永川大捷 (영천대첩기장)
○ 기간1950,9,4-9,13 경북,영천지역
○ 아군,제8사단 이성가장군 휘하 (6개연대 (16,21,5,8,11,19R)
10R은 전투중반에 참전
○ 적군,제15사단 박성철장군 휘하 5개연대(종강)와 기갑부대
○ 적은 남침 후 70여일간 안동과 팔공산등을 거쳐 영천을점령하였읍
적제 15사단은 북한 최정예부대로서 남침 선봉부대임
○ 증강된 아군 8사단은.적을 맞아 적 배후를 역 포위 21연대와
19연대를 증강하여 서북방의 주보급로와 예상후퇴로를 차단하고
16연대를 포위망. 중앙 주공격부대로.하여 배속된 기타
연대와 같이 포진 UN공군 지원하에 9,4 일제히 공격을 개시 하여
9,13 까지의 기간에 최강을 자랑하는 적 부대를 완전히
괘멸 시켰음 19연대 2 대대가 좌공을 맡었다
○ 세계의 이목은 부산에UN군과 북한군 어느쪽이 먼저 도달하느냐를
놓고 큰 관심속에 있었다 (로이타 통신 뉴욕 타임.일본등.보도)
○ 이대회전은 아군의 완전 대승리로서 영천이 갖인 전략적 가치인
대구-부산.축선(국토의10%)의 방어를 성공시키고
대반격 작전과 38선 돌파 북진의 결정적 계기를 조성 하였으며
인천 상륙작전에도 큰 공헌을하였다
○ 전과: 현지 독전을 위하여 왔던 북한 총참모장 강건 폭사시킴
사살 3,800여 포로 309 부상자(통상사살의3배를추산)
탱크5장갑2파괘 차량85대 외 소화기 2,500 야포14문노획
○ 아군피해: 전사29.부상149
○ 이대통령은 2차순방에서 승전보를 받고 하양소학교에 쌓인
전리품을 보고 놀라 잠시 말을못한바 있었다 2일후 내방한
미8군 워커사령관은 전황보고에 이어전리품을 확인 2차대전
유럽, 태평양 전쟁을 경험한 그가“이렇게 큰 전과는 처음봤다"고
감탄사를 되풀이했다
그리고 2군단장 유재흥장군과 8사단장 이성가장군의 어깨를
두들기며 옆에선 각 참모들과 악수를 나누고 계급장도 안붙인
본인에게 다가와 악수를 한다음 만면에 웃음을뛰고 돌아갔디
○ 12,4, 김일성은 만포진에서 개최한 노동당중앙회의 석상에서
“영천을 점령하여 전쟁의승리를 자신하였고 일단 점령한 영천을
상실하자 전쟁의 패배를 하였다“고 말하며 패전을 자인하였다
○ 기장 수장자인 나는 포위공격주력부대인 16연대 작전요원으로
서 작전참모 이상환(후일대령예편)과 작전계획을 위하여 단둘이서
적진속에 잠입하여 지형답사와 적 배치등을 관찰하였음
연후 주공격로와 전투전개 구상등 작전계획수립에 나의 헌신적
노력을 다 받치였음
○ 공격전은 계획과 예상대로 어김없이 전개되여 참모와 나는
눈물이 나도록 좋았다(이 감격을 말로서 다하지 못 한다)
○ 나는 대소전투 기회마다 사병의 신분을 잊고 작전요원으로서
의견을 밝혀 그것이 성과를 얻어 큰 신임을 받고있었다
부대는 장교가 부족하여(전방지휘자 보충차출)나는 직접 참모를
보좌하였고 상,하.부대에서도 나를 많이찾았다 참모는 나에게는
계급장을 달지않게하였다
○ 동란중에 국가상훈제도의 유무는 알 수 없고 모두가 상훈수상
을 바라지도 아니하였다
○ 휴전이 되고 세월이가고 예편(중령) 한 후 반세기가지나 존경하는
이성가장군 사후에 이르러 영천대첩의 크나큰 가치를
알게된 정부는 국가예산30억원으로 현지에 2002년 5월 전승
기념탑을 건립하였으며 정부주관으로 기념행사를 하였다
그리고 기념탑에는 참전자와 같이 나의 성명이각인 되었다
참전자 10,000여명중에서 생존자 400명에게는 이성가장군 명의로
명의로 대첩기장이 증여되였음
○ 이 기장은 무공훈장보다 더 크고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또한
기념 사업회 에서는 유일하게 유공자로서 기념 감사패가 나에
게 주어졌다 국가의 무관심에 대한 반증으로 생각하면서 받아
들였다
○ 나는 당시사병으로서 정식군사교육을 받지 못하였고 더구나
전술학은 전혀 문외한 이였다 그러나 전투 때 마다 얻은성과
를 후임사단장 최영희장군이 인증하게 되어 장교교육과정입교를
권유받았다(이때소속은 사령부작전처근무)
사단장의 입교권유를 받은 박동수동기와 육군보병학교사관후보생
(25기) 과정에 입교하게되였다 후일 최장군이 5군단장이 되자
나를 군단 작전장교로 임명 하였다
○ 9,10 포위공격일 새벽에 정확한 정보에 의하여 적 사령부를
기습한바 장관급 3명을 발견하고 2명은 사살하였으나 1명은
말을타고 도주하였다 휴전이되고 세월이가고 남북회담이
서울에서 열렸을때 북측 대표로 온자가 영천에서 패주한 적
15사단장 박성철이였다 전 국토를 유린하고 수많은 인명과
재산에 큰 피해를 준 그자다 나는 短詩를 읊는다
☞ 謀事在人 人命在天
○ 나는 소년시절부터 兵書를 탐독하고 심취하여 80이된 오늘날
까지도 보지 못하고 읽지도 못하는 책을 가까이 두고 있다
孫, 吳, 孫矉, 兵法, 十八略史, 三國誌, 日本 戰國時代, 戰記
나포레온,戰爭, 一次, 世界大戰, 太平洋戰爭, 軍閥興亡史,
近代戰爭, 太閣記,등등,,,,
“ 늘품수 없는놈이다 자탄한다 금이생기나 옥이 생기나”
2009년4월29일 60년전의 기억을더듬으며 素庵 李相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