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차, 그리고 나를 벗는 삶의 사색들...
산나리꽃 // 임 영 조
지난 사월 초파일
산사(山寺)에 갔다가 해탈교를 건너며
나는 문득 해탈하고 싶어서
함께 간 여자를 버리고 왔다.
그런데 왠지 자꾸만
그 여자가 가엾은 생각이 들어
잠시 돌아다 보니 그 여자는 어느새
얼굴에 주근깨 핀 산나리가 되어
고개를 떨군 채 울고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또
내가 사는 마을까지 따라와
가장 슬픈 한 마리의 새가 되어
밤낮으로 소쩍소쩍
비워둔 내 가슴에 점을 찍었다
아무리 지워도 지울 수 없는
검붉은 문신처럼 서러운 점을.
요즈음, 장사를 하시는 분들이나, 사업을 하는 분들 이구동성 하는말,
죽겠다, 죽겠다. 사람 사는 맛이 나덜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대학을 근근덕신 가르쳐 논 아들놈이 핑핑 백수에 건달 신세니
더더욱 살맛 나는 세상이 아닐게다.
우리들은 누구나가 풍요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가난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충분히 풍요롭게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살이가 욕심하는 만큼 이루워진다면 가난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풍요롭게 살 수 없는 이유는 욕심 때문일 것입니다.
욕심은 우리들의 마음을 허전하게 하지요
가지면 가질수록 더더욱 가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심이요
그것을 충족하기위한 ‘욕심을 위한 욕심’의 허상은 인간을 욕되게
결국에는 파멸지문을 자초하는 형상이지요
‘만족 할 줄 아는 것이 제일 가는 부자’
‘나는 오직 만족한 줄을 안다’
‘만족과 불만족’의 차이는 미미하나 되 돌아오는 반향의 크기는 태산과도 같습니다
소고기를 먹고서도 소화를 못해서는 병원 신세를 지는 양반님네들과
맹물만 먹고서도 늘상 가슴엔, 잔잔한 감사의 진한 물결로
또 내가 할 일은 없을가를 고만하는 사람과의 차이는
천양지차의 수치적인 차이가 아니겠지요.
저도 이팔 청춘의 시절엔 엄청나게도 해탈교를 건너서
해탈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부모에게서 물려 받은 것 이라곤, 달랑 청양꼬추 하나뿐인 맨몸으로
험난한 세상과 단지, 순수한 용기와 패기만으로
맞 부닥친 세상이 주는 시련의 아픔은
조그만한 가슴자위에 커다란 상흔으로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지워도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그때마다, 세상과 함께 호흡할 수 없는 - 뒤 떨어진 사연에,
그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엄청나게도 방황과 번뇌를 일 삼았습니다.
“빈 몸뚱이로 세상을 맞서서 살다는것은
가장 슬픈 한 마리의 새가 되어-세상을 극복하려는,
밤낮으로 소쩍소쩍 비워둔 내 가슴에 통절한 아픔의 점을 찍었다“
이제와서 회고하여보니 세상을 향한 힘없는 자의
소쩍새 울음같던 나의 삶의 아우성 소리가
오늘의 나의 삶의 이정표를 곧게 , 비록 오늘의 삶의 과정이 넉넉지는 못하지만,
그 스스로가 만족할 줄 알면서. 주워진 여건에서 최고의 슬기를 발하였던 것 같다.
우리네 삶의 과정속의 가슴 저리는 사연사연들이
“아무리 지워도 지울 수 없는
검붉은 문신처럼, 서러운 점“들을 다시 슬기롭게 꿰여서
어려운 삶의 과정일수록, 스스로가 만족하는 삶의 지혜를 발휘해서
‘번뇌를, 별빛처럼 영롱한 찬란함’으로 빛내는 지혜를 가슴속에서 품고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방식으로의 전환점이
오늘같이 어려운 시기에 더더욱 요구되는 것 같다.
어느 시인은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세상이라고 설파를 하였습니다
허허로운 우리네들의 인생살이가 순간이요, 찰나인 동시에
알알히 열매맺는 삶의 보람으로 충만시킴은
나 자신이 스스로가 만족하는 순간에서 출발되는 것 같습니다
따사로운 가을볕을 마음껏 받은 감나무의 빠알간 감이
알몸으로 수줍은듯 미소짖는 이 풍성한 계절에
모든 일들이 뜻하시는 바대로 성취되시고
만족속에서 삶의 보람을, 이 가을에 충실히 맺으시길...
땡초법우 배상