 다리는 물론 앞서 본 부르주아의 <시청진격-아르콜 다리>에 나오는 그 “아르콜” 다리가 아니다. 이탈리아 베로나 근처의 “아르콜라 Arcola”라는 마을 근처에 있던 다리다.
1796년 11월 15일부터 3일 동안 벌어진 이 전투를 “아르콜 다리의 전투”라 부른다. 패색이 짙던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에게 승리를 거둔 보나파르트는 일약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다.
1799년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제1통령으로 취임한다. 그리고 1804년 프랑스인들은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찬성표를 던져 나폴레옹을 황제로 선출한다.
나폴레옹은 결국 그가 스스로 수호자임을 자처하던 “프랑스 혁명(1789)”의 이상을 배반하고 혁명이 무너뜨렸던 앙시앙레짐의 권좌를 고스란히 찬탈한 것이다.

Augereau on the bridge at Arcole, 15 November 1796
떼브냉 <아르콜 다리의 오주로, 1796년 11월 15일> 1798년, 캔버스에 유채, 362 x 268 cm,베르사이유 미술관
여기 그림이 하나 더 있다. 이 그림은 떼브낭 Charles Thevenin (1764-1838)이라는 화가가 그린 <아르콜 다리의 오주로, 1796년 11월 15일>이라는 그림이다.
그런데 날짜까지 포함된 이 그림의 제목에는 “보나파르트”가 아니라 “오주로”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다.
어찌된 영문인가?
이 그림은 아르콜의 전투에서 오주로 Augereau 라는 젊은 장교가 다리를 탈환하고 보나파르트가 도착할 때까지 다리를 지켜낸 것을 그린 그림이다. 이것이 진실된 역사다.
나폴레옹은 실제로 다리에서 60보 정도 떨어진 뒤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 역사적인 장소에서 오주로를 몰아내고 자신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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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활용한 홍보 전략가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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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목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나폴레옹의 야심과 재주가 비상하지 않은가. 아마도 근대의 군주 가운데 이미지의 힘을 가장 잘 이해하고 정치적 선전에 활용한 지도자는 나폴레옹이 아닌가 싶다. 그의 비상한 재주는 아래의 그림에도 잘나타나 있다.
이 그림은 나폴레옹의 이집트-시리아 원정 시절에 일어난 일을 묘사하고 있다. 나폴레옹이 이끈 프랑스 군이 시리아의 자파Jaffa 를 무자비하게 함락시킨 직후 역병이 돌아 많은 군사가 병에 걸렸다.
그러자 자파의 한 모스크에 임시 병원을 설치하고 환자를 수용했다. 이 그림은 이 병원을 방문하여 환자를 살피는 나폴레옹을 묘사하고 있다.

그로 <자파 역병환자 수용소를 방문한 나폴레옹> 1804년, 캔버스에 유채, 532 x 720 cm, 루브르 미술관
이슬람식 아치 아래 멀리 성곽 위로 프랑스의 삼색기가 나부끼고 있다. 임시 병원으로 사용하는 사원 안에 벌거벗은 환자가 가득하다. 실상은 이보다 더 비참했을 것이다.
왼편에서는 이슬람 복장을 한 관리들이 환자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있고, 오른편 아래에는 의사가 환자를 돌보고 있다.
그림의 주인공은 물론 나폴레옹이다.
중앙에 당당히 서서 자애로운 눈빛으로 환자의 겨드랑이 상처를 만지고 있다. 그것도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말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그의 등 뒤의 부관은 손수건으로 코를 가리고 있다.
그 옆의 군의관은 놀라서 손을 떼라고 제지하고 있다.
전면을 향해 서서 왼손을 내밀고 서있는 그의 자세는 그리스 조각 아폴로 상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예수가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 기적을 일으킨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시리아 소위 “동방”의 원정에 나섰던 나폴레옹은 내심 알렉산더 대왕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은 야심을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시리아에서 후퇴할 당시 역병에 걸린 수십 명의 군인들에게 치사량의 아편을 투여하여 안락사를 시켰다는 소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그림이 필요했지 않았겠는가.
이집트 원정 시 나폴레옹은 장군에 불과했으나 이 그림을 제작할 당시는 황제의 꿈이 무르익고 있을 때였다. 길이가 7미터가 넘는 엄청난 크기의 이 그림은 물론 나폴레옹이 의뢰한 것이다. 이 그림은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로 선출되고 대관식을 하기 전까지 7개월 동안 파리 살롱에 전시되었다.
창의적 전략가였던 나폴레옹은 “그림 한 장이 천마디 말보다 났다”고 했다던가. 그에게 예술은 권력이었다. 또한 그에게 권력은 일종의 예술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권력을 사랑한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권력을 사랑한다. 소리를 내고 화음을 만들기 위해 음악가가 자신의 바이올린을 사랑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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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브 다리가 아르콜 다리로 바뀐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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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그레브 다리”가 1830년 7월 혁명 후 슬그머니 “아르콜 다리”로 바뀐 것을 언급했다. 그리고 아르콜과 나폴레옹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그런데 시민혁명 이후에 그레브 다리가 어떻게 황제 나폴레옹의 아이콘인 아르콜 다리로 바뀔 수 있었을까? 상식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1830년의 7월 혁명은 나폴레옹이 실각한 지 이미 한참 지난 후에 발발했다. 이 혁명은 ‘왕정복고’로 왕이 된 샤를 10세가 경제정책에 실패하자 불만에 쌓인 시민들이 왕을 축출하기 위해 들고일어난 혁명이었다.
혁명은 성공했고 결국 샤를 10세가 축출된다. 그리고 루이-필립이 왕좌에 오른다.
“프랑스의 왕”이 아닌 “프랑스인의 왕”으로서. 다시 말해 스스로 왕위를 “계승”한 것이아니라 혁명과 국민의 힘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뜻이다. 소위 입헌군주가 된 것이다.
그런 루이-필립이 왕좌에 오르자마자 나폴레옹을 기리기 위해 “그레브” 다리를 “아르콜” 다리로 바꿨을 리는 없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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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 내 이름은 아르콜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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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첫머리의 부르주아의 그림으로 돌아가보자.
그리고 혁명의 그날, 삼색기를 들고 다리를 질주하던 용감한 공과대학생을 상기해보자.
전해 오는 사연은 이렇다. 이 청년은 다리 중앙에 있던 아치 위에 삼색기를 꽂고 내려오다가 다리 저편의 군인들이 쏜 총탄에 맞고 쓰러진다. 그러자 그의 용맹에 용기를 얻은 시민들이 쏟아지는 총탄 속으로 다리를 건너 진격하게 된다. 죽기 전 그가 시민들에게 “동지들, 내가 죽거든 내 이름이 아르콜이라는 것을 기억하시오! 복수를 부탁하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파리 시민 사이에 회자되면서 혁명이 완수된 후 다리 이름이 “아르콜”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4]
과연 그랬을까? “아르콜”이라는 이름은 그날 죽은 사망자 명단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7월 혁명에서 죽은 사망자 504명의 명단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찌 된 일인가?
이런 저런 설들이 있다. “아르콜”이라는 이름은 그 청년이 애국심의 발로에서 사용한 가명이라는 설을 포함해서. 어떤 것이 진실일까?
혁명이 끝난 직후 당시 국민 시인이었던 드라비뉴 Casimir Delavigne (1793-1843)는 <파리에서의 일주일>이라는 서사시를 발표한다.[5] 7월 28일의 격렬한 전투를 소재로 한 시다.
특히 이 전투에서 용맹을 발휘하다 장렬히 산화함으로써 결국 격분한 시민들이 시청을 장악하도록 만든 대학생 “아르콜”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시의 10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와서 그의 마지막 말을 들어라 나폴레옹의 거대한 그림자! 그 이름을 새기는 것은 너의 몫 새 아르콜 다리의 교대 위에”
아마도 그 청년이 시민들에게 전하고자 한 것은 “내 이름이 아르콜이라는 것을 기억하라”가 아니라 “아르콜을 기억하라”였을 것이다. 나폴레옹이 아르콜 다리에서 적의 총탄을 뚫고 진격하여 값진 승리를 쟁취한 것처럼 정규군의 총탄을 겁내지 말고 진격하여 혁명을 완수하라는 의미로 말이다. 결국 혁명은 성공했고 샤를 10세는 퇴위된다.
나폴레옹의 정치적 선전은 성공한 것이다. 젊은 청년의 머리 속에 정치적인 이상을 떠나 아르콜 다리의 의미를 확실히 심어주었으니까 말이다. 아니, 그 뿐 아니라 청년이 삼색기를 들고 선두에서 진격하는 모습을 목격한 시민들은 바로 그 순간 이탈리아 전장의 “아르콜” 다리와 나폴레옹을 떠올렸을 테니 말이다.

비가 내리고 있는 현재의 아르콜 다리 (필자 사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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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각이 없는 센 강 최초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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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년 아르콜 현수교는 늘어나는 교통량을 감당하기 위해 새 다리로 교체된다.
(파리 시내의 센 강에 놓였던 다른 현수교들의 운명도 비슷하다.[6])
당시 파리는 오스망의 파리 개조작업으로 시테 섬 주변의 도로가 재정비 되는 시기와도 맞물렸기 때문이다. 30년도 채 못 넘긴 이 다리는 마차가 이용할 수 있도록 보다 견고한 근대식 금속 아치 다리로 교체되어오 늘에 이른다.
현수교를 헐고 새로 건설한 금속 아치 다리는 ‘다리도로국’에서 은퇴한 기술자 우드리 Alphonse Oudry (1819~1869)가 설계를 맡았다. 이 다리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교량으로 주철이 아닌 연철로 제작되었고 센 강 최초로 교각이 하나도 없는 아치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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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프랑스 역사의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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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 7월 혁명의 심장이 된 아르콜 다리는 연철 아치교로 교체된 후 금세기 들어 또 한차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파리 수복’이 그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8월 24일, 프랑스의 르클러크 Leclerc 장군이 이끄는 제2 기갑사단의 탱크가 아르콜 다리를 건너 파리 시청으로 진격했다. 그리고 다음 날, 파리의 독일 점령군이 항복했다.
바로 그날 노트르담에서 프랑스 임시정부의 수반 자격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샤를 드골 장군은 아르콜 다리를 건너 많은 환영 인파가 모여있던 시청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격정에 싸여 그 유명한 ‘파리 수복’ 연설을 토해낸다.
“남자와 여자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분연히 일어나서 우리 손으로 파리를 해방시켰습니다. 왜 우리 모두 복받치는 감정을 숨겨야 합니까? ..(중략)..
파리! 성난 파리! 부서진 파리! 순교 당한 파리! 그러나 해방된 파리!
스스로 해방된 파리, 파리 시민에 의해 해방된 파리!
프랑스 국민 모두의 도움으로 해방된 파리!“[7]

시청에서 환영인파로 둘러싸인 드골 장군
다리는 역사의 전환점에서 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서있기 마련이다. 아르콜 다리는 특히 시청과 노트르담을 잇는 길목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사건을 목격했다.
앞서의 7월 혁명뿐 아니라 1848년에 일어난 또 한차례 시민 혁명의 격전지. 그리고 혁명 이후 알제리로 추방당한 사람들에 대한 이별과 축복의 장소. 1871년 파리 코뮌 시절에는 시민군의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곳… 이래저래 아르콜 다리는 파란만장한 프랑스 역사의 산 증인이다.
그러나 다리는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볼 뿐 말이 없다. 하지만, 스스로 연출한 “아르콜” 신화의 주인공 나폴레옹은 이 다리와 함께 영원히 회자되지 않겠는가.

장-자크 샴팡 <1848년 3월 24일, 시청광장에 자유의 나무 심기>의 부분, 1848년, 캔버스에 유채, 30.5 x 40.5 cm, 파리 카르나발레 미술관
참고문헌 [1] Myriam Tsikounas, “Le Pont d’Arcole, 28 Juillet 1830,” http://www.histoire-image.org/site/etude_comp/etude_comp_detail.php?analyse_id=104#retour-note-3 [2] 외젠 들라크루아 Eug?ne Delacroix (1798-1863)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는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그림으로 역시 “7월 혁명”을 그리고 있다. 포연이 자욱한 거리에서 바리케이드를 딛고 올라선 여인이 한 손에 장총을 다른 한 손엔 삼색기를 들고 성난 군중들을 이끌고 있는그림으로 루브르에 전시되어 있다. [3] Charles S. Drewry, "A Memoir of Suspension Bridges", 1832, pp. 106-107 [4] George L. Craik, Paris and Its Historical Scenes, Charles Knight, Pall Mall East, 1831. pp. 159-160 (필자가 참고한 eBook 버전은www.forgottenbooks.org 에 의해 2013년 출판) [5] Casimir Delavigne, Nouvelle Messenienne “Une Semaine a Paris,” Alexandre Mesnier, Paris, 1830. p. 10. 들라비뉴의 <신 메세니아인들>에서 메세니아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로 인근의 스파르타와 늘 분쟁을 일으키던 곳이었다. 아래 “프랑스 문서보관소” 사이트의 원문을 옮겼다. http://gallica.bnf.fr/ark:/12148/bpt6k5442934k [6] 파리 시내의 센 강에 있던 다른 현수교들의 운명도 이와 비슷하다. 이에 관한 자세한 스토리는 다른 기회를 빌어 별도로 다루고자 한다. [7] 드골의 연설문은 아래의 사이트에서 옮겼다. http://www.charles-de-gaulle.com/l-homme-du-verbe/speeches/25-august-1944-speech-at-the-hotel-de-ville-in-paris.html
글 :: 이 종 세 Jong-Seh Lee / 한양대학교 건설환경공학과 교수, 우리학회 공공인프라디자인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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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가가 아닌 건설환경공학을 연구하는 사람도 이런 시대적, 역사적 배경의 지식이 있음에 놀랍습니다.
이런 다리 하나에도 그에 걸친 역사적, 인문학적 배경이 있음에 우리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
충분하군요.
저도 이런 걸 만들면서 많이 배운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