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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韓中日近現代史 원문보기 글쓴이: 정암
4. 동요하는 동아시아 내부 질서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 지음 청일수호조규의 체결과 새로운 중ㆍ일 관계동아시아의 내부 질서가 변화를 맞이한 것은 1871년에 체결되고 1873년에 비준된 청일수호조규에 의해서였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책봉-조공 관계와는 다른 외교관계가 맺어진 것이다. 1870년 일본 외무성은 그동안 조선 외교를 담당했던 쓰시마번의 외교권을 몰수하는 한편, 외무대승(外務大丞) 야나기하라 사키마스를 텐진에 파견해 청에게 대등한 관계의 조약 체결을 요청했다. 일본은 이러한 조처를 통해 조선과의 외교를 자국에 유리하게 처리하려 했다. 이에 대해 청 내부에서는 텐진교안 등으로 대외관계가 어려움에 처한 틈을 타 일본이 책동을 벌이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그러나 즈리 총독 리홍장과 량장(兩江) 총독 쩡궈판 등은 일본이 현재는 조공국이 아니므로 조약 체결 요청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옳지않다고 주장했다. 특히 리홍장은 서구 열강과 이미 조약을 맺은 상태에서 일본의 요청을 거부하여 적으로 만드는 것보다 긍정적으로 대처하여 서구 열강에 공동 대응하는 방법을 모색하자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결국 총리아문이 리홍장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일본과의 조약 체결이 추진 되었다. 교섭이 시작되자 일본은 청에게 일방적인 영사재판권과 최혜국 대우를 규정하는 불평등한 내용의 초안을 제시했다.서구 열강에 버금가는 특권을 얻고자 예비교섭단계에서 제시했던 대등 조약안을 변경한 것이다. 이에 리홍장은 일본의 초안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초안을 마련하여 일본에 제ㅔ시했다. 그리하여 1871년 6월부터 흠차전권대신(欽差全權大臣)으로 청에 파견된 다테나리와 리홍장 사이의 수석대표 회담에서는 주로 청 측의 초안에 의거하여 협상이 진행되었다. 그해 9월 청일수호조규와 통상장정(通商章程)이 조인되었다. 그 내용은 영토 보전과 상호 원조를 규정하고 서구열강에 강요당했던 영사재판권과 협정관세권을 서로 인정하는 등 일종의 변칙적인 대등 조약이었다. 일본은 최혜국 대우와 내지 자유통상권을 획득해 중국에 대한 우위권을 확보하려 했지만, 그 의도를 충분히 관철시키지 못했다. 이에 일본은 비준을 연기하고 청에게 청일수호조규의 개정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양국은 1873년 4월 텐진에서 내용 수정없이 비준서를 교환했다. 청일수호조규 체결은 청의 방침, 즉 조약 관계는 서양 각국과의 관계에 한정한다는 자세가 전환된것을 의미하고, 이는 동아시아 지역질서가 변화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청일수호조규가 일본에게 이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청과 대등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일본은 청을 중심으로 한 책봉 - 조공 관계라는 동아시아 전통질서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나 청을 종주국으로 하는 조선보다 우위에 있다는 명분을 얻게 되었다. 아울러 동아시아 지역질서에서 청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874년 5월 타이완 침공은 그 출발점이었다. 일본의 타이완 침공과 류큐병합일본의 타이완 침공은 1871년 말 류큐왕국 미야코섬(宮古島)의 표류민 54명이 타이완 원주민들에게 살해된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일본은 1872년 류큐왕국을 폐지하고 류큐번(琉球藩)을 설치하여 복속시켰다. 이것은 종래에 청ㆍ일 양국과 모두 조공관계를 맺어오던 류큐왕국을 일본 영토로 편입하는 조치였다. 일본은 이를 근거로 자국민 살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청은 류큐왕국의 지배권을 주장하는 한편, 타이완의 '생번(生蕃)'은 일본의 '아이누'나 미국의 '인디언'처럼 '화외(化外)', 즉 청의 정치와 관리가 미치지 않는 백성에 속한다며 보상을 거부했다. 그러나 일본의 외무대신 소에지마 다네오미는 '화외'라는 용어를 청이 타이완 원주민을 지배하고 있지않다는 의미로 자의적으로 해석을 했다. 그는 미국인 고문 르장드르의 조언을 받아 정부에 타이완 침공을 건의했다. '주인없는 땅'은 가장 먼저 차지한 나라가 영유권을 갖는다는 당시의 만국공법 논리를 활용한 것이다. 1873년 10월 소에지마가 정한론을 둘러싼 정부내 대립으로 사짓한 이후, 타이완 문제는 이듬해 2월부터 오쿠보 도시미치의 주도아래 침공방침이 결정되었다. 오쿠보가 내세운 타이완 침공의 표면적인 이유는 류큐인을 살해한 타이완 원주민의 죄를 묻는 것이었지만, 실제 목적은 류큐왕국을 일본 영토로 공인하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타이완의 일부를 식민지화 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874년 5월 3,000여명의 일본 원정군은 보복을 명분삼아 타이완을 침공했다. 근대 일본 역사상 최초로 해외에 군대를 파견한 것이다. 당시 영국과 러시아가 대립하고 있던 터라 동남아 지역의 요충지인 타이완을 침공해도 서구 열강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리라는 낙관적인 예측이있었다. 하지만 예측과 달리 일본의 타이완 침공은 청과 관계를 중시하려는 서구 열강의 비판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현지의 열대성 질병으로 500여명이 넘는 병력을 잃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청 또한 양무파에 의한 서양식 군제 개혁이 원할하게 진행되지 못해 일본과 전쟁을 치룰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 결과 개전으로 교역이 중지되는 것을 우려한 청 주재 영국 공사의 중재로 청이 일본정부에 50만냥을 지불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일본은 이러한 조치를 류큐가 일본에 속한다는 사실을 청이 인정한 것으로 해석했다. 청에 외교적 승리를 가둔 이후 일본은 류큐에게 청과의 책봉-조공관계를 단절하도록 요구하는 등 지배권을 더욱 강화했다. 1879년 마침내 류큐를 일본 영토로 병합해 오키나와현으로 개편했다. 이에 대해 류큐의 지배층은 일본에 대한 불복종과 비협력 운동을 조직하고 청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등 왕국의 재흥과 책봉 - 조공 관계의 부활을 수년간 도모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탄압으로 모두 실패했다. 1880년 일본 정부는 류큐 제도(諸島) 중 미야코 · 야에야마(八重山)을 청에 할양하는 대신, 일본도 서구열강과 마찬가지로 최혜국 대우와 내지 자유통상권을 보장 받을 수 있도록 청일수호조규를 개정할 것을 제안했다. 미국의 전 대통령 그랜트의 중재로 '류큐분할조약'에 작성되기도 했지만, 청 내부의 반대 의견이 많아서 결국 조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강화도 사건과 조일수호조규1875년 9월 일본 군함 운요호는 한반도 연안을 탐측한다는 명분으로 강화도 앞바다를 불법으로 침입했다.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군이 방어를 하기 위해 공격하자, 운요호는 포격하며 영종진에 상륙하여 조선 수군을 공격한 뒤 인적 물적 피해를 입히고 퇴각했다. 이후 일본은 이를 빌미삼아 조선에 개항을 요구했다. 같은 해 12월 일본은 청일수호조규에 입각하여 조선에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을 파견한다고 청에게 통지하는 한편, 조선과 청의 관계에 대한 청의 회답을 요구했다. 청은 조선보다 일본이 군사적으로 우위에 는 판단아래 일본과의 물리적 대결을 피하고자 조선과 일본이 평화적으로 관계를 해결하기 바란다는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청의 태도는 결과적으로 일본에게 조선과의 외교교섭에서 최대의 난제로 여기고 있던 청의 개입문제를 해결해준 셈이 되었다. 한편, 주일(駐日) 러시아 공사 스톨은 조선에 사절을 파견한다는 일본의 통보를 받고, 일본을 지지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원조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주일 영국공사 파크스도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하면서 서구 열강을 대신해서 일본이 조선을 개항시키길 원했다. 미국도 타이완과 한반도 근해의 통상권을 확보하고자 적극적으로 일본을 지원했다. 이렇듯 조선과 조약체결할 수 있는 국제적 기반을 굳힌 일본은 1876년 1월, 함대 6척을 강화도로 파견하여 조선에 조약체결을 강요하였다. 이 때 일본은 조약체결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전쟁을 벌일 태세로 시모노세키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그 결과 1876년 2월에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가 체결되었다. 전문 12개조로 이루어진 조일수호조규의 주요내용과 의미는 다음과 같다. 제1관에서는 조선이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 자주국임을 명시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조선과 청의 관계를 끊고 일본이 조선에서의 우위를 차지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제5관에서는 왜관이 설치된 부산 이외에 두 곳을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허용하도록 했다. 제7관에서는 일본이 조선의 해안을 자유로이 측량하고 해도를 작성할 수 있도록 규정했는데, 이것은 군사작전 시 상륙지점을 정탐하려는 것이었다. 제10관에서는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 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했다. 즉, 일본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한 것이다. 조일수호조규에 이어서 같은 해 8월에 조일수호조규 부록과 조일무역규칙도 체결되었다. 여기에서는 개항장에서의 일본 화폐의 유통과 미곡 수출입 자유, 일본 상품 무관세가 인정되었다. 이후 조선 정부에서는 무관세 조항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를 개정하기 위해 일본과 교섭했지만 실패했다. 이 조항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부과권이 조선정부에 속한다고 명시함에 따라 1883년에 철폐되었다. 이처럼 조일수호조규와 조일무역규칙의 내용은 아편전쟁 이래 청이, 그리고 바쿠후 말기에 일본이 서구 열강에게 강요당하였던 불평등 조약과 비교하더라도 매우 가혹한 것이었다. 일본은 그동안 대등한 관계를 맺어오던 조선을 일본보다도 후발국이라 규정하고, 서구 열강보다 먼저 조선에대한 경제적 · 정치적 우선권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이 서구 열강과 맺은 조약보다 훨씬 불평등한 내용을 강요한 것이었다. 이후 조선은 일본의 적극적인 조선 진출을 견제하려는 청의 주선으로 1882년에 미국과도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도 우호통상조약을 맺으며 근대적 국제관계에 본격적으로 편입되어갔다. 이상과 같이 1870년대부터는 1871년 청일수호조규 체결과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1879년 일본의 류큐 병합 등 동아시아의 내부 질서가 본격적으로 동요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청의 경우 일본과는 류큐와 타이완 문제, 러시아와 이리(伊犁) 문제, 프랑스와는 베트남 문제로 대립하면서 기존의 책봉 - 조공 관계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청의 위기감은 역으로 188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서구 열강과 조약을 맺기 시작한 조선에 대한 노골적인 간섭으로 나타났다. 한편, 일본은 일찌감치 서양의 만국공법을 토대로 동아시아 지역을 조약관계로 재편성해갔다. 조선에 대해서는 서양과 맺었던 조약보다 훨씬 불평등한 조약을 강요하여 개항시켰다. 일본의 조선 진출은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위협했고, 청은 대항하기 위해 조선에 대한 간섭을 강화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