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수원 화성은 18세기 최첨단 전투요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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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화약의 발명은 전쟁의 양상을 바꿔놓았다.화살과 돌을 앞세웠던 전쟁은 조총과 대포의 대
결로 바뀌었다. 이에따라 성곽의 모습 또한 변해야만 했다. 화포의 공격을 견뎌내는 것이
성곽의 첫 번째 과제가 된 것이다. 18세기, 정조시대에 만들어진 화성은 화포 시대를 대비
한 최첨단 전투요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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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1 [화성 성문밖에 서서-]
제가 서 있는 이곳은 수원 화성의 팔달문 앞입니다.아주 견고해보이면서도 세련된 모습인
데요, 이 화성은 200년전, 조선의 계몽군주라고 불리웠던 정조때 만들어졌습니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였던 사도세자의 능을 여기서 가까운 곳으로 옮기면서 인근에 새로운 신도
시를 건설하려고 했는데요,그 결과물이 바로 화성인 것이죠.조선시대 성들중에 가장 마지
막에 세워진 이 화성을 두고, '조선 성곽 건축의 정점이자 완성품'이라는 말로써 극찬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화성은 지난 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돼서 그 건축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은 바 있지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화성의 예술적 가치
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건축학적, 조형적 아름다움 뒤에 숨겨져 있는 화성의 진면목을 들
여다보고자 함인데요, 대체 이 아름다운 건축물이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먼저, 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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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수원시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화성,이 성곽을 중심으로 도시가 성장해 온 까닭에 현재 화성
은 도심의 한가운데 끼어있는 모습이다. 화성 사대문중 하나인 팔달문은 좌우로 도로가 들
어서면서 성곽의 일부가 끊어진 상태, 이런 몇군데를 제외하면 화성은 비교적 제모습을 잘
간직하고있다. 임금이 화성에 행차했을 때 머물던 낙남헌, 성내부에 세워졌던 건물들 중에
서는 유일하게 남은 것이다.주택가로 변해버린 성 내부와는 달리,성곽 주변의 전경에는 옛
스러운 풍취가 살아있다.인공으로 조성된 용연 위쪽으로는 화성 제일의 정자로 알려진 방
화수류정이 자리잡고 있고,성벽을 따라 늘어서 있는 건물들이 화성의 번성했던 시절을 짐
작케 한다. 자연스러우면서도 견고해보이는 성벽은 화성의 가장 큰 자랑거리다.
김동욱 교수 설명중 화성의 경우는 각진 석재를 규격화 시켜가지고 차곡차곡
샇되 중간중간에 맞물려지게 그래서 축성술로보면 조선초기에 비하면 굉장히 견고하고
보기에도 이렇게 모자이크 무늬같이 보여서 시각적으로도 효과를 내는 축성술로서는 제일
완성 단계의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화성이 완성된 것은 1796년-정조의 명을 받아 2년 6개월에 걸친 공사의 결과로 탄생한 것
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근처로 이장하면서 이곳을 수원의 새로운 중심지이
자 신도시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화성이 완성된 뒤, 만들어진 화성 성역의궤-성의 건설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한 일종의 공사 보고서다.공사 주체와 자재에 관한 기록은 물론이고,
언제라도 복원이 가능하도록 건물의 설계도가 모두 기록돼 있다.지난 1997년,화성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 의궤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김동욱 선생 INT 마치 화성을 복원할 것을 미리 예상하고 만든 것 같이
그렇게 정확하게 기록을 했고,그런 기록 정신이야 말로 화성성역의궤의 제일 중요한 가치
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 계획도시로 설계된 화성은 정조대의 안정된 정치와 경제,그리고 문
화의 발달이 있었기에 만들어 질 수 있었다.실용성을 최대한으로 살리면서도 건축적 조형
미를 잃지않은 아름다운 성,수원 화성은 조선시대 최후이자 최고의 성곽 건축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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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2 [성벽위에 서서-]
지금의 이 화성은,정조때 지어진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지난 70년대 중반에 상당부분 복원
된 것입니다. 물론 원형 그대로를 살려서 복원했지만 이처럼 복원된 유물이 세계문화유산
으로 등록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합니다.대체 유네스코에서는 화성의 어떤 점
을 높이 샀던 것인지 한번 볼까요? <화성은 동서양을 망라하여 고도로 발달된 과학적 특징
을 고루 갖춘 근대 군사 건축물의 모범임!!> 그리고 여기에는,<화성은 18세기 군사 건축물
의 대표로써, 유럽과 극동아시아의 성축조술을 통합한 독특한 역사적 중요성을 가졌음!!>
이렇게 돼 있군요.그런데 대체 어떤 부분을 보고 과학적이라는 것이며, 또 발달된 군사 건
축물이라고 평가하는 걸까요? 이제부터 그 의문을 하나하나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일반
적으로 성이라고 하면,평소에는 통치나 치안을 위한 경계선의 구실을 할뿐이지만, 전쟁과
같은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가장 중요한 방어막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를 좀
보십시오.훌쩍 뛰어내릴 수도 있을 것 같은 높인데요,성벽의 높이가 이렇게 낮아서야 전투
를 치를 때 불리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유난히 낮은 화성의 담벼락,여기에는 무슨 까닭이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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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먼저 화성 성벽의 높이가 얼마인지부터 확인해보기로 했다.측정 결과, 성벽의 높이는 평균
4m, 높은 곳도 5m를 넘지 못했다. 장정 두세 사람만 겹쳐도 성벽을 넘어서는 것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방어하기에 유리하지 않은 낮은 성곽, 화성은 왜 이같은 선택을 했던 것일
까? 충북 보은군에 위치한 삼년산성, 삼국 시대때 만들어진 성이다. 깎아지른 듯 촘촘하게
쌓아 놓은 성벽은, 한눈에도 쉽게 침범할 수 없을 것 같은 위압감을 준다. 경사진 산기슭의
높이까지 더한다면, 최고 20미터가 넘는다는 삼년산성,성벽의 높이만도 14미터가 넘는다.
성벽을 이처럼 높게 쌓은 것은 고대 전쟁의 성격때문이었다.보병이나 기병을 이용한 육탄
전이 대부분이었던 까닭에, 성벽이 높을수록 적을 방어하기가 쉬웠던 것이다.높은 성벽에
대응해, 이것을 공략하기 위한 무기들도 개발됐는데, 소차는 성안의 동태를 엿보기 위한
일종의 정찰용 엘리베이터였다.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한 발석차는 커다란 돌멩이를 날려
보내 성벽을 파괴하는 고대의 대포였다.높은 성벽을 타고 오르기위한 이동식 사다리차가
개발되기도 했다.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여의치 않자, 땅 밑으로 통로를 만드는 방법도
등장한다. 이처럼 과거의 전쟁에서는 성벽의 높이가 승패까지도 좌우하는 중요한 조건이
었다. 그러나 화포의 등장은 상황을 변화시켰다. 화포가 전쟁의 주력 무기가 되면서, 높은
성벽은 오히려 방어하기에 불리한 조건으로 전락한다.성벽 아래쪽을 공격당할 경우, 한꺼
번에 무너질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노영구 INT 화포가 등장하게 되면서 직접 화포는 성곽을 공격하는 중요한
무기로 변하게 됩니다.이에 따라서 이전의 높고높은 성곽은 첨탑이 많고 높은 성벽은 공성
화포의 공격에 대단히 취약하게 되죠,이에 따라서 높은 첨탑을 없애야 하고 성벽높이도 점
점 낮아져야 합니다. 높은 첨탑을 가지고 있었던 유럽의 성곽 역시, 화포의 발달이후 낮아
지고 두터워지는 양상을 보인다.성곽의 높이와 더불어,화성이 화포에 대응하기 위한 성이
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석재의 크기다.가로 세로의 크기가 40에서 60센티미터 사이로 매우
큰 편에 속한다.여기가 30/40/두께가 25cm..화성보다 먼저쌓은 남한 산성의 성돌은 훨씬
작음을 알 수 있다.
심선생 INT 여기가 인조때 쌓은 남한산성 본성이다 보시다시피 전통적
축성기법이 남아있다. 성돌의 크기를 보면 30*40으로 작고 본성을 쌓을 때까지만 해도 포
루가 설치 안된다.그런 것으로 봐서 임진왜란 이후의 성이기는 하지만 화포에 대한 대비책
은 강구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돌의 크기가 작을 경우, 화포의 공격으로 일부가 깨어지면 다른 돌들이 함께 빠져 나갈
위험 또한 커지게 된다. 화성의 경우에는 석재의 크기뿐 아니라 성돌의 깊이 또한 70cm
내외로 깊게 만들어서 쉽사리 빠지지 않도록 장치했다.이것은 일반 성돌보다 세배 가까이
긴 것이었다.화성의 성벽을 견고하게 지탱해주는 가장 큰 비결은 심석을 사용했다는 점이
다.무려 1m 50cm 길이의 심석을 성벽 중간중간에 박아놓은 것이다.
장순용 설계사 INT 그 당시에는 지금같은 콘크리트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돌자체끼리 이가 맞물리도록 5-6자 간격으로 석재를 긴 것은 5자정도를 간간히 설치해서
그것으로 뒷채움돌과 성곽이 일체화되는 방법을 사용했다.
화성의 성벽은 심석과 성돌을 엇물려놓는 당대 최고의 축성 기술로 만들어 졌던 것이다.그
렇다면,실전에서는 어떠했을까? 화성이 만들어진 시기에 사용되고 있었던 화기를 살펴보
면, 조총은 성벽에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오늘날 바츄카포에 해
당하는 불랑기 역시 두터운 성벽을 파괴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가장 강력한 화기
는 홍이포였다.당시의 최첨단 화기였던 홍이포,화성은 홍이포의 공격을 어느 정도까지 견
딜 수 있을까? 육군 사관학교 토목 공학과 김운영 교수의 도움을 받아서,그 결과를 예측해
보기로 했다.
김운영 교수 INT 당시 탄을 일반 재래식 철을 사용한 제조로 생각했고 지금처럼
현대 탄 모양이 아니고 구형의,원형의 모양을 생각했습니다.그리고 당시 화약의 성능으로
봤을 때 요즘 무기같으면 시속 300내지 400의 빠른 속도로 나가지만 당시는 그에 충분히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계산한 것은 150정도 초속 150m 정도의 탄의 속도로 가정을
해서 계산을 했습니다.
계산의 조건은 당시의 상황에 가장 가깝게 설정했다. 지름 10cm의 철로 만든 구형 포탄에,
탄의 속도는 초당 150m, 석재의 크기는 화성 성돌의 평균에 맞췄다.
김운영 교수 INT 화강암 같은 경우 일반적으로 요즘 콘크리트 강도의 한
5배 내지 6배의 강도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특히 날아오는 탄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암돌
의 강도가 되겠습니다.그런 높은 강도를 가지고 있고 특히 두께가 60cm 정도로 되어 있을
경우에는 현대 무기로도 저희들이 아주 고성능 무기가 아닌 일반적으로 쓰는 야전에서 볼
수 있는 무기같은 경우는 충분히 돌이 파괴 된다든지 파손이 돼서 피해를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따라서 과거의 무기로 봤을 때는 수원 화성은 당시의 화포의 공격
에 대해서 성벽이 화포의 충격으로 무너진다든지 또는 피해를 보는 일은 없었을 것으로 추
정이 됩니다.결국 화성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무기였던 화포의 공격을 충분히 버텨낼 수 있
을만큼 견고하게 지어졌던 것이다.화성의 건물들중에는 화강암대신 이렇게 벽돌을 이용해
지은 것들도 있다. 그런데 이 벽돌 건물들은 성문 앞쪽이나 성벽 모서리 등 공격에 가장 많
이 노출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조선 시대 실학자들 사이에서는 돌
과 흙, 그리고 벽돌중 어느 것이 성벽의 재료로 적합한 지 의견이 분분했다. 반계 유형원같
은 이는 돌을 이용하되 부분적으로 벽돌을 쌓아서 석회로 고정시킬 것을 주장했다.이것은
현재 화성의 축성법과 동일한 것이다.
김동욱 교수 INT 벽돌성이 좋으냐, 돌로 샇은 성이 좋으냐는 조선시대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돌은 돌자체는 강한데 돌과 돌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것은 무너지기 쉬
운 약점이 마찰력이 약하기 때문에 벽돌은 벽돌자체는 약한데 몰탈롤 옛날의 석회석인데
접착을 해놓으면 전체는 강하고 그런데 이제 대포가 등장하게 되니까 대포에 대해서 돌이
강하냐 벽돌이 강하냐 이게 논란거리다.화성의 성벽은 당시 사람들이 벽돌과 돌의 기본적
인 성질은 물론이고 그 장단점까지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돌 자체의 강도는
석성이 더 강하지만, 포의 공격을 받아 부서질 경우 석성은 주위의 돌들이 함께 무너지는
반면 벽돌은 그 부분만 파손된다. 화성은 축성 재료의 이같은 성질에 맞춰 성의 기본 골격
은 돌로 쌓되 공격에 취약한 지점은 벽돌을 이용하고 있다.그 결과,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만든 성곽이 돌과 벽돌로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건축물의 면모 또한 갖추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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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3 [성벽위에 서서-]
이렇게 튼튼한 성이라고 해도 한곳을 집중적으로 공격받는다면 아마 버티기는 힘들겁니다.
이런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서 성벽을 튼튼히 건설하는 것 뿐만아니라 적에게 맞설 수 있는
공격과 수비능력도 갖춰야 하는데요, 화성의 전투능력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이처럼 성벽
위에 덧대어 쌓아놓은 담을 여담 혹은 여장이라고 하는데요, 여기부터 여기까지를 타라고
부릅니다.각각의 타에는 이렇게 세 개의 구멍이 뚫려있는데요,이건 총 쏘기위한 구멍입니
다. 어디 한번 볼까요? 양쪽 옆에 있는 두 개의 구멍은 이렇게 서서 멀리있는 적들을 향해
총을 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것은 아래를 향해 비스듬히 구멍이 나있군요,성
벽 가까이 다가온 적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죠. 이렇게 말입니다. 화성 둘레에는 이런 타가
913개가 있는데요,하나의 타에 3개의 구멍이 있으니까 모두 합하면 2700여개의 총구멍이
만들어져 있는 셈입니다.그리고 여기 바닥에도 구멍이 나 있는데요,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현안(혹은 누조)이라고 하는 건데요, 적군이 성벽에 달라붙으면
이 구멍을 통해 뜨거운 쇳물이나 오물 등을 부어서 적을 물리치는 시설입니다.이처럼 화성
곳곳에는 방어와 공격을 위한 시설들이 갖춰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건 저
뒤에 보이는 건물인데요, 화성 최고의 전투 시설이라고 불리는 저 건물이 무엇인지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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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동북 공심돈은 화성에서 가장 독특한 건물로,벽돌을 이용해 쌓은 원통형의 몸체에는 수십
여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건물의 내부는 복도식으로 이뤄져 있는데,구멍들을 통해 바깥을
내다볼 수 있도록 했다. 나선형 복도를 따라 걷노라면 꼭대기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같은
구조 때문에 소라각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김동욱 교수 현장음 총구를 질게 직선으로 파서...서로 이렇게 지그재그로
이곳에 만들어 놓은 수십 개의 구멍은 모두 총이나 포를 쏘기 위한 것으로, 자신의 몸은 은
폐 하면서 밖의 적을 공격하기에 유리한 시설이다.한꺼번에 공격할 경우,엄청난 화력을 뿜
어내는 전투 요새로 변신하게 되는데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이같은 시설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중국 병서인 <무비지>속에는 각종 군사 시설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그 중
에서도 망을 보는 초소, 즉, 돈대라고 하는 시설물이 주목을 끈다. 돈대는 우리나라의 기존
성곽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시설이다.우리나라에서 돈대가 처음 세워진 것은 강화도였다.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적을 감시하기 위한 것으로, 강화도 전체에 약 50여개의 돈대가 세
워졌다.그러나 단독으로 세워진 돈대는 적의 집중 공격을 받을 경우 쉽게 함락되는 단점이
있었다.이 때문에 후대로 내려오면,돈대와 돈대를 이어주는 외성을 쌓게 된다.초소로서의
기능에, 방어 능력을 추가시킨 것이다.남한산성의 이웃 산봉우리에 세워진 신남성 동돈대,
남한 산성이 한눈에 내려다 보일뿐 아니라,산성으로 진격해 오는 적의 동태를 감시하기에
도 매우 유리한 곳이다. 즉 전략적 거점인 셈이다.
심선생 INT 남한산성에서 성밖에서 성안쪽이 바라다 보이는 곳이
세군데가 있습니다. 연주봉이 있구요 그리고 한봉이 있고 그리고 신남성 돈대가 바로 이곳
입니다.특히 병자호란때 이곳을 뺏기게 됨으로써 이제 치명적 손상을 입게 되는데요.청나
라군대가 여기다가 대포를 설치하고 포를 성안에 있는 휘궁까지 날렸다는 그런 기록까지
있는 걸로 봐서 여기는 남한 산성을 방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여기다가 군사를 잡고 말하자면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는 개념으로 이 돈대를
쌓았던거 같습니다.
이곳은 본성과 가까운 만큼 방어에서도 유리하다.만약 적이 공격해 온다면 본성에서 포를
쏘아 지원해줄 수 있는 위치인 것이다.
노영구 INT 화포가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그런 독립 시설물들은 적의
화포공격에 각개 격파될 우려가 있는거죠. 이에 따라서 돈대의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돈대가 적의 집중적인 화포공격에 견디기 위해서는 주성곽과 거리를 가가이 하면 가까
이 할수록 안전해 지겠죠.화성에서 보이는 그런 돈대라던지 그런 것들은 바로 그런 양상을
띨 수 있죠.
주위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그 위치만으로도 동북 공심돈은 돈대에서 비롯된 것
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화성의 경우에는 성안으로 완전히 들어와 있는 형태다. 여기에 공격
기능까지 더해 짐으로써 동북 공심돈은 돈대의 가장 발달된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동북
공심돈이 정찰을 위한 돈대에서 비롯됐다면,서북 공심돈은 공격 시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서북 공심돈의 위치는 사방으로 공격하기 쉽도록 성벽 앞쪽으로 노출돼 있다.이것은 공심
적대에서 유래한 것으로, 공심 적대는 빈탑안에 구멍을 뚫고 공격시설을 갖춘 것이었다.이
것 역시 처음에는 성과 떨어져 있었지만, 점차 성가까이로 다가오게 된다.성벽에 붙으므로
써, 각개 격파의 위험은 제거하고 공심 적대의 공격성은 극대화 시킨 것, 바로 이것이 화성
서북 공심돈의 실체인 것이다. 우리의 전통이나 중국의 기술을 받아들여 한단계 더 발전된
것으로 재창조한 사례는 화성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포루도 그중 하나다. '성을 방어하
는 위치는 성벽위'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공격 시설들을 성벽 아래쪽까지 확대시켜 놓
았다.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방화수류정 역시 풍류를 위한 정자의 기능
과 방어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겉에서 보기에는 정자를 장식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는 구
멍들이 실제로는 바깥의 동태를 살피는 정탐 시설이자 방어 시설인 것이다.화성 성곽을 따
라 퍼져있는 시설들은 공격과 방어에 유리하도록 배치한 과학적인 설계의 산물이다.
노영구 INT 수원화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만들 당시부터 중국이라든지
일본이라든지 여러 성제들을 총 수집해서 분석하고 또한 당시 있던 전쟁의 양상들을 분석
하고 조선의 18세기 이후에 샇았던 읍성의 축성경험들을 농축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전
성곽보다도 훨씬 실용성이 높고 당시 전쟁 양상에 부합하도록 조선성곽이 만들어졌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어느것 하나 똑같은 것이 없는 화성의 건축물들,그것은 단순한 미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결
과가 아니었다. 그 하나하나에는 각각의 용도와 위치를 고려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과학정
신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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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4
소라속처럼 뱅뱅 돌아서 올라가는 구조가 참 재미있는데요,이 공심돈이 완성되고 나서 당
시 임금이었던 정조도 이렇게 저처럼 구경을 왔었다고 합니다.그 당시 기록을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세운 것이니 많이들 구경하라 : 정확한 내용으로 보강>
정조가 이 공심돈을 보고 매우 만족해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전투 시설물
들은 그 자체의 화력도 중요하겠지만 얼마나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더 중
요할 것 같은데요.공심돈의 입지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여기는 제가 있던 공심돈
의 건너편 각루인데요 어이쿠,상당히 높습니다.어디 한번 볼까요.저 아래쪽으로는 화서문
이 보이고 그 옆으로는 공심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그런데... 가만히 내려다보니까, 건물
들이 들쭉날쭉하게 배치되어 있군요. 보통 성곽들은 둥근 형태인데...좀 다른 것 같습니다.
여기에도 어떤 의도가 숨어 있을 것 같은데요, 실제 전투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볼까요? 적군이 정문을 향해 쳐들어오니까 양쪽에서 공격을 퍼붓는군요. 이런 이런, 연
기 때문에 밑에 상황이 잘 안보이긴 하지만 이 건물들이 전략적인 목적에 의해 배치되었음
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대체 어떤 전략이 숨어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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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화성 사대문중 하나인 화서문, 이 화서문의 정문 앞에는 마치 담을 둘러놓은 듯한 둥근 성
벽이 가로막고 있다.화서문의 옹성이다.옹성은 다른 곳에 비해 취약한 동시에 공격의 제일
순위가 되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시설이다. 옹성이 있을 경우 성문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쉽지 않을 뿐더러 설사 적이 옹성안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사방에서 포위
하는 형상이 되므로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옹성은 화성의 사대문 앞에 모
두 설치돼 있는데, 위치에 따라 그 모양새가 조금씩 다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팔달문과
장안문 앞에는 또 하나의 성문이 달린 옹성이 있다.한양과 지방을 이어주는 도로가 성문앞
을 지나는 까닭에 우마차 등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면서도 방어 할 수 있도록 이중의 성문
을 만든 것이다. 성문 옆에는 또다른 방어시설도 갖춰져 있다. 옹성보다 조금 더 앞쪽으로
돌출해 있는 적대가 그것이다. 적대는 성문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일종의 공격형 방어시설
이다.만약 적군이 정문을 향해 돌진해 온다면 성문 양쪽의 적대에서 협공을 취할 수 있다.
그만큼 사각지대가 줄어드는 것이다.적의 공격을 받아 성문이 불탈 경우에는 오성지가 그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다섯 개의 구멍에서 물이 쏟아져 내려 불을 끌 수 있는 일종의 소화
전과도 같은 시설이다.화성의 서남쪽에 위치한 화양루 또한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주
목을 끄는 시설이다.성밖에 위치하고 있는 화양루와 성벽 사이에 용도라고 하는 통로를 만
들어서 복도처럼 연결해 놓은 것이다.
김동욱 교수 INT 여기는 원래 성 바깥이에요. 근데 여기가 워낙 높은 곳
이어서 이쪽을 적에게 점거당하면 아주 곤란한 곳이기 때문에 일부러 이렇게 돌출된 부분
에다가 누각을세우고 그 다음에 용도라고 불러서 군사들이 매복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놨
습니다. 이런 것을 이제 지형을 살려서 비록 주민들이 사는 곳은 아니어도 요충지에는 성
벽을 별도로 만들어가지고 여기 올라서면 사방에 주변이 다 내려다보이고 그리고 이 자리
는 적에게 뺏기면 안되는 곳이니까
즉, 평상시 생활에는 필요하지 않지만 전쟁시에는 적에게 거점이 될 수 있는 곳에 성벽을
쌓아 성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화성 전체에서 전략적 거점들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먼저
실측 도면을 토대로 화성 전체의 설계도를 그려보았다.확인결과,무수히 많은 지점에서 의
도적으로 성벽을 꺾어지게 만든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같은 현상은 특히 성문을 중
심으로 두드러졌는데 이전의 성곽에서는 흔치않은 일이었다.
노영구 INT 수원화성의 경우인 직사곽인 화포로 성을 공격해야하고
하다보니까 성곽들이 대채적으로 직선의 가깝게 구성을 하도록 되어있고 17C에 나타나는
여러 성곽들을 보면 직선으로 유지하고 그럴때는 반드시 직각에 가깝게 꺾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 수원화성은 각루라던지 그걸 통해가지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직접
사격을 할 때 사각지대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썼다고 볼 수 있다.
성벽이 직선을 이루는 지형에서는 '치'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있다.이것은 고구려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나라의 전통적 축성술로 성벽을 돌출시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는
시설물이다.화성 전체에서 성벽이 직선을 이루는 지점에는 어김없이 치가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치와 치사이에는 일정한 간격이 있어서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노영구 INT 대체적인 거리는 당시 주요한 성곽방어무기인 불랑기라든지
조총의 유효사거리 속에 있도록 되어있습니다.그래서 인전치성에서 인접치성을 서로 도울
수 있도록 되어 있고 그런 경우에 서로 지원할 수 있으면 그건 바로 화망에 포함됐다 할 수
있죠.
치와 치사이의 거리는 130보. 당시 화기의 가장 효과적인 사거리를 100보로 볼 때 두 개의
치사이에는 60보의 교차 사격범위가 생기게 된다. 그만큼 사각지대가 줄어들고 방어력이
향상되는 것이다.그렇다면 화성 전체의 방어망은 어떤 모습일까? 성곽 위의 모든 공격 시
설에 대해서 각각의 수비 범위를 그려보았다.성을 둘러싸고 2중 3중의 화망이 형성됐는데,
이 방어망 속에서는 사각지대가 발견되지 않았다.결국 수원 화성은 적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철옹성으로 설계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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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5 [치와 치사이에서 포공격되는 상황 시바이주고-]
그러니까 저 치와 치사이의 거리가 교차공격이 가능하도록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라는 말
이로군요.자, 어떻습니까? 화포 공격을 거뜬히 견뎌낼 수 있는 튼튼한 성벽,그리고 당시로
서는 최첨단 무기였던 화포로 장착한 군사 시설들, 여기에 물샐틈없는 방어망까지 자랑하
는 입체적인 성곽운영 시스템!!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난공불락이라고 표현해도 지나
치지 않을거란 생각이 드는데요.그런데,이 수원 화성은 그 전투력을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
가 없었습니다.화성이 축성된 뒤로는 외침이나 내란같은 전쟁이 없었기 때문인데요, 만약
화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면 그 양상은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을까요? 또 전투의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200년전, 가상의 전쟁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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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평소라면 하루를 마감할 시간,전시 체제하에서는 지휘 본부인 서장대를 중심으로 화성 전
역에 비상령이 선포된다. 다섯 개의 봉수에서 모두 불길이 치솟으면 전쟁중이거나 전투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 평소 성을 수비하는 정군은 물론이고 인근 지역의 성정군까지 모
든 병력이 화성으로 총집결하고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화성은 단독으로 적군의 침입을
저지해야 한다.성벽으로 다가서는 침략자들로서도 화성을 정복하지 못할 경우에는 뒤에서
공격당할 위험이 있으므로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전략적 요지, 조선군과 침략자들 사이에
숙명의 대결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성벽의 수비는 성정군의 몫이다.각 타마다 여덟명씩
배정되는데, 조총수, 궁수,창수 등이 각 한명에서 두명까지 배정되고 다섯타당 불랑기 한
대씩이 설치된다. 그리고 뒤쪽으로는 노인과 여성들이 투석전을 준비한다. 공심돈과 포루
를 비롯한 주요 거점시설에는 조총과 화포 등의 화기가 총동원돼 만반의 태세를 갖춘다.그
렇다면 공격과 방어는 어떻게 이뤄질까? 침략자들의 첫 번째 공격목표는 나무로 만들어진
성문,대포를 선두로 공격이 시작된다.일부 포탄이 옹성 벽에 맞더라도 벽돌성벽은 전체적
으로 무너져 내리지는 않는다. 성문에 붙은 불길은 오성지를 이용해 잡을 수 있다.적의 부
대가 성을 공략하기 위해 접근해오면 100보 이내부터는 조총을, 50보 이내부터는 활공격
을 시작한다.
강문식 교수 INT 적이 백보 정도에 근접하게 되면 그때 공격화기로 결국
그들을 제거하고 50보 이내가 되면 재래적인 무기인 궁시류로 결국 전개하다가 성에 그들
이 공성 기구로 등장해서 공격을 하게 될 경우에는 돌이라든가 혹은 분료라든가 혹은 끓는
물, 이러한 것을 동원해서.
옹성 측면으로 파고드는 적은 적대와의 협공을 통해 차단할 수 있다. 성문 함락이 여의치
않을 경우 공격의 2단계는 취약한 지점의 성벽을 직접 공략하는 것! 화성 최고의 전투요새,
공심돈이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사방으로 쏟아지는 공심돈의 공격을 피한다고 해도
치와 치사이의 협공으로 성벽을 오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적의 전력이 약화된 틈을 타
서 성안에서 대기중이던 기병과 보병들의 기습공격이 감행되고 다른 지역으로부터 지원
병력이 속속 도착하면, 침략자들을 소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전쟁의 폭풍을 무사히 넘
긴 화성은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게 될 것이다. 성곽 수비에는 최소한의 병력만이 남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생업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화성에서는 새로운 일상이 시작
되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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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6 [서장대-]
어떻게 보셨습니까? 사실 전쟁의 결과를 예상한다는 것은 역사에 있어서 '만약'이라는 가
정을 하는 것과 같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릅니다.그러나 화성은 그때까지 축적되어온 전
쟁의 경험과 축성술이 총동원된 조선시대 최고의 성곽이었습니다. 때문에 당시 우리나라
에서는 가장 강력한 전투 능력을 갖춘 성이었던 셈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한가지의 의
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한양과 같은 수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경이 가까운 것도 아닌데
왜 하필이면 이곳에 최첨단 전투 요새를 만들었던 것일까요? 이 의자는 정조가 화성에 왔
을 때 앉았던 용상입니다. 정조는 재위 기간중 이 화성을 무려 13번이나 방문했는데요,
200년전 정조의 행보를 통해 전투 요새로 만들어진 화성의 탄생배경을 알아보도록 하겠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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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정조가 화성으로 행차하는 모습은 여러폭의 그림으로 남아있다.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긴
행렬,정조는 이것을 통해서 자신의 왕권이 확고히 자리잡았음을 보여주고자 했다.이 그림
에는 한양에서 화성에 이르는 과정은 물론이고 화성에서 치러진 크고 작은 행사들까지도
상세히 기록돼있다. 그 중에는 군사 훈련도 포함돼 있었다. 이 그림은 서장대를 중심으로
낮과 밤을 이어서 군사 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지휘본부인 서장대의 중앙에는 정조가
앉아있었고 서장대 주위로는 정조의 친위부대 2700명이 배치됐다.왕의 지방 행차에 이같
은 군사훈련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이것을 통해서도 정조가 자신의 정치 군사적인 권
위를 널리 펼쳐 보이려고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날 훈련에는 성벽 주위에 천여명의 병
사들이 추가로 더 배치됐고, 화성 성내의 집집마다에서는 횃불을 밝혀 훈련에 동참했었다
고 한다. 화성에서의 군사훈련 과정에서 주력을 이룬 것은 장용영의 군사였다. 장용영은
정조 12년에 만든 장용위에서 비롯된 조적으로 젊고 무예에 능한 사람들을 모아서 정조의
친위부대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정조 17년,장용영은 다시 조직을 개편해서
내영과 외영으로 나뉘는데 그중 내영이 수도를, 외영은 화성의 방어를 담당하게 된다.
최홍규 교수 INT 화성에 주둔하는 군들의 훈련이 정조시대에 이뤄진
<무예..>등의 군사교본에 의해 철저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정조시대 군사력은 조선시대를
통털어서 아주 강력한 군사력이 장용영에 집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장필기 선생 INT 장용영은 기본적으로 외영이 주인이고, 내영은 부용,
즉 부속이라는 얘기가 있듯이 장용영 체제는 외영이 중심이었다. 따라서 정조는 도성이상
으로 화성을 중시하여 수도방어체제또한 화성중심체제로 옮겨놓고자 했던 것이다.정조의
이같은 뜻은 곧 장용영 외영의 강화로 이어졌고 이로써 장용영 외영은 정조대 최대 군영
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게 되었다
화성 수비 당시 장용영 외영의 편제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성벽 주위에 남아있다.
[현장음] 이 표석은 화성의 방위 경계 표석으로 이쪽 팔달위 중부의 꼬리
부분이고, 이쪽은 창녕위 전부의 머리부분이 만나는 곳입니다.그러니까 이쪽은 남쪽 경계
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쪽은 동쪽 경계죠.그래서 이것이 구분되는 경계석이라고 할 수 있
습니다.즉,이 비석을 경계로 수비범위가 나눠졌던 것이다.이와같은 경계석은 모두 20여개
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자료를 근거로 화성의 수비 체계를 살펴보자.먼저 성둘레는 사대
문을 중심으로 사등분하여 장락전위와 후위,그리고 좌위와 우위가 담당했다. 행궁을 중심
으로하는 성 내부는 장락 중위의 몫이었다. 각각의 장락위는 635명의 인원이 배치돼 있었
고 유사시에는 화성수비를 담당하는 만여명의 성정군 병력이 추가로 투입되도록 했다.
강성문 교수 INT 병력을 운용하는데 있어서는 예비병력이지만 실제 전투가
일어난다든가 전투 훈련을 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은 성을 지키는 주병력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히려 정군는 국왕을 방비하고 호위하는 친위군적인 그러한 병력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실제로 전투를 수행하는 실제국방력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만여명의 성정군은 수원 주위의 다섯 개 고을에서 지원하도록 했다.이로써 성정군과 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외영을 포함하는 화성의 수비 병력은 당시 조선군 최대 규모의 군영을 이
루게 된다.이처럼 정조가 수원에 군사력을 집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선후기로 들어
서면 강화, 남한 산성과 더불어 송도와 수원이 새로운 수도 방위의 거점으로 부각된다.그
중에서도 정조는 유독 수원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최홍규 교수 INT 수원은 수도 서울과 충청경상전라의 연결망,중간지점에
위치해 있고 요충지에 위치해있다. 남쪽의 외적이나 남쪽의 반란세력이나 이런 세력을 진
압하는데 연결시키는데 상당히 중심적인 지점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삼국시대 이래 군사
적 요충지로 역할을 해왔다
정조는 수도로 가는 길목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을 장악함으로써 자신의 정치 군사적
역량을 높이고자 했다.이같은 정조의 의도는 그가 화성으로 행차할 때면 늘 군복을 입었던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지킨다는 명분을 앞세워 화성의
군사력을 증가시켰다.그러나 정조의 내심은 이곳에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새로운
신도시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정조는 조선 최대의 군영을 이곳에 주둔시켰으며
화성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던 것이다.
최홍규 교수 INT 화성신도시의 건설과 화성성곽의 축성과정에서 자기의
정치력이 가장 원숙했던 시기를 반영한 것이고 이것은 정조가 별세할 때까지 자기의 개혁
정치를 추진하기위한 실질적 거점으로서 화성을 많이 활용한 것이다. 화성이야말로 정조
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자기의 정치적 정치 도시이고 군사도시이고 정조의 정치권력이나
군사력의 핵심적인 지방이었다고 볼 수 있다
18세기의 최첨단 전투요새 화성은 한 계몽군주의 이상을 실현해 줄 터전으로써 만들어
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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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뒤로 봉돈에서 연기오르고- MC 정문을 열고 앞으로 나온다.]
축성 동기나 그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본다면 수원 화성은 더없이 아름답게만 여겨지는
성곽입니다.지형을 따라 구불거리는 성곽의 곡선들 어느것 하나 같은 것이 없는 공심돈과
누각 건축물들...이 모든 것이 모여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인 셈인데요, 그
동안 수원 화성을 얘기할 때면 이 건축학적 아름다움만에만 주목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투에 적합하도록 가장 견고하면서도 가장 기능적으로 설계된 건축물, 이것이
수원 화성의 또다른 모습이었습니다.조선시대 최후의 성곽이자, 최고의 성곽으로 평가
받는 수원화성- 5km에 달하는 이 성곽 건축물은 철통같은 수비망을 갖춘 전투용 성으로
써 조선시대의 건축 및 전략 기술이 총집합된 결정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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