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신 (조선)신신
위 사진에 보면 태양 빛이 보입니다. 주신이란 저 빛을 뜻 합니다 (연사)
만주 피라미드 군
인디언 피라미드
주신,즉 고조선이 신화인 이유가 단군이 마늘먹은 곰이 여자로 변한 사람을 데리고 나라(제국)를 건설하였다고
하기때문에 신화라고들 말 합니다. 곰이 어떻게 마늘만 먹고 사람이 될수있냐고...
곰족, 호랑이족,말(갈)족...백제,몽고,왜족 신라족, 경상도족 전라도족, 사슴반, 호랑이반 이라고해서 곰이나 사슴,
또는 호랑이들을 말하거나 곰이나 사슴,또는 호랑이들이 사람처럼 행세하던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민족을 부족별로 나누어불렀던 우리식의 표현이며 언어로써 중국식으로는 해석할수 없습니다.
이전의 중국황실이었던 청나라에 대해 지금의 중국정권이나 중국사람들인 진족들은 엄청난 역사적 스트레스(열
등의식)를 받습니다. 청나라의 아버지(태조)인 누런하치(=시라소니)는 함경북도 회령출신의 김 (金)씨임을 함북
출신사람들은 압니다. 단일민족인 우리 한민족은 다민족인 중국사회에 비해 성씨가 발달되어있지 않고 이름만
발달해왔습니다. 현재의 한국인들 성씨 대부분은 이조시대때 중국식으로 창씨계명되어온것인데 본래 우리민족
의 이름은 지금 성씨가 되어있는 금金씨입니다.
우리선조님들께서는 금자를 사랑하여 사람性자로도 쓰고, 나라國이름으로도 쓰고, 주음식(김치)에도 써오고 있
슴이 이를 증명합니다. 금이란 최강,최고가치를 뜻합니다. (단군의 본명은 금산 -연사-)
동북공정이 왜 북한(남한)까지를 포함하냐면 만주족이 고구려족이고 고구려족은 바로 우리 한민족(조선족=고려
인)이었슴을 진인들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청나라(청제국)는 중국을 정복한 후에 백두산을 신성시하여 경비병을
두었다는 사실은 청(연)사에 기록되어있는 내용입니다. 자신들을 " 백두민족" 이라고 했지요.
백두민족이란 백두산이 우리민족의 발원지 즉, 영산으로써 고구려말로는 높구려 즉, 백두산이므로(구려란 : ~을
존중하는 의미를 할때 붙이는 원래 우리말로써 높을고高자는 있는데 구려란 중국말은 없으므로 중국인들은 대충
만든바, 글귀구句자, 마을 려麗를 써서 고高씨의 마을이다 라는 뜻의 고구려高句麗라 씀, 요즘은 고씨가 원래 중국
고씨가 원조라고 조작하며 고구려는 중국변방국이라고 잘도 꾸며대는데 우리 후손대에가서는 금金씨도 원래 중국
금씨였다고 조작하며 우겨댈것이니 한국사람들은 지금의 단군신화처럼 속지 말아야 함. 고구려란 백두산민족이란
존중하는 의미의 존중,높임말인데, 오늘날 "구리다(나쁜냄새난다 "에이 구려~ " )식의 나쁜의미의 단어로 방구냄새
나 똥 냄새를 표현하고있고 또는 "싸구려(저질품)~ 을 표현할때쓰는 단어로 전락되었슴은, 언어를 통해서도 구려
의 역사를 완전히 말살시 키려는 오래전부터의 치밀한 동북공정의 공작에 일환임을 알아야 합니다.(한민족 말살
공작)
연개소문이라는 고구려시대의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는데, 가문본명은 金海, 호인 연개소문이란 이름자중 성씨인
연씨는 백두산 천지연을 뜻합니다. 즉 백두산을 뜻하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도랑가 연못의 연이
라고 왜곡해놓았고, 중국서에는 심지어 천씨라고까지 남의 성씨마저도 지들 멋대로 바꾸어 기록해 놓았는바 ,이게
바로 중국역사기록의 진실입니다. 이러한 중국기록만을 한국 사학자들은 무조건 신봉하고 있는 바, 이미 반화교화
되어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춘추필범이란 수법처럼 우리민족의 참된 역사적사실이 이런식으로 중요한 각 부분에서
마구 조작된 사실을 아는사람은 현재 대학이건 고구려연구회이건간에 한국사학계내에는 거의없는 실정입니다.
우리 한민족은 일만년 동안 흰 머리산을 신성시 해 왔다.
원래 백두산은 지금보다 3분의 1 정도가 더 높았고 맨 윗부분에는 만년설이 있었으며 중국대
륙에서 보였으며 역대 칸들은 모두 백두산을 향해 머리를 두고 잤다. (청연사)
우리민족이 백두산을 신성시하는 이유는, 우리민족의 "발원지로써 혼의 산"이기 때문입니다.
백두민족이란 우리 한민족을 부르는 이름인 부름입니다. 이것은 우리만의 정신이며 우리민족
의 정체이며 상식입니다. 한민족은 누구나, 백두산천지를 가면 신성한 영혼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화교들은 그 신성함을 두려워하여 백두산 괴물설을 조작해내기도 하였는바 이것은 또
다른 한민족말살 공작인 동북공정입니다. 이것이 한민족과 화교의 '유전자적 현상' 입니다.
몽고제국의 황실은 주신-고구려때부터 구전(말로전해오는 역사)으로 알고있는바,고려에 대해
원래 "우리는 역사적으로 원래 형제지간임"을 사전에 칸의 친서를 직접보내 통보하여 이를 분명
히했고 최초의 려몽연합작전인 거란군을 토벌당시부터 칸의 명에의해 '형제의 예'를 갖추어 대
했으며 삼별초의 저항을 제압한후에도 직접통치하지 않고, 민족전통에 따라 독립을 유지시켰으
며 형제국(부마제국)으로써 주신 전통을 지켜 황족의 딸을 서로혼 인시켜 상호 칸비로 간택케하
였던 사실은 주신시대때부터 고구려시대까지 전해져온 민족적 전통관습이었습니다.
중국땅은 원래 우리 땅 !!!!
상해 임시정부 시절, 장개석을 방문한 이시영 임정 요인에게
장개석은 이렇게 말 하였다.
"우리 중국 대륙이 원래 당신들 영토 였다는 사실을 아는가? 무슨 말씀 이신지..?
"독립운동도 좋지만 당신들 참역사를 먼저 알아야지...참역사를 모르는 독립운동은
진정한 독립운동이 안되지 않겠나..? " 혹시 고구려 말씀을 하시는 건지요...?
" 중국역사 자체가 원래, 당신들 역사이었다니까.."
예 ? 그것이 사실입니까?
- 이시영박사 일기 -
상해임시정부에서 남한으로 돌아온 이시영박사는 후일 또 이렇게 말 하였습니다.
장개석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시 상당히 충격적이라 무슨말을 하는지 몰랐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은 장개석뿐 아니라,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중국의 고대사가 동이족의 역
사임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
당시 부통령이었던 이시영박사의 증언 -
여러분! 중국 이란 나라이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별다른 뜻이 없습니다.
바둑으로 말하자면 그냥 '가운뎃 집' 이라는 뜻이죠. 바둑에서 집을 가운데부터 짖지 않습니다.
사각의 귀퉁이부터 집 짖기시작하여 가운데 집을 짖게되죠. 이것은 세상의 순리이며 이치입니
다. 중국인들 스스로가 다민족이라고 하죠? 지금 중국인들 80%가 한민족의 유전적 특징인 청
반점이 있습니다. 순수화교만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화교정권은 대략 100년이고 우리 한
민족의정권의 통치기간은 보통 200년이죠. 동북공정을 안할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죠.
지금의 중국은,고려후손인 청제국의 200년 통치기간중 정복된 영역이지
화교들이 만든 영역이 아니며, 화교의 고유영역은 송나라 지역일뿐이다.
그 엄연한 증거들...
은폐중인 중국 한 가운데의 거대한 주신 유적들
중국,최초의 통일왕조였던 진나라 시황은 한국인(동이족) 이었슴을 중국학자들은 안다.
중국공산당 당국은 진시황의 릉을 발굴한 이후, 현재까지 방치해놓고 있는 사실과 그 이유를
아십니까? 발굴유적 중, 병마용갱을 보신분은 아시겠지만 진시황을 비롯해 대다수의 병사들
은 모두 상투를 하고 있습니다. 상투는 한민족 고유의 두발형태입니다. 이것은 변발형태인데
위로 올리면 상투가 되고 아래로 늘어트리면 변발이 되는것입니다. 우리 한민족만의 고유 두발
형태로써 주신, 구려, 몽고, 만주, 왜 까지 이어진 전통 두발풍습입니다.
중국에서 발견된 엄청난 규모의 진시황의 유적, 자세히 고증해보니 동이족 즉, 한국인조상들이
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시안의 피라미드와 같이 발굴중단해놓고 있습니다만 독일 고고학자들
이 왜 귀중한 유적인데 발굴을 하지 않고 저렇게 그냥 놔두느냐고 묻자, 유적이 훼손될까봐 발굴
중단했다고 공식 답변한바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화교스런, 동북공정식 답변입니다. 요즘의 유
적 보존 과학기술이 매우 발달해있어 전혀 설득력이 없는 얘기입니다. 눈가리고 아웅하는거죠.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동북공정식의 중국역사를 모조리 불살랐던 것 입니다.
은폐중인 중국의 거대한 피라미드 군
세계 최대의 피라미드인 중국 시안의 제2단군릉(구글 위성)
인류최고,세계최대의 주 신 문화유적
시안 단군릉에서 출토된 유물들
(진시황 유적이 아니라 제2 단군릉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주신의 서울(평양)이었던 시안(장안)
이 내용은 삼우선생이 중국을 방문했을때 만난 중국인으로부터 녹취 된 내용입니다.
" 1963년4월에 우리 고적조사팀 36명은 당국으로부터, 진시황의 다른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으로 말하였고, 우리일행은 기차와 버스,트럭을 나누어타고 이틀만에 목적지인 넓은
평원지대에 도착하였는데 창밖으로 이집트 피라밋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많이있었고
도착한 우리발굴단원들은 하나같이 모두 탄성을 질렀어요.
우리 중국에 세계 최대의 이 피라밋이 있었구나! 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이 뒤섞여서 말
이죠, 우리는 중국최고의 이 엄청난 유적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사단은 4팀으
로 나뉘어져 이후 3일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거의 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중 제일 큰것이 역시 대단했어요.거대한 벽돌 피라밋 지하입구로 들
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갈수록 말과 마차를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그림,여러 문자(중국글 한국글등)들,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절구,솥,그릇등 생활도구 1500여점, 배추김치(원래김치인 백김치) 동물의 뼈등 음식
물 400여점, 청동검 활 금관(신라형) 칼,창등 장신구류등 부장품 7800여점, 상투머리를 한
정 중앙시신(진시황의 모습과 흡사했슴)등 14구과 호위상 3000여점등이 대량발견 되었습
니다.우리는 난생처음보는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
에 홀린듯하였으며, 마치 외계인 세계의 무덤을 발굴하고있는 듯한 느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유물들을 확인하면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했었는데, 작업 3일째되던날 대충 7할
정도 파악,작성된 상황이었고 이날 오후쯤에 이를 당시 발굴 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 보
고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이런말을 했어요, 이 유적은 우리 화하족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중화역사 이전의 조선문명이야! 라고 말하면서 큰일이다!..일단 당국
에 보고 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 조사를 모두 중단하고 일단,오늘은 그만
나가세!" 라고 말하여 모두 발굴을 중단한채 나와 숙소에 있게 되었는데, 그날 밤 발굴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 발굴조사단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유적이 우리의 유적이 아니기때문이라고 이해하였고 일행은 그곳에서 떠나기에 앞서 숙소
에서 현지공안에게 이곳에서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였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 그 피리미드들에 관해 더이상 들은적은 없습니다. 그게 그 피라미드에 대한 저로써의
마지막이었고 제가 아는 다 입니다"
- 당시 발굴요원이었던 故 장문구(張汶邱 가명)씨의 임종 전 증언 내용-
(녹취문서 보관)
중국 당국은 그토록 은폐해왔던 북중국 피라미드가 서구의 고고학계를 통해 알려진 이후에
과거 주은래총리가 반대한 동북공정을 더욱, 대대적으로 가속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
만한 독, 미, 중, 일, 러등의 외국역사학자들은 모두 알고있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다만,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인 대학교수와 언론만 모르고있는바, 이건 등잔불밑이
어두운게 아니라 등잔에 불이 없는 장님의 상태로써.한국사학계의 장님현실을 단
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로 땅을 치고 크게 울다 죽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중국공산당 당국에 공개 요청한다.
우리 한사회원인 모 방송 기자가 중공당국에 3년째 서안피라미드 지역에 대한 촬영취재요
청서를 중공외교부에 제출하고있지만 아직도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더구나 세계 최대의
피라미드인데도 유네스코에 등재하지 않고있어요. 그러면서 중국역대왕릉이라고 모조품과
자작한 비석들을 세워놓고 그 안에 있던 유적만 쬐끔 전시하는 애들 장난질 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 한사 회원중 한명이 시안의 피라미드지역을 들어갔다가 체포되어 조사받고 각서
를 쓰고 풀려났다. 왜 이러는가? 그 좋은 위대한 유적을 유네스코에도 등록하고 세계에 공개
해야 마땅하지 왜 군대를 그 지역에 주둔시켜 일반인들의 접근을 철저히 막고 있는가? 왜 그
래야만 하는 거냐? 이 짱깨 화교놈들아 !
현재의 중국은 우리 남북한과 동시에 좋은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특히 북한에 대하여 형제국
임을 강조하며 북핵 6자회담등,외교에 있어서도 특별한 우호를 강조, 실행 ,홍보하고 있는바,
최근에는 한반도 평화 자주통일을 적극 지지한다는 공식입장을 외교적으로 천명 한 바 있
다. 우리 한민족참역사는 이를 환영하면서 보다 발전된 양국의 밝은 미래와 공동발전을 위해
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는 바이다.
후세의 세계역사가들에게 비판받을 가증스런 역사조작인 동북공정을 즉각 중단하라 !
또한, 과거 주신과 구려 강역으로써 현재진행중인 발해유적과 발굴중단된 북중국
의 피라미드 고분들에 대한 공동 발굴 작업을 수용 하라!
선생들이여 거짓역사를 가르치지 말라 !
인간의 육체는 음식을 먹고, 정신은 국사를 먹는다.
국사를 가르치는 자들에게 눈물로 호소 한다.
당신들도 한번쯤은 생각 해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현재 학교국사는 우리 한민족 역사가 아니라 중국역사로 써의 한국역사인 국사로써 소위 이조사관임을 인정할
것이다. 실사적으로 보자면 절반이상이 왜곡,조작된 내용으로 구성되어있는바, 비록 제도가 그렇고 당신들이
그렇게 배웠왔기에 이외 아는게 없다 하더라도 상식에 어긋나 있다는 점은 알고 있을것이다. 제도상 교과서로
가르치더라도 이 불량음식을 단지 타성만으로 선생의 공권력으로 학생들에게 강제로 단체급식하듯이 처맥이는
행위는 지양해야 할 책임이 있슴으로, 이 부분 즉, 최소한 상식에 결여된 내용이 많음을 전제해 주어야 할 의무는
있다고 본다.
지난 국사교육을 먹고 자란 오늘날 어른들이, 아무 정신적 철학없이 살아 있슴으로 인해, 정 관계 학계,법조계
할것없이, 속으로는 사리사욕과 부정부패가 횡행 난무하는 현재의 우리 사회문화풍토는 이러한 학교 국사교육이
중요한 원인이 됨으로써 이 근본적문제를 바르게 잡지 않는한 경제성장과 정비례하여 혼란과 망국현상은 계속될
것이며, 결국 분열과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교육자로써 최소한 통감해 주기를 바랄뿐이다.
상식과, 마음과, 정신으로, 우리 본래의 고려정신으로...
이조소멸이후,100년이 흐른 현 시점에서, 소위 OECD가입국가에서 중국공산당 정권의 동북공정사와 맥을 같이
하는 이 도데체 말도 안되는 소설삼국지보다 못한 내용의 불량 국사음식을 국사라는 신성한 이름으로 포장한채
도데체,언제까지 학생들에게 강제로 처 맥일셈인가?
이러한 허황되고 불량한 음식을 먹고, 이들이 어떻게 건강하게 자랄수있으며, 맑은 지혜를 모아 어떻게 밝은 미래를
이루어 나갈수있는 있겠는가? 중국의 삼국지소설 보다 못한 저질소설책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랑하
는 위대한 한민족의 후예들에게 언제까지 너희들의 역사라고 사기치며 버젖이 가르쳐 댈 셈인가 말이야?
아무생각없이 그저 당신들이 잘못배운대로, 교과서에 씌어진대로 가르칠뿐이라면, 매국노 땅소송건에 있어서 법
규정이 없다며 승소판결내리거나, 양심병역기피라는 변태적 용어를 만들어 버젖이 법원에 소송하고, 또 승소판결
하며 전관예우를 통해 돈 먹고 판결하는 돈먹은 개념없는 판사와 무엇이 다르다고 할 것인가?
현재국사교과서가 왜곡,조작되어있지만, 정상적 의식을 갖은 학자로써는 현재 가능한 범위안에서 충분히 비판,평
가 할수 있으므로 최소한 그 가치관적 의미에서라도 당신들의 제자들을 위해 바른 의식을 갖도록 교육할 필요가
있을것이다.
현행 가짜 교과서가 바로잡힐 때 까지 해야 할 일 !!
교과서 외에, 역사 실사적 관점에서, 학자로써,객관적 의견을 학생들에게 꼭 부연 강의해주기를 바랍니다.
선생님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지금부터라도 이성계의 위화도 반역으로부터 시작된 한민족사의 조작,왜곡,말살에 이
은 일제의 이씨조선의 병합과 식민사관, 그리고 이후 남북분단과 6.25, 오늘날의 지정학적, 사회적현실에서, 당신들
이 후손을ㅠ위해 할일은 , 우리민족의 역사적 사실을 승자의 논리가 아니라 학문적 논리와 사회정의적 논리,그리고
미래의 주인인 우리 후손들의 바른정신을 위한 실사적, 자주적 차원에서 우리의 역사를 말 할 수 있는 참고려의 선
생님이 되기를 피 토하는 심정으로 다시한번 간곡히 말씀드립니다.
중국이나 일본에게 역사왜곡하지 말라고 하기 이전에
더 많이, 더 깊게 조작된 우리 국사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말씀을 눈물로 호소합니다.
우리는 우리 본래의 글로벌 고려의 정신을 되찾아 우리는 원래 한가족 큰사람이었슴을
우리후손들이 바르게 알고 그러한 역사와 바른정신으로 밝게 살아가기를 바랄뿐입니다.
국내최초로 동북공정(북한점령)을 주장한 한민족 전문 역사 사이버 대학
한 민 족 참 역 사
이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한민족 참역사 카페지기 에게 있습니다.
.khankorea,
참고: 대문글은 우리 한민족참역사의 원래 주된 내용을 정리한것으로 현재의 대문글에 비해 약 3배가 많은
내용입니다만 그러다보니 용량이 너무커서 용량이 적은 컴터를 갖고계신 회원들의 경우 대문글전체가 잘
보이지 않는등 버벅현상이 있는 문제로 옆 메뉴창 상단에 원래 대문글 게시판을 따로 만들어서 그 내용을 이
동시켜 놓았으니 신입회원들께서는 기존의 이 대문글들을 모두 읽어보시기를 권고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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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원주민 치앙타이(한국인 후손)들의 전통 주거지 초가집 전경
여기 가셔서 우리 한민족후예들인 잉카의 음악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1072765
잉카(INCA)문명
마야 문명만큼 신비스럽고 미스터리한 문명이 잉카문명이다. 잉카문명은 태양 숭배와 황금으로 유명하다. 잉카문명에 대한 연구는 잉카족이 어딘가 숨겨놓았으리라 전해지는 전설적인 황금도시 두 곳(엘도라도와 파이치치)를 중심으로 한 발굴을 통해 더 깊이 진행되었다. 잉카인의 도로 관리, 지방 관리 시스템은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것과 비교과 되며 연구 대상이다.
잉카문명을 건설한 잉카족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으나 13세기 경 만코카팍이라는 전설적 인물이 자신의 부족을 이끌고 남페루고원의 쿠스코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태양의 신전을 축조한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잉카족은 남방의 아이마라족이나 북방의 창카족 같이 케추아 언어를 사용하는 페루 인디언의 한 집단이었으며 그 당시 대부족이었던 창카족과의 대전쟁에서 이겨 중부 페루고원까지 손에 넣었다. 이후 각지방의 도로가 정비되고 고원의 깊은 골짜기에도 다리가 놓여 유명한 잉카 왕도(王道)의 도로망이 완성되었다.
창카족과의 대전쟁과 이기고 이러한 업적을 남긴 파차쿠티왕은 1474년경에 죽었다고 알려진다. 다음의 투파크 잉카 유팡퀴 황제의 시대에도 정복사업은 속행되어, 에콰도르 지방과 칠레 아르헨티나의 북부도 잉카의 영토가 되었다. 질서가 확립된 행정제도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각종 공공건축도, 태양신전과 성채를 중심으로 각지에 세워졌다. 잉카제국의 근본적인 형태는 이 투파크 잉카 시대에 이루어졌으며, 이 잉카가 죽은 것은 1493년경이었다
잉카는 15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남아메리카의 중앙 안데스지방(페루·볼리비아)을 지배한 고대제국의 명칭으로 동시에 그 사회적 중핵(中核)으로 되었던 부족 및 그 지배계급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잉카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잉카족은 케추아족이라고도 불리며, 남방의 아이마라족이나 북방의 창카족 등과 함께 페루 인디오의 한 집단이었다.
잉카는 네개의 "수유" (suyu)로 나뉘어 각 수유의 모서리는 (잉카 신화에 의하면) "세계의 배꼽" (Qusqu)에 서로 맞닿아 이곳에 수도 쿠스코가 설립되었다.
제국의 공식 언어는 케추아어였으나 몇 백개가 넘는 지역 언어가 통용되었다. 잉카 지도부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도록 권장했는데 그 중 최고신은 태양신 인티였다
기원전 11000년 오늘날 페루라는 불리는 지역에 정착해 기원전 1250년 안데스 산맥지역에 부족사회가 형성된다. 빈족, 치무족, 나스카족, 티아우아나코족 등이 있다. 서기 600년 우아리 지역에서 온 민족이 200여년 동안 서부 안데스를 지배한다. 이때부터 미라를 매장하는 풍습이 생긴다. 900년 우아리 민족이 사라지고 다시 여러 부족으로 갈라진뒤 1105년 잉카 군주인 신치 로카가 자신의 부족을 다스리게 된다. 1370년 치무족이 페루를 다스린다. 1438년 부족들끼리 분쟁을 일어난다. 약 50년에 걸쳐 잉카족은 다른 부족들을 정복하고 지배한다
1100년 잉카인들이 세력을 넓히려고 다른 민족을 정복한다. 1438년 창카족이 잉카인을 공격하나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잉카제국이 내분이 일게 된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롬버스가 우연히 아메리카대륙에 오게 되어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정복하게 된다.
1430 - 1532년에 전성기를 이룬 제국이다. 꾸스꼬를 기반으로 작은 왕국이었던 잉카는 1세기만에 콜롬비아 남부에서 칠레 중부의 모든 왕국을 통일흡수하였으나 삐사로에게 제왕이 체포되자 쉽게 멸망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기원전부터 여러 문명이 명멸하였다. 잉카는 그 최후에 나타난 제국으로 문자를 사용하지 않아 역사를 추정할 수 밖에 없다.
태양의 신인 비라꼬차의 계시에 따라 최초의 잉카선조들은 기원후 1200년경에 있던 전설상의 대홍수에 의해 이주했다. 이후 망꼬 까빡이라는 최고지도자의 금지팡이가 가장 깊이 박히는 곳에 도읍을 정하라는 계시가 있었고 결국 세상의 배꼽이라는 지금의 꾸스꼬에 신의 계시에 따라 도읍을 정했다. 그들의 수도인 꾸스꼬는 인구가 이십만정도되는 큰도시였다.
네 개의 세상전설을 가진 문명은 씨족공동체인 아이유(Ayllu)를 통해 제국이전부터 토지, 가축 곡식 등을 공동소유하여 집단생활을 했다. 사회제도 행정의 기본틀이 된셈이다. 께추아어를 사용했지만 문자는 없었다. 끼뿌(께추아어로 매듭을 뜻하며 매듭져있는 일련의 끈 또는 줄의 다발로서 수를 계산하고 역사 사건을 기록하는데 사용)를 중심으로 자치적인 정치운영을 했다.
잉까라는 말은 원래 어느 부족의 명칭이었지만 나중에 잉까제국의 황제를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오늘날에는 일반적인 잉까제국 사람들을 뜻한다. 잉까라는 말은 인띱 추린(Intip Churin)이라는 태양의 아들을 의미하는 어휘에서 기인되었다. 태양신은 잉까인들의 대표적인 신이다. 창조주 우이라꼬차가 무에서 만물을 창조한것과 달리 태양은 창조주 의도대로 창조주 최고신이면서 잉까인들의 아버지로 군림했다.
잉까인들은 태양이 코카잎을 즐겨먹는다고 믿었으며 옥수수술을 빚어 태양에게 바쳤다. 그들은 술이 증발해버리는 것을 태양이 마신다고 생각했다. 끼야라고 불리는 달의 신은 태양의 아내로서 임산부의 신이라 불임 여인들이 달에게 아기를 달라고 기도했다. 두개골을 수술할정도로 의학이 발달했다.
1531년, 프란시스코 피사로 장군의 스페인 군대가 페루에 침투하여 북고지의 도시 카하마르카(Cajamarca)가 발견이 되고 거기서 아타우알파가 체포됨으로써 잉카제국은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후 스페인은 잉카지역을 식민지로 삼고 식민지 제도를 시행하였다. 잉카의 마지막 황제가 죽은 후 잉카인들의 독립운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망코라는 잉카인은 반란을 일으켜 쿠스코 북서쪽 계곡을 거점으로 1571년까지 저항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잉카문명은 신권을 중요시하는 제국의 성격을 띠었으나 평민을 위한 사회보장이 완비되어 있어서 ‘신권적 사회주의’라든가‘사회주의 제국’으로 구분된다.
잉카제국에 있어서 모든 토지는 황제에 귀속하며, 모든 지방의 촌락들에 있어서 경지(耕地)는 잉카·태양신·국민을 위하여 3등분되었다고 한다.
비밀의 공중도시 마추피추
1911년 미국의 상원의원이자 고고학 교수인 히람 빙햄에 의해 발견된 마추피추는 안데스 산맥의 해발 2,700m의 봉우리에 숨겨지고 우루밤바강의 계곡에 의해 둘러싸인 요새도시로 잉까제국의 영광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물이다. 그러나 수도인 꾸스꼬로부터 113km떨어진 이 도시가 과연 어떤 목적에 의해 건설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여러 건축스타일로 건설된 궁전, 사원, 요새, 가정집, 광장 등이 있으며 고산지대임에도 불구하고 관개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 그 위치로 볼 때 오얀따이땀보나 삭사우아만처럼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 건설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며 황제가 신과 직접 대면하기 위한 곳, 혹은 천문학적 관찰을 위한 곳이었다는 등의 설이 있으나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마추피추가 쿠스코로의 접근을 통제하기 위한 요새였을가? 아니면 태양신의 처녀들에게 바친 일종의 수녀원이었을까? 망코 잉카(잉카에 대항에 반란을 일으킨 스페인인들이 옹립한 허수아비 지배자)의 마지마 피난처였을까? 마추피추처럼 다양한 가정과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유적도 별로 없다.
깎아지른 절벽과 하늘을 찌를 듯한 봉우리로 둘러싸인 우르밤바 계곡. 마추픽추는 이 우르밤바 계곡지대의 해발 2,280m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마추픽추는 '나이 든 봉우리'라는 뜻인데, 산자락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공중도시'라고도 불린다.
잉카인들이 스페인 인들의 공격을 피해 산속 깊숙이 세운 것이라고도 하고, 군사를 훈련해서 후일 스페인에 복수하기 위해 건설한 비밀도시라고도 한다. 또한 자연재해, 특히 홍수를 피해 고지대에 만든 피난용 도시라고도 한다. 도시의 총면적은 5㎢, 그 절반에 해당하는 비탈면은 계단식 밭이다. 서쪽의 시가지에는 신전과 궁전, 주민 거주지 구역이고 주위를 성벽으로 둘러쌌다.
16세기 후반, 잉카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이곳 마추픽추를 버리고 더 깊숙한 오지로 떠났다. 그 뒤 약 400년 동안 사람 눈에 띄지 않다가 1911년 미국의 역사학자 하이람 빙엄이 발견했다.
수수께끼의 時空
마추픽추의 시공간은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그 유적에는 3대의 시간이 흐른다. 200톤이 넘는 거석, 정교한 다면체로 쌓아올린 '태양의 신전', 주신전 등은 건축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선사시대 사람들의 작품이다. 후대의 잉카인들도 고대인들만은 못하지만 나름대로의 기술로 고유의 건조물을 세웠고, 유적 붕괴 후에는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조잡하게나마 유적을 재건하고자 석축을 쌓았다. 이 3대에 걸친 건조물을 보노라면 문명의 영고성쇠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유적 꼭대기에 '인티파타나'라고 하는 제례용 석조물이 있다. 인티파타나는 '태양을 잇는 기둥'이라는 뜻이다. 이 석조물 위에 높이 1.8m, 너비 36cm의 돌기둥이 솟아 있다. 잉카인들은 천체의 궤도가 바뀌면 커다란 재앙이 생긴다고 믿고, 매년 동지 때 이 돌기둥 바로 위에 뜬 태양을 붙잡아 매려고 돌기둥에 끈을 매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둥을 해시계의 일부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즉 이 기둥이 만드는 그림자가 시각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당시 기술력을 감안해 볼 때 너무 단순한 추측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유적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암반을 깎아 만들었으니 그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황금을 찾아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골드 헌터(Gold Hunter)들에게는 이 두 단어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엘도라도(El Dorado)와 파이치치(Paichichi). 두 곳 다 안데스 산맥 근처 밀림에 있다고 전해지며 엘도라도는 황금으로 이루어진 도시인 반면, 파이치치는 대규모의 황금이 숨겨져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잉카제국이 처음 서방 세계에 알려진 이후 이 두 도시를 찾기 위해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 발견된 것은 맞추피추, 그란 파자텐 같은 유적지였고 그나마 역사적 가치가 높아 그 것으로 위안을 삼곤 하였다. 최근 페루의 일간지 ‘엘 코메르시오’가 페루 동부 원시림에서 가옥, 사원, 무덤들이 완벽히 남아있는 옛 유적을 발견하였다고 보도했다. 덧붙여 이 지역이 지난 500여년동안 고고학자와 탐험가들이 찾던 엘도라도 도시의 일부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었다는 얘기는 없다. 1965년에 그란 파자텐이 발견되었을 때도 그러한 추측과 소문이 떠돌았으나 사실무근이었다.짐승과 인디언 추장 얼굴이 돋을새김 되어 있어 잉카 귀족 무덤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나 발굴을 시작한 지가 꽤 오래인데도 잉카의 황금이 나왔다는 말은 없다.
또 마티겐족이 문명을 피해 살던 판차코차 밀림에서도 1973년에 잉카 유적이 발견되었으나 황금은 나오지 않았다. 엘도라도가 황금인간일 뿐이라는 설도 있다. 1969년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서 몇 시간 거리에 있는 산 속 동굴에서 순금으로 만든 뗏목 모형이 발견되었다. 그 뗏목위에는 순금으로 만든 추장이 서 있었고 그 뒤에는 8명의 부족 사람들이 노를 젓고 있었다. 스페인 군대에게 처음 엘도라도의 존재를 가르쳐준 칩자족은 이러한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추장은 몸에 금가루를 바르고 황금을 구아타비타 호수에 던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해발 3,000미터 높이의 화산 분화구 호수인 구아타비타 물을 다 빼내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그 바닥에서 금을 발견하였다는 소식은 없다.
잉카인들이 스페인군의 약탈을 피해 엄청난 양의 황금을 감추었다고 전해지는 파이치치에 대한 탐사 시도 또한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파이치치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아마존 밀림 어딘가에 깊숙이 숨겨져 있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발견이 안 될 리가 없다. 엘도라도와 파이치치의 존재는 역사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잉카제국은 역사상 가장 황금을 많이 가지고 있던 나라였고 한 때 스페인을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로 만들게 했다고 한다. 그 때 스페인이 빼앗아 간 양은 잉카 제국이 가지고 있던 모든 황금의 4분의 1도 안 된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