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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이뤄 나가는 自然 ,
스스로 번민에 빠져든 걸까?
아니면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지력을 잃은 것일까?
스스로 이뤄나가는 자연의 여정 속에서도 방랑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방랑은 질서에 반하는 일이다. 이리저리 휩쓸려 생각 없이 정처 없는 짓이 바로 방랑의 시원이다.
다시 마음에 질서를 부여해 주고 싶었다. 완전하게 종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겠지만 그냥 그대로 방랑에 매몰되고 싶지 않았다.
시작은 늘 방랑의 유혹이 순례의 마음을 가린다는 저의를 알기에 우선 온전한 순례자의 길을 서두에 잡아 두었다.
그래야 모처럼 얻은 순례의 길이 바람 불듯 물이 흐르듯 계절에 아름다운 순환의 행복과 같이 주님의 모든 것이 인식으로 자각되어 매듭 될 것 같았다. 역질은 모든 이들에게 잠시 질서를 매몰되게 만들었다. 그 원인은 이미 알아차렸지만 이를 바탕으로 살아갈 방도를 새롭게 꾸려야 남은 여생이나마 바르게 창조적 질서에 해당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라는 것이 화두였다.
좁은 수로를 빠져나가는 물살처럼 거침없이 달려 철마는 우리를 예정된 시간에 내려놓았다. 유사장이 보내온 차량과 담당 여직원과 조우, 서류에 사인을 한 후 면허증을 내주어 촬영토록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역에서 대기 중인 서브 리더에게 전화를 걸어 차량으로 이동하라 한 후 문을 열고 짐을 받을 준비를 해 놓고 기다렸다. 도착 즉시 커다란 뒷문을 이용하여 차곡차곡 여행용 가방을 쌓은 후 시동을 걸어 산정동 언덕 위 성전으로 달려 올라갔다.
순례자 중 모교 구 본당에서 반주자와 성가대가 통째로 순례하러 와 웅장하고 거룩한 성가로 미사 전례에 힘을 실어주었다. 마침 기도 후에는 세상에 흩어져 있는 역질을 포함하여 모순과 악마 짓들을 제압하여 몰아 내려는 듯 웅장한 성음악을 성전 전체에 가득 채웠다. 산정동 성당 주례 사제께서도 감동을 받으셨는지 산정동 성당에도 남성합창단을 만드시겠다고 선언하셨다. 우리 역시 감동의 순간을 경험한 후 신앙적 포만의 감성으로 순례의 걸음 이어 나갔다.
신앙과 순교의 발자취를 음양각을 통해 익히고
모든 순교의 아픔을 성모님을 통해 위로받고 성전에서 물러 나왔다. 남은 일정을 소화하며
오늘 휴식과 숙면을 취할 한옥을 찾았다. 여장을 풀고
석식으로 준비된 해담을 찾아가는 중 복원사업에 심혈을 기울이는 성 터를 찾아 자연생태환경에 취해 보았다.
한옥으로 돌아오는 중 13, 14일 추자도행 산타마리아 호 결항을 통보받았다. 결항 이유는 강풍에 다른 파고로 추자항 입항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재차 방법을 찾아 선박회사 담당과 말씨름을 하기 시작하였다. 15일은 수요일, 수요일은 휴항 일이다.
그렇다면 이번 일정으로는 추자도 입도는 불가능한 일이다. 다시 목포, 완도, 우수영에서 출발하는 제주행 선박 중 추자도를 경유하는 배편을 찾아달라 부탁한 후 기다렸다. 역시 전부 결항, 제주도는 입항하니 여행지를 제주로 바꾸면 협조해 주겠다고 전해 왔다. 아쉽지만 포기... 다시 한옥에 하룻밤 더 묵기로 하고 사용료를 한옥 경영 사장에게 지불해 주었다. 아쉬다.
아침 산책을 나가
팽목항에서 제주로 가는 산타마리아 호를 보니 울화가~~~ 하하하 헛웃음으로 배웅하다, 아침을 챙긴 후 섬 티아고로 가기 위하여 차를 몰았다.
그리고 도착한 대기점도 선착장
15일 오전까지 섬 티아고에서 보낸 후 이른 아침 섬 티아고에서의 모든 일정을 끝낸 후 송공항으로 돌아와 차를 몰아 안좌도 두리항으로 몰아 반월도를 찾아 걸음 여행을 끝낼 수 있었다.
선교사로 입국하신 3분의 사제를 6.25 동란 중에 북한군에 의해 잃은 성당이며, 한국 최초로 설립된 레지오 마리아 군단이 탄생된 뜻이 깊은 성당이 바로 산정동 성전이다. 옛적 박해가 휩쓸던 조선 말기 시절에는 박해를 피해 모여 주님을 모시던 시절도 있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긴 세월을 보내면서 허름하게 변하였어도 신앙의 뿌리만은 든든한 곳이었지만 현대식으로 레지오 마리아 군단과 주님의 집을 절묘한 조화로 건축하여 봉헌한 사실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감동받으셨는지 2021년 05월 10일 승인해 주셨다.
광주대교구는 이 기쁨을 받아 다음과 같이 공지하여 널리 알리고 있다. |
광주대교구 2021/06/07
1. 교황청 경신 성사 성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몸소 부여하신 고유한 권한에 따라, 2021년 5월 10일 자로 목포 성지 내에 있는 산정동 순교자 기념성당에 준대성전(Minor Basilica)으로서의 칭호와 품격을 부여하였음을 알려왔습니다(교황청 경신 성사 성 발표문 Prot. n. 554/20).
2. 준대성전은 역사적, 예술적, 신앙적인 면에서 그 중요성이 인정되는 성당에 붙여진 명예로운 칭호로서, 정해진 날들※에 준대성전을 경건하게 방문하여 그곳에서 어떤 거룩한 예식에 참여하거나, 적어도 주님의 기도와 신경을 바치는 신자들은 전대사의 통상 조건(고해성사, 영성체, 교황의 뜻에 따른 기도)을 갖추게 되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로마와 전 세계의 준대성전 칭호에 관한 교령, 1989.11.9. 참조).
※정해진 날들
가. 준대성전의 봉헌 주년 대축일
나. 준대성전의 주보(성 십자가 현양) 대축일 : 9월 14일
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 6월 29일
라. 준대성전 칭호 부여 주년 기념일 : 5월 10일
마. 한 해에 한 번 교구 직권자가 지정한 날
바. 한 해에 한 번 신자 각자가 자유롭게 선택한 날
3. 산정동 순교자 기념성당은 교구 첫 번째 설립(1897년) 본당으로, 수차례에 걸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목포로 이주하여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또한 한국전쟁 때 순교하셨던 세 분의 사제(제4대 교구장 안 파트리치오 몬시뇰, 주임 고토 마스 신부, 보좌 오요한 신부)가 사목 하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세 분의 사제와 두 분의 신학생(전기수 그레고리오, 고광규 베드로)은 현재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근현대 신앙의 증인 시복 명단에 포함되어 시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4. 또한 산정동 순교자 기념성당은 한국에 레지오 마리에가 처음으로 도입(1953년)된 곳으로, 교구는 2009년 11월 산정동 주변을 가톨릭 목포 성지로 조성하기로 목포시와 협약을 맺고, 10여 년에 걸친 성지 조성사업을 추진해 왔습니다.
2018년 한국 레지오 마리에 기념관과 교구 역사박물관을 건립하였으며, 지난해 10월 새 성전을 완공하고 성전 내 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못 박혔던 십자가 보목을, 제단 양쪽 기둥에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부모(성 루이 마르탱, 성녀 마리아 젤리 마르탱) 유해를 각각 안치하였습니다.
5. 산정동 순교자 기념성당에 준대성전으로서의 칭호와 품격을 부여해주신 교황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신부님께서는 이 소식을 교우들에게도 여러 경로를 통해 널리 알려주시어, 많은 분들이 준대성전에 방문하여 전대사의 은총을 누릴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승인 내용을 우리나라로 번역하면
이러한 내용을 알고 미사참례 때 전례 내내 성음악을 부르던 웅장한 남성합창단의 성음악과 마침 기도 후 10여분 동안 이어진 거룩한 찬양의 함성과 같은 성음악이 다시 심금을 울릴 것입니다. 아멘.
주례 사제께서 입당하셔서 도입부에 이런 말을 남기셨다. 역질발병 후 최초로 성당을 가득 메운 신자와 순례자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준비된 주보가 떨어졌다는 안내자 수녀님 말씀에도 떨림이 묻어 있었습니다.
역질에 짓눌려 살아온 살아온 시간들이 그리고 그 안에서 살며 냉담자와 같은 삶을 살아온 생각과 행위들이 부끄러웠습니다. 오늘을 계기로 전환의 신앙적 삶으로 되돌리는 전환의 동기부여가 된 것 같습니다. 주님처럼 성모님처럼~~ 이러한 성가를 소환하여 부르며 성전 곳곳을 혼자서 돌아보았습니다. 주임신부께서 순례들을 위하여 순교사를 비롯하여 성전이 품고 있는 역사 강의 시간을 이용하여 혼자서 다녔습니다. 오래전 김익진 프란치스코 형제님 일대기를 책으로 엮기 위하여 국가 형제회 회장님과 방문하여 프란치스코 형제님의 친척들과 형제님께서 귀중하신 토지 위에 세워진 성전을 탐방하며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던 옛 기억을 되새김하며 새 성전 탐방을 하였습니다.
레지오 마리아 초기 시절 그림
탐방을 끝낸 후 멀리 보이는 유달산 자락을 바라보며 고교시절 한라산 등반을 끝내고 다시 목포로 돌아와 올랐던 기억도 소환해 보았습니다.
광주대교구는 10월 10일 오전 10시 30분 목포 산정동 순교자 기념성당에서 교구장 김희중 대주교 주례로 ‘성 십자가 보목과 성인 유해 안치 미사’를 봉헌했다. 교구는 이날 안치 미사를 통해 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못 박혔던 십자가 보목을, 제단 양쪽 기둥에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부모 유해 일부를 각각 안치했다.
김 대주교는 안치 미사 강론을 통해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지고 가신 십자가 보목과 그 십자가의 길을 충실히 따라 생활하셨던 예수의 소화 데레사 성녀와 부모님들 유해를 안치하는 미사를 봉헌한다”며 “그리스도 십자가의 길을 따르고 성녀의 모범적인 삶을 본받아 십자가 영성을 함양하자”라고 권고했다.
김 대주교는 또 “성녀 데레사는 누구나 해야 하는 사소하고 평범한 일들에 큰 뜻을 두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크고 화려한 것만을 최고 가치로 추구하는 오늘날 세태와는 다르게 작은 것을 추구하는 성녀의 영성은 현대인을 향한 예언적 가르침”이라며 성녀의 영성을 본받을 것을 당부했다.
목포 산정동 순교자 기념성당에 안치된 성 십자가 보목은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혔던 십자가 나무 조각이다. 1963년 교황청이 한국으로 파견된 선교사들을 격려하는 뜻으로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초대 총장 알론소 에스칼란테(Alonso Manuel Escalante) 주교에게 보목을 전달했다. 보목은 이후 1962년부터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원 헥톨(Diaz Hector) 신부에게 전달됐고, 2018년 2월 광주대교구에 증여돼 교구장 김 대주교 개인 수장고에 보관돼 왔다.
교구는 이날 성 십자가 보목과 함께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부모 유해 일부도 안치했다. 성녀 유해를 안치하게 된 것은 김 대주교가 2018년 10월 성녀의 고향인 프랑스 리지외 가르멜 수녀원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수녀원 측에서 유해 일부를 교구에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혀 왔고, 파리 한인 가톨릭 공동체 사목을 담당하는 정윤수 신부가 지난해에 직접 프랑스로부터 가져왔다.
미사참례와 역사적 내용들을 청취한 기쁨의 여운이 남아 있는 순례자를 모아 촬영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전망대에 올라 목포시내와 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는 성전에 의미를 마음에 취합하려는 의도는 문이 굳게 잠겨 있어 포기해야 하였습니다.
화강암 평판 구조물에 부조 처리된 성전에 역사를 시각적 신앙심으로 정리한 후
브라질 대도시 산정에 세워진 예수님상과 같은 성스러운 예수님 상 앞에 서서 순례를 기념하고
성모님 품 안에 머물기도 하였습니다.
예부터 모름지기 성전 건립 터는 산마루였습니다. 사방팔방 어디서나 십자가를 볼 수 있는 곳이며 어디서나 때를 맞춰 들을 수 있는 성당 종소리가 멀리 퍼져나갈 수 있는 곳이 최적지였습니다. 명동성당, 약현성당, 옛 용산 신학교가 있던 성당이 그러한 조건을 충실하게 지키고 건축된 성당입니다. 목포 산정동 성당도 그렇습니다.
목포는 항구다 라는 노랫말이 있듯이 목포는 항구도시입니다. 그러한 지형적 특성을 살려 건축한 성당이 바로 산정 성당입니다. 배 모형을 빌려 설계를 하였으며 그 설계도를 기본으로 건축된 성당이 바로 산정동 성당입니다. 마음으로 기도드리며 차를 몰아 천천히 언덕을 성심의 마음으로 내려왔습니다. 순례의 걸음을 잠시 멈춘 후 성심의 마음으로 목포역 부근에 있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시간을 갖은 후 목포를 빠져나와 진도로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1시간 20여분을 달려 도착한 숙소 한옥, 어울림 반갑게 맞이해 주는 주인과 인사를 나눈 후 실내에 들어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청하였습니다.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불러일으켜 주는 한옥은 우리 민족과 잘 어울리는 주거 주택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고려 원종(재위 1259∼1274), 삼별초가 진도에서 몽골과 항쟁을 벌일 때 해안지방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삼별초가 제주도로 옮겨갈 때 이곳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집니다. 백제 때도 진도에는 3개의 마을이 있었고 그중 한 마을의 중심지가 이곳으로 여겨지는데,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세기부터는 왜구가 나타나서 노략질을 계속해 오자,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진도의 관청과 백성들이 내륙지방으로 피해서 살다가 세종대왕 초에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결국 세종 20년(1438) 해안지방에 주로 설치되던 군사조직인 만호부가 이 지역에 생기게 되고 왜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았는데, 지금 남아있는 성은 그 이후에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성은 동·서·남문이 있던 자리가 잘 남아 있으며, 둘레가 400여 m 정도이지만, 해안지방을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위치임을 보여주고 있는 유적으로 가치가 매우 큽니다. 원래 성 이름은 남도석성이라 불렀으나 2011년 07월 28일 고시에 의거 진도 남도진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바다 색을 품은 각양각색의 돌로 축성한 남도 진도 진성은 현재 복원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활터를 비롯하여 옛 모습을 찾기 위한 공사입니다. 당시 관원들과 병사들로 가득하였을 활터에는 이름 모를 각종 초와 감탄 나무 한그루가 병영을 지키고 있어 그 쓸쓸함을 더하고 있습니다.
진도 남성을 뒤로하고 진도읍내에 위치한 해담을 찾아 다시 산을 넘었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 찾았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식당 해담 주인이 내주는 음식이 정겹고 맛 또한 깊은 맛이 살아 있어 낙원동이나 강남 신사동에서 즐겨 먹던 아귀찜과 비교할 수 없는 깊은 맛이 생각나 찾아가기로 한 것입니다. 전화를 받지 않아 결국 뱃고동이란 식당을 찾아 저녁을 해결한 후 낙조를 보기 위하여 세방낙조로 이동하였으나 낮은 구름이 짙게 깔려 포기하고 바로 옆에 있는 해비치를 찾아들었지만 이미 커피머신을 세척하는 중이라... 모든 것을 포기한 후 숙소 부근 마켓에 들러 막걸리를 사들고 와 몇 잔씩 추렴한 후 첫날 일정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참 아쉬움이 많은 오후였습니다.
진도 탐방 중 산타마리아 선사로부터 전화를 한 통화 받습니다.
아침에 선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메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씨월드 고속훼리(주)예약번호 2246476,/ 가시는 정보, 인원 6명,/ 6월 13일 오전 8:00 진도항 출발, 08:45분 상추자도 도착/ 배편 산타모 니카호/ 진도항 내비게이션 - 진도군 임회면 진도항길 101/ 선실 st. / 선적 차량번호 74하 5923. 차량 선적 고객은 7시까지 오셔서 안내를 받아 선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13일 강풍으로 인하여 14일까지 추자도 입항을 중지하기로 결정되어 다른 날짜를 받기 위하여 전화를 걸었다는 것입니다. 15일은 매주 휴 선일이므로 16일 이후에나 추자도 입항이 가능하다는 친절한 말과 함께... 당황스럽지만 침착하게 다시 문의를 합니다. 혹시 목포, 우수영, 완도 등에서 출발하는 제주행 선박 중 추자도에 입항하는 배편을 알아봐 달라 요청하니, 제주도는 입항하니 여행지를 제주로 바꾸시는 것은 어떠냐 하더군요. 그럴 수 없다는 말과 함께 현재 진도에 내려와 있다고 답변을 하니 다른 선박을 알아주겠다고 한 후 전화를 끊은 후 연락이 왔습니다. 모든 추자도행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메일이 들어오더군요. 씨월드 고속훼리 예약번호 2246476님의 고객님 예약 취소되었습니다.
뱃 길을 이용하는 여행은 늘 불안정합니다. 기상변화에 따라 결항되어 입도와 출도가 자주 불가능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전화를 끊고 여행자로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 그래 입도한 후 여러 날 섬에 발이 묶이는 것보다는 오히려 이런 결과가 더 좋은 일이 아닌가!" 하는 이러한 마음을 갖는 일입니다. 사진은 추자도 입도 예정 날 산책 나가서 팽목항 언저리에서 본 산타모 니카호가 제주로 출항 모습입니다. 제주뱃길은 이상 없고 다만 입항 시설이 제주보다 열악한 상추자도나 하추자도에 강풍 영향으로 파도가 높아 산타모 니카호가 접안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와 같은 사정은 퀸 메리호도 같은 입장입니다.
숙소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해안 부두를 산책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달랬습니다.
등 대를 찾아 주변 아름다운 모습을 구경하고 팽목항 부근에 있는 중국 성이라는 식당을 찾아 가 조식을 해결하려고 아침산책을 진도항 부근으로 정한 것입니다.
아침산책을 끝낸 후 바로 옆에 있는 진도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중화요리를 전문적으로 하던 중국 성도 국밥이나 육개장 집으로 바뀌었습니다. 각자 기호대로 음식을 시켜 아침을 해결하면서 주인 아낙네의 입을 통해 꼭두새벽에 문을 여는 엄마손이라는 식당이 진도항 안쪽에 생겼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쪽으로 오는 도중 본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다음 기회에는 엄마 손 식당을 이용할 계획입니다. 식사 후 세방낙조대를 탐방하기 위하여 가는 도중 만난 거대한 암석 아래 작은 교회당이 아름답게 다가와 앵글에 잡아 두었습니다.
몇 호도 안 되는 마을에 작은 예배당, 교회 운영이 제대로 될 만큼 헌금이 이루어지는지 궁금하게 느껴졌습니다. 하긴 하늘에서 주시는 복락으로 유지되긴 하겠지만.. 돈을 주체할 수 없이 긁어모으는 세속적인 교회가 넘쳐나는 곳이 대도시 교회들인데 이에 반해 예수님처럼 가난한 교회가 많은 곳이 한국 농어촌 지역입니다. 마음이 부자인 이들에게는 겸손한 행복이 넘쳐 보입니다. 자연환경과 어울리는 길을 차로 달리며 창문을 열자 해풍과 숲에서 불어 노는 바람이 교차되며 신선한 바람이 차 안으로 넘쳐났습니다. 상쾌함을 넘어 육신 전체에서 반응하는 생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물과 공기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양질의 음식이지요. 이런 것들만 제대로 챙겨도 늘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생태환경이 오염되기 시작하면 공기와 물은 오염되고 온갖 식품자재들도 덩달아 오염되어 모든 생물들은 생명을 위협받게 됩니다. 바이러스에 공격받는 이유도 생태계의 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이지요. 탐욕이 부르는 재앙이라 말해도 과한 이야기는 아니지요.
세방낙조(細方落照)를 다시 찾았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일출 장소도 갖고 있는 곳이 진도입니다. 동해의 일출은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폭팔적인 빛이라 한다면 진도의 일출과 일몰은 긴 여운을 남기며 마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서히 흩어져 버리는 서정적인 긴 꼬리를 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출은 구자도가 아름답고 일몰은 세방이 아름답습니다.
이러한 일몰의 풍경을 기대하고 찾았지만 어제 진도의 날씨는 잿빛 하늘이었습니다. 빗방울이 가끔 떨어지기도 하고요. 원하는 날씨가 받쳐주어야 일출이나 일몰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번 걸음 여행에서 일출과 일몰은 기대할 수 있는 날씨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전망대에 서서 옛적 산중턱까지 걸어 올라 가 일몰을 기다리던 옛 생각이 해풍에 실려 찾아 들었다가 다시 슬며 시 사라져 버리는 것을 느껴습니다. 시간을 여행하는 것이 인간의 삶인 것 같습니다. 엊그제 같은데 시간의 나이태를 보니 주어진 나이테가 벌써 가득찬 세월이 지났음을 깨닫게 됩니다.
세방낙조대 좌측에 솟대를 세웠습니다. 솟대는 각 지역이나 각기 다른 목적에 따라 짐대·소줏대·표줏대·솔대·거릿대·수살목·서낭대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렀습니다. 모습도 다양하여 일시적인 것과 영구적인 것이 있고 가정이나 개인 신앙의 대상인 것에서 촌락 또는 지역을 위한 것 등이 있습니다. 솟대는 수호신의 상징처럼 사용하였으며 성역의 표시 또는 경계나 이정표 등의 기능으로도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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