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수궁가'의 스토리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남해 용왕이 득병을 하매, 충신인 자라(별주부)는 특효약이라고 하는 토끼의 간을 구하기 위해 육지로 파견된다. 우여곡절 끝에 토끼를 유인하는 데 성공한 별주부는 용왕 앞에 토끼를 대령하지만, 토끼는 기지로 위기를 벗어나 육지로 구사일생, 생환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수궁가의 스토리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별주부가 어떻게 토끼를 유혹하는가와 토끼가 위기를 어떻게 벗어나는가 하는 것이다. 별주부는 토끼를 유인하기 위해 대단히 신중하면서도 다양한 전술을 구사한다. 처음 토끼를 만났을 때 별주부는 용궁에서 그려온 토끼의 화상(畵像)을 확인한다. 상대의 신분을 확실히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토끼에게 '토생원'하고 부른다. 생원(生員)은 조선시대에 소과의 하나인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이다. 진사(進士)와 함께 생원에게는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부여되었다. 진사시와 생원시를 통과해도 벼슬을 하려면 문과에 합격하는 절차가 필요했지만, 이들은 군역이나 잡역을 면제받은 조선시대의 특권층이었다. 조선 후기에 가면 진사나 생원이라는 호칭이 남발되는 경향이 있지만 산중에 사는 힘없는 토끼에게 생원이라고 불러주는 것은 상당한 파격이었다. 이렇게 상대방을 높여 부른 것만으로도 상당한 호감을 줄 수 있다. "첩첩산중에 놀던 토끼가 생원 말 듣기는 처음이라 반겨 깡충 나서면서"라는 표현이 수궁가에 나온다. 호칭을 무엇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상대의 환심을 살 수도 있고 반대일 수도 있다.
다음 별주부의 전략은 자신 포장하기이다. 통성명을 하면서 별주부는 토끼에게 "나는 수국 전옥주부(典獄主簿) 공신 사대손 별주부 별나리라 그러오"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벼슬과 가문이 만만찮음을 밝히는 것이다. 이어서 "토선생 높은 이름 들은 지 오랠러니 오늘에야 화답하니 하상견지만만무고불측(何相見之晩晩無故不測)만이오 그려"라고 인사한다. 댁의 높은 이름은 잘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늦게 만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뜻이다. 한자 어구를 사용해 자신의 학식 역시 과시하는 장면인데, 요즘 말로 하면 '서울의 국립 S대 출신'이라거나 '미국의 유명 H대 법대 출신'이라고 과시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자 토끼는 자신도 유식한 양 하다가 자신의 팔자 자랑을 냅다 늘어놓는다. 자랑한다는 것은 필시 약점이 있음을 감추기 위한 것. 이것을 별주부가 놓칠 리 없다.
토끼에 대해 미남이고 풍채가 훌륭하여 수궁에 가면 훈련대장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잠시 칭찬하다가 바로 토끼의 치명적인 약점을 따지고 들어간다. 여덟 번 죽을 지경을 당한다고 전제한 뒤 겨울에는 풀이 없어 굶어 죽을 지경이고, 봄이 되면 골짜기마다 설치된 올가미와 덫에 걸려 제수 고기되기 십상이고, 그것을 피하면 매사냥의 표적이 되거나 수리와 같은 날짐승의 밥이 될 수 있고, 산중턱으로 피하면 사냥개나 포수들의 사냥감이 되고, 들로 도망가면 나무하는 아이들의 돌팔매질에 살아날 가망성이 없다고 잘라서 말한다. 상대의 약점을 치밀하게 물고 늘어져 도망갈 구멍이 없게 만드는 것, 이게 바로 별주부의 필살기다.
이쯤 되니 토끼는 항복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고민을 그렇게 잘 아니 해결책도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내 팔자 영락없이 꼭 다 옳소. 어찌 그리 잘 아시오? 내 팔자는 그렇다 치고 당신네 수국 풍경은 어떻소?"라고 하며 스스로 별주부가 판 함정에 빠져드는 것이다. 별주부는 이제부터 식은 죽 먹기다. 토끼에게 수국의 풍족함과 편안함을 자랑한다. 환상 심어주기다. 절망을 주고 희망을 주기다. 별주부는 토끼에게 수궁에서의 벼슬과 미인(美人)과 장수(長壽)를 약속한다.
이제 수궁으로 가기만 하면 별주부의 전략은 완성된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꼭 방해꾼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여우란 놈이 나타나 토끼에게 훈수를 둔다. 수궁에 가면 죽는다고. 토끼는 여우의 말을 듣고 방향을 돌리려 한다. 이때 별주부의 마지막 신의 한 수가 나온다. "너 이놈아, 썩 가거라! 너 생긴 모양이 무슨 복이 있으며…" 이렇게 배짱을 부리며 협박을 가하는 것이다. 여기서 애걸복걸하면 모든 일을 그르친다. 자신 있게 자신이 '갑'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주지시켜야 한다. 그것으로 끝이다. 토끼는 무장해제하고 별주부를 따라나선다.(이상 유성준 바디 '수궁가' 기준)
상품을 파는 세일즈맨이나 상대와 협상을 해야 하는 정치인들이나 모두 이 별주부의 전략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상대를 유혹하여 간을 빼먹으려는 별주부이니만큼 얼마나 치밀한 전략을 세웠겠는가. 유혹의 대가 별주부에게 그런 기술을 준 것은 목표에 대한 지고한 사명감이다. 목표를 명확히 하고 상대를 제압하는 전략을 세울 것, 그것만이 별주부의 가르침은 아니다. 용왕의 병을 낫게 하겠다는 지고일순의 충성심이 별주부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대의명분이 확실할 때 인간은 더 강해진다.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