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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젼의 사람 이재철목사, 홍성사
이 원고는 당초 2000년 3월 29일부터 31일까지 사흘간 “섬김과 봉사”라는 주제로 진행된 장신대 신학대학원 신앙사경회 주제설교에서 잉태되었다.
1. 눈먼 사람(행 9:1-9)
* 한국교회의 문제점 - 물량주의, 기복주의, 세속주의, 심각한 분열과 대립 및 반목
* 종교학에서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를 구별하는 분기점을 자기부인으로 삼고 있다.
이를테면 해당종교에
자기부인이 있으면 고등종교,
없으면 하등종교로 분류된다.
종교학에서 말하는 자기부인이란 또 다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자기부인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를 위한 자기 욕망의 부인이다. 그래서 종교학은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가지 부인하는 이슬람교와 불교 기독교 세 종교를 모두 고등종교로 분류한다.
고등종교가 타락하게 될 때 예외없이 나타나는 현상
1) 성직자의 급증을 초래
* 고려말 불교타락시, 온고려땅이 스님천지였음.
* 티베트 라마불교의 타락시엔, 티베트 남자의 70%가 승려였다.
* 1979년 회교혁명으로 팔레비 왕조를 몰아낸 회교최고성직자 호메이니는 스스로 이란 제1의 권력자가 되었고, 그 이후 이란은 회교성직자들의 세상이 되었다.
* 카톨릭이 부패했을 때에도 유럽대륙에 신부들이 넘쳐났다.
--> 이유 : 종교에 자기 부인이 없어졌기 때문이고, 성직자체가
모든 사람이 탐내는 세속적인 직업으로 타락했다는 증거임.
--> 적과흑(스탕달)- 1980년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청년들은 적과 흑을 놓고 고민했다. 적(赤)은 카톨릭 사제의 붉은 성의를, 흑(黑)은 판사의 검은 법복을 의미한다. 당시 유럽 청년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성취하기에 카톨릭 사제와 판사 중 어떤 쪽이 유리한지 저울질했다. 카톨릭사제가 되어도 얼마든지 권력을 휘두르고 축재와 축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고등종교의 타락의 현상이었다.
2) 종교기관의 급증
3) 신앙의 기복화
* 신앙이란 절대자인 신 앞에서 인간이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반면에
*미신은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자기 소유나 달란트로 자기 신을 달래고 얼러 신을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변화없이 자기 욕망을 위해 신을 변화시키려고만 한다면 그가 설령 고등종교에 속한 자라 할지라도, 그는 자신의 신앙을 미신과 대체한 자요, 그런 자를 가리켜 기복주의자라고 부른다.
신앙의 기복화가 일어나는 이유 - 모든 종교기관이 서로 교인들을 자기에게 붙잡아 두기 위한 경쟁관계가 됨. 교인들을 붙들어 두기 위해서는 교인들에게 필요한 바른 진리의 말씀보다는, 교인들의 구미와 욕구에 부합하는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자기 종교가 추구하는 영원한 가치를 단순한 복과 저주의 저차원으로, 성직자가 자신의 손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4) 해당 종교의 이해집단화
* 중세 카톨릭 - 세상의 권력을 휘두르며 왕을 파문 시킬 때, 베드로성당 건축을 위해 면죄부를 거리낌없이 판매하던 일등.
* 한국크리스천들의 특징을 표현한 한
유럽목사님의 멘트 - 한국 크리스찬은 세가지 밖에는 모르는 것
같다
첫째는 하나님- 하나님을 향한 열심. 새벽기도 등,
둘째는 자기 자신-이기적이다. 자신과 가족 외에는 안중에도 없다.
셋째는 돈이다.
* 문제가 많은 교회일수록 교회를 옮기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성도들에 대한 목사님의 대답 “ 당장 교회를 옮기십시오, 목회자가 자기 교인을 저주하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집 근처에 다니시기에 가장 편한 교회를 찾아가십시오”라고 한다.
* 문학에는 십대 천재가 나올 수 없다. 그 이유는 문학이란 인간과 인간의 삶을 다루는 영역이기에, 삶의 경험과 경륜없이는 문학자체가 불가하다. 목회도 삶의 경험이 결여된 천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목회역시 그 대상이 인간과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 폴틸리히의 주장 - 철학은 대상을 객관화하는 것이므로 철학자는 가능한 한 대상과 거리를 두어야 하지만, 신학과 목회는 자신을 대상과 일치시킬 때에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그것을 ‘실존적 자세’(existential attitude)라 했다. 삶의 실존적 경륜 없이는, 참된 목회나 신학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실존적으로는 불가능할 수 밖에 없다.
* 예수님 당시의 목수는 대부분 대패와 망치 그리고 못을 넣은 공구통을 메고, 갈릴리의 여러 마을로 고객들을 찾아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당시의 목수는 누구보다도 다양한 인간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또 체험할 수 있었다. 공구통을 어깨에 메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의 모든 동네를 골목골목 누비시면서 인간의 고통과 삶의 애환, 슬픔과 눈물을 똑똑히 보고 경험하셨던 것이다.
* 도전 “ 여러분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선지동산을 찾은 신대원생들입니다. 적어도 신대원생이라면 자신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은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자리에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까? 왜 주님의 빛을 좇아 살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릇되었던 지난 삶에 대해 눈멀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미련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목사가 되기를 원한다면, 총체적으로 부패한 우리 사회의 온작 비리에 이미 물들 대로 물들어 버린 여러분의 눈을 미련없이 버려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토대 위에서 목표로 삼은 것, 꿈꾸고 있는 것, 지향하고 있는 그 모든 것에 대해 철저하게 눈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때에만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좇아 진정한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 수 있고, 뭇 생명을 살리는 참된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2. 비늘 벗은 사람 행 9:10-19
* 주님께서 사울을 굴복시키신 이유가 그를 꺾어 버리는데 있지 않고, 그를 바로 세우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쓰러진 그를 위해 아나니아를 준비해 주셨다.
* 그러므로 참된 신앙생활을 구현하는 것도, 바른 목사가 되는 것도, 진정한 섬김과 봉사의 삶을 추구하는 것도,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 사하라의 불꽃의 저자인 샤를르 드 푸코 -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찬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고 말하는 것만큼 매사에 그 사실을 믿고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건은 현존자신 하나님을 의식하면서부터 시작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 박완서(카돌릭신자, 소설가) - 크리스찬은 더 이상 하나님을 죽이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현존자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아무리 선교와 봉사에 매진한다 한들 치밀어 오르는 감정 앞에서, 욕정 앞에서, 두려움 앞에서, 우리는 도리어 하나님을 죽이는 어리석은 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 현존자 하나님을 만난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현존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 영원한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과 행위는 현세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 도리어 이 현세를 목적으로 삼고 현세의 것을 추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가 될 뿐이다.
* 사탄의 시선이 현세에 고정되어 있는 반면,
주님의 시선은 철저하게 영원하신 하나님을 향해 있다.
사탄은 인생이 아무것도 없는 광야이기에 확실하게 보이는 현세의 것을 추구하라고 언제나 우리를 유혹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생이 광야이기에 오히려 우리에게, 황량한 광야를 목적삼다가 광야에서 한줌의 재로 허망하게 사라지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고, 오직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진리를 좇아 살 것을 촉구하고 계신다.
* 현세주의란 현실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지만, 크리스천이 현실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소명을 완수하기 위함니다.
* 달라이라마 - 1950년 중국공산당이 티베트를 무력으로 점령하자 1959년 인도로 망명한 이래 지금까지 티베트의 독립 혹은 자치를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 하나님께서는 절대자이시며, 그렇기에 그분께서 행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절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사실을 온전히 믿을 때만 우리는 삶의 현장, 목회현장에서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 현재 제네바 한인교회의 외형적 규모는 주님의 교회에 비해서 30분의 1도 못됩니다. 이 경우 제네바 한인교회 목회는 서울 주님의 교회에 비해 목회 가치가 떨어지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네바 한인교회를 통해서도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뜻은 절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잊지마세요. 목회에는 큰 목회, 작은 목회가 따로 없습니다.
* 절대자 하나님을 믿는 자만,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자기 윗자리에 있어도 기쁨으로 그를 수용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이 이루어지듯, 그들을 통해서도 절대자 하나님의 섭리가 절대적으로 이루어지심을 믿었기 때문인 것이다.
세속적인 계산이나 이기적인 사고방식으로 목회지를 선택치 마세요. 그런식으로는 소위 세상이 말하는 목회 성공을 이룰지는 몰라도ㅡ 한 시대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성령님의 통로가 될 수는 없다. 오직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믿을 때에만 그분께서 지정하신 곳에서 진정한 섬김과 봉사의 목사로 일평생 살아갈 수 있다.
* 바울이 유대총독 벨릭스앞에서 설명한 예수믿는 도리 즉, 믿음의 요체 세가지
(1) 의 -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2) 절제- 잘라버리는 것. 손을 떼는 것. 이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맺어지면 저절로 수반된다.
(3) 심판 - 이런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자만이 절제, 즉 버릴 것을 버릴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으면서 절제할 것을 절제하는 자는 그 삶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게 마련이다.
바울이 평생 의와 절제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비늘 벗은 그가 하나님께서 심판자 되심을 알아뵈었기 때문이다.
* 믿는 자에게 심판은 멸망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에게 심판은 하나님의 셈하심이다.
* 하나님의 현존과 상주심, 다시말해 그 분의 셈하심을 믿을 때에만 우리는 신앙의 안일 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근거로 인간의 평등을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생명, 그 자체의 가치는 모두 똑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으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인간 삶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마저 평등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평등(equality)의 하나님이 아니라 공평(equity)의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신다.
뿌린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정의는 결코 평등이 아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언제나 공평이다.
성경의 하나님께서는 심판자시요,
셈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공평하신 하나님이시다.
* 대천덕 신부님은, 교인들로부터 정말 존경받는 목사가 되기 원한다면 조금만 가난하게 살라고 권합니다. 100원을 얻을 능력이 있어도 80원으로 만족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100원의 능력을 가진 자가 100원을 모두 얻어 즐기는 순간, 그는 곧 200원의 노예로 전락하고 맙니다.
* 일단 전임목회자로 목회지가 결정되어 매달 봉급을 받게 되면, 타교회에서 설교나 집회를 요청할 경우 사례비를 사양하십시오. 거저 받은 은혜를 그 교회 교우님들과 거저 나누십시오. 여러분의 전임목회지에서 받는 봉급을 족하게 여기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전임목회지에서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여기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결코 참된 섬김과 봉사의 목회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요를 족한 줄로 여기지 않는 목회자의 섬김과 봉사란, 교인의 주머니를 노리는 미끼에 지나지 않습니다.
* 히브리 이름인 ‘사울’의 어원은 ‘희망’이란 뜻이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라면 사울왕과 같은 민족의 희망이 될 수 있으리라 스스로 믿었던 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과 자신을 가렸던 비늘을 벗어던진 사울은 스스로 바울이 되었다. 바울의 어원은 “작다”, “단념하다”는 의미이다.
* 생명이 대체 무엇입니까? 내가 지금 숨을 쉬고 있는 것, 이것이 생명입니다. 죽음이란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하는 것입니다. 숨이 멎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맙니다. 비행기탈 때 코끝에 호흡이 붙어있으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호흡이 멎으면 이내 화물로 전락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코긑의 호흡이 멎으면 대형 쓰레기에 불과한 것, 이것이 인생입니다.
어느날, 고작 화물이나 대형 쓸레기로 불현듯 끝나 버릴 인생이 대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안다 말하겠으며, 무엇을 할 수 있다 장담하겠습니까? 현존자요, 영원자요, 전능자요, 절대자시며, 심판자이신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해 주시지 않는다면 어찌 단 1초인들 제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 인생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스쳐 지나가는 1초 1초가 쌓여서 인생이 됩니다. 여러분을 스쳐가는 1초 1초는 이내 사라지고 말지만, 동시에 여러분의 삶 속에 축적, 반드시 살아남습니다. 비늘벗은 눈으로 하나님과 여러분 자신을 직시하며, 하나님께 여러분의 삶을 온전히 의탁하십시오, 여러분을 스쳐가는 1초 1초는 주님안에서 참된 섬김과 봉사의 삶으로 축적, 여러분은 이 시대의 진정한 목회자가 될 것입니다.
3. 성전의 사람 요 4:19-24, 고전 3:16-17
* 예루살렘 성전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천년전,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에 의해서 지어짐. 솔로몬은 당시 최고 품질의 레바논 백향목을 사용했는데, 그 벌목을 위해 군인 3만명을 동원했고, 석재를 확보하기 위한 채석공의 수는 8만명, 성전공사에 투입된 인원은 7만명이었다. 그 모든 인부를 감독하는 감독관의 숫자는 3,300명이나 되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은 18만 3,300명에 달하는 인원이 장장 7년에 걸쳐 완공한 대역사였다.
예수님당시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환심을 살려는 헤롯 왕가의 대대적인 보수공사로 더욱 화려하고, 웅장했다. 그러나 그로부터(예수님의 예언) 40년후 로마제국의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철저하게 초토화 시켜 버린 것이다. 소위 ‘통곡의 벽’이란 이름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는 돌벽은 예루살렘 성전건물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성전 마당 아래쪽을 받치고 서 있던 서쪽 축대의 일부일 뿐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초토화되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이슬람 교도들이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이슬람교 황금사원이 서있다.
* 솔로몬은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건축한 붙박이 성전 안에 갇혀 계실 분이 아니심을. 그럼에도 그가 하나님을 위한 붙박이 성전을 세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곳에만 계신다는 오해로 인함이 아니라, 성전이란 특정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밖 일상생활 속에서 현존자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의 경과와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예루살렘 성전(현교회안) 자체가 이미 우상이 되어 있었다. 성전건축의 동기를 망각, 무소부재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만 계시다는 것으로 단정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믿는 성전 안에서의 그들의 삶과 상대적으로 하나님께서 부재하시는 것으로 여기는 성전 밖(교회밖)의 삶이 일치될 수 없었다.
예수님 당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여인도 역시 하나님께서 특정장소에 국한해 계신 분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테면 신앙 행위를 특정 공간의 문제로만 인식한 것이었다. 주님을 말한다.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말해 믿음은 특정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중심의 문제라는 것이다.
인간의 중심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해 있으면 그가 어디에 있든 하나님께서 그와함께 계시고, 바로 그곳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며, 그곳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라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에게 참된 성전은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다(고전 3:16-17)
스데반처형당시 사울 역시 성전에 대해서 왜곡된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그는
참된 성전은 건물이 아니요, 자기 자신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특정공간을 뛰어넘어,
그 자신이 움직이는 성전이 되어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는 진정한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았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 목사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 움직이는 성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는 예배당 과잉시대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이상의 예배당이 아니라 진정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사람을 성전으로 일구는 시대를 열어야 한다.
* 우리 각자가 우리 자신을 성전, 즉 움직이는 성전으로 일구어야 한다. 하나님의 성전이되기 위해서 반드시 그 안에 네가지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첫째, 법궤,
둘째는 금촛대요,
셋째는 분향단이요,
마지막은 진설병이었다.
우리 각자가 움직이는 성전이 된다는 것은, 우리 속에 바로 이 네가지를 구비하는 것을 뜻한다.
1) 법궤 -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내가 움직이는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내 심령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야 한다.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말씀을 내 심령을 채운다는 것은 하나님을 내 생의 주인으로 내 속에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상식) 마니차 - 라마불교사원에 마니차라 불리는 금속원통이 대웅전 주위에 설치되어 있는데, 누구든 그 통을 손으로 한 번 돌리기만 하면 그 속에 들어있는 라마교 경전을 한 번 읽은 것과 같아 그에 상응하는 만큼 당사자의 업보가 감해진다는 것이다.
-- 경전의 내용은 알지도 못한 채 단지 경전이 든 깡통을 돌리는 것만으로 족하게 여긴다면 기껏해야 깡통신자밖에 더 되겠는가? 이런의미에서 마니차야말로 라마 불교 타락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 : 심령이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고서는 성전이 될 수도 없고, 바른 영성의 목사가 될 수도 없습니다. 말씀 채우기를 체질화하려면 죽을 때까지 매일매일 말씀과 대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말씀의 절대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하고, 그것은 말씀이 아니고는 목사의 살 자체가 아예 불가능함을 절대적으로 인식할 때만 가능합니다.
2) 금촛대 - 옛날 성막은 물론이요 예루살렘 붙박이 성전 속에도 금촛대가 있었다.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는 빛이신 하나님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그 금촛대에는 항상 불을 밝히고 있다. 한마디로 촛대의 의미는 성령님의 조명이었다.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령이 성령님의 조명 속에 거해야만 한다. 따라서 말씀의 깊이와 넓이와 참된 의미를 바로 아는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 성령님의 조명 아래 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을 쉬운 말로, 성령충만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요20:22절 -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하심. 성령님의 조명 아래 거한다는 것, 성령 충만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호흡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님의 조명 하래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호흡으로 사는 삶을 의미한다..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우리가 움직이는 성전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그 깊은 호흡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호흡의 뿌리는 두말할 것도 없이 말씀입니다. 성령님의 조명 속에서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을 때, 우리는 말씀이신 주님의 깊은 호흡으로 살아가게 된다. 악한 감정이 북받쳐 오를 때, 분노가 용암처럼 끓어오를 때, 우리는 성령님의 조명 아래에서 주님의 깊은 호흡으로 우리 자신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3) 분향단 - 제사장들은 성전 속에 있는 분향단에서 항상 향을 피워 올렸다. 그렇게 해서 인간의 마음과 정성이 하나님께 올려 바쳐진다고 생각했다. 분향의 의미?
[개역](계 5: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오늘날의 향이란 기도이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는 향이다. 기도는 우리의 체질이 되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체질화되지 않은, 단지 필요할 때만 발하는 단발성기도는 하나님께 올려지는 향기로운 향이 되지 없다.
* 기도 - [개역](마 6: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일반적으로 우리의 기도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 모르신다는 전제 조건 하에 시작됩니다. 그래서 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통보하는 것으로 기도는 끝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미 알고 계신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영적지도자가 되려는 우리의 기도는 적어도 이 수준을 뛰어넘어야 한다.
기도란 나 자신을 주님께 붙들어 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나를 붙들어 매는 것이요,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나를 붙들어 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음성으로 발해지는 기도도 귀하지만,
입을 다물고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기도는 더욱 귀하다.
(상식) 불교에 이판사판이 있다. 이판은 이판승, 사판은 사판승이다. 사판승은 중생들 앞에서 불교조직 자체의 관리와 관련된 스님들이다.
이판승은 ....불교의 근본을 수호하는 수도승들이다.
사판승들이 .......겉으로 아무리 흙탕물을 튀겨도
이판승들이 불교의 본질을 지키고 있는 한 불교는 건재할 것이다.
카톨릭에도 이판사판이 있다.
교황을 비롯하여 추기경, 주교, 신부 등 카톨릭 교회의 행정 및 관리와 관련된 사제들은 불교용어를 빌리자면 사판승이다.
반면에 세상의 공명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격리시킨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이판승에 해당한다.
---> 불교이든 카돌릭이든 이판의 특징은 침묵의 기도를 드릴 줄 안다는 것이다. 이판들은 입을 다물고 듣는다.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진리가 지금 말하는 소리에 자신을 붙들어 맨다. 그래서 사판들이 본질에서 이탈해도 그들은 본질을 청정하게 고수할 수 있는 것이다.
목사의 영성과 성숙의 깊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하나님앞에서 침묵하는 시간의 길이와 비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침묵의 기도 없이는, 그 누구도 바른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4) 진설병 -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성전 안 진설대 위에 올려둔 떡을 의미한다.
* 주님께서는 하나님사랑과 사람 사랑을 동일시 하셨다. 그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목사나 신부가 아닌 가장 작은 자와 동일시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가장 작은 자를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전이 되기 위하여 우리 마음 속에 진설병을 구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와 이질적인 사람, 전혀 수준이 맞지 않는 사람, 우리 주위의 가장 작은 자를 위한 공간을 우리 마음 속에 확보하는 것이다. 단 한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잇는 넉넉한 공간을 우리 마음 속에 지닐 때 우리는 비로소 움직이는 성전이 될 수 있다.
--- 레위기 24:5에 의하면 성전에 바치는 진설병의 개수는 12개, 하나의 크기는 10분의 2에바 1에바는 21에서 22리터로 약 12되의 분량이다. 따라서 10분의 2에바는 2.4되가 된다. 밀가루 2.4되로 떡 하나를 만들다니 엄청난 크기임에 분명하다. 이런 떡을 12개 진설해야 하므로 약 30되의 밀가루가 필요하다.
-- 우리가 움직이는 성전이 되기 위해 우리 마음 속에 진설병을 구비한다는 것은, 타인을 위해 그 정도로 넉넉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다. 진설병이 결여된 섬김과 봉사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들끼리의 섬김과 봉사이기에 결국 편가르기와 분열이 초래되고, 가장 작은 자를 섬긴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 화목제
다른 제사와는 다르게 화목제는 제사장 몫인 제물 오른쪽 뒷다리와 가슴부위를 제외하곤 제물을 바친 자가 이웃과 더불어 그 제물을 나누어 먹는다. 일종의 잔치제사로, 그 잔치제사를 통하여 이웃과의 화목을 도모하고 증진하게 된다. 그런데 화목제 제물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선느 레위기 7장을 통해 이상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만약 감사의 의미로 드린 화목제라면, 제사후 남은 제물을 반드시 그날 해가 지기 전까지 모두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혹 서원의 의미로 드린 화목제의 경우에도, 그 다음날 해가 지기 전까지 남은 제물을 반드시 먹어치워야 한다. 정해진 시간을 어기면, 그 제사는 무효요, 오히려 화의 근원이 된다.
그 이유? 소 한 마리의 무게는 700킬로-800킬로그램인데 뼈와 내장을 추려도 350-450킬로그램(600-700근)의 살코기가 나온다고 한다. 화목제를 드린자가 제사장 몫을 제외하더라도 무려 300킬로그램(500근)의 살코기를 늦어도 다음날 해지기 전까지는 먹어야 한다. 가능한한 빨리 먹어야 한다. 냉장고가 없이 때문이다. 그 많은 제물을 자기 가족끼리만 먹어서는 절대로 정해진 시한을 지킬 수 없다.
마음에 드는 이웃만 불러서도 불가능하다. 평소에 보기도 싫었던 사람, 같은 자리에 앉는 것조차 꺼리던 사람마저 부르지 않으면 500근이나 되는 제물을 시한 내에 먹을 길이 없고 결국 자신의 제사는 무효가 된고 만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모두 다 불러모아 하나님앞에서 함께 제물을 먹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형편없어 보이는 이 사람도 내 인생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로구나~!” 하나님과 화목한다는 것은 내가 업신여기던, 이 사람과의 화목을 의미하는 구나! 화목제를 통해 그는 가장 작은 자마저 서슴없이 수용하는 진설병을 마음 속에 구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 사랑은 더불어 사는 능력이다. 마음이 합한 사람과는 말할 것도 없고, 전혀 이질적인 사람과도 더불어 살 수 있는 능력이 곧 사랑이다. 마음속에 크나큰 진설병을 지닌 자만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자신을 성전으로 세워가는 자는 분명코 섬김과 봉사의 종이 되어 이 땅에 새로운 역사를 일구는, 수 많은 사람을 어둠에서 빛으로 비양심의 세계에서 양심의 세계로 불어내는 진정한 목회자가 될 것입니다.
4. 비전의 사람 행 19:8-22
* 비젼
잠 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 뜻: 비젼이 없으면 인간은 경거망동한다. 비젼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이다.
* 비젼을 지닌 자 - 그 시선은 언제나 오늘을 뛰어넘어 보다 먼 곳을 향해 있다. 동시에 자신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그곳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애쓰는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요, 그 미래에 자신을 부단히 맞추어 가기에 어떤 형태로든 가시적인 결과가 수반된다.
* 비젼이 없는 사람- 그의 시선이 목전에 머물러 있다. 그런 자는 눈에 보이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 결과 그의 삶이 방자해지게 된다.
* 비젼에 대한 오해 - 마치 신앙이 야망인 것처럼, 야망을 품지 않으면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대부분의 크리스찬들이 비젼을 망상과 혼동하거나 야망과 동일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가슴아픈 것은 역사적으로 교회가 비젼이라는 미명하에 망상과 야망을 부추겨왔다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자리에 앉아 나의 비전을 애써 찾으려 하면 그것은 망상이나 야망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나의 비젼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이루시기 원하는 하나님이 비전이다.
그 비전만이 인간의 야망이나 망상과는 무관하게 나와 타인을 동시에 살리는 참다운 비전이다. 나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그 비젼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나 자신이 비젼으로 삼아야 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보다 더 큰 비젼을 없다.
1) 비젼을 꿈(dream)이 아니다.
대처여사의 구분 - 비젼: 반드시 그 비전에 상응하는 행동을 수반하기에 어떤 형태로든지 결과를 초래한다는 의미에서 꿈과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꿈은 거기에 상응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책임도 없다. 단지 즐기는 것이요, 현실도피며,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2) 비전은 야망(ambition)이 아니다.
야망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수반한다는 면에서 망상과 구별된다. 또 야망은 오늘에 안주하지 않고 무엇인가 새로운 목표를 향해 계속 나아간다는 면에서 야망이 비전과 동일해보이기도 한다. 야망은 욕망의 산물이요, 그 근본이 욕망이다.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성취될수록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해치는 흉기가 된다. 하지만, 비전은 이룰 수록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다.
* 비젼의 사람
1) 요셉
창42: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요셉은 20년간 그 꿈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요셉이 그 꿈을 자신의 비전으로 삼은 적은 더더욱 없었다. [개역](창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요셉은 그 상황속에서 자신의 망상이나 야망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인류를 기근에서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비젼을 이루셨다. 그것은 결코 요셉의 비젼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비젼이었다.
2) 사도바울
[개역](행 19:2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로마 복음화의 비젼을 품게 되었다. 사도바울은 5천 킬로미터에 걸친 2차 선교여행을 거쳐 장장 6천여킬로에 달하는 3차 선교여향을 마감할 즈음에 비로소 그 비젼을 알게 된 것이다. 이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지 최소한 20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당신의 비전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게끔 당신의 방법으로 친히 가꾸셨다.
만약 청년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직후부터 로마 복음화의 꿈을 지녔다면, 그래서 청년의 열정만으로 로마에 뛰어들었다면, 그는 결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비전으로 포장된 그의 야망과 망상은 머지 않아 실체를 드러냈을 것이고, 전혀 준비되지 않은 그는 스스로 중도하차하거나 변질되고 말았을 것이다. 로마 복음화는 바울이 비젼이 사람이되. 오직 하나님을 자신의 비젼으로 삼은 결과였다.
* 비젼의 사람이 반드시 유념해야 할 5가지 사항
1) 현장의 중요성 - 하나님의 비젼은 언제나 삶의 현장에서 주어진다. 매일 매일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던 중, 그의 삶의 현장에서 자신을 통해 이루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비전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통해 이루시려는 당신의 궁극적인 비전역시 우리가 당장 알 수 없다.
그러나 주어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여 매일의 색종이를 충실히 붙여 가노라면, 어느 날 불현듯 완전한 형태의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된다. 우리 나날의 삶은 하나님의 그 비전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이 모자이크 판인 셈이다.
비전을 결코 삶과 괴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사람은 누구보다 현재 주어진 삶의 현장에 충실해야 한다.
2) 지닌 것의 소중함 - 하나님을 비젼으로 삼은 자는, 오늘은 곧 내일을 위한 예비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사는 자이다.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은, 내일 하나님의 비젼을 이루기 위한 귀중한 도구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주신 나의 외모를 통해 당신이 비전을 이루어가신다. 그러므로 모든 크리스찬은 자신의 외모를 사랑해야 한다. 자신의 외모를 상대적으로 평가, 열등감을 갖는 것은 금물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이 어떠하든, 그 상황 자체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 바로 그 상황을 거치는 것이 그 상황을 내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라. 요셉이 꿈 한번 잘꿔서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된 것이 아니다. 13년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종살이와 옥살이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에 의해 철저하게 훈련받은 결과가 국무총리였다는 것이다.
--> 지병으로 시달리던 미후라 야야꼬의 고백
병들지 않고서는 드리지 못할 기도가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믿을수 없는 기적이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말씀이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가까이 갈 수 없는 성소가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우러러 볼 수 없는 얼굴이 따로 있습니다.
오, 병들지 않고서는 나는 인간이 될 수 조차도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을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히 수용할 때, 그 상황을 거쳐 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비젼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빚어지게 된다.
* 조지 워싱턴 카버 박사 - 1940년 죽을 때 당시 미국 최고의 농학자이자 계몽가인 동시에 위대한 흑인 크리스찬 - 미국남부 면화재배로 질소를 상실한 땅에 땅콩을 재배하게 하여 성공하게 하였고,또 땅콩 소비를 위해 연구한 결과 105종류의 식용품과 200종류의 실용품을 고안해 낸 장본인이다.
* 지금 내 손안에 들어 있는 것, 내 주머니 속에 이 순간 지니고 있는 것, 그것이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그 절대적 가치를 소홀히 하지 말라. 하나님의 비전은 바로 그것을 도구 삼아 그 실체를 드러내는 법이다.
3) 자기 세계의 확장 - 하나님을 비젼으로 삼은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세계를 확장시켜 가는 자이다.
이것은
1) 자기 영성의 세계를 키워가는 것이다.
2) 사람의 세계를 확장해야 한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전폭적으로 수용, 사람에 대한 자신이 세계를 확장시켜 가는 자를 통해 하나님의 비전이 성취된다.
3) 지리적 세계를 확장시켜 가야 한다. 세상에 대한 지경을 넓힐수록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더 깊이 교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나와는 다른 사고와 방법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더 넓게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다.
4) 실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실력은 한마디로 표현력이다. 목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진리의 말씀을 말로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 때의 말이란 자신의 삶으로 뒷받침된 말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실력은 표현력이고, 표현력이란 하나 밖에 없는 단어를 찾아내는 실력입니다. 수많은 신학서적을 탐독해도, 아무리 많은 신학정보를 입수해도, 그것을 정확히 표현해 낼 수 없다면 그것은 자신의 실력일 수 없다. 실력은 표현력이다. 표현되는 것만 나의 실력이다. 먼저 말에 대한, 우리 말에 대한 실력을 배양하십시오.
4) 이성적 신앙 -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자는 이성적 신앙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롬12:1 영적예배-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 우리의 삶, 전 생애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드리는 것. 영적(로기코스-이성적) -우리의 이성을 다하여 우리의 뜻과 의지를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영적 예배가 될 수 있고, 그와 같은 삶을 통해 하나님의 비젼을 이루어진다. 이성의 지적 능력인 지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진정 성령으로 충만한 자는 자신의 이성을 주님의 말씀을 담는 그긋으로 삼는 자이다.
이성을 토대로 한 지각의 동원없이는 장성한 믿음의 소유자, 즉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감성은 신앙을 위한 휼륭한 토양이다. 그러나 감성에 더하여 이성적인 신앙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5) 결과로 부터의 자유 - 하나님을 비젼으로 삼은 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보고픈 유혹에서 자유하는 자이다. 자신이 정한 기한 내에 반드시 결과를 보고자 하는 것은 경제논리요 실적주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찬은 달라야 한다.
자신이 지금 행하고 있는 일의 결과를 자신의 생전에 직접 확인
하려 하면, 그 사람은 결코 정도를 걸을 수 없다.
결과라는 우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
다.
크리스찬은 영원을 사는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주님을 위해 행하는 일의 결과를 우리 생애에 못 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영원속에서 주님과 함께 반드시 확인케 될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결과의 유혹을 탈피할 수 있으며, 일평생 정도를 지킬 수 있다.
* 나가노 목사님 - 도요히코 목사님의 스승과 같은 분
* 포르투갈의 국민여가수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 포르투갈의 민속음악인 파두(fado)를 세계 정상의 음악으로 끌어올린 여가수의 장례식 - 죽은 자를 위해 관을 향해 국민들이 박수를 쳐주는 모습이 있었다. 이유는 포르투갈 국민들이 워낙 아말이야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