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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방세계 >
미국의 1960년대의 히피
1969년 우드스탁 축제 그리고 불교
글 | 편집부
지미 핸드릭스
대체적으로 그 시대를 대표하는 대중문화 상징하는 대중 연예인들이 있다. 1950년대에 미국은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할 수 있고, 1960년대에는 밥딜런과 지미 헨드릭스, 그리고 비틀즈라고 한다. 이들의 음악은 그 시대와 세대를 관통하는 대중 메시지의 상징적 역할을 했다.
1960년대는 세계적으로 전환기의 시대였다. 2차 대전 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거대한 두 개의 체제로 개편, 자유세계의 중심축으로 부상한 미국사회는 핵 미사일을 쿠바에 설치하려는 소련과 핵전쟁 위기를 겪었고, 케네디의 인종차별 철폐정책에도 불구하고, 흑인의 인권상황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베트남전 참전과 전쟁의 장기화, 인종간의 극심한 갈등이 지속되었다. 또한 인간이 처음으로 달에 가기도 하였다.
문화적으로는 사회의 지배적인 주류 문화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하위문화(subculture) 혹은 서구와 미국에서 일어났던 기존의 문화와 종교에 반대하는 60년대와 70년대 반문화(Counterculture)의 시대가 도래 했다.
이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반기성(Anti-Establishment)'적 청년 문화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무엇보다 이는 물질적 성공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기존의 성취사회를 거부하고 새로운 공동체 사회를 맞는 새로운 사회의식을 창조하려 했다. 얼터너티브 라이프 스타일, 초월적 명상, 집단적 치유의 시도, 생태학적 인식 등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예술적으로 포크 록 운동, 사회적으로 저항운동의 근간이 됐다.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는 당시 뉴욕의 ‘좌파 본거지’로 비트족 시인들, 흑인 인권 운동가들, 반전 운동가들이 포크클럽으로 모여들었다. 비트족(beat 族)은 출세ㆍ교육ㆍ도덕이라는 전통적 개념에 도전했고 중산층의 라이프스타일에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고, 직업 역할이나 가족 외부에서 정체성을 추구했다. 프랑스의 보헤미안적 예술가ㆍ지식인에 의해 전후 파리의 학생들 사이에서 발전했는데 사회적 변화에 대한 허무주의에 전념하고, 동방적 신비주의ㆍ재즈ㆍ시ㆍ약물ㆍ문학 등에 집착했다. 최근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밥 딜런도 이곳에서 활동하였다.
밥 딜런은 1962년 첫 앨범 'Bob Dylan'을 발표하지만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1963년에는 'The Freewheelin’ Bob Dylan'을 발표했다. 시적이면서도 정치적인 깊이가 있는 가사와 모던 포크의 간결함을 수용한 이 앨범은 곧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고, 저항운동의 상징적인 음악가가 됐다. ‘Blowin’ In The Wind’은 반전 운동의 송가였다. 시적인 가사, 강렬하고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 곡조와 박자 무시하는 듯한 창법… 미국 불교사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잭 케루악, 앨런 긴스버그와 같은 작가들의 비트닉에 영향을 받아 가사를 시적으로 쓰면서 그는 대중음악의 가사의 중요성과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물론 밥 딜런은 기독교 찬송가를 불렀고, 명상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밥 딜러 같은 히피세대들은 명상을 즐겼던 비트족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50주년을 알리는 기념 책자
50년 전의 우드스탁 페스티벌
1969년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약 3일 반나절 동안 뉴욕 북부의 베델 평원에서 대규모 페스티벌 우드스탁 뮤직 앤 아트 페어(The Woodstock Music and Art Fair, 이하 ‘우드스탁 페스티벌’)가 열린다. 최초 3일로 계획된 행사였으나 뜨거운 관객들의 호응으로 1일 연장되어 4일간 개최되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단지 음악뿐 아니라, 행위 예술, 서커스, 마술 등 다양한 예술 행사를 포함하고 있었다. 우드스탁 4인으로 불리는 존 로버츠(John Roberts), 조엘 로젠먼(JoelRosenman), 마이클 랭(Michael Lang), 그리고 아티 콘펠트(Artie Kornfeld)가 자유, 사랑, 평화를 기리는 젊은이들과 어른들이 한 곳에 모여 문화 예술 전반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행사를 기획한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슬로건이 3일간의 평화와 음악(3 Days Of Peace And Music)인 것은 이러한 맥락이었다.
축제사진
우드스탁 4인은 페스티벌 장소로 300에이커 부지의 월킬(Wallkill)을 섭외했다. 하지만 주민들의 심한 반대로 우드스탁에서 약 70km 떨어진 베델(Bethel) 평원에서 열게 되었다. 공연 부지 선정에 어려움을 겪어 공연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었는데 막스 야스거라는 사람이 제공한 73만평의 농장에서 개최된 것이다. 애초에 공연장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드스탁은 음향 시설은 물론 화장실이나 급수시설 등 위생 시설이 제대로 설비되지 않았다. 페스티벌 중에 있었던 폭우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해 거대 진흙 뻘이 되기도 했는데 히피들은 낙천적이게도 폭우에 샤워하고 물웅덩이에서 수영을 하고 놀았다고 한다.
우드스탁 4인은 부지 선정부터 아티스트 섭외에 이르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마침내 티켓 판매에 돌입했다. 존 로버츠와 조엘 로즈먼은 페스티벌 광고와 프로모션을 도맡았고, 아티 콘펠트와 마이클 랭은 공연 운영과 아티스트 섭외 등 페스티벌 전반에 관련된 사항들을 총괄하였다. 3일 동안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즐기기 위한 티켓 가격은 18달러(사전 구매시)와 24달러(게이트 구매 시)였다. 18달러짜리 티켓은 뉴욕 시내의 레코드 가게와 라디오 방송국의 사서함을 통해 판매되었다. (2014년 물가를 기준으로 당시 티켓 가격은 약 120 달러와 150 달러 정도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행사 전 신문, 라디오 등에 광고를 낸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홍보전략이었다. 이는 약 18만 6천 장의 티켓을 사전에 팔아 치우는 엄청난 판매 성과를 올렸다. 이 소식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페스티벌 열기를 몰아갔다. 여기에 오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는데 교통체증이 심하지 차를 버리고 걸어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우드스탁 거리 모습
티베사찰 카르마 트리야나 다르마차크라
1969년 8월 17일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마지막 무대는 흑인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가 장식했다. 빨간 띠를 머리에 매고, 청바지 차림으로 등장한 그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기타를 연주했다. 지미 헨드릭스가 자신의 이로 기타를 뜯거나 이펙트를 사용해 요란한 소리를 낼 때, 베델 평원이 떠나갈 듯 했다.
공연의 절정은 그가 미국 국가 [The Star-Spangled Banner]를 연주할 때였다. 이펙터로 굉음을 내고, 마치 조롱하듯 불안정하게 떠는 그의 기타 연주는 당시 베트남 전에서 미국이 보여준 폭력성을 고발하고, 관중들에게 시대정신을 일깨우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연주가 끝나자 관객들은 지미 헨드릭스를 향해 손을 들어 열광했다.
하지만, 무절제한 쾌락과 탐닉,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향 추구 그리고 실질적 대안의 부재 등은 히피를 포함한 청년 문화 전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초래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60년대 히피 문화의 마침표로 본다. 그들의 자유와 평화의 가치, 편안함에 대한 추구는 방향 상실과 궤도 이탈로 귀결되었다.
미국사에서 혼란과 혼돈의 60년대는 저항의 에너지가 록으로 피어난 시기이지만, 히피를 중심으로 한 플라워 무브먼트는 자생력을 갖추지 못한 채 1969년 이후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히피들에게 정신적 쾌감을 선사했던 사이키델릭 록도 70년대로 접어들면서 의미를 잃었다.
우드스탁 지역의 사찰들, 히피세대들과 미국불교
미국불교사에서 1950년대에 비트족이 나타나서 미국불교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케루악, 엘렌 긴스버그, 개리 스나이더 등이 유명한 비트 문학가들이다. 이들은 시 뿐만 아니라 이 비트세대의 영향을 1960년대의 히피족이 많이 받는다.
그리고 1970년대에 이 히피족의 일부가 불교계에 들어가서 미국불교계의 중요한 신도가 되고 출가도 했다. 히피족들이 중용하게 주장하는 평화적인 분위기, 자아 등을 불교에서 본 것이다. 히피들에게서 나타나는 LSD 복용, 자유분방한 성생활 등은 이후 미국불교계에서 나타나 한 바탕 홍역을 치르기도 하였다.
우드스탁 축제로 유명한 이 지역에는 몇 개의 사찰들이 있다. 우드스탁 높은 곳에는 티베트 카규파 미주 본부인 ‘카르마 트리야나 달마차크라 Karma Triyana Dharmachaka’가 있다. 그 부근에는 ‘젠 마운틴 수도원 Zen Mountain Monastery'가 있다. 한국 사찰 중에는 백림사가 이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원각사도 또한 우드스탁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 글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네이버 지식백과] 우드스탁 [The Woodstock Music and Art Fair] - 60년대 록 문화의 정점 (팝 음악, 이진섭), 시사 온의 정은하 기자 등 몇 개의 글을 참고로 하였다.
나로빠 대학의 알랜 긴스버스 도서관 입구
히피에 대한 소개
1960년 중후반, 베트남 전쟁의 계속된 실패와 불안한 사회의 영향으로, 젊은이들은 희망을 잃고 실의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에 기존 사회의 질서를 부정,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정신적 가치에 무게를 두며 인간성을 중시하고 물질 문명을 부정하는 운동이 전 미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히피'이다.
히피에 대한 개념은 여러가지가 있다. 여러 가지 견해를 인터넷 검색을 몇개 소개해 본다. Hippie. 히피는 1960년대 미국을 위시한 서양권에서 20~30대 위주로 발생한 하나의 문화풍조 및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의 총칭이다.
히피의 뿌리는 비트닉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데, 비트닉 자체가 보헤미안적 태도를 지닌 반항아 문학청년들이었다. 잭 케루악과 앨런 긴즈버그를 비롯한 일군의 젊은 작가들은 기존 질서를 거부하고 자유를 숭배했다. 이 흐름은 훗날 모드족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점점 요란한 패션과 약물 문화, 자유, 평화의 사상이 합쳐지면서 히피 문화가 도래하게 된다. 히피는 대략 1966년경을 기점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자유분방한 의상과 헤어스타일, 정신적 해방을 위한 마약 사용, 집단 난교와 공동생활 등이 대표적인 상징이다. 이들의 상징적은 모습들은 사실 미국 원주민(인디언)들의 생활양식을 많이 따라하였다. 자유분방한 복장은 미국 원주민들의 복장을 어레인지한 스타일이고, 마약을 통한 정신해방은 미국 원주민들의 연기 흡입을 통한 명상이고, 떠돌아다니는 공동생활 역시 미국 원주민들이 거주지를 자주 옮긴 것과 같다. 백인계 미국인들과 다르게 보이려고 선택한 것이 바로 이색적으로 보인 미국 원주민식의 생활양식이었던 것이다.히피는 당시 베트남 전쟁 반대로 큰 호응을 얻던 반전 사상의 아이콘격으로 떠올랐다. 심지어 당시 학생운동이나 청년운동이 힘을 얻던 시대였고, 이들은 종종 폭력투쟁으로 발전했는데, 히피는 철저히 무대응 무저항을 원칙으로 행동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초기에는 히피가 새로운 문명을 개척할 집단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심지어 아무것도 안하는 행동을 연좌시위(sit-in)을 넘어선 행동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를 Be-in이라고 불렀다.
히피 이전의 서브컬처 집단들도 약물을 사용했지만, 그 전까지 약물은 괴팍한 재즈 뮤지션이나 거친 사나이들만 사용하는 것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LSD의 구세주라 불리우는 티머시 리어리가 "Turn On, Tune In, Drop Out"이라는 슬로건을 내걸면서 약물사용을 통한 정신구조의 확장 및 해방을 주장하면서 약물은 히피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이때 생긴 단어가 바로 마약을 통한 정신세계의 탐험을 뜻하는 "Trip"이다. 이 단어는 지금까지도 마약을 경험했다는 은어로 쓰이고 있다. 이 때문에 히피는 단순한 서브컬쳐를 넘어서 "반문화 운동"(Counter-Culture movement)라는 칭호를 얻는다.67년 사랑의 여름으로 대표되는 주로 자유분방함이 넘치는 도시 샌프란시스코가 그 운동의 중심지였으며, 몇몇 히피는 아예 인도나 일본으로 직접 여행가서 전통 무술과 요가, 동양종교와 철학을 배우기까지 했다.[5] 당시 앨런 긴스버그를 위시한 진보적인 지식인과 작가들도 히피 무브먼트에 대거 참여했다. 흑인들의 민권운동, 아니 그 이상을 넘어선 무장투쟁운동도 이 대열에 합류했는데 그게 바로 유명한 흑표당(Black Panther Party)이다. 이에 대한 묘사가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짧지만 자세히 등장한다. 히피인 제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길거리 생활을 하거나, 마약을 통해 정신세계 체험을 하거나 흑표당의 아지트에서 트러블을 일으키는 등. 그러나 1970년대가 되면서 여러가지 사건이 터지고, 히피의 신화와 이상은 점점 흔들리기에 이른다. 특히나 찰스 맨슨이 일부 극단적 히피들의 컬트 교주로서 군림하며 살인을 사주하고 그들을 세뇌하여 착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미지에 심한 타격을 입게 되고, 당시 불길처럼 번지던 크랙 코카인 등 마약의 범람 등으로 인해 히피들에 대한 내외부적인 인식이 변하게 된다. 히피 운동이 사회적인 변혁을 일으켜 줄 것이라 기대하고 동조했던 소위 운동권들도 그들의 무능함에 학을 떼고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1960년대 팝음악의 정신이었던 히피
히피란 196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 LA 등의 청년층에서 시작된, 기성의 사회 통념, 제도, 가치관을 부정하고 인간성의 회복, 자연으로의 귀의 등을 주장하며 탈사회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국의 1960-70 년대 상황은 베트남 전쟁 발발과 케네디 대통령 암살, 말콤 엑스, 루터 킹 목사 암살, 로스 엔젤레스 흑인 폭등 등의 사건 등이 일어났는데, 이때 미국의 청년층은 현 상황에 대해 부정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1950년대에 완성된 현대 대중사회와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들은 평화를 사랑하고 자연으로 회귀를 외쳤고, 도덕보다는 자연스러운 감성을 중시하고, 즐거움을 추구했다. 이들은 긴 머리에 맨발이나 샌들을 신고 다녔으며, 다양한 색깔의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또 마리화 나나 LSD, 그 밖의 약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히피문화는 틀에 박힌 가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치와 의미에 따라 개성의 표현을 추구하고, 기성사회의 성적 억압과 관습적 도덕을 해체함으로써 개방적인 성의 표현을 통해 친밀성과 이를 통한 새로운 공동체의 건설을 성취하려고 했다. 흔히 일어나는 반전운동이나 민권운동과는 달리 히피문화는 기존질서 체제를 정면으로 거부하기 보다는 기성사회의 새로운 가치질서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들은 자아, 자신을 중요시하였다. 이성적 사고보다는 감정이입에 가치를 두고, 객관적으로 접근하기보다. 개인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사실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히피는 사실상 와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 등을 개최하면서 이제 1969년이 지나고 1970년대가 되면 사랑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시대가 펼쳐지리라는, 마치 1999년 세계종말 후 구세주 재림과 신세계를 기원하는 일부 기독교 종말론자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알타몬트 공연의 헬스 엔젤스 사건같은 것이 터지고, 1970년대 베트남전이 종결되면서 급격히 세력을 잃는다. 이들 사상의 주요한 모토였던 록 음악(특히 약물의 힘을 빌린 몽환적인 사이키델릭 록음악)도 1970년대를 넘어가며 히피 신비주의를 버리고 급격히 세속화된다. 1980년대쯤 되면 이제 시대의 유물처럼 취급받게 된다. 히피 세대를 대변한 록 아티스트를 들자면 도어즈, 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 빅 브라더 앤 홀딩 컴퍼니,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크림, 모비 그레이프 등등이 있고, 비틀즈조차도 당시의 히피 세대의 사조를 따랐다.[7] 히피 세대의 "무사안일", "막연한 평화주의"는 훗날 펑크 무브먼트에게 미친듯이 까이게 된다.[8] 섹스 피스톨즈의 유명한 말을 상기해 보자. "난 히피가 싫고 걔들의 가치관도 싫다." 그들의 자식뻘인 X세대도 히피들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사회학적으로는 히피들의 공동체는 공유지의 비극 이론을 방증하는 결과밖에 되지 못했으며 공동분배를 주장하던 수많은 히피집단들은 사실상 딜레마에 당착하여 내부적으로 붕괴되었다.실생활에서 히피는 미움받는 경우가 많다.
히피스타일의 사람들은 타인에게 너그러우면서 자기자신에게도 너그러운데, 히피와 상대하는 평범한 사람으로써는 히피들의 이런 태도 덕분에 자신들이 이익을 보고 쉽게 넘어갔을 때 보다는 자신들이 피해본 기억이 더 강하게 남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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