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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를 떠나 사회에 진출했다.
뜨겁게 직장생활을 엮어가던 당시, 그때 만났던 후배가 있었다.
친하게 지냈다.
우리는 금세 형제 같은 사이가 되었다.
아내들도 몇 번 식사자리에 초대해 서로를 알고 있었고, 상호간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
갈림길이 나오자 선택이 달라졌다.
나도, 그도 서로가 가는 길에 힘찬 박수를 건넸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는 회사를 떠났다.
IMF 사태로 인해 세상이 '상전벽해'처럼 급변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창업의 길로, 그는 다른 회사로 갔다.
각기 다른 길로 진출하는 바람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그래도 자주 연락하며 지냈다.
헤어진 뒤로 다시 세월이 급류처럼 흘렀다.
어느새 우리는 중년이 되었다.
SNS 덕분에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서로 연락하며 근황을 나누곤 했었다.
후배도 새로운 곳에서 열정적으로 일했고 몇 번 승진도 했다.
그야말로 마음껏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다.
멋져 보였다.
매번 그에게 진심어린 격려를 보냈다.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 우리는 서울 중심부에서 조우했고 소주잔도 기울였다.
'불혹'을 넘기고 '지천명'을 향해 가던 때 우리 부부는 본격적으로 '고산과 오지'를 향해 배낭을 싸기 시작했다.
신체가 더 노쇠해 지기 전에 오대양 육대주의 깊은 속살을 찾아가 가공되지 않은 대자연 그대로의 감동과 추억을 가슴에 담아보자고 했다.
아파트나 예금이 아니라 '소,공,추'가 우리의 진정한 자산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점에서 우리는 찰떡궁합이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자주 갔었던 가족여행을 제외하곤 호텔이나 리조트로 휴가를 간 적이 별로 없었다.
지구 곳곳의 오지를 찾아 떠났다.
그렇게 많은 세월 동안 일관되게 배낭을 쌌고, 다녀와서 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날,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님, 보고 싶네요"
나도 후배가 그리웠다.
만났다.
꼭 용건이 있어서 만난 건 아니었다.
보고 싶어 만났다.
하지만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했던가.
술이 몇 잔 들어가자 후배가 자신의 고민과 그에 대한 대안까지 나열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죽어라 일만했지 자기 부부만의 특별한 취미나 공감대가 별로 없다"고 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형님, 형수님과 함께 '오지 트레킹'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헤어지기 전에 나도 후배에게 당부를 전했다.
"오지 트레킹을 하려면 평상시에 열심히 심신을 단련해야 하며, 특히 마인드와 멘탈 관리가 제일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불편하고 힘들다"고 했다.
"오지를 절대로 낭만과 여유의 땅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잘 적응하고 이겨내면 시원적인 감동과 생에 대한 원초적인 찬미를 경험케 된다"고 했다.
후배는 자신있다고 답했다.
후배를 만난 뒤로 다시 반 년 쯤 지났을 때였다.
새로운 산맥을 향해 슬슬 준비를 해볼까 싶어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그때 후배의 부탁이 불연듯 생각났다.
전화했다.
차기 트레킹 계획에 대해 이런 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형님의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꼭 동행하겠다"고 했다.
장비와 여비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남은 몇 개월 동안 '심신단련'과 '마인드 함양'에 진력해 줄 것을 재차 당부했다.
나는 진심으로 한 얘기였다.
후배는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며 자신있게 대답했다.
우리 부부와 후배 부부가 함께 비행기를 탔다.
'티벳'의 동쪽으로 향했다.
우리에겐 낯익은 땅이었지만 후배 부부에겐 첫대면일 터였다.
"가슴이 설렌다"고 했다.
"의당 그럴 테지"
우리는 힘차게 파이팅을 외쳤다.
일단 '동티벳'에 발을 내디딘 이상 각자의 배낭을 메고 거칠고 위험한 절벽길을 며칠 간 꼬박 걸어야 했다.
그곳에서 예외나 꼼수는 있을 수 없었다.
걷는 길이 넓은 곳도 있지만 한 명이 바듯이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곳이 많았다.
게다가 아래를 내려다 보면 수백 미터 절벽 밑으로 황톳빛 급류가 으르렁거리며 흘러가는 길이었다.
길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곳에선 그게 유일한 통로였다.
위를 바라보면, 거대한 수직 암벽들이 땅콩 같이 작은 인간들을 단박에 압살해 버릴 것처럼 무서운 모습으로 서 있었고, 눈 앞엔 즐비한 고봉들이 만년설을 머리에 잔뜩 이고 있었다.
모든 트레일이 다 위험한 건 아니었지만 가다보면 아찔한 곳이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그랬다.
그런 여건 속에서의 트레킹은 애시당초 여유나 낭만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특히 초심자들에겐 그냥 '공포'였고 '고행'이었다.
여러번 경험을 하다보면 그런 환경 속에서도 웃음꽃이 피어나고 감사와 감동이 밀려 들었다.
어느 땐 대자연의 놀라움과 환희에 감당키 어려운 전율이 흘렀다.
서울에서 애지중지하며 금과옥조로 삼았던 인생 테마들과 소중한 아이템들이 그곳에선 부질 없는 관념과 물건들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경험이 쌓일수록 더 내려놓게 되었다.
자연스런 전환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차례 그런 경험을 하다보니, 나는 '오지 트레킹'이야 말로 '수행의 한 방편'이자 '연단의 여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선 모든 것이 불편했고 부족했다.
역설적이지만 그랬으므로 더 광활한 자유와 낭만 그리고 시원적인 감사가 오히려 흥건했다.
그랬던 까닭에 우리 부부는 날이 갈수록 오지를 더 좋아하게 됐고 점점 그곳만의 깊은 매력에 빠져들었다.
트레킹 3일차 되던 날에 다시 배낭을 꾸려 출발했는데 몇 시간이 지나자 후배 아내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원망 섞인 눈물이었다.
"육신도 지쳤고 고산병 증세에 정신적으로도 너무너무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먹고', '자고', '씼고', '싸는' 가장 원초적인 영역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했단다.
특히 앞의 두 가지 보다는 뒤의 두 가지에 더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흙먼지와 땀, 눈물이 범벅 되어 흘렀다.
게다가 계속 울상인 표정까지,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오지 트레킹'은 내내 고통이었고 자금까지 살면서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결이 다른 아픔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 뭔가를 따로 마련해 줄 수도 없었고 대안도 없었다.
돌아갈 길도 없고 어떤 교통수단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지구 끝에 위치한 막다른 격오지였다.
쉼 없이 달래며 가야 했지만, 매번 타인을 격려하는 것도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힘든 점이 많았지만 길고 험한 트레일을 따라 줄기차게 전진했다.
트레킹 중간에 4,500미터 급 '봉우리'를 만났다.
본인이 희망하면 정상까지 갈 수 있었으나 시간이 문제였다.
'단체 트레킹'에선 나만 생각할 수는 없었으니까.
몇 시까지 포스트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우리 일행은 등반을 시작했다.
자신의 체력에 맞게 등반했다가 시간을 고려하여 하산하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같이 올랐다.
아내들이 체력을 감안하여 중간 쯤에서 먼저 리턴했고, 나와 후배는 정상까지 가보자고 했다.
그러나 고도가 높아질수록 후배의 체력이 급격하게 저하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고도 100미터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티벳에선 현저하게 달랐다.
후배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내가 먼저 정상 부근에 다녀오기로 하고 스퍼트를 올렸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파워풀하게 올라갔다.
후배도 "같이 가기 어려우니 형님 먼저 출발하세요"라고 했다.
나는 체력적인 면에선 전혀 문제가 없었으나 정상까지 가기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정상을 찍지 못해 아쉬웠지만 나는 일행들과의 약속시간을 생각하며 9부 능선에서 과감하게 리턴했다.
한참을 내려왔다.
그런데 후배가 혼자 올라오고 있었다.
같이 하산하자고 했다.
그는 내 말을 거부했다.
"첫 해외 트레킹인 만큼 자신은 조금만 더 올라가서 사진 몇 장만 남기고 금방 올 테니 먼저 가라"고 했다.
"몸이 회복되었으니 염려 말라며 시간 내에 포스트까지 기필코 가겠노라"고 했다.
후배는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한껏 자신감을 내비쳤다.
고도는 높았지만 그리 위험한 산도 아니었고 트레일도 비교적 안정되어 있어 나는 후배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그의 말을 믿었던 내가 상황과 사태를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포스트에서 다른 일행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며 후배를 기다렸다.
그렇게 30분, 1시간을 기다렸는데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걱정이 엄습했다.
포스트에 나는 모든 장비를 내려놓고 그를 찾기 위해 다시 달려갔다.
불안감을 가슴속으로 달래며 얼마나 뛰어 갔을까.
그가 비틀거리며 하산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가 부상을 입은 줄 알았으나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친 것은 아니었다.
"조금 더 높은 곳에 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악화된 고산증세로 인해 한참을 그곳에서 아무 생각없이 누워 있었다"고 했다.
잘 했다며 위로했지만 후배 때문에 여정은 2시간 반 넘게 지체 될 수밖에 없었다.
낭패였다.
산에선 평지보다 해가 일찍 졌다.
어둠이 짙게 깔린 위함한 그 길을, 각자의 작은 헤드랜턴에 의지한 채 최대한 조심하면서 산 속 작은 오두막에 겨우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 네 명만 트레킹을 했던 게 아니었다.
다른 일행들도 있었다.
민폐도 그런 민폐가 또 있을까 싶었다.
다른 사람들의 입이 '피노키오의 코'보다 더 크게 튀어나온 뒤에서야 겨우 오두막에 도책했고, 가까스로 바닥에 앉아 지친 몸을 쉬게 할 수 있었다.
미안함에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찌어찌 하여 오지 트레킹을 마치고 무사히 귀국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동티벳'을 떠나기 전에 내가 후배에게 일렀다.
"일행들에게 미안하니 '밥 한 끼' 또는 그 지역 '전통차 한 잔'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끝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현지에서 귀국 행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짐짓 모르는 체했다.
할 수 없었다.
그가 틀렸다거나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너무 아쉽고 안타까웠다는 의미다.
나도 그에게 그런 뉘앙스의 얘기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불만이 가득했던 후배의 아내를 보았다.
잠자리도, 식사도, 트레킹 코스도, 화장실도, 배낭무게까지도.....
서울에선 참신한 화장에 예쁜 장신구, 산뜻한 의상에 깔끔한 피부와 매너까지 참 멋진 사람이었고, 그리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친 자연에 나가서 보니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후배도 그랬다.
그가 염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었으면 현지에서 그에 합당한 행동을 바로 취했을 텐데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는 태도를 보면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의 생각이 엇나갔거나 판단 착오일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생각하자, 신중하게 생각하자며 내 스스로를 달랬다.
그리고 몇 번을 재고하고 또 재고하며 기다렸지만 결과는 허사였다.
그에게서 '염치 있는' 아웃풋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누굴 비난할 목적으로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단지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며 친한 형제 같은 사이였는데, 세상의 가장 척박한 오지에서 그 커플의 밑바닥을, 그것도 아무런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았다 것, 그래서 영 씁쓸하고 개운찮았다는 얘기를 '반면교사' 삼아 기록으로 남기는 것 뿐이다.
나에게도,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성찰'의 매개나 단초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렵고 힘든 상황일수록 따뜻한 배려 한 번이, 상대를 위해 건네주는 환한 미소 한 줄기가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지를 말하고 싶어서 썼다.
다시 시간이 갔다.
나는 지금도 후배와 연락하며 만나고 있다.
그러나 그 횟수와 빈도는 예전에 비해 2분의 1로 줄었다.
그는 악한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다.
크리스천이며 좋은 사람이다.
열심히 일하며 성실하게 생활하는 건실한 직장인이다.
그러나 이기적인 면이 꽤 많다는 걸 알았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헌신적'이거나 '희생적'인 성향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울에선 좀처럼 간파할 수 없었던 대목이었다.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 이후로 후배네 가족과는 조금씩 멀어졌다.
'나이탓'일 수도 있으리라.
나는 후자라고 믿고 있고 앞으로도 그리 믿고 싶다.
내가 자주 쓰는 말이 있다.
'유유상종'이란 단어다.
'지천명' 이후엔 어디를 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누구랑 가느냐가 중요해 졌다.
그래서 이제는 돈이나 명성, 인맥과 관계가 아니라 '배려'와 '헌신' 그리고 '나눔'과 '염치'를 이해하고 실행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면 '동행'이란 단어를 생각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게 되었다.
진짜다.
이것도 '나이탓'이려니 하고 생각하고 싶지만 아무튼 점점 그렇게 변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2024년과 25년, 이 두 해만 지나면 단체로 치러야 하는 '프로젝트들'이 모두 마무리 된다.
앞으로 8번 가량 큰 행사가 남아 있다.
대부분 내가 행사를 주관하는 입장이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다.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물을 주고 거름을 냈는데, 이제는 '유종의 미'를 거둬야 겠지"
그 다음부턴 가능한 한 단체활동은 멀리하고 좀 더 자유롭게 '부부중심', '가족중심', '자연중심', '나눔중심', '봉사중심'으로 인생 2막을 엮어가려 한다.
당신의 몸과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어렵고 힌든 곳에 함부로 가지 마시라.
상호간에 '인간성의 밑바닥'을 보게 될까 걱정스러워서 하는 소리다.
육신의 능력과 정신력은 개인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런 '능력'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인간성과 예의에 바탕을 둔 '배려'와 '염치' 그리고 사람에 대한 조건 없는 '감사'를 얘기하는 것이다.
육체의 파워나 체력의 중요성보다 우리네 마음과 영혼의 '품격'과 '지조'의 중요성 때문에 몇 자 서술해 보는 것이다.
심신의 수양과 영혼의 여백이 부족하다면, 땀 흘리며 고생하는 '대자연'엔 가능한 한 가지 않는 게 좋겠다.
누가 가자고 해도 정중하게 고사하는 게 백 번 낫다.
에펠탑, 금문교, 빅벤, 자유여신상, 쾰른 대성당, 오페라 하우스, 나이아가라 폭포, 콜롯세움 같은 데 가서 예쁘게 차려 입고 깜찍하게 사진 찍는 게 훨씬 낫다.
리버 사이드 레스토랑이나 오션 뷰 호텔에서 우아하게 칼질하며 격조 높은 서비스를 받는 여행이 더 즐겁고 행복할 테니까 말이다.
수십 년 간 친밀하게 지냈던 사람일지라도, 어떤 기회에 상대방의 '밑바닥'을 보게 되는 건 매우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또한 나이가 들수록 종이에 한 번 밴 잉크를 지워내기란 여간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니다.
지우개를 손에 든 채 박박 문지르고 싶어도, 그런 물리적인 시간이 점점 부족해 지고 있고 열정조차도 빈약해 지고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육신의 에너지 뿐만 아니라 마음과 정신의 에너지도 지속적으로 줄어들며 옅어지고 있음을 절감한다.
언제 어디서나 결론은 비슷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이상, 요체는 역시 누군가의 육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성'과 '품격'이라는 것을.
이게 삶의 중추였다.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건강과 건투를 빈다.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