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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남평(南平). 자 일신(日新). 호 삼우당(三憂堂). 시호 충선(忠宣). 초명 익첨(益瞻). 강성현(江城縣: 경남 산청) 출생.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내고, 1363년 좌정언(左正言)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계품사(啓稟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元)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붓대[筆管] 속에 목화씨를 감추어 가져왔고, 이를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고향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다. 1375년(우왕 1) 다시 전의주부(典儀注簿)로 등용되고 1389년 좌사의대부(左司儀大夫)가 되었으며, 공양왕 때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田制改革)에 반대했다가 조준(趙浚)의 탄핵으로 밀려났다. 1440년(세종 22) 영의정이 추증되고 강성군(江城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세조 때에 사당이 세워졌다.
본관 금주(衿州:서울 관악구 봉천동), 초명 은천(殷川). 983년(성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조신(朝臣)들은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그 뒤 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서경유수·내사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다. 1018년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위에 쫓겨가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迎波驛)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檢校太尉)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 이듬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특진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開國侯)에 봉해졌다.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다.
본관은 청도(淸道)이다. 자는 백원(伯元)·백온(伯溫)이고, 호는 고산자(古山子)이다. 출생연도는 분명하지 않으며, 태어난 곳은 황해도 봉산(鳳山) 또는 토산(兎山)이라고도 한다.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지리학에 정진하여 일생을 정밀한 지도와 지리서를 만드는 일에 바쳤다. 전국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30여 년간의 각고 끝에 1834년(순조 34) 《청구도》 2첩을 완성하였다. 이후 1957년(철종 8)에 전국 채색 지도인 《동여도》, 1861년(철종 12)에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여 교간(校刊)하였다.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전체를 그린 전도(全圖)로서 의의가 크다. 김정호는 조선 후기에 민간에서 활발하게 전사되었던 전국지도·도별지도와 국가가 중심이 되어 제작하였던 군현지도를 결합하여 군현지도 수준의 상세함을 갖춘 대(大)축척 전국지도를 만들었다. 특히 《대동여지도》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정확하고 정밀한 과학적 실측지도로 평가된다. 이밖에 서울 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 등을 남겼다. 또 지리지 편찬에도 힘써 《동여도지(東輿圖志)》(1834∼1844), 《여도비지(輿圖備志)》(1853∼1856), 《대동지지(大東地志)》(1861∼1866) 등을 펴냈다. 《동여도지》와 《대동지지》는 지역 단위로 지역의 특성을 기술하는 지역별 지지와 강역·도로·산천 등의 주제별 지리학을 결합시킨 지리지로서 이전의 전국 지리지나 읍지에서는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성을 취한다. 그의 저작활동은 19세기 조선의 국토 정보를 집대성하여 구축하고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국토 정보화의 중요성을 제시하고 실천한 선각자였다. 그의 사망에 대해서는 《대동여지도》를 흥선대원군에게 바치자 그 정밀함에 놀란 조정 대신들이 국가기밀을 누설하였다는 죄로 감옥에 가둬 옥사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그가 만든 지도와 지리서가 보존되었다는 점, 그의 후원자였던 실학자 최한기와 고위 관리를 지낸 신헌 등이 연루되어 처벌받았다는 기록이 없는 점 등으로 보아 신빙성이 적다.
본관은 청도(淸道)이다. 자는 백원(伯元)·백온(伯溫)이고, 호는 고산자(古山子)이다. 출생연도는 분명하지 않으며, 태어난 곳은 황해도 봉산(鳳山) 또는 토산(兎山)이라고도 한다.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지리학에 정진하여 일생을 정밀한 지도와 지리서를 만드는 일에 바쳤다. 전국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30여 년간의 각고 끝에 1834년(순조 34) 《청구도》 2첩을 완성하였다. 이후 1957년(철종 8)에 전국 채색 지도인 《동여도》, 1861년(철종 12)에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여 교간(校刊)하였다.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전체를 그린 전도(全圖)로서 의의가 크다. 김정호는 조선 후기에 민간에서 활발하게 전사되었던 전국지도·도별지도와 국가가 중심이 되어 제작하였던 군현지도를 결합하여 군현지도 수준의 상세함을 갖춘 대(大)축척 전국지도를 만들었다. 특히 《대동여지도》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정확하고 정밀한 과학적 실측지도로 평가된다. 이밖에 서울 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 등을 남겼다. 또 지리지 편찬에도 힘써 《동여도지(東輿圖志)》(1834∼1844), 《여도비지(輿圖備志)》(1853∼1856), 《대동지지(大東地志)》(1861∼1866) 등을 펴냈다. 《동여도지》와 《대동지지》는 지역 단위로 지역의 특성을 기술하는 지역별 지지와 강역·도로·산천 등의 주제별 지리학을 결합시킨 지리지로서 이전의 전국 지리지나 읍지에서는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성을 취한다. 그의 저작활동은 19세기 조선의 국토 정보를 집대성하여 구축하고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국토 정보화의 중요성을 제시하고 실천한 선각자였다. 그의 사망에 대해서는 《대동여지도》를 흥선대원군에게 바치자 그 정밀함에 놀란 조정 대신들이 국가기밀을 누설하였다는 죄로 감옥에 가둬 옥사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그가 만든 지도와 지리서가 보존되었다는 점, 그의 후원자였던 실학자 최한기와 고위 관리를 지낸 신헌 등이 연루되어 처벌받았다는 기록이 없는 점 등으로 보아 신빙성이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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